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

 

'''장효조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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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조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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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color=#373a3c> '''1992'''




'''1987 KBO 리그 MVP'''


'''1983,1985,1986,1987 KBO 리그 타격왕'''


'''1983~1987,1991 KBO 리그 출루율왕'''

보유 기록
0.331
통산 최고 타율
0.427
통산 최고 출루율
1983~1987
5년 연속 출루율왕
6회
통산 최다 출루율왕


'''장효조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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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0번'''
허규옥(1982)

'''장효조(1983~1988)'''

정성룡(1989~1992)
<color=#373a3c>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0번'''
이충우(1985~1988)

'''장효조(1989~1992)'''

이요섭(199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4번'''
임호균(~1997)

'''장효조(2000)'''

이선희(2001~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3번'''
강성우(2006~2009)

'''장효조(2010~2011)'''

세리자와 유지(2012~2014)



<colcolor=#000> '''장효조
張孝祚 / Jang Hyo-Jo'''
'''출생'''
1956년 7월 6일
경상남도 부산시[1][2]
(現 [image]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사망'''
2011년 9월 7일 (향년 55세)
'''국적'''
[image] 대한민국
'''학력'''
삼덕초 - 대구중 - 대구상고[3] - 한양대[4]
'''신체'''
175cm, 78kg, B형
'''가족'''
아내 강경화, 아들 장의태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3년 1차지명 (삼성)
'''소속팀'''
포항제철 야구단(1979~1980)[5]
육군 경리단(1981~1982)
'''삼성 라이온즈(1983~1988)'''
롯데 자이언츠(1989~1992)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1993~1998)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0)
대불대학교 코치 (2001)
삼성 라이온즈 2군 수석·타격코치 (2010)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타격코치 (2011)
'''종교'''
불교개신교[6]
'''별명'''
'''타격의 달인'''
'''서명'''
링크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삼성 시절 (1983~1988)
2.3. 롯데 시절 (1989~1992)
3. 은퇴 후
3.1. 지도자 1기
3.2. 야인, 스카우터, 지도자 2기
4. 별세
5. 영구결번 지정 관련
6. 기타
7.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소속으로 활동했던 전 야구 선수.
선수 시절 별명은 '''타격의 달인'''이었고, 그에 어울릴 정도로 압도적인 기량을 뽐냈던 강타자다. 특히 '''통산 타율 역대 1위(0.331)'''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7] 당시에는 공인구 반발력이 낮았고, 지금보다 훨씬 투고타저의 성향이 강해서 한시즌 3할 타자의 수가 적었고, 때문에 그의 기록은 더욱 가치가 있다.[8] 이 점에서 KBO 역대 최고의 교타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프로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왼손 교타자로 활약했다. 장효조-양준혁-이승엽-최형우-구자욱으로 이어지는 삼성 라이온즈 좌타계보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3,00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 중 통산 출루율 1위(.427) 역시 장효조의 몫이다.
동시대에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교타자로 활약한 웨이드 보그스와 비슷한 스타일의 타자다. 둘 다 정교한 타격 능력으로 명성을 날렸고,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하는 높은 출루율로도 유명했다. <주간야구>를 비롯한 당시 언론들의 야구 기사에서도 장효조를 '한국의 웨이드 보그스'로 부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9]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등번호는 10번, 롯데 자이언츠에서는 20번이었다.[10] 좌투좌타의 외야수였고[11] 지명타자로도 자주 출전하였다. 코치로서의 등번호는 83번(롯데) - 74번(삼성, 2000) - 83번(삼성, 2010~2011)
프로야구 레전드 다큐멘터리 "타격의 달인, 장효조"
매일신문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불세출의 타격왕 장효조 上


선수 시절의 전성기 대부분을 삼성 라이온즈에서 기록한 삼성의 대표적 스타지만, 의외로 롯데 자이언츠에서의 활동 기간도 짧지 않은 편이다. 프런트(스카우트) 시절을 제외하고 유니폼을 입었던 기간만 따지면 삼성에서 9년(선수 6년, 지도자 3년), 롯데에서 10년(선수 4년, 지도자 6년) 동안 있었다. 그외에 유니폼을 입지는 않았지만 스카우트로 삼성에서 5년간 일했다. 김시진처럼 삼성에서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롯데에서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였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아마추어 시절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강타자였다. 원래대로라면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시즌부터 뛰어야 됐지만, 그 해 벌어질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차출되면서 프로 데뷔가 한 해 미루어지게 됐다. 아마추어 시절에 알루미늄 배트 덕분에 장타력도 출중했다. 아직도 명 승부로 기억되고 있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의 4번타자는 바로 장효조였다.
본인 말로는 대학 때는 야구공에 그려진 마크가 보일 정도로 타격감이 좋았다고 한다. #
'''굳이 단점을 꼽자면 수비가 좋지 않고, 큰 경기에선 약했다는 점...'''[12] 당시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일본과의 최종전에서도 8회말 1사 1, 3루의 찬스를 2루 땅볼로 날려버릴 뻔했지만, 일본 2루수의 판단 미스로 병살타를 노리는 대신 홈으로 던져 3루주자 김재박만 잡혔고, 후속타자인 한대화의 극적인 결승 3점홈런으로 장효조의 범타가 묻혔다. 그 외에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롯데 한문연의 플라이를 판단 미스로 '''만세'''를 부르는 통에 3루타로 둔갑시켰고,[13] 타격 또한 정규 시즌과는 딴판으로 허공만 가르는 등 한국시리즈에선 유독 재미를 못 봤다...

2.2. 삼성 시절 (1983~1988)


알루미늄 배트에서 나무 배트로 바뀌면서 장타력은 줄었지만, 1983년 데뷔 첫 시즌부터 타율 1위에 안타를 117개나 쳐내는 등[14] 기록을 쏟아냈으나, '''이미 성인무대에서 어느 정도 활약을 한 상태에서 입단했으므로 신인으로 간주할 수 없다'''[15]는 다분히 역차별적인 이유로 신인왕을 OB박종훈한테 넘겨줘야 했다.[16][17] 훗날 1991년에 벌어진 한일 슈퍼게임에서 선수소개 때 가장 큰 환호와 박수를 받았던 건 선동열도, 이만수도, 장종훈도 아닌 바로 장효조였다. 일본의 올드 팬들이 그때까지 장효조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아마추어 시절에 장효조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데뷔시즌의 장효조가 얼마나 어마무시한 기록을 남겼냐하면 타율이 0.369에 홈런도 18개다. 양적 기록을 토대로 한 평가로도 흠잡을 데 없는 타격이었으나, 질적 평가에서는 더욱 그의 재능이 돋보인다. 출루율이 0.475, 장타율이 0.618, OPS는 무려 1.093, RC/27[18]의 경우는 '''99이승엽, 03심정수, 94이종범'''과 동급이다. 비록 당시의 게임수가 100경기에 불과하여 통산 기록은 손해를 본 편이지만, 질적 평가에서는 단연 사상 최고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는데, 장효조의 전성기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투고타저 시절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즌 조정 OPS가 '''역대 최고'''라는 점에서 장효조의 위대함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이후에는 타율이 3할 이상에 오르며 4차례나 타격왕에 오르는 등. 안타 제조기, 타격의 달인, 타격의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죽하면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라는 말도 있었으니......다만 수비는 '''정말''' 좋지 않았다. 홈런을 제외하면 타율은 1987년 0.387[19], 안타수는 1985년에 기록한 129개[20]가 개인 최고기록. 경기수 출장은 롯데 시절인 122경기로 한해 최다 출장을 기록했다.
프로 생활 10년동안 통산타율이 무려 '''0.331'''에 이르는데 이는 3천 타수를 넘긴 모든 KBO 리그 선수들 중 가장 높은 기록이다. 통산 OPS는 0.886. 특히 선구안이 매우 좋아 통산 BB/K는 1.75, 출루율은 0.427에 달한다. 남들 평생에 한번 하기도 힘든 3할7푼대에 육박하는 타율을 무려 3번이나 기록했다.[21]또한 당대 최고의 투수인 최동원에게 70타수 27안타 1홈런 0.386로 굉장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더구나 프로 입단은 '''27세'''(...)였다. 즉, '''대한민국 나이로 28세 때부터 프로에서 뛰었다는 것.'''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프로야구 출범을 1982년에 했기에 그 이전에는 실업야구 팀이나 일본에서 뛰던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해 뛰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장효조처럼 20대 후반의 선수는 물론이고 30대가 넘은 선수들도 대한민국에서의 프로경기는 처음이었다.
장효조 이후의 한국프로야구 왼손 교타자 라인은 이정훈 - 양준혁 - 장성호 - 이진영 - 김현수 - 이정후로 이어지게 된다.
1988년 12월, 선수협 파동 직후 좌완투수 장태수와 함께 롯데 외야수 김용철, 투수 이문한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됐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서 구단의 횡포에 의한 보복성 트레이드의 피해자인 셈이다.[22] 장효조는 생전 인터뷰서 삼성을 떠나야 했던 이유로 “연봉 협상 문제로 구단과 자주 이견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실제로 매년 겨울 장효조와 구단간의 연봉 협상 과정에서의 잡음이 언론에까지 보도되기도 했다.이와 더불어 한국시리즈에서 장효조은 몇차례의 중요한 실책을 저질렀는데 이 실책들이 시리즈의 패인으로 지목될 정도로 데미지가 큰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도 트레이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장효조와 삼성 구단과의 관계는 이후에도 별로 좋지 않았던 듯 하다. 92년 장효조가 은퇴한 후 삼성에서는 2000년에야 코치로 영입했는데, 이것은 레전드로 대우하여 영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년간 임시직으로 기용한 다소 굴욕적인 조치였다. 당시 삼성 구단은 해태 김응용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수년간 노력해왔는데 2000년 마침내 성사되는 듯 하다가 다시 1년 후로 연기된 바 있었다. 이에 삼성 구단은 1년간 김응용을 대신할 임시 감독으로 김용희를 감독으로 선임했는데 이때 김용희와 함께 장효조가 삼성 코치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김용희와 장효조는 롯데에서 5년이나 감독과 타격 코치로서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롯데 시절 타격 코치로서 장효조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희는 장효조를 끝까지 신임했고 결국 1998년 동시에 경질되고 말았다. 장효조가 삼성 코치가 된 것도 김용희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보고 있다. 1년 후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오게 되면서 예정된 수순처럼 김용희와 함께 장효조도 팀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후 장효조는 10년간이나 현장을 떠나 있다가 2010년에야 삼성 2군 코치로 지도자로 복귀하게 된다.

2.3. 롯데 시절 (1989~1992)


롯데로 트레이드된 후에는 주로 지명타자로 기용되었다. 홀수해(1989, 1991)에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격년제 징크스'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 롯데는 최하위권을 맴도는 부진을 겪었고, 이런 상황과 맞물려 일부 팬들은 "팀 공헌도는 적으면서 타율 관리에만 신경쓴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삼성 시절 타격 1위를 밥먹듯이 했던 임팩트로 인해 장효조에 대한 부산팬들의 기대가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했고, 김용철이라는 나름 프랜차이즈와 맞트레이드되었다는 점도 일조했다.
그래도 1991년에는 이정훈, 장종훈과 함께 시즌이 끝날 때까지 타격왕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2위를 기록하여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출루율 1위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장효조가 프로 선수로서 수상한 생애 마지막 개인 타이틀이었다.
이듬해인 1992시즌에는 삼성에서 하지 못했던 한국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그러나 그 해 그의 기량은 크게 하강 곡선을 그리며 시즌 타율 0.265, 54안타라는 프로 데뷔 이래 최저의 성적을 기록했다. 평소에 "절정일 때 옷을 벗자"라고 생각해온 장효조는 92시즌이 끝나자 미련없이 현역 은퇴를 택했다. 92년 당시 롯데에는 남두오성으로 불린 3할 타자들이 즐비했고, 2할대 후반의 백업 타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지명타자였던 그로서는 안타깝지만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물론 야구계에서는 그가 아직 충분히 더 뛸 수 있었다고 봤기에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은퇴한지 11년이 지난 후 인터뷰에서 장효조는 "너무 일찍 은퇴해서 아쉬움이 많다.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3~4년은 더 야구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아쉬움을 피력하기도 했다. #

3. 은퇴 후



3.1. 지도자 1기


1992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와 동시에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로 임명되어 1998 시즌까지 6년간 롯데에서 타격코치로 활동했다. 1993 시즌 강병철 감독 밑에서 1시즌을 보낸 후 1994시즌부터 김용희 감독과 5년 동안 함께 했다. 2011년 간암으로 별세한 후, 롯데 코치 시절의 모습이 잠시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뉴스 영상[23]
롯데 타격 코치에서 물러난 후 1999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마이너리그 코치로 1년간 유학을 떠났다.
[image]
2000년 김용희 수석코치[24]의 감독 승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다. 그해 김용희 감독이 심판의 판정에 불복하고 심판 멱살을 잡아 계형철 투수코치, 이순철 주루코치와 함께 6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자 6월 28일부터 7월 1일까지 나흘간 6경기서 장효조가 감독대행을 맡았는데, 감독대행을 맡던 6경기에서 '''4승 2무'''라는 호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00시즌이 끝나고 김응용 감독 부임과 함께 대대적으로 코칭스태프가 물갈이될 때 재계약에 실패하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 김용희와는 롯데에서 감독-코치로 5년을 함께 하다가 동반퇴진했으며, 삼성에서도 감독-코치로 함께 영입되었다가 1년만에 동반퇴진했다.
2000시즌까지 롯데에서 6년, 삼성에서 1년간 타격코치를 했지만, 이때 타격코치로서의 평가는 별로 좋지 못한 편이다. 롯데에서는 전임 타격코치였던 김용희남두오성을 길러내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우승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타코 시절 장효조는 전임 김용희와 비교되곤 했다.[25] 다만 이것은 김용희가 타코로서 능력이 걸출했데다가, 김용희 뿐만 아니라 역시 타격쪽에서는 뛰어난 지도자였던 강병철 감독의 역할도 컸다. 장효조의 코치 능력이 김용희에는 못미쳤지만, 타코로서의 자질이 평균 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롯데에서 6년이라는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타코로 머물렀던 것을 보면 롯데 내부에서는 장효조의 타코 코치로서의 능력을 나쁘게 보지 않았음을 직잠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타격코치로서 성과가 좋지 못했던 데는 본인이 선수 시절 워낙 뛰어났던 탓에 선수들이 자신의 지도방식을 따르지 못한 이유가 컸다는 의견이 있다. 한편 당시 언론 등에서는 남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는 직설적인 언변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던 그의 성격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의 성격 문제는 장효조와 매우 껄끄러웠던 삼성 프런트의 언론플레이였던 측면도 있다. 삼성 프런트는 1988년 장효조를 트레이드로 내보낸 이후 2010년에 2군 타코로 기용할 때까지 2000년 단 1시즌을 제외하고 장효조를 코칭스태프로 기용하지 않았다. 2000년에 타코로 기용한 것도 당시 감독으로 내정된 김용희가 장효조를 워낙 강하게 요청했던데다가, 어차피 1년 후면 김응용 사단으로 교체될 테니 1년 쓰다 버릴 심산으로 기용한 측면이 크다. 삼성팬들은 당연히 팀 역사상 최고의 강타자 중 한명이었던 그를 지도자로 영입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러나 삼성 프런트는 장효조의 성격이 워낙 강하고 직설적이서 지도자로는 힘들다는 얘기를 언론에 주기적으로 흘리곤 했다. 물론 장효조가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효조가 롯데에서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두 감독과 그 유명한 롯데의 강성 프런트 밑에서 별다른 잡음없이 타격코치직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장효조의 성격이 지나칠 정도로 완고하고 비타협적이라는 삼성 프런트의 주장을 그대로 납득하기는 어렵다. 사실 강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은 지도자에게는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특히 2010년대 이전에 한국 야구계에서 소위 명장이라고 불렸던 이들의 상당수는 이런 카리스마형 지도자였다. 다만 이런 유형의 지도자들은 프런트와 마찰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다.
훗날인 2010년 삼성 2군 코치가 되고난 후 인터뷰에 따르면, 현역에서 은퇴하자마자 곧바로 코치가 되었기 때문에 지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채 코치가 됐고 이 때문에 미숙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지도자 수업을 받지 않고 곧바로 지도자가 되어 성공한 경우도 많았기에 정답은 없는거지만, 그래도 자신의 경우에는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면 더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롯데에서 6년간 코치를 한 후 미국에서 1년간 유학하고 돌아온 후에도 삼성에서 타격코치도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때문에 선수 시절에는 팀의 간판스타였지만 삼성 코치에서 물러난 후 10년간 현장 밖에 있어야 했다. 다만 10년만인 2010년 삼성 2군 코치로 복귀한 후에는 지도자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장효조 본인은 현역시절은 물론, 코치 시절에도 그동안 2군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2010년 2군 코치가 되어 처음으로 2군 생활을 4개월 정도 하니까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말했다.
어쨌든 2000년 삼성에서 1년 동안의 타격코치 생활을 끝으로 10년간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에 공백기가 생긴다. 삼성 코치에서 물러난 후 2001년 전남 대불대에서 1년간 타격코치를 했다.

3.2. 야인, 스카우터, 지도자 2기


2001시즌이 끝나고 대불대 타격코치를 그만둔 뒤에 3년여간 완전히 야인으로 머물렀다. 그가 오랫동안 야인으로 머물자 이대로 야구계와 멀어지는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2002년에는 국민일보에 '장효조의 야구읽기'라는 코너와 관전평을 썼으며, 2004년 부산 지역지인 '국제신문'에 야구해설위원으로 초빙되어 ‘장효조의 만루홈런’이라는 관전평을 쓰면서 야구와 연을 이어갔다. # 야인으로 머물던 2004년초 부산일보 인터뷰에서 그는 현장 지도자 복귀에 대한 희망을 강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2005년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가 되며 야구계에 복귀하게 되었는데, 이 때 엉엉 울 정도로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26][27] 스카우트로 삼성에 복귀했지만 여전히 유니폼을 입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스카우트에 대한 대우가 훨씬 열악했다. 나중에 장효조는 자신이 병을 얻은 것에 대해 "스카우트 시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2010년에야 2군 수석코치와 타격코치를 겸하면서 10년만에 다시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공석이 된 스카우터 자리는 우용득 前 감독이 하게 되었다. 말이 수석코치지 사실상 1군 감독이 2군을 총괄한다는 의미의 직책이기에 2군 감독이나 다름없었다.
류중일 감독이 부임한 2011 시즌부터는 2군 감독 직함을 달게 되었다. 여전히 타격코치도 겸하고 있었지만 8월 10일 강기웅이 2군 타격코치로 부임하며 짐을 덜게 되었다.
초기 타격코치 시절과 달리 10년만에 다시 현장에 돌아온 후에는 지도자로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배영섭을 필두로 모상기, 정형식 등 2군의 여러 타자들을 키우는 성과를 보였다.
2011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30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에 선정되었고, 7월 23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식전 행사때 등장하여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image]
'''하지만 이것이 그가 팬들 앞에서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4. 별세


2011년 7월 말, 급격히 살이 빠지며 건강에 이상을 느낀 그는 8월 2일, 서울 삼성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고, 이틀 후인 8월 4일, 간암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장효조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8월 19일 주치의가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고향부산으로 내려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8월 20일, 자택 인근인 부산 동아대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한편 삼성 2군은 8월 2일부터 양일환 2군 투수코치가 감독 대행을 겸직하고 있었다. 20일 가까이 삼성 2군이 감독 없이 경기를 치르자 그의 건강에 이상이 있느냐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강한 장효조는 자신의 투병 사실이 알려지길 꺼렸다. 삼성 구단은 가족과 이 문제를 조율했고 ‘건강이 나빠 입원 중이라는 사실만 알리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장효조의 투병 사실은 부산 동아대병원으로 이송된 다음날인 8월 21일,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관련기사. 남들에게 약하게 보이는 걸 꺼린 장효조는 구단에 “구체적인 병명은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면회를 사절하던 상황임에도 8월 30일 삼성 단장 송삼봉이 가족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1분 정도 장효조를 면회할 수 있었고, 병상의 장효조에게 "형님, 아직 살아 있잖습니까. 1%의 확률이라도 있으면 병원비 같은 거 걱정 말고 열심히 치료해 봅시다. 야구 천재가 이 정도(암)도 이기지 못해서야 말이 됩니까. 얼른 털고 일어나이소" 라고 간청하자 장효조는 "노력해 볼께" 라고 답했다 한다. 그리고 다음 날엔 삼성의 김인 사장과 운영팀장도 짧게나마 장효조를 면회하여 그의 쾌유를 빌었지만, 결국 2011년 9월 7일 아침, 간암으로 55세라는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발견 당시 이미 간암위암으로 전이된 말기 상태여서 의학적으로 도무지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고...
9월 9일 아침에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3가 동아대학교 병원에서 발인이 엄수되었다. 금정구 두구동 소재 영락공원에서 화장을 진행되었으며, 장지는 기장군 철마면 실로암공원이다.
[image]
생전에 2군에서 같이 일하던 코치 6명이 고인을 운구했고 가족과 친지,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감독, 구단 관계자 등 백여명이 운집하여 고인의 가는 길을 지켜봤다. 전설의 타자가 가는 마지막 길답게 전혀 쓸쓸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발인 당일 새벽 2시경, 광주 KIA 타이거즈전을 마친 삼성 선수단이 구단 버스로 문상을 와서 마지막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고...
이렇게 그가 치지 않는 공은 볼이라고 일컬어지던 타격의 달인, 전설의 교타자는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장효조가 타계하고 일 주일 뒤, 최동원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묘하게도 최동원롯데에서 데뷔했지만 위의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고 장효조는 비슷한 시기에 삼성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명의 전설이 작고한 2011년 시즌 페넌트레이스 1, 2위는 경상도 지역 연고의 삼성롯데. 만약 두 팀이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붙게 되었다면 여러 가지의 관점에서 많은 의미가 부여될 2011년 한국시리즈가 되었을지도...
'''다만 당시 시리즈 준우승팀인 SK 와이번스의 감독이 공교롭게도 같은 삼성레전드이만수라는 점에서 역시 특별하다면 특별한 시리즈가 되었다'''. 이만수는 장효조와 같은 시대, 같은 팀에서 뛰며 각각 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와 최고의 중장거리 교타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동시에 장효조의 지인로서는 유일하게 최동원의 임종을 지킨 절친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최동원을 추모하는 롯데와 장효조를 추모하는 삼성을 모두 상대했으니... 이만수 역시도 꽤 복잡한 심정으로 포스트시즌을 치뤘을 듯 하다.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다큐멘터리 장효조 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내레이션 by 안지환)

눈물을 꿀꺽 삼키며, 그는 떠났다.

길지 않았던 삶, 55년. 그 대부분은 야구장에서 보냈고, 그 나머지 역시 야구를 생각하면서 보냈다. 오직 야구만 생각했기 때문에 최고가 될 수 있었고, 오직 야구만 했기 때문에 더 외로웠던 사나이. 그는 이제 떠났다. 하지만, 그의 기록과 모습은 지워지지 않을 전설로 남겨졌다.

(중략)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3할 3푼 1리는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남겨진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멈추지 않는 도전과 의지, 끝을 봐야 멈출 수 있는 투지와 신념. 그리고, 오직 야구만 사랑했던 그 마음. 단순한 숫자, 그 이상의 기록.

'''이것이 바로, 장효조가 남긴 유산이다.'''

'''보고 계십니까? 들리십니까? 당신이 꿈꿔왔던 그 순간, 2011년 챔피언! 삼성 라이온즈입니다!'''

한명재 캐스터의 2011년 한국시리즈 우승콜

그리고 장효조가 세상을 떠난 그 해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확정짓자, 한명재 캐스터가 '''팀의 우승을 보고 떠나지 못한 그를 염두에 둔 듯한 우승콜을 외치면서''' 다시 한 번 삼성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28] 이후로도 한명재는 삼성우승하거나,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경기에서도 장효조를 염두에 둔 멘트를 하기도 했다.

5. 영구결번 지정 관련


선수생활의 마무리를 롯데에서 하긴 했어도 엄연히 삼성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한국 야구사에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대선수인데, 왜 영구결번으로 지정시키지 않느냐는 삼성팬들의 의견이 많다. 장효조가 삼성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10번은 훗날 후배인 양준혁이 사용하였고 양준혁 은퇴후 삼성에서는 양준혁의 번호로만 영구결번으로 지정해놓은 상태이다. 양준혁은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다큐멘터리 장효조 편 말미에서 '''"제가 10번을 달고 영구결번의 영광을 누렸지만 이 번호는 원래 장효조 선배님 겁니다."'''라면서 본인 역시 장효조의 영구결번 지정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했었다.
때문에 공동 영구결번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비록 아직까지 KBO 리그에서는 공동 영구결번이 탄생한 적이 없지만, 메이저리그는 몇몇 구단에서 공동 영구결번을 지정해놓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29] 무리한 의견은 아니다.

6. 기타


  • 마구마구에서는 약간 느린 발이지만, 이를 송구로 커버하는 어깨 괴수로 출현. 특히, 삼성 세트덱에서 레어 87 장효조나 엘리트 83 장효조는 레벨업시 컨택트, 스로잉이 동시에 극상을 찍는 아름다운 탭간을 보여준다. 덕분에 플라이 이후 섣부르게 뛰었다간 끔살당한다. 더욱 충격적인 건 여태까지 나온 장효조 카드의 스로잉 평균은 80 중후반대이다. 그리고 87년 재평가로 인해 엘리트가 한장 더 추가되었다.
  • 대구상고 시절부터 프로까지 항상 잘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모양. 고교 시절에는 4개의 주요 대회에서 3번의 타격상을 수상하고 소속팀의 우승을 4번이나 이끌었음에도 최우수 선수에 선정된 적이 없었다. 프로에서 와서도 위에 나온 것처럼 프로 첫해에 MVP급의 활약에도 시즌 MVP는커녕 신인왕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1987년에 백인천 이후 최고인 3할8푼대의 고타율을 기록하는 등의 맹활약으로 프로시절의 유일한 MVP를 수상했다.
  • 고교 선수 시절, 장효조에겐 또다른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도루가 그저 몰래 한 베이스 이동하는 기술정도로 치부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홈 스틸을 성공시킨 적이 있었다. 그 점수는 그대로 결승점이 되어 그의 모교인 대구상고에 승리를 안겼지만 정작 본인은 홈 스틸을 성공시킨 후에 체력이 다해 기절하고 말았다. #
  • 프로 경력 말기였던 1991년 3할 4푼 7리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타율 순위 2위에 랭크됐는데 이 때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장효조의 대구상고 후배이기도 한 이정훈 한화 이글스 코치의 증언에 의하면 장효조는 실업 시절부터 매일 경기가 끝나면 자기 전에 캔맥주 2개를 꼭 마시고 잠을 자는 습관이 었다고 한다. 그런데 1991년 시즌 중 후배 이정훈과의 타격왕 경쟁을 위해 캔맥주를 매일 즐겨 마시던 버릇까지도 끊어버리고 그 시간에 타격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참고로 이 당시 장효조의 나이는 한국식 나이로 무려 36세였다.[30]
  • 선수 시절 자신의 집에 수십개의 배트를 걸어놓고 치밀하게 관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를 두고 민훈기 해설위원은 "마치 무사가 예리한 칼을 관리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 통산 병살타가 31개밖에 안 된다. 통산 타석수가 3,632타석인데, 덕분에 타석수 대비 병살타가 0.85%로, 1%도 안 된다.
  • 전성기 시절 높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최다안타에서는 높은 순위에 들어간적이 별로 없는데, 이는 장효조, 이만수 같은 주전 선수들은 체력 안배를 위해 삼미 슈퍼스타즈전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시절 삼미는 최약의 약체팀이었기 때문에 주전 타자들과 투수들을 쓰지 않고도 압도적으로 이겼다고 한다.
  • 한편 그가 쓴 10번은 훗날 양준혁의 번호로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2011년 10월 25일에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 고인의 아들 장의태 씨가 시구를 했는데 등번호가 331이었다. 그의 통산 타율 0.331에서 유래한것. 일각에서는 331번을 영구결번 처리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31] 거기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은 한국시리즈 한정으로 유니폼에 검정색 원형 패치를 달고 경기에 나섰다. 패치에는 LEGEND HITTER JANG HYO-JO라고 씌어 있고, 가운데에는 0.331이 씌어 있다.
  • 2011년 한국시리즈 당시 우승한 삼성 선수들은 하늘을 가리키는 세레모니를 했는데 이 세레모니는 하늘나라로 간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가 담긴 세레모니였다고 한다.
  • 군인, 기업가, 정치인이었던 포스코 박태준 회장이 좋아했다고 한다.[32]1979년 한국실업야구포철 야구단에 영입할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달라던 장효조에게 돈까지 얹어준 일화는 유명하다. 계약금 1,500만원에 집을 제공해 주는 조건이었다.
  • 모 팀추모 경기와는 달리 삼성은 현재까지 2016년을 제외하면 장효조의 기일에 열린 추모행사가 있었던 경기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33] 장효조 감독이 별세한 2011년 당일 경기를 시작으로 12, 13년까지 3년 연속으로 승리를 거뒀으며, 2014 시즌은 기일에 경기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15년은 당일에는 경기가 없었으나 홈 경기였던 6일에 하루 일찍 추모행사가 열렸고 그 경기에서 승리하며 불패 징크스를 2015년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2016년에는 선발 요한 플란데가 불을 지르며 타선이 잘 따라갔으나 결국 큰 점수차를 뒤집지는 못 하고 패했다. 다행히 2017년에는 승리.
  • 대학 진학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한양대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야구 명문이라는 점 외에도 집, 생활비, 부속병원비[34] 등을 전부 부담하겠다는 조건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 대구상고 2학년 때 대통령배 대회가 자신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자신감을 얻고 이후 봉황대기에서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한다.
  • 육군 경리단에서 복무를 했었는데, 이 에피소드가 굉장히 골 때린다. 그 당시 군 야구단은 공군과 육군에만 있었는데 공군은 지원이고 육군은 징병이었기 때문에, 공군으로 가기 위해 시험을 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육군 경리단 단장이 대령이었는데, 대통령과 육사 동기여서,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장효조 선수 본인의 표현으론 '체포해와라.' 라고. 이후 공군 입대 이틀 또는 하루 전에 헌병차에 납치되듯이 끌려가 육군 경리단에 입대했다. 그 후, 공군 VS 육군 라이벌 전에서 승리하고 3개월 특별 휴가도 받았다.
  • 1977년 4개국 대학선발 친선야구 대회에 참석하러 니카라과에 갔었는데, 대회 준비 위원회 측에서 애국가 테이프가 준비되지 않아서, 육성으로 직접 부르게 되었다. 당시 감독이 "저, 뭐냐 너 가서 불러라."라고 해서 불렀는데, 이후 대회 시작 전 나오는 애국가는 장효조 선수의 목소리였다.
  • '장효조의 집'이라는 가게를 했었는데, 그 당시 나이키프로스펙스가 서로 대한민국 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키에서 선전용으로 홍보를 위해 시도했었는데, 그리 영리적인 건 없었고, 4~5개월 이후 문을 닫았다.
  • 830g의 가벼운 배트를 주로 썼다. 본인이 스스로 가벼운 걸 선호한다고 밝혔다.
  • 타격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따라간다고 생각했다.
  • 2000년 삼성 1군 타격코치 시절, 김용희 감독이 심판의 판정에 불복하고 멱살을 잡은 바로 출장정지 징계를 받게 되어 감독대행을 잠시 맡은 적이 있었다. 고작 6경기지만 4승 2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때문에 일부 올드 삼성 팬들은 장효조가 삼성 감독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떡밥을 던지며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 한 때 재일교포 선수 김일융과 절친 사이였다.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 전지훈련 캠프 때도 같은 방을 자주 썼고, 출퇴근도 항상 같이 했다고 한다. 3살이나 차이 나는 선후배 사이지만 둘이 유난히 궁합도 잘 맞아서인지 진솔한 대화도 많이 나눌 정도로 끈끈했었다. 장효조가 롯데로 트레이드 된 당시에도 김일융이 국제전화로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일본 전지훈련 기간에도 기분 전환을 위해서 매일같이 통화했다고 한다. 장효조에게 야구인의 마음가짐, 그리고 진정한 프로 선수가 지녀야 할 자세 등을 집중적으로 전수하면서 장효조가 트레이드 사건에 대한 아픔을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일등 공신이 바로 김일융이었다. 2011년 일본 대지진 때 걱정돼서 김일융에게 전화한 적도 있다. 그리고 서술했다시피 그 몇 달 후...
  • 롯데 자이언츠의 손아섭이 장효조를 롤 모델로 삼고 있다.
실제로 손아섭은 장효조의 통산타율 기록을 깰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또다른 후보로는 박민우, 이정후.
  • 어느 날 한 기자가 와서 장효조에게 어떤 선수를 가리키며 "저 선수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장효조는 망설임도 없이 " 저 거구에 저정도 유연성을 가진 타자는 아주 드물어요. 두고봐요.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가 될 겁니다!" 라며 " 아직 선수 볼 줄 모르는구만!" 이라고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그 때의 그 선수는 훗날 조선의 4번 타자가 된다.
  • 대구가 고향인 것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실제 고향은 부산이다. 인터뷰에서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자신의 고향이 부산이라고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부산 동래구 안락동에서 출생하여 영도구 영선초교(현재는 남항초교와 합병)를 다니다가 3학년때 가족들과 대구로 이사와서 삼덕초교로 전학하여 야구부에 들면서 제대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 어린 시절 부산고등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활약했던 작은 아버지에게 처음 야구를 배웠다고 한다.
  • 롯데 자이언츠 이적 후 별세할 때까지 쭉 부산에서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삼성 타격코치에서 경질된 후 야인으로 있는 동안 부산 지역지 '국제신문'에 야구해설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2004년 인터뷰에서도 부산 금정구에 거주하고 있다고 나왔으며, 삼성 스카우트 시절인 2008년에도 부산에서 부인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나오며, 삼성 2군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갑작스레 별세했을 당시 기사에도 자택 역시 부산이라고 나왔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학창 시절과 선수 생활의 상당 부분을 보낸 대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도 있지만, 동시에 고향항구도시 부산에 대한 애착도 잘 나타난다.
  •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다가 kt wiz로 이적한 김동욱 선수를 생전에 매우 아꼈다고 한다. 평소에는 쓴소리를 많이 했지만, 지인들에게는 무조건 성공할 선수라고 칭찬했다고. # KBO 리그의 10번째 구단인 kt에서 10번째 구단인 만큼 10번을 아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동욱이 10번을 달겠단 의지가 강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존경했던 장효조 감독의 현역 시절 등번호가 10번이었기 때문.[35]

7.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기록. 푸른 글씨는 KBO 리그 역대 최고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삼성
92
317
'''.369'''
(1위)
'''117'''
(1위)
19
3
'''18'''
(3위)
'''62'''
(3위)
'''61'''
(2위)
'''22'''
(4위)
'''64'''
(1위)
'''.618'''
(1위)
'''.469'''
(1위)
1984
89
309
'''.324'''
(4위)
100
'''19'''
(4위)
'''7'''
(2위)
7
44
'''56'''
(4위)
8
'''54'''
(공동 3위)
'''.498'''
(5위)
'''.424'''
(1위)
1985
107
346
'''.373'''
(1위)
'''129'''
(2위)
'''24'''
(2위)
1
11
'''65'''
(3위)
'''66'''
(2위)
17
'''61'''
(2위)
'''.543'''
(3위)
'''.467'''
(1위)
1986
95
304
'''.329'''
(1위)
100
20
2
6
41
55
16
'''60'''
(1위)
'''.467'''
(4위)
'''.436'''
(1위)
1987
88
284
'''.387'''
(1위)
110
16
4
2
58
51
7
44
'''.493'''
(4위)
'''.461'''
(1위)
1988
96
283
.314
89
12
2
4
35
41
5
'''51'''
(공동 5위)
.413
'''.419'''
(4위)
<color=#373a3c> 연도
<color=#373a3c> 소속팀
<color=#373a3c> 경기수
<color=#373a3c> 타수
<color=#373a3c> 타율
<color=#373a3c> 안타
<color=#373a3c> 2루타
<color=#373a3c> 3루타
<color=#373a3c> 홈런
<color=#373a3c> 타점
<color=#373a3c> 득점
<color=#373a3c> 도루
<color=#373a3c> 4사구
<color=#373a3c> 장타율
<color=#373a3c> 출루율
1989
롯데
94
333
'''.303'''
(5위)
101
8
3
1
31
40
12
59
.354
'''.407'''
(3위)
1990
96
324
.275
89
13
4
1
22
36
8
36
.349
.347
1991
122
346
'''.347'''
(2위)
120
17
'''10'''
(2위)
4
54
45
11
'''70'''
(5위)
.488
'''.452'''
(1위)
1992
82
204
.265
54
9
0
0
25
23
3
34
.309
.365
<color=#373a3c> '''KBO 통산'''
(10시즌)
<color=#373a3c> 961
<color=#373a3c> 3050
<color=#373a3c> '''.331'''
(1위)
<color=#373a3c> 1009
<color=#373a3c> 157
<color=#373a3c> 36
<color=#373a3c> 54
<color=#373a3c> 437
<color=#373a3c> 485
<color=#373a3c> 109
<color=#373a3c> 533
<color=#373a3c> .459
<color=#373a3c> '''.427'''
(1위)
  • 수위타자 4회(1983, 1985, 1986, 1987), 최다 안타 1회(1983), 최우수 장타율 1회(1983), 최우수 출루율 6회(1983, 1984, 1985, 1986, 1987, 1991)
[1] 장효조의 출생 당시 부산은 (정부 직할) 부산시보다도 이전인 경상남도 부산시 시절이었다.[2] 과거 대구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부산이 고향이다. 장효조는 자신의 고향이 대구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면서 실제 고향이 부산임을 강조하는 발언을 몇 차례 하기도 했다.[3] 47회 졸업생이다. 김한근, 최병국(1956)과 고교 동기다.[4] 체육학과 1979년 졸업[5]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79년에 입단해서 1980년 9월까지 포항제철에서 활약한후 10월부터 군 입대 후 경리단 소속으로 뛰었다고 한다.[6] 아들선교사이다. 참조.[7] 2020 시즌이 종료된 현재 3,000타석 이상 타자들 중 타율 1위가 장효조(0.331), 2위가 박민우(0.330), 3위가 손아섭(0.325), 4위가 김현수(0.322), 5위가 최형우(0.321)이다.[8] 당시 경기수가 적어서 요즘보다 체력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았겠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은 반대에 가깝다. 당시에는 경기수가 지금보다 적고, 투수 분업화가 미비해서 각 팀의 주력 에이스 투수들이 매우 자주 등판했다. 때문에 경기수는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동원, 김시진, 김일융처럼 한 시즌에 25승 이상을 거두는 투수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것이다. 때문에 요즘보다 에이스들과 훨씬 자주 대결해야 했다. 당시에 외국인 용병은 없었지만 재일교포 출신들이 사실상의 용병으로 각 팀에서 몇명씩 뛰곤 했다. 그들은 백인천, 장명부, 김일융처럼 일본에서도 수준급의 성적을 냈던 선수들이다. 김일융은 삼성과 계약이 끝나고 다시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을 정도.[9] 이전 문서에는 장효조를 '한국의 토니 그윈'이라고 표현하면서 높은 통산타율, 심지어는 두 사람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걸 근거로 내세웠지만, 억지스러운 끼워맞추기에 가깝다. 그윈은 정교한 타격 능력에 비해 보그스보다 적극적인 타격 성향을 보여 타율에 비해 출루율에서 손해를 보았다. 게다가 장효조와 보그스가 둘 다 1980년대에 전성기를 기록하고 내리막을 걸은 반면, 그윈은 오히려 1990년대에 더욱 두각을 나타내며 보그스를 능가하는 기록과 명성을 얻었다.[10] 이 당시 롯데에서는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자갈치' 김민호가 10번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11] 주로 우익수 수비를 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비 실력은 타격에 비해 떨어졌다는 것이 일관된 분석이다. 게다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시리즈의 행방을 넘겨주는데 단초를 제공하는 초대형 실책(일명 '장효조 만세 사건')을 저지르기도 했다.[12] 반면 이해창은 빅 게임에 강해서 서로 비교되기도 했다.[13] 하필이면 이 장면을 이건희 당시 삼성 라이온즈 구단주 겸 삼성그룹 부회장이 잠실야구장에 도착한 순간 직관했다고 한다.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 비해 직관 승률이 지극히 낮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이건희 당시 부회장은 이날 사무실에서 TV로 경기를 보다가 삼성이 경기를 리드하자 "이쯤 되면 내가 가도 이기겠지?"라고 생각하고 잠실로 향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만세 사건'을 보고 유두열의 역전 쓰리런 홈런까지 목격하게 된다. 이날 경기 이후부터 이건희 회장이 야구장에 가는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4] 당시 1시즌 경기는 총 100경기였다.(원년에 80경기, 이후 100경기로 늘어났고 증감을 거쳐 2013년부턴 128경기) 교타자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 해에는 18개의 홈런을 쳐서 리그 3위를 기록,이는 1991년 쌍방울김기태가 27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신인 좌타자 시즌 최다홈런 기록이었다. 참고로, 1983년 홈런 1위는 이만수(27개), 2위는 김봉연(22개).[15] 오마이뉴스의 김은식에 따르면 '참신성이 없다' 라고...사실 프로에 오기 전에도 성인 야구무대인 실업 야구에서도 커리어가 쌓인 고참급 선수이기는 했다. 입단 당시 나이만 봐도 현재를 기준으로 해도 중참에서 고참으로 넘어가는 단계.[16] 이 이유에도 나름 근거는 있는게,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사실상 전신이라고 봐야하는 한국실업야구에서 충분히 활약을 한 선수를 신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느냐는 건데, 종목은 다르지만 한국프로농구에서도 이상민이 실제로 현대전자에 입단한 후 거의 뛰지 않고 바로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입대하고 프로 2년차부터 현대 다이냇 소속으로 뛰면서 MVP를 수상했음에도 불구, 신인왕 투표에선 주희정에게 밀렸던 예가 있다. 어떻게 보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일본리그출신 선수들에게 신인왕 자격을 주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논란이 종종 벌어지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17] 이런 전례가 있어서였는지, 이후에도 실업리그 출신 프로야구 선수가 신인왕을 수상한 사례는 없다.[18] 같은 타자를 1번부터 9번까지 도배했다는 가정하에 9이닝 당 얻을 수 있는 예상 득점을 계산하는 기록, 자세한건 야구의 기록 계산법 참고.[19] 1987년 올스타전 화면에서도 나오지만 이 해 전기리그 타율이 무려 '''0.419'''였다.[20] 한 시즌 110경기 중에 107경기에 나와서 때린 기록. 경기당 1.2개씩은 꼬박 친 셈이다. 2016년의 경기 수준으로 환산하면 약 174개에 이른다.[21] 정확히는 1983년 0.369/1985년 0.373/1987년 0.387[22] 장효조의 사망 이후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방송된 추모 다큐멘터리에서 박영길 당시 삼성 감독이 트레이드 발표 후 장효조가 자신의 집을 찾아왔던 당시를 회상하면서 흐느껴 우는 장면이 나왔다[23] 왼쪽은 최동원이며, 우측에 나온 인물은 장효조와 친분이 깊었던 김일융인 듯 하다.[24] 1998년 시즌 중에 롯데에서 해임된 김용희는 실업시절 동료인 서정환의 부름을 받고 1999년에 삼성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되었고, 1999년 플레이오프가 끝나고 졸전을 펼친, 서정환 감독은 사임하게 되었는데 김응용이 안 와서 땜빵 감독으로 승진했다(...).[25] 김용희 또한 타코 시절에는 훌륭한 업적을 거두었지만, 이 때문에 롯데 프런트의 섣부른 결정으로 39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감독으로 승진하면서 감독 시절에는 타코 시절때 만큼 좋은 지도력을 보이지는 못했다. 장효조 역시 현역 은퇴와 동시에 롯데 타격 코치가 되었는데, 훗날 장효조는 지도자 수업을 받지 못하고 너무 빨리 타격코치가 된 것이 결과적으로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26] 부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삼성의 스카우트로 복귀할 때 엉엉 울었다고 한다. 또한 부인은 남편이 우는 모습을 그 때 처음 봤다고 한다.[27] 동시에 삼성 리틀야구단 감독도 맡았다.[28] 다만 생중계에서 외친 건 아니고 녹화방송에서 한 멘트이긴 하다. 그러다 보니 격한 승리의 감정보다는 추모의 의미가 좀 더 부각된다.[29] 대표적인 것이 재키 로빈슨의 42번. 마리아노 리베라, 브루스 수터 등이 공동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30] 당시만 하더라도 30대 초반의 나이에 들어서면 '노장' 취급을 받았고 30대 중반에 대부분 은퇴하던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장효조는 37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관리가 뛰어난 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3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455(연속경기 매진 신기록),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중계 캐스터 톰 치크의 4306(연속 경기중계 수)로 세 자릿 수 이상의 영구결번이 있다.[32] 박태준이 축구를 가장 좋아했던 것이 더 유명해서 잘 부각되지 않았지만, 야구도 좋아했었다.[33] 매년 6월 10일김상진의 기일만 되면 KIA는 대부분 진다. 근데 2016년에는 오랜만에 이겼다.[34] 선수 자신이 부상을 입을 시에 치료를 지원하겠다는 뜻이거나, 저 때 가족 중에 병중인 이가 있어 이에 대해 지원하겠다는 뜻 중 하나다.[35] 이후 김동욱은 황재균이 kt로 이적하면서 황재균에게 10번을 넘겨주고 자신은 33번으로 등번호를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