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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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8대 임금.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 휘는 정(禎). 몽골식 이름은 왕부다시리(王寶塔失里).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공민왕의 형이다.
2. 시호의 의미
충혜왕이라는 시호는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다.
'충'은 원 간섭기에 재위했던 왕들한테 '너희는 신하니까 우리한테 충성해라'라는 의도로 원나라에서 준 글자로[2] 뒤의 혜는 왕의 행실상 좋은 시호를 줄 수는 없으니 마지 못해 은혜 혜(惠) 자를 썼다고 한다.
굳이 충혜왕뿐만 아니라 한국이든 중국이든 시호에 은혜 혜 자가 들어간 군주는 심각하게 무능했거나[3] 사이코패스였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4] 사실 충혜왕이 저지른 막장 짓을 보면 해릉양왕을 연상시키는데 대체 왜 시호에 양(煬)이 안 들어갔나 싶을 지경이다.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인데 뒤 효 자는 효성스러웠다고 형식상 올리는 시호이며 앞의 헌 자는 후한 헌제나 고려 헌종과 같이 약한 임금들에게 올린 시호이다. 자주적인 시호를 올린 고려 국왕은 공민왕인데 비록 자신의 형이지만 그의 악행이 커버가 안돼서 이런 시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충혜왕 따위와 고려 헌종, 후한 헌제를 비교하는 것은 후자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지만.
3. 생애
3.1. 막장 행보
'''연산군도 학을 떼는 한반도의 귀축왕. 중국 대륙에 해릉양왕이 있었다면 해동에는 충혜왕이 있었다.'''
세자 시절부터 그 막장끼가 보여 절 지붕 위의 새를 잡는답시고 절에 방화를 한 뒤 도망가거나[5]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거나 술을 즐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아들의 만행을 듣게 된 부왕인 충숙왕도 경악하여 "예끼 이놈! 너는 왜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느냐!"라고 욕까지 할 정도였으나 삐딱하게 굴며 말로만 고친다 하고 고치지 않았다. 이후 즉위식을 치르러 고려로 오다가 마침 원나라로 가던 부왕과 황주에서 마주쳤는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길 위에서 몽골인들의 유목민식 인사인 호례(胡禮)[6] 하는 아들에게 "네 아비와 어미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디서 내게 호례를 행하느냐? 그리고 옷은 또 뭐가 그렇게 사치스러우냐?"라고 꾸짖는 충숙왕의 서슬퍼런 호통에 놀라서 울며 물러났다고 한다.
아버지 충숙왕도 꽤나 막장이라 아내를 폭행하며 신하의 아내를 뺏고 하는 등의 일로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것과는 달리,[7] 충혜왕은 진짜 정치를 못한다는 이유로 왕 자리에서 잠깐 쫓겨났다가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왕위에 복위된 경우다. 충혜왕은 왕이 되자마자 정사에는 관심도 없고, 여색을 지나치게 즐겼으며, 내시들과 씨름이나 즐겼다. 심지어 그가 궁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주춧돌 밑에 아이를 묻는다"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8]
특히 충혜왕은 연산군처럼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이쁘면 전부"라는 식으로 마구 겁탈을 했다. 이 막장 행각이 절정에 달한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즉, 장모와 새어머니)들을 강간'''했다.
이 인간이 겁탈한 충숙왕의 아내는 2명으로 한 명은 수비 권씨(壽妃權氏), 다른 한 명은 당시 충숙왕의 정비(正妃)격인 위치에 있었던 경화공주(慶華公主)[10] 였는데 경화공주를 범할 때 모양이 진짜 막장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공주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송명리[11] 등의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지를 묶고 범했다.'''5월 병인일,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월 경오일,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정을 통했다.
5월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오서는 곧 복위하실 것이니 백성들을 잘 다독거리고 아낌없이 상을 내리소서."라고 진언했다.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데 있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하여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8월 갑오일, 경화공주(慶華公主)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복위 2년 3월 초하루,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을 보내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때려 죽였다.
같은해 8월에는 날마다 사냥을 다니다 겨울이 되어 여의치 않자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가서 그의 처 이씨를 강간하였고 전에 때려죽인 바 있는 박이라적의 첩과 상관하였으며, 재상 배전의 집에서 그의 처와 그의 아우 금오의 처를 번갈아 간음하기도 하였다.[9]
또 경화공주가 원통하여 참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했는데, 이 때 충혜왕이 연안군 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등에게 명하여 마시(馬市)를 금하여 공주가 말을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충혜왕에게 강간당한 경화공주의 밀고로 조적 등 심왕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감춘 뒤 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충혜왕은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 그 뒤 경화공주를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 임숙의 집에 유폐시킨다.
이 개막장짓이 발각된 것은 얼마 후의 일로, 원나라에서 국새를 가지고 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할 때였다. 두린은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는데, 경화공주는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수치심에 울기만 했다. 이에 다른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난 후에야 경화공주는 자신이 당한 수치를 두린에게 말하게 되고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원으로 압송한다. [12] 충혜왕은 원으로 끌려가 투옥되었다가 자신을 고발한 환관이 실각하자 다시 복위했는데, 그의 입지가 원나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배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이것 외의 기록들은 링크를 참고하자.#
3.2. 원나라 사신 실덕
이처럼 흉포 무도한 충혜왕에게도 무서운 사람이 한 사람 있긴 하였는데 원 사신 실덕이라는 자였다. 한번은 충혜왕이 한창 새 궁궐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시기에 몸소 담장에 올라가서 공사를 감독하였고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두어 들였는데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기한을 늦추는 자가 있으면 몇 곱의 베를 벌로 받았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시달렸고 소인배들이 이때를 틈타 치부에 열을 올리고 충직한 인사들은 배척 당해 한번만 바른 말을 하면 살육을 당하기에 두려워하여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판국에 1343년 7월 원나라에서 오던 사신 실덕은 길거리에 나부끼던 방문에 "나무와 돌을 기한 전에 바치지 않는 자는 베를 징수하거나 섬으로 귀양 보낸다." 씌어진 것을 보고 대노하였다. 농사가 한창인 시절에 이렇듯 백성들을 동원해 부역을 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꼴을 보고 실덕은 곧 귀국해 원 황제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이에 충혜왕은 채하중을 친히 보내 원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지 말 것을 간청하였는데 일국의 왕이 타국의 일개 사신에게 비굴하게 간청해 선처를 구한 것이다.
3.3. 폐위와 최후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와 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 중 원탑을 달리던 기철이 원나라 황제에 청을 넣어,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3] 이 둘이 '''한국사 탑클래스를 달리는 유명한 간신배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데, 사실 간신배라고 해도 어쨌든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다. 충혜왕은 의외로 눈치는 빨랐는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출두를 거부했지만, 결국 원나라 사신은 충혜왕을 속여 그를 정동행성 내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처음부터 폐위시킬 생각으로 유인한 거니 보자마자 사신은 왕에게 무엄하게도(?) 발길질을 했고, 환관 고용보는 이를 본체만체하였으며, 사신의 호위병들은 압송이란 이유로 주위에 칼부림까지 해 사상자가 속출했다.[14] 이날이 1343년 11월 22일(음력) 갑신(甲申)일, 1343년 12월 9일(양력)이었다. 이에 따라 직무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왕권이 정지되었다. 시종을 드는 사람이 없어 왕이 직접 짐을 들고 압송되었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지방 수령에게[15] 추워서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그 관리는 '''"네가 잘못해서 못 주겠다!!"'''라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겪는다.(...) 물론 뒤에 그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관리를 처벌한 사람이, 원에서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하기까지 했던 타치(朶赤)라는 몽골인이었다.[16] 안균이 그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고 일러바치자, 타치는 "너한테 여기를 다스리게 해준 사람이 누구더냐? 네가 모시는 왕이 추위를 못 견뎌서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 게 신하의 도리냐?"라며 쇠자로 초죽음이 되도록 때렸다. 충혜왕 입장에서는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다.
원나라 혜종(순제)은 충혜왕에게 '그대의 죄는 너무나 커서 '''그대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지만'''(雖以爾血,啖天下之狗,猶爲不足),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는 식으로 말해서 주눅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시체를 갈갈이 찢어서 온 사방에 흩뿌려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죄인이라는 뜻이다. 보통 이런 류의 발언은 역성혁명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에게나 하는 것인데다, 당시 몽골인들이 땅에 피를 흘리는 처형 방식을 극도로 금기시한 것을 감안한다면 충혜왕의 행동들에 대해 원나라 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로 귀양간 할아버지 충선왕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을 간 2번째 고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 내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유배된 거였고 나중에라도 이용 가치가 있어서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충혜왕은 막장이라서 유배된 거였기에 빨리 죽어줄수록 고려와 원나라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인지 게양현(揭陽縣)[17] 으로 귀양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18] 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서하였다. 항간에는 귤을 잘못 먹고 체해 급사했다는 설도 있고, 독을 탄 술로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었다. 갑자기 사망한 걸 보면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게 확실해 보이는데,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고려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19]
王傳車疾驅 艱楚萬狀 未至揭陽 薨于岳陽縣。或云遇鴆。或云食橘而殂。國人聞之 莫有悲之者 小民至有欣躍 以爲復見更生之日。初 宮中及道路 歌曰 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至是 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 今日去 何時還。
유배지로 데려가는 함거(檻車)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왕은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게양까지 가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에서 죽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짐독(鴆毒)으로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그에 앞서 민간에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 이제 가면 언제 오냐?"라는 참요가 유행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어떤 사람이 이 노래의 앞구절을 "악양망고지난(岳陽亡故之難)"으로 풀이해 "악양에서 죽을 재난을 만났으니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 5년(1344년)
그나마 유해는 고려로 송환되어 영릉(永陵)에 안장되었다.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 달에 충혜왕에게 강간당했던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꼴은 보고서 저승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과 충정왕으로 즉위하는데,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그것이 고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러모로 진정한 막장 군주.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사관의 글을 보자.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회(回回) 사람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20]
를 챙겼으며 소를 도축[21] 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해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 충혜왕 세가 총서
4. 재평가?
최근 정치 운영과 개혁 정책을 분석한 결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에 역대 충자 돌림 왕들의 항목을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26]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22]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23]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24]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25]
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이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 제19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
그의 이런 성향은 어찌보면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이나 아버지 충숙왕 같이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렬왕이나 충숙왕의 경우에도 원나라의 압박이나 권문세족의 견제로 제대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고 이 왕들의 경우에도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이나 여색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혜왕은 어린 시절부터 원에 있으면서 그곳의 퇴폐한 풍속에 빠져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제왕학이나 정치적 자제력을 그에게 교육시켜 줄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는 것. 후대의 왕인 우왕도 어렸을 때부터 권신의 압박 때문에 이런 루트에 빠지는데 그때 큰아버지 충혜왕과 비교되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과한 행적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사에 실린 충혜왕에 대한 사신의 논평도 이와 비슷한 논지다.
충혜왕은 영리한 재능을 나쁜 데에 썼으니,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오직 늙은 신하 이조년[27]
만이 간곡히 충언을 올렸으나 그 말마저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5. 업적
후술할 편민조례추변도감 설치 이외의 업적을 굳이 찾자면 한가지 있긴 있다. 1330년 7월 무자일, 낭장 김천우가 원나라에서 돌아와 "원 조정에서 전 정동행성 좌우사 낭중 장백상의 건의에 근거해 고려에 장차 행성을 설치할 것이라고 한다" 고 보고한다. 이에 충혜왕은 즉각 원나라 태사 우승상 연첩목아에게 서한을 보내 장백상의 간교한 말을 믿지 말고 원나라 왕의 의사를 잘 인도하여 고려가 스스로 풍속을 지키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유업을 편안히 계승하게 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이에 연첩목아가 원나라 황제에게 고해 고려에 행성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는 충혜왕이 즉위한 이후 최초로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겠다.
6. 사냥왕
재위 원년 당시 사냥 기록이다. 이게 고려사 충혜왕 원년 기록과 2년째 기록의 전부.[29] 참고로 사냥이라고 해서 그냥 활 하나 쥐어잡고 아무 산이나 가서 짐승 쏴잡는 수준을 생각하며, 그 정도 취미 생활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평민이나 지배 계층이라도 어지간한 집안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국왕이 사냥을 나가며 경호를 담당할 많은 호위병, 국왕과 신하들과 병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여러 요리사, 식재료와 사냥 도구 및 기타 비품을 운반할 짐꾼, 사냥터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경계를 설 경비병, 사냥감을 찾거나 몰아야 하는 몰이꾼 등 최소 수백명의 수행원이 필요하다. 그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숙식하려면 당연히 급료, 물품 등의 경비가 장난아니게 든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사냥 풍속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냥이란건 사실상 당시의 워크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말인즉 왕이 사냥을 자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중간에 왕 노릇 한 거라곤 4월 경인일에 끌려간 고려 국민들을 돌려달라는 글을 써서 보내기는 했다. 이마저도 돌아와서는 사냥 다닌 기록보다 궁 내에 강간, 살인 등의 기록이 늘어났다. 이건 뭐...
7. 가계도
- 제1비 덕녕공주
- 1남 충목왕 왕흔(1337년 ~ 1348년) (재위 1344년 ~ 1348년)
- 1녀 장녕공주(長寧公主, ? ~ ?) : 원나라 노왕[30] 에게 시집갔는데, 사위인 공민왕이나 덕녕공주에게 돈을 줬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이 시기 장녕공주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고 고려에서 절개를 잃었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왕과 결혼한 뒤 돈을 줬다는 노왕의 아버지에게 재가했을 수도 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가 명나라에게 점령되는 혼란의 와중에 실종되었다. 그러자 숙부인 공민왕은 신하들을 시켜 장녕공주를 찾게 했다. 그 후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가 장녕공주를 찾아 고려로 돌려보냈고,[31] 공민왕은 장녕공주를 그 어머니인 덕녕공주와 살게 했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덕녕공주와 살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제2비 희비 윤씨
- 2남 충정왕 왕저 (1337년 ~ 1352년) (재위 1349년 ~ 1352년)
- 후궁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 林氏, ? ~ ?) : 충혜왕과 비슷한 성품으로, 충혜왕의 비위를 잘 맞추어 총애를 받았다(마치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처럼).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본래 종실 단양대군의 여종이었다. 상인의 딸로 충혜왕을 만나기 전에는 사기 그릇을 파는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기옹주(沙器翁主)라고 비꼬아 불렀다. 충혜왕은 열약을 즐겨 먹어 여러 비빈들이 성생활을 못 견디거나 병에 걸리기도 했는데 임씨만이 능히 감당하여 총애를 받았다.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간 후 은천옹주도 궁에서 쫓겨났다.
- 후궁 화비 홍씨(和妃 氏洪, 생물년도 미상): 경상도 진변사인 홍탁의 딸. 충혜왕은 그녀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정식으로 궁궐로 불러들이지도 않고 후궁으로 삼았다. 위의 은천옹주는 원래 일개 궁인의 신분으로 충혜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홍씨가 화비로 책봉된 것을 질투했다. 그래서 충혜왕이 은천옹주로 책봉해줬다. 그런데 충혜왕은 화비 홍씨에게 금세 흥미를 잃어서 궁 밖에 방치해 둔 채 자주 찾지 않았다고 한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코에이의 원조비사 정발판 시나리오 3에서 충숙왕 자식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정발판 자체가 시대가 뒤틀려서 크게 상관은 없다. 능력치는 방탕하고 무능한 군주였던 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치력이 D이고 전반적으로 별로이지만 그래도 왕자라 나중에 충숙왕을 죽이고 동생인 공민왕을 군주로 하는 플레이를 할 때 정복지의 군주로 잘 써먹을 수 있다.
- SBS 드라마 신의에서 잠시 등장한다. 다만 이 드라마는 퓨전 드라마이고 공민왕 시절이 배경인지라 크게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적이 짧고 굵게 표현된다. 대낮부터 기녀들을 끼고 술판과 춤판을 벌이던 충혜왕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최전방에서 싸워온 적월대 부대의 유일한 여인인 단백을 발견하고 “어명이니 옷을 남김없이 벗어보라”며 추태를 부렸다. 이를 대장 문치우가 막아서자 충혜왕은 드디어 본심을 드러낸다. “너희들도 똑똑히 봤지? 저것들이 저렇게 방자하다. 백성들이 임금인 나보다 저것들을 더 믿는다 했어!” 외치며 마지막 속옷을 벗지 않는 단백을 향해 칼을 겨눴지만, 문치우가 단백 대신 왕의 칼을 맞았다. 이 일로 문치우는 죽고 단백은 충격으로 자살하며, 문치우의 제자이자 단백의 연인이었던 최영은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배우는 오현철[32] .
- 인터넷에 떠도는 것 중 역대 우리나라 왕들의 모습을 상상해 그린 삽화들이 있다. 역사편찬위원회의 "대한민국 5000년사 역대왕조실록"에 실린 삽화로 추정되는데 눈매가 상당히 음흉해보인다. 왠지 모 야겜의 남자 주인공과 닮았다. 그런데 30살에 죽었는데 심히 늙어보이는 얼굴이다.
- 만화가 박종관이 그린 아동 역사 만화인 <고려왕조 500년>에선 주인 닮아서 인상이 상당히 불량한 말을 탄 채 "으하하, 내가 누구냐? 바로 돌아온 탕아야!"라는 중2병 가득한 대사로 첫 등장했다. 죽어서 퇴장하는 컷의 대사는 "탕아의 최후구나."
9. 기타
- 대부분의 한국사 교재에서 충혜왕 부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한두 교재에서 간단히 '폭정을 한 왕'이라고만 대충 나오는 정도.[33] 앞의 증조할아버지 충렬왕과 할아버지 충선왕이나 더 이후의 왕인 동생 공민왕이 많이 나온다. 굳이 충혜왕의 업적을 찾는다면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설치해 개혁을 시도했다 딱 이 정도만 나온다. 그나마 이것도 상급자용.
- 충혜왕 때와 관련된 <고려사>의 기록 중에 우리나라에 만두가 고려 시대에 전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있는데, 문제는 이 기록이란 게 어떤 사람이 만두가 먹고 싶어 궁중 주방에 침투해 만두를 먹다 걸려 처벌받았다는 기록. 다만 이 때의 만두는 상화라는 것으로, 고기나 야채로 된 속이 들어가는 쟈오쯔(교자)가 아니라 만터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 제수인 노국대장공주와는 몽골식 이름이 같다.
-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방영 전 공개된 자료를 통해 주진모가 연기하는 충혜왕이 3명의 주연 중 한 명으로 비중있게 소개됐는데, 설명상 실제 폭군의 모습에서 심각하게 미화되어 있어서 반발이 컸고, 결국 실제 방영 중에는 가상의 고려왕 '왕유'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드라마 전개 중 등장하는 복위 횟수며 사망 시기며 전부 왕유와 충혜왕이 비슷하여, 충혜왕을 기반으로 왕유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 개막장 인생이었던 충혜왕과는 달리 충혜왕의 장남인 충목왕이나 동복동생인 공민왕은 충혜왕과 가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인물들이다. 아들 충목왕은 12살에 요절했지만 오래 살았다면 명군이 되었을 것이라는 평을 받는 모습을 보였고, 동생인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펼쳤던 개혁군주였다.
- 시호인 충혜는 관우가 북송으로부터 추증받은 시호이기도 하다.
- 충혜왕이 좋아하던 고려가요로 '북전(北殿)'이라는 노래가 있다. 충혜왕 당시 같은 이름의 궁궐을 완공했을 무렵에 생겨난 노래라고 한다. 당시에는 '뒷전' 혹은 '후전진작'이라는 제목으로 불렸으며 조선 초기까지 유행했던 노래다. 망국의 곡인 데다가 가사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성종(조선) 시기에 노랫말이 한 번 용비어천가스럽게 개사된 후 18세기까지 활발히 연주되고 불렸다. 아무래도 가사가 문제인 데다가 원형에서 변화를 많이 겪어서인지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도 잘 소개되지 않는 노래이다. 바뀌기 전의 노랫말은 아래와 같으며,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전해 내려온다. 해당 노래가 시조의 초기 형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멜로디를 들어보면 느긋하면서도 흥겨운 멋이 있는데, 이 때문에 노래가 오래 살아남았던 듯하다. 태종(조선)도 '후전진작은 노래는 좋지만 가사가 저속하다'면서 불평하기도 했다.
> 전차 전차로 벋님의 전차로셔
> 설면자(雪綿子)ㅅ 가새론듯 범그려셔 노옵새
>
> (정신이) 흐려질 만큼 누그러져서 사랑하신다면 얼었다가 누그러지듯이 쫓아다니세
> 까닭 까닭으로 벗님의 까닭으로서
> 설면자(풀솜)의 가시인 듯 뒤섞여서 노세.
> 누운 들 잠이 오며 기다린 들 님이 오랴
> 이제 누우신들 어느 잠이 하마 오랴
> 찰하로 안즌 곳에서 긴 밤이나 새오쟈
> 공방(空房)을 겻고릴동 성덕을 녀표릴동
> 내종(乃終) 시종(始終)을 모르옵건 마로나
> 당(當)시론 괴실새 좃잡노이다
> 아쟈 내 황모시필(黃毛試筆) 묵(墨)을 묻혀 창(窓) 밧긔 디거고
> 이제 도라가면 어들 법 잇거마는
> 아무나 어더 가셔서 그려보면 알리라
>
> 아차, 내 족제비털 붓이 먹을 묻히고 창 밖에 떨어졌구나
> 이제 (내가) 돌아가면 얻을 수 있겠지만
> 아무나 얻어 가셔서 그려보면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