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 대첩

 



<color=#373a3c> '''귀주대첩
龜州大捷'''

<colcolor=#373a3c> '''시기'''
1019년[1] 2월 1일음력
1019년 3월 10일그레고리오력
'''장소'''

고려 귀주 동쪽 근교 (現 평안북도 구성시)
'''원인'''
거란의 고려 침공.
'''교전국'''
고려 [image]
거란
'''지휘관'''
<^|1>강감찬(상원수)
강민첨(부원수)
김종현(병마판관)
박종검(판관)
유참(판관)
조원[2](시랑)
소배압[3]
야율팔가
해리†
고청명
아과달†
작고†[4]
'''병력'''
208,300 명
100,000 명[5]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지휘관 다수 전사
천운군, 우피실군 궤멸
'''결과'''
고려군의 대승.
'''영향'''
고려와 거란 화의 맺음. 여요전쟁 종결.
1. 개요
2. 거란의 침입
2.1. 거란의 전쟁 준비
2.2. 거란의 전면 개전 및 고려 침공
2.3. 흥화진·삼교천 전투
2.4. 소배압의 진격과 개경 공방전
3. 귀주 대첩
3.1. 거란군의 배수진
3.2. 귀주 평원의 전투
3.3. 고려군의 포위 섬멸
4. 전투 이후
4.1. 다수가 소수를 격파한 시시한 전투?
4.2. 수공으로 승리했다?
4.3. 문관인 강감찬이 왜 총지휘관인가?
5. 기타
6. 미디어 믹스에서
7.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image]
귀주 대첩 기록화. 이용환 作[6]

僵尸蔽野俘獲人口·馬駝·甲冑·兵仗不可勝數. 生還者僅數千人'''契丹之敗未有如此之甚'''.

(거란군의)시체가 들판을 뒤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낙타·갑옷·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강감찬 열전'''}}}


1019년 2월 1일, 강감찬이 이끄는 약 21만 명의 고려군이 귀주(龜州)[7]에서 10만 명의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로 초기의 기선 제압, 유격전, 청야전술, 포위 섬멸전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승리한 전투이다. 흔히 을지문덕살수대첩, 이순신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이라 불린다.[8]
도합 30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뒤엉킨 싸움으로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회전(會戰)이다. 더 정확히는 양측의 규모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전투 중 최대 규모이다. 제2차 고구려-수 전쟁 당시 살수대첩이나(고구려군 규모 불명)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때 벌어진 주필산 전투나(당군 규모 불명), 제2차 고구려-당 전쟁사수 전투(양측 규모 불명) 등의 대규모 회전, 통일신라 시대의 달벌대전, 후삼국시대에 벌어진 일리천 전투(후백제군 규모 불명), 제2차 여요전쟁 통주 전투(거란군 규모 불명) 등도 대군이 동원되었거나 그랬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투지만, 귀주 대첩은 양측의 규모나 자세한 전황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앞의 전투들과 차이점이 있다.[9]

2. 거란의 침입



2.1. 거란의 전쟁 준비


거란(요나라)은 본격적인 고려 침공에 앞서, 몇 차례 군사를 압록강 근처로 보내 고려를 위협했다. 요성종은 1014년 6월 상온 소적렬(蕭敵烈)을 도통(都統)으로 하여 압록강 인근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10] 압록강 인근에 도착한 거란군은 압록강에 부량을 설치하고 압록강 동서 양안에 진지를 구축한다. 고려와의 장기전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거란은 이송무(李松茂) 등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동시에 1014년 10월 고려의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지만, 고려 측은 흥화진 장군 정신용(鄭神勇)의 방어로 거란군 700여 명을 사살한다. 도망치다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이후 거란군은 3개월 간 전열을 재정비하여 흥화진을 포위하고 통주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실패한다.
거란은 이후에도 계속 사신을 보내 강동 6주[11]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자신감이 높아졌는지 고려 조정은 거부하며 거란 사신을 체포하고 억류하기까지 한다! 이는 고려 측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화가 난 거란은 1015년 9월에 재차 침입하여 통주를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저항으로 실패하여 통주 점령을 포기하고 우회, 청천강까지 진격하여 영주(안북부)[12]를 공격하였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자 압록강을 넘어 후퇴한다. 이후 다시 곽주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등 소소한 성과를 이루었으나, 전면적인 침공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압록강 이북으로 후퇴한다.
1017년 5월에 거란은 소합탁(蕭合卓)을 도통으로 임명한 뒤 고려를 다시 침공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흥화진을 포위하고 9일 간이나 공세를 가했지만 흥화진을 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별다른 성과 없이 큰 피해만 입어 다시 압록강 이북으로 후퇴한다.
1018년 10월에 몇 차례의 고려 공격에 실패하자 요성종은 전면적인 침공을 준비하게 되었고, 소배압을 도통으로 임명하여 본격인 고려 침공을 준비하게 된다. 고려 역시 이에 맞서 서북면 행영도통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안주(安州)에 고려군 본진을 설치한 뒤 20만 8천 3백 명의 군사를 준비한다.

2.2. 거란의 전면 개전 및 고려 침공


1018년 12월에 거란의 소배압이 황제 직속 부대인 우피실군[13]을 포함한 10만에 달하는 정예 기병을 끌고 내려오면서 거란의 3차 침공이 시작된다.

2.3. 흥화진·삼교천 전투


[image]
상원수 강감찬은 고려군 20만 8,300명 중 1만 2천의 기병을 차출해 흥화진 옆 삼교천 계곡에 매복시켰다. 일반적이라면 성을 중심으로 방어를 했을 것이나, 강감찬은 거란군이 기병 위주의 편제가 이루어 져있는 데다 2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수도 함락을 최우선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판단해 이와 같이 병력을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마디로 거란군의 계획을 강감찬이 훤히 꿰뚫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고려의 예상대로 거란군 10만이 고려 방어군을 우회해 삼교천을 도하하자, 고려군은 쇠가죽으로 막은 둑을 터트림과 동시에 기병대를 출격시켜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둔다.
[image]
참고로 귀주 대첩을 두고 '수공으로 이긴 전투'라고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사실 이 전투는 귀주 대첩이 아니라 흥화진 동쪽을 흐르는 하천인 '''삼교천(三橋川) 전투'''이다. 흥화진은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근교이고, 귀주 대첩이 벌어진 귀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 일대니 전혀 다른 곳이다. 그나마 흥화진 전투의 수공도 거란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강하는 거란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종아리까지 차는 시냇물 건너는 것도 시냇물의 유속이 빠르다면 은근히 힘들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춤까지 오는 물이 빠르게 흘러온다면 갑자기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도강하던 병사들의 진형도 당연히 흐트러지게 되며, 아직 도강하지 못한 병사들은 더 높게, 더 빨리 흐르는 물을 건너야 하므로 도강이 늦어지게 된다. 그래서 도강을 이미 마친 병력과 그렇지 못한 병력이 일시적으로 분단되며 제 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수공 직후 강감찬은 1만 2천의 기병대로 대열이 흐트러진 거란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강감찬 위인전에서 다른 전투보다 이 수공 장면에 초점을 두다 보니 '강감찬 = 수공 = 귀주 대첩'이라는 공식이 생겨 버린 셈. 살수대첩을지문덕 역시 마찬가지로 비슷한 오해(?)를 받고 있다. 수공을 안 쓴 것은 아니지만 당시 토목 기술로는 적들을 수장시킬 정도로 강력한 수공을 할 수 있는 대형 둑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현재의 토목기술로도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발목 높이의 물을 일순간 흘려보낸 것. 물론 어지간한 사람은 이 정도의 급류에도 자빠지고 나뒹굴기 일쑤이기에 이 정도로도 적을 당황시키고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데에는 충분하다. 범람 등으로 인해 발목 깊이의 물이 지속적으로 쇄도한다면 실제로 매우 치명적이기도 하니 둑으로 일시적인 격류를 만든다고 얕볼 게 아니다. 쓰나미 항목 참조.
설령 둑을 쌓아 물을 막았다 해도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어려운, 굉장히 고난이도의 작전이다. 심지어 제 2차 세계대전 때도 시도되지 못한 작전이다. 물이 빛도 아니고 둑을 터뜨린다고 해서 바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이밍 맞추기 쉽게 도하지점 인근에 둑을 설치했다가는 정찰병들에게 발각되기 쉽다. 도하하는 도중이 가장 취약할 때임은 건너는 사람들도 알기 때문에 매복이나 기타 함정을 확인하느라 도하 전에 인근을 샅샅이 정찰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둑이 도하지점에서 그리 가까웠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둑이 크면 무너뜨리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떠내려가 익사할 만큼 많은 양의 물을 들키지 않고 정확한 시점에 터뜨리기란 요즘 기술로도 불가능에 가깝다. 당하는 쪽이 알고 맞춰서 당해준다면 모를까. 정리하자면 수공은 거들 뿐 거란군을 제압한 것은 고려군이었을 것이다.

2.4. 소배압의 진격과 개경 공방전


흥화진 전투 이후 소배압은 전략적인 기세를 잃지 않고 냅다 개경을 향해 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는 거란군이 기병을 토대로 한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군의 총 지휘를 맡은 강감찬은 이곳 저곳에 주둔한 별동대를 계속 보내 거란군의 머리, 허리, 꼬리를 정신없이 계속 찔러대기 시작한다. 강감찬은 부원수 강민첨을 자주로 급파, 거란군을 마탄으로 향하도록 하고 시랑 조원은 마탄에서 대기하여 거란군을 맞이하게 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자주(慈州) 내구산에서 부원수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의 한 부대를 잡아 격파했고, 평양 근처 마탄진에서는 시랑 조원도 거란군 한 부대를 격파하는 등 연달아 피해를 입혔다. 기록에 따르면 마탄진 전투에서 거란군 1만여 명을 참획(斬獲)[14]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20여년 전의 1차 침입 때와도 달랐죠. 1차 침입 때는 방어군이 출동하는 데만 2달이 걸렸지만, 이번엔 침공 당일 이미 고려군의 요격이 시작되었습니다. 12월 10일, 흥화진 남쪽 삼교천에서 벌어진 전투는 고려군의 대승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남하하는 거란군은 고려의 요격에 시달렸습니다. 두 번째 전투였던 내구산 전투나, 세 번째 전투였던 마탄 전투에서도 거란군은 고려군의 요격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확실히, 1018년의 고려는 예전의 고려가 아니었습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EBS 다큐프라임 -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2부- 거란전쟁, 동북아 균형자의 조건'''##}}}
그러나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의 본대는 선발대의 방향과 달리 산길을 따라 개경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이런 소식에 고려군은 동북면의 병사 3천 3백명을 개경으로 이동시켜 개경의 수비를 보충하도록 한다. 당시 고려에서 동북면[15] 병사 1명이라면 타 도의 병사 5명~6명에 맞먹을 정도로 최정예 병력이었다. 함경도 병사의 이러한 최정예 전통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지는데 이는 동북면 쪽에 수렵을 하는 사냥꾼들이 많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16][17] 특히 김종현이 이끄는 1만 병력은 소배압을 맹추격하여 소배압의 주력을 끊임없이 견제 / 위협하였다.

(1019년) 봄 정월 경신일에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image]
KBS 정도전에서 묘사된 개경 일대의 모습.[18]
이렇듯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소배압은 2차 여요전쟁 때처럼 수도 개경만 불태우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하였기에 결국 개경 근처의 신은현(新恩縣)까지 도착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절대로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요동 방어선을 우회한 거란에게도, 병자호란 때의 청나라군에게도 발해와 조선은 각각 이렇게 패배를 당하였다. 때문에 소배압이 그렇게 수많은 방해를 뿌리치고 수백 km를 주파하여 전략적 목표인 개경까지 도착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이것도 영화에 나오면 기가 막힌 건데, 개경에 방어 병력이 없었어요. 그리고 개경은 전투를 할 수 있는 성이 아니에요. 수도잖아요. 성이 있긴 했는데 평야성이야. 병력은 있는대로 긁어서 윗쪽으로 올려 보냈어. 거란군 입장에서는 "왕도를 함락하자!", 뒤에 따라오던 김종현 추격대는 "그 전에 따라 붙어야 한다!". 영화 같은 추격전이 펼쳐졌죠.

그런데 여기서 현종이 대단한 결단을 내립니다. "'''두 번 도망은 없다.'''"[19]

그래서 주변에 청야를 하고 주민들을 소개해 개경 방어전을 준비합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신유일(음력 1월 3일)에 소손녕이 신은현[20]

에 이르니 서울과의 거리가 백 리였다. '''왕은 성밖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청야하여 적군을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그러나 고려의 현종은 2차 여요전쟁 당시 개경이 홀라당 불타버렸던 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방어를 위한 작계를 완비하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엄청나게 보강된 개경의 성문과 성벽, 그리고 개경의 궁성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송악산의 산성[21] 외엔 마치 핵폭탄이라도 맞은 듯 한 톨 집 한 채 없는 폐허, 그리고 쉴새없이 사방에서 찔러대는 고려군의 견제 병력들뿐이었다.[22] 그래서 꾀를 낸 소배압은 수하 장수인 야율호덕을 시켜 개경의 통덕문으로 가서 개경을 수비하고 있던 고려군에게 "이제 우리 철수합니다." 하고 을 쳤다. 물론 그렇게 뻥을 쳐서 안심시킨 후에 몰래 척후병 300명을 보내 개경에 잠입시켰다. 즉, 개경의 방비를 소홀히 하게 한 뒤 척후병을 잠입시켜 성문을 몰래 열어서 쳐들어가려는 작전을 짠 것이다. 하지만 거란군 입장에선 불행하게도 이 회심의 작전마저 고려군에게 간파되어 버렸고 개경의 성문을 열기 위해 잠입시킨 거란 척후병 300명은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교역[23]에서 대기하고 있던 100여 명의 고려군 기병대에게 붙잡혀 죽었다.
  • 이때 전설 하나가 내려오는데, 소배압의 군대가 개경을 향해 다가오자 송악산의 산신이 밤새 소나무들로 모습을 바꾸었고, 이 소나무들이 일제히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두려움에 떨어 도망갔다고 한다.

가끔은 소수의 결정이 역사를 바꾼 때라든지, 역사의 방향을 결정할 때가 있는데 저는 현종이 도망치지 않고 거기서 버텼다는 것을 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가, 역사를 움직인 순간.

{{{#!wiki style="text-align: right"

'''정명섭.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이 회심의 작전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배후의 강동6주서경 일대를 고스란히 두며 군대의 생명줄인 보급선마저 고려하지 않은 채 그대로 고려 영토 깊숙이 진입한 데다가, 고려가 청야 전술을 쓰는 바람에 보급이 실패로 돌아가자[24] 소배압의 거란군은 아무 것도 못하고 고립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소배압은 개전 이듬해인 1019년 2월, 개경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배압의 거란군은 서경(평양) 근처의 고려군을 피해 크게 우회하여 퇴각, 연주・위주에 이르렀으나 추격해 온 강감찬의 고려군에 의해 500여 명이 사살되는 등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거란군은 퇴각을 계속하였고, 거란군의 본진인 압록강 이북으로 후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귀주(龜州)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3. 귀주 대첩


[image]
고려군은 해안가를 거치는 퇴각로를 모두 틀어막고, 거란군을 귀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감찬은 유격전을 위해 각지에 파견했던 고려군을 전략적 요충지인 귀주로 총집결시켰다. 그러나 김종현의 1만 병력은 이때 무슨 이유인지 아직 도착하지 못했는데, 이들이 빠진 채 결전을 시작해야 했던 총사령관 강감찬은 매우 초조했겠지만, 나중에 이 변수가 결국 승리의 여신이 고려군에게 선사한 미소가 되었다.
한편 물러가던 거란군은 연이은 패전과 고려의 유격전으로 인해 지속적인 타격을 입었으나, 거란 최고의 장수 중 하나인 소배압의 통솔력으로 인해 남진과 퇴군을 거듭한 군사임에도 전투력은 상대적으로 보존되어 있던 편이었다.
그리고 1019년 2월 1일. 거란군은 마지막 회전(會戰)을 예상이라도 한 듯[25] 포진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 20만을 보자마자 주저 없이 그대로 전투에 돌입, '''운명의 마지막 대회전'''이 벌어지게 된다.

3.1. 거란군의 배수진


[image]
평화전쟁 1019에서 나온 귀주 대첩 포진 장면
귀주성 앞쪽으로는 2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그 뒤쪽으로 구릉지대가 있는데 소배압 휘하 장군들은 이 구릉을 끼고 포진하여 고려군이 하천 두 개를 건넌 뒤에 공격하도록 유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감 야율팔가가 이에 반대하였고 소배압도 이에 따르면서 거란군은 개천 하나를 등 뒤에 두고 싸우기를 선택했다. 이른바 배수진이다.

12월에 소배압 등이 개경에 이르자, 적들이 무너졌다. 이에 군사들을 풀어 사로잡고 노략한 다음 돌아왔다. 군사들이 다타이하(茶陀二河)[26]

를 건널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의 군사들이 쫓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려의 군사들로 하여금 두 강물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야율팔가 혼자서만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적들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인 바, 이는 위태로운 방법이다. 그러니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배수진이 좀 뜬금없어 보일 순 있으나, 무리한 전술은 아니었다. 한국사의 배수진 하면 탄금대 전투라는 실패사례가 워낙 강렬해 그냥 자살행위 쯤으로 인식되는데, 한신의 정형 전투를 잘 복기해보면 한신은 배수진을 '''방어용'''으로 사용했다. 고려군보병 위주이므로 거란기병을 선제공격하는 게 아니라 공격해오는 적을 막아내는 것이 기본 전술이었고, 그런 점을 고려하면 배수진은 충분히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었다. 20만이라는 대규모 군세를 투입했으니 배수진은 자살전술이 아니라 강 건너편에 대한 교두보 구축의 성격이 강하며 후방에서는 지속적으로 보급과 지원이 가능한 반면 한쪽이 강으로 막혀있으니 적 기병의 우회침투를 허용할 위험이 없었다.[27][28]
반면 거란군은 기병이었기 때문에 이러나저러나 고려군을 선제공격해야 했고, 장기간 원정을 수행중이던 거란군 입장에서는 시간을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적이 하천을 건너와 교두보를 구축해 기병이 기동할 공간을 빼앗기 전에 선제적으로 공간을 확보하고 우회로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아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고려군의 도하를 허용하면 하천 동안에는 바로 야트막한 언덕이 자립고 있어 이에 의지한 방어진지를 상대해야 하는 반면 거란군이 선제적으로 도하한다면 기병이 활동하기 좋은 귀주평원을 전장으로 삼을 수 있으니 거란군에게는 나쁠것이 없는 선택이었다. 실제로 전투 경과를 보면 배수의 진을 친 거란군은 2달 가까이 굶주리고 지치고 다쳤음에도, 드넓은 대륙에서 불패의 신화를 써내려갔던 거란의 최정예다운 위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애당초 무기력한 군대라면 그 초단기간에 적국의 수도까지 들이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29]

3.2. 귀주 평원의 전투


[image]
토크멘터리 전쟁史[30]
양측 병사들이 끊임없이 피를 쏟은 대혈투가 절정에 달할 때쯤,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김종현의 '''1만 병력이 10만 거란군 등 뒤에''' 별안간 나타난다. 길을 헤매이는 바람에 전장에 늦게 도착했다고는 하나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혹은 부대를 다시 재정비하느라 늦었을 수도 있다. 사실 고대에서 중세까지 길을 헤메는 것은 거의 당연지사였고 그만큼 지리를 잘 알아야하는 것이 지휘관들의 전투 전의 최우선 과제였다. 거기다 기병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인데 이동 중 말의 식사 시간과 전투를 위해 체력을 많이 아껴두어야 하는 만큼 늦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단 기병은 전투에서 엄청나긴 하나 그만큼 관리가 많이 필요해 전쟁사에서 기병을 잘 관리해 이용하는 지휘관들이 몇 손가락 꼽을 만큼 대단히 어려운 병종이다.
여하튼 이렇게 장대하고 정교한 전략을 총 지휘한 강감찬이라 하더라도 이런 타이밍까지 의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절묘한 출현은 통신 수단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쉽지 않고, 또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에 가급적 해서도 안 된다.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자칫 대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31]
[image]
평화전쟁 1019
김종현의 1만 병력의 등장은 전방의 고려군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던 거란군을 상대로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김종현과 1만의 고려군은 30만이 뒤엉켜 싸우는 전장으로 주저없이 돌격해 들어간다. 쌍방간 주력이 격돌하는 대회전에서는 조그마한 변수도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데, 1만씩이나 되면 조그마한 변수가 아니다. 더군다나 김종현 부대는 거란군의 추격이 목적이었으므로 병력을 '''기병 위주로 편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란군도 김종현 부대의 등장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녘으로부터 휩쓸어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꼈다. 아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니 용기가 스스로 배나 더해졌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거기에 그 순간 풍향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며(!) 동시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계절상으로는 북풍이 부는 것이 정상인데 간혹 일시적으로 계절풍이 아닌 역풍이 부는 경우가 있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강감찬이 예측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당시 장수들의 필수 요건 중 하나가 기상 관측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72세)를 생각하면 오랜 경험과 치밀한 사전 정보수집으로 이 현상을 어느 정도 예측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러한 기상 이변까지 나타나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간 반면 거란군의 기세는 여지없이 꺾였다. 고려군이 남쪽에, 거란군이 북쪽에 포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군에는 순풍이, 거란군에는 역풍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 간혹 한낱 바람이 병사들의 사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나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부는 태풍이 올 때 밖에 나가보면 알 수 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바람이 심하면 움직이긴커녕 눈조차 뜨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한시바삐 움직여야 하는 전쟁터에서 이런 바람을 만나면 전열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시야 확보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전열이 무너지고 통제력을 상실하면 그 때는 10만이 아니라 100만이어도 패잔병에 불과하다.[32][33] 또 거란의 주 병력은 역사상의 유목 민족 국가들이 그러했듯 궁기병 위주였을 것인데, 문제는 비바람이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불어닥치니 풍속이 대단했을 것이고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강력한 역풍을 맞는 거란군 입장에서 화살을 쏴봐야 공중에서 흔들거리다 툭툭 떨어지게 되거나 맞아도 큰 피해를 주기 어렵다. 아무리 못해도 순풍을 받는 화살이나 바람이 없는 상황에서의 화살보다 약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반면 고려군 입장에서는 대충 쏴도 바람이 적진까지 잘 배달해주니 아주 신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앞은 안 보이는데 화살은 비처럼 쏟아지고 안 그래도 김종현 부대의 강력한 뒤치기로 멘탈이 흔들거리던 거란군에게는 결정적인 일격이었다.[34]

이에 2009년 11월 21일 역사스페셜에서 기상청에 문의해본 결과 2006년 4월 19일에 관측된 활강형 한랭전선과 비슷하다고 한다. 당시 한반도에는 '''최대 20m/s 이상의 남동풍'''이 불었다고 하며, 이를 직접 시험해본 결과, '''성인 여성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바람'''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
>시간이 많이 흘러서, 당시 관측 자료라든지, 예보 자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아마 귀주 대첩 당시 강감찬 장군이 수성이 아닌 평지를 택해서 기마군이 주력인 거란과 맞승부 했다는 것은, 강감찬 장군이 이 전쟁을 준비하면서 많은 연구를 통해서 한반도에 겨울철에 남쪽으로 기압골이 통과할 때, 북서풍에서 남동풍으로 급격하게 전환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김동진 중령. 공군 기상 예보관'''. 2009년 11월 21일 역사스페셜 中}}}
거란군의 전위는 천운군과 우피실군이 맡았고 우피실군은 황제군 5위의 하나로 6만 병력을 보유한 정예군이다. 그런데 이 우피실군이 고려군의 돌격에 무너졌다. 배수진을 쳐둔 상태라 진형을 재정비할 수 없었고 이내 무너져서 퇴각하는데 이때 강민첨의 별동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반령(盤嶺) 벌판으로 몰아넣었다. 추격 부대는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므로 도망치기에는 최악인 곳으로 내몰린 것이다.

3.3. 고려군의 포위 섬멸


[image]
귀주 대첩 묘사도※출처 :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님 블로그
결국 이 싸움은 거대한 '''포위섬멸전'''으로 마무리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포위 섬멸전이 그러하듯, 거란군 역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10만 거란 병력 중 살아 돌아간 병력은 수천에 불과했다. 소배압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지만 최고위급 부대 지휘관이 4명이나 죽었을 정도로 고위 계층 장수들의 손실도 컸다. 《요사》에 기록된 이 때 전사한 지휘관은 천운군 상온 해리, 발해상온 고청명, 요련상온 아과달, 객상사 작고이다.

“이 달에 소배압(蕭排押) 등이 다하(茶河)와 타하(陀河)에서 고려와 전투하였는데, 요의 군대가 불리하였다. 천운군(天雲軍)과 우피실군(右皮室軍)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天雲軍詳穩) 해리(海里) 등이 모두 죽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다하와 타하를 건널 적에 적이 협공해서 활을 쏘자,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려왔던 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권88 열전18 소배압고'''}}}
이때 전사한 대장 중에 '발해상온'이라는 직함을 가졌던 '고청명'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직함에서 보듯 요나라의 '''발해인 출신 부대'''의 대장이었다. 사실 발해인 부대도 상당수가 요나라 소속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다. 완안아골타가 요나라를 공격할 때 천조제는 발해인 부대를 보내 아골타를 막으려 했으며 금나라 역시 송나라를 공격할 때 수만명에 달하는 발해인 부대를 운용한 사례가 있다. 발해인이 그래도 고려에 동족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는 부분. 심지어 고려군에도 발해 유민 출신의 병사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거란군 소속 발해인 병사'''와 '''고려군 소속 발해인 병사''' 간의 접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35] 어떤 의미에서는 망국의 비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족전이었던 셈. 참고로 고청명이 전사한 후, 그 가족들은 거란에서 국가 유공자로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2년,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ㆍ타하(陀河)에서 전투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송사』 요열전'''}}}
어찌나 크게 이겼는지 《고려사》에서는 '''이날 죽은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으며 포로와 전리품은 산더미였는데, 우리가 거란과 싸운 이후 거란이 이렇게 패한 적이 없었다.'''[36]라고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의 역사서인 《송사》조차 '다하(茶河)와 타하(蛇河)의 전투에서 (거란군이) 고려군에게 크게 패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전쟁사의 주요 전투로 올리기에도 손색이 없는 대승 중의 대승이라 할 수 있다. 이때까지 수많은 야전 / 회전에서 승승장구하던 거란군을 크게 발라버린 이 싸움이 '살수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인 '귀주 대첩'이다. [37]

4. 전투 이후


귀주 대첩은 '''26년에 걸친 장기간의 고려 전쟁을 종식시킨 전투'''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안주섭. 『고려-거란전쟁』 저자.'''}}}

거란군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습니다. 서역에서 부터 만주에 이르기 까지 그들을 당할 군대는 없었습니다. 고려는 그런 군대를 맞아 정면대결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공성전이 아닌 벌판에서의 회전으로 전성기에 있는 제국의 군대를 궤멸시킨 것은 우리 역사상 이 전투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를 끝으로, 거란과의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EBS 다큐프라임 -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2부- 거란전쟁, 동북아 균형자의 조건'''##}}}
이 전투 이후 거란은 두 번 다시는 고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지 못했다. 거란 성종은 참패하였다는 소식에 머리 끝까지 열받아서 돌아온 소배압에게 '''네놈의 머릿가죽(또는 얼굴가죽)을 벗겨버리겠다!'''[38]날뛰었지만 차마 친인척을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던지 진짜 그렇게 하지는 않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39] 훗날 덕종 때인 1033년 거란군이 정주까지 쳐들어오는 등 소규모 전투가 몇 번 있었지만, 이 또한 고려군이 금방 격퇴하면서 상황 종료. 덕종 문서와 여요전쟁 문서 참조.
그리고 이렇듯 초기의 기선 제압, 청야 전술, 수도 방위와 지속적인 견제, 마지막 회전으로의 유도와 포위 섬멸로 이어지는, 정교하고 치밀하게 진행된 3차 여요전쟁 전체의 전략/전술을 총지휘한 사람은 강감찬이었다.
1019년 2월 5일, 고려의 국왕인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나아가 강감찬을 맞이하였다. 전하는 글에 의하면, 이때 임시로 지은 누각에 현종이 친히 올라 주연을 베풀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직접 꽂아 주었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파역을 흥의역[40]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지. 그리고 강감찬은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 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41]과 식읍 300호를 받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공신호를 받았다. 한마디로 구국영웅이 된 것.
이후 고려는 개경 주위에 나성[42]을 쌓고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구축[43]하는 등 방어에 신경쓰게 되며 당대 동아시아 최강 전력인 거란군을 격멸함으로써 수, 당과 싸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국호에 걸맞은 위상을 보여준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맞이하게 된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이후 120여 년간의 전성기를 얻어낼 수 있었다.

4.1. 다수가 소수를 격파한 시시한 전투?


숫자만 봐서는 20만으로 10만을 격파한 게 뭐가 대단하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거란의 10만은 거의 대부분이 '''유목민 출신의 기병들'''로 이루어진, 거기다 '''거란의 황제 친위군 5위 중 하나였던 우피실군도 포함된 최정예'''들이었다.[44]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유목민 출신이란 것은 기마술에 매우 능숙하다는 뜻이다. 당시의 기병이 오늘날 전차기계화보병의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어릴 때부터 이미 전차장갑차 조종을 마스터했다는 거다.[45] 반면 고려군은 있는 거 없는 거 다 쏟아부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 전 전쟁과정에서 통주 전투같은 칠천량 해전급 패배로 인해 야전군 자체가 박살나버리는 상황까지 있었던 상황에서,[46] 그냥 있는거 없는거 죄다 쥐어짜내 쏟아부었다고 봐야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침공군은 적국으로 공격을 가는 상황이므로 최정예 부대로 공세를 펼치는 거지만, 방어군은 말 그대로 창만 들 수 있으면 모조리 소집해서 막아내야 한다. 숫자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매우 컸고, 병종 또한 보병과 기병의 차이는 매우 크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거란군은 정예 기갑 내지는 기계화보병사단 10개, 고려군은 소수의 기갑 혹은 기계화보병에 일반 보병, 예비군민방위까지 총동원한 20개 사단[47]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매우 적은 손실로 적을 섬멸한 전투였으므로 큰 공이라 할 수 있다.
임용한은 거란군이 2차 침공과 다르게 10만의 규모인것은 보급부대가 전혀없는 전부 기병으로 이뤄진 전원 전투부대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수도인 개경으로 직행해서 고려왕의 항복을 받아내는것이 목표였으며 시간단축을 위해 기병으로만 군대를 준비했고 보급은 현지 약탈로 물자보충을 할 계획이었으나 알다시피 청야작전으로 실패한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우세한 전력으로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하는 것은 지휘관으로서 지향해야 할 것이고, 이는 손자병법에도 나와있는 유서 깊은 전략의 기본 중 기본이다.''' 소수의 적으로 다수의 적을 이기려 드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역관광당할 확률이 더 높다. 꼭 불리한 여건에서 승리해야 명장이란 생각은 지나친 영웅주의의 발로일 뿐이다. 오히려 소수의 정예로 다수의 적을 이기는 것보다, 이렇게 병력은 많지만 다소 질이 떨어지는 부대를 구성한 뒤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아군에게는 유리하고 적군에게는 불리한 요건을 적이 피할 수 없도록 만든 뒤 싸워서 이기는 게 더더욱 어렵다.[48] 당장 한국사 최고의 명장이자 세계 전사에서도 최상위급 명장이라 평가받는 이순신 장군조차 '''명량 해전이라는 어쩔 수 없는 예외상황을 제외하면 항상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했다. 그렇기에 명장인 것이다.'''
전쟁사에서 양만 많고 질이 떨어지는 대부대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소수 정예인 적군에게 반격을 당해 부대 전체가 와해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손자병법에서 '''유능한 장수는 먼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한다'''[49]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사례이다.
게다가 거란의 장수진 또한 거란 측에서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최정예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총사령관 소배압의 경우, 귀주에서의 참패로 자신의명성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송과 서하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애초에 여요 2차전에서 강조의 부대를섬멸시킨 지휘관이 소배압. 그 외의 지휘관들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하지만, 애초에 송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전과를 거두고 있던 거란군에서, 전사한 주요 지휘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당대의 맥락에서는 나름 유명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4.2. 수공으로 승리했다?


정확히 말하면 고려군이 수공을 사용한 것은 귀주 대첩이 아니라 흥화진, 삼교천 전투에서였다.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들에선 귀주 대첩 당시 수공을 했다는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오해가 생긴 점 중 하나는 "우리 군이 졌는데, 그중 다수가 익사했다."라는 《요사》의 기록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개태(開泰) 7년(1018년)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소배압(蕭排押)이 고려와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하천 사이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익사한 자가 많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고려열전'''}}}
하지만 익사라는 것은 반드시 수공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닌 데다, 귀주 전투는 거란군이 배수진을 쳐서 하천을 등뒤에 끼고 전투를 하였기 때문에 전황이 불리해져 고려군에 밀리거나 도망가다가 다수가 물에 빠져서 숨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4.3. 문관인 강감찬이 왜 총지휘관인가?


강감찬이 문관이기 때문에 베테랑 장군이 이끄는 직업군인들이 행정직 공무원이 이끄는 징집병들에게 대패를 당한 전투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이는 전근대 군대 행정 체계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나온 이야기로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에서 문관이 총사령관을 맡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분열기나 왕조교체기에는 순수 무장이 공을 세우고 공신까지 되는 일도 많았지만, 그렇게 건국하거나 통일한 국가도 안정되면 날 때부터 권력자인 사람들이 무신보다 되기 쉬운 문신이 되어 국가의 최상위 계층을 차지하고 전시에도 군의 총사령관으로 내정되는 일이 많았다.
고려 역시 후삼국 통일 후 나라가 안정되면서 강감찬 말고도 윤관이 여진정벌을 맡거나, 무신정권에서 조위총의 난 진압 사령관을 맡은 윤인첨,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시기 강동성 전투에서 몽골과 연합작전을 펼친 조충처럼 문신이 총사령관으로 출정하는 것이 관례였다.[50] 다른 나라에서도 조선김종서, 권율, 명나라우겸, 원숭환 등과 같이 문관 출신이 전시에 사령관으로 출전한 사례는 많다. 이들 문신 출신 지휘관 하에선 전문가인 무신은 문신을 보좌하고 실제 전투를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51]
전쟁을 단순히 작전 짜서 적을 물리치는것만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인데, 군대라는 거대집단을 이끌다보면 전술을 계획하는것보다는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행정에 더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총지휘관의 경우에는 병참도 신경써야하고, 예하 부대들의 상황을 조율해야 되기때문에 순수 야전군인으로서의 능력보다는 행정가로서의 능력과 정치적인 능력이 더 많이 요구될때가 많다. 그런데 전근대 무장들은 학식과 행정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현대와 같은 행정장교 시스템도 없었기 때문에 문관이 이 역할을 해주어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변경의 수령들을 주로 무관 출신으로 임명하는 것이 방침이었는데, 이때 이들의 행정능력 부족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에 대한 지적이 끊임없이 나왔다.
즉, 총사령관인 강감찬 같은 문관의 역할은 목표를 제시하며 자신들이 필요하다 싶은 영역에서 나서는 것이고[52] 강민첨 같은 무관은 그를 등에 업고 군 병력을 지휘하여 목표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비단 귀주 대첩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이므로 강감찬이 특이한 일은 아니다.[53]
이와 연관된 이야기는 소배압 항목을 참고.

5. 기타


  • 귀주라는 지역이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200여년 후 몽골 제국군이 쳐들어온 여몽전쟁의 시기 귀주성에서 귀주성 전투 또한 벌어진다.
  • 설죽화 설화의 배경이 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 1982년 기념우표의 도안으로 등장했다. ##
  • 남장을 한 소녀, 설죽화가 활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다만 인터넷 등에서는 고려사에 이름을 남겼다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구성군 일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 설화가 그 기원이다.

6. 미디어 믹스에서


한국사에 몇 없는 벌판에서의 대회전이기 때문에 영상화를 바라는 역덕들이 제법 있다. 하지만 영상화가 된다면 의외의 논란거리가 나올수가 있는데, 수십만이 싸우는 벌판에 기병 중심의 지원군이 갑자기 등장, 적들의 후미를 박살내버리며 승리를 거둔다는 장면은 반지의 제왕[54], 왕좌의 게임[55]등에서 이미 나왔기 때문에 잘못했다간 표절 논란에 휘말리기 쉽기 때문. 물론 뜬금없이 기병 지원군을 등장시켰던 영화 안시성과는 달리 실제로 존재했던 장면이니 만큼 논란의 수위가 높지는 않겠지만 연출자로써는 어떻게 표현하든 표절 논란으로 홍역을 겪을 확률이 높다(...)

6.1. 천추태후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약 5분이 안되는 정도로 나온다.
거란군이 대군을 이끌고 오는 모습, 강감찬이 고려군에게 연설하는 것이 끝나면 물가가 있는 땅에서 양 군에서 기병이 먼저 격돌하는 모습이 나오며, 양 군의 보병도 격돌하면서 고려 측에서는 보병은 함정이 있는 지푸라기가 덮힌 지점에 대기한다. 거란 보병이 함정에 빠지자 고려 측 궁병이 멀리서 오는 거란군을 활로 쏴 죽이며, 고려 보병은 함정에 빠진 거란군을 죽인다.
이어서 다른 곳에서는 궁병이 지푸라기 벽이 있는 곳에 불화살을 쏴서 거란군을 혼란시키고 고려 측 보병이 거란 측 보병을 공격하며, 상황이 불리하자 소배압의 부하가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하자 소배압이 "빠져나갈 곳이 없다"고 혼란스러워 한다. 귀주대첩이 수공중심이 아닌 육상전투 중심이었음은 잘 그려냈다.

6.2. 평화전쟁 1019


JTBC에서 제작한 2부작 다큐드라마의 주요 줄거리가 고려 현종여요전쟁의 이야기다. 2부에서 귀주 대첩을 다루고 있다.
1019년 2월 1일, 고려군과 거란군은 구주(귀주) 동쪽 벌판에서 일대 회전을 벌인다. 치열한 전투가 행해지고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막상막하로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개경으로 보냈던 병마판관 김종현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장에 진입한다. 그리고 김종현의 뒤로 고려군을 돕기 위한 또 다른 것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
평화전쟁 1019에서는 김종현과 바람의 등장이 잘 묘사되어 있다.

7. 같이보기


[1] 현종 10년.[2] 趙元. 생몰년 미상으로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지휘부의 도주로 무방비가 된 서경의 방어를 진두 지휘한 문관.[3]요사》에서는 소배압이 출전했다고 기록했으나, 고려사에서는 그의 동생 소손녕이 출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소손녕은 이미 사망한 시기였기 때문에 고려사의 기록은 잘못 된 것이다.[4] 이상 명단은 모두 《요사》에서 발췌.[5] 단 귀주 대첩 당시에는 8만 ~ 9만의 병력이었다. 그 전부터 흥화진과 마탄에서 1만이 넘는 병력이 고려군의 공격에 분쇄되었던 데다가, 개경까지 전격전을 펼쳤으나 고려군의 유격전에 지속적으로 당했기 때문이다.[6] 당시 건국대 산업 디자인과 교수.[7]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 귀주성 유적은 지금도 있다. 다만 이 대첩은 귀주성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8] 여기에 권율행주 대첩이 포함되어 4대 대첩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살수, 귀주, 한산도 대첩이 각각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투들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행주 대첩은 조선시대의 대표 전투인 한산도 대첩에 밀려 주로 3대 대첩으로 많이 언급된다.[9] 이후 회전은 아니지만 공성전으로 홍건적 침입 때 개경 공략전 때도 홍건적 10만 VS 고려군 20만이라는 대규모 사이즈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10] 이때의 병력 규모는 15만 명으로 추산되나, 압록강을 도하하여 실제 고려를 침공한 병력 수는 알 수 없다.[11] 평안북도 서부. 의주군, 용천군, 철산군, 곽산군, 선천군, 귀성군[12] 평안남도 안주시[13] 거란요태종 야율덕광이 정의롭고 어진 자들만을 모아 만든 군대인 어장친군(御帳親軍) 소속 정예병.[14] 베거나 사로잡음.[15] 현재의 함경남도.[16] 당시 호랑이늑대와 같은 맹수들을 상대해야 했던 사냥꾼들은 최정예 병력의 자질을 가졌다. 단병접전(냉병기를 사용해서 벌이는 근접전)에서는 완력보다 담력이 더 중요하다. 냉병기를 사용한 회전의 경우 전체 사상자의 95%는 전열이 무너져 패주할 때 생기는 사상자이다. 실제 전투에서 생기는 사상자는 5% 정도였다. 때문에 전열이 무너지지 않도록 함성이나 북소리로 병사들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묘사가 있는 것.[17] 사실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함경도가 해당 지역이 수시로 북방민족이 쳐들어오는 소규모 교전이 발발하고, 조선시대에는 툭하면 예방전쟁으로 레이드를 뛰고 다니던 동네다. 임진왜란의 발발, 명나라의 국가 막장 테크로 조선이 이러한 동북면에서의 예방전쟁 여력을 상실한 것이 후금의 세력 확대에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다. 군대에서 실전경험만큼 병력의 질을 높이는 훈련은 없다. 그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력들이 동북면 병사들인 것이다. 또한 해당 지역은 체격이 좋은 북방 유목민족이 사실상 공존하는 지역이다 보니 근대 신장조사에서도 다른 한반도 지역보다 평균신장이 클 정도로 체격여건도 좋았다. 화기로 전쟁하는 현대에도 병사의 체격이 튼실하면 전투력 측면에서 큰 이점을 가지게 되는데, 하물며 개개인의 신체스펙이 현대전 이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는 냉병기 시대의 전장상황을 생각하면 다른 지역의 병력 '''따위'''와 비교하기가 힘든 수준이었을 것이다.[18] 꽤 고증에 공을 들인 이미지로, 실제 풍경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19] 참고로 2차 침공 당시엔 현종은 강조의 정변으로 옹립된 바지사장이었기 때문에 실권이 없었으며 실권자였던 강조통주 전투를 통해 고려 주력군 30만을 홀라당 날려 먹어서 선택지가 도망 or 항복뿐이었고 결국 도망을 선택한 것. 3차 침공 때는 2차 침공과 달리 자신이 실권자였고 선택지도 도망, 항복, '''싸움''' 3가지로 늘어나 있었다.[20] 현재의 황해도 신계군.[21] 당시 개경의 나성으로 송악성 혹은 발어참성으로 불렸다. 이후 황성으로 전환된다.[22] 거기다 더 놀라운 사실은 왕이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수도에서 항전을 하겠다는 것에 고려 군사들뿐만 아니라 안에 있던 백성들이 감격하여 그야말로 사기가 충만했을 것이다. 청야전술 때문에 식수와 군량을 확보할 수 없고, 거기다 왕이라는 자가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수도에서 결사항전을 외치며 버티고 있어 군사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사기가 올랐으니 거란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난관 그 자체였다.[23] 오늘날 황해도 금천군이다.[24] 성밖의 모든 식량과 물자, 주민들을를 성안으로 옮긴데다 우물을 메워 식수를 얻지 못하게 했다.[25] 여기서 역습해서 고려군 주력을 격파하고 추격의 맥을 끊자는 생각이었다고 추측된다.[26]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강을 말한다. 순서대로 각각 삼교천과 청천강을 이르는 것으로 보이며, 이하에 거론된 "요사"나 "송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27] 볼가 강 때문에 독일군이 시가지를 포위하지 못하고 정면공격만 반복해야 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비슷한 상황이 된다.[28] 다만 강을 하나 건너온 고려군 역시 배수진을 치게되므로 고려군 역시 이러한 이점을 그대로 누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강을 하나 건너오는 시점에서 고려군도 자동으로 배수진을 치게되기 때문이다. 다만 평원지대를 전장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고려군보다 거란군에게 훨씬 이득이었다. 따라서 거란군에게 배수진을 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후술하듯 기병을 운영하기 유리한 귀주평원을 차지하기 위해선 강 두개를 고려군이 모두 건너는 것을 피하는것은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29] 머나먼 타국의 수도를 치기 위해 원정을 온 군대인만큼 거란군 중에서도 최정예들이 뽑혀왔다. 살수대첩 당시에 평양을 공격하기 위해 보낸 30만 군대 역시 100만 수나라 군대에서 엄선된 군대였다. 또한 역사상 많은 원정들의 주력은 정예 부대가 맡고 전쟁을 선도하였다. 이를 증명하듯 이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즉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는 말) 우피실군은 요나라(거란) 황제의 친위대였다.[30] 오해가 있을까 첨부하면, 붉은 원형의 넓이가 귀주성의 넓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실제 크기는 위의 그림의 "귀주성" 우측 상단 꼭지점 부근에서 조금 위쪽이 귀주성의 남문 겸 정문이었다. 방송에서 대략의 위치를 묘사하기 위해 저렇게 표현한 것.
[image].
[31] 그런데 의도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게 귀주대첩의 경우 매우 이상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보여주고 있다(자마 전투칸나이 전투에 비견할 만하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볼 때 강감찬은 망치 역할을 할 김종현의 군대가 어느 시점에 정확히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하진 못하지만 김종현의 군대는 분명히 오며 그때까지 본인의 군대가 충분히 모루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 온다고 생각했지 정확하게 언제 올지 몰랐기에 강감찬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너무 타이밍이 좋아서 그야말로 천운인 셈이다.[32] 후대 이괄의 난 때 반란군 쪽으로 돌풍이 불어 반란군이 시야 확보에 애를 먹었고 한술 더 떠 관군이 재를 뿌린 데다가 이괄이 도망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고춧가루를 뿌렸다는 말도 있는데 고춧가루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군용으로 쓰기는 곤란했을 것이다.[33] 100만이어도 패잔병에 불과하단 것이 절대 과장이 아니다. 비수대전때는 고려처럼 20만이라는 대군도 아닌 동진의 8만 병력에 100만이 넘는 전진의 군세가 모랄빵이 나면서 북조를 통일한 왕조가 무너져 버렸다. 현대전에서도 각 부대가 정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근대 이전의 전투에서 방진이나 전열이 무너지는 것은 사실상의 전투 종료임과 동시에 일방적 학살의 시작이었다. 긴급히 징집된 경보병들의 실제 전투에서의 역할은 이렇게 상대의 전열을 무너뜨린 상황에서의 섬멸전과 진지구축 등의 잡무다. 과거 전사를 보면 얼핏 보기에 굉장히 단순히 '패주를 가장한' 유인작전에 말려드는 지휘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전열이 무너진' 적 병력을 물리적으로 섬멸하지 않으면 전투 규모에 비해 사상자가 적게 나오는 전근세 전투의 특성상 물리적 섬멸이 반드시 필요했고, 물리적 섬멸은 포위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전열이 무너져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면서 공격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문헌으로 보기엔 단순한 작전 같지만 아군의 패퇴병력이 적 주력을 유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있어야 하면서도 패퇴하는 아군과 그 아군을 지원해야 하는 본대가 모랄빵이 나지 않고 역습시 순간적으로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어야 하는 초 고도의 전술이다. 어설프게 그 짓하다가 100만 대군을 말아먹은 훌륭한 예시가 상술한 비수대전이다.[34] 또한, 갑작스러운 돌풍에 말들도 놀라서 궁기병뿐만 아니라 다른 기병들도 힘을 못 썼을 가능성도 높다.[35] 아닌 게 아니라 안융진을 막고 있던 수비장이 '''발해 유민''' 출신으로 고려에서 중랑장을 맡고 있던 대도수였다.[36] 我生還者, 僅數千人, 契丹之敗, 未有如此之甚(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 정확한 출처는 고려사절요다. 고려사절요 권3 >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 현종(顯宗) 10년 > 2월 > 강감찬, 김종현 등이 귀주에서 거란군에 대승을 거두다[37] 통주 전투 때에는 다름 아닌 거란 황제인 성종이 직접 참가해 싸웠기에 군대의 규모가 컸다. 하지만 성종도 2차 침입 때 고려 충신들의 활약에 자신이 까딱 잘못하다가 후미를 잡혀 포위를 당한 경험이 있어서 오히려 3차때 침입했다가는 더 큰일났을지도 모른다. 일단 고려가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현종은 그때와는 다르게 도망가지도 않았다. 거기다 강감찬이 싸울 장소도 고르고 청야 전술까지 펼친 것도 모자라 거란군들은 한반도 지리를 잘 모를 가능성도 있기에, 만일 귀주대첩에 요 성종이 참전했다면 그야말로 요 성종이 목숨을 잃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다.[38] 성종이 이런 소릴 한 이유는 거란족이 흉노족으로 부터 갈라져 나온 별부이기 때문. 흉노족의 주요 관습 중 하나가 적장의 목을 베어오거나 반란 혹은 죽을 죄를 지은 자는 머리의 가죽을 벗겨 손수건으로 만들어 말의 고삐에 걸거나 인장가죽으로 만들곤 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벗겨서 남은 두개골은 소가죽이나 금박을 덧입혀 술잔 즉, 음기로 만들곤 했다는 기록이 여러 흉노 관련 기록에 두루 나타난다. 실제로 흉노족의 족장이 월지의 왕의 머리로 음기(술잔)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무수히 나오며 이런 말을 한 연유도 일부 관습이 흉노가 망한 이후로도 몇 백년 가까이 지나며 부족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잔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39] 소배압요성종의 모후인 승천태후 소씨의 조카였다. 한마디로 성종의 외사촌 형님인 셈이다.[40] 정'''의'''가 '''흥'''한 '''역'''관.[41] 명예 태위, 중서문하성 차관, 천수현 남작을 받은 것이다.[42] 왕가도가 주도. 기존의 나성이었던 송악성은 황성이 됨.[43] 유소가 주도.[44] 기록에서도 고려가 아닌 거란군 10만에 대해 대군으로 기록했다.[45] 화기가 발달하기 전까지는 기병이 보병 10명을 족히 상대한다고 평가되었다. 냉병기를 사용하던 시절에 기병의 역할이 중요하던 시기였었다.[46] 이 떄가 얼마나 절망적이냐면 우선 강조가 패배함으로서 개성까지의 길이 사실상 활짝 열렸다. 즉 상주 전투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조선과 마찬가지였다는 것 더욱이 몽진과정에서의 현종의 고초를 생각해보면 답이 없다.[47] 여담으로 현대의 국방 전문가들은 1개 기계화보병 사단은 약 3개 일반 보병 사단에 맞먹는 전투력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대한민국 육군의 8개 군단 중 기계화보병사단 위주로 구성된 제7기동군단이 괜히 육군 최강 부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48] 나폴레옹의 전성기 시절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은 황제가 소수로 다수를 격파했다고 이야기했지만 나폴레옹은 자기는 한번도 소수로 다수를 격파한적이 없다고 이야기 하였다. 즉 전술과 전략의 천재 나폴레옹 또한 접전지역에선 숫적 우위를 확보함으로서 병력수의 절대적 불리함을 극복한 것이다.[49] 정확히는 승병선승이후구전(勝兵先勝而後求戰), 풀이하면 '이겨놓고 싸운다.'[50] 윤관과 윤인첨은 조금 예외인 것이 윤관은 지군국중사라는 특별 직위를 받아 별무반을 지휘했다. 윤인첨은 문관 출신이지만 상장군 무관직을 받아 형식상 무관이기도 했다.[51] 윤관 밑의 척준경, 김종서 밑의 이징옥이 그 예이다.[52] 가령 진군로 상에 위치한 지방의 유력자에게 명령을 내려야 할 때는, 무신과 같은 전문직 계층보단 '높으신 분들'인 중앙 고위 귀족의 한마디가 더 위력적이다.[53] 무관인데도 뛰어난 행정능력을 보여주는 문무겸비의 무장도 찾아볼수 있는데 최윤덕,이순신있는데 전자는 4군6진 개척이라는 행정업무가 필요한 업적을 세워 정승의 자리인 좌의정까지 올랐고, 후자는 중앙정부의 보급이 없는 상황에서 수군 전투력을 유지, 확장할 정도의 행정역량을 보여주었다.[54] 왕의 귀환, 펠레노르 평원의 전투.[55] 시즌 7 서자들의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