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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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선수 시절
1. 소개
前 난카이 호크스, 빙그레 이글스, OB 베어스 소속의 재일교포 외야수이자 前 태평양 돌핀스 타격코치.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재일교포 출신 타격왕'''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2.1. NPB 시절
주쿄고교를 졸업하고 난카이 호크스에 지명되어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1984년 2군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구단이 1군에 진입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서[2] 1985년 팀을 떠나게 된다.
2.2. KBO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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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장훈의 주선으로 같은 해 한국에 건너오게 되고,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게 된다. 첫 해에는 타율 0.245, 3홈런, 33타점, 13도루로 그닥 눈에 띄는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다음 해부터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1989년에는 0.327의 타율로 '''타격왕을 수상'''하며 '''재일 교포 출신 야수가 최초로 개인 타이틀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3][4] 그와 함께 골든 글러브도 수상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내리막이 찾아왔고, 1991 시즌 종료 후 OB 베어스로 보내지지만 거기서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며 1992년 시즌 중 방출되었다.
OB로 트레이드 되기 전에 김영덕 감독과의 불화도 한 몫 했었다. 난카이 호크스의 선, 후배 간이나 한솥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부임 첫 해인 1988년부터 '''"낙인찍힌 사나이"'''가 되었으며 '''"시즌만 끝나면 방출"'''설이 나돌았었다. 이에 고원부는 '''"빙그레는 싫지 않지만 빙그레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시즌 중에도 이야기를 했었다고 한다.
통산 성적은 타율 0.280, 37홈런, 244타점, 52도루. 너무 빨리 찾아온 내리막이 아쉬웠던 선수 중 하나이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994년부터 2년 동안 태평양 돌핀스 타격코치를 지냈다. 특히 1994년에는 '족집게 도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돌핀스 타자들의 타격 향상에 기여하면서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팀이 현대 유니콘스로 바뀌는 과정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았고, 다시 일본으로 간 이후 나고야에서 유통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SK 와이번스 2군 매니저 나카니시 카즈미가 한국으로 유학을 갈 때 도움을 주기도 했다.
4. 기타
1988년 5월 12일 청주 MBC 청룡전에서 유종겸을 상대로 KBO 최초로 ''' 그라운드 만루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2015년 김은식 기자가 트위터에 근황을 알렸다.[5]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정식교명은 中京大学附属中京高等学校. 야구부는 전국 굴지의 명문이며, 코시엔 전국대회 통산 승수 (봄 대회 55승 및 여름 대회 78승, 총 133승), 우승 횟수 (봄 대회 4회 및 여름대회 7회, 총 11회) 모두 전국 최다이다. 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 격인 국체에도 자주 출전한 학교다.[2] 이때 욱해서 코칭스태프와 주먹다짐까지 갔다고 한다.[3] 투수 부문에서는 장명부가 첫 사례. 같은 재일교포인 홍문종은 1984 시즌 롯데에서 최다 안타를 기록했지만, 당시 최다 안타 부문은 시상 대상에 없었다. 기타 수상 경력을 따지면 1986년 올스타전 MVP였던 김무종이 있다.[4] 그러나 타격왕 경쟁 과정에서 김영덕 감독이 경기장에서 계산기를 쳐 가면서 타석 출장 여부를 결정하는 '타율 관리'로 인해 언론과 야구팬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5] 본문에 87년 타격왕 고원부라고 되어있는데, 고원부는 89년 타격왕이다. 87년 타격왕은 장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