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 베어스

 


[image]
'''OB 베어스'''
'''OB BEARS'''
'''창단'''
1982년 1월 15일
'''법인 설립'''
1983년 3월 24일
'''모기업'''

'''팀명 변경'''
1999년 1월 9일
'''OB 베어스''' → 두산 베어스
'''연고지'''
충청도[1] (1982~1984)
서울특별시 (1985~)
'''홈구장'''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2] (1982~1984)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3] (1982~1984)
동대문야구장 (1985)[4]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1985~현재)
'''최종 우승 '''★★ '''(2회)'''
'''우승 엠블럼'''


'''페넌트레이스 우승 ''' (1회)
'''단일 리그'''
1995년
'''전, 후기 리그'''
1982년 전기, 1986년 후기
1. 개요
2. 창단 과정
2.1. 연고지 관련 오해와 실상
3. 유명 선수
4. 시즌
4.1. 1982년 ~ 1983년
4.2. 1984년 ~ 1988년
4.3. 1989년 ~ 1994년
4.4. 1995년 ~ 1998년
5. 유니폼 및 마스코트
6. 부활?
7. 기타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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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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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원년 팀 중 하나로 두산 베어스의 전신이다. 1982년 1월 15일 원년 6개 구단들 가운데 가장 먼저 창단식을 가진, 한국 최초의 프로야구단이며, 프로야구 원년 우승팀이기도 하다. 공식 팀명은 '''두산 프로야구단 OB 베어스'''이다.

2. 창단 과정


당시에 창단된 팀들은 팀명에 그룹명을 붙였으나, 유독 두산그룹자사 맥주 제품OB를 붙여 화제가 되었었다. 두산그룹의 프로야구단, OB BEARS라는 이야기. 그리고 사실은 원래 그룹명이 오비그룹였다가 1978년에 두산그룹으로 바뀌었다. 당시를 볼 땐 오비가 두산보다 인지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5]
많은 사람들이 모기업이 그대로인 원년구단은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2개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OB/두산 베어스도 모기업이 변하지 않은 원년구단이다. 그러므로 한국 프로야구에 현재까지 존속하는 모기업이 그대로인 원년구단은 총 3개 구단이다.[6]

2.1. 연고지 관련 오해와 실상


본 항목에 있었던 서술이지만 실제로는 방송사인 MBC가 KBO 창설 이전에 MBC 자체적인 프로야구 구단 창단, 거기에서 더 나아가 당시 이진희 사장이 "MBC만 구단 창단을 할 것이 아니라 4개 구단이 참여하는 리그를 개최하라" 라는 지시를 내려 MBC TF팀에서 구상을 마친 다음 청와대에 초기 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MBC는 81년 10월경에 프로야구 구단 창단계획을 마무리지었고,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야구와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하던 청와대 비서실과 접촉, 프로야구 기획안을 올린다. 이 시점에서 MBC는 이미 서울연고를 확정지었다.
그런데, 저기서 경인권, 전라도, 충청도 1순위 기업들이 프로야구단 창설에 난색을 표한다. 아무래도 그 당시로서는 프로스포츠단이란 개념 자체가 막연했던 시절이라 위험부담이 클 것이라 판단한 것. 그래도 어떻게 경인권과 전라도는 각각 삼미와 해태가 참여하면서 해결을 했는데, 문제는 충청권. 동아는 진작 안 하겠다고 했고, 한화는 81년 7월에 김종희 회장이 사망하면서 형제의 난이 발발, 프로야구고 뭐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여기 말고 달리 들어갈 만한 충청권 기업은 없었다. 그래서 프로야구 참가 의사는 있었지만 연고지를 구하지 못한 두산이 당첨(…)된 것.
문제는 두산이 충청도에 연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두산그룹의 오너 박승직의 고향은 경기도 광주고, 두산그룹의 발상지는 지금도 두타가 있는 서울 동대문이었으니. 순수하게 서울-경기권 기업이었던 두산이 그냥 충청도로 내려갈 리는 없었다. 그러나 서울은 이미 MBC가 초기계획 수립 시부터 선점했고, 두산은 차선책으로 삼미가 들어가기 전에 경인권 연고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이건 또 청와대 비서진에 의해 막히고 만다. 청와대에서는 충청권 연고 구단이 나타날 상황이 아니니 어떻게든 두산을 충청도로 보내버리려 했던 것. 그러다가 삼성에서 “우선 OB가 충청도로 갔다가 3년 후에 서울로 오면 어떻겠냐”라는 중재안을 내놓는다.
결국 두산은 이 중재안을 수용한다. 단 이를 다른 5개 구단이 공증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단다.
그러자 이번에는 MBC가 반대. 이미 서울연고는 MBC가 하기로 정해져 있었던데다, MBC는 프로야구 창설을 기획했다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MBC 사장 이진희는 KBO 총재까지 노렸을 정도로 정권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 강짜를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다가는 판이 다 엎어지겠다고 판단한 5공 정부는 MBC에게 이 중재안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했다. 결국 MBC는 이진희보다 서열이 더 높았던 이학봉 민정수석의 호통 앞에 울며 겨자먹기로 이 중재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로부터 3년 후인 1985년에 5공의 부당한 명령에 불복한 국제그룹이 어떻게 해체되었는지를 생각하면 5공 초기였던 당시에는 일개 기업들 입장에서 감히 거부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업 해체는 물론이고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두산은 원년부터 신인 드래프트에서 서울 출신 선수를 배정받았다. 사실상 최초의 드래프트라 할 수 있으며, OB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통칭 2:1 드래프트라 불렀다. 왜냐면 MBC 2: OB 1의 비율로 지명을 했기때문. 원년의 1라운드의 경우 MBC는 김재박과 이해창 두 명, OB는 박철순 한 명을 지명했다. 라운드는 알 수 없지만 김우열도 이때 뽑혔다.[7] 보통 OB의 지명은 서울권에서 많이 뽑고 나머지가 충청권 선수였는데, OB가 충청으로 내려가기 싫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선수 수급에 어려움이 있다는 명분이었으니[8] 납득이 간다.

3. 유명 선수


OB 베어스
등번호
이름
등번호
이름
No.3
'''김우열(金宇烈)'''
No.10
'''윤동균(尹東均)'''
No.8
'''김유동(金裕東)'''
No.15
'''황태환(黃泰煥)'''
No.21
'''박철순(朴哲淳)'''
No.22
'''김경문(金卿文)'''
No.1
'''박종훈(朴鍾勳)'''
No.31
'''장호연(張浩淵)'''
No.25
'''조범현(曺凡鉉)'''
No.35
'''윤석환(尹錫環)'''
No.33
'''김광림(金光林)'''
No.17
'''김진욱(金鎭旭)'''
No.29
''' 김형석(金炯錫)'''
No.44
'''김상호(金湘昊)'''
No.11
'''계형철(桂瀅鐵)'''
No.19
'''신경식(申慶植)'''
김민호, 김우열, 김유동, 박철순, 신경식, 윤동균, 박종훈, 윤석환, 김경원, 김상호, 이명수, 임형석, 김상진, 심정수 등이 이 팀에 속했었으며, 김경문조범현도 이 팀의 포수로 활동했다. 포수가 넘쳤기 때문에 '''포수 왕국'''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이처럼 포수 왕국이다 보니 김영신이라는 포수가 경쟁에서 밀려나 실의에 빠져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그의 배번은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또한 포수가 많았던 탓에 OB 소속이었던 이도형, 진갑용, 최기문두산에서 오래있지 못하고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었다.[9]

4. 시즌



4.1. 1982년 ~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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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2월 초, 모기업인 두산은 팀 이름을 '''두산 OB 베어스'''로, 감독에는 재일 한국인 출신의 김영덕을 내정하고, 1981년 12월 29일, 사상 최초의 드래프트에서 두산은 박철순, 선우대영, 조범현, 박상열, 황태환, 계형철, 유지훤, 윤동균, 김우열 등을 지명했다. 그리고 1982년 1월 15일,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야구단으로 창단했다.
당초 모기업이 서울 종로에서 시작한 터라 충청도에 연고가 없었던 두산은 당초 현대그룹이 프로야구에 참여했을 때 맡기로 했던 인천/경기지역[10]이 현대의 참가 거부로 공석이 되자 그쪽으로 연고지를 변경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후 다시 서울로 변경하여 요구했으나 KBO 기획부터 참여했던 MBC가 이미 서울 연고를 선점했기에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서울 연고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참여를 거부하겠다고 두산 측에서 강짜를 놓았고, 현대 등 다른 그룹들의 잇따른 불참으로 리그가 열리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인지라 MBC 측의 거센 반대를 전두환이 권력으로 찍어누르면서(...) 결국 전 구단의 합의에 따라 3년만 충청권으로 갔다가 서울 동대문 야구장으로 복귀하는것으로 결정되었다. (합의 과정은 위의 구단 소개 문단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충청팜의 부실을 핑계 삼아 서울권 드래프티들의 33%를 배정받고[11], 동대문 야구장에서 삼미, 삼성, 롯데, 해태 등과 홈경기도 진행하였다. 그렇게 OB는 충청남도 대전에서 1985년서울동대문운동장으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1985년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충청도 연고지를 이듬해 창단되는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에게 넘겨주게 된다.
OB 베어스의 첫 경기는 MBC 청룡과의 경기로 박철순의 4안타 2실점(1자책점) 완투승으로 승리했다. 이후 4월 중순부터 분위기가 반전되어 5월 2일 홈경기에서는 10승 5패로 단독 선두에 나섰다. 이후 9연승 등으로 시즌 4경기를 남겨두고 28승 8패로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박철순이 시즌 24승을 거두면서 이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을 한다. 김유동이 한국 시리즈 6차전 9회 만루홈런을 쳐내면서 MVP에 선정.
그러나 1983년 시즌에는 박종훈, 한대화, 장호연, 정선두만을 신인[12]으로 확보했고, 박철순, 선우대영, 강철원 등의 주력 투수와 구천서 등의 야수진도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전기리그 6위, 후기리그 5위를 기록 순위가 5위로 하락했다. 그해 10월 14일, 김영덕 감독이 팀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만다. 한편 이때 당시 투수코치였던 김성근이 김영덕과 일언반구 상의없이 바로 감독직을 승계하고, 김영덕은 삼성의 감독이 되어서 두 사람은 앙숙이 된다. 이 앙숙지간은 1984년의 져주기 게임을 야기했다.

4.2. 1984년 ~ 1988년


1984년, 새 감독으로 투수 코치였던 김성근이 취임했고, 코치진도 보강되었다. 선수도 재일교포 최일언, 홍신차등을 비롯해 신인 윤석환, 김진욱, 김광림 등을 확보했다. 그리고 계형철이 14승, 박상열 12승, 장호연이 평균자책점 1위의 성적을 거두었고, 야수진에서도 부상 공백이 메워지며 9연승으로 치고 나갔다. 그러나 이후 6연패에 빠지며 삼성에게 전기리그를 내주었고, 후기리그에서도 초반에는 선두로 질주했지만, 8월 15일 부터 선두 자리를 내주었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OB는 해태와, 롯데는 삼성과 맞붙었는데, 삼성은 롯데에게 일부러 패하면서 OB는 후기리그도 2위에 머물렀다[13] 공교롭게도 당시 삼성 감독은 김영덕. 물론 그 김영덕 감독의 져주기가 있었다지만 84년의 OB는 역대 가장 운이 없는 팀이었다. 전ㆍ후기 통합 승률 1위를 달성하고도 포스트시즌에 나서지 못했던 것.
1985년, OB는 연고지를 대전에서 서울 동대문 야구장으로 옮겼다. 이 해에는 연고이전 직후 임시 홈으로 삼았던 동대문에서 거의 대부분의 홈경기(37경기)를 치렀지만 특별 홈경기로 MBC의 홈구장인 잠실에서 9경기, 예전 홈구장이었던 대전에서 6경기를 치렀으며,[14] 특이하게 당시 롯데의 제2홈구장이었던 마산에서도 중립경기로 2경기를 치렀다.[15] 그리고 그해, 전기리그는 2위를 기록했으나 후기리그는 5위로 마무리했다.
이듬해 1986년 아마야구와의 갈등으로 인해 1988년까지 사용하는 조건으로 잠실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16] 그리고 그해 전기리그는 5위에 그쳤으나 후기리그 플레이오프 진출권이 달린 롯데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김형석의 동점 홈런(일명 '운명의 한 방')과 신경식의 끝내기 안타로 4-3으로 승리하며 청룡과의 끈질긴 경쟁 끝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2승 3패로 패하고 1987년 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지만 예상외로 해태 킬러였던 최일언이 1차전부터 난타당하는 등 1승2패로 부진하며 해태에 2승 3패로 탈락한다.[17] 1988년 롯데와의 개막전에서 장호연은 무탈삼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다. 이후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를 기록한다. 시즌 후에 두산 그룹은 우승을 못한 김성근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으려 했고, 김성근 감독도 사임하여 신용균 코치, 최주억 코치, 박상열 투수가 태평양으로 이적하게 된다. 이 당시 김성근은 2군 시스템의 운영과 투수분업화 시도를 하기도 했다[18]. OB시절에는 종신감독까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구단주와 사이가 돈독했다는 평도 있었으나, 결국은 단장 이하 프런트와 큰 갈등을 겪었고, 이 갈등은 이광환 2군감독과의 알력으로 이어져 결국 팀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김성근 감독이 2군 선수를 콜업했더니 2군에서 이광환 2군 감독이 우리도 경기하느라 바쁘다고 콜업을 거부하는 황당한 일까지 생기고... 결국 태평양의 부름을 받고 팀을 옮긴다.
직후 이광환 감독 부임으로 OB는 엄청난 침체를 겪게 되는데...

4.3. 1989년 ~ 1994년


1989년 이광환 감독이 취임. 그는 당시 한국야구의 대세였던 일본식의 관리야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선수들 개개인에 개성과 책임감을 믿고 맡기는 '자율 야구'의 기치를 들었다. 첫 시즌이었던 89년에는 개막 1승9패로 최악의 스타트를 보인 뒤 후반기 시작 후 상승세를 타며 -11에서 5할을 찍는 저력을 보였으나 다시 연패에 빠지며 태평양, 삼성과의 4위권 경쟁에서 낙오되며 최종순위 5위로 마쳤다. 이해 프로야구 역사상 첫 은퇴경기로 윤동균의 은퇴경기가 있었고 윤동균은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 롯데의 김시진에게 2루타를 쳤다. 그러나 90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기존 투수력과 타선의 노쇠화가 한꺼번에 찾아보면서 팀 전력이 급격하게 붕괴. 5월부터 10연패와 11연패를 연달아 기록하면서 그 해 6월 19일 시즌 중 교체 되었다. 제4대 감독으로는 재미교포 출신으로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고 있던 이재우가 취임했다. 그는 1990년 감독 대행으로 기용되어 1991년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했다. 하지만 91 시즌에도 시즌 도중 12연패에 빠지는 등 안습한 성적으로 그 해 9월 9일 시즌 중에 교체되었다.
제5대 감독은 '''최초의 프로선수 출신 감독'''으로 윤동균이 내정되었고, 그는 비록 탈꼴찌엔 아쉽게 실패했으나 감독 대행을 맡은 91시즌의 남은 경기를 5할의 승률을 기록하여 가능성을 보이며 정식감독 승격에 성공했다. 1992년, 본격적인 첫 시즌에 그는 김민호, 장원진, 안경현 등의 신예들을 대거 발탁하고 김형석, 임형석, 강영수, 김상호로 이어지는 공격적인 타선을 완성하면서 그 해 5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1993년에는 초반에는 5위에 머무르다가 9월부터 강력한 선발투수진과 특급 신인 마무리투수 김경원을 앞세우면서[19] 연승을 시작해 마지막 경기에서 LG에게 승리하며 3위로 6년만에 팀을 포스트 시즌 진출로 이끈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오히려 4위 LG에게 1승 2패로 탈락한다.
1994년에는 우승후보라는 예상과 달리 초반부터 고전하면서 하위권을 맴돌았았다. 결국 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9월 4일, 전북 군산시 쌍방울 전에서 1-2로 패배하자 윤동균 감독은 '몽둥이를 들겠다'고 했고 선수들은 이를 거부하자 윤동균 감독이 '맞기 싫은 선수들은 다 짐싸서 서울로 올라가라'라고 하였고 박철순 외 16명의 선수들은 이탈해 서울로 올라갔다. 선수들 중 최고 연장자인 박철순은 '윤 감독과 같이 옷을 벗겠다'라고 사태를 무마시키려 했다. 결국 9월 14일, 윤동균 감독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고,[20] 남은 시즌은 최주억 코치가 감독직을 대행했다. 이 사건이 바로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구단의 어두운 흑역사로 기록 되어 있다.

4.4. 1995년 ~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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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사건으로 권위적이고 급한 성격의 윤동균 감독 대신 인화를 중시하는 김인식 감독이 부임하면서 심기일전. 시즌 초반 전문가들의 예상은 잘 해야 5~6위권 전력이라는 평가였으나 예상을 깨고 13년만의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투수쪽에서는 에이스 김상진이 '''3경기 연속 완봉승'''을 포함해 17승을 올렸고, 이어 권명철이 15승, 그리고 신인 이용호, 진필중은 김경원의 빈자리를 메워주었다. 타선에서는 25홈런 101타점으로 최초의 잠실 홈런왕을 차지한 김상호의 활약과 1번 타자이자 유격수인 연습생 출신 김민호의 화려한 주루플레이, 하위타선에 붙박이로 배치된 고졸 신인 심정수의 21홈런, 그 외에도 14홈런을 친 공격형 신인포수 이도형이나 베테랑 김형석, 이명수 등이 강타선을 구축했다. 시즌 구도는 서울 라이벌인 LG와 OB의 선두 다툼으로 흘러갔는데, 5월까지는 OB의 독주구도였으나 강병규, 장호연 등이 부진으로 선발투수진에서 이탈하고 고질적인 좌완투수 부재[21]로 좌타자 중심인 LG와의 맞대결에서 연전연패. 결국 '''LG가 8월 중순에 6경기차로 간격을 벌리면서 앞서나갔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의 발빠른 대처로 불펜에서는 이용호가 부진한 김경원을 대체하면서 뒷문을 잠그고 선발진에서는 진필중과 강길룡, 송재용 등으로 장호연과 강병규의 빈자리를 메꾸면서 9월부터 재반격을 시작. 이후 LG가 주춤하는 사이에 OB는 6연승, 4연승 등을 거두면서 상승세를 타더니 '''9월 10일에는 다시 선두를 탈환한다.''' 그리고 마지막 27경기에서 OB는 20승 7패를 기록하면서 LG에 반 경기차로 정규 시즌에서 우승한다. 그리고 LG를 꺾고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와의 한국 시리즈에서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롯데에게 4-3로 승리하며 사상 두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때 정수근심정수, 진필중, 이도형 등 재능있는 신인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8위(최하위), 1997년에는 5위를 기록했는데,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전년도 디펜딩 챔피언이 꼴찌로 추락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22][23] 1998년, 이 해에는 10년 이상 중심 타선을 지켜오던 김상호, 김형석이 빠지자 8월 말까지 꼴지를 기록했으나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 김동주, 심정수[24]의 활약에 힘입은 시즌 막판 연승으로 1경기차 4위에 오른다.[25]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잠실 라이벌 LG에 2연패로 탈락하게 된다. 이는 OB 베어스라는 이름으로는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1999년 1월 5일, 구단 명칭을 현재의 '''두산 베어스'''로 바꾼다. 이후의 시즌은 두산 베어스 문서 참조.

5. 유니폼 및 마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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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프로 원년부터 구단명을 두산 베어스로 바꾸기 전인 1998년까지 무려 '''17년간''' 장수한 유니폼이다. 2014년 현재까지도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가장 오랫동안 채택됐던 디자인이기도 하다. 원년에 가슴 부분의 패치가 OB라고 크게 박은 유니폼이 별도로 있던 것만 빼고는 버튼형 셔츠에서 박스형 셔츠로 바꿀지언정 한번도 디자인을 바꾼 적이 없다. 색깔도 '''베어스 특유의 흰색-남색-빨간색'''을 써 곰의 이미지인 힘과 우직함을 잘 상징했다. 또 무엇보다 그냥 유니폼 디자인 자체가 이쁘다. 80년대 만들어진 유니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클래식함과 깔끔함을 자랑한다. 당대 OB 베어스 야구 잠바는 남학생들의 최애 아이템이자 최고의 인기 아이템이였다. 모자 디자인도 나름 유니크하면서도 예쁜지라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베어스 특유의 팀 컬러를 잘 반영하고, 요즘에도 결코 촌스럽지 않은 디자인이라 OB CI에서 두산 CI로 바꾼 것 빼고는 올드 유니폼 이벤트 때도 입고 나온다. 이 디자인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팬들도 많다.
이 유니폼 이후 두산 베어스로 팀명을 변경하고, 1999~2009년까지 약 10년간 남색과 노란색의 조합인 일명 반달 유니폼을 사용하였으며 2010년에 들어서 유니폼 디자인을 변경. 다시 OB 때의 컬러인 짙은 남색+빨간색+흰색 조합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사용중이다.

6. 부활?


2020년 들어 두산그룹의 경영상황이 갈수록 암담해지면서 두산 베어스의 매각설이 수시로 흘러나오던 가운데, 오비맥주가 두산 베어스의 인수를 타진했다가 두산 측이 터무니없이 높은 호가[26]를 불러 접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예전 OB 베어스 마스코트를 '랄라베어'라는 이름으로 그룹 홍보에 써먹어 재미를 보던 가운데 이참에 야구단을 인수해서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심산이었다고 한다. # 사실이라고 하면 예전에 두산이 팔아치운 OB가 옛 모기업과 처지가 역전되어 그룹의 상징격인 야구단을 사겠다고 온 상황이니 두산그룹 입장에서는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두산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

7. 기타




2016년에 OB맥주가 프리미엄 맥주를 출시하며 내놓은 광고들
  • 1990년대 KBO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에 관련해 프런트가 주사위의 한테 버림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27]
  • 응원곡인 승리의 OB[28]LG 트윈스의 나가자! LG와 마찬가지로 유명하며, 마스코트인 곰돌이의 경우 삼성 라이온즈의 마스코트인 사자와 마찬가지로 유명하다. 참고로 당시 OB맥주의 맥주 체인점인 OB 베어와 마스코트를 공유했고 마스코트 사용권은 두산이 OB맥주를 매각하면서 완전히 OB맥주에 넘겼다고 한다. 그래서 OB맥주가 OB 라거를 재출시할때 OB 베어스의 마스코트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 한 술 더 떠 OB맥주에서 이모티콘이나 콜라보 티셔츠 등 뉴트로 마케팅에 써먹고 있다.
  • 1998년 두산이 OB맥주를 벨기에의 주류 기업인 인터브루[29]에 지분을 50.9%를 매각하여 공동소유가 되었고, 이후 주류 업체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모기업인 두산그룹의 이름을 따서 1999년 두산 베어스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후에 45%의 지분을 넘겨 현재는 5%만 가지고 있다.)[30]
  • 불암콩콩코믹스의 작가인 최의민이 좋아하는 팀이라 작가의 오너캐가 OB모자를 쓰고 나온다.
  • 유재석은 두산 베어스 팬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OB 베어스 원년팬이라고 한다.
  • 1985년 서울특별시로 연고지를 옮긴 후 서울 연고 정착과 야구 저변 확대, 꿈나무 육성 등을 위해 1986년부터 서울지역 초등학교 및 리틀야구 대회를 창설해 현재까지 개최하고 있다. 참고로 이 대회의 초대 우승팀이 서울학동초등학교였는데 이 팀의 주축 선수 중의 한 명이 바로 서장훈이다. 서장훈은 OB 베어스 원년 시절부터 열렬한 두산 베어스의 팬이며 박철순의 열렬한 팬으로도 알려져 있다.
  • 2015시즌을 마지막으로 진갑용, 박명환, 이혜천이 모두 은퇴하면서 OB 유니폼을 입어봤던 KBO 현역선수는 전부 사라졌다. 단 현역선수로 범위를 넓히면 이혜천은 호주리그 애들레이드 바이트에서 뛰기로 했다.
  • OB 베어스 드래프트 픽 출신으로는 1997년 김원섭, 1999년 김성배, 정재훈 등이 현역으로 뛰고 있다. 다만 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팀의 명칭이 두산 베어스로 바뀐 이후에 베어스 선수로 입단했다. 2018년 기준으로 모두 은퇴했다.
  • 1990년대에는 해태 타이거즈를 무려 2번이나 가을야구 문턱에서 좌절을 시킨 전력이있다. 바로 1995년과 1998년인데 1995년에는 OB가 해태와의 추석 연휴 4연전을 싹쓸이 하며 선두로 올라섰고 기세를 몰아 시즌 막판에 LG를 2위로 끌어내리며 반 게임차로 1위를 차지한 반면 해태는 4연전 피스윕 기점으로 휘청거리며 3위 롯데와 4.5게임차로 벌어지며 4위를 하고도 규정상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를 했다.[31] 1998년에는 시즌 마지막 경기인 2연전을 남겨두고 4위 해태가 5위 OB에 1게임차로 앞선 상황에 1무만 거두어도 해태가 포스트시즌에 갈수있었지만 되려 2경기를 모두 내줘 역으로 5위로 내려 앉았고 OB가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으로 포스트시즌에 합류한다.
  • 처음 충청도 연고 시절에는 3년 후 서울로 올라가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 지역민들은 OB에 별다른 마음을 주지 않았고, 홈팀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OB가 원년에 연전연승을 기록하면서 성적이 잘 나오고 우승까지 하자 결국 마음을 주게 되었다. 하지만 OB가 서울로 이전한 후 빙그레가 창단되자 대부분은 빙그레로 갈아타게 되었는데, 소수는 OB를 계속 응원하여 80년대 말까지는 충청도에도 OB팬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OB암흑기가 도래했고 때맞추어 빙그레 이글스가 강팀으로 자리잡으며 결국 충청도의 OB팬들은 대부분 빙그레로 흡수되며 그 명맥이 점점 끊어져 갔다. 아직까지 충청도 출신으로 두산을 응원하는 장년 노년팬들은 원년 베어스팬 중에서도 충성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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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그 출범 당시 광역 연고제였고, 충청남북도 전역이 연고지였다. 대전은 당시 충청남도 대전시. 1989년 직할시 승격, 1995년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개칭.[2]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3] 제2구장[4] 아마추어 야구계의 반발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으로 옮겨갔다.[5] 당시 프로야구팀을 창단할 때는 홍보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소비재 기업을 전면에 내세웠었다. 한화그룹(당시 한국화약그룹)도 빙과류와 유제품을 주력으로 파는 계열사 빙그레를 팀명에 붙여서 빙그레 이글스를 창단했다. 이후 구조조정이나 계열분리에 들어가면서 그런 소비재들이 그 그룹의 주력분야에서 멀어짐으로써 그룹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롯데도 한동안 제과업체인 롯데제과가 프로야구단을 관리했다.[6] 물론 연고이전과 팀명 변경을 하지 않은 원년구단으로 엄격하게 기준을 적용하면 삼성과 롯데 둘뿐인 것이 맞다.[7] 충청 태생이지만 서울의 선린상고 출신으로 서울연고 드래프트 대상이었다.[8] 실제 고교야구 팀들의 성적 등으로 나타나는[9] 최기문은 홍성흔의 입단 전 차명주를 상대 롯데로 트레이드 되었다.[10] 두산 그룹의 박승직 창업주가 경기도 광주 출신이라고 연고로 붙일 수 있기에 그렇다. 또한 두산그룹의 창업지가 서울이었기 때문.관련 자료[11] 8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부터 서울팜에 지명권을 행사하였다.[12] 박종훈은 최초 신인왕을 수상[13] 다만 불과 이틀사이에 OB도 해태와 함께 김일권의 도루왕 타이틀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승부조작을 한 바 있다(...)[14] 8월 18~20일에 청보를 상대로 치른 3연전이 OB가 홈팀 자격으로 치른 대전구장의 마지막 경기였다.[15] 그 중의 1경기(9월 26일)의 상대가 공교롭게도 홈팀인 롯데였다. 물론 특별 홈경기인 관계로 롯데가 선공을 했다. [16] 아마야구의 반발이 계속되며 동대문야구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고 1989년 이후에도 계속 잠실야구장에서 홈구장을 치렀다.[17] 1차전 충격패에도 불구하고 3차전까지 2승1패로 앞서있었고 4차전 9회말2아웃까지 3:2로 앞서있어 한국시리즈가 눈앞에 있었지만 2사3루에서 유지훤의 실책성수비로 동점이 되었고 연장 10회에서 최일언의 끝내기폭투로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18]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2군 체제가 제대로 짜여진 팀은 OB가 유일했다[19] 그러나 공격력은 별로 강하지 않았다. 팀 타율은 2위였지만 홈런 수에서 LG에 뒤졌다.[20] 박철순, 김상호, 김형석, 장호연, 강영수 등의 다섯 고참 선수들은 계약을 해지하기로 하였으나, 강영수만이 방출후 태평양 돌핀스로 입단 하게 되면서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21] 1995년 OB의 74승 가운데 '''좌완투수가 올린 승리는 하나도 없었다'''.[22] 결과적으로 삼성에게 죽쒀서 개준 꼴이 되었지만 이게 진갑용을 지명하기 위해 일부러 꼴찌를 했다는 설도 있다. 그 당시에는 진갑용이 홍성흔에게 밀려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지만.[23] 한편 농구에서는 15-16시즌 정규리그 우승팀인 전주 KCC 이지스가 다음시즌인 16-17시즌에 정규리그 꼴지로 추락하여 사례를 하나 추가했다.[24] 일명 '''우동수 트리오'''. 이후 두산 베어스로 바뀌고도 몇 년 동안 중심타자로 맹활약한다.[25] 단 한번이라도 지면 끝인 시즌 막판 8경기를 '''전부 이긴다.''' [26] 사실상 거절의 의미다.[27] 주사위 던지기에 져 1993년 드래프트 1차 지명의 이상훈을 못 뽑는 다든지...[28] 1999년 두산 베어스로 팀명이 바뀐 뒤에는 우리 두산 멋진 두산으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29] 2004년브라질 기업 암베브와 합병해서 인베브로 바뀌었다.[30] 두산그룹은 주류, 식품 등 소비재 위주 기업이었으나 IMF 직전이었던 1990년대 중반부터 소비재 업체들을 매각하고 대신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등을 인수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현재는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를 중심으로 한 중공업이 주력인 기업으로 바뀌었다.[31] 잔여경기 일정에서 김성한의 은퇴식이 있던 경기도 OB와의 대결이었는데 그 경기도 OB가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