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호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고영호는 1920년 12월 16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우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에서 고성현(高成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34년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6학년 때 일본인 교장 나카야마 시게요시(中山重義)가 조선어 사용을 억제하는 것에 항의하다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심상고등소학교에서 공부하며 노동을 병행했는데, 이때 노동 현장에서 조선인에 대한 극심한 차별을 체험한 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 1942년 심상고등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4월 동창생 윤병윤(尹炳允)·한종치(韓宗治)·정진환(鄭鎭煥)·하백문(河伯文)·이행철 등과 함께 오사카의 한 자택에서 조국 광복에 나서기로 서약하고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했다.
1942년 6월, 그는 조선독립청년단 회합에서 비밀을 엄수할 것, 민족 의식을 앙양하는 운동을 펼칠 것 등을 결의하였다. 또한 한국 내의 애국 동지와 종교계 인사들과 연계하고, 나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원과도 접촉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43년 2월 고베시의 한 저택에서 회합을 가지고 있을 때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고영호는 극심한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1944년 1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5년 7월에 만기 출소했다.
8.15 해방 후, 고영호는 1945년 10월 초 오사카에서 열린 한민족 궐기대회에 참석했으며, 1947년 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중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전투 도중 몸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았고, 완쾌 후 일본 내에서 여러 회사에 근무했다가 1984년 제주시로 귀향했다. 이후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 2004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고영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