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릭스 버팔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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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오사카/고베.
일본 야구단 중에서도 복잡한 역사를 지닌 팀으로, 보통 퍼시픽 리그 소속팀들은 센트럴 리그에 비해 바닥을 깔아주는 팀이 거의 없고 대다수 팀들의 일정 이상의 전력을 유지하고 평준화도 잘 되어있다고 평가받지만, 그 중에서도 퍼시픽을 대표하는 약팀을 꼽으면 십중팔구 오릭스를 선택할 정도로 '''퍼시픽 리그에서 독보적인 약팀'''이자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손꼽히는 비인기구단'''으로[9] 고전하는 중이다. 기록으로만 봐도 '''21세기 파리그 팀들 가운데 통산 승률, 성적이 가장 낮고, 2000년 이후로 유일하게 우승이 없는 퍼시픽 리그 소속팀'''이다. [10]
그리고 2017년 자타공인 일본프로야구 최약체 팀인 베이스타즈가 19년만에 일본시리즈 진출에 성공하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한지 가장 오래된 팀'''이 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24년'''. 참고로 한미일 프로야구팀 가운데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1위는 창단 이후 43년동안 월드시리즈 진출도 못해본 시애틀 매리너스(...), 2위는 38년째 맥주만 만드는 밀워키 브루어스.
2004년 일본프로야구의 리그 축소 문제와 초유의 파업(공백의 2일) 등의 혼란의 결과로 2004년 오프시즌에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가 합병하여 현재에 이르게 됐다.
퍼시픽 리그 팀들 중 유일하게 지역명을 팀명에 붙이지 않는다. 지역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인기 있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이유로는 두 구장을 왔다갔다하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모기업 사정. 모기업인 오릭스 그룹이 금융업부터 시작해 보험, 증권, 부동산 임대업, 렌터카 등등 전국단위의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팀은 기업의 광고판 역할을 하는데 오사카 오릭스 버팔로즈라고 지역명을 붙여버리면 보는 사람들이 '오릭스 렌터카는 오사카에서 영업해서 관동에서는 빌릴 수 없는 거 아냐?' 하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룹 전체로서는 손해가 되기 때문에 붙이지 않는 것. 다른 구단 모기업의 주 사업인 인터넷이나 식품사업 등은 이런 지역명 부착의 영향이 적지만, '실물' '지역' 베이스로 거래되는 부동산 임대나 렌터카는 이런 지역명 부착의 영향이 크다.
비슷하게는 마찬가지로 전국지인 요미우리 신문사에서 지역이미지 고착을 막기 위해 자사에서 운영하는 스포츠팀 이름에 지역명 부착을 거부하고 있는데, 지역명 부착을 강제하려고 하자 축구단 도쿄 베르디는 지역명을 붙이느니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는 입장을 보이며 매각했고[11] , 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차마 야구를 넘어선 일본의 상징 중 하나인 구단을 팔 수는 없으니 원정유니폼이나 로고에 삽입하는 식으로 미적지근하게나마 연고지를 반영하고 있고, 주니치는 중부 일본을 줄인거로 우겨서라도[12] 흔적은 남기고 있지만, 오릭스는 그것도 없다.
또한 일본프로야구 구단 중 유일하게 구단명에 한자가 들어가지 않으며[13] 더하여 유일하게 구단명에 가운뎃점이 붙는다. [14]
한국에서 어문 규정을 잘 지킨 언론사의 경우 오릭스 버'''펄'''로스[15] 라고 많이 표기한다.
2. 홈구장
2.1. 교세라 돔 오사카(오사카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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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홋토모토 필드 고베(고베 종합운동공원 야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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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공식적로 오릭스 버팔로즈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가 브레이브스-블루웨이브의 프랜차이즈에 흡수된 형태이기 때문에 브레이브스 - 블루웨이브 프랜차이즈를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오릭스 버팔로즈 공홈에 있는 구단역사를 보면 오릭스가 한큐 브레이브스를 인수한 1988년(오릭스로서의 리그 첫 참가는 1989년.)부터 게재하고 있다.[16] 그야말로 족보가 참으로 거시기한 상태. 일단 일본프로야구기구 웹사이트나 위키에서는 한큐/오릭스 브레이브스 -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을 전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거 한큐, 긴테쓰 팬들을 온전히 수용한 팬베이스라고 보긴 힘들지만, 구단 측에서는 그래도 한큐, 긴테쓰 팬들을 위해 올드 유니폼, OB 초청, 칸사이 클래식[17] 등 전신 팀을 추억하기 위한 행사는 하는 편이다. 올드 유니폼 종류만 해도 70~80년대 한큐 브레이브스, 일본생명 구장-후지이데라 구장 시대의 킨테츠 버팔로즈, 오사카 돔 시대였던 말기의 킨테츠 버팔로즈, 오릭스 블루웨이브[18] 4종류가 기본으로 쓰이고 최근에는 그 이전의 한큐/킨테츠 유니폼이나 오릭스 인수 직후의 '오릭스 브레이브스' 유니폼을 쓰기도 한다. 때문에 정말 시도때도 없이 올드 유니폼 데이가 열리며 매년 테마가 다르다. 물론 OB(레전드) 초청도 긴테츠 때 따로, 한큐 때 따로 이렇게 한다. 구장에서도 과거 긴테쓰, 블루웨이브 응원단의 깃발이 보이기도 하며 몇몇 응원가는 긴테쓰/블루웨이브 시절에 쓰던 것들이 그대로 쓰인다.[19]
하지만 현재의 오릭스 버팔로즈는 2005년 이후에 재탄생한 신생팀과 다름없다고 봐도 그다지 무리는 없다. 애초에 영구결번이었던 긴테쓰의 스즈키 케이시의 1번이나 [20] 이 해제된 것만 봐도, 과거의 역사는 되도록 잊으려는 듯하다.[21] 참고로 현재 오릭스 버팔로즈의 준영구결번은 이치로의 51번.
다만 오해하서는 안 될 게 어디까지나 '신생팀이나 '''다름없다''''는 거지 공식적으로도 버팔로즈가 과거 한큐-블루웨이브와는 전혀 연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NPB 사무국이 인정한 '''공식적인''' 역사는 '''한큐/오릭스 브레이브스 - 오릭스 블루웨이브 - 오릭스 버팔로즈'''. 한국 프로야구 10개 구단의 변쳔 연표가 기록된 패널이 전시되어 있는 KBO 사무국의 한국야구회관빌딩처럼 도쿄 돔의 야구전당박물관에도 일본 프로야구 12개 구단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그래프가 전시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버팔로즈의 역사는 한큐 시절까지 단절 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사진) 그렇기 때문에 이 항목의 '역사' 부분은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로 한정해 소개한다.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구단연혁은 독립된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2018년 기준 한큐/오릭스 브레이브스 시절 경험이 있는 현역 선수는 2015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선수 겸 배터리 코치를 맡던 포수 나카지마 사토시가 은퇴하면서 모두 사라졌고, 블루웨이브 시절 경험이 있는 선수마저도 스즈키 이치로가 2019년 일본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개막전 후 은퇴를 선언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아울러 현재 퍼시픽 리그 구단들 가운데 유일한 20세기 최후의 일본시리즈, 퍼시픽리그 우승팀이자 진출팀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우승이 1996년이란게 위안거리..라지만, '''퍼시픽리그 마지막 우승이 자신들이 합병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마지막 우승연도(2001년)보다도 밀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비참해진다.. 더군다나 그 마지막 우승을 '''사상 초유의 대타 역전 만루 끝내기 리그 우승 홈런'''을 얻어맞으며 허용한 팀이 바로 자기들이었고, 긴테쓰를 대신해 새로이 창단한 신구단은 창단 당시에 자기들(오릭스)이 우수한 선수들은 다 빨아먹고 쩌리들만 남겨놓은 걸 울며 겨자먹기로 영입해 창단했음에도 불구하고 9년만에 퍼시픽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을 해버렸으니...심지어 포스트시즌조차도 2005년 이후를 기준으로 라쿠텐 4회, 오릭스 2회로 오릭스가 더 밀리며 그나마도 라쿠텐은 2013년의 첫 우승을 포함, 3번이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오릭스는 전부 퍼스트에서 광탈했다.
3.1. 브레이브스 - 블루웨이브 프랜차이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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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큐 브레이브스의 구단기.[22]
1936년 한큐 전철이 '''한큐군(阪急軍)'''이란 이름으로 창단. 전후인 1946년 다시 한큐군이란 이름으로 프로야구 리그에 참여. 이듬해인 1947년 '''한큐 베어즈(阪急べアーズ)'''로 구단명을 바꿨으나, 시즌 개막일이었던 1947년 4월 18일 구단명을 '''한큐 브레이브스(阪急ブレーブス)'''로 다시 바꾸고 이 이름으로 계속 리그에 참여한다. 1950년 양대리그제 시행 당시 퍼시픽리그에 참가했으며,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을 홈으로 삼았다. 한큐 철도망의 덕택에 경기를 보러오는 고정팬들이 꽤 있었다.[23]
1950년 양대리그 시행이후 퍼시픽 리그에 소속되었으나, 1960년대 중반까지 니시테츠, 난카이, 토에이, 마이니치(다이마이 - 도쿄) 등 잘나가던 팀들에게 밀려 그저 인기 없는 구단으로 '''회색 구단'''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똑같이 '''지하철 야구단'''이란 비아냥을 듣던 긴테쓰 버팔로즈와 서로 하위권을 전전하면서 지낸다.[24] 그러다가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부임한 이래 1967년 구단 최초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일본시리즈 상대가 아주 잘 나가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 때는 교진군의 V9시절(1965년~1973년 연속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의 최전성기였는데, 교진군이 9연패를 하던 시절 그 중 거의 절반 이상인 무려 5회(67~69, 71~72)[25] 나 만나 모두 준우승에 머무르며 콩라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아무튼 퍼시픽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으로 성장한 것은 잘된 일.
이후 브레이브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이 1974년 부임, 니시모토 감독이 만들었던 토대 위에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시대가 끝난 이후 '''1975년부터 1977년까지 3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76년과 1977년 2년 연속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 우승하여 과거의 치욕을 되갚았다.[26] 이 시기에 배출한 스타로 세계 최초 통산 1,000도루 돌파와 13년 연속 도루왕, 1회 선두타자 홈런 일본기록, 통산 1,065도루의 리키 헨더슨 이전까지 '세계의 도루왕'이라 불린 후쿠모토 유타카와 통산 350승 투수 요네다 데쓰야, 그와 콤비를 이뤘던 가지모토 타카오, 역대 최고의 서브마린 투수 중 한 명인 야마다 히사시와 그만큼 화려하지는 않아도 꾸준함을 보인 언더핸드 선발 아다치 미츠히로, 강속구 투수로 이름난 1975년 일본시리즈 MVP 야마구치 다카시, 1973년, 1979년 수위타자 가토 히데지, 홈런왕 3회 수상과 32시합 연속 안타(1971)을 기록한 나가이케 도쿠지 등이 있다. 특히 야마다(1위), 가토(2위), 후쿠모토(7위 지명) 3명의 명구회 회원을 배출한 1968년 드래프트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 스카우팅으로 평가받는다.[27]
1978년과 1984년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28] 브레이브스는 세이부 라이온즈가 돈질을 앞세워 파리그를 씹어먹기 전까지 파리그를 대표했던 최강팀이었고, 세이부가 최강팀으로 발돋움한 뒤에도 세이부의 독주를 저지할 1순위 후보이자 상위권 단골로 꼽혔었다. 위의 황금기 멤버들에 이어 미노다 코지, 마츠나가 히로미, 이시미네 카즈히코, 부머 웰즈, 사토 요시노리, 이마이 유타로 등의 스타 선수들을 여럿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기업인 한큐 전철의 경영난으로 인해 1988년 시즌 종료 후 금융업체인 오릭스에[29] 구단이 매각되었다. 1957년에 서거한 한큐 전철 창업주인 고바야시 이치조의 유언 중 야구단과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팔지 말라는 말이 있었으나, 다카라즈카만 남기고 야구단은 끝내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큐는 창업주의 손자들이 나중에 한신 전기철도를 인수하면서 '''한신 타이거스'''도 동시에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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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브레이브스의 구단기.
인수 직전까지도 성적이고 관중동원이고 뭐고 막장의 끝을 달린 옆동네 오사카의 난카이 호크스와는 달리, 한큐 브레이브스는 효고현 지역에서 백만에 가까운 관중을 동원할 정도로 나름 팬베이스도 두터웠다.[30] 브레이브스의 마스코트 브레이비[31] 도 상당히 인기있었다. 그리고 쇼와 말기에 파리그의 왕자 자리를 세이부에게 넘겨주기는 했지만, 그 시기에도 끝까지 세이부와 선두 다툼을 벌일 정도로 강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큐 브레이브스의 마지막 해인 1988년 프랜차이즈 스타 후쿠모토 유타카와 야마다 히사시가 팀의 매각과 동시에 은퇴했지만,[32] 그들을 대체할 젊은 선수들이 전성기에 있었다. 투수에 사토 요시노리(항목1)와 좌완투수 호시노 노부유키가 있었고, 야수진에는 마츠나가 히로미-부머 웰즈[33] -이시미네 카즈히코-후지이 야스오 등의 토종 강타자들에 난카이의 연고지 이전 이후에도 간사이에 남고자 했던 카도타 히로미츠까지 합류해 '블루 선더 타선'이라는 막강 화력의 타선이 꾸려졌다. 특히 오릭스로 이름을 처음 바꾼 1989년에는 긴테츠 버팔로즈, 세이부 라이온즈와 정규시즌 마지막날까지 파리그 우승을 두고 삼파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오릭스 브레이브스는 '''승차 없이 단 1리 차이로''' 2위에 머물게 된다. 안습.[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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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블루웨이브로 이름을 바꾸며 새로 만든 마스코트인 '''네피'''. 이후 2010년 마스코트 변경 전까지[35] 활약했다.[36]
오른쪽은 스즈키 이치로.
1991년에 니시노미야에서 고베로 연고지를 옮겼고, 오랫동안 써왔던 '브레이브스' 대신 항구 도시인 고베의 이미지에 맞게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팀명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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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의 구단기. 오릭스 버팔로즈로 구단명을 바꾸고 오사카로 메인 연고지를 변경한 후에도 2008년까지 이 형태의 구단기를 사용했다. 물론 하단의 "블루웨이브(Bluewave)"는 "버팔로즈(Buffaloes)"로 변경.
고베의 보다 넓은 구장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 구단 수뇌진은 한큐의 여태까지의 화력 중심 팀컬러를 바꾸고 싶었던지 요미우리 V9 시절의 주전 2루수이던[37] 도이 쇼죠 감독을 영입했다. 하지만 도이 감독 하에서 성적은 3년동안 3위만 하며 상위권 커트라인은 유지했지만 도이 감독은 마츠나가, 이시미네, 웰스 등 기존 한큐 출신 선수들과 불화를 겪어 이들을 다른 팀들로 떠나보내는데 일조했으며 지금은 감독 경력 자체보다도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폼이 이상하다며 2군에 박아 슈퍼스타의 앞길을 막은 꼰대로서 더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도이 감독이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난 뒤 긴테쓰를 우승전력으로 올렸던 오기 아키라 감독이 부임하며 다시 오릭스의 전성기가 돌아온다. 천재 타자 스즈키 이치로의 폭발, 사토 요시노리, 호시노 노부유키, 노다 코지, 하세가와 시게토시, 후지이 야스오등 기존 전력들의 분전, 다구치 소, 히라이 마사후미, 노무라 타카히토, 트로이 닐 등 신 전력의 대두 등이 맞아떨어지면서 1995년, 1996년 2년 연속 리그 우승과 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특히 위의 두 우승은 고베 대지진을 극복하고 거둔 우승이라[38] 더욱 값진 우승이 되었다. 이 시기 팀의 전력이나 티켓파워에서 이치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우측 외야 관중석에'''만''' 우익수 포지션의 이치로를 보는 사람으로 북적였다고. 하지만 그것도 약발이 떨어져 1997년부터는 도로 관중수가 하락했다. 특히 1996년에는 리그 우승과 더불어 나가시마 시게오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수가 140만이 안되는 안습함을 보여주었다.
2000년대 들어 주요 전력이던 하세가와 시게토시, 스즈키 이치로, 다구치 소 등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한 후에는 반등의 기미라고는 전혀 없이(...) B클래스(하위권)에 쭉 맴돌았다. 구대성 선수가 바로 오릭스의 침체기인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구대성, 카네다 마사히코, 다니 요시토모 등이 분전했지만 성적은 줄곧 하위권이었고[41] 오기 감독 이후 이시게 히로미치, 레온 리[42] , 이하라 하루키 등 감독들은 별다른 성과 없이 줄곧 갈리기만 했다. 암흑기의 한가운데이던 2003년에는 이시게 히로미치 감독이 4월에 일찌감치 해고되고 타격코치를 맡던 레온 리가 감독직을 급하게 이어받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44승 88패 4무(승률 .353)의 압도적 꼴지에 '''927실점, 819자책점, 팀 평균자책점 5.95, 팀 피안타 1534개라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기록'''을 세웠고[43][44] , 심지어 당시 리그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게 '''20실점 이상을 허용한 패배만 4번'''을 당하는 굴욕적인 기록도 세웠다.[45]
여담으로 한큐-오릭스는 지금까지 4차례 승리한 일본시리즈에서 첫 해인 1975년을 제외하곤[46] 모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어 승리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팀이기도 하다. 거기다 그때 요미우리의 감독은 모두 나가시마 시게오였다.
3.2. 현재 : 블루웨이브-버팔로즈 프랜차이즈 합병 후
2005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 합병하여 지금의 '''오릭스 버팔로스'''가 되었다. 합병시 긴테쓰가 흡수되는 형태였기 때문에, 구단의 공식적인 역사는 오릭스 브레이브스-블루웨이브를 계승한다.
합병의 이야기를 하자면, 긴테쓰 버팔로즈는 나름대로 오사카의 터줏대감이였으나 옆동네 야구단의 압도적인 인기에 밀려 적은 인기와 함께 어마어마한 오사카 돔의 이용료 등으로 인한 적자 때문에 더이상 야구단을 운영할 수 없다고 GG를 치게 된다. 이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회장인 와타나베 츠네오를 위시한 보수파 구단주들을 중심으로 아예 한 구단[47] 더 합병한 뒤 10개 구단으로 단일리그제로 환원한다는 구상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반발한 선수회[48] 는 전무후무한 파업으로 이를 간신히 저지하고, 없어지는 구단 대신 한 자리를 채우는 방향으로 2리그 유지를 시키는 등, 파란의 연속이였다. 결국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새로 창단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된다.
합병 주체가 오릭스였기 때문에,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는 흡수당한 것으로 취급하므로 구단역사는 오릭스를 계승하게 되었다. 따라서 킨테츠의 역사는 여기서 '''끝'''. 영구결번 등도 2004년을 끝으로 없어지게 되었다.[49] 한가지 더 슬픈 건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는 팀이 해체될때까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안습도 이런 안습이 없다...
오릭스의 2군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네이밍라이츠(명명권) 시스템으로 인해 '''서패스 고베(サーパス神戸, Surpass Kobe)[50] → 서패스(サーパス, Surpass)[51] ''''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가[52] 2008년을 끝으로 계약이 해지되며 다시 오릭스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네이밍라이츠로 2군을 운영하는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뿐(쇼난 시렉스)이었다가,(2000~2010) 2011년부터 이쪽도 그냥 베이스타즈 2군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막장인 프런트와 팀 전체 전력의 반을 차지하는 외국인, 어린이들에게'''만''' 인기가 있는 선수들이 어우러져 전체 12개 구단 중 인기는 최하위인 팀. 실제로 설문조사에서도 고작 '''0.3%'''만이 오릭스의 팬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인기가 처참하다.[53] 방송 중계 사정도 안습해 간사이 지역의 온갖 채널들이 정보 프로그램에서 다루고 전속중계를 하는 한신 타이거즈와는 달리 오릭스는 '''로컬 TV중계가 아예 없어서''' 가끔 NHK 전국방송을 타던가 하지 않는 이상 접근성이 한정된 스포츠 전문 케이블, 위성 채널로만 방송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 퍼시픽 리그가 리그 차원에서 파리그 TV같은 것도 제공하고 지역방송이 스트리밍 서비스에 딴지를 걸거나 하는 일도 없어 온라인 스트리밍 중계 환경이 나은 것은 다행. 일본 웹에서는 야구장 밖에서 오릭스 팬 7명이 모이면 드래곤볼마냥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농담도 있을 정도.
오릭스 팬 2인조가[54][55] '''오릭스의 연고지인''' 오사카 우메다에서 오릭스 팬을 찾아보는 영상. 정말 고생고생해서 두시간 반만에 한 명을 찾았다...이들은 한명한명씩 설문을 하면서 찾다가 힘들었는지 아예 '오릭스 팬 구함' 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연고지에서의 인기가 이 정도이다. 참고로 저 두 명 중 주인공인 B-モレル는 혼자 도쿄에 가서[56] 시부야에서 오릭스 팬을 찾아보는 컨텐츠도 진행했다. 그리고 거기서도 두시간 반만에 한 명 찾았다(...). ‘오릭스 팬 구함’ 종이를 든 것도 여전했다(...).
오릭스의 큰 문제점은 '''구단주가 야구팬인데 야구단 운영을 모른다는 것이다.'''[57]
어쨌든 모 회사가 금융회사라 돈은 많은데, 한신처럼 지역내 팬베이스가 확고한 것도 아니고, 젊은 선수를 제대로 키워내는 팀도 아닌지라 다른 팀의 베테랑 선수, 포텐이 터질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끝내 어느정도 나이는 먹었는데 유망주 딱지는 못 뗀 2군 본즈 같은 선수, 연봉 대비 효율이 낮아서 퇴출된 이름값 센 외국인 선수[58] 를 꾸역꾸역 채워오는 식으로 운영을 하였다.
본래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인기가 없던 두 구단인 긴테쓰 버팔로즈와 오릭스 블루웨이브를 합병했는데, 애초에 구단을 인수할 기업을 찾는 것이 아닌 합병이라는 것 자체가 와타나베 쓰네오를 위시한 구계 보수파 구단주들의 뜻이라 탄생부터가 단일리그화를 원하지 않는 선수들과 선수들의 입장에 동조하기 마련인 팬 입장에서는 밉상인 팀이었는데 합병 과정에서 라쿠텐에는 나이많은 선수만 보내 주는 밉상짓, 스즈키 이치로, 타구치 소 등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잇다른 이탈로 인해, 합병 시점에서는 말이 합병이지 사실상 2005년에 생긴 신생팀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는데 같은 연고지에 위치한 전통의 인기팀 한신, 위에 써진 대로 꾸역꾸역 퇴물들을 돈으로 사 와서 꾸려가는 구단 운영, 그로 인한 낮은 성적으로 도대체가 팬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는 팀으로 특히나 젊은 여성층에는 팬이 거의 없었다. 일본의 야구팬들 사이에서 가끔 농담으로 나오는 말이 "현실에서 젊은 여성 오릭스팬은 본적이 없다." 일 정도.
하지만 2010년대 중반 들어와서 양상이 많이 바뀌었는데 프런트진이 여성 팬 유치에 많이 진력해서 최근에는 젊은 여성 오릭스 팬들이 많이 늘었다. 특히 신규 유입된 이들 여성팬들에게 카프조시에 대항하는 오리히메[59] 라는 별명이 생기는 등 나름대로 마케팅에 꽤 성공했다. 오히려 경기의 승패에 죽고 사는 아저씨, 꼰대의 이미지는 과격, 무식의 훌리건 이미지로 대표되는 한신 타이거스의 팬들에게 많이 붙어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기는 타 구단에 비해 많이 처지는 상황이다.
여성팬이 는 것과는 별개로 야구단이라기보다는 금융회사스러운 운영은 여전해서, 여전히 상술한 대로 베테랑 선수들이 마지막으로 1~2년 정도 현역연장을 위해 거쳐가는 팀 중 하나다. 다만 오릭스 입장에서는 어차피 돈은 많은데다가, 모기업이 금융뿐만 아니라 보험, 부동산, 증권, 렌터카 등 전국단위로 사업을 하기 때문에 이런 유명선수들이 입단해서 성적은 어찌됐건(...)스포츠신문에 크게 이름을 날려주고 입단 자체만으로 뉴스거리가 되어주며, 가끔씩 모기업 광고에 출연도 해 주거나 박찬호, 이승엽 때 처럼 중계권을 구입해 가외수입을 안겨주기도 하는 등 야구 외적으로 큰 홍보효과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방만한 경영을 굳이 바꾸지 않고 있다.
다만 이런 식으로 경영하면서 성적이 나오는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이기에, 베테랑들로 자리를 채우면 신인은 출장기회를 잃어 성장이 늦어지고, 신인이 제대로 못 커서 팀은 망가지고, 인기는 점점 더 떨어지고, 떨어진 인기와 성적을 회복하기 위해 베테랑을 영입해오고...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나마 가끔씩 튀어나오는 괜찮게 자란 유망주들도 FA가 되면 미래가 없는 팀에서 탈출하기 바쁘다. 반대로 FA를 구입해서 때우려고 해도 더욱 많은 돈과 인기, 수도 도쿄와 우승권 전력 등 단순히 돈 이외의 큰 메리트를 가진 요미우리 자이언츠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영입싸움에서 밀리기 일쑤라 결국 저렇게 한물 간 선수나 외국인 선수 정도로 전력향상을 꾀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자니 또 상술한대로 악순환에 빠지고...하는 수렁에 빠진 팀. 그래도 돈은 많아서 거물 선수가 FA로 나오면 항상 주 영입 후보 중 하나로 꼽히고는 있다.
결국 야구팀이란 측면에서는 방만한 경영, 망가진 육성 시스템으로 인해 빵점이지만, 야구단도 결국 기업이란 측면으로 바라볼 땐 꽤 똘똘한 경영을 하는 구단.
이렇듯 팀 꼬락서니는 막장이지만, 구단가 하나는 센스가 일품이다. MEGA STOPPER라는 밴드가 주로 만들고 있는데, 스카 펑크풍의 흥겨움이 돋보인다. 특히 매년 같은 시기에 구단응원가를 발표하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과 비교하면 넘사벽. SKY, PLAY BALL, calling.
4. 역대 시즌
4.1. 합병 후~2011년
프런트가 합병을 추진한 사유 중 하나는 킨테츠의 주력선수인 나카무라 노리히로, 이와쿠마 히사시, 오오무라 나오유키, 이소베 코이치 등을 영입하여 우승을 노려 보고자 했기 때문인데, 정작 해당 선수들은 이에 반발했다. 나카무라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했다가 처참히 망하고 결국 오릭스로 왔으나 한 해만에 성적 부진+연봉 문제로 인한 갈등 크리가 쌍으로 겹치며 방출당한다.[60] 이와쿠마와 이소베는 선수회의 선봉에 서서 공식적으로 오릭스를 엿먹이며(...) 고생길이 훤한 라쿠텐행을 선택했다. 오오무라는 들어갈 것처럼 말하다가 막판에 뒤통수를 치며 FA 권리를 행사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갔다. 이후 오릭스는 트레이드로 기어이 오오무라를 오릭스에 데려왔으나 2년만에 방출시켜 버렸다.[61] 또 이 기간에 들어온 드래프트 하위 신인선수들에게 계약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오릭스의 전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에 아주 충실하게(...) 선수 분배 드래프트에서의 우선권[62] 을 무기로 오릭스와 긴테쓰 양 팀에서 건질 수 있는 주력급 선수나 상위픽 유망주들을 포지션 가릴 것 없이[63] 모조리 빨아들이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는 40대를 눈앞에 둔 노장선수[64] 나 나이만 먹고 성장이 정체된 노망주, 미미한 기대치의 젊은 선수들을 떠넘기는듯한 행태로 골고루 밉상짓을 했다.
그럼에도 몇 년간 B클래스를 맴돌며 라쿠텐과 함께 암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6년에는 메이저리그 도전에 실패한 긴테츠 최후의 4번타자 나카무라 노리히로와 요미우리에서 부진 끝에 방출된 왕년의 대타자 키요하라 카즈히로를 데려오며 소소한 화제거리를 만들기도 했지만 순위는 오히려 5위로 더 내려갔고[65] 상술했듯이 시즌 종료 후 나카무라와는 연봉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결국 방출시켜버렸다. 2007년에는 외국인 감독의 성공을 벤치마킹해 메이저 출신의 테리 콜린스 감독을 데려오고 왕년의 홈런왕 터피 로즈가 오사카로 돌아왔지만 최하위... 그나마 2008년에는 1999년 이후 9년만에 처음으로 A클래스(상위권)에 진입하였다. 15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한 고마쓰 사토시를 필두로 가네코 치히로, 콘도 카즈키, 야마모토 쇼고 등 10승 선발투수들이 마운드를 지켰고 타선도 세이부에서 이적해온 홈런왕 타자 알렉스 카브레라(36홈런 104타점), 역시 2007년부터 복귀한 또다른 홈런왕 터피 로즈(40홈런 118타점) 듀오 둘이서 76홈런 222타점으로 퍼시픽리그를 폭격하면서 투타의 균형이 맞았다. 테리 콜린스 감독[66] 이 잘리고 오오이시 다이지로가 감독대행을 맡으면서 시즌 초반을 어수선하게 보냈지만, 어찌저찌 반등에 성공하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이어 리그 2위[67] 를 차지. 하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선 3위 닛폰햄에게 2연패하며 탈락.
2009년에는 56승 86패 2무로 다시 퍼시픽리그 꼴찌로 추락했다. 5위, 즉 꼴찌에서 두번째가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거취를 둘러싸고 구단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팀 분위기가 개판된 치바 롯데 마린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참... 작년 신인왕 코마츠가 '''1승 9패 7.09'''라는 충격적인 추락을 보여주는 등 마운드가 전반적으로 붕괴했다. 오이시 다이지로 감독은 사임하고 2010년 오카다 아키노부 전 한신 타이거스 감독이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여담으로 2009년에는 터피 로즈가 9년을 채우며 외국인 제한이 풀린 덕에[68] 5명을 가동하는 팀이 되었는데, 야수진에만 4명. 그것도 터피 로즈, 알렉스 카브레라, 호세 페르난데스[69] , 그렉 라로카등 각 팀의 주포급의 거포들로만 쫙 깔아버린 덕에 팀 전체 공격력의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해버려 다른 팀들에게는 공포를 안겨주지만 정작 팀의 인기는 하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정작 그 초중량 타선은 부상 크리로 전혀 잘 가동되지 못했다.
2010년 2월 5일 팀의 외야수인 오제 히로유키 선수가 전지훈련지인 오키나와 미야코 섬의 숙소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70] 일단은 자살로 추정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새해부터 뭔가 심상치 않더니 성적도 리그 5위로 시망. 결국 21세기 첫 10년을 2008년 '''단 한 번''' A클래스에 든 것으로 마무리했다. 후새드. 동쪽의 개막장팀도 2번 찍었는데... 그나마 요코하마와는 달리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한 거[71] 에 위안을 삼았지만 요코하마는 2016년에 CS 진출에 성공했고, 그것도 모자라 첫 해부터 오릭스도 못 간 파이널까지 가더니 이듬해엔 CS 우승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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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즌에는 대대적인 전력강화의 일환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풀린 이승엽을 얻어오고, 거기에 '''박찬호'''라는 카드까지 영입했으나 둘다 한시즌만 뛰고 한국복귀를 하게 되었다. 암튼 전력 보강으로 시즌 후반에 분전을해 3위를 지킴으로써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나 싶었지만 마지막 경기때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패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승차없이 1모(...)로 탈락했다...[72] 그나마 위안인건 꼴찌가 '''작년 일본시리즈 우승팀''' 치바 롯데 마린즈란 것과 5위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란 것 정도..? 물론 라쿠텐은 도호쿠 대지진으로 분위기가 망한 것도 있지만.
새 유니폼과 마스코트가 이 해 1월 8일에 공개되었는데 마스코트 자체가 모에선을 너무 맞은 느낌이 든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배경 스토리에 따르면 박사가 멋대로 만들어낸 시공을 초월한 '''소 로봇'''이라는데… 버팔로 벨 참조. 한국에서도 모에선을 맞았다.
동시에 공개된 유니폼은 예상보다 멋지게 나왔다. 홈은 의외로 괜찮은 편이며 외곽선과 넥라인에 금색을 사용한 덕에 황금간지가 줄줄, 원정은 회색이긴 했지만 가슴 로고와 폰트는 보조색인 노랑색이 커버하기에 사이타마 세이부보다 몇배 나은 편. 남색은 서드 유니폼에 적용되었다. 다만 밀워키 브루어스의 유니폼 색상을 연상시키게 한다는 평이 있다. 1월 28일 NHN이 오릭스와 1년간 공식 후원계약을 체결하여 헬멧과 유니폼에 한게임 로고가 박힌다. 기사보기
4.2. 2012년
4.2.1. 시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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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를 영입하면서 타선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지만... 현실은 '''이대호와 여덟 난장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이대호가 팀내 홈런(24홈런)과 타율(.286) 그리고 타점 선두(91타점)를 차지했고, OPS도 0.846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나머지 타자들은 전혀 이대호를 받쳐주지 못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이대호가 타점을 기록했을 때 30승 27패 2무지만 타점 0일 경우는 27승 50패 8무(...).
결국 2012년 보란듯이 '''6'''을 찍었다. 비밀번호 하나 더 추가. 그 와중에 이대호는 퍼시픽리그 타점왕 자리를 가져갔다(...). 팀 전체에서 유일한 타이틀 홀더다 이게(...). [73] 그리고 니시 유키는 시즌 최종전에서 호크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 경기[74] 를 펼쳐 위안거리 중 하나를 남겼다.
다만 이 때문에 이대호가 돋보이는 효과가 있었으니(...). 1년차 외국인이 유일하게 활약하다 보니 팬들 사이에서는 대박영입이라고 찬사를 받았다. 시즌 초기에는 이대호가 크게 부진하면서 실망하는 반응이 주류였으나, 빠른 적응과 함께 공격력이 폭발하기 시작하자 180도 달라진 반응을 보여줬다. 특히 이대호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의 나카무라 타케야와 시즌 막바지까지 홈런왕 경쟁을 해준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75]
4.2.2. 스토브 리그
프론트가 약을 빨았는지 스토브리그 기간동안 미친듯이 선수들을 빨아들여 이적시장 태풍의 핵이 되었다.
우선 10승 경험이 2번이나 있으나 감독과 사이가 틀어져서 2군에서 썩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토노 슌을 트레이드로 땡겨온 것으로 시작, 원 오릭스 소속이나 한신으로 간 뒤 포텐 터져서[76] 3할 3번찍고 각성한 히라노 케이이치도 FA로 계약하였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라, FA를 선언한 테라하라 하야토의 보상선수로, 11년까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절대적 마무리투수였던 마하라 타카히로를 공짜로 업어왔다(...).
그리고 스프링캠프 직전에 마지막으로 대박이 터졌는데, 현재 퍼시픽리그 최고 외야수라 여겨지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이토이 요시오까지 트레이드로 영입하였다. 주전급 4명, 그것도 리그 타이틀을 노려볼만한 영입을 4건이나 성공시켜서 무시못할 전력으로 발돋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문제는 이토이를 제외하고는 2012년 시즌에 다들 약간씩 하자가 있던 선수들이라 넷 다 잘 터지면 대박이지만 재수없으면 3명 정도는 밥값 못할지도 모른다는게 불안요소. 토노는 감독과 불화가 있기는 했지만 12년에는 1군 등판이 거의 없었고, 히라노는 커리어 로우를 찍었으며, 마하라는 1년내내 부상 + 2014년 FA취득(...). 사실 이토이도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리그에 보내달라고 니혼햄에 요구했다가 트레이드된 케이스[77] 라 언제 구단과 불화를 일으킬 지 모른다.
4.3. 2013년 시즌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이대호 앞뒤로 믿을 만한 선수들이 좀 들어섰지만 여전히 이대호가 공격의 핵인 건 부정 못 하는 상황. 개막 당시에는 리그 최강급의 타선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공인구의 변화로 인해 사전 예측만큼의 위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이토이나 이대호나 홈런을 양산하는 스타일이 아닌 중거리포이다 보니, 공인구가 바뀌었다고 홈런이 크게 늘어나고 그러지는 않는지라 다른 팀들이 오히려 덕을 크게 본 것. 그렇다 해도 이토이-이대호-발디리스로 이어지는 클린업은 기술과 힘을 겸비한 리그 최고의 타선이라는 평을 받지만 그 셋과 포수 이토를 제외한 나머지 쩌리들은 공인구가 바뀌었건 말건 여전히 땅을 파고 있는지라 팀 전체 타격성적으로는 오히려 파리그 최하위라는 웃지 못할 상황.
반면에 투수진은 시즌 전의 걱정이 그대로 터져서 12년에 그나마 밥값을 했던 기사누키 히로시의 대체자원으로 여겨지던 이가와나 토노는 1군에서 뛰기엔 부족한 투구내용을 보여주고 있,고 노히트노런으로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니시 유키는 부침이 심한 투구를 보여주고 있으며, 외국인 선수들은 내려갈 선수는 내려간다는 진리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중이라 믿을 수 있는 선수가 에이스인 가네코 치히로 딱 한명뿐이라는 안습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불펜도 시즌 초반에 선발 이상으로 불을 질러댔지만 리그 정상급의 마무리로 각성한 히라노 요시히사, 분전중인 2년차 신인 사토 타츠야, 시즌 초 전범랭킹 1위였다가 제 페이스를 찾은 히가나 베테랑 키시다 마모루등의 활약으로 안정화된 것만이 위안거리.
결국 작년과 마찬가지로 클린업이 터지지 않으면 패배하는 패턴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으며 승률 5할에 올라갈 듯 하면서 못 올라가고 주저앉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고토 와는 비교가 안 되는 이토이가 앞에서 받춰주고 있으며 그밖의 가용자원도 훨씬 늘어났고 불펜의 경우는 12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놀라운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기에 파리그의 평준화에 힘입어 A클래스는 충분히 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는 편이었으나...
'''결국 A클래스 진입에 실패했다'''. 경기가 순연돼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가 열릴때 라쿠텐과 3연전을 했다. 최종 성적은 144경기 66승 73패 5무(0.475)로 리그 5위를 차지하며 꼴지 탈출에는 성공. 팀의 주축이 다 털린 니혼햄이 대신 꼴지를 차지했다. 클린업 이토이 요시오[78] -이대호[79] -아롬 발디리스[80] 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나머지의 삽질로 팀타율 꼴지를 차지했고, 그와 반대로 팀 투수진은 3.31의 평균자책점으로 라쿠텐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결국 투타의 밸런스 붕괴가 A클래스 진입에 실패하게 한 원인. 에이스 가네코 치히로가 '''2.01(2위)'''의 평균자책점과 평균 7이닝(29경기 223⅓이닝)이 넘는 투구, '''200삼진(1위)''', '''10완투'''를 했음에도 안습한 타선 때문에 15승 밖에 거두지 못했고[81] , 유망주 니시 유키도 커리어 최초로 규정이닝 진입(166이닝 투구)에 성공하며 3.63(리그 9위)의 방어율을 기록했음에도 10승 달성에 실패[82] 했다. 외국인 투수 딕슨은 규정이닝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괜찮은 성적을 냈다. 셋업 사토 타츠야(1.75,41HP(1위))와 마무리 히라노 요시히사(1.87,31S(2위) 11HP)로 이어지는 라인도 좋았다.
오프시즌에는 클린업의 중추인 이대호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아롬 발디리스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 빼앗겼다. 그 공백을 매우기 위해 소프트뱅크에서 뛰던 파워히터 윌리 모 페냐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리드오프 역할을 하던 유틸리티 내야수 에스테반 헤르만을 영입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내야수 유니에스키 베탕코트도 영입했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수위타자를 차지한 경력이 있으나 젊은 선수들에 밀려 출장기회가 적었던 외야수 텟페이를 프랜차이즈 스타이던 고토 미츠타카와 맞바꿨다. 드래프트에서도 사회인 야구 최대어로 꼽히던 선수를 영입하는데 성공하는 등 나름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
4.4. 2014년 시즌
4월 6일 기준으로 윌리 모 페냐가 8경기동안 6개의 홈런을 치며 자신을 버린 소프트뱅크에 확실히 복수하고 있다. 팀도 5연승으로 1위를 달리며 쾌속의 스타트를 끊었다. 정작 소프트뱅크로 간 이대호는 안타는 괜찮게 치고 있지만 홈런을 치지는 못하고 있다. 투수진도 니시 유키 등이 대폭발. 3-4월동안 무섭게 달리면서 그 달의 퍼시픽 리그 월간 MVP 투수(니시 유키), 타자(윌리 모 페냐)부문 모두를 쓸어갔고, 과거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연상케 하는 반지원정대 급 라인업을 갖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수위 다툼을 하고 있는 중. 5월 17일 5시간에 걸친 수위공방전에서 12회말 이토의 희생플라이로 2-1로 승리, 수위를 따냈다.
그렇게 퍼시픽리그 1위인 상태로 교류전에 돌입했건만 주위의 시선은 여전히 촌놈마라톤 취급에 이제 슬슬 DTD가 오겠지(...) 하지만 그러한 주위의 시선을 비웃듯 교류전에서도 선전을 계속 했다. 결국 교류전도 3위로 무난하게 통과하고 수위의 자리를 지켜내면서 반환점을 통과했다. 여름 동안에는 호크스와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치열한 수위다툼을 전개할 듯이 보였다.
7월 10일 호크스와의 3회전중 트리플 플레이를 따냈는데, 심판진의 오심으로 무효처리 되었다.[83] 설상가상으로 7월 25~27일에 걸쳐서 벌어진 적지 후쿠오카에서의 소프트뱅크와의 맞대결 3연전에서는 칼을 갈며 벼르고 별렀던 소프트뱅크의 역습에 3연전 싹쓸이 패. 1.5게임차 뒤진 2위로 내려앉았다. 이전부터 0.650에 육박하던 승률을 조금씩 까먹으며 버텨왔지만 시즌 중후반 선두 경쟁을 하고 있는 팀과의 중요한 일전에서 거의 자동아웃 수준이던 상대팀 포수 호소카와에게 2경기나 결승타를 맞는 등 내용도 영 좋지 못한 상황. 그대로 내려가 버릴지, 혹은 극복할 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8월에 들어와서 호크스가 파죽의 9연승을 기록하면서 게임차가 벌어졌고 1위자리는 절망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8월 중순에 벌어진 위닝시리즈를 거둠과 동시에 호크스가 주춤하는 틈을 타서 다시 게임차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9월초에 후쿠오카 돔에서 벌어진 호크스와의 맞대결 3연전에서 1무 2패의 루징시리즈를 거두면서 완전히 끝났나 했는데, 그 이후에 호크스가 주춤하면서 다시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9월 중순에 홈에서 벌어진 3연전에서 2승1패로 깔끔하게 되갚아줌으로써 다시 한번 1위 탈환의 가능성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이 3연전의 두번째 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2008년 이후 '''6년만에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게다가 2위임에도 불구하고 1위인 호크스보다 5경기가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2위팀 인데도 매직넘버가 들어오는 기괴한 상황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소프트뱅크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패하면서 결국 우승은 실패. 그리고 6년만에 올라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3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1승 2패로 밀리면서 광탈하고 말았다'''[84] . 시즌 최종성적이 호크스와 게임차 없이 무승부 숫자에서 비롯된 승률차이로 2위였던 만큼 오래간만에 좋은 성적을 낸 오릭스로서는 천추의 한으로 남을 시즌이 되고 말았다.
2013년 시즌을 정리하자면 2012년의 막강 투수진에 업그레이드 된 타선이 힘을 보태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돌풍을 일으킨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에이스 카네코 치히로는 트리플 크라운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며 만장일치로 사와무라상을 수상했으며 , 니시 유키와 외국인 투수 딕슨도 규정이닝 달성 + 3점대 방어율로 선발진을 잘 지켰다. 사토 타츠야(홀드 포인트 1위, 홀드 3위)와 히라노 요시히사(세이브 1위)를 필두로, 히가 모토키, 키시다 마모루 등이 가세한 불펜진은 리그 최상급의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타자진은 리그 2위로 작년의 클린업만 야구하는 타선에서 확실히 탈피했다. 이토이는 타격왕을 차지했고, 윌리 모 페냐는 홈런 3위로 이대호의 확실한 대체재 역할을 수행해주었다. 거기에 T-오카다가 23홈런으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나머지 선수들도 리그 평균급의 타격을 해주며 밸런스 패치가 적절하게 이뤄진 모습을 보였다.
4.5. 2015년 시즌
1게임만 더 이겼어도 1996년이후 18년만의 우승을 차지할수 있었던 아쉬움을 뒤로하고 2014 시즌의 성과에 고무된 구단은 2015년 시즌 본격적으로 19년만의 우승을 목표로 삼고 과감한 보강에 나섰다. 특히 2015년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는 해라, 당시 고베를 본거지로 삼고 있었던 팀으로서는 더 각별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도 돈 쓰는 규모는 적지 않은 구단이었으나 예년과는 달리 FA시장에서 알짜 FA를 줄줄이 낚으면서 12개 구단 중에서 오프시즌에 가장 전력보강이 충실한 팀으로 평가 되었다. FA 시장에서 팀내 FA인 에이스 가네코 치히로를 잔류시키고, 히로시마와 계약이 만료된 외국인 투수 브라이언 벌링턴을 영입했다. 거포였던 윌리 모 페냐와 재계약을 포기하고 요코하마 DeNA에서 계약만료된 토니 블랑코를 영입했다. 또한 충실한 투수력을 보강할 야수진의 보강에 힘을 쏟아서 타팀 출신 FA에서도 닛폰햄에서 FA를 선언한 고야노 에이이치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로 복귀하는 나카지마 히로유키의 영입에 성공하였다. 특히 가네코, 고야노, 나카지마는 지역 라이벌인 한신 타이거스도 눈독을 들이던 선수들로, 한신과의 영입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인기는 처질지언정 금융업으로 다져진 현질 능력만큼은 결코 한신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과시했다.
그러나 현실은 개막 4연패, 그 후 1승을 찍더니 다시 4연패를 하는 등 초장부터 영 좋지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6월이 되기도 전에 승패마진 -15를 찍는 역대급 막장 시즌을 치르는 중.
리그를 씹어먹는 포스를 보였던 카네코 치히로가 부상으로 개막부터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 딕슨이 리그 MVP급 포스를 보여주고 니시도 작년을 능가하는 성적을 찍고 있으며 토메이가 신인 2년차 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투구를 보여주면서 선발진은 선방하긴 했는데, 작년의 팀을 떠받쳤던 주축 불펜들인 히라노(5.40, 5월31일 시점) 사토(4.35, 5월31일 시점), 키시다(5.63, 5월 31일 시점), 히가(부상으로 등판없음)가 전부 나가 떨어졌다. 5월말 시점의 팀 성적 '''34패중 19패가 역전패'''라는 사실이 이 팀의 안습한 불팬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팀 타격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로, 중심에서 타선을 이끌던 이토이가 극도의 부진에 빠지고 그나마 공갈포라도 쳐 주던 페냐가 나가면서 데려온 블랑코는부상, 부진에 시달렸고 팀은 암흑기 포스를 풍기고 있다. 거액을 투자한 마이너에서 돌아온 나카지마의 성적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나마 새얼굴인 신인왕 경쟁 대열의 루키 니시노 마사히로와 고작 2500만엔 연봉의 독립리그 출신 카라바이요가 체면치레를 해 주고 있는 정도이지만, 둘 다 사실상 신인이기에 언제 하락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더욱 암울.
결국 6월 2일, 모리와키 히로시 감독이 사실상 사퇴하면서 후쿠라 준이치 수석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마무리할 공산이 커졌다.
그래도 교류전에서 한신 타이거스를 자기 홈에서 3연승 스윕하며 체면치레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적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8월에는 어느 정도 승을 먹으며 5위 라쿠텐에 1경기 차까지 따라붙어 탈꼴을 향한 희망고문 모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찌감치 선두 소뱅과는 27.5게임차라는 까마득한 수준의 승차가 생기며 사실상 우승 트래직 넘버는 소멸. 3위 세이부와는 8게임차, 4위 지바롯데와는 7.5게임차라는 초월적인 수치라 따라잡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9월 15일,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제치고 꼴찌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10월 1일 기준으로 오릭스의 잔여 경기는 2경기에 불과하지만, 라쿠텐은 무려 6경기여서 이 순위도 지킬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하지만 감독의 사임 발표 등으로 팀 분위가 와해된 라쿠텐이 시즌 막판 무기력하게 무너지면서 최하위 탈출에는 성공했다.
4.6. 2016년 시즌
원정 유니폼을 회색에서 남색으로 바꾸었다. 과거 블루웨이브 시절 쓰던 남색의 부활이긴 한데, 사실 블루웨이브 시절의 푸른색에 가깝던 남색보단 현재 쓰는 팀컬러이자 킨테츠의 말기 팀컬러와 비슷한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이다.
개막 후 13경기가 지난 4월 12일 현재까지 '''팀 홈런이 단 1개도 없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개막 후 무홈런 기록[85] , 팀 득점과 실점 모두에서 영예로운 리그 꼴찌이며, 당연히 퍼시픽리그 꼴찌를 순항중이다.(...) 14경기만에 이토이 요시오가 홈런을 기록하였고 꽤 긴 시간동안 라쿠텐과 함께 팀 홈런이 한자릿수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5월 초에 뜬금없는 분전과 세이부, 라쿠텐 두 팀의 거한 삽질로 한 때 순위를 4위까지 끌어올리면서 탈꼴찌의 희망을 가지는 듯 했으나 교류전이 시작되면서 도로아미타불...
5월 24일 릭 밴덴헐크가 선발등판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NPB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22 : 6'''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로 떡실신을 당했다(...). 주자 만루에서 '''4볼넷으로 밀어내기 4점'''이라는 진귀한 기록을 남겼다.
6월 19일 기준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함께 교류전 최하위권에 머물러있다. 교류전 때만 되면 오릭스도 중박은 친다는 이야기도 올 시즌에는 할 수 없게 되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3연전에서 스즈키 세이야의 2경기 연속 끝내기 홈런, 3경기 연속 결승타라는 하드캐리로 3경기를 모두 '''역전패'''로 내 준 것이 뼈아팠다. 우천순연된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를 승리해도 공동 최하위, 지면 단독 꼴찌가 된다. 6/20(월) 한신과의 원정경기에서 패하면서 5승 13패를 기록하며 교류전을 최하위로 마감했다.
팀은 여전히 못나가는 가운데 일본의 마일리지 포인트 카드인 폰타와의 홍보활동 제휴로 폰타의 마스코트인 너구리 폰타의 트위터 계정을 통한 버팔로즈 응원 기획이 시작되었는데 경기 시작 전에 업로드 되는 일러스트에 나오는 폰타의 희망찬 표정과 패배한 경기 후에 업로드 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짠한 표정의 폰타가 네티즌들의 묘한 동정과 공감을 얻으면서 컬트적인 인기만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무려 15만이 넘는 팔로워를 기록하면서 불과 2개월 반만에 본진인 폰타의 트위터 계정의 팔로워수를 뛰어 넘어버렸다.#
홈이 돔구장인데도 여기저기서 우천취소를 많이 겪어서 치른 경기가 다른 팀에 비해 5~6경기 적은 상황이다. 퍼시픽리그에 돔을 쓰는 팀이 4개나 있는데...여러모로 묘한 시즌이 되고 있다.
전반기가 끝난 시점에서 1위 소뱅과 25경기 차, 3위 지바 롯데와 15경기 차의 최하위를 기록중이었으나, 후반기 들어서 5위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엄청난 추락을 하게 되면서 5위와의 경기차이가 많이 좁혀졌다. 7월 31일에 세이부와의 3연전에서 위닝시리즈를 기록, 세이부와의 경기차이는 0.5경기차밖에 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세이부가 8월 첫 3연전에서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스윕을 당해준 덕분에 최하위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금방 다시 최하위로 굴러떨어졌다. 의외로 시즌 막판 1위 감별사 노릇을 했는데, 소프트뱅크에게 스윕을 거두거나 위닝을 하면서 닛폰햄의 극적인 역전우승에 일등공신이 되...는듯 하다가, 그 닛폰햄 또한 9월 14~15일 2연전에서 잡으면서 2위로 내려 앉혔다. 특히 14일엔 닛폰햄 오타니 쇼헤이의 일본 구속 최고기록인 164km 직구를 이토이가 멋지게 받아쳐서 2타점 적시타를 만들어 내는 명장면까지 만들었다. 1위를 하고 싶다면 오릭스부터 잘 잡도록 하자...
결국 최하위, 그것도 NPB 팀들 중 승률이 가장 낮은 팀이 되고 말았다. 이쯤되면 누가 감독을 맡든 답이 없을지도...그리고 2016년 시즌 종료를 기준으로 양대 리그 12구단 중 유일하게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를 진출한 적이 없는 유일한 팀이 되었다.[86] 거기다 히로시마가 DeNA를 누르고 올라가며 일본시리즈 올라간 지 가장 오래된 구단도 가져갔다.[87]
다만 두 가지 긍정적인 점이 있다면 이토이 요시오가 '''역대 최고령 도루왕'''에 오른 것과 '''무려 NPB 사상 최초의 무포일(!!!) 시즌'''을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라나?
4.7. 2017년 시즌
시즌 전 후쿠라 준이치 감독이 실책을 범한 선수에게 점심도 안 주고 훈련을 시키고, 체중이 증가한 선수를 2군으로 내려보내는 등 지옥훈련을 시켰다.
개막 3연전, 전년도에 꼴찌자리를 놓고 다투던 라쿠텐과의 홈 3연전을 무난하게 스윕을 당하면서 올해도 "그러면 그렇지"의 상황이 반복되는 듯이 보였다. 세이부와의 2연전을 스윕할 때만 해도 하위권 팀끼리의 도토리 키재기 정도로 보였으나...이어진 일본시리즈 우승팀 닛폰햄과의 3연전을 싹쓸이하면서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어진 롯데와의 경기도 11대 1로 대승을 거두면서 개막 3연패 후 '''6연승을 질주'''. 6승 3패로 소프트뱅크를 제치고 2위로 치고 나갔다. 2014년 2위 이후 이름값 뿐이던 막강 선발진이 모처럼 제몫을 하는 가운데 과연 이 기세가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날지 더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할 듯.
그리고 그 기세가 4월 한달 내내 이어지면서 라쿠텐과 더불어 퍼시픽 리그의 판도에 대이변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작년에 4위에 그쳤던 세이부까지 3위에 오르는 등 지난 해 B클래스 세 팀이 나란히 A클래스 자리를 차지하면서 상전벽해의 양상을 일으키고 있다. 4월말 현재 15승 7패, 승률 .682. 한달 내내 위닝시리즈의 페이스를 보이면서 수위 라쿠텐 을 1경기 차로 쫓는 2위에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러나 선두 등극의 호기로 여겼던 선두 라쿠텐과의 센다이 3연전에서 1차전을 승리한 보람도 없이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면서 불길한 출발을 보이더니 5월 5일 니혼햄에게 패하며 3위로 추락했고, 이 후 DTD의 늪에 빠져 5월 한 달 동안 8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 결국 5월 26일 롯데에게 패하면서 5위까지 추락하고야 말았다(...). 5월 들어 4연패, 5연패, 6연패를 한번씩 하면서 교류전 들어가기 직전인 5월 28일까지 월간 성적 4승 18패.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안했던 꼴찌가 이제는 가시권이다(...).
그런데 교류전 첫 주에 야쿠르트와 요미우리를 차례대로 스윕하며 6월 3일까지 '''교류전 전승'''을 질주했다. 7연승도 덤으로 따라오면서 닛폰햄을 제치고 다시 4위로 부상했다. 승수로만 따지면 교류전 시작한지 일주일만에 이미 전년도의 승수를 뛰어 넘었으며 교류전 전반에만 7승 2패로 선전했다. 다만 지역 라이벌 한신 타이거스에게 1승 2패로 루징시리즈를 기록한 것이 흠. 그러나 그 후에 주니치에게 연승을 거두며 9승2패로 교류전 단독 선두까지 치고 나갔다. 그렇게 교류전에서 잘나가면서 회복하나 싶더니 이내 '''교류전에서도 DTD를 시전'''. 교류전 막판에 6연패를 하면서 순식간에 9승 8패로 초반의 선전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교류전 마지막 디엔에이와의 경기를 잡아서 10승 8패로 교류전을 마쳤으나 교류전에서도 어중간한 성적에 머무르면서[88] 반등의 기회를 잡지 못한채 다시 퍼시픽리그 팀들과의 대결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6월 26일 라쿠텐전에서 4-4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자력 우승 가능성이 소멸되었다(...) .
현재까지의 행보를 보면 후쿠라 감독의 평판은 상당히 나쁜 편이다. 1이닝에 번트 두 개를 쓰는 등 아웃카운트를 늘려가며 툭하면 번트작전을 찾고 선수기용 및 배치도 돌대가리로 할 뿐더러, 7월 25일 세이부에게 시즌 2호 8연패를 당하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드립을 치면서 실패를 남의 일 같이 이야기하는 등 입만 산 감독이라는 평. 실제로 사토자키 토모야 TV 아사히 해설위원도 "번트 쓰기 전에 성공시키기 위한 포석 잘 뒀는지 생각하고 써라"라고 하고 코마다 노리히로 TBS라디오 해설위원도 후쿠라의 선수기용을 돌려깔 정도로 해설자들 사이에서도 후쿠라식 야구에 대한 악평이 절로 나오고 있다.[89]
그 이후로는 거의 완전히 '''4위자리에 고정'''. 위로 치고 올라가기도 힘들고 밑으로 내려가기도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다. 3위 세이부와는 무려 15게임차가 나는데다 후반기 들어와서 세이부의 상승세가 범상치 않아서 3위와 4위의 사이에 넘사벽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5위 닛폰햄과는 8.5게임 차이인데 이쪽도 닛폰햄이 그다지 상승요인이 없는 상황이라 지금까지 하던 만큼만 하면 내려갈 일도 없는 상황. 나홀로 4위자리에서 외로운 레이스를 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제 유일한 볼거리는 세이부와 라쿠텐 사이의 2, 3위 다툼에 얼마나 고춧가루를 뿌릴 수 있을지 정도?
결국 9월 24일 세이부 전에서의 패배로 3년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되었다.
9월 29일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경기에서 외국인 타자 크리스 마레로가 NPB 통산 10만번째 홈런포를 때려냈다.[90]
정규시즌 종료 후, 미야우치 요시히코 오너가 시즌 종료 보고에서 후쿠라 감독에게 팀의 기동력이 약하다, 연습 더 해라라는 쓴소리를 했다. 그 와중에 10월 10일 스즈키 이치로 일본 복귀시 오릭스 말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발언을 했고 오릭스 팬들에게 선수보강, 투자나 하라는 말을 들은 건 덤.
옆리그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가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센트럴리그 사상 초유의 3위 팀의 일본시리즈 진출이란 대기록을 쓰면서 일본시리즈에 마지막으로 진출한지 가장 오래된 팀으로 남아버렸다.
4.8. 2018년 시즌
시즌 후 오랫동안 마무리 자리를 지켜온 히라노 요시히사가 FA를 선언하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떠났다. 팀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상하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FA를 선언한 마스이 히로토시를 영입하여 미리 히라노의 빈 자리를 메워놨다.
매년 돈을 뿌려가며 화려하게 전력보강을 해 오던 지난 세월과는 달리 특별한 전력보강은 없었는데 의외로 '''시즌 전 예상은 나쁘지 않다.''' 마스이 히로토시의 영입은 히라노 요시히사의 빈 자리를 메우는 정도라 특별히 보강이라고는 할 수 없고 현상을 유지한 수준이지만 소프트뱅크를 제외한 퍼시픽 리그의 다른 4팀의 사정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탓이 큰데 일단 전년도 2위를 한 세이부는 2년전의 기시에 이어 불펜의 축이던 마키타 가즈히사와 10승투수 노가미 료마를 FA로 유출한 채로 특별한 보강이 없어 투수력이 그 무시무시한 공격력으로도 메우기가 버겁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눈에 띄게 얇아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다. 3위인 라쿠텐은 선발투수는 소프트뱅크보다 강력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으나 타격 면에서 안정감이 떨어지는 용병 3명에게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점과 고질적인 백짓장 전력으로 주력중에 부상선수가 1, 2명만 나오면 팀이 급속하게 DTD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지적된다. 닛폰햄은 오타니가 빠져나간 전력과 키요미야 코타로와 나카타 쇼의 포지션 정리 문제부터 해결해야 될 상황에 주전 마무리도 오릭스에게 뺏겼고 전년도 최하위였던 롯데는 눈에 띄는 전력보강은 없는 채로 감독경험이 전무한 초짜를 감독자리에 앉혀서 선수가 아니라 감독부터 육성을 해야할 판(...)이다. 그에 비해 오릭스는 전년도 시즌 후반기부터 선발투수진들이 서서히 이름값을 하기 시작했고, 포수자리에 이토 히카루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주포인 T-오카다가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시즌 도중에 뽑은 크리스 마레로가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일본야구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자리를 잡은지라 몇몇 부분에 취약점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최근 몇년간에 비하면 할만 하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프트뱅크를 제치기는 어렵겠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은 꽤 가능성이 있고 잘 하면 2위까지도 노려볼 만하다는 희망섞인 관측이 꽤 많다.
그리고 맞이한 시즌 개막전의 상대는 전년도 우승팀인 소프트뱅크였다.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의 중책을 맡은 니시 유키가 소프트뱅크 타선을 상대로 7 ⅓이닝 2실점으로 역투했음에도 불구 타선이 센가 코다이 - 이와사키 쇼 - 데니스 사파테로 이어지는 상대팀의 필승 릴레이에 단 27명의 타자로 영봉패(안타를 치고 나가서 병살로 이닝이 마무리 된 회가 있기 때문에 퍼펙트나 노히터는 아니다.)하면서 2018시즌도 패전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8회 들어와서 투구수가 120구에 육박하면서 구위가 떨어져가고 1사 만루의 위기상황에 몰렸음에도 구시대적 선발완투를 고집한 무능한 감독의 똥고집 때문에 니시는 잘 던지고도 패전투수가 됐다. 물론 이날 타선 하는 거 봐서는 잘해봐야 노디시전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로써 오릭스는 개막전 7연패.
4월 17일 치바 롯데를 상대로 5:3 패배했다. 가네코는 최고구속 140km 언저리에서 직구로 꾸역꾸역 막았지만 5회 수비 실책과 폭투가 겹치며 3실점 해버리고 말았다. 6회 4번타자 로메로의 뜬금포로 3:3 동점을 만들었지만 불펜 방화로 7회 2실점 하고만다. 타선은 9안타를 치긴 했지만 무네, 아다치가 8타수 1안타로 꽉 막혔고, 하위타선에선 T-오카다, 이토가 무안타로 침묵했다. 특히 이토는 번트 병살로 뼈아픈 실책을 하고 말았다.
4월 18일 치바 롯데를 상대로 4;3 진땀승을 거뒀다. 4회까지 서로 무득점으로 치고받다 선발 투수인 앤드류 앨버스(전 한화)가 첫 타자를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흐름이 조금식 바뀌기 시작했다. 다음 타자인 나카무라 쇼고가 11구까지 가는 승부끝에 땅볼로 아웃을 잡았지만 4번타자 이노우에 세이야한테 안타를 맞고 1, 3루가 되고만다. 5번 타자인 스즈키 다이치를 실점없이 땅볼로 잡았지만 다음타자인 기요타 이쿠히로한테 적시타를 허용하고만다. 다행이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1실점으로 4회를 종료했다. 이후 6회 1아웃에서 아다치가 안타로 출루하고 와카츠키 켄야 타석에 대타 T-오카다가 안타를 때려 1사 1-3루를 만들었다. 1번 타자 무네 유마가 오랜만에 적시타로 동점이 됐고, 요시다 마사타카도 안타로 나가면서 1사 만루가됐다. 4번 타자 로메로가 풀카운트 승부끝에 볼넷으로 역전했고 다음타자 마레로가 2타점 적시타를 올려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왔다. 8회 신인투수 쿠로키 유타가 흔들려 2실점했지만 역전은 당하지 않았고 니폰햄에서 온 마스이 히로토시가 아슬아슬하게 세이브를 따냈다.
이후 꾸준히 5할 아래를 밑돌며 5위 자리로 그냥 여느해처럼 시즌이 흘러갈 분위기였으나, 세이부의 상승세가 잠잠한 사이 승률을 끌어 올리면서 5할을 넘기고 1위와 5게임, 3위와는 1.5게임차의 4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교류전에서 소프트뱅크가 야쿠르트, 주니치에게 4연패를 당하고, 21세기 최악의 시즌을 맡은 거인에게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면서 교류전 도입 이래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사이 히로시마와의 3연전을 독식하는 등 야금야금 승수를 쌓아 6월 14일 자로 3위까지 올라갔다. 신흥 중심타자 요시다 마사타카가 세리그 투수진을 맹폭하며 교류전 MVP에 올랐고, 한화 이글스 출신 외국인 투수인 앤드류 앨버스가 실질적인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올스타전에도 감독 추천으로 뽑힐 정도의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에 고무되었는지 오릭스는 시즌 도중 선발 요원 보충을 위해 또다른 KBO 약팀 kt wiz 출신 투수인 돈 로치를 영입하기도 했다. 위의 몇 문단에 언급된 이토 히카루는 완전히 수뇌부의 신뢰를 잃어 역시 포수난에 시달리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로 투수 아카마 켄과 함께 트레이드되었다. 오릭스는 그 대가로 4살 어린 포수 타카조 슈토와 내야수 시라사키 히로유키를 받았다.
하지만 7월에 6승 13패 1무로 DTD한 결과 8월 초에는 5위까지 떨어졌고, 그 사이 A클래스 구단들인 세이부-닛폰햄-소프트뱅크(+롯데)가 분전하며 게임차가 더욱 벌어졌다. 게다가 꼴찌 라쿠텐이 나시다 마사타카 감독 사임 이후 히라이시 요스케 감독대행 체제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 순식간에 꼴찌와의 게임차가 2게임 차까지 좁혀졌다. 올해도 A클래스는 멀어지는 듯한 분위기.
결국 또 B클래스가 확정되었고 10월 5일 시즌 최종전인 소프트뱅크전을 패했으나 롯데가 잔여경기 전승을 거둬도 승률을 뛰어넘을 수 없게 되어 시즌 4위가 확정되었다. 아울러 2018시즌 12개 구단 중 가장 빨리 일정을 소화했다. 10월 5일 최종전 이후 니시무라 노리후미[91] 에게 1군 지휘봉을 맡길 것으로 보인다. 다구치 소 2군 감독의 1군 감독 승격도 검토되었으나 경영진의 구상에 니시무라가 더 맞다고 판단한 것 같다.
맨 위의 요약에도 나와있듯 양대리그 최저 평균자책점(3.69), 최소 실점(565)의 우수한 투수력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공격력으로 인해 망한 시즌. 선발진은 니시 유키와 야마오카 다이스케 외에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가 없지만 가네코, 앨버스, 딕슨 등이 부상으로 가동이 제한되기는 했어도 일단 나와주면 준수한 투구를 펼쳤고, 신인 좌완 타지마 다이키도 스팟 선발로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불펜진은 야마모토 요시노부라는 우수한 영건이 등장하고 클로저 마스이 히로토시, 콘도 다이스케, 사와다 케이스케, 요시다 카즈마사 등이 활약해 다른 상위권 구단들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퀄리티를 보여줬다. 하지만 상술했듯 이 팀이 망한 이유는 빈곤한 득점력. 점수를 내야지 불펜이 걸어잠그든 말든 하지...팀 득점력은 퍼시픽리그 4위인 538점으로[92] 그 투수력을 가지고도 득실차 -를 찍었다. 요시다 마사타카가 대망의 첫 풀타임 시즌을 보내며 3할 20홈런으로 분전했지만 T-오카다가 극도의 부진에 빠지고 작년 후반기 좋은 모습을 보인 로메로-머레로의 우타 외국인 듀오도 공갈포의 모습만 보였으며 그나마 후쿠다 슈헤이나 니시노 마사히로, 오다 유야가 똑딱이 노릇이라도 해준 것을 빼면 죄다 멘도사 라인들 뿐인 물빠따 팀이었다. 주전 유격수 아다치 료이치는 퍼시픽리그 규정타석 만족 타자 중 최저타율(.219)을 기록했을 정도. 아다치의 경우 선수 본인이 못 친것도 있지만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만성 질환이 있어 절대적인 체력관리가 필요한 선수를 대체자원도 없이 굴린 후쿠라 준이치 감독의 무능한 기용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2018시즌 이 팀의 문제를 집약해놓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4.9. 2019년 시즌
2014년 반짝 2위 이후 4년 연속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둔 것을 반영한듯 우승을 노리고 2015시즌 전에 FA로 영입했던 고야노 에이이치와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숙청했다. 고야노는 은퇴를 선택하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코치로 부임했으며 나카지마는 방출 후에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부름을 받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고야노, 나카지마와 더불어 FA 잔류를 통해서 붙잡았던 가네코 치히로에게는 한도폭을 넘는 80%가 삭감된 연봉 1억엔을 통보했으며 이에 반발한 가네코는 규정에 따라 자유계약 선수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에 대해서 구단 측의 대응도 매우 강경해서 제시한 액수보다 더 주는 구단이 있으면 가되 만약 아무데도 받아주는 데가 없어서 다시 돌아올 경우에는 연봉을 더 후려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아 구단과 가네코와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지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그동안 2~4선발 자리를 오가면서 꾸준하게 로테이션을 지켜온 니시 유키가 FA 자격을 취득하여 2018년 시즌 종료 후 시장에 나섰다. 마침 이번 FA 시장에는 쓸만한 선발투수가 나오지 않아서 경쟁자가 없는데다 17년만의 최하위로 절치부심하고 있는 한신 타이거스와 선발진을 보강하고 싶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 이른바 큰 손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몸값이 폭등 중이다. 이에 따라 니시마저 팀을 떠날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고 가네코와 니시의 빈 자리를 채울만한 뾰족한 수도 없는 상황이라 2019년 시즌은 가시밭길이 예고되고 있다. 결국 가네코는 닛폰햄으로 니시는 예상대로 한신으로 이적하면서 매년 250~300이닝을 책임져주던 이닝이터 둘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 그 와중에 선발투수 보강한다고 완전히 퇴물 다 된 나루세 요시히사(...)를 입단 테스트 끝에 데려왔다. 근데 그 나루세는 부상으로 나가리...
개막 3연전에서 1무 2패를 기록한 후 4월 2일 경기마저 패하는 바람에 1무 3패로 파리그 최하위다. 더불어 2019 시즌에 12구단 중 아직도 승리 못 해본 팀이다(...). 4월 3일 경기에서는 상대팀인 소뱅의 타선을 '''12이닝동안 1피안타'''로 묶어놓고도 0 대 0 무승부를 기록하며 '''못 이겼다.'''(...). 결국 다음날 경기도 0대3으로 패하면서 25이닝 연속 무득점 기록과 함께 2시리즈 연속 똑같은 패턴으로 2무4패. 개막 이후 6경기동안 한 경기도 못이기며 최후의 0승클럽 멤버로 남았다. 이어진 4월 5일 경기에서 라쿠텐에게 2대0으로 간신히 승리하면서 개막 7경기만에 첫 승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한가지 위안거리라면 선발 로테이션의 두 축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 치고는 투수진은 그렇게 나빠보이지는 않은 점. 작년 셋업맨으로 호투한 뒤 올 시즌부터 선발 전향한 야마모토 요시노부와 역시 올해부터 로테이션에 합류한 사카키바라 츠바사의 스무살 영건 듀오가 1점대 ERA로 선발진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타선의 중심인 요시다 마사타카가 1할대도 기록하지 못하는 예상외의부진을 보이는 등 타선이 기껏 호투하는 투수진을 도와주지 못한 게 초반 부진의 원인이다.
이 뒤로도 별 특징 없이 무난히 지는 생활을 반복한 결과, 1위부터 4위까지 반게임차씩 떨어져 있고 5위(1위와 3게임차)도 승부 여하에 따라서 선두싸움에 들어갈 수 있는 대혼전 상태의 파리그에서 혼자 6게임차 6위를 기록하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그러다 1위와 1게임차 4위였던(...) 닛폰햄을 만나 스윕을 당하면서 닛폰햄을 2위까지 들어올려주고, 본인은 1위와 8.5게임차까지 벌어지면서, 5위 지바롯데가 1위와 3.5게임차인 마당에 역시 홀로 선두싸움은 남의 집 일인 것처럼 지내고 있다. 남들 다 25승 넘길 때 혼자 20승도 못 한건 덤.
그리고 교류전에 돌입하는데, 첫 상대는 역시 상태 안 좋은 요코하마. 1패[93] 뒤 2연승으로 교류전 스타트를 끊었다.[94] 이후 치러진 경기에서 그럭저럭 선방하며 6월 19일 기준으로 교류전 전적이 7승 1무 5패로 5할 이상을 찍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바 롯데를 제외한 다른 퍼시픽 팀들도 선전중이고 교류전 돌입전에 워낙 깎아먹은게 많은터라 순위는 여전히 6위를 유지하고 있다...
거기다 가뜩이나 포수 뎁스가 형편없는 판인데 백업 포수였던 후시미 토라이 선수가 6월 18일 요미우리전에서 정말 허무하게도 스윙을 하다가 아킬레스 건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했다. 이에 후쿠라 GM은 포수를 트레이드로 영입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팀 포수진의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
이후 교류전 마지막 시리즈인 히로시마전을 모두 쓸어담으며 교류전 10승을 돌파했다. 특히 6월 23일 치러진 히로시마와의 3차전에선 9회까지 0:0의 균형을 유지하다가 연장 10회초 공격에서 '''한 이닝 3루타 4개를 때려내 NPB 기록을 경신하며''' 10회초에만 대거 9득점에 성공. 9:3 승리를 거두었다. 이날 승리로 교류전 10승을 달성한건 덤. 다음날 치러진 야쿠르트와의 교류전 잔여경기도 6:2로 승리하며 최종 전적은 11승 1무 6패. 교류전 순위는 2위로 마무리하였다. 교류전에서 상당한 호성적을 거두었음에도 퍼시픽리그 순위는 여전히 꼴찌지만 5위인 지바 롯데가 교류전에서 적자를 기록한 덕분에 교류전 시작전 꽤나 벌어져 있던 5위와의 승차를 1.5게임차로 좁히며 탈꼴찌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6월 30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2대 2 트레이드로 왼손투수 마츠바 타카히로, 외야수 타케다 켄고를 보내고 포수 마쓰이 마사토, 외야수 마쓰이 유스케를 받았다. 상술한 포수진 뎁스를 채우기 위한 트레이드. 같은 날 주니치의 외국인 외야수 스티븐 모야의 현금 트레이드도 발표되었다. 모야는 장신의 거포 외야수로 준수한 타격을 보여주었지만 야수진의 비시에도와 알몬테, 투수진의 주축 계투 로드리게스와 습자지같은 로테이션을 때우는 데 쓰일 선발 요원들 때문에 자리가 없던 탓에 외국인 타자들이 부진한 오릭스에서 출장기회를 받게 되었다. 현 오릭스 버팔로즈의 전신 중 하나인 긴테쓰 버팔로즈의 레전드 용병타자이던 랄프 브라이언트와 거의 같은 커리어 패스를 밟은 탓에 브라이언트의 재래를 바라는 팬들이 생기기도 했다.
7월 31일 현재 5위 롯데와 4게임차로 여전히 최하위다. 교류전 효과로 한때 탈꼴찌를 바라봤지만 결국 꼴찌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포수 뎁스 보강을 목적으로, 팀 타선 강화를 목적으로 트레이드를 진행하며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 투수진은 야마모토 요시노부-야마오카 다이스케-사카키바라 츠바사의 영건 트리오가 선발진의 중심을 잡고 요시다 마사타카도 초반 슬럼프에서 벗어나 리그 최강 타자 반열에 올랐으며 오오시로 코지나 후쿠다 슈헤이같은 젊은 똑딱이 내야수들이 괜찮은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전력의 나머지 부분에서 특별히 반등할만한 요소도 보이지 않기에 이대로라면 2016년 이후 3년만의 꼴찌가 유력해보인다.
그런데 공갈포 짓만 하던 외국인 타자 로메로가 8월 타율 .385 7홈런 23타점의 쾌조를 보이며 타선을 캐리했고, 잘 나가는가 싶던 닛폰햄이 워낙 급속히 추락하면서 탈꼴찌의 길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8월 29일 기준 5위 닛폰햄과 1경기차. 그리고 8월 마지막 시리즈에서 지바롯데에 위닝시리즈를 거두고, 닛폰햄이 라쿠텐에 스윕을 당하면서 탈꼴찌에 성공한다.
'''그러나… ''' 9월 3일부터 충격의 '''9연패'''를 당하며 다시 꼴찌행. 하필 닛폰햄에게도 스윕을 당해 탈꼴찌의 꿈은 다시 멀어졌다. 이제까지 그래도 버텨주었던 투수진이 터져버린 것이 원인. 결국 2016시즌 이후로 다시 꼴찌를 확정지었다. 1년 더 하위권으로 끝낸다면 또다시 비밀번호에 묶이게 된다. 이런 저조한 성적과 별개로 관중 동원력은 대폭 상승해서 경기당 평균 관객은 전년 대비 8.2% 증가를 기록했으며, 증가율로는 12개 구단 중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에 이은 2위이다.
4.10. 2020년 시즌
머레로, 로메로 등 17년에 2년 계약을 맺었으나 실망스러운 성적을 낸 외국인 타자들과 결별하고, 그 대안으로 오프시즌에 한때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심장이었던 외야수 애덤 존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 AAA리거 아델린 로드리게스 [95] 를 데려왔다. 로메로는 구단과의 연봉 협상에 실패해 구단과 결별하게 된 것이다. 로메로 본인이 직접 협상한 것이 아닌 대리인이 구단과 연봉 협상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무엇보다 로메로 본인은 오릭스에 남고자 했던 의지가 있었다. 이후 로메로는 외국인 타자 뎁스를 강화하고자 하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엄청나게 삭감된 연봉으로 입단해 일본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96][97]
홈에서 열린 6월 19일 라쿠텐과의 개막전에서 작년 승률왕 야마오카 타이스케가 선발로 등판해 7이닝 5K 1실점(1자책점)으로 호투했으나 뒤를 이은 불펜진이 8회에만 8실점을 하는 불꽃놀이를 시전하며 9:1로 패배했다. 다음날에는 10이닝동안 11안타를 치고도 1점밖에 못 내는 변비야구의 진수를 보여준 끝에 연장 10이닝에 2:1로 패배. 그나마 개막 3연전의 마지막인 일요일 경기에서 에이스 야마모토 요시노부가 8이닝 무실점에 10탈삼진을 솎아내고 타선도 1번타자로 출장한 T-오카다가 2루타 2방 포함 3안타 4출루 2타점 경기를 치뤄내는 활약을 보여주며 4:0 승리를 일궈내 시리즈 피스윕을 면했다.
23~28일 치바 롯데와 원정 6연전을 벌였는데, 무려 6연전을 스윕당하며[98] 급격히 최하위로 추락당했고, 롯데는 오릭스를 6연전을 쓸어담고 1위로 뛰어올랐다.[99] 한화마냥 실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대량실점으로 지는 것도 아닌데 6연전 중 4시합이 1점차, 1시합이 2점차로 운 자체가 더럽게 안 따를 뿐더러 접전 상황에서의 집중력 부족도 여실히 드러났다. 루상에서 허무하게 비명횡사를 한다던가, 3루에서 홈으로 오긴 왔는데 아웃 당한다던가[100] , 갑작스럽게 수비와 불펜의 난조로 경기가 뒤집어진다던가 하는 등 결정적인 장면에서의 실책은 덤.
이후 7월 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오릭스는 6-0으로 [101] 7연패를 끝내고 선발투수 스즈키 유(鈴木優) [102] 가 프로 입단 후 첫 승리를 하게 된다. 또한 팀 에이스 요시다 마사타카(吉田正尚)가 2020시즌 제 1호 홈런을 날렸다.
하지만 팀은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최하위를 전전하고 있으며 퍼시픽 리그의 5팀들이 상위권 경쟁에 뛰어드는 와중에도 오릭스만 압도적인 최하위에 머물렀다. 결국 2020년 8월 20일(경기종료 이후) 1군 감독 니시무라 노리후미(西村徳文)가 성적부진[103] 에 따른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공석이 된 감독자리에는 나카지마 사토시(中嶋聡) 2군 감독을 1군에 올려서 대행 체제로 잔여 시즌을 치른다.
하지만 말이 자진사퇴지 사실상 해임이라고 보는게 맞다. 나카지마 대행만 1군에 올라온것이 아니라 1, 2군 일부 코치진들의 이동도 이루어졌고, 오릭스 프런트 측에서 니시무라에게 자진사퇴 요청을 했고 니시무라 감독이 그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가네코와 니시가 빠져나간 선발투수진도 야마모토 요시노부, 다지마 다이키, 야마오카 다이스케 등 젊은 투수진의 성장으로 생각보다 빨리 재건에 성공했고 타선에서도 요시다 마사타카라는 중심이 될 강타자를 비롯하여 젊은 선수들 중에 꽤 쓸만한 선수들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시즌 전에는 항상 다크호스정도의 평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리빌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위권에 쳐저있는 것이 이 팀의 불가사의이다. 실제로 2020년 시즌도 롯데와 소뱅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어서 그렇지 이 두 팀을 제외한 나머지 세 팀에게는 상대전적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몇년전처럼 한숨만 나오는 전력은 아니다. 게다가 모기업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현역 메이저리거인 애덤 존스를 사올 만큼 관심도 가지고 투자도 해주는 편이다. 물론 구단주의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짐이 되고 있는 인상도 있지만 그렇다고 구단주가 구단 운영에 크게 간섭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좋은 재목을 계획적으로 키워서 팀 전력을 강화할 로드맵을 구축할 안목이 부족한 프런트진과 구태의연한 옛날식 지도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코칭 스탭인데 이런 부분에서 인적쇄신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시즌 후반 무렵에는 다른 팀들을 상대로 곧잘 이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시즌 초반에 롯데와 소프트뱅크한테 헌납한 승수가 너무 많다보니 탈꼴찌조차도 힘겨워 보인다. 결국 초반부터 크게 벌어진 승패마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또 B클래스, 거기다 최하위. 다시 비밀번호를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들 안방에서 간사이 아재들이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간토의 토끼떼들이 2020년 일본시리즈에서 홈구장으로 쓰게 되었다.[104]
4.11. 2021년 시즌
5. 관중수 추이
인기도에 비해 관중 수는 그나마 있는 편이었으나 2018년에 기어코 관중수도 최하위를 찍었다.
6. 한국과의 관계?
1987시즌 김성길 이적[107] , 2001년 구대성 영입 등으로 한국 야구계와 인연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한국 야구 팬들의 관심을 끈 계기는 2011 시즌 박찬호와 이승엽의 영입, 그리고 2012년 이대호의 영입이었다. 이들 영입들은 대한민국 시장을 고려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유는 오릭스그룹이 푸른2상호저축은행을 인수하면서 오릭스저축은행#[108] 으로 한국 금융시장에 진출했기 때문이다.[109] 오릭스그룹이 2010년 푸른2상호저축은행을 인수하면서 한국 시장에 진출하였고 한국 투자자들을 더욱 끌어모으기 위해 한국프로야구 선수의 오릭스 버팔로즈 진출을 꾸준히 시도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출신 선수들의 영입을 통한 이미지 제고로 오릭스저축은행이 개설한 투자 파생상품이 인기를 모았으며, 오릭스 경기 중계권을 한국 방송국에서 사들이면서 이로 인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이 포스트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다.
이후 제2금융권에서 재미를 봤는지 현대증권의 인수협상 1순위 기업으로 선정됐다. 기사
2016년 5월 8일 SBS 인기가요에서 TWICE의 정연이 CHEER UP 무대에서 이 팀의 유니폼을 입고 나오기도 했다. 링크
※ 참고로 2006년 오릭스 버팔로즈 팬클럽 가입 특전 유니폼(팔소매 한쪽만 파란색 색칠되어있는)이다.
LG 트윈스의 2016 썸머크리스마스 유니폼보다 먼저 킬트무늬 유니폼을 선보인 팀으로도 유명하다(...).
[image]
7. 응원가
8. 유니폼
9. 선수단
9.1. 현역
9.1.1. 투수
- 11. 야마사키 사치야[110]
- 13. 미야기 히로야[111][112]
- 14. 요시다 카즈마사
- 15. 아라니시 유다이
- 17. 마스이 히로토시
- 18. 야마모토 요시노부[113][114]
- 19. 야마오카 타이스케[115][116]
- 20. 곤도 타이스케
- 21. 타케야스 다이치
- 22. 무라니시 료타[117]
- 26. 도메이 다이키
- 27. 앤드류 앨버스[118]
- 28. 토미야마 료가
- 29. 타지마 다이키
- 30. K-스즈키[119]
- 32. 브랜든 딕슨
- 35. 히가 모토키[120]
- 39. 고바야시 케이스케
- 43. 마에 유이토[121]
- 46. 혼다 히토미
- 47. 가이다 토모유키
- 48. 사이토 코키
- 49. 사와다 케이스케
- 52. 타일러 히긴스[122]
- 57. 야마다 노부요시
- 58. 가네다 카즈유키
- 60. 히다리사와 유
- 61. 사카키바라 츠바사
- 65. 우루시하라 타이세이[123]
- 66. 요시다 료
- 68. 스즈키 유
- 95. 캄베 후미야
- 98. 장이[124][125]
9.1.2. 포수
- 23. 후시미 토라이[126]
- 33. 마츠이 마사토[127]
- 37. 와카츠키 켄야[128]
- 44. 통구 유마[129][130] [131]
- 45. 이이다 다이스케
- 62. 야마자키 카츠키[132]
9.1.3. 내야수
- 0. 카츠마타 쇼키[133]
- 2. 시라사키 히로유키[134]
- 3. 아다치 료이치[135]
- 4. 후쿠다 슈헤이[136]
- 5. 니시노 마사히로[137]
- 9. 오시로 코지[138][139]
- 24. 쿠레바야시 코타로[140]
- 31. 오타 료
- 36. 야마아시 타츠야
- 38. 코지마 슈헤이[141]
- 42. 아델린 로드리게스[142]
- 53. 기보 쇼[143]
- 64. 히로사와 신야
- 67. 나카가와 케이타[144]
9.1.4. 외야수
- 00. 니시우라 하야토
- 1. 스티븐 모야[145]
- 6. 무네 유마[146]
- 8. 고토 슌타[147]
- 10. 애덤 존스[148]
- 25. 니시무라 료
- 34. 요시다 마사타카
- 41. 사노 코다이[149]
- 50. 오다 유야
- 55. T-오카다
- 56. 마츠이 유스케[150]
- 59. 네모토 카오루
- 99. 스기모토 유타로[151]
9.2. 코치[152]
9.2.1. 1군
- 나카지마 사토시 - 1군 감독
- 타카야마 이쿠오 - 헤드코치 겸 투수종합코치
- 다구치 소 - 야수(野手)종합 겸 타격코치
- 코마츠 사토시 - 투수코치
- 츠지 류타로 - 타격코치
- 카자오카 나오유키 - 내야수비・주루코치 (3루)[153]
- 사타케 마나부 - 내야수비・주루코치 (1루)
- 사이토 토시오 - 배터리 코치
- 벳푸 슈사쿠 - 불펜 코치
- 스즈키 코헤이 - 야수 코치 보좌[154]
9.2.2. 2군
9.3. OB
9.3.1. 감독
- 니시모토 유키오 (1964 - 1973)
- 우에다 토시하루 (1974 - 1978, 1981 - 1990)
- 가지모토 타카오 (1979 - 1980)
- 오기 아키라 (1994 - 2001, 2005)[155]
- 이시게 히로미치 (2002 - 2003[156] )
- 이하라 하루키 (2004)
- 테리 콜린스 (2007 - 2008[R] )
- 오이시 다이지로 (2008[157] - 2009)
- 오카다 아키노부 (2010 - 2012[R] )
- 모리와키 히로시 (2013 - 2015)
- 후쿠라 준이치 (2016 - 2018)
- 니시무라 노리후미 (2019 - 2020[158] )
- 나카지마 사토시 (2020 [159] )구단 공식 유튜브에서 올린 취임 인터뷰 영상.
9.3.2. 투수
- 가지모토 타카오 (1954 - 1973)
- 통산 254승 255패를 기록한 일본프로야구 통산 승리 9위의 명선수. 그러나 200승 이상 투수 중 유일하게 승리보다 패배가 더 많은 투수이기도 하며 1956년 베스트나인에 오른 걸 제외하면 타이틀 등을 한 번도[160] 따본 적 없는 무관의 제왕이다(...).[161] 선수 은퇴 후엔 코치로서 우에다 토시하루를 도와 한큐의 일본시리즈 V3와 78, 84년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79~1980년에 감독직도 맡아서 1979년 후기리그 우승을 거두었지만[162] 1980년 성적이 폭망해(...) 사임하고 우에다 토시하루가 재취임했다. 2006년 호흡 곤란 증세를 보여 고베에서 사망. 사후인 2007년 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요네다 데쓰야와 함께 마운드를 지킬 당시 요네카지 콤비라는 별명이 있었다.
- 요네다 데쓰야 (1956 - 1975)
- 아다치 미츠히로 (1959 - 1980)
- 야마다 히사시 (1969 - 1988)
- 이마이 유타로 (1971 - 1990)
- 사토 요시노리 (1977 - 1998)
- 김성길 (1978 - 1986)
- 야마오키 유키히코 (1982 - 1994)
- 호시노 노부유키 (1984 - 1999)
- 브래드 레슬리 (1986 - 1987)
- 하세가와 시게토시 (1991 - 1996)
- 노무라 타카히토 (1991 - 1997)
- 하기와라 준 (1992 - 2007)
- 니시모토 다카시 (1993)
- 마키노 루이 (1993 - 2003)
- 고바야시 히로시 (1993 - 2004)
- 카네다 마사히코 (1993 - 2004)
- 노다 고지 (1993 - 2000)
- 정규이닝 19 탈삼진이라는 일본프로야구 기록을 보유한 포크볼러 선발 투수.
- 히라이 마사후미 (1994 - 2002, 2013 - 2014)
- 스즈키 타이라 (1995 - 1999)
- 미즈오 요시타카 (1995 - 2000)
- 카세 토시히로 (1995 - 2004)
- 오구라 히사시 (1997 - 2004)
- 에드윈 후타도 (1998 - 1999)
- 가와고에 히데타카 (1999 - 2009)
- 가토 신이치 (1999 - 2001)
- 이와시타 슈이치 (2000 - 2005)
- 야마구치 가즈오 (2000 - 2009)
- 구대성 (2001 - 2004)
- 오쿠보 마사노부 (2001 - 2010)
-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항목에 나오는 ①9회말 3점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②팀의 우승을 결정짓는 ③대타 ④역전 ④끝내기 ⑤만루 홈런을 친 주인공의 허용 투수[164]
- 아이키 다카시 (2001 - 2005)
- 모토야나기 가즈야 (2002 - 2010)
- 다나카 유키 (2002 - 2008)
- 요시이 마사토 (2003 - 2007)
- 스즈키 마코토 (2003 - 2005)
- 가토 다이스케 (2003 - 2011)
- 가토 다츠오 (2004 - 2008)
- 다카기 야스나리 (2005 - 2009)
- 기쿠치하라 쓰요시 (2005 - 2010)
- 야마모토 쇼고 (2005 - 2010)
- 가츠키 료타 (2005 - 2012)
- 곤도 가즈키 (2005 - 2016)
- 팀 최후의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출신 선수이자 원년 멤버. 아래의 사카구치가 방출당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2016년 시즌 도중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이로서 오릭스 버팔로즈에 긴테쓰 출신 선수/원년 멤버는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 카네코 치히로 (2005 - 2018)
- 제레미 파웰 (2005)
- 호세 파라 (2005)
- 톰 데이비 (2006 - 2008)
- 키시다 마모루 (2006 - 2019)
- 2020년 시즌부터 오릭스 2군 투수 코치
- 코마츠 사토시 (2007 - 2016)
- 오릭스 1군 투수코치 (2020년 8월 21일 감독 및 코치 인사 이동으로 인함. 이전에는 2군 코치)
- 니시 유키 (2010 - 2019)
- 박찬호 (2011)
- 알프레도 피가로 (2011 - 2012)
- 차승 백 (2012)
- 알렉스 마에스트리 (2012 - 2015)
- 이가와 게이 (2012 - 2015)
- 돈 로치 (2018)
9.3.3. 포수
- 오카무라 고지 (1961 - 1971)
- 나카자와 신지 (1965 - 1985)
- 한큐의 일본시리즈 3연패 당시 주전포수.
- 후지타 히로마사 (1983 - 1991)
- 1984년 신인왕. 이해 주전포수로 뛰면서 22홈런을 치는 등 한큐 최후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이후엔 은퇴 때까지 다시 신인왕 시즌만큼의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 나카지마 사토시 (1987 - 1997)
- 미와 타카시 (1994 - 2004)
- 히다카 타케시 (1996 - 2012)
- 마에다 다이스케 (2003 - 2011)
- 스즈키 후미히로 (2005 - 2012)
- 마토야마 데쓰야 (2005 - 2007)
- 요코야마 데쓰야 (2005 - 2013)
- 사이토 토시오 (2011 - 2016)
- 현재 1군 배터리코치 (2020. (2020년 8월 21일 감독 및 코치 인사 이동으로 인함. 이전에는 2군 육성코치.))
- 비니 로티노 (2013)
9.3.4. 내야수
- 래리 레인즈 (1953 - 1954, 1962)
- 로베르토 바르본 (1955 - 1964)[166]
- 다카이 야스히로 (1964 - 1982)
- 대럴 스펜서 (1964 - 1968, 1971 - 1972)
- 카토 히데지 (1969 - 1982)
- 같은 해에 함께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던 후쿠모토 유타카[167] , 야마다 히사시와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의 70년대 황금기를 이끌며 MVP 1회, 수위타자 2회, 타점왕 3회, 최고출루율 3회 수상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 강타자 1루수. 노무라 카츠야의 뒤를 잇는 통산 희생 플라이 2위(105개) 보유자다. 다만 은퇴 때까지 한큐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았던 후쿠모토와 야마다와는 달리 카토는 저 둘보다 다소 빨리 기량 하락이 시작되면서 말년엔 한큐를 떠나 히로시마, 킨테츠, 요미우리, 난카이 4개팀을 떠도는 저니맨 생활을 했다. 다만 저니맨 생활을 했음에도 꾸준히 뛴 결과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87년에 통산 2천안타를 달성하여 유증의 미를 거두고 은퇴했다.
- 오하시 유타카 (1972 - 1982)
- 바비 마르카노 (1975 - 1982)
- 마츠나가 히로미 (1978 - 1992)
- 유미오카 케이지로 (1981 - 1991)
- 후쿠하라 미네오 (1982 - 1992)
- 부머 웰즈 (1983 - 1991)
- 범프 윌스 (1983 - 1984)
- LA 다저스의 레전드 모리 윌스의 아들. 메이저리그 통산 831경기 출장, 196도루의 나름 준수한 성적을 올렸고, 4년 4억엔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에 계약했으나, 일본에서는 폭망했다. 여담으로 당시 한큐의 흥행 이벤트로 후쿠모토 유타카와 함께 말과 그라운드에서 60m 달리기 경주를 한 에피소드가 있다.(...) 결과는 경주마가 인조잔디의 감촉에 당황해 기수의 지시를 듣지 않고 우왕좌왕한 끝에 윌스가 승리. 아래에 하술할 미노다 고지도 참가예정이었으나 어느 프런트직원의 설사유망주 조롱때문에 불참하면서 프런트와 불화가 시작되었고 결국 87시즌 직후 요미우리로 쫓겨났다.
- 후쿠라 준이치 (1985 - 1997)
- 2016~2018 오릭스 1군 감독. 2019년 중반부터 GM(단장 및 팀 편성부장) 역임 중
- 오가와 히로후미 (1989 - 2000)
- 마츠야마 히데아키 (1990 - 1998)
- 트로이 닐 (1995 - 2000)
- 이치로 등과 함께 오릭스의 중심타선을 이루며 1996년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했으나, 우리나라에선 2001년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가 폭행사건으로 퇴출된 먹튀로 유명하다(...).
- 오시마 코이치 (1996 - 2004)
- 시오자키 마코토 (1997 - 2010)
- 시오타니 가즈히코 (2002 - 2005)
- 고토 미츠타카 (2002 - 2013)
- 오릭스 블루웨이브 출신 선수로는 가장 오래 버팔로즈에 남았던 선수이자 NPB 최후의 블루웨이브 출신 선수. 한국에서는 이대호 일본 진출 첫해의 3번 타자로 기억될 것이다. 일본인 센터 내야수로서는 나름의 파워를 가졌지만 막장 선구안 때문에 출루율이 낮았고, 게다가 부진한 와중에 중심타선에 배치되다보니 이대호 팬들에게는 갖은 욕을 얻어먹었다. 아무튼 블루웨이브 출신으로는 오릭스에서 마지막까지 트레이드되지 않고 주전으로 남은 선수로, 주전 2루수로 오랫동안 활약한 나름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 기량 저하로 텟페이와 트레이드되어 라쿠텐으로 오게 되었다. 라쿠텐에서는 백업 내야수와 왼손 대타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2016년 방출당하면서 선수생활을 마감했고, 이후 블루웨이브 출신 현역 선수는 다른 리그의 스즈키 이치로와 구대성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 현재 2군 타격 코치 (2020년 8월 21일 감독 및 코치 인사 이동으로 인함. 이전에는 1군 코치)
- 오릭스 블루웨이브 출신 선수로는 가장 오래 버팔로즈에 남았던 선수이자 NPB 최후의 블루웨이브 출신 선수. 한국에서는 이대호 일본 진출 첫해의 3번 타자로 기억될 것이다. 일본인 센터 내야수로서는 나름의 파워를 가졌지만 막장 선구안 때문에 출루율이 낮았고, 게다가 부진한 와중에 중심타선에 배치되다보니 이대호 팬들에게는 갖은 욕을 얻어먹었다. 아무튼 블루웨이브 출신으로는 오릭스에서 마지막까지 트레이드되지 않고 주전으로 남은 선수로, 주전 2루수로 오랫동안 활약한 나름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 기량 저하로 텟페이와 트레이드되어 라쿠텐으로 오게 되었다. 라쿠텐에서는 백업 내야수와 왼손 대타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2016년 방출당하면서 선수생활을 마감했고, 이후 블루웨이브 출신 현역 선수는 다른 리그의 스즈키 이치로와 구대성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 히라노 케이이치 (2002 - 2007, 2013 - 2015)
- 야마사키 타케시 (2003 - 2004)
- 호세 오티스 (2003 - 2004)
- 시마무라 잇키 (2004 - 2010)
- 미즈구치 에이지 (2005 - 2007)
- 아베 마사히로 (2005 - 2009)
- 기타가와 히로토시 (2005 - 2012)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문서에 나오는 9회말 3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터진 세계 최초의 대타 역전 만루 끝내기 리그 우승 홈런의 주인공.
- 클리프 브룸바 (2005 - 2006)
- 기요하라 가즈히로 (2006 - 2008)
-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6)
- 그렉 라로카 (2007 - 2010)
- 알렉스 카브레라 (2008 - 2010)
- 호세 페르난데스(1974) (2009, 2013)
- 아롬 발디리스 (2010 - 2013)
- 이승엽 (2011)
- 이대호 (2012 - 2013)
- 윌리 모 페냐 (2014)
- 오쿠나미 쿄 (2013 - 2017)
- 2017년 5월 17일 속도위반 운전으로 적발되어 면허정지 30일에 처해졌는데, 불과 5일만에 오사카 시내에서 면허정지 상태에서 접촉사고로 2명을 경상에 빠트린 바람에 무기한 근신 처분을 받고 결국 동년 8월에 방출. 방출 이후 야구선수로서 재기를 모색하는 듯했지만, 여고생 성매매 혐의로 2019년 3월 14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경찰로 가장하여 현금이나 카드를 갈취한 혐의로 같은 해 5월 30일에 또 경찰에 체포되었다. 9월 24일 성매매 혐의, 사기 혐의에 대해 고베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사실 야구 선수로서의 재기 자체도 본인의 불성실함으로 무산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멘탈레기인 것으로 보인다.
- 코야노 에이이치 (2015 - 2018)
- 2014년 시즌 후 FA로 닛폰햄에서 오릭스로 이적. 2018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 2020년 시즌부터 오릭스 2군 야수(野手)종합코치.
- 크리스 마레로(2017 - 2019)
- 일본프로야구 10만호 홈런의 주인공. 이 선수는 일본 리그 데뷔 첫 홈런을 치고서 그 홈런이 무산된 바가 있다. 본인이 홈 플레이트를 밟지 않아서. 기록은 3루타 후 누의 공과로 아웃. 아이러니하게도 이 누의 공과 덕분에 10만호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2017년 한 해를 제외하면 공갈포 먹튀짓만 하고 2019년을 끝으로 방출. 참고로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1라운더 출신이었는데[170] 일본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여담으로 사촌동생 데븐 마레로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1라운더인데 메이저리그 통산 163경기에 나와 타율 .194를 기록한 게 끝이다.[171] 거기다가 2019년 PCL에서 풀 시즌을 뛰고도 OPS .745에 그치면서 아시아 리그에 가기에도 쉽지 않은 성적을 냈다.[172] 그 외에도 형 크리스찬 마레로[173] , 삼촌 엘리 마레로[174] , 오촌 조카 엘리 마레로[175] 도 야구선수.
9.3.5. 외야수
- 나가이케 아츠시[176] (1966 - 1979)
- 후쿠모토 유타카 (1969 - 1988)
- 리키 헨더슨이 경신하기 전까지 통산 1065도루로 통산 도루 세계기록 보유자였다. 물론 현재도 일본 기록 보유자. 1시즌 106도루를 기록한 적이 있는 세기의 도루왕.
- 미노다 코지(1976 - 1987)
- 30-30 클럽 2회 가입자.(1980, 1983) 1983년은 3할 타율까지 찍으면서 '트리플 스리'도 달성했다. 1980년에는 그보다 더 진기한 기록인 30홈런-30도루-30희생타(...)를 기록하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선수. 쉽게 설명하자면 박건우 상위호환이 되시것다. 하지만 85시즌 헤드샷을 당한 직후 노쇠화기미가 보인데다가, 어느 프런트직원의 설사유망주발언으로 프런트와도 불화가 심해지면서 87시즌 직후 (본인이 트레이드 요구했던 고향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아닌] 저멀리 도쿄에 있는 요미우리로 쫓겨났다. 요미우리에선 1989년 일본시리즈 역스윕때 4차전에서 포문을 여는 홈주루를 시전하고 5~7차전도 4차전처럼 1번타자로 선발출장하면서 고향팀에게 털렸던 1984년 일본시리즈의 한을 풀었다. 담해 은퇴하고 코치까지 지냈다.
- 고바야시 신야 (1978 - 1987)
- 이시미네 가즈히코 (1979 - 1993)
- 구마노 데루미쓰 (1985 - 1991, 1994)
1985년 신인왕. 하지만 이쪽도 전년도 신인왕이었던 같은 팀의 후지타 히로마사처럼 그 해 이후론 신인왕 시즌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 모토니시 아츠히로 (1987 - 1997)
- 후지이 야스오 (1987 - 2002)
- 카도타 히로미츠 (1989 - 1990)
- 다구치 소 (1992 - 2001, 2010 - 2011)
- 스즈키 이치로 (1992 - 2000)
- 다니 요시토모 (1997 - 2006, 2014 - 2015)
- 팀 최후의 오릭스 블루웨이브 출신 선수 2. 암흑기 블루웨이브의 자존심과도 같았던 선수.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을 앞세워 전성기 리그 정상급 외야수로 활약했다. 2000안타를 얼마 안 남기고 요미우리에서 기량저하로 방출된 뒤 친정팀에서 2000안타를 노렸지만, 달성하지 못하고 히라노와 같은 해 은퇴한다.
- 아이카와 료타 (1999 - 2010)
- 하야카와 다이스케 (2002 - 2006)
- 무라마츠 아리히토 (2004 - 2008)
- 블루웨이브 최후의 FA 영입 선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도루왕을 1회 차지한 준족의 외야수였다.
- 사카구치 토모타카 (2005 - 2015)
- 팀 최후의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출신 야수. 2008-2011년 4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을 자랑했던 교타자로 그 기간동안 오릭스 부동의 리드오프-중견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 이후 통일구 도입으로 인한 타격의 침체와 잦은 부상 등으로 성적이 저하되어 2015년 시즌 종료 후 방출된다. 현재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리드오프의 한 축을 맡아 재기에 성공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다.
- 시모야마 신지 (2005 - 2011)
- 카림 가르시아 (2005 - 2006)
- 터피 로즈 (2007 - 2009)
- 오제 히로유키 (2008 - 2009)
- 위에 언급된 2010년 스프링캠프 기간 도중 사망한 젊은 외야수. 세상을 떠난 시기가 2010년 시즌 전이라 활동 기간을 2009년까지로 서술했다.
- 오무라 나오유키 (2009 - 2010)
- 스테판 로메로(2017 - 2019)
- 2017년에 입단한 용병으로 2017년에는 잘 했으나 2018년부터 2019년 시즌 초반까지 엄청난 부진에 빠져있었다. 2019년 시즌 중반부터 미친듯이 몰아치면서 완벽한 먹튀였던 2018년과는 달리 2019년에는 꽤 괜찮은 성적을 냈지만 결국 방출. 이것은 방출이라기 보다는 로메로 대리인의 연봉협상 실패라고 보는 게 맞다. 이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주워가면서 2020년에도 일본에서 뛰게 되었다.
- (2019)
- 2018년 트리플 A IL 홈런왕, 타격왕. 사실 트리플A 첫 시즌이 2018년이라 존버하면 메이저리그 콜업 가능성은 꽤 높았음에도 불구하고[177] 2019시즌에 바로 일본행을 택한 케이스. 그러나 2019년 5월부터는 부진에 빠져 2군에 가 있었다가,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적발되어 6월에 퇴출되었다.
9.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하세가와 시게토시 (애너하임 에인절스 - 시애틀 매리너스)
- 기다 마사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 오릭스 복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시애틀 매리너스 - 일본 재복귀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 이시카와 밀리온스타즈(독립리그))
- 스즈키 이치로 (시애틀 매리너스 - 뉴욕 양키스 - 마이애미 말린스 - 시애틀 매리너스)[178]
- 다구치 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필라델피아 필리스 - 시카고 컵스 - 2010년 오릭스로 복귀, 2012년 시즌 후 은퇴)
- 노무라 다카히토 (요미우리 자이언츠 - 밀워키 브루어스 - 닛폰햄 파이터즈 - 2003년 시즌 후 은퇴)
- 구대성 (뉴욕 메츠 - KBO 한화 이글스)
- 이대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시애틀 매리너스 - KBO 롯데 자이언츠)
- 히라노 요시히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 시애틀 매리너스)
10. 역대 성적
11. 관련 문서
[1] 2005~2007 3년간은 오사카와 더블 프랜차이즈.[2] 2011년부터의 이름. 개장년도인 1988년부터 2002년까진 그린 스타디움 고베, 2003년부터 2004년까진 야후 BB 스타디움, 2005년부터 2010년까진 스카이마크 스타디움이란 이름을 씀.[3] 고시엔 기간 동안은 한신 타이거스가 오사카 돔을 쓴다.[4] 전후기리그제 성적도 포함.[5] 1976년과 1978년은 전후기리그를 전부 우승해서 플레이오프가 취소되었다. 그래서 일본시리즈 직행.[6] 4강전인 파이널 스테이지 자체를 간 적이 없다.[7] 황해도 배천 출생으로 1917년 출생, 2009년 사망. 일본에서 일을 하던 중 당시 한큐 브레이브스의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여 프로 선수가 되었다. 주 포지션은 포수. 1939~1941년에는 2군 소속이었으며, 1942년부터 1군 기록이 있다. 1945년 일본 프로야구 해체로 인해 귀국, 해방 후 포지션을 투수로 변경하여 국대 에이스가 된다. 이후 인천에서 학생을 지도하여 인천 야구의 대부가 되었으며,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SK 와이번스 유완식 투수상이 수여되고 있다. #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의 성적. 창씨개명으로 야스다 노부오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8] 2020.08.21~[9] 후발주자라서 그렇다면 모를까, 오릭스는 NPB 전신인 일본 야구 리그 원년부터 뛴 뼈대 깊은 역사를 지닌 팀이다. 다른 원년 팀인 요미우리, 주니치, 한신은 극강의 팬덤을 보유한 것을 보면...[10] 세이부 라이온즈 - 2004, 2008 / 소프트뱅크 호크스 - 2003, 2011, 2014, 2015, 2017, 2018, 2019, 2020 / 라쿠텐 골든이글스 - 2013 / 롯데 마린스 - 2005, 2010 / 닛폰햄 파이터즈 - 2006, 2016 이상 퍼시픽 리그의 21세기 일본 시리즈 우승 기록인데, 2001 ~ 2020년까지 20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팀 중 15번이 퍼시픽 리그에서 나올 정도로 2000년 이후 일본 야구는 파리그 세상인데, 그 중에 유일하게 오릭스만이 웃지 못하는 중이다.[11] J리그 수뇌부에서도 "요미우리는 방을 빼"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요미우리를 제 발로 걸어나가게 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그게 지역명 부착, 기업명 제거.[12] 일반적으로는 주부라고 쓴다.[13] 소프트뱅크 호크스, DeNA 베이스타즈, 야쿠르트 스왈로즈, 롯데 마린즈 등은 공식 팀명에 지역명이 들어가서 한자가 포함된다. 한국으로 보면 서양 언어 명칭으로만 이루어진 NC 다이노스, kt wiz, LG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 등과 비슷한 케이스. (KIA는 起亞라는 한자다.)[14] 참고로 중간에 작은 tsu(ッ)는 안 들어간다. 일본 발음으로는 바화로ㅡ즈(バファローズ). 밧화로ㅡ즈(バッファローズ) 아니다. 가끔 해설자가 バッファローズ라고 하는데 그거 아니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드립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참고로 오릭스 팬들은 중간에 ッ가 들어가게 말하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15] 단, 외래어 표기법만 적용하면 버펄로'''즈'''가 맞는데(영어 발음 기준으로, 마지막 s가 유성음 /z/로 발음되므로 발음에 따라 '즈'로 표기) 국립국어원에서 외래어 표기법 외에 관례적으로 적용하는 다른 원칙까지 따를 경우 버펄로'''스'''라고 적어야 한다. 뭔 소리냐면 국립국어원에서 외래어 표기법과 더불어 추가로 적용하는 관례화된 규정이 더 있다는 뜻이다. 구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은 1986년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된 뒤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인명)》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 중에 '일러두기'란을 외래어 표기법에 포함되지 않은 규칙들을 추가했다. 이것들은 표준어 사정(査定) 때 외래어 표기법과 더불어 관례적으로 참고해 왔다. 현재는 외래어 표기법이 개정을 통해 보강되면서 현재 저 '일러두기' 부분 중 제6~9장만 참고하고 있다. 아무튼 이 '일러두기'의 제6장의 5.(나)를 보면 "어말의 -s
[z]
는 ‘스'로 적는다"는 규칙이 적혀 있다. 원래 외래어 표기법만 적용하면 철자와 관계없이 발음에 따라 '즈'로 적어야 하는데, -s로 끝나면 그냥 '스'로 적게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외래어 표기법 뿐만 아니라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인명)》의 '일러두기' 제6~9장까지 준수하면 Buffallos를 버펄로'''스'''로 적어야 한다.[16] 일본프로야구 구단 중 중간에 운영 주체가 인수된 경우라도 과거 프랜차이즈의 역사를 버리지 않으며, 당연히 홈페이지에 소개해 놓고 있다.[17] 과거 같은 칸사이 지방 팀이었던 난카이 호크스의 후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와의 연간 경기 중 몇몇 경기를 칸사이 클래식으로 개최하며 옛 팬, OB, 선수단들과 함께 과거 칸사이 지방에 있던 한큐, 킨테츠, 난카이 팀들을 추억한다. 칸사이 클래식 땐 각 팀 관련 OB들을 초청해 시구식을 개최하고 각 팀의 올드 유니폼(소뱅은 난카이, 오릭스는 한큐/킨테츠)을 입고 경기를 치룬다. 2016년까진 '''오사카 클래식'''이란 명칭이었으나 2017년부터 '''칸사이 클래식'''으로 개명했다.[18] 그중에서도 1995년~1996년 퍼시픽리그 연패 시기의 유니폼이 자주 쓰인다.[19] 응원가는 킨테츠 시절의 선수 응원가가 한큐-블루웨이브 시절의 선수 응원가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유용(流用)된다. 응원가 작곡을 대체로 오사카의 구 킨테츠 응원단 출신의 사람들이 맡기 때문으로 추정.[20] 이전 문서엔 영구결번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실제론 '''계획은 있었으나 취소되었다가 여러 사유로 무산된 경우'''이다. 1984년 통산 1천도루 달성을 기념해 후쿠모토의 7번을 영구결번으로 제정하려 했으나 본인이 아직 현역인 점도 있고 해서 고사했기에 취소되었는데, 1988년 후쿠모토가 은퇴한 것과 동시에 한큐 브레이브스가 오릭스에 매각되어 버렸고, 이후 오릭스에서 구단명과 연고지를 여러번 바꿈과 동시에 한큐 시절의 색채를 지우는 데 주력하면서 결국 영구결번이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후엔 그래도 후쿠모토의 업적이 업적이다 보니 한동안 결번처리 되어 있었다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이적한 신도 타츠야가 후쿠모토 본인의 허락을 받아 달기도 했다. . 야마다 히사시의 17번은 준영구결번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17번은 야마다가 은퇴하고 얼마 안 가서 다른 후배가 달았는데 그 후배가 일본인 메이저리거의 선두주자 중 하나인 '''하세가와 시게토시'''이다. 통산성적으로는 야마다와 비교가 안되지만 오릭스 재적시절에 시즌 두자릿수 승수를 4번이나 기록하며 95년 리그우승, 96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고 무엇보다도 메이저리그에서 선발투수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간계투로 보직을 바꾸어 9년이나 버티면서 소속팀에서 인정밨았다는 점에서 물려받은 등번호가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했다고 할 수 있다.[21] 다만 스즈키의 경우는 구단 측에서 영구결번을 제안했으나 스즈키 본인이 거절했다.[22] 이 구단기 말고도 80년대에 구단 마스코트 브레이비와 후반기에 쓰던 로고가 그려진 빨간색 위주의 구단기가 병행해서 사용되기도 했다.[23] 여담으로 한큐가 다카라즈카 극장을 세운 방법과 똑같이 야구장 설계 초기부터 한큐 철도망이 지나가는 근처 부지를 잡고 지었다고 한다.[24] 그래도 중간에 띄염 띄염 A클래스 5번(53, 55~56, 58, 64년)은 찍었다. 반면 긴테쓰는 69년 이전까지는 54년 딱 1번이 전부(...).[25] 1970년엔 롯데 오리온즈가 파리그 우승. 1973년엔 난카이 호크스가 전기리그 우승 후 플레이오프에서 이 해 후기리그를 우승한 한큐를 3승 2패로 누르고 파리그 우승.[26] 1975년의 일본시리즈 상대는 바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참고로 카프는 이 해 구단 역사상 최초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선 한큐에게 전패(무승부 2번 포함)를 해버리는 바람에 우승에 실패했다. 히로시마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은 그로부터 4년 뒤 이룰 수 있었다.[27] 한큐는 이 해 12라운드에서 카도타 히로미츠도 지명했지만 이쪽은 한큐의 지명을 거부하고 사회인야구를 거친 뒤 다음 해 난카이에 지명되어 그곳에 입단한다. 카도타는 현역 말년에 다이에에 인수된 호크스가 오사카를 떠나자 한큐를 인수한 오릭스 브레이브스에 입단하게 되며 브레이브스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참고로 1968년 드래프트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드래프트 중에서도 유난히 많은 스타들이 배출된 드래프트로도 유명하다. 당시 향후 10년 넘게 지탱한 선수들이 한큐에서 많이 나와서 그렇지, 다른 팀들의 드래프티 면면도 대단한데, 타부치 코이치(당시 한신), 야마모토 코지, 미즈누마 시로(이상 당시 히로시마), 호시노 센이치, 오시마 야스노리(이상 당시 주니치), 아리토 미치요(당시 롯데), 히가시오 오사무(당시 니시테츠), 카네다 토메히로(당시 도에이) 등이 이 드래프트에서 지명됐다. 덤으로 이 해 토에이의 1차지명자였던 유격수 오하시 유타카는 이후 한큐에서 뛰어난 수비력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골든글러브 7회, 베스트나인 5회를 수상했다. 한큐는 자기네 드래프티 이외에도 이 드래프트로 정말 많은 걸 뽑아먹은 셈이다.[28] 다만 일본시리즈에선 센트럴리그 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78년엔 야쿠르트 스왈로즈한테(참고로 스왈로즈도 이 해 구단 사상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뤘다. 거기다가 첫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해버린다.), 1984년엔 9년 전에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3승 4패로 패했다.[29] 한국에서는 금융지주회사법과 은행법상 오릭스 같은 금융회사에 야구단 매각을 할 수 없지만, 일본에서는 가능하다. 다만 한국에서도 농구단이나 배구단같이 규모가 작은 리그의 팀 매각은 가능하며, 야구단 운영은 법적으로 안 되지만 스폰서와 명명권이 사용된 팀명까지는 가능하다.[30]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경기 때마다 빈자리가 많이 보일 정도로 한큐를 포함한 당시 퍼시픽리그의 다른 팀들의 관중동원력은 매우 현저했고, 결국 이것은 경영 부진으로 이어져 한큐가 구단을 매각하는 계기가 되었다.[31]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호시노 센이치를 거르고 뽑은 1968년 드래프트 1차지명 출신의 '''시마노 오사무'''가 전속 슈트 액터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마노는 호시노와 달리 별다른 활약을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한큐에서 은퇴했지만, 은퇴 이후 오히려 브레이비-네피의 슈트 액터로 이름을 알리며 전화위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팀이 오릭스에 매각되고 고베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마스코트가 '네피'(1991년 런칭)로 바뀐 뒤에도 지병으로 은퇴를 선언한 2004년까지 슈트액터를 맡았다. 2010년 사망.[32] 후쿠모토는 우에다 토시하루의 말실수 때문에 은퇴했다(...). 자세한 건 후쿠모토 유타카 항목 참조.[33] 일본프로야구 용병 중 최고의 용병 반열에 한 두번은 거론되는 인물이다. 특히 1984년에 외국인 선수 최초의 타격 삼관왕을 기록했다.[34] 전 시즌이었던 1988년 10월 19일 카와사키 더블헤더 경기에서 긴테츠에게 고춧가루를 뿌렸던 롯데 오리온즈가 이번에는 오릭스에게 고춧가루를 뿌렸다. 이 해에는 긴테쓰가 10월 12일 세이부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4연타석 홈런'''을 때린 용병타자 랄프 브라이언트의 활약의 힘입어 파리그를 우승한다. [35] 시마노가 이 해 사망했다.[36] 상단 각주에서 나오다시피 시마노 오사무가 네피도 연기했다.[37] 옆동네에서 세이부 왕조를 꾸린 히로오카 타츠로, 모리 마사아키의 요미우리 출신 '관리야구' 감독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38] 당시 유니폼에는 '힘내라! KOBE'라는 패치가 붙어있었다.[39] 2017년 현재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군 타격코치로 있다.[40] 이 경기는 2010년 일본야구기구에서 선수와 코치를 상대로 조사한 '최고의 시합과 명승부 명장면' 종합 2위로 선정되었다. 키타가와, 후루쿠보, 오쿠보 모두 이 시합에 투표했다고...[41]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2001년 팀 사상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의 제물이 된 때도 이 때였다. 긴테쓰의 리그 우승을 결정지은 2001년 9월 26일 오사카 돔에서의 원정경기에서 9회 초까지 5-2로 앞서 있었으나 8회 도중 교체된 구원투수 오쿠보 마사노부가 9회 말에 아웃을 하나도 못 잡고 안타→2루타→볼넷 크리로 만루를 허용했다가 9번타자 후루쿠보 겐지(그날 3타수 무안타)의 대타로 나온 키타가와 히로토시[39] 에게 '''세계 최초의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리그 우승 홈런'''을 얻어맞고[40] 긴테쓰 좋은 일만 시켜줬다. 결국 오기 감독은 그 해를 끝으로 사임했다. 여담으로 당시 긴테쓰 감독은 공교롭게도 오기의 제자였던 나시다 마사타카였다(...).[42] 롯데 오리온즈,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용병으로 활약한 명선수.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흑인 감독, 메이저리거 데릭 리의 아버지. 여담이지만 수정 전 '''레론 리'''란 이름으로 적혀있었으나, 레론 리는 바로 '''레온 리의 친형이다(...).''' 참고로 이쪽도 롯데 오리온즈에서 장기간 활약을 펼친 명선수로 '''NPB 통산 타율 2위(.320)''' 기록을 갖고 있다.[43] 저 4 항목 모두 그 기나긴 NPB 역사상 최악의 기록이다! 이해 오릭스의 팀 평자는 '''12개구단 유일의 5점대(그것도 6점대가 될락말락한)에 나머지 NPB 11팀과 비교해 무려 1점 이상(!!!)이나 높았다(...).''' 심지어 이해 '''45승 94패, 승률 .324'''로 오릭스보다 훨씬 더 폭망한 센트럴리그 최하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도 팀 평자는 4.80으로 오릭스에 비교하기가 미안할 수준이었다. 이해 일본프로야구가 꽤나 심한 타고투저였던 걸 생각해도 한심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44] 투수진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물빠따 타선 때문에 울었던 2002년과는 정반대로 2003년엔 타선은 어느정도 나아졌지만 반대로 투수진들이 폭망해버렸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해 오릭스 투수진은 규정이닝을 소화한 투수조차 없었을 뿐더러 이들 중 평자 4점대 미만인 투수가 '''딱 1명'''밖에 없었다(...). 근데 그 1명이었던 시오미 다이스케는 3시합 등판, 2이닝 투구로 평균자책점 0점을 찍은 게 전부인지라...그러니까 그냥 '''선발이건 구원이건 나오는 족족 상대팀 타선에게 얻어터졌다는 말이다.''' 당연히 이렇게 얻어터지는 투수진이 제대로 승리를 챙길리가 없었으니, 10승 투수가 없는 건 물론이요 팀내 최다승조차도 구대성이 겨우 '''6승'''을 한 게 다였다. 그 구대성조차도 이해 시즌엔 승수보다 많은 8패 찍고 방어율 4.99로 망해버렸다. 그나마 잘 던진다는 투수의 성적이 그 정도일 테면 얼마나 투수진이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기록.[45] 첫번째는 6월 17일 이와테 현영구장에서 열린 지방 홈경기에서 6회까지 난타전을 벌이다가 7회에 10실점으로 제대로 얻어터지면서 '''11-21'''로 패배했고, 두번째인 7월 27일에는 후쿠오카 돔에서 다이에에게 '''32안타'''를 얻어맞으며 4회에만 벌써 '''1-19'''라는 충공깽스런 점수차를 보여주다가 '''7-26'''로 대패했다. 세번째인 8월 1일 경기가 압권이었는데, 야후 BB 스타디움으로 몰려온 고베의 홈 관중들 앞에서 투수진은 홈런만 7발을 얻어맞았고 야수들은 수비에서 4실책을 범했으며 타격에서는 스기우치 토시야에게 꽁꽁 틀어막혀 '''1-29'''로 떡실신 당했다. 경기 하이라이트 마지막인 9월 14일에도 8월 1일 경기와 마찬가지로 야후 BB 스타디움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3회까지 1-7로 앞서다가 4, 5회에 각각 7실점씩 도합 14실점이나 당하면서 '''20-11'''로 대역전패를 당했다.[46] 고바 타케시가 이끌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4승 2무로 탈탈 털며 첫 우승을 차지했다. [47] 당시 모기업 다이에의 경영난으로 휘청대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치바 롯데 마린즈와 합병한다는 안이 있었다. 결국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가 다이에 호크스를 인수해 현재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어진다.[48] 당시 선수회 회장이 바로 후루타 아츠야였다.[49] 상술되었듯,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300승 투수 초혼(草魂) 스즈키 케이시의 1번이 오릭스에서는 본인이 원치 않아서 영구결번에서 해제되었다.[50] 2000~2005[51] 2006~2008[52] 서패스는 일본의 주택건설업체인 아나부키공무점의 맨션아파트 브랜드이다. 한국으로 치면 래미안 경산 정도 되는 네이밍 센스. 그러나 아나부키공무점은 이후 경영사정 악화로 부동산회사인 다이쿄에 인수되었다.[53] 2019년 요미우리 신문의 조사에서는 '''0%'''를 기록하면서 또 네타화가 됐다(...). 이 통계를 보면 소수점 이하는 전부 반올림을 했는데 오릭스 다음으로 인기가 없는 롯데, 야쿠르트도 1%를 찍는 판에 오릭스만 0.5%(...)를 못 찍어서 0%로 집계가 된 것. 참고로 1위 쿄진은 25%, 2위 한신은 12%, 퍼시픽리그 최고 인기팀 소프트뱅크는 7%를 찍었다.[54] 저 2인조는 유튜버 B-モレル라는 사람으로 응원가를 본인들이 직접 부르는 영상을 주로 올린다. 사실 처음에는 주인공(?)인 B-モレル 혼자 집 안에서 웃기게 응원가를 혼자 불러대는 영상을 올려대면서 욕만 들입다 먹었으나 점차 컬트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데니스 군이라는(터키 혼혈이라 서양인처럼 생겼지만 토종 일본인이다...영어도 못한다. 데니스 군은 터키식 이름이고 본명은 아다치 타쿠미라고.) B-モレル의 친구가 가세하여 둘이서 유튜브 영상을 꾸준히 올려오고 있다. 2020년 현재는 구독자 2만 명도 넘기는 등 나름대로 인기를 끌고 있다.(시청자 모임을 개최했을때 중년 아저씨부터 여고생, 심지어 외국인까지 참여했다!) 오릭스 외에도 12구단 모두의 응원가를 불러대지만 두 사람다 골수 오릭스팬이니 주력은 오릭스. 닉네임에서 알 수 있듯이 B-モレル의 유니폼 마킹은 오릭스에서 2년 동안 뛰었지만 성공을 거두진 못했던 브랜트 모렐(...). 어지간히 광팬인지 브랜트 모렐이 은퇴하고 미국에서 포도농장을 운영하는데 그 포도를 구해다가 먹방 찍기도 했다.[55] 이 두 사람은 아쉽게도 곧 유튜브 활동을 그만둔다고 한다. 대학생이라서 취준하느라 바빠진 것 같다는게 중론.[56] 해당 컨텐츠는 오사카보다 먼저 진행했다.[57] 구단주 인 미야우치 요시히코는 모기업이자 일본 최대의 리스 회사인 오릭스의 창업주로, 일본 재계에서 소문난 야구광이라 환갑이 넘어도 투수로 뛸 정도다. 그러나 2004년 프로야구 리그재편 문제 때 오릭스와 긴테츠의 합병을 주장해 선수협과 야구팬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후 10년이 지난 2014년에 마이니치신문과 한 인터뷰에서는 당시 결산시점에서 12구단의 재무제표를 연결해 봤더니 총합이 적자였다고 하며, 야구를 흑자를 내는 비즈니스로 만들기 위해 리그개편이 필요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남겼으며, 지금(인터뷰 당시 2014년)은 10구단 체제가 아닌 12구단 체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오릭스가 흑자를 유지한다면 구단명을 기업명까지 뗀 '오사카 버팔로즈' 로 바꿀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남겼다. 여담으로 오사카 버팔로즈는 킨테츠 버팔로즈가 해산 전 쓰던 정식 구단명이었다.[58] 이게 명단을 보면 진짜 노답인게, 200-300만 달러를 받던 왕년의 30-40홈런 타자나 왕년의 1선발들을 '''전성기 몸값 그대로''' 데려와서 대타나 6선발 정도로 쓰다가 폭풍방출을 하는 일이 자주 보였다. 토니 블랑코나 브라이언 벌링턴 등...[59] 일본어로 견우와 직녀에 나오는 직녀.[60] 하지만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후 다시 부활에 성공. 이후 라쿠텐, 요코하마에서 뛰며 2천안타까지 달성한다.[61] 사실 이적 첫 해엔 주전 중견수로 열심히 뛰었고 타율 자체는 .291로 좋았지만 문제는 세부성적. 홈런이 0개에 출루율 .321/장타율 .341로 OPS가 7할도 안되는 시원찮은 모습에 주특기였던 도루조차도 5도루 12도루자로 성공률이 '''30%'''도 안 되는 개막장스런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상 단타만 잘 치는 것 외엔 장점이 없는 똑딱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만약 감독이 킨테츠 시절 팀 선배였던 오오이시 다이지로가 아니었다면 진작 백업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이러니 수뇌진 측에서 공격, 주루 어느것 하나 기대에 못미치는 오오무라에게 기회를 줄래야 줄수가 없었고 결국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2010년엔 단 2타석에 그친채 결국 그해 시즌 종료 후 방출되면서 그대로 은퇴하고 말았다.[62] 자세한 분배 드래프트 방식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항목을 참조.[63] 특히 센터 내야는 블루웨이브에서 시오자키 마코토-고토 미츠타카-히라노 케이이치, 버팔로즈에서 아베 마사히로-미즈구치 에이지 등 양 팀의 주전 선수들을 모조리 데려와 포지션 적체가 생길 정도였다.[64] 이렇게 라쿠텐으로 보낸 선수 중 야마사키 타케시는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해 39세의 나이로 홈런왕까지 차지하는 회춘을 보여주며 오릭스를 제대로 엿먹였다. 이런 탈 오릭스 효과스러운 사례 말고도 블루웨이브 시절 우승의 주역이자 덕아웃 리더로 팬들의 지지를 받던 오오시마 코이치, 2000년대 초 투타 모두 막장가도를 달리던 오릭스에서 어떻게든 투수진을 지탱했던 카네다 마사히코, 오구라 히사시 같은 베테랑 선수들을 토사구팽한 것으로도 오릭스는 욕을 먹었다.[65] 말이 5위지 승률 .391로 전년보다 약 8푼이나 승률이 떨어져서 4할도 못 찍었다. 라쿠텐이 아니었으면 최하위를 찍었을 만한 성적.[66] 2017년 시즌까지 뉴욕 메츠 감독을 역임하였다. 감독 취임 후 선수들이 주로 다는 배번인 1번을 달았는데 당시 주전급으로 올라서고 있던 고토 미츠타카가 1번을 어쩔수 없이 콜린스 감독에게 내주고 다른 배번을 달 수 밖에 없어 논란이 있었다.[67] 여담으로 이때에 '''오늘도 졌다'''가 공개되었다.[68] 2010년엔 알렉스 카브레라마저 풀린다. 외국인 6명으로 운용이 가능할 뻔했으나 로즈가 재계약을 하지 못해 결국 카브레라로 돌려 5명으로 유지할듯 싶어보인다.[69] 그 사망한 메이저리거 투수 아니다. 2002년 SK 와이번스에서 뛰었던 그 페르난데스다.[70] 그 이후로 오제의 등번호인 41은 애도의 의미로 팀에서 사실상 준 영구결번이 되었으나 2020년 이후 외야수 사노 고다이가 사용하게 되면서 준영구결번은 해제.[71] 요코하마가 2000년대에 A클래스를 찍은 2001, 2005년 당시엔 센트럴리그에 CS가 없었다. 2007년부터 추가.[72] 3위 세이부는 68승 9무 67패(승률 .5037) 4위 오릭스는 69승 7무 68패(승률 .5036)[73] 사실 오타쿠 사이에서나 선두지 진짜 인기 선두 마스코트는 아시다시피 주니치의 도아라와 야쿠르트의 츠바쿠로다.[74] 이날은 호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고쿠보 히로키의 은퇴시합이었다.[75] 결국 홈런왕은 나카무라 타케야에게 돌아갔다.[76] (적어도 2010년대 이전까지)오릭스가 내보낸 선수들은 다른 팀에서 포텐이 터지거나 부진에서 벗어나 부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언급된 히라노도 그렇고, 보다 상징적인 사례로 긴테쓰 시절 40홈런을 치며 메이저에 도전했다가 LA 다저스에서 1년도 안되 폭풍 방출(...)된 뒤 오릭스에 돌아왔으나 부상과 구단과의 갈등으로 삽질을 거듭한 끝에 자유계약으로 풀린 강타자 나카무라 노리히로가 있다. 2007 시즌이 끝나고 오릭스에서 방출된 그를 주니치 드래곤즈가 육성선수로 헐값에 데려갔고, 그는 그해 주니치에서 20+홈런을 치는 등 맹활약하며 끝내 '''일본시리즈 MVP'''가 된다! 노리히로는 수년 뒤까지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주전 3루수로 활약하며 2013년에는 현역 통산 2000안타까지 달성한다.[77] 이토이의 FA 취득은 2017년에나 가능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최대 4년동안 쓸 수 있다.[78] 0.300/0.384/0.468 17홈런 61타점 75득점 33도루[79] 0.303/0.384/0.493 24홈런 91타점 60득점[80] 0.289/0.371/0.441 17홈런 91타점 60득점 1도루[81] 사와무라상 조건 7개를 모두 달성해서 다나카 마사히로보다 1개 앞섰지만 결국 다나카가 사와무라상을 탔다. [82] 시즌 마지막 등판 경기에서 부상으로 인해 2이닝 투구 후 교체됐다.[83] 1루수인 T-오카다가 다이렉트 캐치로 타자아웃, 1루를 밟아서 주자아웃,3루에 송구해서 3루주자 아웃. 헌데 1루심판인 요시카와는 1루앞에서 원바운드후캐치한걸로 판정했다.[84] 참고로 2008년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2위로 올라와서 홈에서 3위인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탈락. [85] 1953년 난카이 호크스. 12경기. 퍼시픽리그는 개막 3연전에서 6팀 모두 단 한개의 홈런도 치지 못했다.[86] 센트럴리그의 과거 꿈도 희망도 없었고 클라이맥스도 경험하지 못했던 요코하마 DeNA가 2016년에 리그 3위를 기록하며 클라이맥스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위인 요미우리를 누르고 파이널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다.[87] 1996년. 히로시마가 가졌던 종전 기록은 1991년.[88] 그래도 작년 꼴찌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거의 파리그의 독주무대인 교류전이란 걸 감안하면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는 데만 그친 셈(...).[89] 이 이전에도 2016년 한화 이글스 코치였던 니시모토 다카시가 닛칸스포츠 칼럼으로 오릭스 팀 내부 코치 배치전환을 비판하기도 했다.[90] 이 10만번째 홈런포에 함정이 있는데 사실은 본인이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친 홈런이 누의 공과가 돼서 취소가 된 덕분에 본인 바로 앞에서 홈런을 친 T-오카다의 홈런이 99999번째 홈런이 되고 100001번째 홈런이 되어야 할 자신의 홈런이 10만번째 홈런이 돼버렸다. 누의 공과라는 게 드물기는 해도 아주 안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하필이면 그 누의 공과를 자신이 기록하면서 마치 의도한 것처럼(...) 10만번째 홈런의 영광을 T-오카다에게서 뺏어간 모양새가 돼서 그쪽 인터넷 상에서는 누의 공과를 노리고 한 게 아니냐는 농담도 나오고 있다.[91] 2010년 치바 롯데 마린스를 2010년 일본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다. 리그 3위팀이 일본시리즈를 제패한 사례이며 언론은 사상 최대의 하극상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기린 바 있다.[92] 5위 롯데 534득점, 6위 라쿠텐 520득점으로 근소한 차이. 이 해 퍼시픽리그는 득점 순위와 리그 순위가 일치한 시즌이 되었다. 심지어 이 팀들은 '''투수가 타석에 서는''' 센트럴리그 최저득점 팀들인 한신과 요코하마보다도 50점 가까이 점수를 못 냈다![93] 이 1패는 오릭스 팬들 입장에선 상당히 뼈아픈 패배인게 일단 팀의 에이스로 급부상했던 영건 투수 야마모토 요시노부가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고 이 경기의 결승타가 하필이면 2018년 중반까지 오릭스에서 뛰다 요코하마로 트레이드된 포수 '''이토 히카루'''의 솔로 홈런이었다. 이토는 2019시즌 현재 요코하마의 주전포수로 완전히 정착하여 새로운 야구 인생 2막을 열었다. 반면 이토를 보내고 요코하마에서 받아온 포수 타카조 슈토는 트레이드 이후 1군 승격 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주전으로 박고 키우는 포수 와카츠키 켄야는 여전히 깝깝한 타격으로 팬들의 속을 터트리는 중이다. [94] 이게 디엔에이의 유일한 교류전 루징 시리즈다. 교류전 깡패라던 소프트뱅크도 동률 시리즈로 물러났다.[95] 롯데의 입단 테스트를 받다가 중간에 포기한 경험이 있다.[96] 그리고 로메로는 시즌 초반이긴 하지만 무지막지한 타격감을 자랑하며 라쿠텐 타선을 이끌고 있다. 비싼 돈을 주고 데려온 애덤 존스에게 바라던 성적을 로메로가 찍고 있는 상황. 참고로 애덤 존스는 OPS 7할 정도만 간신히 유지하면서 딱 1군에서 말소당하지만 않을 성적을 기록하며 먹튀를 하고 있다(...)[97] 오릭스 팬은 언제나 위가 아픕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작년에 잘 쳤지만 부상이 많아서 돈값 못한다고 방출한 로메로는 250만 달러 정도를 받았고, 올해 라쿠텐에서는 100만 달러도 못 받는다. 몸값이 거의 1/3토막이 난 셈. 애덤 존스의 보장금액이 올해만 400만 달러인 걸 감안하면.. [98] 정규시즌에서 한 팀에게 6연전을 스윕 당한 사례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다.[99] 근데 그 롯데는 바로 다음 상대인 라쿠텐 상대로 1승 5패를 기록하며 DTD를 시전했다.[100] 3루 코치의 실책이 크다.[101] [102] 프로그래머 아니다. 그 사람은 鈴木裕로 이름 한자도 다르다.[103] (8월 20일 경기종료 기준) 개막 이후 53경기 16승 33패 4무. 개막 이후 팀 승률 .327, 8월 팀 승률 .133 [104] 도쿄 돔에서 일본 사회인야구 대회인 도시대항야구대회가 개최됨에 따라 홈구장을 내주게 됐다.[105] 구단 신기록[106] 구단 신기록[107] 공식적으로는 한큐가 삼성에 무상 트레이드 한것으로 서류를 등록했다.[108] 2013년 OSB저축은행으로 사명변경을 했다.[109] 이미 오릭스는 오래전에 국내 지사가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오릭스 한국지사는 예전에 삼성동 도심공항터미널 근처에 있었다가 2019년 현재는 역삼동으로 이전했다.[110] 2020 시즌부터 등번호 11로 변경.[111] 2019 드래프트 1위. 2020 입단[112] 오키나와 출신.[113] 2019년 방어율 1.95로 퍼시픽리그/센트럴 리그 포함 양 리그에서 최우수방어율 타이틀 차지. (오릭스 구단 내에서는 최연소 최우수방어율 타이틀)[114] 2020 시즌부터 등번호 43에서 팀 에이스 번호인 18로 변경. 2019 시즌 최종전에서 은퇴한 투수 기시다 마모루가 쓰던 번호다.[115] 2019년 13승 4패로 퍼시픽리그 승률왕 타이틀을 차지.[116] 2020 시즌부터 등번호 13에서 팀 에이스 번호인 19로 변경. 가네코 치히로가 쓰던 번호다.[117] 2019 드래프트 3위. 2020 입단[118]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던 그 선수가 맞다. 심지어 한화 시절보다 훨씬 잘 던졌다![119] 이 선수는 같은 팀의 선배 내야수 스즈키 코헤이와 발음이 완전히 같은 본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등록명을 정했다. 약간은 T-오카다와 비슷한 케이스. 하지만 2019년 오프시즌에 선배 내야수 스즈키 코헤이는 2019시즌 자신의 프로 경력상 최고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모르게 팀에서 짤리고 2020 시즌부터 1군 코치 보좌(...)를 하고 있다. 그리고 K-스즈키는 등록명에 변함이 없다. [120] 오키나와 출신.[121] 2019 드래프트 4위. 2020 입단[122] 2020년 입단[123] 2020년에 지배하가 된 선수로 1군 경기 출장 가능[124] 지바 쇼크때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의 선발투수로 등판한 선수. 양다이강과 양야오쉰의 사촌인 대만 야구의 명문가 출신이다. NPB 등록명은 張奕의 일본어 발음으로 정해 쵸 야쿠라고 부른다. 참고로 일본어의 跳躍(도약)이랑 발음이 같다. 2020년부터 등록명을 일본어 발음에서 타이완 발음으로 바꾼다는 말이 있었는데 잘 안된 듯.[125] 외국인이긴 해도 일본 소재 고등,대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1군 외국인 선수 등록 제한과 관련없이 일본인 선수와 동일하게 경기 출장 가능. [126] 이 선수는 2018년 들어 포수보다 1루수로 출장 중. 전혀 기대하지 않던 타격이 의외로 잠재력이 폭발하여 시즌 중후반 선발 5번 타자로도 자주 출장했다. 2019년부터는 본업인 포수로 출장. 하지만 2019년 교류전 중 아킬레스건 부상을 입었다. 2020년 개막부터 경기 출장 중[127] 2019시즌 중 트레이드로 주니치에서 이적. 후술할 크리스 마레로의 누의 공과를 어필하였다.[128] 팀의 주전 포수. 성우 타치바나 리카의 배우자이다. 결혼 후 타격 상승 중. [129] 프로 입단 후에는 3루 수비를 맡았으나 2019년 후반부터 고교 때 포지션이었던 포수로 전향.[130] 여담으로 투수 야마모토 요시노부의 고향 친구이며 고향에서 집이 옆집이라고 한다.[131] 부상이 잦아 출장이 적은 편[132] 2014년 소프트뱅크에서 FA로 이적[133] 2019 드래프트 5위. 2020 입단[134]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서 포수 타카조 슈토와 함께 2018년 트레이드로 입단했다. 오릭스에서는 포수 이토 히카루와 투수 아카마 켄을 보냈다.[135] 팀의 확고한 주전 유격수.[136] 福田周平. 롯데의 후쿠다 슈헤이(福田秀平)와 한자가 다르니 주의.(나무위키 후쿠다 슈헤이 문서는 현재 롯데 선수만 있다.) 롯데의 후쿠다 슈헤이만큼 유명하지는 않아도 , 루키 시즌에 팀의 주전급 2루수로 발돋움. 2019 시즌에는 팀 캡틴을 맡았다.[137] 우투좌타에 2루수와 3루수를 소화할 수 있는 내야수라는 점 등, BW-Bs 출신 팀 선배 히라노 게이이치를 꼭 빼닮았다. 응원가도 그대로 물려받았고, 언제부턴가 38번이던 등번호도 히라노의 선수 시절 등번호와 같은 5번으로 변경하였다.[138] 오키나와 출신. 2루수와 중견수를 왔다갔다하며, 백업 유격수이기도 하다. 2019시즌부터는 팀의 주전 유격수로 자리잡았다.[139] 2020 시즌부터 애덤 존스가 입단함에 따라 등번호를 10에서 9로 변경.[140] 2019 드래프트 2위. 2020 입단[141] 2루, 1루, 3루와 외야 전포지션 소화 가능. 아쉽지만 타석에서의 활용도는 별로...였는데 2019시즌부터는 타격에 눈을 뜬 느낌이다. 그래봤자 발빠른 똑딱이지만...[142] 2020년 입단. 2019년 시즌 전에 치바 롯데 마린즈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이유로 탈락시켜줄 것을 요구하고 중도귀국한 흑역사가 있다. 다만 2019년에도 트리플 A에서만 뛰면서 일본행. [143] 오키나와 출신.[144] 오사카 PL 학원 야구부를 나온 최후의 프로야구 선수. 일명 최후의 PL 전사. 나카가와 본인은 최후의 PL 출신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자신이 프로 생활을 청산했을때 PL 학원 야구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다면 모교의 감독을 하고싶다는 소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근래들어서 쿠와타 마스미 등의 PL 학원 출신 야구인들을 중심으로 PL 학원 야구부 재건을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긴 하니 나카가와의 소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145] 2019시즌 중 트레이드로 주니치에서 이적.[146] 이 선수는 2018년까지 구단 홈페이지에 내야수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팀에서 이 선수의 육성 방향을 바꿔 2018시즌부터 외야수로만 출전한다. 2020시즌에는 주로 센터나 3루 등 내외야 관계없이 출전 중이다. 기니 혼혈의 좋은 피지컬을 가진 유망주지만 아직은 터지지 못한 툴가이 스타일.[147] 원래의 등록명은 이름의 슌타(駿太) 뿐이었는데, 2018시즌부터 풀 네임인 고토 슌타(後藤 駿太)로 등록명을 바꿨다. 유니폼의 이름 표기도 SHUNTA에서 GOTOH로 달라졌다.[148] 2020 입단. 2년계약에 800만 달러.. 참고로 2+1 계약에 옵션 다 합치면 1500만 달러가 넘는다.[149] 2020 시즌부터 등번호 93에서 41로 변경. 등번호 41은 비운의 선수 오제 히로유키의 등번호였으며 오제 사망 이후 징크스로 여겨진 등번호다. 오제에 관해 알고싶다면 검색바람. 사노의 등번호 변경은 사노 본인이 원한 것으로 알려짐.[150] 2019시즌 중 트레이드로 주니치에서 이적.[151] 2015년 드래프트 10라운더. 전체에서 2번째로 최하위 픽이었고 전체 최하위 픽 선수는 2020년 현재 방출당했다(...) 대졸+사회인 거포유망주임에도 불구하고 10라운더라는 낮은 지명순위가 말해주듯 2군 본즈 역할만 하고 있지만 4년 동안 터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에서는 장타력 때문인지 붙잡고 있는 중. 보통 하위픽이 2군에서만 있거나 대졸사회인이 2군에서만 있거나 하면 4년 안에 방출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선수는 둘 다 해당하는데도 살아남았다.[152] 2020.08.21~[153] 솔직히 말하면 이 코치의 실책 때문에 1년에 몇 번을 더 지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교체 안되는 걸 봐선 처세술이 대단한가 보다.[154] 캐리어 하이인데 팀에서 짤리고 코치 보좌...[155] 오릭스 팬의 영원한 오릭스 감독[156] 시즌 도중 해임[R] A B 시즌 도중 사임[157] 시즌 도중 대행으로 취임[158] 시즌 도중 사임[159] 시즌 도중 대행으로 취임. 시즌 도중까지는 2군 감독이었음.[160] 정확히는 최다탈삼진을 1956~57년 2년 연속으로 딴 적 있었으나, 당시엔 연맹표창이 없었다(...). [161] 다만 이건 본인이 별로 타이틀 등에 욕심을 갖는 성향이 아니었다. 시즌 종반에 최다승을 차지할 수 있도록 이긴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도록 감독이 촉구했으나 “남의 승리를 가로채는 짓은 참아 주십시오”라고 등판을 거부한 적도 있었고, 본인이 승리 투수가 되는 데도 별 집착이 없었던 터라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73년에는 자신의 통산 승리 수가 통산 패전 수를 웃돌게끔 구원으로 등판하라는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제안에도 이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10대 0으로 이기는 것보다는 0대 1로 지는 게 좋다. 승패보다는 충실한 투구를 했는지의 여부가 나한테는 더 중요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선수, 코치, 감독직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존경을 받았다. 심지어 노무라 카츠야는 "투수 같지 않고 부처님 같은 성격이다" 하고 했을 정도(...).[162]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긴테츠 버팔로즈에게 패배해 긴테츠의 첫 일본시리즈 진출을 허용했다. [163] 애니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보면 타키가와 크리스 유우의 아버지가 있는데 그 분 모델이 이 분으로 추정된다. 현역시절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낸 후 은퇴 뒤에 연기나 예능계에서 활약했다는 점이 유사하다.[164] 2004년 분배드래프트로 기적의 주인공과 같은 팀 동료가 되었고 2015년 5월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올드 유니폼 기간에 블루웨이브 올드 유니폼을 입은 오쿠보와 오사카 긴테츠 올드 유니폼을 입은 기타가와가 서로의 포지션을 바꿔 시구와 시타를 했다.[165] 다만 판정 자체는 옳았다. 다음 날 신문에 도이 쇼조의 발이 홈에 닿은 사진이 올라온 것.[166] 항목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1964년까지는 한큐, 1965년엔 킨테츠 버팔로즈 소속으로 뛰었다.[167] 이쪽은 파나소닉(당시엔 마츠시타) 사회인 야구팀 동기이기도 하다. 후쿠모토는 아예 카토 덕에 프로 데뷔가 가능했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168] 입단 당시 히라노는 자유획득제도(상위지명 후보가 희망 팀 선언 후 우선 교섭을 하던 제도로, 이전의 역지명 제도와 비슷하다. 2006년 폐지)로 입단한 사실상 1라운더였고, 고토는 같은 해에 10라운더로 입단한 하위픽이었다. 하지만 입단 후에는 히라노가 못한 건 아니지만, 고토가 예상 외로 잘하는 바람에 거의 동급의 선수로 평가 받게 되었다. [169] 히라이는 트레이드 덕분에 아래에 하술할 미노다 고지처럼 일본시리즈 반지를 추가득템하게 된다.[170] 전체 15위.[171] 단 크리스는 54경기에서 타율 .209를 기록한게 끝이라 메이저 경험은 데븐이 더 많다.[172] 다만 데븐은 크리스와 달리 원래부터 준족의 똑딱이 성향으로 보인다.[173] 메이저리그 22라운드 지명자로 지명 때부터 동생이랑 사촌동생보다 기대치가 낮았고 트리플 A가 최고기록이었다. 2015년에는 멕시칸리그에 입단하였으나 두 달 만에 방출.[174]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3라운드 출신으로 10년 동안 724경기에 출장. 일가들 중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175]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8라운드 지명. 현재 2년차인데 싱글 A에서 멘도사 라인의 타격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 엘리 마레로와는 한글 표기법은 같지만 알파벳이 달라서 주니어가 아니다.[176] 1978년까진 나가이케 토쿠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79년부터 개명.[177] 그러나 성장세가 느려서 유망주라고 하기엔 나이가 꽤 많았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콜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뭐 약쟁이로 밝혀진 지금이야...[178] 2016년 기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마지막 현역 선수였고 2019년 은퇴하며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모든 선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179]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180] 전, 후기 통합우승으로 플레이오프 무산[181] 전, 후기 통합우승으로 플레이오프 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