후쿠우라 카즈야
1. 개요
전 치바 롯데 마린즈 소속의 야구선수이자 현재 치바 롯데 마린즈의 2군 수석·타격코치. 치바 출신으로 학교도 모두 치바에서 나왔으며 치바 롯데의 초창기 시절부터 현재까지 오로지 치바 롯데 한 팀에서 만 뛰었고, 지금도 치바 롯데에서 스태프 커리어까지 보내고 있는 말 그대로 '''치바의 긍지'''다.[10] [11] 전체 최하위 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구회 가입까지 이뤄낸 인간 승리의 표본이기도 하다.
그보다 윗 순번으로 지명받은 치바롯데 선수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1순위 지명자 카토 타카야스는 첫해 12경기 등판을 마지막으로 부상 때문에 1995년에 은퇴하고 음식 사업을 하고 있고, 2순위 지명자 타치카와 타카시는 백업 외야수로 뛰다가 2005년 한신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뒤 K-1 격투기 선수로 데뷔한 적이 있다.
3라운드 픽 오오츠카 아키라는 백업 외야수로 활동하다 2010년에 은퇴 후 현재는 롯데의 3루 주루코치로 있고, 4순위 지명자 나카야마 마사유키는 카토처럼 첫해 15경기 등판을 끝으로 1996년에 은퇴(이후 미국 독립리그에서 한해 더 뛰었다), 5순위 지명자 모로즈미 켄지는 2006년에 은퇴하고 롯데의 2군 1루 주루코치로, 6라운드 픽 오노 신고는 2013년에 은퇴하고 롯데의 스카우터로 활동 중이다.
내구성도 그렇고 성적도 그렇고 7순위 지명자인 후쿠우라 카즈야가 제일 뛰어났으며, 그 다음으로 괜찮았던 선수는 통산 293경기 등판의 6순위 지명자 오노 신고였다. 게다가 3번째로 잘한 선수도 통산 103도루를 기록하고 잠깐이나마 주전 중견수를 맡기도 한 5순위 지명자 모로즈미 켄지였다. 그 밑으로는 오오츠카와 타치카와가 비록 백업인생이어도 1군에 자주 올라오면서 30대까지 선수생활을 하긴 했다. 카토와 나카야마는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한 최악의 픽이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상위 지명자들이 망하고 하위 지명자들이 팀의 주축으로 성장한 기묘한 드래프트.[12]
2. 선수 생활
치바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치바 현에서 졸업하고[13] 1994년에 '''전체 최하위 픽으로'''[14] 투수로써 팀에 입단하였으나 어깨 부상으로 3년간 2군에서 고생만 하였다. 결국 이 때문에 1994년 시즌 도중 타자로 전향하게 되는데, 이것이 프로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15][16]
타자전향 후 2년간 2군에서 기량을 쌓은 후 1997년 7월에 처음으로 1군에 승격하였고, 승격하자마자 곧바로 주전 1루수 자리를 꿰차며 규정타석의 절반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했음에도 타율 .287, 6홈런 23타점의 호성적을 기록하였다. 이후 주전으로 꾸준히 뛰면서 2000년대 들어 포텐이 대폭발하여 2001년부터 2006년까지 6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등 치바 롯데의 간판타자로 자리 잡았다. 특히 2001년에는 3할 4푼 6리로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의 경쟁 끝에 퍼시픽리그 타율왕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배트를 앞뒤로 흔드는 진자 타법이 그의 상징이었다.
롯데 시절의 이승엽을 지명타자/좌익수로 보낸 장본인이기도 한데, 그만큼 주전 1루수였던 후쿠우라의 팀내 입지가 상당히 컸다.[17] 더군다나 1루 수비는 최상급인 이승엽에게 수비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의외로 준수한 수비수이기도 했다.[18] 2003년, 2005년 2007년 총 3번 1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노쇠화를 피할 순 없었는지 30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꾸준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도 팀 내에서 베테랑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잊을만 하면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치바 롯데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오오무라 사부로가 은퇴했고 이구치 타다히토도 2017시즌 후 은퇴하고 바로 감독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당분간 팀내 야수진 최고참으로써 후배들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지금 팀 돌아가는 꼬라지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19][20] 무엇보다도 2000안타에 30개 정도가 남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명구회 가입 조건은 채워주고 은퇴시키자는 분위기라 내년에도 팀에서 계속 뛸 듯 하다.
2.1. 2018 시즌
자세한 정보는 후쿠우라 카즈야/2018년 항목으로. '''2018년 9월 22일, 시즌 16경기를 남기고 2000안타를 달성하며 명구회 가입조건을 충족시켰으며, 2018년 10월 8일 명구회에 가입했다.'''[21]
2.2. 2019 시즌
그리고 2019년에도 플레잉코치를 하게 되면서 선수로 계속 뛰게 되었다. 보직은 2군 타격코치. 그리고 스프링캠프에서 롯데의 1라운드 지명자 후지와라 쿄타의 타격훈련을 돕기 위해 배팅볼 투수를 맡는다고 한다. 이는 25년만의 투수 복귀라고 한다.
1월 24일에 예고은퇴를 선언하였다. 도중에 번복하지 않는 이상 2019년이 선수 커리어 마지막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2군에서 코칭에 집중하며 경기는 안 나오는 중. 오오무라 사부로처럼 은퇴경기 아니면 1군에 안 올라올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5월 7일 2군에서 대타로 나와 2루타를 쳤다.
9월 23일 은퇴식이 예정되었고 9월 22, 23, 24일 모두 은퇴 기념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 때 경기에 올라올 지는 미지수이나 일본프로야구는 은퇴경기 특례 1군등록 규정이 있다 보니 어지간하면 못해도 대타 정도로는 나올 듯. 현재 후쿠우라 특별 상품이 수십 종류나 발매 예정이며, 은퇴경기 특별 페이지까지 나오는 중 매우 성대한 은퇴식을 준비하고 있다. 아무래도 명구회 가입 정도의 큰 족적을 남긴 롯데의 프랜차이즈 선수가 한동안 없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나오기 힘들 것이기 때문인듯.[22][23] 그리고 7월 21일 후쿠우라의 은퇴경기 팬클럽 선예매가 시작되는 날, 치바롯데 티켓 예매 사이트의 서버는 폭발해버렸다. 개막전이나 도쿄돔 경기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24]
롯데가 9월이 되도록 치열하게 3위경쟁을 하는 중이라 후쿠우라 본인은 은퇴경기날 출전을 고사하고 은퇴식만 하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이구치 타다히토 감독은 후쿠우라를 위해서 은퇴경기 날 선발로 출장시킬것이라 밝혔다.
그리고 예정대로 은퇴식 경기에 올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발 출장했다. 7번 지명타자로 출장해서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였고, 9회에는 지명타자에서 해제되어 1루 수비로 출장하였으며 경기를 끝내는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되는 1루 직선타를 포구하면서, 드래프트 최하위 픽으로 시작하여 치바를 대표하는 1루수의 자리까지 올라간 파란만장했던 현역생활을 마쳤다.
3. 은퇴 후
2020년부터 롯데의 2군 타격코치 겸 수석코치를 맡는다. 수뇌부에서는 이미 이구치 다음 감독으로 후쿠우라를 내정한 상황이라고 한다. [25] 그리고 등번호도 데뷔했을 때의 등번호인 70으로 회귀.
4. 연도별 성적
5. 플레이 스타일
당겨치기와 밀어치기에 모두 능하며 플라이볼보다는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많이 친다. 야마모토 코지 감독은 타격에 천부적인 센스를 갖고 있으며, 배트 컨트롤은 타고났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2001년 이전까지는 좌상바 기질이 있었다가 2001년에 갑자기 좌투수 상대로 4할을 치면서 타율이 대폭 좋아졌다. 또한 전성기 시절에는 진자 타법을 많이 이용하였으나 지병인 요통 때문에 노쇠화가 오면서 진자 타법을 그만두었다.
파워는 전성기 때에는 준수했던 편. 15~20홈런에 40개 안팎의 2루타를 꾸준히 칠 수 있었다. 거기다가 타법 자체가 홈런을 노리기보다는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노리는 스타일이었고, 구장 역시 투수친화구장인 것을 감안하면 장타력은 충분했다. 그러나 30대 초반에 이미 전성기가 끝나갔기 때문에 그 후로는 장타력보다는 교타력으로 버텼다. 2010년에 지명타자 전향 이후 다시 13홈런을 치며 잠깐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1년만에 공인구가 바뀌면서 완벽하게 똑딱이화. 그냥 똑딱이도 아니고 최근 7년 동안 홈런을 3개 칠 정도로 엄청난 똑딱이가 되었다.
하지만 2011년 이후에도 중요한 상황에서 유독 잘 치는 능력 덕분에 대타 스페셜리스트로 꾸준히 뛰어왔고, 결국 2000안타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수비는 수비력의 중요성이 낮은 1루수지만 매우 훌륭한 수비력을 가졌기 때문에 30대 중반까지 꾸준히 1루수로 뛰어왔다. 신인 시절에는 외야수 도전도 했었으나 어깨가 좋지 않아서 포기. 하지만 좋지 않은 어깨라고는 하지만 가끔 송구해야 할 일이 있을 때의 송구 능력은 상당히 좋았다. 그러나 후쿠우라의 진가는 역시 포구 능력. 몸이 유연하다 보니까 어지간한 실책성 악송구들은 전부 잡아냈다. 한때 팀메이트였던 이마에 토시아키는 후쿠우라가 없었으면 팀의 송구실책은 두 배로 늘어났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 실제로 수비 관련 지표를 보면 후쿠우라는 역대 NPB 1루수 중 한 손 안에 꼽히며, 동시대 1루수 중에는 거의 최강급이었다. 하지만 2010년 즈음부터는 거의 전문 지명타자/대타로 전업.
주루는... 체격 때문에 발이 빠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보기보다 발이 느려서 2001년엔 시즌 '''0도루''' 수위타자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두자릿수 도루를 기록한 시즌 역시 한 번도 없다. 애초에 통산 도루가 고작 '''10개'''에 시즌 최다 도루는 겨우 '''2개'''[28] 인 판이다. 도루자도 무려 '''17개'''로 도루성공률이 '''절반은 커녕 40%(!!)도''' 안 된다. [29] 한마디로 (수비를 제외하면) 교타력 하나로 먹고사는 타자. 참고로 2003년에는 '''22병살타'''로 병살왕을 한 적도 있다(...) 참고로 1루까지 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8초'''로 팀에서 제일 빠른 오카다 요시후미랑 비교하면 거의 1.5배 수준(...) 빠르지 않다를 넘어서 느리다.[30]
여담으로 이런 유형의 한국 선수로는 서용빈, 박종윤, 채태인이 있다.
6. 기타
- 30대에 접어들면서부턴 스킨헤드에 가까운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탈모 때문에 그냥 머리카락 채로 밀어버린 듯 싶다.
- 메론을 싫어한다고 한다.
- 오마츠 쇼이츠를 친동생처럼 챙겨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2016년에 오마츠가 방출당했을 때 한동안 오마츠의 등장곡을 썼고, 오마츠도 야쿠르트로 가서 후쿠우라의 등장곡 願い를 등장곡으로 썼다. 그 외에 드래프트 동기들, 특히 동갑내기인데다가 팀내 프랜차이즈로 성장한 오노 신고[32] , 오오츠카 아키라[33][34] 와 친했다고 한다.[35] 2013년에 오노 신고가 은퇴하여 동기 중 자신만 현역으로 남게 되었을 때 매우 쓸쓸해했다고 한다.
- 오오무라 사부로와 공동으로 치바 롯데에서 뛰는 치바 출신 야구선수를 육성하기 위해 중등부 야구팀 '치바 마쿠하리 보이즈'를 설립했다.
- BoA의 광팬이다. 사토자키 토모야와 함게 보아 콘서트를 보러 간 적이 있으며 이때 이승엽에게도 함게 가자고 했으나 이승엽이 야구전념을 이유로 거절한 듯하다. https://sports.v.daum.net/v/20040317115747424
- 별명으로는 마쿠하리의 안타 제조기가 있다. 한때는 리그 최고의 교타자였기에 이런 별명이 붙은 듯.
- 위에서도 언급했듯 드래프트 전체 최하위 픽이다 보니 엄청난 인간승리 중 하나로 꼽힌다. 본인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혹시나 프로에 갈 수 있지는 않을까?'하는 태도를 보일 정도로 지명 가능성이 높지 않았고, 지명 이후에도 등번호 70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육성선수도 없다 보니 70번이라는 코치나 달법한 등번호를 보고 너는 선수냐 코치냐?하고 주변에서 놀리기도 했다고(...)[36] 그리고 2020년 선수를 은퇴하고 코치를 맡게 되면서 다시 70번으로 돌아왔다.
- 등번호가 9번이라 그런지 9월 9일에 유독 잘 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2013년, 2014년엔 대타로 나와 각각 역전 적시타와 끝내기 적시타를, 2018년에는 3년 만의 홈런을 쳤다.
- 직전 시즌은 2천 안타 달성 이후 안타가 없었고, 은퇴 시즌에 안타를 기록하지 못하면서 후쿠우라의 통산 안타수는 정확히 2000개로 끝났다. 참고로 통산 2천 안타상태에서 은퇴는 NPB 사상 처음 이라고 한다.
- 2000안타를 친 것이 엄청난 인간승리인 근거 중 또 하나는 바로 후쿠우라의 신체적 조건. 흔히 말하는 5툴 플레이어의 조건 중 후쿠우라는 2툴밖에 없었다. 다른 3툴 중 어깨와 주루는 없는 것을 넘어서서 -였고, 파워는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공인구가 탱탱볼이여서 30홈런 타자가 즐비했고, 홈런왕은 50개 가까이 쳐야 되는 시절이었다. 15~20홈런을 치는 후쿠우라의 홈런 순위는 매년 20위 바깥이었다. 그나마 갖고 있는 2툴 중 수비도 1루수 한정이었고, 좌투라서 애초에 1루 이외의 내야수는 시도도 해 보지 못했으니... 사실상 컨택 하나로 전체 최하위 픽에서 명구회까지 가고 치바 롯데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니 엄청난 인간승리. 거기다가 반 농담성이긴 하지만 20대 때부터 탈모가 와서 얼빠가 생기기도 어려웠는데[38] 컨택만으로 그것들을 다 극복한 것이다.
- 일본프로야구에서는 원정경기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갈 때 원칙적으로 1군 스타플레이어도 얄짤없이 이코노미 클래스, 그 중에서도 뒷자리를 준다고 한다. 다만 일부 구단은 일부 스타플레이어들의 경우는 구단에서 정해서 따로 비즈니스 클래스나 앞자리를 주고, 일부 구단은 본인이 자비로 차액을 내면 그런 좋은 자리로 옮겨가게 해줬다고 한다. 롯데는 차액을 내고 자리를 옮길 수 있게 했는데 후쿠우라는 언제나 이코노미석 뒷자리를 고수했다.[39]
[1] 커리어 초반에 외야수 병행도 했었다. 하지만 2003년 이후 외야수는 하지 않는다. 2010년부터는 1루수는 백업 위주로 들어갔고, 선발출장은 주로 지명타자로 나왔다. 물론 타격이 더 좋은 지명타자감 선수가 있을 때는 1루수로도 나와서 2017년까지는 1루 수비를 자주 보았다.[2] 2010년부터는 대타 아니면 지명타자로 주로 출장하였다. 선술했듯 1루수 선발출장도 2017년까지는 아예 없던 것은 아녔지만.[3] 전체 64순위로, 그 해의 롯데 최하위 픽이자 그 해 드래프트 '''전체 최하위 픽.''' 롯데를 제외하면 7라운드에서는 전원 패스를 선언했다. 참고로 1974년부터 후쿠우라가 지명받기 전해인 1992년까진 드래프트 지명가능 선수가 최대 6명(1978~1980년엔 최대 4명)이었기 때문에 후쿠우라는 '''1973년 이후 무려 20년만에 나온 6순위 미만 지명 선수'''였다.[4] 플레잉코치라서 선수생활을 접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선수로써 성적이 잘 안나오자 5월부터 코치를 중단하고 한동안 선수로만 남기로 했다.[5] 플레잉코치이며, 1군에 콜업된 기간 동안은 코치 등록 말소.[6] 네가이라고 읽는다. 소원이라는 뜻. 해당 한자는 원할 원.[7] 원래는 '해변으로 가요' 였다가 2011년 시즌부터 MVP사건 때문에 원곡 불명의 노래로(응원단 자작곡일수도) 바뀌었다. 2016년에 '해변으로 가요'가 부활한다고 했으나 한번도 부르지 못하고 후반기부터 다시 봉인되었다.[8] 원곡 불명의 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들의 후쿠우라/이 한방에 모든 걸 담아/불굴의 투지를 보여다오/치바의 긍지를 가슴에(俺達の福浦 一打に全て込めて 不屈の闘志を見せてくれ 千葉の誇り胸に)"'''[9] '해변으로 가요'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부른다/쳐라 후쿠우라(x2)/성원을 받아/쳐라 후쿠우라(x2)/승리를 붙잡아라(俺らは叫ぶ 打て福浦(打て福浦) 声援受けて 打て福浦(打て福浦) 勝利をつかめ)"'''[10] 실제 응원가 가사에도 치바의 긍지라는 표현이 들어간다.[11] 이미 차기 감독으로 내정된 상태다(...) 구단에서 대놓고 이구치 다음 감독은 후쿠우라라고 발표했다.[12] 또한 동기에 동갑내기인 후쿠우라, 오노, 오오츠카, 나이는 많지만 입단 동기였던 모로즈미까지 4명은 은퇴 후에도 롯데를 떠나지 않으면서 원클럽맨으로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다. 전형적인 롯데의 성골 라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13] 즉 가장 좁은 형태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태어난 지역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태어난 지역의 연고지 팀에 입단하여 그 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뼈를 묻는다는 조건에 제대로 부합하는 선수이다. 참고로 그 순수혈통 따지는 요미우리에서도 오 사다하루만이 저 조건을 다 지켰었다.(이제는 팀 옮겨서 오 사다하루도 순혈이 아니지만) 그런데 그 오 사다하루는 외국인이니...[14] 드래프트 동기가 쟁쟁한 상위픽 코쿠보 히로키, 오카지마 히데키, 마쓰이 카즈오, 야부 케이이치다. 이 중에서도 명구회 회원자격을 보유한 사람이 코쿠보와 마쓰이.[15] 1994년에 코치가 동갑내기 동기 오노 신고와 함께 타격 테스트를 시켜보았는데, 후쿠우라는 타자로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타자로 전향시켰다. 오노는 타자로써는 시망이라 판단하여 그대로 투수를 시켰는데 결국 투수로 성공하면서 해피엔딩.[16] 이 와중에 장타자보다는 중장거리 교타자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1루수로 정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좌완투수 출신이었기 때문. 후쿠우라 본인도 1루수와 외야수밖에 못 하는데 자신이 타자로 잘 하게 될지 의구심을 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좌익수마저 못 하고 1루수만 전문으로 하게 된 이유는 바로 드럽게 느린 발과 소녀어깨. 2000~2001년에 주로 대수비 위주로 외야수에 76경기 출전했는데 수비율이 .950을 찍을 정도로 못했다. 외야수는 수비실책이 적어 '''수비율이 .980 정도여도 수비 못 한다는 소리 듣는데''' 후쿠우라는 .950을 찍었으니 단순히 못하는 것을 넘어서 사실상 불가능한 선수를 세워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17] 똑딱이 1루수라는 말도 있는데, 이승엽이 들어오기 직전인 2003년에는 20홈런을 넘겼고, 10홈런 이상 친 해도 꽤 되는데다 2루타 등도 꽤 많이 치는 나름 장타력을 보유한 타자였다. 다만 하다 못해 3루수 정도만 됐어도 준수한 중장거리포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통산성적을 보면 역시 '1루수'로서는 아쉬운 성적. 거기다 2011년부터 반발력이 현저히 적어진 공인구가 새로이 도입되면서 그 영향 때문에 2011년엔 작년 기록한 13홈런에서 두 자릿수가 지워진 3홈런밖에 기록하지 못하였고, 2012년부터는 아예 이대형 수준의 똑딱이가 돼버리면서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 버렸다. 안 그래도 원래도 1루수로썬 그닥이었고 노쇠화로 심하게 하락한 장타력이 공인구 도입으로 고인이 되다시피 하면서 6년 동안 386경기에 출장하면서 홈런을 '''2개'''밖에 못 쳤다. 그래도 이쪽이야 원래 장타력이 아닌 교타력이 주특기였던 선수였고 소속팀이 홈구장 구조 탓에 홈런 안 나오기로 소문났던 치바 롯데였으니 충격이 덜했지, 옆동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는 공인구 도입 전까지만 해도 30홈런 수준의 성적을 매년 기록하던 강타자가 공인구 도입 한 방에 순식간에 장타력 사망+멘도사 라인이 되어버렸다.. [18] 하지만 노쇠화가 어느정도 진행된 2010년에는 수비력이 썩 좋지 못한 김태균에게 밀려 지명타자로 나서는 일이 많았다. [19] 같은 포지션에 좌투좌타인 오마츠 쇼이츠도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인해 2016년 단 한경기도 뛰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20] 현재 치바롯데에서 1루수로 자주 나오는 선수들 중 네모토 슌이치는 센터라인 출신이다 보니 식물타격이고 이노우에 세이야는 2군 본즈라서 주전은 커녕 풀 시즌 뛰기도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후쿠우라가 아직도 1루수로 필요한 상황.[21] 2018년에 같이 가입조건을 충족시킨 선수로는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있다.[22] 이마에 토시아키는 아직 명구회 가시권이기 때문에 만약 FA로 팀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후쿠우라의 계보는 이마에가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마에가 FA로 떠났고, 밑 세대의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오기노와 키요타는 풀 시즌을 제대로 뛴 해가 없어서 명구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밑의 카쿠나카 카츠야, 이노우에 세이야, 스즈키 다이치의 경우는 카쿠나카와 이노우에는 1군 정착이 너무 늦었고, 그나마 다이치가 명구회 가능성이 있는 편인데 다이치도 가진 툴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자리보전이 잘 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대졸이라 주전으로 발돋움한 시기가 늦었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그보다 밑에는 타무라 타츠히로, 나카무라 쇼고, 후지오카 유다이 등이 고정 주전인데 타무라와 후지오카는 타격이 뛰어난 경쟁자가 나와서 자리를 빼앗길 가능성이 높은 편이고 나카무라는 1군 정착이 너무 늦었다.(92년생인데 2018년부터 주전으로 정착.) 따라서 한동안은 후쿠우라만큼의 경력을 남긴 롯데의 선수는 없을 것이다.[23] 투수 쪽으로 돌리자면 후쿠우라만큼의 임팩트가 있는 선수가 아예 없다. 일단 현재 중심투수들을 보자면 선발 중 이시카와 아유무는 일시적인 부진인지 하락세인지 알 수 없으나 초반 몇 년을 제외하면 계속 예전만큼의 성적이 나와주지 않으며 와쿠이 히데아키는 FA 이적생이라 후쿠우라만큼의 대우는 힘들 것이다. 그 외에 오오타니 토모히사, 마츠나가 타카히로, 마스다 나오야, 우치 타츠야, 카라카와 유키 등은 괜찮은 불펜투수지만 임팩트가 없다. 신인이나 어린 투수들을 보자면 후타키 코타, 타네이치 아츠키, 이와시타 다이키, 아리요시 유키 등이 잘 던져주고 있는데 아리요시는 데뷔가 한국나이로 27살(심지어 빠른이라 사실상 28살이다.)이라 신인은 신인인데 서비스타임이 짧아서 큰 커리어를 남기기가 힘들다. 그러면 부상 없이 꾸준히 롱런해서 명구회, 혹은 그에 준하는 훌륭한 커리어를 남길 가능성이 있는 투수는 끽해야 후타키 코타부터 나온다. [24] 오전 10시 30분 직전에 터졌는데 오후 2시가 되도록 서버가 복구가 안 되고 있다. 물론 중간중간에 아주아주 낮은 확률로 예매가 가능하다 보니 표는 느리게 느리게 줄어드는 상황.[25] 사실 니시무라 노리후미같은 롯데에서만 뛰었던 프랜차이즈 스타-롯데에서만 코치로 몇 년 간 감독 준비-롯데 감독 테크를 탄 케이스가 이미 있었다. 대신 니시무라는 고향이 치바가 아니었으며 롯데 감독을 내려놓은 후 오릭스로 갔지만.[26] 4년 만의 홈런. 참고로 이거 한 경기에 멀티홈런 친 거다(...)[27] 6년 만의 도루(...)[28] 2002~2004년 각 2개씩[29] 이쪽은 신체능력과 주력 자체는 상당했는데 야구센스가 거의 바닥을 기는 스타일이라...[30] 팀에서 아예 꼴찌 수준이다. 50미터 달리기는 7초를 넘기며 이대호와 경쟁하는 수준(...) '''거기다가 후쿠우라는 좌타다!''' [31] 2010년 즈음부터 안 쓴다. 응원단이 이 즈음에 프런트와 싸우면서 물갈이돼서 그렇다.[32] 후쿠우라 카즈야와 함께 신인 시절 타자 전향을 염두에 두고 배팅 테스트를 했던 투수. 근데 후쿠우라와 달리 투수로써의 재능이 보였는지 투수를 계속했고, 일요일에 주로 등판하여 선데이 신고라는 별명을 얻고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하여 팀내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은퇴 후에는 스카우터를 하다가 현재는 롯데의 2군 투수코치를 맡고 있다.[33] 포지션은 외야수였는데 실력은 백업급이어서 많이 나오지는 못했으나(통산 737경기 출장) 롯데에서 17년 동안이나 뛴 나름 프랜차이즈라고 부를 만한 선수. 2010년 시즌 후 은퇴. [34] 현역 시절 끝내 터지지 못한 5툴 플레이어 유망주였다. 발도 빠르고 장타력도 중간 이상이었으나 야구센스가 심하게 안 좋아서 주루사를 엄청 당했다. 문제는 은퇴 이후 3루 주루코치를 맡으면서 현역 시절마냥 생각 없이 주자를 돌리다가 2019년 롯데의 홈 주루사를 무진장 양산하는 중.[35] 2라운더 타치카와도 고졸신인인데 중간에 타팀으로 이적했고 은퇴 후에는 롯데에서 일을 하지 않다 보니 친분에 대한 언급이 잘 안 나온다. 또한 입단 동기고 2020년 현재도 꾸준히 롯데에서 코치를 하면서 원클럽맨으로 남아있는 있는 모로즈미 켄지는 나이가 많아서(대졸사회인이라 6살 차이가 난다) 그런지 특별히 절친이라는 묘사는 없다.[36] 사실 2017년 이노모토 켄타로 등 롯데 선수단 내에서도 70번을 단 현역 선수가 있긴 있었다.[37] 에토 미사가 드라마에서 소프트볼 선수 역할을 맡았는데 타격폼이 후쿠우라와 비슷해서 개드립을 치는 것(...) 영상 [38] 얼굴 자체는 50~60년 전의 미남상을 선호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꽤 괜찮게 생겼다고 평가할 얼굴이다. 머리를 민 스타일도 나름 잘 소화하고. 그러나 21세기식 미적 기준으로는 꽃미남과는 거리가 먼데다가 그놈의 탈모가...[39] 반대로 이구치 타다히토와 사토자키 토모야는 항상 돈을 더 내고 앞으로 가서 뒷자리에 앉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