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보

 


1. 개요
2. 생애


1. 개요


高龍普
( ? ~ 1362)
고려 말의 환관.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아 엄청난 권세를 휘두르며 전횡을 부렸고 충혜왕 폐위에 일조하고 충목왕을 옹립하는 등 정사까지도 좌지우지할 정도였으나, 조일신의 난 이후 정계에서 사라진 끝에 결국 공민왕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2. 생애


고용보의 본관은 전주로, 원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출신으로서 천한 신분이었다. 사회 밑바닥 출신으로 고려에 계속 머물렀다면 천대를 받았겠지만 그는 자신에게 내려온 동아줄을 잘 잡았다. 당시 원나라는 고려로부터 매, 인삼 등 다양한 공물을 징발해가면서 화자[1]도 데리고 가서 환관으로 써 먹었다. 이렇게 환관이 된 고려 청년들은 각종 잡일에 동원되었지만 이따금씩 원 황제의 총애를 받아 관직을 하사받고 권력까지 넘보는 등 권력의 중추에 다가서는 케이스도 있었다. 고용보 역시 바로 그런 케이스.
언제 그가 원으로 넘어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1310년대 정도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쨌든 원으로 넘어가서 환관으로 일하던 그는 1333년 기자오의 딸 기 씨를 원 조정에 추천해 원혜종의 차를 맡는 궁녀로 들여보내면서 본격적으로 기를 펴기 시작한다. 이 기 씨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기황후.''' 1340년에 비로소 기 씨가 제 2황후로 책봉되자 그 역시 기 황후를 등에 업고 원 황제로부터 자정원사라는 관직에 임명받았다. 자정원은 바로 기 황후의 재정을 담당했던 기구로 자정원사가 바로 그 곳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는데 순식간에 왕후의 측근 심복이 되어 요직을 꿰찬 것.
이렇게 고용보는 기 황후의 뒷배로 승승장구하였고 기 황후의 원 조정 내에서의 영향력이 커져갈수록 그의 힘 역시 급속도로 강해졌다. 얼마나 권세가 강했는지 충혜왕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를 대광완산군 작위를 줬을 정도.
그는 마침내 1342년 원의 사신 자격으로 고국 고려의 땅을 밟았는데 이는 원순제의 명을 받아 기 황후의 모친인 이 씨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부터 고용보는 고국 고려는 물론 조정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전횡을 부렸는데 심지어 충혜왕에게 매를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질책했을 정도였다. 그는 그리고 권문세족의 우두머리이자 기황후의 오빠였던 기철과도 뜻을 맞춰서 일파를 이뤘다.
1343년 그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는데 이 때 충혜왕의 난행이 원 조정까지 알려졌고 이에 황실에서는 충혜왕 폐위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용보는 황제의 명령으로 충혜왕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고려에 들어오게 된다. 이 때 충혜왕은 뭔가 낌새를 차렸는지 몸이 아프다는 꾀병을 부려가면서 사신을 맞기를 거부했지만 도리어 고용보가 경고를 날렸고 결국 충혜왕은 어쩔 수 없이 정동행성으로 조서를 받으러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충혜왕을 압송하기 위한 고용보의 계략이었다. 일전에 사신으로 파견와있던 도치 등이 충혜왕을 발로 차고는 그를 결박했고 이에 충혜왕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고용보는 도와주기는 커녕 도리어 충혜왕을 꾸짖었다. 도치는 충혜왕을 원으로 끌고가면서 고용보에게 고려의 내정을 전담하게 했고 이에 고용보는 전권을 받아 충혜왕의 신하들을 투옥시켰다. 이 사건은 당시 고용보의 고려 내 영향력을 알려주는 실사례였다.
그러나 고용보의 횡포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으니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을 헐뜯어 그를 악양현으로 유배보낸 뒤 사실상 죽음에 이르게 했고 1344년 당시 8살의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았던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을 원혜종에게 입조시켜 그를 고려 왕으로 옹립하는 공을 세웠다. 이렇게 고용보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인지 그를 따르던 일파들도 전횡을 부렸다.
그러나 고용보의 권세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으니, 바로 고용보의 전횡을 보다 못한 나머지 원의 어사대에서 그를 탄핵했기 때문. 그렇게 원에서 사실상 힘을 잃은 고용보는 금강산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그러나 곧바로 충목왕에게 불려진 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인지 기철과 함께 조정을 좀 먹으면서 횡포를 부렸다.
결국 이러한 고용보의 횡포는 스스로 본인의 목숨줄을 끊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1352년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면서 기철 등과 함께 본인을 타겟으로 삼자 곧바로 조정을 떠나 숨어 살게 된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합천 해인사로 도맡쳐서 중인 척 위장하여 살게 된 것. 그러나 공민왕은 일전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는데 바로 고용보가 자신의 형인 충혜왕 폐위를 주동한 것으로도 모자라 목숨까지 잃게 만든 것.[2] 끝내 고용보는 1362년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 정지상에 의해 처형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독만태감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배우는 이원종.
[1] 성 불구자를 뜻하는 말.[2] 물론 충혜왕이 고려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 주저없이 꼽힐 정도로 수 많은 막장 행각을 벌였지만 어쨌든 한 나라의 임금이었다. 그리고 전술된 것처럼 충혜왕이 진심은 아니었더라도 어쨌든 고용보를 잘 대해줬기도 하다. 그러나 고용보는 그런 충혜왕이 도움을 청하자 무시하고는 그를 겁박하면서 무례를 저질렀고 끝내 그를 폐위한 후 죽게한 셈이 되었다. 당연히 친형의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버린 고용보에게 공민왕은 원한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