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청명

 

高淸明
(?~1019)
1. 개요
2. 생애


1. 개요


거란(요나라)의 장군. 거란이 멸망시킨 발해의 유민으로서, 여요전쟁에 참전해 거란군 안의 발해인 부대인 발해군을 지휘하다가 귀주 대첩에서 전사했다.

2. 생애


출신이나 여요전쟁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의 국성인 고씨로, 말갈계가 아닌 고구려계 발해 유민으로 추정된다. 생년은 미상이나 926년 발해가 멸망한 이후 거란의 피지배민족으로서 태어났거나, 정안국 등 발해부흥국 소속이었다가 거란에 멸망하면서 흡수되었을 것이다.

“이 달에 소배압(蕭排押) 등이 다하(茶河)와 타하(陀河)에서 고려와 전투하였는데, 요의 군대가 불리하였다. 천운군(天雲軍)과 우피실군(右皮室軍)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天雲軍詳穩) 해리(海里) 등이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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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제3차 여요전쟁 당시에는 발해인들을 모아서 만든 발해군 부대를 지휘하는 발해상온(渤海詳穩) 지위에 있었고, 1018년 12월(음력) 고려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전사하였다. 발해인이 그래도 고려에 동족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는 부분. 심지어 고려군에도 발해 유민 출신의 병사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거란군 소속 발해인 병사'''와 '''고려군 소속 발해인 병사''' 간의 접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닌 게 아니라 안융진을 막고 있던 수비장이 '''발해 유민''' 출신으로 고려에서 중랑장을 맡고 있던 대도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망국의 비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족전이었던 셈.
고청명이 전사한 후, 이듬해 패퇴한 요나라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발해인 장교에게 포상을 내리고 전사한 장교의 가족에게는 보상을 하였다. 아마도 고청명의 가족들도 이 때 거란에서 국가 유공자로 보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