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 개요
2. 구단 역사
2.1. 초창기 (1938~1949)
2.2. 난카이 호크스 전성기 (1950~1977)
2.3. 암흑기의 시작 (1978~1988)
2.5. 새로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시작과 계속되는 암흑기 (1989~1997)
2.6. 강팀으로의 재도약 (1998~2003), 구단 매각(2005)
2.7. 그리고 가을 야구의 비극 (2004~2010)
2.8. 2008년 이후의 동향
2.9. 왕조를 넘어선 소프트뱅크 제국
4. 유니폼
5. 홈구장
5.1. 제1 홈구장: 후쿠오카 PayPay 돔
5.2. 제2 홈구장: 키타큐슈 시민 구장 외
6. 인기
8. 마스코트
9. 관중수 추이
10. 역대 성적
10.1. 양대리그 출범 이후
11. 이야깃거리
12. 주요 선수들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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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프로야구단.
1938년 창단되어 2004년까지 13번의 퍼시픽 리그 우승, 4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 20년 연속 A클래스 실패 등 흥망성쇠의 길을 걷다가 2005년 소프트뱅크가 팀을 인수한 뒤 야구를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팀에 투자하는 구단주를 만나 팀 역사상 가장 큰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그 후 2011년 주니치, 2014년 한신, 2015년 야쿠르트, 2017년 베이스타즈, 2018년 카프, 2019년 요미우리, 2020년 요미우리를 전부 무너뜨리면서 '''2010년대에만 7번의 일본시리즈 우승'''과 '''왕조의 상징인 3-peat을 달성'''과 동시에 불과 '''9년이라는 짧은 기간안에 12구단 체제 최초로 반대 리그 전구단을 상대하여 우승을 달성한 팀'''이 되었다.
또한 2005년부터 시행된 NPB '''양대리그 교류전 최강자로''', 통산 최다 우승[5] 과 통산 최고 승률[6] 모두 호크스가 보유하고 있는 중이다.
'''현시점 명실상부 이견이 없는 일본 최강팀'''이며 동시에 아시아 최강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인기도와 관중수로만 봐도 센트럴 리그의 일본 그 자체인 팀과 간사이 그 자체인 팀에 이어서 3위를[7] 기록하고 있는 퍼시픽 리그와 규슈를 대표하는 명문팀이다.
또한 현재 호크스가 사용하는 홈구장 후쿠오카 PayPay 돔은 이전 모회사 다이에가 거품경제 시기에 일본야구장 준공비 역대 1위에 해당하는 '''800억엔'''을 갈아넣어 만든 일본에서 가장 비싼 야구장으로, 현재까지 일본 최초이자 유일의 개폐식 돔구장이다.[8]
2. 구단 역사
2.1. 초창기 (1938~1949)
1938년, 난카이 전기철도를 모회사로 한 '''난카이군(南海軍)''' 이란 이름으로 창단했다. 현재는 후쿠오카를 연고지로 하지만 초기부터 1988년까지 긴 시간을 오사카에 거점을 둔 구단이였다.
초창기엔 난카이군이란 이름으로 운영했으나 1944년 모회사가 킨키 일본 철도와 통합되는 바람에 '''킨키닛폰군(近畿日本軍)'''으로 개명당했다가 1946년 '''그레이트링(グレートリング)''', 그리고 1947년 다시 난카이 전기철도의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한 모회사에 의해 '''난카이 호크스(南海ホークス)'''로 개명되었다. 현재까지 구단명칭 호크스는 이때 난카이로 바뀌면서 처음으로 붙은 명칭으로 난카이 전기철도의 표장에 들어가 있는 매에서 유래했다.
2.2. 난카이 호크스 전성기 (1950~1977)
난카이 호크스 시절인 1947년부터 1988년을 반으로 뚝 잘라, 전기를 전성기 후기를 흑역사로 구분하는 올드 팬들이 많다(...). 이는 모회사가 잘나갈때 함께 잘나가다 몰락할때 같이 주저 앉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난카이 호크스는 23년동안 장기 집권한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 아래 1951년, 1952년, 1953년, 1955년, 1959년, 1961년, 1964년, 1965년, 1966년 퍼시픽리그 우승과 1959년, 1964년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는 등 196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며 퍼시픽 리그를 휘어 잡았다. 당시의 대표적인 스타로는 스기우라 타다시, 히로세 요시노리, 노무라 카츠야 등이 있었다. 이 시절에 수립한 1955년 퍼시픽리그 우승 당시의 99승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일본프로야구 한시즌 팀 최다승''' 기록이다.
2.3. 암흑기의 시작 (1978~1988)
그러나 1973년 퍼시픽리그 우승 이후 휘청하더니 1977년 당시 선수 겸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가 팀을 떠난 후[9] 저주에 시달려 모기업이 다이에로 바뀌어 후쿠오카로 이전한 이후인 1998년까지 '''단 한번도 A클래스에 못 올라갈 정도로''' 공인 퍼시픽 리그 동네북으로 전락한 아픈 과거가 있다.[10]
2.4. 구단 매각, 그리고 후쿠오카로의 연고이전 (1988)
1988년에 모회사인 난카이 전기철도가 구단 운영 포기를 선언하면서 소매유통업체인 다이에가 구단을 인수하게 되고 이미 팬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오사카를 뜨기로 결정한다 그 당시 난카이는 창단 5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였지만 결국 창단 50주년 기념으로 구단을 매각해버렸다(…). 여담으로 매각조건에 '호크스' 라는 팀명을 유지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진을 보면 시즌 중반까지 매각이나 운영포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매각 작업이 상당히 급박하게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팔려고 내놓은 구단을 창단 50주년 드립을 치면서 기념을 할 리가.
이 급작스러운 구단 매각의 내막에는 구단주이자 난카이 전기철도 회장이었던 가와카츠 덴(川勝傳)의 노환으로 인한 사망이 있었다. 팀이 장기적인 부진에 빠지자 난카이 전철 이사회와 노조는 "적자만 내고 그룹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구단을 매각하라"고 요구해왔다. 하지만 가와카츠는 꿋꿋하게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 까지'''는 절대 구단만큼은 못 판다."라고 완강하게 버티면서 호크스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결국은 1988년 4월 23일 가와카츠의 '''눈에 흙이 들어가자마자(…)''' 구단을 다이에에 팔아버렸다.
난카이 시절의 홈구장이었던 오사카 구장은 구단 매각 후 더 안습을 달리게 됐는데. 시내 중심지, 난카이의 본거지인 교통의 요지 난바 인근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팀이 도망가면서 방치가 돼버린다. 가끔씩 타 팀들의 경기가 열리기도 했지만, 그 이외엔 쓸모없는 건물이 되버린 건 마찬가지. 심지어는 야구장 안에 '주택박람회' 같은 전시회를 해놔서 야구장 안에 견본주택(모델하우스)이 늘어선 정말 굴욕아닌 굴욕적인 장면도 연출되었다.[11]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한국의 동대문운동장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청계천 지역에서 장사하던 노점상이 청계천 공원화 이후 갈곳이 없어지자 폐쇄된 동대문운동장에서 풍물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했었다. 구단매각의 이유 중 하나가 간사이 국제공항의 개통에 따른 난바역 주변 재개발이라는 명목도 있었으나 거품경제 붕괴 후로는 손을 못대고 방치에 방치를 거듭. 결국 1998년 11월에 와서야 헐리고, 지금은 난카이 그룹 계열 쇼핑센터인 난바파크스(なんばパークス)가 자리잡고 있다.
다만, 호크스에 대한 대우는 떠나간 프랜차이즈 치고는 어느 나라보다는 대우가 후한게 오사카 구장 부지에 들어선 쇼핑센터에 난카이 호크스 기념관도 있고, 관중석 일부도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난카이 구단과 등을 돌리고 원수 사이가 된 레전드인 노무라 카츠야에 관한 기록은 지금도 유니폼 한 조각, 사진 한 장 조차 전시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1959년의 일본시리즈 우승장면 사진에서도 노무라는 교묘히 지워놨을 정도. 노무라 카츠야가 난카이 호크스에 어떤 존재였는가를 생각하면…
난카이의 여담을 하나 더하자면, '아부상' 이라는 만화책이 있는데, 여기 주인공이 난카이 호크스에 있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있어서 야구장에 광고판 까지 있었다. 때문에 난카이 호크스 해단 관련 동영상에 작가가 꾸준히 등장하며, 마지막 경기 때는 중계도 함께 했다. 아부상은 호크스가 후쿠오카로 이전하고 다이에와 소프트뱅크의 손을 걸친 지 한참이 된 시기까지도 연재되었다가 2014년에야 완결이 났고, 주인공은 은퇴 뒤 '''현실에서''' 준영구결번까지 되었다(…). 결과적으로 80년대까지는 칸사이 지방에 한큐 브레이브스, 긴테츠 버팔로즈, 난카이 호크스 의 퍼시픽리그 3팀이 존재했으나, 지금은 그 조상도 애매해진 오릭스 버팔로즈(구 한큐 브레이브스)만 남아있게 되었다.
2.5. 새로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시작과 계속되는 암흑기 (1989~1997)
호크스 구단을 매입한 다이에는 당시 재개발 사업이 한창인 기류에 편승하여 1989년 후쿠오카로 구단을 이전하여 팀명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福岡ダイエーホークス)'''로 개명하였고, 그 후 1993년 당시 돈으로 800억엔을 투입하여 돔구장을 짓는 돈지랄을 과시하면서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지금의 홈구장인 후쿠오카 돔으로 홈구장을 옮겼다.[12] 또한 웬만하면 팀명이 바뀌지 않는 한 바꾸지 않는 응원가[13] 를 갈아엎었다.[14]
잠시 새 연고지인 후쿠오카와 헤이와다이 구장에 대해 설명하자면 1950년 서일본 철도와 서일본 신문이 각각 퍼시픽 리그의 니시테츠 클리퍼스와 센트럴 리그의 니시닛폰 파이리츠로 일본 프로야구에 참여, 같은 헤이와다이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며 뛰었다. 그러나 1950년을 끝으로 니시닛폰이 GG를 쳐 니시테츠와 합병되며 해산되고 그 뒤 니시테츠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꿔 계속 뛰었다. 그리고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명지휘와 나카니시 후토시, 이나오 가즈히사, 오기 아키라, 토요다 야스미츠 등의 맹활약으로 1956~1958년 3년 연속으로 미하라의 라이벌 미즈하라 시게루가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누르고 일본시리즈를 제패하는 등의 황금기까지 누렸고 그 뒤에도 1963년 퍼시픽 리그 우승까지 했으나[15] 점점 약체팀이 되면서 망해갔고 결정적으로 검은 안개 사건이 터지며 구단은 완전히 ㅈ망. 결국 1972년 서일본 철도가 GG치며 경영을 포기하고 만다. 그 뒤 명명권 판매 등으로 "타이헤이요 클럽(1973~1976)-크라운 라이터(1977~1978) 라이온즈" 로 이름을 바꾸며 어찌저찌 연명했다가 1979년 세이부 철도에게 팔려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꿈과 동시에 연고지를 사이타마로 이전하여 후쿠오카와 헤이와다이 구장은 빈 터가 되어버렸다. 자세한 것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참고. 그 10년 사이에 후쿠오카에서 그냥 멍하니 있었던 건 아니었고 어떻게든 새 구단을 유치하기 위해 서명 등의 방법을 동원했고, 그 결과 후쿠오카에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연고이전 이후 10년만에 프로야구팀이 생겼다.
원래 후쿠오카가 니시테츠-타이헤이요 클럽-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의 연고지였고, 호크스는 난카이 시절 라이온즈와 치열한 라이벌 관계였던 탓에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10년만에 후쿠오카에 프로야구 구단이 들어오는 것이었던지라 환영 무드가 더 컸다. 하지만 이 시절의 호크스는 1978년 이후로 계속 비밀번호를 찍었던 탓에 점차 관중석에 빈자리가 속속 보였다(…). 심지어 이 전 후쿠오카의 주인이었던 라이온즈의 원정 시합에서는 라이온즈 팬의 비율이 더 많을 정도였다(…).
결국 후쿠오카 이전 이후에도 1997년까지 B클래스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 전신이었던 난카이 호크스 시절 노무라 카츠야가 팀을 떠난 1978년부터 무려 '''20년 동안''' A클래스(1위~3위)에 한번도 못 올라갔다. 이 정도면 엘롯기는 장난. 숫자로 써보자면 6-5-6-5-6-5-5-6-6-4-5-4-6-5-4-6-4-5-6-4. 참고로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 모두 각각 6구단 체제이니 6이 꼴찌. 잠깐 눈물 좀 닦고…
참고로 20년 연속 B클래스는 도통 깨질 기미가 안 보이는 일본프로야구 최다기록(…). 한때 그 기록을 깰 가장 유력한 후보로 센트럴리그의 동네북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 사실상의 자급자족형 시민구단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거론되었으나, 2010년대 초중반부터 두 팀 모두 모기업의 투자 성공 및 자체 육성 성공으로 히로시마는 15년, 요코하마는 10년만에 B클래스 탈출에 성공 하였고, 둘다 앞으로 몇년은 먹고 살 전력이 갖춰진 상태라 향후 몇년간은 다시 불멸의 기록 취급 받게 생겼다(…). 옆 동네에 이 기록을 깨버릴 듯한 유망주가 있긴 한데 거기도 끊어졌다.
2.6. 강팀으로의 재도약 (1998~2003), 구단 매각(2005)
그러다가 1993년에 취임한 이 팀의 GM인 네모토 리쿠오 전무[16] 의 공격적인 선수 영입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세이부 라이온즈의 투타의 주축이었던 쿠도 키미야스를 FA로, 아키야마 코지를 대형 트레이드로 영입한 것이나, 큐슈 지역 거물 유망주였던 조지마 겐지를 과감하게 영입한 것은 현재도 자주 회자되는 얘기.
또한 오 사다하루 감독의 지도력으로 난카이 시절의 암흑기(…)에서 벗어나면서 팀이 다 리빌딩 된 이후 충실한 유망주 육성으로 많은 프랜차이즈 스타를 배출하며 퍼시픽 리그의 강호로 떠올랐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그간의 울분을 풀듯, A클래스에 연속으로 들어가며 완전한 부활에 성공한다. 1978년부터 1997년까지 20년 연속으로 B클래스에 머물던 팀이 1998년 이후 2017년까지 20년 동안은 딱 2번을 제외하고는 전부 A클래스를 기록했다. 그나마 그 두번의 B클래스도 9월까지 2위를 유지하다가 시즌 막판 1달동안 분위기를 잘못타서 최하위로 떨어진 2008년[17][18] 과 3위와 불과 1게임차이로 4위로 밀린 2013년.
1999년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등의 한국인 삼총사가 있던 주니치 드래곤즈를 물리치고 1964년 이후 35년만에 [19]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것을 시작으로,[20] 2000년 퍼시픽리그 우승,[21] 2003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한신 타이거즈와 7경기까지 가는 접전[22] 끝에 다시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현재도 '산요(山陽) 신칸센 시리즈'[23] '호응(虎鷹) 시리즈' 등으로 불리며 역대 일본시리즈 명승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시기의 성적은 3-'''1'''-1-2-2-'''1'''. 그 전까지 20자리 비밀번호를 찍었던 팀이라는 게 안 믿겨질 정도로 환골탈태했다. NPB 최고의 투수친화 홈구장에 걸맞지 않게 고쿠보 히로키, 마츠나카 노부히코, 시바하라 히로시, 죠지마 켄지, 이구치 타다히토, 페드로 발데스, 훌리오 줄레타 등 강타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막강한 타선이 특징이었다. 특히나 2003년엔 강타자들이 포진한 일명 '''다이하드 타선'''을 앞세워 퍼시픽리그와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는데, 이 당시 세운 기록이 '''일본 프로야구 최고기록인 시즌 팀타율 .297'''에 '''2명의 30+홈런 타자를 포함한 4명의 20+홈런 타자 겸 4명의 100+타점 타자[24] 를 비롯한 8명의 50+타점 타자, 6명의 3할 타자를 배출'''해냈다. 심지어 시즌 중반에 입단해서 시즌 절반도 안되는 67시합 출장에 그친 외국인 타자 훌리오 줄레타까지도 13홈런 43타점을 기록했다.[25]
그러나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일본에 불경기가 찾아오면서 소매업이 주력이었던 다이에가 파산하게 되고 이온으로 흡수되면서 구단 매각을 선언[26] , 2004년 시즌이 끝나고 재일동포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오너가 구단 운영을 선언하여 2005년 시즌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탄생하게 된다.
난카이 시절 경험이 있던 현역 선수들은 2010년 오미치 노리요시를 끝으로 이미 모두 은퇴하였고, 다이에 시절 경험이 있는 현역 선수는 팀 내에서는 와다 츠요시, 아카시 켄지, 데라하라 하야토 등 총 3명이고 팀 밖에서는 야마자키 카츠키, 가와사키 무네노리 등이 있어 총 5명.
2.7. 그리고 가을 야구의 비극 (2004~2010)
'''2(*)-2(*)-3-3-6-3-1(*)'''
별표 표시를 한 건 페넌트레이스에서 1위 해놓고도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해서 일본시리즈를 못간 해이다. 보시다 시피 원래대로라면 1을 세 번을 찍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플레이오프에 발목이 잡혀서.
그놈의 포스트시즌제도가 문제인데, 2004년에 퍼시픽리그에 1973년~1982년 시행하다 중단했던 플레이오프 제도가 재도입된 이래[27] 2008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참가했는데 2010년까지 단 한번도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 이를 두고 호크스 팬들은 플레이오프의 비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004년, 2005년에는 정규시즌 1위였으나 각각 세이부 라이온즈,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두번다 2승 3패로 일본시리즈 진출권을 내주는 참사가 벌어졌다. 더 안습한 것은 당시 1승 어드밴티지는 1위와 2위가 '''5게임 이상''' 벌어져야 주어지는 것이 었는데 두 시즌 모두 2위와 '''4.5게임차'''로 시즌을 마쳐서 1승 어드밴티지를 못 얻은것이 었는데 이게 플레이오프에서 그만(...).
퍼시픽 리그측에서는 이거 1위하고 두번이나 마지막 경기까지 가서 발리니 불쌍하지 않음? 이라고 해서 정규시즌 1위팀에게는 게임차와 관계없이 플레이오프 때 무조건 1승을 주는 어드밴티지를 적용하는 계기가[28] 되었다. 근데 2006년에는 역으로 작년 5위였던 닛폰햄이 1위 등극. 그러나 작년 1위였던 호크스는 리그 3위.. 이건 뭐 제도가 바뀌니 역으로 호크스에 불리한 규정이 되고 말았다(…). 결국 2006년도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격돌했으나 어드밴티지로 인한 자동 1패 포함, 3연패로 패퇴했다(…).
역사적 명승부로 꼽히는 2006년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는 유리어깨로 소문난 에이스 사이토 가즈미가 4일휴식 후 등판을 강행하며[29] 최후까지 저항했지만 사이토의 역투에도 불구하고 양팀 모두 9회까지 1점도 내지 못했고, 결국 9회말 투아웃 1,2루 상황에서 닛폰햄의 이나바 아츠노리의 2루방향 타구를 2루수 나카자와 타다아츠가 호수비로 막아냈지만 2루 송구가 옆으로 빗나가며 1루 주자였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가 2루에 세이프되는 사이 2루 주자 모리모토 히초리가 그대로 홈까지 내달려 결승점을 얻으며 그대로 닛폰햄이 끝내기 승리를 거두었고, 소프트뱅크는 또다시 3년 연속으로 가을야구에서 주저앉고 만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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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는 닛폰햄이 끝내기 결승점을 얻으며 팀의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 마운드에 주저앉아 무릎꿇고 대성통곡했고 팀동료들이 부축해주기 전까지 일어나지도 못하는 찡한 장면을 연출했다. 포수 마토바 나오키는 홈플레이트에 주저앉은 채로 울음을 터뜨렸고 4번타자 마쓰나카 노부히코는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망연자실한 채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했다.
2007년에는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밀려서 아예 1스테이지에서 탈락. 2008년은 9월 1일까지 2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9월 이후로 6승 21패란 충격적인 성적을 기록해 꼴찌까지 수직낙하하면서 진출은 커녕 다이에 시절인 1996년 이후 12년만의 리그 최하위란 치욕을 당해야 했고 2009년엔 또 다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후 이와쿠마와 다나카 단 두명의 투수에게 틀어막히면서 도호쿠 라쿠텐에게 1스테이지에서 발렸다.
안습의 절정은 2010년으로 정규시즌 1위로 7년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 1승 어드밴티지까지 먹고 진출했으나 3승 1패로 바라고 바라던 일본시리즈 진출까지 단 1승만 남긴상황에서 충격의 3연패로 또 일본시리즈에 못갔다. 이로써 호크스는 04년부터 10년까지 7년간 2008년(최하위)을 뺀 총 6번을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단 한번도''' 일본시리즈에 가지 못했다. 잠시 눈물좀 닦고(...). 결국 2010년 시즌 끝나고 요코하마로부터 FA를 선언한 우치카와 세이이치와 사이타마 세이부의 주전포수 호소카와 토오루, 오릭스에서 자유계약으로 풀린 알렉스 카브레라 등을 지르면서 절치부심. 우치카와가 역대 FA 최고 성공사례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만한 성적을 찍어주면서 팀 타선의 중심으로 활약한 덕분에 7수만에 일단 클라이맥스 시리즈의 저주는 풀었다.
결국 2011년에서는 일본시리즈의 저주도 풀었지만 정작 아시아 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일본 프로팀이 단 한 번도 내준 적이 없던 아시아 시리즈 우승컵을 내준다'''(...). 이것도 저주라면 저주겠다(...).
2.8. 2008년 이후의 동향
2.8.1. 2008년 시즌
오 사다하루 감독이 마지막 해를 선언한 이해에, 팀 주력들이 줄부상및 부진크리와 베이징 올림픽 차출 크리로, 9월부터 시즌 끝날 때까지 한달동안 6승 21패의 기록적인 수직낙하를 보이며, 2위에서 한달만에 6위까지 굴러떨어지는 역사적 수모를 기록 2008년에는 결국 최하위로 시즌을 끝내고 말았다. 이에 대한 책임 및 건강상의 이유로 인해 오 사다하루 감독이 사임하고 후임 감독으로 아키야마 코지가 부임하게 된다.
2.8.2. 2009년 시즌
2009 시즌에는 2위를 줄곧 유지하다 시즌 막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역전을 허용하면서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또 1스테이지 참패. 라쿠텐에서 내보낸 투수는 딱 두 명. 이와쿠마와 다나카. 이 정도면 저주다.
2.8.3. 2010년 시즌
2010년 시즌 역시 투타 모두 안정적인 성적을 보이며 상위권을 엎치락 뒤치락 하더니, 막판에 수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직접대결 3연승으로 한방에 추격후 계속해서 연승 + 사이타마 세이부의 캐삽질 6연패로 4.5게임차를 뒤집어, 2010년 퍼시픽리그 우승팀이 되었다. 참고로 직접대결 3연승 직전에 세이부는 매직넘버 4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1차전에서 혈전을 벌이고 기어올라온 3위 치바 롯데 마린즈를 맞아, 어드밴테이지 1승을 가진 상태 + 홈에서 모든 경기를 하는 상황에서 3승 1패로 1승만 더하면 드디어 저주를 깨는 일본시리즈 진출직전까지 갔었으나 4차전부터 포풍 '''3연패'''를 당해 최종스코어는 어드밴테이지 1승먹고도 3승 4패로, '''또 일본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이정도면 굿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시즌 종료후 FA로 풀린 우치카와 세이이치와 교섭하여 입단시키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치바 롯데와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벌이던 당시, 구단주인 손정의 회장이 직접 구장을 방문해 '''이기면 페라리 쏜다''' 라고 말한 사건도 유명하다. 결국 포풍 3연패로 페라리의 주인은 안 나타났다.
2.8.4. 2011년 시즌
시즌전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 팀 답게 초반부터 선두를 달렸다. 특히 교류전에서는 10연승을 깔고 시작해서 끝나고 나니 18승 2무 4패. 승률 .858 이라는 캐사기 우승을 달성했다. 단 교류전에서 힘을 좀 뺐는지, 이후 조금 버벅이면서 전반기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동률 선두로 마감했다. 후반기도 사실상 이 두팀의 싸움이 될것으로 예상 되었었다 그도 그럴게 전반기 종료시점 기준으로 2위와 3위인 치바 롯데 마린즈와 승차가 12.5(…).
그러나 막상 후반기 되니 홋카이도 닛폰햄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수직낙하에 가까운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하여 일찌감치 매직넘버를 켰고, 결국 10여경기 남은 시점에서 우승을 확정짓고 정규시즌 2연패를 달성하였다. 오프시즌의 대형 영입인 우치카와 세이이치는 투고타저 시즌이 무색하게 .338의 고타율로 수위타자를 차지하며 MVP를 차지했고 마츠다 노부히로도 리그 2위인 25홈런[32] 에 25도루를 기록하며 20-20 클럽에 가입했으며 가와사키 무네노리, 혼다 유이치의 테이블세터-키스톤과 고쿠보 히로키, 마쓰나카 노부히코, 타무라 히토시 등의 베테랑들도 타선에서 어느정도 몫을 해 주었다.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데니스 홀튼, 셋츠 타다시 등이 포진한 선발진도 난공불락. 을 시즌 종료 후 2위인 홋카이도 닛폰햄과의 게임차만 무려 17.5, 3위인 세이부와는 20.5. 이로써 7번째 플레이오프 진출 확정.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예상을 뒤집고 홋카이도 닛폰햄을 2연승으로 꺾고 올라온 3위 사이타마 세이부를 상대로 한단계 위의 전력을 과시하면서 깔끔하게 3연승으로 일본시리즈 진출확정. 플레이오프, 클라이맥스 시리즈 7수만에 돌파에 성공하면서 일단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관련된 저주는 풀었다. 그리고 맞붙는 상대는 주니치 드래곤즈. 12년만에 리턴매치다! 치열한 투수전 끝에 7차전 홈에서 승리하며 8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시리즈 MVP 고쿠보 히로키는 99년의 팀 선배 아키야마 코지를 넘어서는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가 되었다.
2011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퉁이 라이온즈에 6대5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삼성 라이온즈에 9대0 완승, 오스트레일리아의 퍼스 히트를 3대2로 누르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는 심판의 오심의 도움(김상수 2루 세이프 과정)에도 불구하고 무려 '''백업요원'''인 정형식에게 역전타를 얻어맞아 5대3으로 패해 2007년 SK 와이번스 이래 4년 만에 '''예선에서 3경기 전승하고도 준우승하는 팀이 되었다.''' 더군다나 기자들과 네티즌들에게 신나게 까였는데 기자들은 "대한민국 왕자의 ‘하극상’에 무너졌다", 이에 네티즌들은 "일본 야구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다", "1년간 쌓아온 것이 단 1경기에 무너졌다" 게다가 이번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지금까지 4번의 우승을 일본 팀들이 모두 차지했기 때문에 이번 결승전 패배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결승전이 열리기 직전에 선수들이 흡연을 해버리는 것이 들통나 더욱 까였고 일본시리즈 우승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야구 팬들에게 두고두고 씹혔다. 그나마 오승환을 상대로 2점을 내긴 했지만 '''무사 만루'''에 분위기 한창 올랐을 때 병살타를 치고 2점 밖에 못 낸 거라(…).[33]
[34]
문제는 투수왕국 호크스가 1, 2, 3선발 스기우치, 와다, 홀튼이 전부 한번에 이적하는 바람에 다음 해 투수진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추락했다. 1선발을 2011년 처음 선발전환한 셋츠 타다시에게 맡겨야 할 실정. 세이부의 FA 호아시 카즈유키를 따내는 데 성공해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긴 했는데 그래도 구멍을 메우기엔 부족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2011년에 우승해서 정말 다행인 듯.
2.8.5. 2012년 시즌
2012시즌에 앞서 팀 선발진의 원투쓰리펀치와 부동의 톱타자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헬게이트가 펼쳐졌다(…). 에이스인 스기우치 토시야와 외국인 투수 D.J. 홀튼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좌완 선발 와다 츠요시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건너갔으며 주전 유격수 가와사키 무네노리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애틀 매리너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저 선수들이 빠져나간 대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19승 & 다승왕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브래드 페니를 연봉 400만달러 + 옵션 350만달러[35] 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조건으로 영입했고[36] 타선엔 파워툴만큼은 미국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던 윌리 모 페냐를 추가했다. 강력한 타선과 불펜만큼은 건재하니 새롭게 개편된 선발진의 활약 여하에 따라 여전히 상위권을 노릴 수 있는 전력으로 전망되었다.
메이저리그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1, 2, 3 선발에 주전 유격수까지 털린채로 지난 해 4선발이었던 셋츠 타다시를 에이스로 내세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오릭스와의 개막 3연전을 싹쓸이하면서 선두권을 유지했으나 다승왕이었던 홀튼과 좌완 에이스 와다, 스기우치의 공백을 메워줄 것을 기대하고 데려온 브래드 페니와 호아시 카즈유키는 사이좋게 먹튀 인증. 철벽 계투조를 형성했던 마하라와 폴켄보그가 부상으로 각각 시즌 아웃과 시즌 도중 장기 이탈. 2011년에 양대리그 수위타자에 MVP를 획득하면서 돈이 아깝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던 우치카와 세이이치마저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진의 늪에 빠지는 등 악재가 연달아 터졌다. 그러면서 그동안 호크스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던 인터리그에서 간신히 꼴찌를 면하는 등 리그 5위까지 추락. 2011년의 성과는 현실에서 프로야구 매니저를 하는 듯한 사기에 가까운 선수빨 덕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다.
그러나 7월경부터 젊은 야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스기우치, 와다, 홀튼의 이탈에 페니와 호아시까지 먹튀가 된 선발진은 부상에서 부활한 오토나리 켄지와 갑툭튀한 고졸신인 다케다 쇼타의 맹활약으로 메우고 마하라와 폴켄보그의 연달은 부상으로 생긴 마무리 공백을 전년도 일본시리즈에서 MVP급의 활약을 보여준 모리후쿠[37] 로 대체하는 등 수습에 들어가 8월중순부터 7연승을 거두면서 폭풍질주, 다시 순위경쟁에 뛰어들었다. 한대 선두권도 넘보기는 했으나 8월 말에 사이타마 세이부가 질주를 하고 9월달에 홋카이도 닛폰햄이 상승세를 타면서 결국은 3위로 정규시즌을 마감.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스테이지에서는 2위였던 사이타마 세이부를 꺾고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출했으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또다시(!) 홋카이도 닛폰햄에게 스윕을 당하면서 탈락'''. 뭐 일단 그 전해에 일본시리즈 우승까지는 해 봤으니 그렇게 안타깝지는 않으려나.
2.8.6. 2013년 시즌
전년도 시즌 후반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팀을 구원했던 고졸신인 다케다 쇼타가 2년차 징크스에 빠지고, 투수진의 한 축을 이루던 오토나리 켄지가 부상으로 1, 2군을 왔다갔다 하는가 하면, 20홈런을 날리면서 쏠쏠하게 활약해준 윌리 모 페냐도 예전의 공갈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어려운 상황에서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됐던 고쿠보는 은퇴한 상황. 팀 순위도 한 때 최하위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교류전에 들어오자 전년도에 FA 먹튀가 된 호아시가 귀신같이 부활하고 윌리 모 페냐의 공백은 신 외국인 브라이언 라헤어가 메워줬으며, 그동안 약간 실망스러운 성적이 이어진 중견수 하세가와가 교류전에서 4할대 타율을 기록하면서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시즌 초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외야수 야나기타, 요시무라, 투수 이와사키 등이 적절하게 활약해 주면서 2년만에 교류전 우승을 차지하고 다시 상위권으로 뛰어 올랐다. 교류전 종료 후에는 라쿠텐, 롯데와 더불어 상위권을 형성했으나, 2012년에 팀 투수진의 주축들이 빠져나간 공백은 여전히 메우지 못했고 올스타 브레이크 때는 다시 5위로 추락했다. 올스타전 이후 8월 초에 잠시 반짝했지만 에이스인 셋츠 타다시 외에는 믿을만한 투수가 없는 상황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면서 3위 싸움으로 밀려났다. 그래도 나름 9월말까지 잘 버텼으나 세이부와 롯데의 연승으로 3위와 1게임차로 4위로 추락함으로써 시즌을 마감한다.
2008년 시즌 이후 오랜만에 B클래스로 떨어지면서 2013년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 대대적인 투자를 할 것이란 소식이 알려졌고 실제로 45억엔(약 450억원)을 풀어서 외국인 선수와 FA선수를 잡을 것이란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MLB 보스턴 레드삭스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등에서 뛴 베테랑 좌완 불펜투수 오카지마 히데키를 1년 5500만엔에 잡았고#, FA를 선언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포수 츠루오카 신야와 주니치 드래곤즈의 투수 나카타 켄이치를 영입하였다. 외국인 선수로는 올해 활약이 미미했던 비센테 파디야, 윌리 모 페냐(오릭스 버팔로즈행), 브라이언 팔켄보그(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행)를 떠나보내고 한신 타이거스에서 준수한 활약을 한 선발투수 제이슨 스탠드릿지와[38]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선발 투수 브라이언 울프,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구원투수로 활약한 데니스 사파테를 영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최근 오릭스 버팔로스와 결별 후 MLB 진출과 NPB 잔류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대호를 잡으려고 호크스가 3년 14~15억엔을 제시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2013년 12월 3일 기준으로 이대호가 호크스와의 계약에 합의하고 세부 조정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다.# 12월 23일 이대호와 3년 19억엔 계약을 맺었다.
2.9. 왕조를 넘어선 소프트뱅크 제국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무려 6번이나 했다.[39] 또, 2011년 우승까지 합쳐 2010년대에만 일본시리즈 우승 6번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우수한 육성팜 덕분에 2021년 이후로도 몇년간 가을야구를 연례행사처럼 참여하며 일본시리즈 연속 우승을 밥 먹듯이 할 가능성이 매우 커서 현재 일본내에서 타 팀팬들 위주로 소프트뱅크 때문에 야구가 재미없어진다 라는 불평과 언론에서는 요미우리를 위시한 센트럴 리그의 질이 매우 하락되어 있어서 수준 차이를 좁혀야 한다 라는 사설도 있다. 게다가 수년간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인해 매번 만원관중과 이에따른 100%에 가까운 구장이익 지분 덕에 다른 팀의 외인이나 FA 선수 영입을 통한 전력 약화도 언제나 가능한 상황이며 실제로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먹튀가 될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다른 팀에가서 부활하면 장애물이 되어 성가시니 차라리 우리가 가지고 있자 라는 웃지 못 할 썰이 있다.
2.9.1. 2014년 시즌
2.9.2. 2015년 시즌
3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 후 2년 연속 우승과 통산 7회 우승을 위해 야심찬 준비들을 하였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2년동안 에이스 역할을 해주며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견인한 릭 밴덴헐크를 2년 4억엔에 영입하였고, 2007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2014년까지 있던 마쓰자카 다이스케에게 러브콜을 보내 4년 16억으로 영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시즌에 들어서자 육성과 투자, 외부영입등이 모두 긍정적인 방향으로 폭발하면서 타팀에게 그야말로 대정의라고 평가받을 정도의 강력함을 보여주고 있는 중. 이미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이번 시즌에 들어 장타력까지 만개하면서 일약 리그 최고의 화제 선수가 된 야나기타 유키[40] 를 비롯해 작년의 시원찮던 성적을 훌훌 털어버리고 야나기타와 함께 리그를 씹어먹고 있으며 5월 MVP까지 수상한 이대호, FA를 앞두고 역대 최고의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는, SB라 6번이지(...) 타구단이면 여유롭게 4번을 차지하고도 남는 성적의 마쓰다 노부히로, OPS는 8할도 못 되지만 그래도 타율은 3할을 넘기고 있고, 호크스 4번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용납할만한 우치카와 세이이치의 3~6번은 말 그대로 리그 최강. 1번타자를 주로 맡는 나카무라 아키라도 리그 최상위권의 테이블세터이고 하위타선의 2루수 타카다, 아카시 등도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 그야말로 지뢰밭이다. 유일한 구멍이 1할대 타율에 OPS 5할조차 간당간당하고 리그 최다실책을 기록중인 유격수 이마미야 겐타 뿐. 그러한 타선의 파괴력이 바로 타율, 홈런, 팀OPS, 팀득점 모두 양리그 통틀어 1위(6월 10일 시점)인 타격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투수진은 2012년의 대재해 이후 리그를 압도할만한 에이스가 없다는 약점은 여전하지만 선발과 불펜, 마무리가 전부 탄탄해서 종합 성적으로는 역시 리그 최상위. 특히 외국인 투수는 선발의 스탠릿지, 중간계투 바리오스, 마무리 사파테 전부 맡은 바 활약을 다 해주고 있어서 2군을 폭격하고 있는 릭 밴덴헐크를 올릴 자리가 없을 정도이다. 결국 스탠릿지와 밴덴헐크를 1군과 2군에 올렸다내렸다 하는 방식으로 로테이션을 만들었지만.[41]
이렇게 말 그대로 투타 모두 완벽한 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어째 스탯에 비해서는 연승이 별로 없어서 3연전 스윕은 6월 첫째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이 되어서야 처음 이뤄냈고, 리그 순위는 닛폰햄 파이터즈와 거의 대등한 수위싸움을 벌이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패하는 날이 의외로(어디까지나 팀 스탯에 비해 의외로) 많지만, 패전 스레드가 세워지더라도 워낙 투타가 잘해주고 있어서 막상 깔 곳은 없기에 스레드는 당일 경기에서의 활약상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위에 언급된 이마미야 겐타와 쿠도 감독을 까는 글들로만 가득 채워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7월 28일부터 8월 6일까지 8연승을 기록하며 2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승차를 11.5경기차로 늘리면서 매직넘버를 조기에 가동시켰다. 퍼시픽리그 최고의 투수인 오타니 쇼헤이도 6과 1/3이닝 7실점으로 털어버린건 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처럼 괴물같은(…) 13연패를 하지만 않는다면 사실상 퍼시픽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8월 11일, 드라마틱한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했다. 오릭스 버팔로스의 에이스 가네코 치히로에게 7회까지 2점으로 묶이며 9회까지 6:2로 지고 있었다. 그리고 맞이한 9회말, 기적이 일어났다. 상대 투수 사토 다쓰야에게 요시무라 유키가 3루타, 다음타자 혼다 유이치가 볼넷을 얻어냈다. 후쿠다가 플라이 아웃을 당해 패배가 확정된다고 생각한 순간, 아카시 켄지가 볼넷을 얻어내며 1사 만루를 만들었다. 다음 타자 나카무라 아키라가 2타점 2루타를 날리며 6-4로 따라붙었다.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는 야나기타 유키가 3구만에 우월 쓰리런 을 날리며 6-7로 게임을 끝냈다. 9회말에 무려 5점을 만드는 괴력을 발휘하며 니혼햄과의 승차를 10.5경기차로 다시 벌렸다. 13일, 전날의 아쉬운 패배를 분풀이라도 하듯 막강한 화력을 선보였다. 4번 우치카와가 부상으로 결장하긴 했지만, 이대호의 3점 홈런 포함 13안타를 몰아치며 12-5로 승리했다. 이로써 닛폰햄과 9.5경기차를 유지했다.
매직넘버가 켜진 이후로 꾸준하고 위닝시리즈를 거두면서 착실하게 매직 넘버를 줄였고 8월말 2위 닛폰햄과의 3연전을 1승1무1패로 무난하게 넘기면서 매직넘버를 18까지 줄였다. 9월 이후에 2위 닛폰햄과 7경기나 남겨두고 있고 전년도 시즌 막판과 같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경쟁팀들이 반쯤 포기 모드로 들어가고 2위 사수(닛폰햄) + 3위 경쟁(세이부, 롯데) + 탈꼴지 다툼(오릭스, 라쿠텐) 모드로 돌입한 상태라 남은 일정은 거의 신선놀음의 경지. 결국 9월 17일 세이부와의 홈경기에서 3-5로 승리하면서 '''2년 연속 파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퍼시픽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우승을 확정지은 기록은 덤으로 따라왔다.
그러나 우승을 확정지은 이후에는 약간 나사빠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우승을 확정지을 때까지만 해도 100승은 무리더라도 95승정도는 하지 않겠느냐는 평이 대세였는데 우승 이후 4승 8패의 성적에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만날 것이 유력시 되는 닛폰햄과의 맞대결은 물론 감독의 사임발표로 팀 분위기가 거의 와해상태인 라쿠텐을 상대로도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는 등 기록적인 정규시즌을 보내고도 또 가을의 풍물시가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그 무시무시했던 타선이 집단으로 슬럼프에 빠져서 득점력이 저하되어 있고, 이 때문에 경기 중반까지 근소하게 리드를 잡고 있다가 후반에 투입되는 불펜들이 얻어맞으면서 역전패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는 우승을 눈앞에 두고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던 전년도 시즌의 재판이라 더욱 걱정이 되고 있다. 우승 때까지 무패를 자랑하던 사파테도 세이브 상황을 지키지 못하고 패전을 기록하는가 하면 모리 등 필승조들이 등판만 하면 난타를 당하면서 과연 포스트시즌을 무사히 치를 것인가 근심을 더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시즌 초 팔꿈치 수술을 받은 후 내내 2군에 머물러 있던 김무영이 10월 4일 방출되었다.
10월 14일부터 펼쳐지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는 치바 롯데 마린즈와 붙게 되었다. 전력이나 승률 차이[42] 를 생각하면 소프트뱅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상술했듯이 소프트뱅크가 우승 이후 경기력이 좋지 못하다는 점, 롯데의 막판 상승세, 무엇보다도 소프트뱅크의 가을야구 울렁증과 5년 전의 악몽[43] 을 생각하면 롯데가 불리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파이널 스테이지 1차전에서 선발 다케다 쇼타가 3회초에 2점을 내주는 등 4⅓이닝밖에 못버티는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2번째 투수로 등판한 센가가 1사 2, 3루의 위기를 중심타자 데스파이녜와 크루즈를 잇달아 삼진으로 잡으면서 넘겼다. 2점을 뺏긴 직후인 3회말 야나기타 유키가 동점 2점 홈런으로 부상에서 회복되었음을 확인시켜 준 것도 수확이었다. 그러나 투수들을 짧게 짧게 끊어가는 작전으로 나온 적장 이토 쓰토무의 계투작전에 말려들어 5회이후 타선이 침묵하여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10회 말 1사 만루에서 우치카와 세이이치의 끝내기 안타로 귀중한 승리를 챙기면서 어드밴티지 포함 2승으로 앞서나가게 되었다.
다음날 벌어진 2차전에서는 2회말 이대호의 선제 솔로홈런으로 앞서 나갔으나, 4회초에 롯데 포수 다무라 다쓰히로의 적시타로 동점을 허용했다. 선발 투수인 릭 밴덴헐크는 비록 동점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6이닝을 1실점으로 틀어막았고, 이대호의 홈런 외에는 출루조차 거의 못하는 답답했던 타선이 6회 2사 후에 7명의 타자가 6안타, 1볼넷으로 연속 출루하면서 순식간에 5득점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밴덴헐크는 일본에서의 첫 포스트시즌 등판에서 승리를 거두며 일본무대 데뷔 이후 무패 행진을 이어나갔고, 이대호는 홈런 포함 2안타 2타점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이어진 3차전에서는 3회 우치카와 세이이치의 적시타와 이대호의 투런 홈런으로 3:1로 승리, 어드벤티지 1승 포함 4전 전승으로 2연속 일본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어 그간의 우려를 기우로 만들었다. 일본시리즈 상대는 교진을 꺾고 올라온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되었다.
일본시리즈에서는 대부분의 예상대로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면서 야쿠르트를 4승 1패로 물리치고 난카이-다이에 시절까지 통틀어서 구단 사상 처음으로 2연패에 성공했다. 일본시리즈의 내용에 관해서는 2015년 일본시리즈 항목 참조.
2.9.3. 2016년 시즌
시즌 시작 직후에는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4월 7일 기준으로 11전 3승 6패 2무로 5위에 머무르는 중.. 시즌 초반이라 어찌될진 모르지만 작년 꼴찌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구단 GM과 감독이 바뀌자마자 시즌 초부터 치바 롯데 마린즈와 1,2위를 겨룰 정도로 선두권을 달리는 등, 영 좋지 않다..
그러나 4월 7일 치바 롯데 마린즈전에서 17대8로 시원하게 털린다음에 팀 전체가 각성을 했는지 그 후로 파죽의 6연승을 기록하며 2위로 치고 올라왔다. 특히 구마모토 대지진의 여파로 경기가 취소된 4월 16일의 다음날인 17일 라쿠텐과의 경기에서는 에이스 다케다 쇼타가 6회에 집중타를 허용하면서 대량 5실점. 앞서가던 경기를 뒤집히고 9회초에 쐐기점이 될 수 있는 1점을 추가로 내주면서 4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9회말에 돌입했는데 2아웃에 대타로 기용된 요시무라 유키가 라쿠텐의 마무리 마쓰이 유키로부터 동점 쓰리런을 기록하고 다시 12회 말에 끝내기 2점 홈런을 기록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요시무라는 시즌 첫 안타와 두번째 안타가 모두 팀을 구원한 홈런. 그리고 4월 19일 선두 치바 롯데 마린즈와이 맞대결에서 승리하면서 파죽의 7연승을 기록하며 선두로 복귀했다. 내친 김에 그 다음날까지 이겨서 8연승을 기록.
원래도 시즌 시작하기 전에 거의 우승이 당연시 될 정도였는데 충격적인 대패로 선수단 전체가 각성하고 나서는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17점을 내주는 대패의 다음날인 4월 8일부터 5월 8일까지 1달에 걸쳐 거둔 성적이 무려 '''17승 2무 '2패'(…)''' 한 달동안 17승은 팀 전력상 당연하다 쳐도 그 기간 동안 질 경기도 연장전으로 끌고가서 뒤집어 버리거나 아니면 최소한 무승부로 끝내며 고작 2패 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도 '''호크스의 독주를 막겠다면서 각 팀들이 호크스전에 에이스급 투수들을 집중 투입한 결과'''가 이렇다. 게다가 호크스는 작년까지 4년연속 10승을 거두던 셋쓰 다다시와 미들맨 에디슨 바리오스가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가 있고, 셋업맨 이가라시 료타와 주전포수인 호소카와 토오루는 부상으로 출전도 못하고 있다. 16억엔 짜리 니트 투수는 여전히 2군에서 조정 중이고, 지난 시즌 로테이션의 일각을 차지하던 제이슨 스탠드릿지와 중심타자 이대호는 팀을 떠났다. 전년도 MVP인 야나기타 유키는 상대팀 투수들의 집중견제로 한달 반동안 겨우 2할5푼대 타율에 3홈런만을 기록하면서 출루율만 높이고 있는 중. 전년도 테이블 세터 타순에서 쏠쏠하게 활약을 하던 아카시 겐지도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어 있고, 유격수 이마미야 겐타는 여전히 멘도사 라인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4~15년 동안 부상과 부진으로 주전자리에서 밀려났던 하세가와 유야가 괴물같이 부활하며 이대호가 빠진 5번자리를 메웠고, 역시 전년도 부진으로 고작 2할8푼5리에 그친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며 타선을 이끌고 있다. 릭 밴덴헐크와 다케다 쇼타는 전년도의 좋았던 모습을 계속 이어가고 있고 5년만에 팀으로 돌아온 와다 츠요시와 전년도 시즌에 가능성을 보여준 센가 고다이가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선발진의 구멍을 메웠다. 그리고 2년전만 해도 모국인 베네수엘라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알바로 세미프로 팀에서 뛰던 로베르토 수아레스가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뿌려대며 필승조로 갑툭튀. 바리오스의 자리를 완벽하게 메우고 있는 중이다. 사정이 이러니 아직 5월 중순인데 벌써 리그 내 다른 팀들에게 포기 모드가 감돌기 시작하고 있다. 골든위크가 끝난 5월 9일까지 성적이 자그마치 20승 4무 8패로 그나마 찰나의 순간 선두 경쟁을 하던 치바 롯데 마린즈만이 20승으로 승수만 겨우겨우 맞추면서 3게임차로 추격하고 있는 중이다. 롯데도 20승 14패로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성적이나 빛이 바래고 있고, '''3승6패2무 당시 광희난무하며 상황을 즐기던 2ch의 악플러들조차 할 말을 잃어버린 상태(…)'''.
같은 20승인 상태에서 만난 2위 롯데와의 3연전 맞대결에서 첫 두 경기를 승리하면서 위닝시리즈 확정. 시즌 시작하고 한달 반 밖에 안 지났는데 '''시즌 두번째 8연승'''을 기록했다. 그나마 승수라도 쫓아가던 롯데가 맞대결에서 패하면서 벌써 2위와의 승차가 5.0게임차. 문제는 이 승차가 좁혀질 가능성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벌써 현지에서는 사상 초유의 '''시즌 100승''' 예상까지 성급하게 나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 가운데 셋츠의 빈 자리를 3년전의 드래프트 1위이자 2년전 일본시리즈 4차전의 수훈갑인 히가시하마 나오가 완벽하게 메우면서 전력에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교류전 첫 경기인 주니치 드래곤즈 전의 승리로 6월이 시작하기 전에 '''시즌 세 번째 8연승'''을 기록하면서 이제 더이상 막을 팀이 없는 상태.
안그래도 강한 교류전인데 전년도보다 다운그레이드 되어보이는 전력으로 오히려 성적은 더욱 업그레이드가 되고 있으니 센트럴리그 팀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 소프트뱅크와 맞붙는 센트럴리그 팀들은 그저 스윕만 피하면 다행이라는 마인드로 완전히 불가항력의 자연재해 취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교류전 기간 중에 10년동안 대주자, 대수비 요원 역할에 머물러 있던 기도코로 류마가 뜬금없이 각성하면서 교류전에서 .412, 5홈런으로 MVP급 활약을 보이며 팀 타선을 이끌며 주전자리를 차지하고 주니치 전 이후 피로 증상으로 말소된 릭 밴덴헐크의 자리는 제구 난조로 2군에 머물러 있던 나카타 겐이치가 준수하게 메워주는 등 될팀될이 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중이다. 6월 2째주에는 요코하마와 요미우리를 상대로 연속으로 시리즈를 스윕하면서 '''시즌이 절반도 안 지났는데 6연승 이상만 네 번'''을 기록했다. 결국 지난 해에 이어 교류전 성적 18전 13승 4패 1무로 교류전 1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교류전이 끝나고 6월말부터 패전을 하나씩 적립하더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충격적인 스윕패를 당했다. 그동안 쌓아둔 것이 많아 여전히 수위를 유지하고는 있다. 닛폰햄이 13연승을 했는데도 아직도 5.5게임차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 사실 닛폰햄에게 스윕 당한 것 빼면 '''나머지는 전부다 위닝시리즈'''인데다 그 스윕패가 5월 초 이후로 '''약 한달 반만에 처음으로 당한 루징시리즈'''였다. 닛폰햄이 2위인데다 워낙 기세가 등등한데다 이 팀은 '''위닝시리즈 정도로는 도리어 승률이 내려가는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위기인 것처럼 보이는 것.
8월 들어 정말로 위기다운 위기가 찾아왔다. 2위에서 바짝 쫓아오고 있는 닛폰햄을 상대로 루징하더니 하다못해 이젠 파리그 대표 동네북 오릭스에게 스윕을 당하면서 5연패를 기록하며 닛폰햄에게 3게임 차로 쫓기게 되었다. 결국 8월 18일 세이부 전에서 패하며 4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함과 동시에 같은 시간 오릭스를 이긴 닛폰햄에게 반 게임 차로 뒤지고 있지만 승률 계산법에 의하는 순위에서는 0.001 차이로 겨우겨우 1위 수성 중이다. 그리고 8월 19일부터 21일까지 적지 삿포로 돔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외나무다리 싸움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3연전에서 2경기 연속 1점차 승리를 기록하며 위닝시리즈를 달성, 일단 한 고비를 넘겼다. 허나 8월 23일부터 치뤄진 라쿠텐과의 3연전에서 루징을 기록하고 닛폰햄은 롯데 3연전을 스윕하면서 결국 8월 25일 1위 자리를 빼앗겼다.
그리고 9월 28일 니혼햄이 오타니 쇼헤이의 1안타 완봉승으로 세이부를 1-0으로 꺾고 매직넘버를 0으로 만들면서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실패하고, 2위가 확정되었다(…). 초반에 너무 잘나가다가 우승을 놓쳐서 후반기에 팀 전력이 완전히 붕괴한 것 같지만 그래도 승패마진이 +30이다. 결코 못한 시즌이 아니다. 승수도 80승을 넘겼고 승률도 6할이 넘는다. 물론 7월 이후로는 거의 5할 승률에 머물렀지만 여기저기서 부상자가 나오는 악재 속에서도 최대한 버텨내서 6할 승률을 유지했다는 것이 이 팀이 가진 힘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닛폰햄이 초인적인 시즌을 보냈을 뿐.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3위 지바 롯데에게 2경기 연속 역전승을 달성하며 2연승을 기록, 일본시리즈 3연패의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삿포로행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었지만 부전패 포함 2승 4패로 패배하며 왕조 건국은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2016년 드래프트에서 올해 나온 투수 중 최고로 평가받는 다나카 세이기를 지명했고 교섭권까지 따냈다. 내년 시즌 즉전감으로 쓸 수 있는 투수이며 빠른 강속구를 보유한 우완 투수다.
2.9.4. 2017년 시즌
2016년 시즌 종료 직후 2011, 2014, 2015년 우승에 공헌한 호소카와 토오루에게 은퇴와 코치직 취임을 권고했으나 선수 생활을 연장하고 싶은 본인의 요청으로 자유계약선수로 풀어주게 되었다. 그 후 호소카와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했다. 또한 왼손 원포인트로 귀중한 활약을 했던 모리후쿠 마사히코가 FA를 선언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에릭 테임즈 영입전에 끼어들었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놓쳤고 대신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활약한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의 간판타자 알프레도 데스파이네를 3년 15억엔으로 영입했다.
전년도에 이어 2016년 시즌 종료 후에도 별다른 보강은 눈에 띄지 않는 채 핵심 전력들이 다른 팀으로 빠져나가는 등 두터운 선수층으로 인한 무한경쟁 체제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고 있는 상황. 다만 기존 전력이 좋은 편이기에 무난히 상위권을 지킬 것으로 전망된다.
시즌이 시작함과 동시에 시카고 컵스에서 뛰던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가와사키 무네노리가 복귀했다.
그러나 출발은 좋지 않다. 4월 17일 현재 4연패를 당하며 리그 4위. 리그에서 가장 상태가 안 좋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게까지 루징 시리즈를 거두었다. 그러면서 거의 4월 한달 내내 B클래스에서 헤맸었다. 그래도 작년에 같이 A클래스였던 두 팀과는 달리 5할 승률 근처에서 필사적으로 버티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5월 들어와서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4위권에서 헤매던 성적도 어느새 오릭스를 제치고 선두 라쿠텐을 위협하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5월들어와서 예년의 페이스를 회복하면서 교류전 시작 시점에 30승 19패로 6할대 승률을 올리면서 "올라올 팀은 올라온다"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다만 작년 후반기의 닛폰햄에 이어 올해는 생각지도 않았던 라쿠텐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어서 충분히 1위를 할 수 있는 성적임에도 여전히 성적은 2위. 게다가 4번 우치카와를 제외하면 야나기타, 나카무라, 마쓰다 등 공격력의 주축을 이뤄야 할 중심타자들의 성적이 부진하고 한 때 로테이션을 3개를 꾸려도 된다고 하던 투수진도 잦은 부상으로 와다 츠요시와 다케다 쇼타가 이탈하고 셋츠 타다시의 부진이 장기화되는 등 로테이션의 변동이 심한 상황에서 불펜진에 조금씩 부하가 걸리는 상황이라 예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일단은 장기였던 교류전에서 라쿠텐에 대한 추격의 실마리를 잡는 것이 중요할 듯.
그러나 교류전 개막 시리즈인 주니치와의 3연전에서 2승 1패에 그치는 사이 라쿠텐이 거인 3연전을 스윕하며 격차가 외려 4.5게임 차까지 벌어졌다(...) 그 후 타선의 중심역할을 하던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경추염좌로 이탈한 가운데 장타력이 부활한 야나기타 유키와 알프레도 데스파이네가 3, 4번 콤비를 이루면서 활화산같은 타격감으로 팀을 캐리하는 등 교류전 최강자의 명성을 확인시켜줬다. 주니치 3연전 이후 DeNA에게 위닝, 야쿠르트에게 스윕으로 교류전 첫 10경기에서 8승 2패를 기록하며 교류전 수위로 뛰어올랐고 같은 기간 5승 5패에 그친 라쿠텐과의 승차를 1.5 게임으로 줄이며 바짝 추격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신과의 시리즈가 끝나고 홈런 선두를 달리던 데스파이네가 햄스트링으로 이탈했다. 이렇게 부상당한 전력이 많은데도 성적을 유지할 정도로 팀 전력의 뎁스가 두껍다는 얘기도 되지만 이렇게 주력들이 하나 둘 빠지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팬들도 있다. 그럼에도 6월 18일 히로시마와의 교류전 최종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12승 6패를 기록하며, 2위 히로시마를 승자승 원칙으로 제치고 '''3년 연속 교류전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그리고 라쿠텐과의 게임 차도 3.5에서 1.5로 줄인 채로 리그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라쿠텐보다 무려 7경기나 더 치렀는데도 좀처럼 1.5게임 차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점. 만약 후반기까지 이 뜨뜻미지근한 상태가 계속되고, 라쿠텐이 잔여 7경기에서 탱킹을 시도하는 B클래스팀들로부터 승리를 조공받을 경우 올해도 우승은 물 건너 갈지도 모른다. 관건은 부상으로 이탈한 전력의 조기 복귀 여부일 듯.
그러나 교류전이 끝나고 리그전에 복귀하면서 라쿠텐을 추격하여 6월 30, 7월 1, 2일 센다이에서 벌어지는 맞대결 3연전을 앞두고 경기차를 0.5게임차로 줄였다. 0.5게임 차에서 맞이한 라쿠텐과의 맞대결 3연전에서도 위닝시리즈를 거두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라쿠텐을 밀어내고 0.5게임차로 선두자리를 탈환해야 하나… 앞서 언급한 소화경기 수의 관계로 승률에서 여전히 라쿠텐이 앞서면서 0.5게임차로 맞이한 3연전에서 위닝시리즈를 거두고도 선두 라쿠텐에게 '''0.5게임차 앞선(…)''' 2위자리를 유지.
라쿠텐과의 3연전 후에 오릭스와 닛폰햄을 상대로 4연승을 거두면서 잠시 라쿠텐을 제치고 수위로 올라섰으나 전반기 막판 홈에서 벌어진 라쿠텐과의 리턴매치 2연전에서 2연패하면서 원정 3연전에서의 위닝시리즈를 고스란히 되돌려 받았고 라쿠텐과의 승차도 1.5게임차로 벌어진 채 올스타전 휴식기에 돌입했다. 특히 2연전 첫 경기는 무패행진을 하던 마무리 사파테가 시즌 첫패를 기록하면서 4대0으로 앞서던 경기를 역전패했다. 이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팀 성적에 가려져서 일부 팬들에게서만 지적을 받았던 구도 감독의 무리한 투수운용의 부작용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팀의 투자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만약 올해도 우승에 실패한다면 구도 감독의 거취도 불분명해질 가능성도 일각에서는 제기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구도 감독은 3년연속 6할대 승률을 기록하고도 재계약에 실패하는 희한한 기록을 세울 가능성도 있다.
다만 8월 이후 라쿠텐이 우려했던 대로 과밀 일정을 버티지 못하고 DTD의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8월 초순까지 경기 소화수 관계로 승차에서는 앞서나 승률에서 뒤져서 2위라는 기묘한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8월 18~20일 라쿠텐과의 3연전을 싹쓸이하며 승차에서 앞서는 2위라는 기묘한 포지션을 해소했다. 그리고 후반기 들어 무서운 기세로 만나는 팀마다 씹어먹으며(심지어는 호크스도 8월초에 벌어진 3연전에서 루징시리즈를 기록했고 그 이전까지는 '''13연승'''을 기록 중이었다.) 상위권을 위협했던 세이부와의 이어진 3연전에서도 2경기 연속 영봉승을 거두면서 2위 라쿠텐과의 승차를 7.5게임, 3위 세이부와의 승차를 9.0게임까지 벌렸다. 승률도 무려 2승1패 페이스를 뛰어넘는 6할7푼3리로 8월이 안 끝났는데 이미 승패차는 나머지 11개팀 연합 올스타 팀과 일본시리즈를 하라는 야유를 들었던 2015년에 육박하는 +39. 게다가 전년도의 뼈아픈 기억이 있어서 구도 감독이 시즌 끝날 때까지 고삐를 늦출 계획은 없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 수치는 더욱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시즌 초반에 부진했으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역대급' 소리를 들었던 2015년을 훌쩍 뛰어넘는 페이스를 보여주며 2, 3위 팀도 승률 6할을 넘어가는 상황에서 독주 채비를 갖추기 시작하고 있다. 결국 9월 1일 라쿠텐과의 경기에서 이기면서 매직넘버 ON. 사이타마 세이부 역시 상승세를 타고 있는 만큼 신구 후쿠오카 시리즈로 결승행을 다툴 전망이며, 히로시마와의 첫 대결도 기대해볼 만하다. 결과는 둘 다 후쿠오카 만나기 직전 스테이지에서 떨어져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올해는 외국인 선수들도 깅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릭 밴덴헐크는 퍼시픽리그 외국인 선발투수 중 평균자책점, 다승 1위를 마크하고 있으며 중간에 영입한 중간계투 리반 모이넬로는 ERA 1점대의 철벽 미들맨으로 활약하고 덕분에 작년에 준수한 셋업맨으로 활약하며 재계약을 한 로베르토 수아레스가 토미 존 수술로 빠진 공백을 완벽하게 메웠다. 마무리 투수 데니스 사파테는 '''0점대 평균자책에 50세이브'''를 기록하고 있고 지명타자 용병 알프레도 데스파이네는 30홈런을 찍으면서 홈런왕 경쟁과 더불어 작년 우승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5번타자와 이대호의 공백을 훌륭하게 메웠다. 물론 모이넬로가 오기 전에 1군에 있었던 카일 젠슨은 6경기 1안타 1홈런으로 먹튀 확정이지만 1군 엔트리에 이미 최상급 용병 4명이 있기 때문에 2군 선수층만 채우면서 더이상 팀에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떠날 듯.
결국 9월 16일에 2위 세이부와 직접 대결에서 승리하여 통산 18번째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루어냈다. 본인들이 이룬 2015년에 기록한 리그 최단기간 우승기록을 또 갈아치우는 쾌거. 옆리그 히로시마보다 이틀 먼저 리그 우승에 성공한 건 덤. 이쯤되면 우승 문턱에서 DTD를 시전하며 닛폰햄에게 밀려버린 작년 시즌이 아쉬워진다.[44]
9월 24일 라쿠텐 전의 승리로 90승 라인을 돌파하고 2015년을 뛰어넘는 91승을 달성했다. 시즌 90승 초과는 1956년 니시테쓰 라이온즈와 난카이 호크스가 각각 96승을 거둔 이후 61년만에 나온 대기록이다.[45] 게다가 이 때는 양 대리그 분리 초창기라 퍼시픽리그에만 8팀이 소속된 시기로 한 시즌이 메이저리그를 방불케 하는 154경기였다. 시즌이 143경기로 줄어든 현대의 야구에서 90승을 돌파했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록인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다만 우승 확정 이후로는 2승 6패로 또다시 나사빠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한데[46] , 2015년에도 그랬다가 정작 포스트시즌에서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과시한 적이 있어서 그냥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페이스 조절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즌 최종성적은 94승 49패, 승률 .657, 승패마진 +45. 시즌 승수로는 퍼시픽리그 역대 4위, 승률로는 역대 9위의 성적이다.
그리고 2017년 클라이맥스 시리즈/퍼시픽 리그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2연패로 삐긋했으나 내리 3연승을 거두며 시리즈 스코어 4-2로 도호쿠 라쿠텐을 떨어뜨리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와 일본시리즈에서 맞붙는다.
일본시리즈에서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와의 매치업은 처음이었다. 초반 3연승으로 우승을 쉽게 차지하는 듯 했으나 4,5차전을 내줬고 6차전에서 연장 끝내기 안타가 터지며 어렵게 2년만에 일본정상에 올랐다.[47]
2.9.5. 2018년 시즌
2.9.6. 2019년 시즌
팀의 윤택한 자금력을 앞세워 FA로 풀리는 니시 유키(오릭스 투수), 아사무라 히데토(세이부 야수) 획득에 나섰다. 니시에게는 DeNA, 한신, 주니치가 역시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호크스는 4년 계약에 총액 16억엔이라는 조건을 먼저 날린 상태. 구단은 니시가 최근 5년간 10승 이상 시즌을 4회 기록한 안정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와다 츠요시의 어깨 부상, 센가 고다이와 히가시하마 나오가 부상으로 선발 로테이션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하는 등 불안요소가 있고, 2012년에는 팀이 니시에게 노히트 노런의 수모를 겪은 적도 있는 등 은근히 소뱅에게 강한 모습을 보인 적이 많아서 얻을 수 있다면 팀에 상당한 플러스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아사무라와 니시 두 명을 획득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시즌 끝나자마자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2018시즌 개막전 선발멤버로 출전했던 혼다 유이치는 은퇴를 선택하고 코치로 부임했으며, 2018시즌 연봉 4억엔인 프랜차이즈 투수 셋쓰 다다시를 비롯하여, 연봉 3억5천만엔인 이가라시 료타, 역시 베테랑인 데라하라 하야토, 기도코로 류마 등 아직 현역연장에 미련을 보이는 30대 중반 베테랑들을 과감하게 방출했다. 이들을 정리하면서 세이브한 연봉 총액만 무려 10억 5천만엔에 이른다고 한다.
아사무라는 오릭스와 라쿠텐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필요하다면 오 사다하루 회장이 직접 협상 테이블에 앉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사무라는 오 회장에 협상테이블에 나서기도 전에 가장 유력하다고 보도되던 라쿠텐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이에 아사무라 뽑으려고 세이브한 자금도 굳었겠다, 니시에게 베팅액수를 더 올릴 것이 유력시 되는 상황. 이미 주니치는 과도하게 오른 입찰액에 니시 쟁탈전에서 철수했고 DeNA는 그냥 손만 들어본 정도라 한신과의 1대1 대결 양상으로 가고 있다. 과연 한신이 소뱅의 베팅액을 받아칠 것인지 이대로 물러날지에 따라 니시의 행선지가 결정될 듯. 결국 니시 유키도 한신행을 선택했고 아사무라와 니시 두 명을 잡겠다고 나선 소뱅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다. 둘 다 경쟁자보다 더 높은 액수를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져서 더욱 충격을 받은 모양.
정규시즌 개막은 지난시즌 퍼시픽리그 우승팀인 세이부와의 홈 3연전으로 시작되었다. 29일 개막전은 4대0으로 순조롭게 앞서나가다가 카지야 렌이 만루포를 쳐맞고 연장에서 어렵게 데스파이네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를 거두었다. 30일 경기는 4대1로 지고있던 4회말에 이마미야 겐타의 밀어내기 볼넷과 야나기타 유키의 그랜드슬램으로 6대5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31일 경기에서는 그간 롱릴리프 또는 땜빵선발을 맡아온 타카하시 레이가 6이닝 1실점의 호투를 선보여 3대1로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스윕으로 시즌을 상큼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이어진 오릭스와의 3연전을 2승 1무로 마치고 1무포함 5연승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롯데와의 3연전에서 1승 2패로 루징시리즈를 기록했으며 하필이면 3연전의 마지막 날 야나기타 유키가 3루도루를 시도하다 무릎부상을 입고 등록이 말소가 되었다. 이로써 나카무라 아키라, 주리스벨 그라시알에 이어 타선의 중심을 잃은 외야는 우에바야시 세이지만이 남았고 중견수는 2군에서 올라온 가마모토 고가 좌익수 자리는 백업요원인 후쿠다 슈헤이와 원래 내야요원인 가와시마 게이조 등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는 중이다. 4번에 배치한 알프레도 데스파이네도 부진이 장기화 되는 가운데 노쇠화의 확연해진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어쩔 수 없이 선발 1루수로 계속 출장하고 있으며 가이 다쿠야도 1할대 밑에서 헤배고 있는 등 타선의 두께가 잔뜩 얇아진 상황이다.
2019년 시즌도 어김없이 부상 퍼레이드로 시즌을 시작하게 됐는데 이미 캠프 때부터 내야 백업으로 복병 역할을 충실하게 해온 아카시 겐지가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으면서 엔트리에 들어오지 못했고, 외야요원인 에가와 도모아키도 같은 증세로 장기 이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여기에 릭 밴덴헐크도 허리부상으로 개막 엔트리에 들어오지 못했고, 캠프 때 팀에 복귀한 데니스 사파테는 전년도 부상의 후유증으로 구속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2군에서 조정중이다. 여기에 시즌 개막 직전에 좌익수 주전이던 나카무라 아키라가 옆구리 부상에 이은 자율신경실조증으로 개막 직전에 이탈했고, 나카무라의 빈자리를 성공적으로 메우는 듯 했던 주리스벨 그라시알이 시즌 시작하자마자 몇경기 안돼서 옆구리 부상으로 이탈, 급기야는 전년도에 아무 이상없이 한시즌을 치러서 안심했던 야나키타마저 전치 3주의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말소가 되었다. 여기에 재작년 필승조였던 이와사키는 팔꿈치 재수술을 받았고 작년 필승조인 가지야 렌은 부상은 없지만 구위가 떨어져서 올라오기만 하면 얻어맞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군에서는 인플루엔자가 유행하여 선수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바람에 1군 호출은 고사하고 2군 경기조차 제대로 치르기도 버거운 비상상황이다.
그래도 작년에 급하게 대역 마무리를 맡아서 세이브 타이틀까지 따낸 모리 유이토가 이제 완전히 마무리 역할에 익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작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픽한 대졸신인 가이노 히로시가 시속 150km가 넘는 패스트볼을 뿌리면서 필승조에 가세했으며 선발진에도 센가 고다이, 히가시하마 나오, 다케다 쇼타의 기존 선발진에 작년 시즌 중간에 들어온 아리엘 미란다, 신인으로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던 육성 드래프트 출신 오타케 고타로와 드래프트 2라운드 픽인 언더핸드 스로 다카하시 레이가 착실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이면서 투수진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5월에는 5연승도 해 보고 3연패도 해 보고 그 후로도 연승과 연패를 반복하면서 1위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데, 치고 나가지 못하는 사이에 라쿠텐, 세이부, 롯데, 닛폰햄이 같이 2위그룹을 형성하면서 소프트뱅크를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그리하여 5월 26일 기준 2위 라쿠텐과 반게임차, 3위 세이부와 '''1게임차''', 4위 지바롯데와 '''1.5게임차''', 5위 닛폰햄과 3게임차라는 환장할 순위표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5월 28일에 오릭스에게 패배한 틈을 타 라쿠텐이 세이부를 꺾으면서 1위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두 경기에서 오릭스를 이기면서 위닝시리즈를 거두고, 29일 경기에서 지고 30일 경기가 없던 라쿠텐에게서 다시 한 게임차 1위 자리를 탈환했다. 그리고 교류전에 들어가기 직전 펼쳐지는 라쿠텐과의 3연전. 그러나 여기에서 스윕을 당하며 라쿠텐과 2경기차 벌어진 3위까지 떨어지고 만다. 2위는 누가 했냐면, 지바롯데와 오릭스를 털어버리고 6연승을 달린 닛폰햄.
그렇지만 이 팀이 어떤 팀이던가. 교류전이 시작되자마자 패왕 모드를 가동. 어느 센트럴 구단에게도 열세를 대주지 않으면서 또 다시 교류전 우승을 달성, 이 힘으로 바로 퍼시픽 리그 선두까지 복귀했다. 동률 구단은 한신, 디엔에이. 나머지 상대로는 우세.
그리고 리그전에 돌아오자마자 닛폰햄과 라쿠텐을 스윕, 오릭스에 위닝을 거두며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2위와는 6경기차.
5월 중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는데. 무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의해 '''전체 8픽'''으로 지명되었지만 메디컬 문제로 인한 계약금액에 대한 이견 때문에 입단을 거부한 우완 투수 카터 스튜어트와 계약했다는 것이다! 브레이브스가 제시했던 200만불보다 500만불 높은 700만불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하며 6년 뒤 FA로 풀리는 조건. 이 기묘한 계약은 스튜어트의 에이전트가 '''스캇 보라스'''였기에 가능했던 계약으로, 보라스는 이전에도 J.D. 드류같은 유망주들의 계약금을 높이기 위해 계약을 거부하고 독립리그 등으로 진출시키는 무브를 써먹었던 적이 있다. 성공 여부에 따라 향후 메이저리그 진출 유망주들의 진로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전망.
7월 31일 현재 2위 닛폰햄과 1.5 게임차 선두를 유지하고 있지만... 외인선수인 그라시엘과 모이네로가 잠시동안 국가대표로 차출된 탓에 안그래도 부상병동이던 팀 전력에 더 큰 구멍이 생겨 1위 사수에 비상이 걸렸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롯데전 위닝시리즈를 제외하면 죄다 루징이거나 피스윕을 당하며 굳건했던 1위자리가 위험해졌다. 그러나 이런 말이 무색하게 그 닛폰햄을 8월이 되자마자 6전 5승 1패로 눌러버리면서 2위와의 경기차를 다시 5게임차로 벌렸다. 그 뒤로도 잘 하는가 싶었지만… 8월 23-25일간 있었던 지바롯데전에서 스윕을 당하고, 그 다음 오릭스 2연전이 취소되는 동안 2위 세이부가 닛폰햄을 스윕하면서 양 팀 경기차는 2경기차로 좁혀진 상황. 그리고 30일부터 세이부와 원정 3연전을 치른다. 1위자리가 다시 한 번 위태로워졌다. 그리고 여기서 루징시리즈를 당하며 1게임차까지 추격을 허용.
이후 4연승을 하며 한숨 돌리는가 했지만 세이부도 똑같이 4연승을 하며 맹렬히 추격. 그 뒤로도 세이부가 이길 때 소프트뱅크도 이기고 세이부가 지면 소프트뱅크도 지는 운명공동체(...) 상태로 불안한 1위 자리를 유지해 왔지만, 결국 딱 걸리고 말았다. 9월 11일부터 세이부와 다시 한 번 원정 3연전을 치르는데, 첫 경기부터 지는 바람에 순위가 뒤집힌 것.
9월 19일, CS 진출을 확정지었다. 1위 세이부와의 승차는 2경기차, 세이부의 리그 우승 매직넘버는 5. 이후에 어찌저찌 1경기 차이로 격차를 좁히긴 했으나 세이부도 좀처럼 지질 않아서 매직넘버는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결국 9월 24일 라쿠텐과의 원정경기에서 2:4로 패하며 라쿠텐을 CS무대로 올려줌과 동시에[48] 세이부의 리그 우승을 허락하고 말았다. 시즌 중후반까지 부상병동인 상태로 잘 버텼으나 끝내 마지막에 고꾸라지며 2년만의 통합 우승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남은건 1년전처럼 세이부를 업셋하고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도 차지하는 것. 때문에 일본시리즈 3연패 가능성은 아직 유효하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라쿠텐을 상대하여 첫 경기를 패했지만 2차전과 3차전을 내리 이기며 파이널 스테이지 티켓을 거머쥐었다.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시즌중의 팽팽했던 승률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1승 먼저 주고 시작하는 열세속에서도 붕괴된 세이부의 투수진을 신나게 털어먹으며 4연승을 거둬서 업셋에 성공했다.
결국 2년 연속으로 2위를 거두고도 똑같은 상대를 즈려밟고 일본시리즈로 올라간 상황. 상대는 같은 날 일본시리즈행을 확정지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단 한 게임도 내주지 않고 4:0으로 스윕승하며 일본시리즈 3연패와 동시에 2010년대 센트럴리그 전 구단 상대 승리 + 19년만의 복수 + 같은 팀을 상대로 2번 스윕한 유일한 팀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
2.9.7. 2020년 시즌
어느새 연고지를 규슈로 이전한지도 30년을 넘어 31년째 시즌에 돌입했다. 이제 후쿠오카에 라이온즈가 머물렀던 기간(1950-1978)보다 호크스가 자리잡은 기간이 더 길어졌고, 후쿠오카에 있던 기간 중에서도 소프트뱅크 시절(2020년 시즌으로 16년째)이 다이에 시절(1989-2004, 15년)을 뛰어 넘게 되었다. 이제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명실공히 후쿠오카와 규슈를 대표하는 구단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시리즈 3연패의 기쁨을 뒤로 하고 팀 로스터에 변화가 생겼다. 유틸리티로 쏠쏠한 역할을 해줬던 후쿠다 슈헤이가 FA로 팀을 떠나 치바 롯데 마린즈로 팀을 옮겼고 대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자유계약으로 풀린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이적해왔다. 발렌틴의 가세로 장타력은 늘어나겠지만 이미 외야, 지명자리에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주리스벨 그라시알이 있는데다 주전급 외야수만 해도 부상으로 역할이 제한되어 버린 하세가와 유야를 제외하고도 야나기타 유키, 나카무라 아키라에 2019년의 부진으로 절치부심하고 있는 우에바야시 세이지 등으로 인해 과포화 상태이고 투수쪽에서도 기존의 리반 모이넬로, 릭 밴덴헐크에 데니스 사파테도 부상에서 회복해서 복귀를 노리고 있는데 맷 무어까지 가세한 상태라 용병과 외야진의 교통정리가 골치거리로 떠오른 상황이다. [49] 그 와중에 육성선수로 입단시켜 작년에 1군 데뷔전 첫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내서 기대를 모았던 오스카르 콜라스가 오프시즌 중에 MLB 진출을 위해 무단으로 망명을 신청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데스파이네, 그라시알 등 쿠바 선수들은 보유하고 있으려면 매년 쿠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되고 계약도 단년계약만 허가가 되는데[50] 그런 식으로 데려와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키우려던 선수가 시즌 끝나고 집에 간다고 해놓고서는 쿠바 정부가 가장 싫어하는 망명이라는 사고를 친 지라 행여나 어렵게 쌓은 쿠바 야구계와의 신뢰관계가 허물어질까 걱정 중이다. 다행히 이번 시즌도 나머지 쿠바선수들과의 재계약에는 성공했다. 다만 쿠바가 2019 프리미어 12에서 예선 탈락으로 도쿄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실패하는 바람에 3월달에 있을 세계 예선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 때문에 데스파이네, 그라시알, 모이넬로의 차출이 불가피한 상황인데 하필 2020년 시즌은 도쿄올림픽 휴식기간 때문에 개막을 일주일 앞당기게 되어 시즌 초반에 이들의 이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무리하게 블라디미르 발렌틴을 데려온 것도 이에 대한 보험이라는 관측도 있다. 그렇지만 도쿄올림픽 연기에 모기업 사정도 연이은 대형 투자 실패로 녹록치 않기 때문에 올해가 팀의 본격적인 시험무대가 될지도.
치바 롯데 마린스와의 개막 3연전에서 개막전은 연장 10회말 끝내기 안타로 승리했지만 그 후로 2경기를 내리 패배하면서 1승 2패의 루징 시리즈를 당했다. 다만 세이부와의 3연전은 네덜란드 듀오를 앞세워서 위닝시리즈를 장식했다. 이후로 꾸준히 루징을 반복하며 B클래스로 떨어진 상황. 투수진에서는 2점대의 히가시하마를 제외하면 4점대의 와다와 무어, 6점대의 밴덴헐크로 구성된 약한 선발진, 쿠바듀오의 이탈로 1번 쿠리하라, 3,4번 야나기타-발렌틴만 거르면 나머지는 자동아웃 수준의 타선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나마 불펜진은 강력해서 쿠바 듀오의 합류만을 기다리며 모이넬로-카야마-다카하시레이의 0점대 불펜진으로 버티는 중.
그렇게 개막월인 6월을 3승 6패 1무로 이팀답지 않게 승률 3할대를 끊으면서 올해는 안될것 같다는 비관론이 피어올랐으나, 선발진이 점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7월부터는 반등하는 분위기다. 7월 시작인 닛폰햄과의 6연전을 3승 2패 1무로 위닝을 장식하더니 그 다음주차에는 1위를 달리고 있던 라쿠텐에게 4승 2패의 위닝, 3주차에는 오릭스를 상대로 5승 1패로 스윕에 가까운 6연전을 장식하여 7월 중순이 종료된 시점에서 어느새 1위와 단 1게임차의 단독 2위로 올라섰다. 8월 중순 1위로 올라선 소프트뱅크는 꾸준히 1위자리를 고수하면서 9월부터 본격적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해 10월에는 10월 23일까지 무려 12연승을 달리는 등 쾌조의 상승세를 보이며 27일 리그 1위를 확정지었다.
11월 11일에는 치바 롯데 마린스와 치를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나설 선발진을 발표했다.소프트뱅크 CS 대비 선발 로테이션 확정…센가 1선발
이어지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2승을 따내며 치바 롯데를 무난하게 스윕했다. 덕분에 일본시리즈 상대인 요미우리와 동시에 시즌이 마무리 돼서 체력 문제는 한시름 덜게 되었다.
그리고 2020년 일본시리즈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2연속 매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스윕이 나왔다. 그럼으로써 전세계 야구 리그에서 유일하게 최종시리즈에서 같은 팀을 상대로 2연속 스윕, 그리고 3번 스윕한 유일한 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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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올 시즌 포스트시즌까지 포함한 최후반 30경기에서는 '''정규시즌에서 단 3패만을 내준 채''' 27승 3패의 승률 '''9할'''이라는 세계 스포츠사에도 남을만한 압도적인 독주를 달리게 되었다. 이젠 2004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저주라도 걸린 듯한 가을 야구의 부진으로 '''가을의 풍물'''이라 풍자받던 시절과는 180도 돌변했다고 자신해도 좋을 모습을 보여주었다.
3. 응원가
구단가는 다이에 호크스 시절부터 자 가라 젊은 매 군단(いざゆけ若鷹軍団)을 사용하고 있다.
WE=KYUSHU 버전. 큐슈 지역 출신의 연예인들과 그 외 지역 출신이지만 호크스 팬으로 알려진 유명 인사가 불렀다.[51]
2020년 부터는 로봇을 동원해 춤을 추기도 한다.
4. 유니폼
5. 홈구장
5.1. 제1 홈구장: 후쿠오카 PayPay 돔
5.2. 제2 홈구장: 키타큐슈 시민 구장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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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키타큐슈 시민 구장이 있으며 가고시마현립 카모이케 야구장, 구마모토의 리브와쿠 후지사키다이구장에서도 경기를 치룬다.
6. 인기
엄청난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2014년 기준으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팬은 '''279만명'''인데 연고지인 후쿠오카 시의 인구수가 '''150만명'''[52] 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출처 요미우리 자이언츠(889만명), 한신 타이거즈(608만명), 히로시마 도요 카프(292만명)[53] , 주니치 드래곤즈(288만명)에 이어 5번째로 팬이 많은 구단이며 1~4위 구단들이 센트럴리그 소속 구단이라는 것을 보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퍼시픽리그 구단중 1위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1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후에 열린 시내 퍼레이드에서 무려 35만명의 시민이 우승 퍼레이드를 지켜보기 위해 시내로 나왔다는 것도 이러한 인기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기사, 카퍼레이드 영상
퍼시픽 리그 구단 중 가장 인기가 좋으며, 매년 1회 도쿄돔에서 열리는 홈경기 및 주요 가을야구 퍼블릭뷰잉마저 꽉꽉 채운다. 센트럴 리그 구단이라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인기는 호크스보다 뒤쳐지면 뒤쳐졌지 앞서진 않는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팬들의 충성도는 몰라도 홈구장 수용능력 때문에 관중동원 실적에서는 호크스에게 밀린다.
그리고 후쿠오카 팬들은 중간에 10년 동안 홈팀을 잃어버렸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팬들의 팀에 대한 충성도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 못지 않게 상당히 높다. 하지만, 본거지가 일본 서쪽 끝에 박혀있기 때문에 예전 홈이었던 오사카를 제외하면 원정에서의 관중 동원 능력은 그다지 높지는 않은 편이다. [54]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후쿠오카 돔뿐 아니라 2군 홈구장 겸 1군 연습구장이었던 후쿠오카 간노스 야구장의 경우에도 평균관중수가 1천명을 웃도는 어마무시한 관중동원력을 보여주고 있다. 시즌 끝나고 후쿠오카 상점가에서 이와타야, 미츠코시 등을 중심으로 화끈한 우승 세일이 열리는 건 덤이다.
2004년부터 매 해 여름 '''<매의 제전(鷹の祭典)>'''이라는 이름의 이벤트를 개최하는데 기존 홈 유니폼이 아닌 매의 제전 전용 유니폼을 착용해 홈경기를 치루며 각 년마다 입는 유니폼이 다르다. 특정 날마다(사실상 기간 내내. 그래도 유니폼 증정 유무 확인 필수) 유니폼 증정하며 레이저쇼, 불꽃놀이, 공연 등의 각종 이벤트를 개최한다. 키타큐슈 시민 구장, 교세라 돔 오사카와 도쿄돔에서도 각각 <매의 제전(鷹の祭典)>을 개최하며 매년 1회 홈경기를 가진다.
한국에서는 구단주가 한국계라는 점, 이범호,이대호, 김무영, 릭 밴덴헐크 등 KBO출신들이 거쳐간 팀이라는 점과 야나기타의 호쾌한 스윙이나 마츠다의 퍼포먼스에 매료된 팬층이 꽤 있었는지 상대적으로 인기가 있는 팀이다. 다만 최근 한국 내 일본야구 마니아들은 리그를 혼자서 다 해먹는다고 안티 소프트뱅크 움직임이 조금씩 보이고 있는 중. 그래봤자 안티 요미우리급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크게 낮아 보이는 듯 했으나… 소프트뱅크가 11월 8일 FA시장에 나온 아사무라 히데토와 니시 유키에 각각 4년 28억, 4년 20억엔을 제시할 것이라고 표명하자 일부 팬들이 이젠 돈지랄도 모자라 FA거품까지 만들려한다며 불편해하고 있다.
후쿠오카 출신의 연예인들도 많이 지지하는 팀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연예인은 다름아닌 호크스 출신 명투수이자 현직 호크스 1군 투수코치 와카타베 켄이치의 딸인 前 HKT48의 와카타베 하루카가 있으며, 후쿠오카 출신인 현 HKT48 멤버 무라카와 비비안이 있다.[55]
7. 야빠 구단주와 부자 구단
일본프로야구계에서 적극적인 투자를 실천하는 구단으로도 유명하다. 2015년 기준 일본프로야구에서 페이롤(선수총연봉)이 46억 3,400만 엔[56] 으로 전체구단 1위를 기록했다. 그 말은 돈지랄로 정평이 난 요미우리 자이언츠보다도 높다는 소리.[57][58] 2016년에는 페이롤 41억 7,577만 엔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59]
한때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마이애미 말린스보다도 페이롤이 높게 책정 되기도 했다(…).[60][61]
용병들에게도 아낌없이 쏟아붓고, 선수단 지원도 확실하게 투자하는 편이다. 심지어 이범호의 사례처럼 계약기간 중간에 방출시켜도 "그래도 너 잔여연봉 다 줄게"라며 남은 잔여연봉을 모두 지급하기도 하고, S급 용병에게는 "우리 10억 엔 이상 줄 의향도 있음"이라며 엄청난 제안을 하기도 한다.
또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더불어 유이하게 모든 투수의 데이터를 입력해서 사용가능한 피칭머신을 보유중인 구단[62] 이기도 하고, 2016년에는 오타니 쇼헤이만을 분석하기 위해 30억짜리 비주얼 피칭머신을 도입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선수단 전원에게 아이패드를 지급하여 전용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퍼포먼스를 분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게다가 2군으로도 모자라서 3군까지 운용하면서 선수를 육성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한국프로야구의 신고선수에 해당하는 육성선수도 적극적으로 선발해서 선수단 규모만 100명이 넘는다. 또한 2군 및 3군의 육성을 위하여 후쿠오카시 근교 치쿠고시에 '''자비로''' 그라운드 2면 및 훈련시설, 기숙사를 포함한 새 2군 구장 HAWKS 베이스볼 파크 지쿠고를 2016년에 오픈했다. 여담으로 기존의 2군 구장이던 간노스 구장의 노후화로 새로운 2군 구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후보지를 공모했는데 이 때 호크스의 2군 구장을 유치하겠다고 나선 규슈지역의 지자체만 무려 5개현의 29군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선수 선발 및 육성 시스템면에서 단연 일본프로야구 톱이다.
아낌없는 투자+합리적인 운영에 맞물려 구단 성적은 급속도로 상향, 2014년, 2015년 일본시리즈 2연패에 이어, 2017년, 2018년, 2019년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며 명실상부한 일본프로야구 최강팀으로 우뚝 올라섰다.
이러한 적극적인 투자는 그룹 오너인 손정의가 야빠여서 가능한 일이기도 한데, 팀 전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손정의의 다음 목표가 "세계 최고의 야구단"으로 잡고 있으며 실제로 미국-일본 월드시리즈에 대한 생각을 슬쩍 내비치기도 했다.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일본 복귀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한 이유로 '''"세계 제일을 노리는 구단이어서 입단했다"''' 라는 인터뷰를 한 것도 바로 이 때문.
소속 팀 선수들의 포스팅 시스템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 것도 '''세계 제일'''을 지향하는 구단 방침상 포스팅으로 선수들을 메이저리그로 보내주면 자의적으로 메이저리그 팀들의 전력 보강을 도와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63] 이 때문에 메이저 진출을 갈망하고 있는 센가 코다이가 2017년부터 매년 포스팅을 해달라고 노래를 부르는데도 절대 허용하지 않고 있다. 2020 시즌 후 연봉 협상자리에서도 연봉문제보다 포스팅에 대해 대화를 더 많이했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실패. 그래서 그런지 2021년 연봉 4억엔에 도장을 찍었음에도 협상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고 한다.
이쯤되면 팀은 막대한 적자를 보고 그저 야구를 좋아하는 재벌 구단주의 취미와 쌈지돈(…)에 기대어 전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구단 운영은 최근 몇년 간 연속으로 '''흑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2015년에도 매출 200억 엔(!)에 인건비를 포함한 운영비는 겨우 70억 엔밖에 안들었다고 한다. 구단주의 화끈한 지원에 구단 임직원들도 최대한 폐를 덜 끼치려고 필사적으로 영업 활동을 해온 결과라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쿠오카 돔을 매입해서 '''자가용'''으로 만들면서 구장으로부터 발생하는 매출을 모조리 구단이 가져갈 수 있게 된 것이 컸다고 한다. 여기에는 야구경기 관련 수익(입장료, 구장 광고비, 경기 중 구장내 매점 매출액 등)뿐만 아니라 야구와 관련없는 콘서트, 컨벤션 등의 대관 수익 등도 포함됨다.[64] [65][66]
8. 마스코트
9. 관중수 추이
10. 역대 성적
10.1. 양대리그 출범 이후
11. 이야깃거리
- 최대 라이벌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난카이-니시테츠 시절부터 선두다툼을 하는데 사사건건 부딪쳐서 라이벌리가 치열했고, 다이에 시절부터는 신구 후쿠오카라는 연고지 역사까지 겹친 상태다. 니시닛폰 신문과 호크스의 전담매체인 자매지 니시닛폰 스포츠에서도 세이부 소식을 다뤄 주고 있다. 2018년과 2019년 2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내주며 라이벌리가 재점화되고 있으며, 20세기의 왕조와 21세기의 왕조 자리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 독설로 유명한 노무라 카츠야가 바로 이 팀의 명선수였다. 소프트뱅크의 전신인 난카이 호크스에서 선수 겸 감독까지 뛴 난카이 구단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레전드이고 양대리그 분립 이후 최초의 타격 3관왕이자 통산 홈런, 타점 2위. 하지만 부인인 사치요의 막장행각과 난카이 프런트과의 불화로 인해 결국 1977년 시즌 막판에 감독직을 사임하고 난카이를 떠났다. 그 뒤로 난카이는 공식 자료에서 노무라의 존재를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후쿠오카로 이전하고 나서는 팬 베이스와 팀 컬러가 완전히 바뀌어서 그냥 언급하기가 어색해져서 언급을 안 하게 됐다. 안습.
- 2000년대 전후로는 다른 팀에 비해 들어오는 신인들이 대박을 많이 터뜨려서 유망주들의 선호구단으로 자리잡았었다. 대표적으로 조지마 겐지, 마쓰나카 노부히코, 고쿠보 히로키, 이구치 타다히토의 토종 거포들의 활약과, 사이토 가즈미, 와다 츠요시, 스기우치 토시야, 아라카키 나기사, 마하라 타카히로 등의 싱싱한 투수진들을 겸비한 매우 강한 구단이였다.
- 하지만 게임에서는 가장 안습인 팀이기도 했다. 이유는 주요 선수들이 유리몸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라면 5경기 뛰고 전치 일주일은 기본일 정도. 가장 강력한 건 타무라 히토시. 코나미의 야구게임인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서는 특수능력인 부상정도 1이 4명이나 걸리기도 했다. 2도 3명 정도 되고.[82] 이러한 부상병동의 특징은 지금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옮아간 듯 하다(…).
- 호크스 3군의 경우 초청 팀 자격으로 2012년부터 KBO 퓨처스리그에서 초빙 경기를 20경기 가량 갖는다. 2011 아시아 시리즈에서 준우승에 머무른 것에 대한 영향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 대학 팀들하고도 교류전을 치르고 있다. 또한 3군 기록도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있다. 궁금한 선수가 있으면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주목받는 선수는 거의 없다지만…[83]
- 교류전의 최강자. 2005년부터 2019년까지 15년동안 214승 14무 126패(승률 .628)로 교류전 우승만 절반이 넘는 8회, 교류전에서 승률 5할을 못 넘긴 것도 단 두 해[84] 밖에 없으며, 통산성적에서 센트럴리그 6팀 모두를 상대로 우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요코하마, 야쿠르트, 히로시마는 거의 보약 취급이고 그나마 센트럴리그 팀 중에서 교류전 성적이 가장 좋은 요미우리도 이 팀에게는 맥을 못 춘다.[85] 통산 승리도 2위 그룹인 롯데, 닛폰햄과 무려 20승 넘게 차이가 난다. 그것도 모잘라서 2010년대에만 센트럴리그의 모든 팀과 일본시리즈에서 한번씩 맞붙어서 올킬을 달성하기까지 했다. 이 쯤되면 리그를 바꿔보는 걸 고려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
- 잘나가기만 할 것같은 이미지와는 반대로 제2홈구장인 키타큐슈 시민구장(北九州市民球場)에서는 2011년 8월 31일 이후 이후 8연패(1무 포함) 중이다. 연패 기간동안 25득점 57실점이다. 무지막지한 성적을 내는 2016년 시즌에도 여기서는 어김없이 패배를 당했으며, 일본프로야구 데뷔이후 14연승가도를 달리던 릭 밴덴헐크의 연승행진이 멈추고 첫 패배를 기록한 곳도 여기다. 그러나 2016년 7월 20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2011년 4월 이후 기타큐슈시민구장에서 드디어 연패를 끊는 승리를 거뒀다.
- 일본시리즈에서 현존하는 모든 센트럴 리그 팀을 격파한 유일한 구단이다.1959년에 요미우리를 이기고 첫 우승을 달성했고, 1964년에 한신 격파, 1999년에 주니치 격침, 2015년 도쿄 야쿠르트, 2017년 요코하마 디엔에이, 2018년 히로시마를 차례대로 무너뜨렸다. 특히 한신은 2014년에, 주니치는 2011년에 요미우리는 2019년에 다시 격침하면서, 소프트뱅크 시절에만 센트럴리그 팀 전원을 격침시킨 기록을 남겼다. [86]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아직 올킬을 달성하지 못했고[87] 전구단 상대의 기록도 달성하지 못했다. 원인은 2000년대 들어와서 A클래스에 두번밖에 들지 못한 이 팀.
- 2020년부터 Unsold Stuff Gaming의 시드권을 인수해 일본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리그인 LJL에 참가하며, 한국인 선수로 김덕범, 이문용, 박보헌 선수를 영입하였다.
- 2020년부터 유튜브에 한국 팬들을 위한 한국어 공식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다. 주로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이 올라온다.
12. 주요 선수들
12.1. 현역
12.1.1. 감독
- 81. 쿠도 키미야스
12.1.2. 코치
12.1.3. 투수
- 2. 카터 스튜어트 주니어 :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가 계약금을 적게 준다고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지명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보내버린 그 선수다. 입단 첫 해인 2019년에는 3군에서도 부진하였으나 2020년 시범경기부터 1군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는 유망주.
- 10. 오타케 코타로
- 11. 쓰모리 유키
- 13. 니호 아키라 : 스윙맨과 추격조 중간계투를 오가며 가늘고 길게 뛰고 있는 우완투수. 2020년 6월 21일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개막 3차전에서 번트 자세를 취하던 나카무라 쇼고의 두부를 직구로 강타하면서 강제퇴장 당했다. 46초부터 나옴
- 14. 카지야 렌
- 16. 히가시하마 나오 : 2017년 퍼시픽리그 다승왕 출신.
- 17. 이와사키 쇼 : 2017년 퍼시픽리그 홀드왕 출신.
- 18. 다케다 쇼타
- 20. 카이노 히로시
- 21. 와다 츠요시
- 25. 다나카 세이기 : 2016년 드래프트 최대어였는데... 현실은 테라시마 나루키[88] 와 함께 2016년 1라운더 중 최악의 선수가 되어가는 중. 2020년에는 심지어 테라시마가 불펜에서라도 좋은 활약을 시작한 반면 다나카 세이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 그나마 대학 시절 라이벌 취급받던 사사키 치하야도 망해서 다행이다.
- 26. 요시즈미 하루토
- 28. 타카하시 레이
- 29. 이시카와 슈타
- 34. 시이노 아라타
- 35. 리반 모이넬로
- 37. 맷 무어 : 한 때 탬파베이 레이스의 에이스 후보였던 그 선수 맞다.
- 38. 모리 유이토 : 2018년부터 소프트뱅크의 마무리를 맡고 있다.
- 39. 오가타 슈토
- 40. 스기야마 카즈키
- 41. 센가 고다이
- 42. 마츠다 료마
- 47. 다카하시 준페이 : 2015년 드래프트 1라운더. 2018년까지만 해도 2군에서도 털리면서 실패한 1라운더라는 설레발이 있었으나[89] 2019년 드디어 불펜으로 터졌다.
- 49. 후루야 유토
- 50. 반도 유고
- 53. 이즈미 케이스케
- 56. 타우라 후미마루
- 57. 카야마 신야 : 좌완 사이드암 선수로 주로 원 포인트 위주로 나온다. 다만 원래는 평범한 스리쿼터였고 2017년부터 사이드암으로 전향. 전향 전에는 원 포인트론 잘 안 나오다가 전향 후에는 거의 원 포인트 위주로 나온다.
- 61. 오쿠무라 마사토
- 63. 카와하라 히로유키
- 66. 마츠모토 유키
- 67. 카사야 슌스케
12.1.4. 포수
12.1.5. 내야수
- 0. 다카타 도모키
- 00. 카와세 히카루
- 5. 마쓰다 노부히로
- 6. 이마미야 겐타
- 8. 아카시 켄지 :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 백업, 대타로 나오면 수비뿐만 아니라 타격력도 좋은데 주전으로만 나오면 타격력이 저하되거나[91] 부상을 입는 등[92] 주전경쟁에서 밀려서 백업이나 대타 위주로 주로 나오다가 빈 자리(주로 1루와 2루)가 생기면 임시적으로 주전 라인업에 드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참고로 최후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출신 선수 중 한 번도 이적하지 않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뛰어 오는 선수이다.[93]
- 22. 니시다 테츠로
- 23. 슈토 우쿄 : 주로 대주자로 나오는 대졸신인인데 대주자로 워낙 잘 뛰어서 프리미어 12에도 대주자 룰로 들어갔다(...) 2020년에는 주전으로 나와 타격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며, 구단 연속도루 기록도 갱신하는 등 팀의 주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 27. 주리스벨 그라시알 : 쿠바에서 파견된 용병. 원래는 3루수나 유격수 전용이었는데 자리가 없어서 현재는 주로 좌익수에서 뛰는 중. 2018년에는 보험용 용병이었기 때문에 시즌 후반기에 들어서야 올라오기 시작했으나 여기서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2019년에는 완전히 1군에 정착했다. 심지어 2019년 초반에는 알프레도 데스파이네보다 더 잘 치고 결국 일본시리즈 MVP까지 차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쿠바 국대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 33. 마스다 슈
- 36. 마키하라 타이세이 : 센가 코다이, 카이 타쿠야와 육성선수 동기. 앞의 두 명이 워낙 대성했기에 그렇지 이 정도만 돼도 육성선수로는 나름 성공한 거라 할 수 있다. 2019년 현재는 2루수 주전 자리를 놓고 1군에서 경쟁중이며 외야도 볼 줄 안다. 또한 가을야구만 되면 미치는 스타일이라서 마키하라를 2루 주전에서 빼야 하나 싶다가도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으로 계속 2루 주전으로 나오고 있다.[94] 진지하게 마키하라의 평소 실력을 말하자면 아카시 켄지보다는 낫지만 역시 주전보장을 하면 OPS 6할대에 타율 2할 초반으로 말아먹는 스타일. 일단 가장 큰 문제가 발이 빨라서 주로 테이블세터 역할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초구부터 노피어스윙으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타격기술이 이치로 아니 우치카와급만 돼도 초구부터 노피어스윙이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기술이 받쳐주지 못하니 결과는 끔찍한 출루율로 돌아오는 것. 실제 2019년 시즌 12개구단 주전 1번타자 중에서 유일하게 2할대 출루율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 52. 리처드 스나가와: 등록명 리처드. 오키나와 출신으로 아버지가 미국인인 혼혈이다. 2017년 육성선수로 입단하여 2019년 3군에서 중심타선으로 활약한 끝에 3년만에 정식선수로 승격했다. 혼혈답게 189cm에 112kg의 거구로 팀에서는 파워히터 후보로서 기대가 높다. 야마카와 호타카가 파워 하나는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할 정도. 형제가 모두 야구선수로 친형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고 현재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다.
- 55. 노무라 다이쥬
- 68. 미모리 마사키
- 69. 고바야시 주이
- 99. 가와시마 게이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거친 베테랑 유틸리티 내야수. 2010년대 내내 유난히 2루수 자원이 혼다, 아카시, 마키하라 등 좌타자 일색이었던 호크스에서 우타 플래툰 요원으로 가늘고 길게 활약해왔다. 등번호 4번을 달아왔으나 옛 친정팀 야쿠르트에서 건너온 거물 발렌틴 때문에 2020년부터 99번을 단다.
12.1.6. 외야수
- 4. 블라디미르 발렌틴
- 7. 나카무라 아키라: 2014년 퍼시픽리그 최다안타왕. 2014년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 오승환에게 끝내기 스리런 홈런을 친 선수
- 9. 야나기타 유키
- 24. 하세가와 유야
- 30. 사토 나오키
- 32. 야나기마치 다쓰루
- 51. 우에바야시 세이지
- 54.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 59. 미즈타니 슌
- 60. 카마모토 고
- 64. 마사고 유스케
12.2. OB[95]
12.2.1. 투수
난카이 초창기를 대표하는 투수로, 1년차인 1942년을 빼면 매 시즌 300이닝 이상을 소화하고 1947년 시즌에는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기록인 47완투(55경기 50선발, 448.1이닝)을 소화하며 30승을 기록한 팀의 대들보격 투수였다. 하지만 벳쇼 빼내기 사건으로 알려진 이적 소동을 일으키며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고 이를 둘러싼 분쟁은 일본프로야구가 현재의 양대리그 체제로 변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요미우리에 이적한 뒤로는 벳쇼 다케히코로 개명하고 요미우리에서도 대투수로 활약한다.
- 미나가와 무츠오 (1954 - 1971)
통산 221승을 거두며 호크스 프랜차이즈 최다승 기록을 보유한 언더핸드 투수. 임팩트는 후배 스기우라 타다시에 밀리기도 했지만, 스기우라보다 훨씬 꾸준하고 긴 선수생명을 보여주며 장기간 난카이의 선발진을 떠받쳤다. 1968년에는 언더핸드 투수로서는 사상 최초로 통산 200승을 기록했으며 이는 야마다 히사시 등장 이전까지 언더핸드 투수 사상 최다승 기록이었다. 같은 해 기록한 31승은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후의 단일시즌 30승 기록이기도 하다.
- 김영덕 (1956 - 1963)
통산 7승 9패 방어율 3.57을 기록했다. 은퇴 후 스카우터로 일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실업야구에서 활약하고 지도자 생활도 이어갔다.
- 스기우라 타다시 (1958 - 1970)
이나오 카즈히사와 더불어 단 둘만이 갖고 있는 일본시리즈 내리 4승을 혼자서 독식한 투수이자 1959년 첫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잠수함 투수 중 하나로 꼽힌다
- 조 스탠카 (1960 - 1965)
- 에모토 타케노리 (1972 - 1975)
난카이에서 유명해졌지만[97] 밑에 나오는 에나츠 유타카와의 맞트레이드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 선수생활은 한신 시절이 훨씬 길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한신 OB로 간주되고 있다. 1973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98]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플레이오프[99] 5차전(10월 24일)에서 9회초 2점으로 앞서갔다가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대타 도긴 히데타카의 홈런으로 한큐에서 1점을 내준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출진해 한큐에서 승부수로 내보낸 대타 타카이 야스히로를[100] 헛스윙 삼진으로 아웃시켜 난카이 호크스의 마지막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101]
- 장명부 (1973 - 1976)
아래의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난카이의 3루수이던 토미타 마사루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노무라 카츠야 감독 하에서 선발 요원으로 성장했지만 1976년 시즌 종료 후 아래의 김기태(재일교포)와 맞트레이드되어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한다.
- 야마우치 신이치 (1973 - 1983)
밑에 있는 야마우치 카즈히로, 야마우치 다카노리와 더불어 동일한 시기에 난카이에서 뛰었는데, 심지어 등번호도 위에서부터 18-19-20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이 셋 모두 당시 난카이의 주축 선발로 뛰었다.
- 에나츠 유타카 (1976 - 1977)
난카이에서 노무라 카츠야의 권유로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여 통산 201승 193세이브를 올린다. 소속한 팀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우승청부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 김기태(재일교포) (1977 - 1984)
일본명 가네시로 모토야스. 장명부와의 맞트레이드로 난카이에 이적했다. 에나츠와 비슷한 테크로 선발투수에서 구원투수로 전향했다.
- 요시다 토요히코 (1988 - 1998)
난카이 시절을 겪은 투수 중 가장 늦게 은퇴한 선수. 입단 후 몇 년간은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나 기량 저하로 중간계투로 전향한 뒤에는 한신-긴테쓰-라쿠텐을 거치며 저니맨 좌완 중간계투로 가늘고 긴 커리어를 보냈다. 라쿠텐 시절이던 2007년 6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서 입단 동기인 오미치 노리요시와 난카이 출신자로서는 마지막 대결을 펼쳤다.
- 요시다 슈지 (1994 - 2006)
- 쿠도 키미야스 (1995 - 1999)
- 후지이 마사오 (1995 - 2000)
- 호세 누네스 (1996 - 1997)
- 사이토 가즈미 (1996 - 2010)
- 시노하라 타카유키 (1997 - 2008)
후지이, 요시다 슈지, 페드라자와 함께 철벽 계투진을 이루며 1999년 호크스의 26년만의 우승에 공헌한 좌완 중간계투. 이 해 중간계투로만 60경기에 등판해 구원승으로만 14승을 거두는 활약을 했다.[103] 이후에는 이와 같은 수준의 활약을 보이지는 못해도 수 년간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 중간계투진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 로드니 페드라자 (1999 - 2002)
- 맷 랜들 (1999 - 2000)
- 스기우치 토시야 (2002 - 2011)
- 데라하라 하야토 (2002 - 2006, 2013 - 2018)
- 아라카키 나기사 (2003 - 2014)
- 브랜든 나이트 (2003 - 2004)
- 마하라 다카히로 (2004 - 2012)
2005년부터 7년동안 180세이브를 올린 프랜차이즈 스타 마무리 투수였지만, 부상으로 2012년 한해를 공치고 난 뒤 FA로 호크스에 복귀한 데라하라 하야토의 보상선수로 오릭스 버팔로즈가 지명하는 바람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오릭스로 이적하게 되었다.[104] 결국 자신을 버린 소프트뱅크의 처사에 마음이 상했는지 2014년 시즌 후에 FA 자격을 취득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 오릭스에 남았지만, 2015년 시즌 부상이 도져서 결국은 시즌 끝나고 은퇴했다.
- 양야오쉰 (2006 - 2013)
- 모리후쿠 마사히코 (2007 - 2016)
팀을 묵묵히 지탱했던 왼손 중간계투. 좌완이면서 사이드암 스로에 가까운 투구를 하며 주로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했다. 2011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대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2대1 리드 상황, 무사 만루)에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아낸 '모리후쿠의 11구'가 유명하다. 2016년 시즌 후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
- 오토나리 켄지 (2007 - 2017)
- 크리스 니코스키 (2007 - 2008)
- 릭 구톰슨 (2007 - 2008)
- 제이슨 스탠드리지 (2007 - 2008, 2014 - 2015)
- D.J. 홀튼 (2008 - 2011)
입단 후 첫 2년간은 셋업맨으로서 두 시즌 모두 70경기 넘게 등판했고, 선발로 전향한 뒤에는 2011년~2015년 5년 연속 두 자리수 승수를 달성한 우완투수. 당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싱커볼러이기도 하다. 2012년에는 다승왕 타이틀과 사와무라상을 차지했다. 다만 늦은 나이에 사회인야구를 통해 데뷔하고 선발로건 구원으로건 많은 이닝을 먹어준 워크호스라 점차 기량이 저하했고, 2016년부터는 보다 젊은 선발투수들에 밀려 스팟 선발 정도로 위상이 떨어졌다.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팀이 2018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다음날 방출되었고 끝내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해설가로 활동중.
12.2.2. 포수
- 노무라 카츠야 (1954 - 1977)
현역 시절에는 난카이의 감독-4번 타자-포수로 팀을 이끌었지만 구단과의 불화로 선수생활 말년에는 이팀 저팀 떠돌아다녀야 했다. 선수로서나 감독으로서나 레전드. 일본프로야구 통산 안타, 홈런, 타점 2위.
- 카가와 노부유키 (1980 - 1989)
나미쇼 고등학교(현 오사카체대 부속 나미쇼교교) 시절 동료인 우시지마 가즈히코와[105] 함께 배터리를 이루어서 팀을 코시엔 준우승으로 이끈 스타 출신 선수. 고교시절부터 육중한 체형으로 유명했으며 비슷한 체형의 미즈시마 신지의 만화이자 그 만화 주인공인 야마다 타로의 별명을 딴 "도카벤"이라는 별명으로 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난카이 호크스 입단 후엔 자기관리를 못해 고도비만이 되면서 저조한 성적을 기록. 결국 1989년 후쿠오카로 이전한 첫 시즌 후에 전력외통보를 받으며 초라하게 은퇴했다. 그 후에도 고도비만을 주체하지 못한 끝에 결국 2014년 심근경색으로 사망.
- 요시나가 코이치로 (1988 - 2000)
후쿠오카 돔 이전 초기 고쿠보도, 조지마도, 마쓰나카도 없던 시기를 대표했던 왼손 슬러거 포수. 일본에서는 독보적인 사이즈로 여겨지던 후쿠오카 돔에서도 장타를 양산하는 것으로 이름높았다. 1997년에는 3-4-5 비율스탯에 29홈런을 치기도 했는데, 홈런을 친 한 경기가 노 게임 선언으로 무효가 되버리는 바람에 3할-30홈런에 안타깝게 이르지 못한 에피소드가 있다. 아래의 조지마가 성장한 이후로는 수비력의 문제를 지적받으며 1루수, 지명타자 등으로 주로 뛰었지만, 아무튼 중심타자진의 일원으로서 1999년 호크스의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2년뒤 아베 신노스케를 받쳐줄 백업포수를 구하고 있던 요미우리로 옮기고 2003년 시즌 도중 은퇴해버렸다.
세이부 라이온즈로부터 FA이적한 후 일본시리즈 3회 우승에 공헌을 한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비형 포수. 2016년 시즌 구단의 은퇴권고에 자유계약선수의 길을 선택한 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
12.2.3. 내야수
- 츠루오카 카즈토 (1939, 1946 - 1952, 감독재직 1946 - 1968)
과거 난카이 시절 23년 간 팀을 이끌던 명장. 선수 생활도 난카이에서만 한 진정한 호크스맨.
- 이이다 토쿠지 (1947 - 1956)
키누가사 사치오 이전 일본프로야구 연속경기 출장 기록(1246경기)을 갖고 있던 1루수로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경기인 156경기(1956)를 출장한 선수이기도 하다. 타점왕 2회를 차지한 좋은 타격을 갖춘 1루수였지만, 통산 390도루에 고쿠테츠 이적 1년차에는 40도루로 도루왕도 한 번 차지한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력도 갖고 있던 다재다능한 선수. 말년은 고쿠테츠 스왈로즈에서 보냈고 1966년에는 스왈로즈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의 프로야구 감독이 되기도 했다. 2년간 5위만 찍고 고쿠테츠 감독에서 해임된 뒤 1968년 난카이의 감독을 맡기도 했지만 최하위만 한 번 기록하고 바로 해임.
- 키즈카 타다스케 (1948 - 1956)
'바보 어깨'라 불릴 정도로 강한 어깨와 일본프로야구 역대 4위의 통산 도루(479도루)를 기록한 빠른 발로 뛰어난 수비력을 보여준 유격수. 1949-52년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다.
- 카게야마 카즈오 (1950 - 1959)
위의 1루수 이이다, 유격수 키즈카와 함께 '백만 달러의 내야진'을 구성한 3루수. 선수로서건 지도자로서건 츠루오카의 후계자로 기대받았으나, 1965년 시즌 종료 후 츠루오카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부임한지 4일만에 급성 부신피질기능부전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최후를 맞았다.
난카이 시절 말기부터 재적한 팀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였으나 난카이 말기 다이에 초기의 막장분위기를 상징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체구도 좋고 타격에 소질이 있어 중심타선을 맡을 정도로 기대가 컸음도 불구하고 매년 어정쩡한 성적에 그쳐 그 시절의 나태한 팀 분위기를 대표하는 선수로 낙인찍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세이부에서 트레이드 되온 직후의 아키야마 코지가 중심선수인 후지모토가 경기 시작 직전까지 클럽하우스에서 다른 선수와 쇼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보고 "팀이 이기려는 의지가 없다"는 분위기에 충격을 받고 절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 후 아키야마가 그 후에 들어오는 선수들의 리더 역할을 자처하며 팀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나선 계기가 됐다고 한다. 결국 선수생활 마지막 해에는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트레이드 돼서 선수생활을 마쳤다. 하지만 워낙 막장분위기가 길었던 팀에 소속되면서 현역시절 승부욕이 부족했고 연습을 게을리 한 것만 빼면 타격기술이나 야구센스도 괜찮았고 인간적으로는 호인이라 그러한 점을 팀에서 높게 평가한 모양. 은퇴 후에도 후쿠오카 지역 방송국의 방송해설을 거쳐 타격코치로 호크스와의 인연을 계속하고 있다.
- 모리와키 히로시 (1987 - 1996)
- 토니 버나자드 (1988 - 1990)
- 하마나 치히로 (1992 - 2001)
- 고쿠보 히로키 (1994 - 2003, 2007 - 2012)
통산 2,000안타, 400홈런를 돌파했고 요미우리로 트레이드 되었던 3년 동안을 제외하면 줄곧 호크스와 함께 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 마쓰나카 노부히코 (1997 - 2015)
다이에 시절부터 팀을 대표했던 프랜차이즈 거포 타자로 2004년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적이 있다. 2015 시즌이 끝나고 팀을 나왔지만 오퍼를 전혀 받지못해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NPB 최초이자 유일한 3년 연속 시즌 120타점을 달성했다.
- 이구치 타다히토 (1997 - 2004)
- 가와사키 무네노리 (2000 - 2011, 2017)
- 훌리오 줄레타 (2003 - 2006)
- 토니 바티스타 (2005)
- 혼다 유이치 (2006 - 2018)
프로입단 전에는 유틸리티였지만 프로 입단 후에는 사실상 전업 2루수로 자리잡았다. 통산 342도루에서 볼 수 있듯이 주루능력 하나는 리그 탑급이었던 선수였다.
- 로베르토 페타지니 (2010)
- 이범호 (2010)
- 알렉스 카브레라 (2011 - 2012)
- 윌리 모 페냐 (2012 - 2013)
- 이대호 (2014 - 2015)
- 카일 젠슨 (2017)
- 우치카와 세이이치 (2010~2020)
12.2.4. 외야수
- 히로세 요시노리 (1955 - 1977)
한큐 브레이브스의 '세계의 도루왕' 후쿠모토 유타카의 뒤로 일본프로야구 통산 도루 2위(596도루)를 기록한 리드오프. 사실 선수생활은 이쪽이 먼저였고, 일본시리즈 우승 등의 영광도 여러 차례 차지한데다 후쿠모토의 롤모델도 이쪽이었지만 왠지 인지도가 떨어져서인지(...) '음지의 도루왕'이라는 비운의 별명이 이후에 붙여졌다. 심지어 후쿠모토의 통산 도루기록 갱신도 히로세가 현역에서 은퇴하기도 전에 이루어졌을 정도... 이쪽도 츠루오카 카즈토처럼 선수, 코치, 감독 생활을 모두 호크스에서 보냈다. 그러나 선수 은퇴 후 바로 오른[106] 감독으로서는 재임기간(1978~1980) 동안 5위 이하만 찍으며 호크스의 20년 비밀번호 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했다.[107]
- 오사와 케이지 (1956 - 1964)
- 카도타 히로미츠 (1970 - 1988, 1991 - 1992)
- 아라이 히로마사 (1975 - 1985)
재일교포로 한국명 박종률. 호크스의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중반까지 리드오프를 맡았던 선수다. 빠른 발에 통산 2,000 안타를 기록할 만큼 컨택트 능력이 좋았다. 현재 일본프로야구에서는 최고의 타격코치로 손꼽힌다. 훗날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타격코치로 재직했을 때 스즈키 이치로를 지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쿠보데라 유지 (1977 - 1984)
- 고원부 (1981 - 1985)
이후 빙그레 이글스에서 한국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재일교포 타격왕이 된 선수.
- 야마모토 카즈노리 (1983 - 1995)
일명 카즈 야마모토.[108] 사사키 마코토와 더불어 80년대 중반 ~ 90년대 초반의 호크스 타선을 대표하던 강타자로, 번트를 대지 않는 2번타자[109] 로 유명했다. 2번의 방출과[110] 난청을 딛고 스타로 거듭난 근성의 사나이로, 1994년에는 37세의 나이로 시즌 중반까지 이 해 일본 최초의 200안타를 달성하며 화제를 일으킨 스즈키 이치로와 수위타자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111]
- 사사키 마코토 (1984 - 1993)
1980년대 중반~90년대 초반,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 당시 에이스였던 무라타 가쓰요시와 더불어 아키야마 코지, 와타나베 도미오 등이 엮인 2대3 트레이드로 세이부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른바 세기의 트레이드의 주인공.
- 오미치 노리요시 (1988 - 2006)
난카이 호크스의 유니폼을 입은 경험이 있는 최후의 현역 선수. 아울러 팀이 다이에의 팀 인수로부터 소프트뱅크로의 매각 때까지 15년간 뛴 호크스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은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했다. 극단적으로 배트를 짧게 잡는 타격폼으로도 유명했다.
1993년 시즌 후 위의 사사키 마코토가 포함된 이른바 세기의 트레이드로 세이부에서 다이에로 이적. 그 후 9시즌 동안 뛰면서 리그 우승 2회, 일본시리즈 우승 1회에 공헌했고, 2009 ~ 2014년까지 소프트뱅크 감독으로 리그 우승 3회, 일본시리즈 우승 2회를 달성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케빈 미첼 (1995)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왕, 타점왕, MVP를 수상한 경력이 있는 거물급 용병. 일본으로 오기 직전 해에도 타율 .326, 30홈런을 기록했었다. 그러나 지랄맞은 성질 때문에 어떤 팀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의 여파로 94년 시즌이 중단되고 95년 시즌도 개막이 불투명해지자 다이에 호크스와 계약했다. 개막전의 일본 무대 데뷔 첫 타석에서 만루홈런을 날리면서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무릎부상을 치료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수뇌부와 갈등을 겪으며 태업설이 돌기도 했고 결국 8월에 무단으로 귀국하자 다이에에서 바로 잘라버린다. 일본에서의 성적은 37경기 출전 타율 .300, 8홈런, 28타점. 마이크 그린웰보다는 임팩트가 덜하지만 일본야구 용병 사상 최악의 먹튀 중의 하나로 당시 다이에 호크스의 무모한 돈지랄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였다. 일본으로 온 것이 기량의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파업 사태가 일단락된 뒤 메이저리그에 복귀했고, 99년까지 메이저리거로 뛰었다.
놀랍게도 상술한 케빈 미첼의 동생.(...) 이쪽은 구단이랑 다투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 조용히 1할대의 타율을 찍고 1년만에 퇴출되었다. 그래도 거액의 계약으로 데려온 형과 달리 독립리그에서 데려왔기 때문에 연봉이 1500만엔으로 저렴하기는 했고, 공갈포긴 했어도 10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요코하마에서 고졸 4년차에 26홈런을 기록한 것을 시작해 4년간 중심타선을 책임지며[112] 시즌 30홈런까지 기록했던 거포 유망주. 그러나 공갈포 성향이 강했고[113] , 공인구 교체의 직격탄까지 맞으면서 20대 중후반에 이미 한물 간 퇴물취급을 받으며 소프트뱅크로 트레이드됐다. 소프트뱅크에서도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2018년을 끝으로 방출. 2019년에는 네덜란드 프로야구에 진출했다가 2020년 류큐 블루오션[114] 에 입단해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12.3. 준영구결번
- 15. 후지이 마사오
1999 시즌 '불꽃의 계투'라는 별칭으로 불리면서 오래간만에 호크스가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는데 공헌한 투수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0년 10월에 요절하게 되는데, 이후 그가 사용하던 15번을 단 선수가 없어 사실상 결번처리를 했다.
- 89. 오 사다하루
호크스를 강팀으로 도약시킨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감독 시절의 번호가 결번 처리되었다.
이하는 한때 준영구결번이었거나, 결번 언급이 있었던 번호들.
- 1. 아키야마 코지
역대급 선수이다보니 호크스 구단에서 당연히 아키야마의 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겠다고 했지만 본인이 고사하고 아키야마가 은퇴한 그 다음 시즌인 2004 시즌에 시바하라 히로시(柴原洋)가 아키야마에게 허락을 받아 1번을 쓰고 시바하라가 은퇴한 후에는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그 번호를 물려받았다.
- 9. 고쿠보 히로키
1990년대 말~2010년대에 호크스의 전성기를 이끈 3루수. 2013년부터는 일본야구 대표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무상 트레이드로 잠시 호크스를 떠났던 2004~2006 시즌에 결번으로 처리했는데 후에 고쿠보가 호크스로 복귀하면 다시 이 번호를 쓰기로 약속했다. 결국 2012 시즌이 끝나고 고쿠보가 은퇴하면서 2013년부터 9번을 영구결번 한다고 한다. 그런데 2015 시즌부터 야나기타 유키가 이 번호를 물려받는다고 한다. 9번도 1번과 같이 팀내 주축 선수에게 물려주는 영광의 번호로 취급할 모양.
- 90. 카게우라 야스타케
실존 선수가 아니라 만화 캐릭터에게 영구결번을 준 특이한 케이스. 미즈시마 신지(水島新司)의 야구만화 '아부상(あぶさん)'의 주인공으로, 이 만화가 연재된 1973년부터 2016년까지 영구결번으로 지정돼 있었다. 만화 연재가 끝나고, 작가의 허락하에 로베르토 수아레스가 번호를 사용하며 결번이 해제되었다. 수아레스가 이적한 후는 코치로 부임한 고쿠보 히로키가 번호를 달았다.
12.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사상 최초의 아시아출신 메이저리거이다. 난카이 호크스 입단후 꽤 촉망받는 신인이었으며, 그 자질을 높게 평가해서 1년차 시즌인 1963년 시즌 후에 미국 야구 배워오라고 샌프란시스코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 야구 유학을 보냈는데 거기서 꽤 쓸만한 활약을 해서 자이언츠 구단이 메이저리그로 콜업을 해버렸다(...) 중간 계투로 2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통산 6승 1패, 방어율 3.43의 성적을 남겼다. 여기에 고무된 자이언츠 구단은 무라카미를 더 데리고 있고 싶었으나 문제는 여전히 난카이 호크스와 계약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 심지어는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있던 시절에도 여전히 일본에서는 난카이 소속 선수로 등록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중계약(...) 여차하면 난카이 구단과 자이언츠 구단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으나 애초에 난카이 구단이 무라카미를 보낸 것도 자기 팀 소속 선수로서 야구유학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고, 마이너리그에서의 활약에 고무된 자이언츠 구단이 멋대로 메이저리그까지 콜업을 해버린 것이다. 양 쪽이 서로의 제도에 대해서 무지하고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던 1960년대니까 일어날 수 있었던 일. 결국 원 소속구단인 난카이 구단의 무라카미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되었고 난카이 구단은 돈들여서 야구유학 보낸 유망주를 써먹지도 못할까봐 부랴부랴 무라카미를 귀국시켰고, 이렇게 사상 최초의 아시아출신 메이저리거는 불과 2년만에 짧은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마감해야 했다. 일본에서는 18년간 3개구단에서 뛰면서 통산 103승 82패 30세이브, 방어율 3.64의 성적을 올렸다.
- 죠지마 켄지 (시애틀 매리너스→일본복귀후 한신 타이거즈)
- 이구치 타다히토 (시카고 화이트삭스→필라델피아 필리스→샌디에이고 파드리스→필라델피아 필리스→일본 복귀 후 치바 롯데 마린즈)
- 와다 츠요시 (볼티모어 오리올스[115] →시카고 컵스→복귀)
- 가와사키 무네노리 (시애틀 매리너스→토론토 블루제이스→시카고 컵스)
- 이대호 (시애틀 매리너스→한국복귀 후 롯데 자이언츠)
13. 둘러보기
[1] 현지 명칭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이다.[2] 차륜(車輪)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난카이가 철도회사이니 당연히 나올 이름. 하지만 1년 6개월 밖에 쓰지 못한 이유는 그 당시 영어 속어로 '''여성의 성기'''를 지칭했다고 하니... [3] 전후기리그제 성적도 포함.[4] 괄호 안은 재적연도[5] 2019년까지 15회의 교류전 중 8회 우승으로 2위인 요미우리, 치바롯데의 2회 우승과 차이가 크다[6] 2019년까지 통산 0.629 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6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는 팀은 호크스가 유일,[7] 2019년 NPB 평균관중 순위 1위 한신 타이거즈 42,935 / 2위 요미우리 자이언츠 42,643명 / 3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36,891명[8] 2023년에 에스콘 필드 홋카이도가 완공되면 유일한 개폐식 돔구장은 아니게 된다.[9] 노무라 카츠야는 1970년부터 1977년까지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 포수, 4번타자라는 3가지 중책을 맡으면서 팀을 이끌었다. 1973년에는 난카이에게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시즌 2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아내 노무라 사치요의 막장행각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난카이 선수들 가운데 노무라의 감독 해임에 반대하고 있던 가시와바라 준이치와 에나츠 유타카는 각각 닛폰햄 파이터즈,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했고 코치 다카바타케 미치히로도 난카이를 퇴단하여 노무라와 함께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10] 참고로 구단 사상 B클래스 성적을 맞은 적이 32번인데 '''이 중 20번이나 차지하는 게 바로 이 기간이다!'''[11] 화차(소설)에 이런 기묘한 상황이 등장 하기도한다.[12] 홈구장으로 쓰던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보수공사 중 옛 고료칸 유적지가 발견된 탓도 있었다. 결국 헤이와다이 구장은 호크스가 후쿠오카 돔으로 홈구장을 옮긴 후 고교야구나 사회인야구 예선전 등에 쓰이다가 호크스의 20년 비밀번호(…) 마지막 해인 1997년을 끝으로 철거. 현재는 그 자리에 역사공원이 조성되어 있다.[13] 훼일즈가 요코하마로 이전해도 베이스타즈 시대 전까지 응원가는 그대로였고, 더 최근으로 보면 파이터즈가 도쿄에서 홋카이도로 갈 때도 응원가를 새로 편곡한 버전을 쓰게 되긴 했지만 응원가를 뒤엎지 않았다. 다만 훼일즈의 경우는 응원가였던 '''가자 다이요(行くぞ大洋)'''가 요코하마 연고이전 '''전해인 1977년'''에 작곡한지라 1년만에 응원가를 갈아엎기 그랬다는(...) 점도 있다. 그리고 해당 노래엔 연고지 내용은 일체 나오지도 않아서 굳이 갈 필요도 없었다.[14] 그러나 이 때 새로 나온 구단가인 '''다이아몬드의 매(ダイヤモンドの鷹)'''는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군가, 행진곡 풍 위주의 곡이 다수인 NPB 대다수의 구단가와 다른, 록 스타일의 곡이었기 때문.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수단(!)''' 쪽에서도 불만이 나올 정도였으니.. 거기다 팬들의 일반 공모 형식으로 나온 응원가 '''나아가라 보라매 군단(いざゆけ若鷹軍団)'''이 훨씬 더 인기를 끌어서 1999년 리그 및 일본 시리즈 우승 때가 되면 아예 다이아몬드의 매가 틀어진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할 정도로 위상이 추락. 결국 소프트뱅크가 인수하면서 다이아몬드의 매는 공식 구단가에서 완전히 퇴출되었다. 그후 위의 보라매 군단 노래는 가사를 일부 바꾼 편곡 버전으로 현재도 쓰이고 있다.[15] 일본시리즈에선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했다.[16] 이전에는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세이부를 강팀으로 육성한 바가 있었다.[17] 참고로 같은 기간 동안 A클래스를 딱 2번 기록한 오릭스 버팔로스의 2000년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A클래스가 이 해이다.[18] 이것 때문에 오 사다하루는 그 해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너무 많은 연세 탓과 무엇보다 2006년도에 위암 수술을 했던 점도 있었지만.[19] 우승 확정 후 자막을 자세히 보자.[20] 그러나 정작 호크스를 강팀으로 만들어준 네모토 리쿠오는 그해 4월 급작스럽게 사망하여 이 우승을 보지 못했다.[21]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 사다하루가 일본시리즈에서 만나 "ON 시리즈"라 부를만큼 드림매치였다. 결과는 나가시마의 요미우리가 4승 2패로 우승했다.[22] 1~2차전에서 우승을 거뒀지만 이후 3연패를 당하며 역스윕을 당할 뻔했다. 그러나 6~7차전에서 겨우 우승을 하여 일본시리즈를 우승했다. 여담이지만 2009년 한국시리즈처럼 1~7차전 전부 홈팀이 우승한 경기였다.[23] 후쿠오카의 신칸센 정차역인 하카타역과 오사카의 신칸센 정차약인 신오사카역을 잇는 신칸센의 노선명이 산요 신칸센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메이저리그의 '서브웨이 시리즈'에 빗댄 것.[24] 죠지마 켄지, 마츠나카 노부히코, 이구치 타다히토, 페드로 발데스[25]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주포로 활약하여 2006년까지 팀 타선을 이끌었다(2004년 .284 37홈런 100타점, 2005년 .319 43홈런 99타점, 2006년 .281 29홈런 91타점)[26] 다이에의 매각과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해체 때문에 NPB 일각에서는 10개 구단으로 프로야구를 재편하고 단일리그제로 환원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2004년 선수회와 팬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대운동이 있었다. 후루타 아츠야, 이와쿠마 히사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오릭스 버팔로즈 등 항목 참조.[27] 수정 전 클라이맥스 시리즈라고 되어있었으나 클라이맥스 시리즈는 2007년 센트럴리그에서 이 플레이오프제를 도입하면서 양측에서 바꾼 이름이다. 이전엔 퍼시픽리그에서만 단독으로 플레이오프를 도입했다.[28] 그 후 클라이맥스 시리즈로 개편되며 사라졌다가 센트럴 리그 리그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제 2 스테이지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패해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부활하였다. [29] 당시 사이토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등에게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받는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하나였지만, 고질적인 유리몸으로 인해 6일 로테이션을 엄수하고 있었다.[30] 이 결승점 득점 과정은 만화 다이아몬드 에이스 22권의 도쿄 지역예선 결승전 9회말에 그대로 오마쥬된다. 그리고 이 장면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곡이 Second Heaven이다.[31] 사이토 가즈미는 이후 어깨부상이 악화, 2007년에 6승을 올린 후 5년간의 재활끝에 은퇴하고 만다. 현재는 소프트뱅크 코치로 재직중.[32] 근데 홈런왕인 세이부의 나카무라 타케야가 무려 48홈런이나 쳐내며 23개의 차이가 난다[33] 삼성 라이온즈 연고지는 소뱅 구단주의 본적지인 대구광역시이고 400승 투수였던 김경홍의 본적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기톱 돌아가듯이 혐한들의 먹잇감이 되었다.[34] 그 대회에서 도호쿠를 꺾은 상대는 2년 전 후쿠오카에게 패한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스다. 심지어 11우승팀인 삼성도 결승진출 실패했다. 그바람에 호시노VS이승엽 리턴매치 무산은 덤이다. [35] 다음해 연봉 450만달러의 옵션도 있다.[36] 개막전 1패 후 본인이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면서 매니 아이바, 브라이언 배니스터에 이은 초먹튀 인증.[37] 전년도 일본시리즈에서 '''노아웃 만루를 무실점으로 막는''' 큰 활약을 보였다. 1,2차전 홈경기를 패배한 후 분위기를 다시 호크스쪽으로 끌어오는데 결정적인 활약이었다.[38] 스탠드릿지의 퇴단으로 빈 한신의 외국인 투수 슬롯에 오승환이 들어갔다.[39] 2016년을 제외하고 전부 우승. 참고로 이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 횟수는 11번이다. 즉, 이 시기에 우승 횟수의 절반 이상을 이루었다.[40] 타율 .368(리그 1위) 출루율 .459(리그 1위) 장타율 .610(리그 2위) 홈런 13(리그 5위) OPS 1.069(리그 1위) WAR 4.1(리그 1위) - 6월 10일 시점[41] 이 중 스탠릿지는 10승을 찍는 등 준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없어서 결국 시즌 종료 후 치바 롯데 마린즈로 갔다.[42] '''승차가 18.5 게임차다!''' 같은 해 KBO 리그의 1위 삼성 라이온즈와 5위 SK 와이번스의 승차가 18게임차 인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다. 그러나 3년후 KBO 리그에서 두산 베어스가 2위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18.5 게임차 압도적 1위를 달성한 바 있다. 그런데 소프트뱅크와 달리 두산은 스스로 무너져버렸다.[43] 2010년 퍼시픽 리그 3위였던 롯데가 일본시리즈를 재패한 일명 '''위대한 하극상''' 때의 퍼시픽 리그 우승팀이 소프트뱅크이다.[44] 2016년에도 우승했으면 요미우리 자이언츠, 세이부 라이온즈, 한큐 브레이브스 이외엔 일본의 어느 프로야구 구단도 해본적이 없는 '''4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다.[45] 여담이지만 난카이는 시즌 '''96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니시테쓰에게 반 게임차로 우승을 내줬다…. [46] 정작 경기 자체는 로테이션에 들어가는 다케다, 와다, 센가, 히가시하마 등을 여전히 선발로 투입하고 불펜에서도 필승조인 이와사키를 투입하는 등 설렁설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47] 사실 이것도 천운이 따랐는데 5-3 병살타 과정에서 송구 미스로 인해 이닝 교체 상황이 2사 주자 1,2루로 바뀌었고 후속 타자 가와시마의 우전 안타때 전진 시프트로 인해 나카무라 아키라가 이미 3루를 돌때 이미 공은 홈플레이트에 먼저 도착해 있던 상황이었으나 우익수 카지타니 타카유키의 송구가 약간 부정확 했고 무엇보다 미네이가 홈플레이트 뒤에 있었기 때문에 바운드가 된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튀어올라 뒤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에 나카무라 아키라가 운 좋게 홈에들어와서 우승 한것이다. 게다가 12회초에는 요코하마가 최상위 타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소프트뱅크는 6차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48] 이게 차라리 나은게 소프트뱅크의 대 라쿠텐전 전적이 13승 12패로 근소하긴 하지만 어쨌든 우위에 있다. 8승 17패로 만날때마다 고전했던 지바 롯데가 클라이맥스 상대가 되었으면 심리적인 압박감이 더 상당했을지도 모른다.[49] 어차피 카터는 20살짜리 꼬꼬마 루키고 저 나이에 미국이면 잘해야 A+, 초특급이라도 AA라서 AAA수준 리그인 일본 1군에서 즉전급 활약을 기대하고 영입한 게 아니다. 신경 안 쓰는 게 당연.[50] 그래서 데스파이네, 그라시알 등은 매년 시즌이 끝나면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하고 쿠바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서 재계약하는 식으로 계약을 반복해왔다.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하면 자유계약 신분이라 그 사이에 타 구단이 쿠바정부하고 협의하면 팀 이적이 가능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장기간 호크스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호크스가 쿠바선수들에게 들이는 공이 상당하다는 간접적인 증거이다.[51] 순서대로 오 사다하루, 체커즈 멤버 출신 가수 후지이 후미야, 쿠로키 히토미, 하라구치 아키마사, 오즈키, 모리구치 히로코, 스모선수 코토쇼기쿠 카즈히로, 수신 선더 라이거, 하카타 하나마루&다이키치, 나카무라 아유미, HKT48, 아유카와 마코토, 바카리즘, 이시스.[52] 후쿠오카 '''현''' 자체를 봐야한다. 후쿠오카현은 일본 수도권, 케이한신, 나고야 다음으로 큰 경제권을 가진 후쿠오카 - 키타큐슈 도시권을 가지고 있으며, 인구수 5백만이 넘는 꽤 큰 현이다. 그리고 중심 도시가 하나만 있는 다른 현과는 달리 후쿠오카는 후쿠오카시로부터 불과 1시간 거리에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키타큐슈시와 도시권 지역이 있기 때문에 배경인구는 히로시마나 센다이보다는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후쿠오카 돔을 채우는 관중들 중에서 기타큐슈 시에서 관전하러 오는 관중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이 곳에 있는 키타큐슈 시민구장을 제2홈구장으로 쓰기 때문에 키타큐슈 시민들도 후쿠오카 '''현''' 소속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후쿠오카의 이름을 쓰는 팀 이름에 거부감이 없는 것도 팬 베이스 구축에 도움이 되고 있기도 하다.[53] 이쪽은 심지어 연고지인 '''도시 자체는 물론이고 현 자체의 인구를 뛰어넘는다!'''(히로시마 시의 인구가 약 120만명, 히로시마 현의 인구는 약 282만명)[54] 입장 수익의 일부를 원정팀에게 떼 줘야 하는 KBO 리그와는 달리 NPB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홈 앤드 어웨이 리그에서 입장권 수입은 홈팀이 전부 먹고, 원정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55] 그래서 무라카와 비비안 문서의 사진첩을 열어보면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진이 있다. 그래서 유니폼도 갖고 있으며 등번호는 48번을 새겼다. 개인방송 쇼룸에서도 관전 방송을 하기도 하고, 이번 2018 시즌에서 소프트뱅크가 좋은 성적을 거두자 크게 좋아하기도 했다.[56] 한화로 약 463억 원[57] 2015 시즌 교진군의 페이롤은 44억 4,930만 엔이다. 그러나 예산이 대부분 고액 FA 선수들에 대한 인건비, 도쿄돔 임대료 및 선수단 운영비로 들어가다 보니 2군, 3군 시설 및 유망주의 무덤이라 불리는 육성인프라는 영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58] 다만 페이롤이 꼭 구단의 부유함과 정비례하지는 않다. 오릭스 버팔로즈는 페이롤은 낮지만 호크스와 쿄진 다음으로 돈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저 두 구단과의 돈싸움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비싼 FA 선수들이 같은 연봉을 제시한다면 오릭스를 안 가서 고액 선수가 생각보다 드물다. 키워서 비싼 돈 주는 선수도 거의 없고.[59] 단 요미우리와는 성향이 다른 것이 소프트뱅크에서 돈 쏟아붓는 선수들은 대부분 직접 키워낸 후에 거액의 몸값을 안겨 주는 경우가 많다. FA를 아예 안 사는 건 아니지만 선수를 사서 쓰는것이 주류인 요미우리와는 다르게 일단 키워서 쓴다. 이전 버전에 요미우리의 파리그 버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소뱅 팬들은 그런 말 하면 엄청 화낸다. 용병의 경우도 검증이 돼야 돈을 많이 주지... 준수한 중간계투 용병 리반 모이넬로는 처음 입단할때는 KBO 리그에서 용병들이 일반적으로 받는 돈보다도 훨씬 적은 돈으로 계약했다.[60] 2014년 기준으로 교진군은 46M, 호크스는 40M을 기록했는데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21M(…), 마이애미 말린스는 35M을 기록했다. 뭐, 휴스턴의 경우에는 2008년에 KBO 리그 팀들보다 적은 15M을 쓴적도 있으니...[61] 다만 2015년에는 휴스턴과 마이애미가 투자를 해서 메이저리그 최저 페이롤 구단인 마이애미가 70M으로 일본프로야구 구단들과 큰 차이를 내고 있다.[62] 참고로, VR 타격연습 시스템을 도입한 구단으로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가 있다.[63] 반대로 똑같이 포스팅 시스템을 절대 허용하지 않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야마구치 슌(단, 이쪽은 FA 영입 당시 2년차 이후 포스팅을 허용한다는 조건이 있었다.)이나 스가노 도모유키의 포스팅을 허용하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64] 한국의 모해설자께서 복합엔터인먼트 시설로서의 돔 구장의 효용성을 누누이 강조하실 때 그 본보기가 되는 모델이라 할 수 있다.[65] 사실 일본 축구나 하다못해 돈 많이 번다는 독일 축구도 역시 세금 문제로 장기 임대 형식으로 많이 쓰며, 경기장을 매입한다는 건 구단이나 모기업이 말 그대로 상상초월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거나 가지고 있다는 뜻. 매입이 힘들다면 적어도 운영권을 얻어내기만 해도 상당히 더 벌 수 있다. 참고로 후쿠오카 돔을 다이에가 처음 지을때도 지자체 지원같은 거 없이 다이에가 100% 자비로 현금을 때려박아서 지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프로스포츠의 시장성이 높은 미국에서도 구장을 신축하는 것은 개별 구단이나 기업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워 거의 다 시 정부나 주 정부로부터 부지와 자금지원을 받아서 짓고 이 문제를 둘러싸고 증세 논란이나 연고지 이전까지도 갈 수 있는 수많은 알력다툼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꽤 대단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66] 정반대 케이스가 삿포로 돔. 이쪽은 핵심 클라이언트인 닛폰햄에 대한 삿포로돔 측의 부실한 대접(구장시설 관리, 임대수익 관련)으로 인해 구단과 삿포로돔 간에 허구헌날 디스전이 벌어져서 아예 신구장을 짓기로 했다.[67] 구단 신기록[68] 구단 신기록[69]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 [70] 전후기제인 경우 플레이오프 승리 시 통합승률 관계 없이 우승. 나머지 순위는 연간 승률 순.[71]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전기 1위와 후기 1위가 플레이오프 진출, 나머지는 페넌트레이스 1위만 일본시리즈 진출. 괄호 안은 상대팀.[72]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다승.[73] 초장기간 비밀번호 시작.[74] 2004 시즌은 플레이오프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음.[75] 2004년은 3위까지 플레이오프 진출, 나머지는 페넌트레이스 1위만 일본시리즈 진출. 괄호 안은 상대팀.[76] 일본판 2007년 한국시리즈, 당시 다이에는 적진인 도쿄 돔에서 2승을 거두고도, 4연패를 당해서 떨어졌다.[77] 2005, 2006 시즌은 플레이오프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음.[78] 2004년은 3위까지 플레이오프 진출, 나머지는 페넌트레이스 1위만 일본시리즈 진출. 괄호 안은 상대팀.[79] 진정한 올킬 + 2000년의 복수 + 같은 팀을 상대로 2번 스윕승을 모두 기록했다.[80] 4연속 우승 + 같은 팀 상대로 2연속 스윕승 + 같은 팀 상대로 3번 스윕승이란 기록을 얻었다. 특히 후자의 두 개는 전세계의 야구 리그 통틀어서도 최초다.[81] 소프트뱅크와 정반대의 구단운영으로 유명한 곳이 오릭스인데, 이쪽은 미야우치 요시히코 오너가 대놓고 감독, 선수단을 갈구고 경기 지면 화가 난다고 인터뷰하는 등 막장운영이 지속되고 있다.[82] 이 수치가 높을 수록 부상당하기 어렵다.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5거나 아예 철인이란 전용 특기가 있다.[83] 그나마 조금 주목받는 선수로 쿠바의 오타니로 불리는 오스카 콜라스가 있었다. 투타겸업을 하면서 3군에서 투수로 9경기 등판해서 ERA 1.54에 1승 0패, 타자로 45경기 출장해서 타율 .231에 4홈런 17타점을 기록했다. 그러고는 2019년 시즌 끝나고 집에 간다고 해놓고서 MLB 이적을 위해 망명이라는 사고를 쳤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캠프에서 테스트를 받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당연히 분노한 소뱅측에서는 본보기로 로스터 한자리를 까먹는 것을 감수하고 제한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경우 미-일 야구협정에 의해서 원 소속팀인 소뱅의 동의 없이는 미국 및 일본의 어떤 다른 팀과도 계약을 할 수 없다.[84] 2007, 2012.[85] 2019년까지 통산 상대전적은 다음과 같다. 요미우리 - 36승23패, 히로시마 - 37승4무18패, 주니치 - 34승2무23패, 요코하마 - 40승2무17패, 야쿠르트 - 36승2무21패, 한신 - 31승4무24패.[86] 특히 요미우리 상대로는 두 번 스윕한 팀이 되었다. 이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87] 다만 70년대 전-후기리그제 하에서 열린 플레이오프까지 합하면 포스트시즌에서 현존하는 전 11개구단 올킬을 달성하기는 했다.[88]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라운더.[89] 사실 고졸이라서 망했다는 의견들은 말 그대로 설레발. 쥰페이와 동갑내기인 대졸 선수들이 2019년 드래프트에서 지명되고, 대졸+사회인 테크를 타는 동갑내기들은 2021년 드래프트가 되어야 드래프트에 참가 가능한 판이니...[90] 주전 포수로 타격은 좋지 않으나 수비에서는 리그 원탑인 선수. 도루저지 하나로 일본시리즈 MVP까지 오른 포수이다.[91] 유일하게 100안타 이상을 친 2012년 시즌 기록이 타율 .254에 OPS .601이다. 통산 OPS가 .647인 것을 감안하면...[92] 2017년, 2018년 등. 그래도 2017년에는 103경기 290타수에 나오는 등 나름 활약했고, 2018년에도 시즌 후반과 포스트시즌에 대폭발하면서 짧게나마 테이블 세터로 활약했다.[93] 2018년까지만 해도 키도코로 류마가 있었는데 방출당해 은퇴.[94] 팬들 사이에서 농담조로 하는 말이지만 아사무라 히데토한테 라쿠텐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지 못한 것도 마키하라가 포스트시즌 때 워낙 잘해서 구단 수뇌부가 낚이는 바람에 이 돈 주고 오면 감사고 아님 말고로 소프트뱅크가 나온 거 아니냐는 말도 있다.[95] 괄호 안은 재적연도[96] 1944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 악화로 프로야구 리그가 중단되었고 벳쇼도 일본군에 징집되었다.[97] 이전 서술에 난카이에서 데뷔했다고 되어있었으나 사실 데뷔는 토에이 플라이어즈에서 했다. 그러나 별다른 활약을 못해 결국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여기서 확 각성했다.[98] 한큐-오릭스 브레이브스의 홈구장. 코베 이전 후 경륜장(문서 수정 전은 경마장으로 되어있었음) 등으로 쓰이다 2005년 철거.[99] 퍼시픽리그에서 단독으로 1973~1982년까지 실시한 전후기리그제의 첫 플레이오프였다.[100] 대타 홈런 세계 최다 기록(27개) 보유자. 대타로 활약하다가 1975년 퍼시픽리그에 지명타자제가 생기자 지명타자로 1982년 은퇴 때까지 맹활약했다.[101] 근데 에모토는 불과 이틀 전에 3차전(10월 22일)에서 선발투수로 출진해 우승한 바 있다.[102] 山内和宏. 마이니치-다이마이, 한신의 강타자 야마우치 카즈히로(山内一弘) 와는 이름의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의 투수이다[103] 이 해 최종 성적은 60경기 79.1이닝 14승 1패 1.25 ERA. 933의 승률을 찍으며 중간계투로 승률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이색 기록을 보였으며, 승리 수는 이 해 퍼시픽리그 다승왕인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16승에 단 두 개 뒤진 것이었다. 시즌 막판 경기에서 호크스 OB인 노장 타자 야마모토 카즈노리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지 않았다면 중간계투로 15승 무패 시즌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 단 이 시기에는 홀드가 일본프로야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기록이 아니라 최우수 중간계투를 정하는 참고기록에 불과했기에 홀드가 기록되지는 않았다. 이해 최우수 중간계투는 팀 동료 후지이가 차지.[104] 아무리 부상이 있다고 해도 팀의 마무리 투수였던 선수를 그렇게 간단하게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하냐는 까임에, 프런트는 재활때문에 2013년에도 시즌 초반에는 등판 가능성이 낮고 FA 자격 취득이 1년밖에 안 남은지라 설마 데려가겠냐는 생각에 차라리 유망주 한명을 더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전략적 선택을 했는데 정말로 데려갈 줄은 몰랐다고 답변했다(…). [105] 前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 부임 첫해인 2005년 팀을 3위로 이끌었지만(그리고 이것이 2015년까지의 마지막 A클래스였다!) 이듬해엔 도로 꼴찌로 처박으면서 해임당했다(...)[106] 노무라 카츠야가 구단과의 불화로 난카이를 떠나면서 급히 감독이 필요해지자 프런트에서 선수 은퇴시키고 바로 임명한 게 히로세였다(…). [107] 사실 이건 준비도 안 된 사람을 급하다고 은퇴시키고 바로 임명한 ㅂㅅ프런트가 문제지만… 거기다 난카이도 이 시점부터 재정이 안 좋아졌다.[108] カズ山本. 다이에 말기인 1994년후반기와 1995년에 잠시 썼던 등록명이다. 은퇴 후에도 이 예명으로 연예계 활동을 했다.[109] 일본에서는 보통 1번 타자가 출루하면 2번 타자가 1번 타자의 진루를 돕기 위해 번트를 대는 게 일반적이었으니.(대표적 예가 카와이 마사히로.)[110] 원래 야마모토는 1976년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데뷔했으나, 데뷔 이후 6년간 고작 6안타 1홈런에 그치는 저성적으로 인해 결국 1982년 방출당한다. 그러나 방출 후 오사카의 배팅센터에서 아르바이트와 연습을 병행하다가 2군감독 시절부터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 타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조언을 해 줬던 아나부키 요시오 당시 난카이 감독(이 해 부임)의 부름을 받아 1983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한다. 이후 비로소 실력이 만개하여 팀의 주전 외야수로 뛰게 되었고, 팀이 다이에에게 넘어가 후쿠오카로 연고이전한 후에도 중심타자로 꾸준히 뛰었다. 그러나 1995년 부상 등으로 시즌을 망쳤고, 결국 시즌오프 때 고령 등이 원인이 되어 2번째 전력외통보를 받고 호크스를 퇴단한다. 그러나 그가 신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거라 여긴 킨테츠 시절 선배인 사사키 쿄스케 당시 킨테츠 감독의 부름을 받고 1996년 다시 킨테츠 버팔로즈에 입단한다. 그후 이해 프로 인생 처음으로 팬투표로 올스타전에 선출되고 잠시나마 수위타자에 오를 정도로 1년간은 쏠쏠한 활약을 했지만, 이후 기량 저하로 점점 출장기회가 줄었고 결국 1999년을 끝으로 은퇴한다.[111] 하지만 결국 7푼 가까이나 되는 타율차로(이치로 .385/야마모토 .317) 수위타자를 내줘야 했다. 그러나 이해 이치로가 사기캐였을 뿐, 야마모토도 이 해 타율 2위에 오를 정도로 호성적을 거뒀다.[112] 사실 2009년에는 중심타선으로 개근하긴 했지만 이 시즌부터 이미 하락세를 타면서 16홈런과 OPS 7할대 초반에 그쳤기 때문에 딱 3년 잘했다.[113] 2006년에 10볼넷 116삼진이라는 정신나간 선구안을 보여주었다. 타율이 .311인데 출루율이 .336(...) 통산 타율은 .253인데 출루율이 .311이다.[114] NPB 가맹을 목표로 하는 독립구단. 오키나와가 홈이다.[115] 계약은 했으나 부상으로 계약기간 내내 한 경기도 등판 못하고 방출. 그 후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트리플A에서 뛰다가 메이저리그로 승격하여 컵스에서 메이저리그 데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