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부

 

'''장명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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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KBO 리그 다승왕'''

<color=#373a3c> '''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34번'''
팀 창단

'''장명부(1983~1985)'''

팀 해체
'''청보 핀토스 등번호 18번'''
팀 창단

'''장명부(1985)'''

이광근#s-1(1986)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19번'''
팀 창단

'''장명부(1986)'''

조용호(1989)


'''장명부의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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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기록
시즌 최다 선발
44경기[29]
시즌 최다 완투
36경기
시즌 최다 투구
427⅓이닝[30]
시즌 최다 승리
30승
시즌 최다 선발승
28승
시즌 최다 완투승
26승
최다 연속 경기 완투승
8승
경기 최다 피안타 승리
16피안타
시즌 최다 패전
25패
시즌 최다 연패
15패
특정팀 상대 연패
10패(vs MBC 청룡)
시즌 최다 피안타
388피안타
시즌 최다 실점
175점
시즌 최다 자책점
145점


[image]
'''한국식 이름'''
장명부(張明夫)[1]
'''일본식 이름'''
후쿠시 히로아키(福士敬章)[2]
'''생년월일'''
1950년 12월 27일
'''사망'''
2005년 4월 13일 (향년 54세)
'''국적'''
[image] 대한민국[image] 일본[3]
'''본적'''
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실옥리[4]
'''본관'''
나주 장씨
'''출신지'''
일본 돗토리현 야즈군 치즈정
'''학력'''
일본 돗토리현립 돗토리니시 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80cm, 90kg
'''프로입단'''
1968년 드래프트 외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8~1972)
난카이 호크스 (1973~1976)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7~1982)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1983~1985)'''
빙그레 이글스 (1986)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후
4. 사망
5. 여담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1. 개요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5]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의 투수. 별명은 너구리.
역전패의 명수이자 만년 꼴찌 팀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 기적을 몰고 왔던 수호신이자, 무리한 혹사로 비참하게 쓰러진 비운의 투수이다. 등번호는 '''34번(1983~1984)'''→18번(1985)→19번(1986).

2. 선수 경력



2.1. 일본프로야구 시절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의 투구 모습.(긴테츠 버팔로즈와 대결한 일본시리즈 당시) 패스트볼의 구속이 무려 149km/h다.
돗토리현립 돗토리니시 고등학교 졸업 후 당시 재일교포를 외국인 선수로 분류하는 일본프로야구의 규정[6]에 의해 1968년 지명 외 선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1970년 1군 승격 후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입단 후 3년 간 고작 18시합에 등판해 승리기록 없이 3패만 쌓았고, 1973년 도미타 마사루와의 맞트레이드로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였다. 그 해, 노무라 카츠야의 밑에서 선발로 뛰면서 7승을 올리면서 그 해 난카이의 퍼시픽 리그 전기 우승에 공헌하였다. 이후 난카이 시대 최후의 리그 우승을 결정지은 플레이오프 2, 4차전에서 패전처리 투수로 등판. 일본 시리즈에선 3차전 선발 투수로 등판하기도 했다. 5이닝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지만(...) 아무튼 난카이 이적 이후 실력이 만개하면서 에모토 타케노리 등과 함께 난카이의 주전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image]
197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고바 타케시 감독에 의해 김기태와의 맞트레이드로 히로시마로 이적하였다. 히로시마에서도 선발 투수로 활약하면서 1978년, 1980년 시즌에 15승을 올리고 1980년엔 최고승률 타이틀까지 획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1979년과 1980년 히로시마의 일본시리즈 2연패 달성에 공을 세우며 히로시마 황금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그 후로도 마운드의 중추적 멤버로 활약했지만 1982년 3승에 그치며 구단에서 연봉의 대폭 삭감을 통보하자 이를 현역 은퇴 선언으로 맞받아치며 유니폼을 벗었다.
당시 뒷이야기로 1982년 시즌 종료 후 선배인 장훈에게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어볼 생각이 없냐고 권유를 받은 장명부는, 고민 끝에 대한민국행을 결정했다. 그리고는 스승인 고바 타케시에게 대한민국으로 가고 싶다고 털어놓자 고바는 처음엔 강력히 만류하였으나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봉사하고 싶다는 장명부의 의지를 이해했고, 결국 "그래, 한국으로 가거라. 그 대신 키야마 에이큐(이영구)도 같이 데려가라"면서 승락했다고 한다. 이영구는 재일교포 2군 내야수로 평소 장명부가 동생처럼 아끼던 선수였고, 고바는 내친 김에 히로시마 구단에서 자리가 마땅치 않던 이영구까지 배려해 준 것이었다. 또한 장명부가 대한민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숨기고 연봉 협상 테이블에 나섰을 때 고바는 모른 척 하고 장명부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묵인해 주었다.

2.2.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시절


[image]
'''일 프로야구 히로시마 주전선수'''
'''재일동포 장명부 모국서 뛰고 싶다.'''
프로 원년 시즌이 끝난 후 1982년 12월, KBO가 전력 보강과 프로야구 활성화의 일환으로 추진한 재일동포선수 영입 계획에 의하여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게 된다. 계약금 1,500만 엔(약 4,500만 원), 연봉 2,500만 엔(약 7,500만 원)에 부대 비용(세금, 아파트, 승용차 제공) 6,000만 원 등 토탈 1억 8,000만원의 금액을 받는 조건이었다. 대졸초임이 20만 원대였고 당시 국내 최고 연봉 선수이던 OB박철순이 2,400만 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거액이었다. 당시 국산차 중 최고가던 포드 그라나다의 풀옵션 가격이 2천만 원이 안 되었고 강남은 60평대 아파트가 5천만 원을 하던 시절이다. 거기에다가 금리도 20%대에 달했기에 억대의 돈이라고 하면 정말 이자수익만으로도 상당히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수있는 수준의 거금이었다.
또한 이러한 급여가 한국에서만 거액이었던 게 아니라, 일본프로야구 기준으로도 고액이었다. 그 시기 일본프로야구 최고연봉 선수가 7,000만 엔이고, 1983년 히로시마 카프 투수진 중 '''키타벳푸 마나부(3,300만 엔) 단 1명만''' 장명부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았다. 심지어 야수진에서도 장명부보다 연봉이 많았던 선수는 '''야마모토 코지(6,500만 엔), 카토 히데지(4,000만 엔), 기누가사 사치오(3,200만 엔)의 단 3명'''뿐이었다. 이 3명 전부 타이틀 수상 경력이 있는 당대의 강타자였고, 특히나 야마모토와 기누가사는 히로시마에서 영구결번프랜차이즈 스타였다. 게다가 한국에서 계약금을 따로 받고 소득세를 구단이 대납해주며 아파트와 자동차를 제공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후한 대우였다.

입단 계약은 1983년 1월 18일에 마쳤고, 장명부는 1983 시즌부터 삼미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해 장명부는 전설을 써 낸다.'''#
[image]
만화가 최훈김형준 칼럼에 투고한 일러스트.
장명부는 1983년 시즌 시범 경기에 두 차례 등판했다. 한국 프로 무대 데뷔 전이라 할 수 있는 3월 19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구덕 경기에 5회말 무사 만루 상황에서 임호균을 구원하여 첫 선을 보인 그는 일단 5회 말은 1실점으로 막아냈지만, 이후 2이닝을 던지며 롯데 타선에 4안타 3사사구로 3실점을 허용했고, 무엇보다 일본프로야구의 베테랑이란 얘기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냥 설렁설렁 던지는 피칭이 야구팬들의 의구심을 살 정도로 형편없는 피칭이었다. 그리고 3월 22일 MBC 청룡과의 인천 시범 경기에 선발로 등판했는데, 경기 전 김진영 감독으로부터 "오늘은 최선을 다해 던져보라"고 주문을 받았지만 변함없는(...) 대충대충 투구로 일관하며 13안타를 두들겨 맞은 끝에 9대 7로 간신히 승리를 따냈다. 시범경기 동안 2게임 등판에 11이닝을 던져 17피안타 11실점이란 기록으로 매 이닝 1점을 내준, 누가 보아도 형편없는 투수로 보기에 충분했다.
김진영 감독으로선 '''"저 놈을 도대체 왜 데려온 거야?!"''' 라고 땅을 칠 만 했지만, 장명부는 MBC와의 시범경기 후 그의 부진에 속을 끓이던 김진영 감독에게 '''"감독님, 오늘은 저 쪽(MBC) 전력 파악하려고 직구만 던진 겁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시범경기에서 이긴 건 일본야구까지 통틀어 8년 만에 처음입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별거 아니거든요?"''' 라면서 오히려 김진영을 달랬다고 한다. 이 말에 김진영은 속으로 ''''이런 너구리 같은 놈!!''''이라 감탄했다고.
그의 꾀돌이 작전은 시범경기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삼미와 입단 계약조건을 조율하던 도중에 삼성 라이온즈의 훈련 캠프를 찾아가 조감독이자 같은 재일교포인 이충남에게 "내가 뛰게 될 삼미라는 팀이 작년에 그렇게 시망이었다며? 가고 싶지 않다."라고 투덜거리고는 "여기서 몸도 풀 겸 연습이나 하고 가겠다"라면서 삼성 타자들에게 직접 배팅볼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이충남은 '혹시 얘가 삼성으로 오려고 이러나?'라면서 일말의 희망을 품었지만 알고 봤더니 삼성 타자들을 분석하려고 페이크를 썼던 것(...). 결국 그 해 삼성은 장명부에게 철저히 농락당했고, 특히 그 해 데뷔한 장효조는 장명부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나 마찬가지였다.
장명부의 진가는 삼미의 시즌 개막전이자 장명부의 공식 경기 데뷔전이었던 4월 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구덕 경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날 장명부는 7이닝 동안 29타자들을 상대로 삼진 7개를 잡아내었고 6안타 4볼넷으로 1실점, 10-4로 첫 승리를 이끌었다. 평소엔 설렁 설렁 던지는 듯하다 위기다 싶으면 전력을 다 하여 투구했고, 사이드 암과 스리 쿼터 형의 투구 스타일을 변칙적으로 사용하며 당시 최고 수준인 145km의 강속구와 낙차가 큰 커브, 특히 능수능란한 완급 조절로 경기장을 지배했다. 그 날 김진영 감독이 장명부의 호투에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그거야!!"''' 라고 환호한 건 당연지사.
그날 한국 무대 첫 승을 거둔 장명부는 대 번에 언론과 팬들로부터 너구리라는 별명을 선물받았다. 어느 날은 홈 경기가 끝난 후 한 팬에게 농심 너구리 한 박스를 선물로 받았다는 일화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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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그는 닥치는 대로 등판하여 닥치는 대로 던졌고, 그야말로 한국 모든 선수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투수임을 보여줬다. 한국 최초로 빈볼로 타자들을 견제했고, 벤치 클리어링을 한국에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며, 빈볼을 던진 다음엔 특유의 썩은 미소로 타자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심리전에도 능했다.
결국 장명부는 1983년 한해 '''60경기 등판, 44경기 선발, 427.1이닝, 30승(28선발승), 36완투, 26완투승, 6완봉승, 8경기 연속 완투승'''이라는 '''먼치킨'''급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7]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52승을 올렸다. 장명부가 선발이었던 경기에서 삼미의 승률은 0.636이지만 장명부가 선발이 아닌 경기의 승률은 고작 0.429. 이는 정말 '''이게 인간이야 장명부야'''라고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기록임에 틀림 없었다[8]. 다승 1위, 탈삼진 1위, 평균자책점 2위로 MVP를 다툴 자격은 충분했지만 홈런 1위, 타점 1위 이만수에게 밀려서 수상하지 못했다. 그 다음해인 1984년에는 4관왕 트리플 크라운 이만수가 다승 1위 탈삼진 1위로 2관왕인 최동원에게 MVP를 내준 걸 감안하면, 장명부가 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또한 MVP는 정규 시즌 성적만 보고 뽑는 만큼 최동원의 한국 시리즈 4승은 해당되지 않는다.
사실 그가 이러한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운 것은 시즌 전 삼미의 허형 사장이 장명부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30승을 하면 보너스 1억 원을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한 것에 낚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반 농담같은 계약이 설마설마 하다가 그게 진짜로 현실이 되어버렸고, 당황한 허 사장은 그런 약속 안했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어차피 계약서에 명기된 내용도 아니라서 구단 운영비에서 이를 충당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결국은 허사장의 사비를 털어 일부를 지급하는 것으로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이 일로 장명부는 삼미에 오만 정이 떨어져 버렸고, 장명부는 아무리 한국 야구판이 후지다고 해도 어떻게 사장까지 선수를 속이냐고 분개하며 이듬해부터는 고의 태업을 일삼기 시작한다. 그런데 삼미는 장명부와 관련해 장명부도 속이고, 기자들도 속이고, 모그룹인 삼미그룹까지도 속였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한편 허형 사장은 1984 시즌 종료후 사임했다.
다만 링크 내용에서 계약잡음이 터진 이후 장명부가 고의태업을 했다고 쓰여지기는 했지만, 400이닝을 던지고 몸이 아무렇지 않을수는 없었을 것이다. 몸도 상했는데 마음까지 상하는 과정에서 허탈감에 빠져드는 일종의 번아웃 증후군이 생겼고 이 증상이 겉에서 보기에는 태업으로 비춰졌을 것이고 결국 그 번아웃 증후군을 극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장명부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허리 부상으로 고생 중이었고, 거기다 1983년 시즌의 혹사까지 겹쳐 급속도로 구위가 추락하며 1984년 13승 20패란 부진한 성적을 남겼고, 이듬해인 1985년에는 한 시즌 최다패 기록(25패, 11승)을 세우기도 했다.

2.3. 빙그레 이글스 시절


[image]
설상가상으로 그는 1983년 시즌 후 보너스 문제로 매년 삼미 측과 갈등을 빚었고, 팀이 청보에 넘어간 이듬해인 1986년에 청보 핀토스의 감독을 맡은 허구연이 선수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방출되어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했다.[9] KBS N SPORTS에서 방영했던 프로야구 다큐멘터리인 '더 레전드'에 당시 빙그레 이글스 배성서 감독과의 인터뷰가 나왔는데, 그는 '''"그런 선수보다는 어린 선수들을 키우자"'''며 구단이 장명부를 빙그레로 데려오는 것을 반대했다고 말했다. 홍순일 前 주간야구 편집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노진호 단장이 장명부를 영입했으며, 노 단장이 자신에게 노장 장명부를 써먹을 수 있겠냐고 묻자 아직 장명부는 아직도 쓸만한 선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빙그레로 이적한 1986년에 1승 18패의 처참한 성적을 내고 만다. 방어율은 4.98로 에이스급들은 2점대, 3점대 성적을 기록하던 것에 비추어보면 좋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이 해 1군 참가를 시작한 신생 팀이던 빙그레는 에이스 이상군조차 2.63의 방어율로 12승 '''17패'''를 안겨주는 물타선이었고 폼이 떨어질 만큼 떨어진 그 해의 장명부만큼도 못해주는 투수들밖에 없었을 정도로 팀이 부실했었다. 그렇게 나가는 족족 지면서도 그해 100이닝이나 책임졌다. 참조[10]
이 때 빙그레와의 입단 계약 당시 2년치 연봉 1억 5천만 원을 한꺼번에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해 '''세상에서 가장 비싼 1승'''을 거두었고, 빙그레는 장명부를 방출하며 나머지 연봉 7천 5백만 원은 토해놓고 가라고 했지만 장명부는 '''"나를 스카우트한 너님들도 책임은 있지 않은가? 몰러 배째!"'''라고 맞대응하기도... 결국 빙그레 구단주인 김승연 회장의 조치로 탕감되었다고 한다. 당시 노진호 단장의 관련 인터뷰가 정말 압권이다. "장명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한 물 간 투수라 해도 최소한 10승쯤은 올리지 않을까? 크게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1승이라니…, '''내가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빙그레 이글스 입장에서는 구단 역사 초창기의 대표적인 선택 실패였던 셈.
장명부가 망한 이유는 1983년 시즌의 유례없는 혹사 이외에도, 이후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장명부는 1983년 이후로도 계속 혹사당해야 했는데, '''1984년 45경기 25선발 15완투 261.2이닝을 기록했으며 1985년에는 45경기 35선발 10완투 246.0이닝을 기록했다.''' 유례없을 정도로 혹사당한 투수를 쉬지 않고 2년이나 더 굴린 데에는 잘하는 선수가 거의 없는 삼미/청보의 팀 사정으로부터 기인했다. 그나마 1983년 장명부 다음으로 믿을 만했던 임호균은 1984년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해 버리는 바람에 다른 대안도 없었다. 결국은 다 못 해서 던질 사람이 없으니 계속해서 200이닝을 넘겨야 할 정도로 혹사당한 것이다.
한 시즌 400이닝이나 굴려졌으니 공이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장명부가 못하는 투수로 전락한 건 아니었다. 1984년 최다패를 하긴 했으나 팀내 종합 WAR는 1위였고, 10승을 거뒀다. 1985년은 투수진 WAR 4위를 기록했는데 최다패를 경신하는 와중에도 WAR 수치가 플러스(0에 가깝긴 하지만)를 찍었다. 가장 성적이 나빴던 1986년은 방어율 4.98에 ERA+는 63에 불과했다. 이 당시가 투고타저였음을 감안해 본다면 5점대에 육박하는 평균자책점은 매우 못한 것이 맞긴 하지만 1승밖에 못 한 데에는 타선과 구원투수진의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게 컸다. 이해 WAR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긴 했지만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에 약간 못 했다고 보이긴 해도 아주 못 했다고 보긴 힘들며 무엇보다도 그해 빙그레가 신생팀으로서 청보보다도 아래인 꼴찌를 했다는 점에서 참작의 여지가 있다. 당시 강팀이었던 삼성이나 해태 소속이었다면 1986년에 1승 18패가 아니라 거의 10승 정도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1984년까지는 잘하는 투수였다고 볼 수 있으며, 혹사로 인해 나머지 2년은 보통 투수로 전락했다고 보는 게 옳다. 기록상으로는 못하는 투수로 보이긴 했어도 그의 소속팀이 다 하나같이 최약체였기에 그런 기록이 나온 것일 뿐, 실제로 못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오류인 것이다.
그의 가장 큰 불운은 늘 하위 팀 소속으로 뛰었다는 점일 것이다. 강팀에서 뛰었다면 그 유례없는 혹사도 없었을 것이고, 몇 년 더 리그를 호령할 수 있었거나 똑같은 시기로 선수생활을 마무리 지었더라도 기립박수를 받으면서 은퇴했을 것이다.

3. 은퇴 후


[image]
삼성 라이온즈 투수 인스트럭터 시절 성준의 투구 폼을 고쳐주는 장명부.[11] 뒤의 인물은 삼성의 2군 감독이던 박창용 씨.
은퇴 후 그의 인생은 완벽하게 쇠락했다. 1987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하려다가 김포국제공항에서 종합소득세 730만 원이 체납된 사실이 밝혀져 혼자만 대한민국에 발이 묶였고, 이후 이혼까지 당했다.[12] 이후 서울의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투수를 지도했고 삼성롯데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13] 고교 순회코치 시절에 그가 발굴한 투수 중 한 명이 LG 트윈스의 야생마 "이상훈"이다.
하지만 롯데 투수코치 시절에 팬을 폭행했고, 1991년 5월에는 성낙수, 박찬 등과 함께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가 드러나 마약사범으로 구속되어 한국프로야구계에서 사실상 매장당했다. 그 해 7월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지만, 결국 KBO로부터 영구제명된 후 대한민국 입국금지 조치를 당하며 죽을 때까지 다시는 대한민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빌린 돈을 안 갚는다며 지인으로부터 사기 혐의로 피소당했다.
1991년 12월, 그는 추방 형태로 도쿄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이후 일본에서 건설업과 건물 야간경비, 택시 운전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무지 그의 행적은 찾기 어려웠으며, 김무종이나 주동식 등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1995년 4월 27일 MBC에서 한선교, 신애라가 진행했던 '그 사람 그후'라는 프로그램 제작진이 그를 찾아서 인터뷰를 한 일이 있는데, 당시 '후쿠시 상사'를 운영하며 묘지매매와 무역, 중개업을 해왔다. 딱 봐도 얼굴이 푸석푸석한 검은 빛이 도는 등 건강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럼에도 야구의 끈은 놓지 못했다고 한다. 청각장애인 야구팀의 코치를 맡아 무료 봉사를 하고, 세계장애인야구연맹 부회장으로도 있었다고... 기사.

4. 사망


그렇게 힘든 말년을 보내던 중, 2005년 일본 와카야마현의 미나베 마을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하우스 사무실의 소파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사건현장 당시 벽에는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살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향년 55세. 비록 전성기는 짧았지만 다시는 나오기 힘들 대기록을 남긴 주인공의 마지막 순간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했다.

5. 여담


  • 투수들의 평균 구속이 136km/h 수준이던 1980년대 한국프로야구[14]일본프로야구 출신으로 평균 145km/h의 패스트볼, 최고 149-150km/h를 찍던 구위 + 칼날 제구력 + 완급 조절능력을 발휘했으니, 대한민국 타자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한국 진출이후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강속구가 아닌 제구력과 기교위주로 기억하는 것을 보면 한단계 아래였던 당시 한국리그에서는 변화구와 제구력 위주로 공략했던 것 같다. 속구가 필요없었다는 뜻일지도. 그의 일본시절 평속 145km/h, 최고 149-150km/h는 후대의 선동열도 마무리때 보여주던 구속이다.
  • 당시 일본 프로리그에서 15승 2회 등 통산 91승을 거둔 투수가 아직 세미프로 수준인 한국에 왔으니 당시 타자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굳이 지금에 비유하자면 MLB 90승 투수가 한국에 진출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현 한국야구 수준을 고려해보면 이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 엄청나게 가난한 집안에서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글짓기 시간에 "병이 나으면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요"라는 주제로 글을 지어 아버지에게 보여줬더니 다음 날 아버지가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사 갖고 오신 것이 계기가 되어 야구를 시작했다.
  • 일본에서 쓰던 본명은 마쓰바라 아키오(松原 明夫)였지만, 결혼하면서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며 후쿠시 아키오(福士 明夫)로[15], 차남을 낳은 후에는 후쿠시 히로아키(福士 敬章)로 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본명인 장명부에 애착을 갖고 있어서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다고.
  • 난카이 호크스 시절 팬이던 후쿠시 치에코와 사랑에 빠지며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걸림돌은 장명부를 탐탁치 못해하던 치에코의 아버지였다. 그는 일본 정부 고위직을 지낸 거물급 인물이었는데 장명부가 결혼 승낙을 받으려 치에코의 집에 쳐들어와 3일 동안 대치했고, 참다 못한 치에코의 아버지가 장명부를 안방으로 불러서는 "자네는 야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묻자 잔뜩 얼어있던 장명부는 "막노동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굶기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무남독녀인 딸을 데려가 호강시켜 주겠다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이러한 대답에 보통의 아버지라면 "이 녀석이!! 뭐가 어쩌고 어째?!"라면서 멱살을 잡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치에코의 아버지는 "그래? 무릇 사내라면 그래야지...자존심을 버리면 뭐든 할 수 있다"라며 어깨를 토닥이며 결혼을 허락했다 한다. 장명부의 장인이란 양반도 어찌 보면 대인배였던 듯... 그렇게 결혼에 성공한 장명부는 이듬해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고 일본으로 귀화했고, 장명부의 아버지는 "섭섭하다"라고 토로했지만 본인이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으로서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은 입장인지라 더 이상 아들을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 삼미에서 뛰던 시절, 팀 동료들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특히 1983년 12승을 거두며 원투펀치를 형성한 임호균과의 사이가 굉장히 불편하여 이듬해 임호균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고[16], 배터리를 이루던 포수 김진우와는 견원지간[17]이었다(...). 가장 친한 팀메이트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의 동료였던 내야수 이영구뿐이었으니 말 다한 셈.[18] 그렇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등판한 경기 때 결승타를 치거나 파인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에게 고급 시계 또는 양복 등을 선물하는 등, 인심을 쓰는 면도 있었다.
  • 1985년 시즌, 삼미가 18연패의 수렁에 빠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단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는데 목사님과 스님을 불러 예배와 예불을 한다던가, 심지어 무당까지 불러 굿을 하거나 덕아웃 앞에 소금을 뿌리는 등 미신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저녁에 호텔 나이트클럽을 통째로 빌려 선수들을 밀어넣고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시켜주는 것은 물론 밴드까지 불러주며 아무 말 안할테니 밤 새도록 실컷 놀고 스트레스를 풀라고 한 적도 있다. 그 와중에 성적이 부진한 팀에서 흔히들 하는 삭발만큼은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장명부가 "삭발해서 이겼으면 진작에 이겼다. 일본에서도 아무리 팀 성적이 안좋아도 머리는 깎지 않는다" 라고 부득부득 우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 아버지의 고향이었던 충청남도 아산에 이복 형인 장재현 씨가 살고 있는데, 장재현 씨의 집에 장명부의 선수 시절 사진이 도배되어 있다고 한다. 장명부가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던 1975년 대한민국 실업 팀과의 친선경기차 방한한 일본 프로 연합팀 멤버로 대한민국에 와서 서로 만난 적이 있지만, 그 당시 장명부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해서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장명부는 대한민국에 있을 때 아버지의 고향에 꼭 가보고 싶다고 염원했으나, 결국 가지 못한 채 쫓겨난 후 세상을 떠났다.
  • 그의 가정사를 추가로 덧붙이자면, 본인의 바람기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거 같다고 인터뷰 한 바가 있다. 자신의 아버지는 상당한 호색한이었고, 자신의 엄마가 몇번째 아내인지도 모른다나. 장명부의 아버지인 장득룡 씨는 1992년에 74세를 일기로 작고했는데, 이복 형 장재현 씨가 수습하여 아산시 영민면 영인산 자락에 모셨다고 한다. 이복 형 장재현 씨는 지금도 생존 중이고 손주가 현재 20대라고 한다.
  • MBC 청룡내야수 김인식[19]은 장명부의 사구에 가장 많이 맞은 선수였다. 김인식은 계속 참다참다가 어느 날 또 사구를 얻어맞자 헬멧을 집어던지고 장명부에게 달려들어 원터치를 뜰...려고 했는데, 정작 마주치니깐 20cm 이상 신장 차이가 나는 장명부를 보고서는 그냥 쿨하게 1루로 갔다. 장명부를 다룬 다큐에서 이 장면이 나왔다.
  • 현대 유니콘스에 이어 인천광역시를 연고지로 삼은 SK 와이번스가 2004년 문학 홈 개막전에[20] 장명부를 시구자로 세우려고 장명부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연고지역민인 인천 시민들에게 아직까지 낯설었던 SK 구단을 홍보하고[21] 이 시기에 개봉했던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과의 콜라보레이션 홍보를 위해서라도 장명부를 찾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일단 장명부는 1991년 12월에 대한민국 입국 금지를 당하며 추방당했던 데다가, 장명부는 은둔 생활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히 야구계 관계자를 피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장명부의 행방을 아는 재일동포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22] 결국 SK에서는 장명부 대신 슈퍼스타 감사용의 실제 주인공인 감사용으로 시구자를 대신했으며[23], 이듬해 4월 일본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고서야 세상에 그의 행적이 드러났다.
  • 이런 멸시와 차별, 선입견 때문에 일본에선 조센징, 조국에선 반쪽바리로 불리며 단지 '야구만 잘할 뿐이던' 그의 비참한 인생이 계속되었다. 오죽했으면 '내 조국은 대한민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내 조국은 현해탄[24]이다.'라고 말했을까. 그의 설움이 잘 드러나는 명언이다.
  • 한국에서는 장명부의 말로 알려져 있는 '낙엽은 가을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 영화에 등장한 표현이다. 가츠 신타로가 주연했던 영화 자토이치에 등장하는 표현인 것. 가츠 신타로 명언 봇이라거나, 관련 서적 등에서도 언급된다. 한국에서는 이걸 한자식 표현으로 바꿔서 "落葉不怨秋風"이라고 쓰기도하는데, 이 표현은 한국 웹에서만 검색된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落葉不怨秋風 但靜落爲更始"라는 댓구까지 완성된 사례가 보이는데 이것은 네이버 지식인 답변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 사람들이 많이 모르는 사실인데, 선수협의 기초를 마련한 바 있다. 1983년 시즌 후 그는 일본처럼[25] 한국도 선수들의 협회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MBC 청룡의 김재박, 이해창 등 노장 선수들이 만들려고 했으나, 구단들이 그 전에 미리 손을 쓴 탓에 실패했다.
  • 씨름선수 장지영과 굉장히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장명부가 한국에서 전성기를 누렸을 시절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기에 인천직할시에 살았고 장지영은 인천 출신으로서 인하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한때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친분이 매우 깊었다.
  • 야구게임 마구마구에서는 영입선수 전환 시 대표팀 계열의 덱에 사용할 수 있다. KBO와 MLB에 관계없이 한국인 선수만 대표팀에 영입선수로 사용할 수 있는데, 일본국적의 재일동포임에도 KBO시절엔 당시 외국인 제도도 없었고, 한국인 선수 취급을 받았기에 무리는 아닌 듯하다. 이는 용병영입, FA영입, 대표팀 차출로 통합 전 세부화하던 시기부터 유효했다.
  • 2020년 1월에 한 한국인 유학생[26]이 그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했다.# 위에 언급된 장명부의 이복형 장재현 씨와 박영길,이영구 등 당시 같이 활동했던 야구인들을 직접 인터뷰했다고 한다. 후속작도 기획중이라고.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68
요미우리
1군 기록 없음
1969
1970
11
40⅔
6
0
0
3.07
0
3
-
-
38
4
18
32
1971
2
7⅓
1
0
0
5.14
0
0
-
-
6
1
3
6
1972
5
9
2
0
0
8.00
0
0
-
-
17
4
4
2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73
난카이
27
140⅔
18
6
1
'''2.87'''
7
0
-
-
130
10
73
56
1974
26
139⅓
18
5
2
3.04
9
7
0
-
130
10
43
59
1975
32
188⅔
21
11
'''4'''
(1위)
3.00
'''11'''
12
0
-
185
10
60
66
1976
24
115⅓
17
3
0
3.68
6
7
1
-
120
13
44
23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77
히로시마
46
100
6
0
0
5.13
6
6
5
-
129
11
45
39
1978
41
230
32
'''12'''
(1위)
2
3.60
'''15'''
8
0
-
236
(1위)
23
75
94
1979
37
163⅔
25
4
1
3.57
7
9
1
-
156
24
47
109
1980
31
187
28
8
1
3.95
'''15'''
6
0
-
195
28
55
106
1981
35
201⅓
28
7
1
4.03
'''12'''
9
0
-
211
22
81
116
1982
22
111⅓
15
5
1
4.46
3
11
2
-
113
21
43
77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3
삼미
'''60'''
(1위)
'''427⅓'''
(1위)
'''44'''
'''36'''
(1위)
'''6'''
(1위)
'''2.36'''
(2위)
'''30'''
(1위)
16
'''6'''
(3위)
0
'''388'''
19
122
'''220'''
(1위)
1984
'''45'''
(3위)
'''261⅔'''
(2위)
25
'''15'''
(1위)
'''2'''
(3위)
3.30
'''13'''
20
'''7'''
(4위)
0
261
20
72
'''145'''
(4위)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5
청보
'''45'''
(3위)
'''246'''
(2위)
35
'''10'''
(4위)
0
5.30
'''11'''
'''25'''
(1위)
5
0
304
22
112
'''128'''
(3위)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6
빙그레
22
108⅓
17
3
0
4.98
1
18
0
0
130
12
50
48
<color=#373a3c><colbgcolor=#ffff88> '''NPB 통산'''
(15시즌)
339
1634⅓
217
61
13
3.68
91
84
9
-
1666
181
591
785
<color=#373a3c> '''KBO 통산'''
(4시즌)
172
1043⅓
121
'''64'''
7
3.55
55
79
18
0
1083
73
356
541
비록 한 해뿐이었지만 장명부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 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들 중 시즌 최다이닝 등판, 시즌 최다경기 완투, 시즌 최다승, 시즌 최다패의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깨질 가능성도 희박하며, 절대로 깨져서도 안 된다.''' 단, 승리나 패전 기록만이라면 1선발들이 부지런히 등판하면 30경기 이상은 등판하므로 '''일정이 도와준다는 가정 하에 등판 전 경기 승리'''를 한다면 가능하다. 따라서 반대로 최다패 기록도 가능은 하다. 요즘은 1선발이라 해도 36경기를 선발로 올라가질 않으니 36완투는 나올 수 없고, 이닝 기록은 33경기 선발에서 경기당 13이닝씩 던지거나 48경기 선발로 경기당 9이닝씩 던져야 경신이 가능하니 현실성이 없다. 선발 투수가 한 해 200이닝을 넘기면 위험한 거 아닌가 염려할 정도로 관리를 해주고 풀타임 선발이 150이닝도 못 넘는 선수도 많은 요즘 기준이라면, 장명부는 일반적인 투수가 3년 던질 것을 1년 만에 던진 것이다. 그것도 경기수도 적었던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
사실 이런 그의 초인적인 기록은 한국프로야구가 출범 2년 밖에 안 된 초창기 시절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이 많이 올라간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27][28] 특히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에는 분업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고는 해도, 장명부가 세운 기록은 무쇠 어깨를 가진 '초인'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7. 관련 문서


[1] 한국에서는 한국명으로 활동하였으므로 등록명으로 본다. 즉 여기선 한국계라서 한국명이 아니라 외국인 선수의 등록명과 똑같이 다룬다.[2] NPB 입단부터 1978년까지는 마쓰바라 아키오(松原明夫), 1979년에는 후쿠시 아키오(福士明夫)라는 이름을 썼다. 작명가의 조언을 받아 바꾼 이름이 바로 이 이름.[3] 부인과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귀화했다. 참조.[4] 현재의 아산시 배미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참조.[5] 장명부가 죽은 곳에서 발견된 자필 문구. 하단 참조.[6] 이 규정은 같은 해에 역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김일융 사건을 계기로, 재일교포일본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것으로 개정된다.[7] 2008년에서 12년까지 5시즌 동안 류현진이 15완투 6완봉을 기록했다(...).[8] 그 해 롯데 자이언츠에만 2완봉승을 거두었는데, 일본 난카이 호크스 시절이던 1975년에는 롯데 오리온즈 상대로 3완봉승을 기록하기도 했다[9] 무려 아버지의 고향 팀이다. 본래는 OB 베어스였으나 서울로 올라갔다.[10] 장명부가 유니폼을 벗은 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그 해 20승 정도만 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괜한 욕심내 가지고 30승을 거두는 바람에 망했다고 후회하면서 눈물을 흘린 장면은 유명하다.[11] 이 때 그가 달았던 47번은 훗날 한 좌완투수가 달게 되고, 그는 타팀에 가서 수호신 . 현재는 잡담사로 유명한 강민호가 달고 있다.[12] 명목상 이혼 사유는 생활고였는데, 실제로는 장명부의 바람기가 원인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장명부는 아버지의 바람기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13] 이 때 장명부를 롯데로 데려온 사람이 삼미 시절 장명부를 보살펴 주었던 김진영 감독이었다. 그리고 김진영 감독이 1990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해임당하자, 장명부도 같이 잘렸다.[14] 198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의 평균 구속이 시속 140km 초반에서 145km/h로 넘어가는 추세였다.[15] 흔히 일본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데릴사위의 경우는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르기도 한다. 일본 야구계에선 나카니시 후토시가 그 경우에 해당되며,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사위로 미하라 가문에 입적된 바 있다. 그래서 미하라 후토시가 그의 호적상 이름이다.[16] 그러나 임호균은 인천 출신인 자신이 장명부 가족이 살 집을 알아봐 줄 정도로 챙겼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워낙 실력 차이가 커서 국내 선수들이 콤플렉스를 느낀 부분도 있고, 장명부가 한국어를 거의 못해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어서 원만하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라고 추측했다.[17] 1984년 시즌 막판 홍문종(롯데), 김일권(해태), 이해창(MBC) 세 명이 치열한 도루왕 경쟁을 벌일 때 장명부는 같은 재일동포인 홍문종이 누상에 나오면 견제를 게을리하여 베이스를 훔치는 데 은근슬쩍 지원해 줬고, 이에 열받은 김진우는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나도 지원할 사람이 있다 이거야' 라면서 김일권을 밀어 주었다. 참고로 당시 장명부는 주자견제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지금으로 치면 거의 봉중근급) 김진우 또한 1983년 시즌 도루저지율 5할(120회 시도 중 60회 저지)을 기록한 데다 1984년에도 롯데 한문연의 뒤를 잇는 도루저지율 2위의 강견을 자랑하는 포수였다. 덧붙이자면 이해창은 지원해 줄 타팀 배터리가 아무도 없어 나름 열심히 뛰긴 했지만 결국 그해 도루왕 타이틀은 김일권에게 내줘야 했다(...).[18] 삼미의 국내 선수 중엔 포수 금광옥과 친했다. 장명부 등판 시에 사이가 안 좋은 김진우 대신 금광옥이 자주 마스크를 썼는데, 포수 리드가 공격적이라며 금광옥을 선호했다고 한다.[19] 흔히 알려진 프로 및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유명한 투수 출신의 김인식과는 동명이인이다. 현재 독립야구단인 연천 미라클 감독직을 역임 중.[20] 'LG의 야생마'였던 이상훈이 SK 유니폼을 입고 LG를 상대로 세이브를 올렸던 기막힌 사연의 경기였다.[21] 인천지역의 야구팬들, 특히 인천야구의 역사를 또렷이 기억하던 올드 팬들에게 장명부가 의미하는 게 상당했기 때문에...[22] 반면 어떻게 보면 라이벌인 투수 김일융은 야구 해설 등으로 너무 세간에 잘 알려졌고...[23] 10년뒤 고향에서 다시 시구했고 그로부터 6년뒤 고향팀은 첫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24] 대마도규슈 사이를 가르는 해협. 현재 한국에서 쓰이는 명칭은 대한해협이나, 현해탄이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사람이나 재일교포들에게는 현 세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25] 일본은 1979년 처음 선수협이 결성되었고, 1985년 노동청으로부터 노동조합 지위를 인정받았다.[26] 히어로즈 팬이라고 한다.[27] 같은 이유로 최동원, 백인천, 장효조 등의 기록도 폄하되는 경우가 인터넷 상에서는 종종 있다.[28] 하지만 그 말대로면 과거 메이저리그에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 사이 영, 월터 존슨, 타이 콥, 베이브 루스같은 선수는 못하는 선수로 평가된다. 옛날 기록이라고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그 당시 얼마나 잘했느냐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