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종
1. 소개
재일교포 출신의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포지션은 포수.
일본명은 키모토 시게미(木本茂美)로 원래 한국명은 '''김무미'''지만 어감이 안 좋다는 이유로 '''김무종'''으로 개명당했다.[2] 또한 현역 생활 은퇴 후 일본으로 돌아간 후 성을 키모토에서 타키무라(滝村)로 바꿨다고.
2. 일본프로야구 시절
일본 야마구치 현의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s-2를 졸업하고 1972년 드래프트 8순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했다.[3] 그러나 프로 11시즌 동안 1군 출장이 겨우 15경기에 불과할 정도로 철저히 2군에 묻혀 있었다.
3. 한국프로야구 시절
1983년 한국야구위원회의 재일교포 선수 영입 계획에 의해 한신 타이거즈에서 뛰던 투수 주동식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원년의 해태는 박전섭과 김경훈이 번갈아 가며 마스크를 썼는데 상대팀 주자들이 대놓고 뛰어도 거의 잡지를 못할 정도로 허약한 안방을 자랑(...)하던 팀이었지만, 김무종의 입단으로 최강의 배터리를 구축하게 되었다. 비록 2군에만 있었다지만 일본야구를 경험한 김무종은 한 수 앞선 투수리드와 강한 어깨, 견고한 블로킹으로 해태 투수들을 이끌면서, 타율 0.262, 12홈런, 60타점을 올리며 개인타격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4] 그리고 해태가 MBC 청룡을 꺾고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984년 공격형 포수이던 MBC 청룡의 유승안이 해태로 왔지만 좀 더 주전포수에 기용된것은 김무종이었고 여전히 좋은 타격을 보여줬다. 1985년이 되자 리그 평균 이하의 공격력으로 내려갔으나 여전히 주전을 차지하고 포수 치고 타격은 좋은편이었다. 1986년 유승안이 신생팀 빙그레로 떠나고 신예 장채근이 들어왔지만 아직 김무종이 주전 포수를 지켰다. 이 해 올스타전에서는 MVP를 수상했다. 1987년도 마찬가지로 전해와 마찬가지로 주전으로 활약하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봤다.
그러나 1987년 시즌 중반부터 엄지손가락이 뒤로 젖혀지는 포수들의 '''직업병'''[5] 이 심해지며 조금씩 포수 자리를 장채근에게 내주었고, 비록 고국이라고는 하지만 타국이나 다름없는 낯선 한국에서의 생활과 재일교포에 대한 냉대에 지쳐 우울증까지 도지면서[6] 결국 1988년 잠재력이 폭발한 장채근이 주전을 꿰차게 되었고 김무종은 고작 9경기 9타석만 나오며 이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해태 유니폼을 벗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프로 6시즌 통산 타율 0.240, 41홈런, 192타점을 기록하였다.
통산 wRC+가 약 92정도 되는 공격이 되는 포수였으며, 노련한 투수리드, S급이라 평가받은 수비능력으로 해태 안방을 든든하게 지키며 초창기 해태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4. 은퇴 이후
1991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한 김성근의 부름을 받고 삼성의 배터리 코치로 한국 프로야구에 복귀하였다. 이듬해 말 김성근이 감독직에서 물러난 가운데에서도 코치직을 유지했지만 1993년 한국시리즈를 패퇴로 끝난 뒤 재계약을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7]
이후 일본에서 운수업, 정확히는 트럭 운전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11년 2월 6일 NHK에서 방영된 재일교포 야구인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백구(白球), 선수들은 바다를 건넜다"'''에 출연했다고 한다.
5. 여담
과거 프로야구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에서 연도에 상관없이 사용가능한 클래식 카드로 출연하여 다시 관심을 받았었다. 이유가 뭔고 하니 기아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의 포수 카드들 중에 타격과 수비가 동시에 되는 유일무이한 옵션이기 때문이다(…). 수비 SS등급 달성이 가능하고 교정과 육성에 따라 교타 110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마구마구에서는 성명권 문제로 인하여 김이종이라는 이름의 선수카드에 그의 기록과 능력치가 수록되어 있다.
6. 연도별 성적
7. 관련 문서
[1]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골든글러브와 포지션별 베스트10을 따로 수상했다.[2] 한자 문화권에서 '''아름다울 미(美)자가 남자 이름에 쓰이는 곳'''은 일본 이외엔 거의 전무한 편이다.[3] 나중에 장명부와 같이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는 내야수 이영구와 팀메이트이자 룸메이트 였다.[4] 김종모 김봉연 김성한 다음으로 잘 쳤으며 리그 전체를 봐도 상위권이고 타석도 팀에서 5번째로 많다.[5] 이로 인해 은퇴한 포수들이 많은 편이며, 2015년 시즌 직전 은퇴한 현재윤도 이런 케이스.[6] 이 당시 김무종은 언론에 '''"내 고향은 현해탄이다"''' 라고 털어놓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푸대접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동료인 주동식의 증언에 따르면 삼성 라이온즈와의 대구 원정경기 후 술을 잔뜩 마시고 만취한 김무종이 호텔 로비에서 "(반쪽바리라고) 차별하지 말라"며 울부짖은 적도 있다고 한다.[7] 삼성은 그를 대신해 미국 연수 중이었던 김경문을 영입했다. 그리고 삼성의 1차 암흑기를 김경문과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