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행성

 


정동등처행중서성 征東等處行中書省
1. 개요
2. 상세
3. 성격
4. 기타
5. 같이보기


1. 개요


'''정동등처행중서성'''(征東等處行中書省), 줄여서 '''정동행성'''(征東行省)은 고려 원 간섭기 시절의 내정 간섭 기관이다.
여몽전쟁의 종전 이후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의 서경에 설치되었다. 원의 2차 일본 원정 직전인 1280년(충렬왕 6년)에 설치되었으나 일본 원정이 실패한 뒤 폐지되었으며, 이후 1283년(충렬왕 9년) 재설치되었다가 쿠빌라이 칸이 일본 원정을 포기하면서 다시 폐지되었다. 1285년에 세 번째로 설치된 이후로는 군사적 기능은 없이 오직 내정간섭과 권문세족들의 권력을 보전하기 위한 기구가 되었다.
'정동'이란 단어는 '동쪽을 친다'는 의미로, 이는 지리적으로 동쪽에 있는 일본까지 복속하여 동아시아 지역을 모두 정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행중서성' 또는 '행성'은 원나라 중앙의 행정기관이었던 중서성[1]의 지방 파견 기관을 의미하며[2] 보통 행성이라 줄여 불렀다. 이 때문에 줄임말이 '정동행성'이다.

2. 상세



쿠빌라이 칸은 약 30여 년에 걸친 여몽전쟁 끝에 고려를 원나라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남송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정복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당시 일본의 정권을 장악한 가마쿠라 막부에게도 자신들에게 복속할 것을 종용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순순히 응하지 않자 결국 쿠빌라이 칸은 일본도 정복하겠다고 결정하고 1274년 1차 일본 원정을 진행하였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의지의 쿠빌라이 칸은 포기하지 않고 7년 뒤 1281년에 2차 원정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정동행성'이라는 조직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2차 원정은 처참하게 끝났고, 결국 1282년 정동행성은 다시 폐지되었다. 원은 이듬해 3차 원정을 계획했고, 정동행성 역시 이 과정에서 1285년에 다시 설립되었다. 하지만 3차 원정은 계획으로만 끝났다. '일본 원정'이라는 본래의 목표가 사라져버린 이후, 정동행성은 일반적인 행정기구로 성격이 변모했다. 그렇다고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차지했던 것은 아니고, 기껏해야 하정사(賀正使)[3]를 파견하는 것과 같은 부수적인 일을 담당하는 게 전부였던 정도. 원이 고려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남긴 기관이지만 큰 효율이 없었다. 정동행성의 관리인을 고려인으로 뽑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원나라에 매를 바치는 응방의 영향력이 더 컸을 정도. 1285년쯤에 잠시 행상서성(行尙書省)으로 이름이 바뀐 적이 있었다.
그러다 1299년(충렬왕 25)에 한희유(韓希愈)의 반역 시도를 계기로 종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고려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당시 충렬왕충선왕의 부자 사이에 분쟁이 있었고, 신하들 또한 두 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정쟁 중이었는데, 이 대립이 원나라의 제실(帝室)에까지 얽혔기 때문. 원래 정동행성의 승상은 고려국왕이 맡았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원나라의 야율희일(耶律希逸)과 활리길사(濶里吉思)가 내려와 직접 고려를 통치했다. 이때 고려 상급관리들의 처벌은 반드시 원나라에 보고하도록 하고, 관리수를 줄이며, 노비제도를 원나라의 법식대로 고치도록 했다.[4] 하지마 세조구제를 내세운 고려 지배층의 저항으로 노비제 개혁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로 이따금 원나라가 정동행성의 힘을 키워서 고려 내정에 더 강하게 간섭하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고려가 강하게 반발한 탓에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이문소를 혁파하고 반원운동(병신정변)을 펼침에 따라 1356년 정동행성은 결국 철폐되었다. 그러나 20만 홍건적개경 침공 이후 1361년 원을 홍건적 격퇴에 동참 시키기 위해 다시 설치했고, 다음해에는 관제(官制)가 원 간섭기의 것으로 복구되었다가, 1369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3. 성격


이 행성은 원나라의 다른 행성들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견해도 있다. 본래 원나라는 중세 봉건제처럼 확대한 영토를 제후왕들에게 분봉하며 영토를 관리하였다. 하지만 원나라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제후왕들의 영토도 같이 넓어졌다. 때문에 강력한 제후왕들이 반란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으며, 대표적인 예가 만주의 옷치긴왕가의 반란이었다.[5] 이러한 제후왕들을 견제하기 위해 원나라는 전국에 행성 11개를 설치했는데 그중에 정동행성도 있었다.
하지만 정동행성은 행정기구인 행성보다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이후 일본의 반격을 대비한 임시적인 군사기구로 역할하였다. 고려 역시 정동행성의 이러한 역할을 강조했고, 이는 충렬왕대부터 제기되었던 입성책동을 반대하는 중요한 논리가 되었다. 원나라의 다른 지방들은 제후왕과 행성이 병존하는 이중지배체제였지만, 고려는 정동행성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고려 왕이 정동행성의 승상을 겸하였다. 고려왕이 정동행성의 관리의 인사추천권을 가져 사실상 자체적인 인사권을 장악했고 정동행성의 관리들 역시 고려조정의 관리들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충혜왕 이후 고려 왕들의 폭정이나 왕권의 급격한 악화 때문에 달라졌다. 고려 왕은 더 이상 과거처럼 정동행성을 강력하게 장악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1299년(충렬왕 25)에 한희유(韓希愈)의 반역 시도를 계기로 정동행성은 종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고려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일종의 통감부 같은 기구로 바뀌었다. 당시 충렬왕충선왕의 부자 사이에 분쟁이 있었고 신하들 또한 두 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정쟁 중이었는데 이 대립이 원나라의 제실(帝室)에까지 얽혔기 때문이다.
원래 정동행성의 승상은 고려국왕이 맡았는데, 이 사건 이후 '''원나라의 야율희일(耶律希逸)와 활리길사(濶里吉思)가 내려와 직접 고려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 고려의 상급관리들의 처벌은 반드시 원나라에 보고하도록 하며, 관리수도 줄이고, 노비제도를 원나라의 법식대로 고치도록 했다.[6] 하지만 고려 지배층이 '세조구제'를 내세우며 격렬히 저항하여 노비제 개혁만큼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다(...).

4. 기타


  • 자랄타이가 제6차 여몽전쟁에서 총사령관인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임명되었다. 다만 이때 동쪽의 정벌해야하는 대상은 일본이 아닌 고려였다.

5. 같이보기



[1] 당령의 3성 6부에서 유래하여 당나라 이후 여러 국가의 정치모델이 되었다.[2] 왕궁의 지방 궁궐을 행궁(行宮)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3] 신년과 같은 기념일을 맞이해서 파견하는 사신을 지칭한다.[4] 웃기게도 노비제도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돌아가던 시기가 이 때였다. 고려 지배층들은 노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는데, 원나라는 노비를 오히려 줄이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남송인은 노예로 삼았지만 동족노비화가 아니라 민족 자체가 노비인 특이한 경우였고, 그 외 노비는 모두 죄인이었다.[5] 옷치긴왕가를 견제하는 것이 바로 심왕이었다. 이후 원무종을 지지했던 충선왕이 심왕을 겸했지만, 원인종이 충선왕에게 승상자리를 제안하였다. 제후왕이 승상을 겸한 경우는 없으므로 사실상 두 왕좌를 겸했던 충선왕을 견제한 것이었다. 결국 충선왕은 심왕은 조카인 왕고, 고려왕의 아들은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만권당을 지어 정치에 뜻이 없음을 드러내었다.[6] 웃기게도 노비제도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돌아가던 시기가 이 시기였다. 고려 지배층들은 노비들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원나라는 오히려 노비를 줄이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남송인은 노예로 삼았지만 동족노비화가 아니라 피지배 민족 자체가 모두 노비인 특이한 경우였고, 그 외 노비들은 모두 죄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