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세족
1. 개요
'''권문세족'''(權門勢族)이란, 고려시대의 고려인 문벌 귀족 가문으로, 원나라의 간섭기 이후 관료계를 장악한 족벌 세력을 말한다.
고려 원 간섭기와 말기(1270년~1388년)의 지배층이다.
이 세력을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로, 사실 권문세족이라는 말은 없는 단어였다. 권문이나 세족이라는 용어가 각기 사료에 등장하기는 하나 그 의미가 다르고 권문세족이라는 용어 자체는 사료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 사료상의 지칭을 살펴보자면 보통 ‘권세지가(權勢之家)’, ‘세신대족(世臣大族)’, ‘구가세족(舊家世族)’, ‘권문(權門)’, ‘권귀(權貴)’ 등이 있다. 그 뜻을 풀어보자면 권세가 있는 가문, 대대로 이어오며 왕가를 섬기는 큰 신하 가문, 여러대를 이어온 명문가, 권세를 가진 문중 등이 되겠다.
이 가문들에는 고려 전기로부터 내려오는 문벌귀족, 무신집권기의 새로운 관인층인 능문능리, 원간섭기의 원경과같은 고려인 몽골어 통역관이나 고려인 환관, 고려 왕비의 사속인, 고려인 공신 집안, 무신 정권때부터의 일반 무신 등 여러 갈래 신흥 세력이 포함되었다. 또한 죄를 짓고 원나라로 도망간 윤수와 천민 출신인 이정은 매를 기르는 응방사로서 응방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2. 일반적으로 알려진 특징
무신정권 후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충렬왕대에 이르러 세력화됐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그 성분은 형성기에는 대체로 세 가지였는데 크게 나누면 ①고려 전기부터 존재하던 구 문벌귀족 가문 중 살아남은 세력 ②무신정권 시기에 새로 성장한 세력 가문 ③무신정권의 몰락기에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해지면서 농장과 겸병을 기반으로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고려인 대지주 호족층으로 나눌 수 있다. 이후, 충렬왕~충선왕 대를 거치며 원나라와의 특수관계를 이용해서 출세한 고려인 세력들이 등장하였고, 소위 친원세력, 부원배로 불리는 집단이 역사속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권문세족이란 고려인 부원세력들도 포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원세력과 나누어 보는 경우도 있다. 대다수의 권문세족들은 원나라에 적대하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고려의 독립성은 유지하려고 노력해서, 원나라의 간섭이 너무 심해지거나 아예 원나라의 일부로서 행성을 설치하려는 입성책동 움직임이 있으면 뭉쳐서 원나라에 대항하여 고려의 독립성을 지키려고 했으며, 정말로 원나라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 했던 고려인 환관 등의 부원세력들과는 차이점이 있다.
귀족으로 묶인 성분적인 부분에는 일관성이 없었으며, 맨 처음 이 권문세족들은 재상지종(宰相之宗)이라 하여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으로서 묶이고 나열되었다. 하나의 정치적 자파로, 혹은 제도적 귀족층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해당 시기에 왕실과 통혼이 가능할 정도로 권위가 높은 가문들을 권족으로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그 가문의 구성은 고려전기의 문벌귀족과 비교하면 상당히 변화가 있었다.
권문세족은 고려 초의 문벌귀족과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문벌귀족이 귀족끼리의 혼인을 통해 귀족으로서 가문 자체의 '''권리'''를 누렸다면 권문세족은 '''관직 그 자체'''를 중시했다. 다만 충선왕의 교지에서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가문으로서 언급된 사례를 보면 혼인 관계를 여전히 중시했던 것은 사실이다.
권문세족의 토지 경영은 전형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부재지주, 즉 중앙에 있으면서 간접적으로 지방 토지를 관리하는 지주의 형태를 보여준다.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하여 대농장을 경영하고, 이후 노비로 전락한 양민들은 농장을 경작하는 소작노비화 하였다. 이 과정에는 겸병의 폐해가 심각했는데, 한 땅에 주인이 여럿 존재하였으므로 한 경작지에서 세금을 중복으로 내야 했다. 이에 따라 양민의 수가 적어들고 조세를 내야할 백성이 줄어 들었으며, 이는 곧 국가의 조세 수입 감소로 이어졌다. 양민의 감소와 재정의 궁핍은 고려 후기, 왜구의 잦은 침략과 함께 큰 문제가 되었다. 반복되는 전란으로 인한 인구 감소, 대농장과 겸병의 폐해는 고려의 멸망에 일조했다.
이 토지 경영의 규모와 폐해가 얼마나 컸는지, 당시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토지의 넓이는 주(州)와 군(郡)을 넘어다니고 큰 산과 강을 경계로 하였다'(고려사 78권, 우왕 14년 7월 조준이 토지제도를 바로잡을 방책을 상소하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이다.
고려의 지배층이던 권문세족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고려인이였다. 원간섭기에 원나라에서의 간섭이 있긴 하였지만 고려인의 심한 반발로 인해 간섭은 제한적이였다. 하지만 기존 문벌과 무인정권때의 무신 귀족들은 무인정권때부터 시작한 농장 경영을 점점 늘려 나갔다 또한 고려왕을 시종하던 환관이나 고려왕의 측근이 된 하급 고려인 관리들은 농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황폐해진 땅에 나누어주는 사급지를 핑계로 농장을 늘리고 기존 문벌,무인들의 땅까지 빼았는 경우가 있었으며 그로 인해 충숙왕때 기존 귀족들의 반발로 충렬왕의 고려인 측근들 즉 권문세족들의 농장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또한 권문세족의 권력은 그들이 고위직이 되면서부터 사용할 수 있었다. 고려왕의 고려인 측근으로서 원래는 하급 관리였으나 충렬왕의 권세를 빌려 고위직이 되었다. 즉 매우 관료적인 성격인 것이다.
3. 반론
13 ~ 14세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권문세족이라는 세력 및 이들과 신진 사대부의 대립 구도에 대한 회의를 표하는 의견도 많아졌다. 굳이 그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권문세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심하는 의견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일단 '권문세족'이라는 호칭에 대해서, '''세족은 맞지만 권문은 아니다'''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몇 대에 걸쳐서 관직을 장악한 주요한 집안은 있었지만, 이들이 원과 연계해서 중앙 권력을 독점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가 일고 있는 상태. '재상지종'이라는 것도 그냥 유력 가문에 가깝고, 파평 윤씨나 해주 최씨 같은 가문은 문벌귀족 시절부터 원래 잘 나가던 가문이었다. 권문세족을 규정하는 집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 대부분 권문 세족을 보면 대부분이 전부터 세력이 크던 가문들과 원나라에 동원된 하급 고려인 가문들, 고려왕을 따라갔던 고려인 환관 또는 시종들의 신진 세력들이다.
직접 토지를 경작하지 않으면서 양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노비를 늘려 나갔으며 결국 그것이 중앙 재정의 궁핍으로 이어졌다는 서술은, 권문세족에게 보다 공격적으로 서술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이르는 양반의 생활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양반과 뚜렷이 구분되는 권문세족의 문제점도 있다. 유력 세도가들은 강과 산을 경계로 땅을 나누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인데, 따라서 토지 소유의 규모는 권문세족 쪽이 훨씬 컸다고 볼 수 있겠다. 권문세족 자체가 기존 고위 귀족들도 있었지만 소수의 하급 관리이면서 왕의 측근으로서 고위 관직에 있게되어 힘을 기른 권문세족들이 기존 무신정권에서 무신들이 농장을 늘린 것처럼 농장을 늘렸고 기존에 농장을 가지고 있던 고위 귀족의 땅까지 빼앗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전기까지 이르는 토지 개혁론에 불을 지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애초에 무신정권기, 더 길게는 문벌 귀족의 집권기까지 올라가는 이야기이고, 소위 '신진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13세기부터 토지 소유 구조에 대한 개혁론은 활발해지고 있었다. 흔히 신돈의 개혁 기구로 알려진 전민변정도감은 이미 고려 원종 때부터 설치되어 7번에 걸쳐 존폐를 거듭했고, 녹과전을 지급하면서 수조권을 건드려 보려고 했던 것도 그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조권 문제의 기본은 실질적으로 땅을 지급받을 수 있는 관료의 수보다 실제 관료의 수가 지나치게 팽창했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었다. 문신이란 문신은 죄다 썰어버린 무신정권 초기 이후 중앙 행정이 크게 위축되면서, 무신정권 후기부터는 문신을 다시 등용하는 한편 지방 세력을 위무하여 행정에 이용하거나 중앙에 끌어들이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13세기에 이르게 되면 다양한 지방 세력의 활발한 중앙 진출로 나타나며, 이것의 부작용으로 관료층이 오히려 비대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자연히 '세족'들도 늘어나면서, 수조권 증가가 더욱 폭증했다는 것이다.
권문세족에 대한 회의는 신진 사대부와 이들을 대비시켰을 때 더욱 뚜렷해진다. 우선 신진 사대부의 출신 계층은 대체로 ①무신정권 이후로 최우에 의해 등용된 신관료층('능문능리' 계층) ②지방 중소 지주, 향리 세력 등이 진출한 세력 ③기존 권문세족이 전환한 세력 등으로 설명되는데, 문제는 ①의 경우 권문세족과 출신 상 다를 바가 없고, ②의 경우 신진 사대부의 기반이 중소 지주층임을 확인할 길이 거의 없는 데다가 향리 세력의 경우 과거급제를 통해 권문세족으로도 활발히 진출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13세기까지, 권문세족과 사대부 세력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논의가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게다가 13 ~ 14세기 초반까지 '신진 사대부의 효시'로 평가되었던 인물들도 상당수가 세족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박전지, 홍언박 등 이미 권문세족에서 갈라져 나온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들은 물론이요, 이제현, 안향, 백이정 등의 인물은 아예 원에서 수학하고 온 인물들이다. 대체 어느 중소 지주가 그나마 권문세족에게 침탈받는 재산을 기반으로 원나라에서 유학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러한 이들 중에는 원나라에서 관직에까지 오른 인물들이 있다. '친원 세력'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권문세족보다 오히려 나을 것이 없다는 얘기다. 또한 신진사대부자체가 기존 하급 관리였고 재산도 적었던 고려인 권문세족보다 더 많은 재산을 이미 가지고 있던 귀족들이였으며 하급이며 재산이 적었던 몇몇 고려인 권문세족으로 인한 신진 사대부의 땅과 재산의 갈취가 충숙왕과 공민왕의 토지 개혁을 일으키도록 하는 신진 사대부의 반발이였다고 본다.
흔히 신진 사대부는 과거를 중시했고, 권문세족은 음서를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권문세족 측에서도 오히려 과거에 많이 응시했다.[1]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고 과거에 합격해 관직 생활에서 입지를 펴 나가는 것이 대표적인 경로였다.
게다가 음서를 통하지 않고 처음부터 과거로 관직에 진출한 자들의 상당수 또한 권문세족이었다. 세족 집안의 출신 지역도 전기에는 개경 중심의 집안들이 많았던 반면, 후기에는 삼남 지방이 중심이 된다.
또 한가지 권문세족에 대한 편견 중의 하나가 권문세족은 유교적 소양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과거시험 문과 합격자의 많은 수가 권문세족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또한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연구 결과 정도전, 조준 등 조선 건국의 주요 인물들까지도 가문을 따지고 들어가니 '최소한 예전에는 한 가닥 했던 집안들'이 많았고, 존 던컨의 연구 결과 아예 조선 초기 관료들도 권문세족 집안 출신이 많았다. 14세기부터 이미 신진 사대부 집안과 권문세족이 활발하게 통혼하기도 했다. 즉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의 구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4 ~ 15세기 고려와 조선 사이의 격변을 폄훼할 이유는 없으며, 유학적 사고관에 따른 개혁론이 한반도에 큰 격변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일단 14세기부터 남부 지방에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여 과거 응시자의 하한선이 내려갔고, 13세기까지 혜심 등에 의해 주도되던 유교와 불교 사이의 타협론이 침몰하기 시작했으며, 과거에 대한 중시는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여기에 공민왕 대가 되면 성균관의 개혁이 마무리되어 이색, 정몽주 등의 인사가 과거를 주도하게 되는데, 이는 고려시대를 상징하는 좌주 - 문생 관계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전까지는 권력을 지탱하던 요소들과 새로운 요소들이 어느 정도 융화되어 기존 세력과의 타협으로 국가가 유지될 수 있는 압력 정도만이 주어졌다면, 14세기 중엽부터는 그 압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중앙도 스스로 비대해지면서 그 중앙에서 얼마만큼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원명 교체와 홍건적, 왜구 등으로 인해 한반도가 받던 압력이 촉진제가 되었고, 마침내 요, 금, 원의 압력과 무신정권의 세파까지도 모두 이겨냈던 고려 왕조가 새로운 왕조로 재탄생하는 격변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포인트는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 친원과 반원의 이중 대립 구도를 지양하자는 것에 있다. 애초에 출신 성분이 무엇이었든 간에 고려-조선 교체기에 토지 문서를 싸그리 불태워 버리고 정도전은 국가의 평균적인 토지 분급을 주장할 정도로 사회상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며, 굳이 권문세족이 쓸려 나가야 신진 사대부가 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론들은 존 던컨 등이 주장하는 비교적 신흥 학설이며 아직 주류 학설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를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이 식민사관이 강조해온 정체성론으로 회귀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지만, 목적을 위해 역사적 관점을 끼워 맞출 수는 없지 않냐는 시각도 있다. 다만 존 던컨 교수는 정체성론은 부인한다고 밝히고 있다.
좀더 냉정하게 말해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신흥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게, 던컨이 이런 주장을 한 지 30년도 더 됐지만 이런 학설은 주류에 편입은 안되어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결구도는 여전히 통설이고 던컨의 주장이 그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 교과서에는 여전히 위의 일반 학설이 권문세족의 대표적인 사례로 다루고 있다.[2]
4. 유명 권문세족 가문
4.1. 재상지종 15개 가문
- 전주 김씨: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에서 분적하였다. 충렬왕의 외척 가문. 김봉모의 손자이자 김태서의 장남 김약선이 충렬왕의 장인. 차남 김기손, 3남 김경손. 전주 김씨 후손 중에 유명한 인물로 북한의 김씨 일가가 있다.
- 안산 김씨: 고려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의 가문. 그런데 그 위상이 김은부의 처가인 경원 이씨 가문으로 바톤 터치 되면서 다소 사그라든 위세. 충렬왕-충숙왕 대에 활동한 김원상이 안산 김씨 가문이다.
- 언양 김씨: 아름답고 긴 수염으로 유명한 고려판 관운장 위열공 김취려의 후손들. 시조인 김선은 신라 경순왕의 7남인 동시에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인 관계로 정계진출이 원활했으며, 13세기 초 김취려 장군의 무공으로 기반하여 대출세하였다. 도은 이숭인의 외가가 언양 김문이기도 하다.
- 여흥(황려) 민씨: 무신정권기에 출세한 민영모의 가문이다. 과거 급제자가 엄청나게 많이 배출되었다. 이방원의 정실 원경왕후의 친정이기도 하다. 고려 말기나 되어서야 신흥 무장 세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전주 이씨[3] 가문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불가능한 전통적인 고려의 대명문 가문이다. 후대에 민비를 필두로 한 어마어마한 세도정치로 악명을 떨치다 조선(대한제국)을 말아먹고 친일파로 전락한 것은 덤.
- 파평 윤씨: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개국공신 윤신달의 가문. 고려 전기 문숙공 윤관 장군 이래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명문 가문이다. 충렬왕 재상지종 발표 여러 해 후...충혜왕의 부인 가운데 파평 윤씨 가문 출신이 있다. 즉 충정왕의 생모가 파평 윤씨이다.
- 경원(인천, 인주) 이씨: 매우 유명한 가문. 왜냐하면 역사 교과서에 절대로 안 빠지는 인물의 가문이다. 바로 이자겸. 고려 문종 이래 100여년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세 가문. 일본 역사학자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심도 있게 연구한 가문이기도 하다. 세조의 장인 파평 윤문 윤번의 장인인 공도공 이문화가 경원 이씨 가문이다. 조선 왕실에도 세조의 아들 이후로 경원 이씨 가문의 피가 흐른다. 그 위력 포스가 정말 후덜덜하다.
- 청주 이씨: 현종 대 이자림의 가문이다. 이자림은 고려 황실의 왕(王)성씨를 하사받은 인물로, 현종 묘정 배향공신이다. 현종 및 덕종의 왕비가 배출된 가문이다.
- 횡천 조씨: 무신정권 기에 출세한 조영인-조충 가문이다. 조충은 김취려 장군과 함께 거란 유종을 강동성 일원에서 무찌른 장군이다.
- 평강 채씨: 무신정권기 군인 채송년의 가문이다. 채홍철, 채하중 등이 배출된다. 정조 대의 명재상 채제공이 이 가문 출신이다.
- 철원(동주) 최씨: 고려 전기 이미 문벌 귀족 가문으로 최유청의 출세로 급부상한 가문이다. 무신 정권기에도 번성했으며, 고려 말 무민공 최영 장군이 배출된 가문이다. 유명한 문학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최남선이 철원 최씨 가문이다.
- 해주 최씨: 역사 교과서에 꼭 나오는 문헌공 최충-교육 관련해서 꼭 등장하는 가문이다. 이자겸의 처가가 해주 최씨 가문이다. 조선 시대 세종 대의 최만리, 왜란 시기 의병장 최경회 등이 해주 최씨 문중이다.
- 공암(양천) 허씨: 충렬왕 묘정 배향 공신 첨의중찬(오늘날 국무총리) 허공의 가문이다. 허공의 딸 순비 허씨(노책의 장모)는 충선왕과 재혼했다. 충선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 남양 홍씨: 딱 100년에 걸친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홍규(홍문계)의 가문이다. 홍규는 원래 임연의 사위였다가, 1270년 거사 이후 재혼한 듯하다. 홍규와 부인 광산 김씨 사이에서 명덕태후(공민왕의 생모)가 태어난다.
4.1.1. 기존의 문벌 귀족 가문
- 경원 이씨[4] : 이자연(고려), 이자겸
- 경주 김씨: 김혼
- 공암 허씨[5] : 허공
- 안산 김씨: 김은부
- 정안 임씨[6] : 임의, 임원후(원애), 공예태후
- 철원 최씨[7] : 최영[8]
- 청주 이씨: 왕가도
- 파평 윤씨: 윤관, 윤언이, 윤인첨, 윤보, 윤선좌
- 해주 최씨: 최충, 최사추, 최윤의, 최자
- 이천 서씨: 서신일, 서필, 서봉, 서희, 서눌
4.1.2. 무신으로 인정받으면서 성장한 가문
- 언양 김씨: 김취려, 김희조
- 평강 채씨: 채송년, 채홍철
4.1.3. 관인가문
4.1.4.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4.1.5. 재상지종은 아니지만 유력(有力)한 가문
- 능성 구씨: 구존유, 구연, 구예, 구영검
- 문화 류씨: 류공권, 류경, 류숙
- 김해 김씨: 김목경, 김익경
- 연안 이씨: 이엄, 이권, 이운, [12] . 외에도 무신으로 권력을 잡아 지밀직사사를 지낸 위사공신 이분희와 원종의 총애를 받은 이분성(이습)도 이 집안 출신이다.
- 안동 권씨: 권보, 권근, 권우 다만 권근, 권우는 신진사대부였다.
- 구 안동 김씨[13][14] : 김방경
5. 같이보기
[1] 음서의 경우 인원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한 부모의 자식들이라고 해서 모두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때문에 혜택을 못받은 나머지 자식들은 과거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2] 다만 기득권의 자제들이 공부하면서 사회의 문제에 고민하다가 세로운 세력으로 대두되는건 역사적으로 흔한 사례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혁명기 미라보 백작 같은 사람이 있다.[3] 훗날 조선(대한제국)의 왕가/황가가 된다.[4] 현재의 인천 이씨. 고려 시대 때 경원이 인주로 지명이 바뀌어서 인주 이씨로도 불렀다.[5] 현재의 양천 허씨.[6] 현재의 장흥 임씨.[7] 현재의 동주 최씨.[8]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유명한 그 최영 맞다.[9] 현재의 여흥 민씨.[10] 현재의 횡성 조씨.[11] 권문세족 출신이나 급진적 성향을 많이 띠는 정도전, 남은 등의 신진 사대부와 교류하였고 조선의 1등 개국공신 겸 태조, 정종, 태종의 재상으로 지냈다.[12] 공량공 이수산의 본관은 사료에는 수안이라 나와 있지만 수안 이씨의 족보에는 이수산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 족보에 그의 후대까지 나와 있다. 또한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에서 분파한 공량공파가 존재하므로 이수산이 연안에서 수안으로 분적하였다는 설이 존재한다.[13] 현재의 구(舊) 안동 김씨.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를 한 신(新) 안동 김씨와는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는 가문이며 구 안동김씨는 김부의 아들 대에서 갈라져 나왔고 신 안동김씨는 고려 태조를 도운 안동의 호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14] 독립운동가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 서두에, 자신이 충렬공(김방경)의 직계 후손임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김사형, 김질, 김시민, 김응하, 김자점(조선 효종때 역모를 꾸미다 처형된 탓에 김자점 친척의 후손인 김구가 어릴 때 고생해야 했다)(...) 등이 바로 이 가문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