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국
[1]
1. 개요
定安國
938년? ~ 985년 12월? / 986년 1월? (10세기 전반)
발해 유민들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국가로 만주와 압록강 유역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요에 저항하여 발해부흥운동을 일으킨 수많은 세력들 중 하나인데, 발해부흥운동 중에서 50년 가까이되는 긴 존속기간을 미뤄보아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짐작할 수 있으나[2] 역시 기록은 부족하다.
발해 부흥국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한 국가인데, 정안국은 수십년을 존속했으나 이후 정안국 유민으로 보이는 오소경이 995년 올야국(兀惹國)을 세웠지만 다음해 다시 거란에 항복했다.[4]
발해부흥운동으로 세워진 국가들의 기록 자체가 별로 없는 데다가 이 국가들의 역사의 비중에서도 크지 않기에 역사 교육에서도 이 국가들에 비중을 두어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거란의 제1차 침입의 원인에서 거란의 정안국 정복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정규 교육과정에 언급되었다. 즉 발해의 멸망부터 여요전쟁 발발까지의 60여년은 정안국이 거란의 침입을 받아주는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해주었고 그 덕택에 고려는 정안국이 잔존했던 기간 동안 건국 초기의 혼란함을 가라앉히고[5] 국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2. 역사
2.1. 정안국 건국
926년 거란이 발해의 상경용천부를 공격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동란국(東丹國)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당연히 일본 등 국제 사회에 (고려라 자칭한) 발해의 후계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930년 4년만에 요나라 황족 야율배의 후당 투항으로 요의 직할령으로 흡수되었다. 단 정식 흡수에 대해서는 936년 설도 존재한다. 동란국이 사라졌고 요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 옛 발해 땅에는 발해 왕족 / 귀족과 유민들이 여러 집단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세력이 뿔뿔히 흩어지고 있었다.
이때 열만화(烈萬華)가 938년 경에 후발해의 일부 세력을 이끌고 정안국을 건국했다. 남경 남해부에서 근거지를 옮겨 압록강 유역에 건국한 것이 통설이다.[6] 그러나 그보다 북쪽의 요하 유역이나 발해의 구도인 상경 용천부 부근으로 보는 이설도 있다.
2.2. 파편적인 기록들
946년 백두산이 폭발했다. 압록강은 백두산의 화산쇄설류가 그대로 뒤덮이는 범위 안에 있었으므로 엄청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70년에 열만화가 송나라(북송) 태조에게 사신을 보냈다.
976년에 오현명[7] 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원흥(대흥)으로 정했다. 오현명이 열만화와 성씨가 다르기 때문에 정변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뒤따르지만, 열만화의 성씨가 오 씨, 즉 오열만화이므로 정상적 계승이라는 이설도 있다.
979년 발해의 유민이 또 고려로 투항했다. 981년 오현명이 송(송태종)에 사신을 보내 요를 협공하여 반씩 가지는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송은 서하를 견제하는데 정신이 없었으며 요에는 오히려 밀리는 형세였다. 983년 ~ 984년에 결국 요가 정안국을 털어갔다.[9]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아룁니다. (중략) 신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서 (중략) 근년에 거란이 강포한 힘만 믿고 우리 영토를 침략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으나, 저희 할아버지께서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8]
백성들과 함께 난을 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힘을 길러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 부여부가 근래에 거란에서 등을 돌려 우리 나라에 귀순하였으니, 재앙이 장차 이르게 되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천자의 조정으로부터 비밀 계획을 듣고, 정예의 군사를 거느려 거란 토벌을 돕고자 합니다. 기필코 원수를 갚고 싶으니, 감히 명령을 거역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오현명은 진실로 간절히 원하며 삼가 고개를 숙입니다.
원흥 6년(981년) 10월 ?일,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성스러운 황제 앞에 표문을 올림.
985년에는 고려에 SOS를 보냈고 잠시 통교하기도 했지만 곧 관계가 끊겼다. 고구려의 계승국을 자처한 고려이긴 하지만 명분과 동포애보다는 냉철한 이해 관계가 앞선 것으로 보인다.[10] 고구려의 후계인 발해의 후신 정안국은 잠재적으로 고려랑 맞서 고구려의 정통성을 다툴 소지가 있었을테니. 거기다 당시 고려는 2대 혜종부터 4대 광종까지 호족세력간의 치열한 내분이 있다가 겨우 정리하고 행정 체계를 정비한 수준에 그쳐 있어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는 지는 의문이다. 당시 요나라가 현재 의주 지방에 내원성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지도 못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거란에 탈탈 털리면서 정변까지 일어났다. 고려는 정안국의 일을 들어 흥료국에도 역시 지원군을 보내질 않았다.
2.3. 멸망
결국 정안국은 985년 12월 ~ 986년 1월 경 요나라에게 재차 공격받아 재건한 지 2대 48년만에 멸망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 땅에 4개 주(州)를 설치하였다고 하니 나름대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는 있으나 발해와 마찬가지로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993년 발발한 1차 여요전쟁에서의 서희의 담판으로 멸망했다는 와전된 썰도 있으나, 연도에서 보듯 이는 정안국의 멸망 7년 뒤에 일어난 일이다. 도리어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기 위해 방해 요소인 정안국을 제거하면서 주변국(특히, 고려)을 떠보는 수순이었다. 한편으로 서희가 거란과의 협상에서 정안국의 부흥 세력인 후발해국 등을 여진족의 범주에 넣었을 가능성이 유력하지만, 협상의 대상이었던 강동 6주(압록강 ~ 청천강 사이에 있는 오늘날의 평안도 서북 해안 지방)는 당시 발해 부흥 운동의 중심지와는 꽤 거리가 있는 지역이었다. 거기다 여진족들이 발해가 건재했을 때에도 고구려계와의 동화가 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1차 여요전쟁이 일어나기 3년 전 고려가 이 지역에 대한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니 정답이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3. '마한의 한 종족'이라는 기록
정안국은 그 역사는 짧으나 엄연하게 중국 정사 열전에 수록된 국가다. 이 열전에서 정안국 = 마한이라는 발언이 나온다. 삼국시대 때부터 고구려의 별칭으로 한, 삼한, 마한, 변한 등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11]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馬韓)의 한 종족이다. 거란(契丹)에게 공파되자 그 서비(西鄙)를 지켰다.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破 保其西鄙.
송사(宋史) 정안국전(定安國傳)
4. 역대 국왕
5. 둘러보기
[1] 동경의 위치가 잘못되었다.[2] 다만 기록상으로 보면 후발해가 더 길수도있다. 정안국 멸망이후에도 계속 기록이 나오기때문. [3] 지금의 신의주.[4] 대씨인 대연림이 1029년 흥료국(興遼國)을 세우고 여진 등 세력을 키워 요나라에 대항했으며 고려에도 지원 요청을 보냈다. 하지만 괜히 요나라에 개기고 고려가 돕지 않아 역시 다음해 멸망했다. 요나라의 지방관이었던 고영창이 건국한 대발해(대원국)는 1116년 1월에 건국했으나 역시 금나라와의 대립 끝에 4개월만에 멸망했다. 고려는 이 과정에서 보주[3] 를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다.[5] 고려 초기는 왕건의 무분별한 혼인정책으로 호족간의 다툼이 치열했고 광종(고려)이 겨우 수습했다. 이후에도 복수법 같은 뻘짓도 있었는데 이런 혼란기에 거란이 쳐들어왔다면 고려의 운명은...[6] 압록강 유역은 발해의 5경 중 하나인 서경압록부가 위치했던 곳이다.[7] 열만화를 도운 오제현의 후손이라고도 한다.[8] 이에 따르면 열만화는 그의 할아버지 격이 될 수 있다.[9] 상술했듯이 정안국의 국력도 굉장히 약했다.[10] 반면 초기 고려가 여진족 - 정안국 - 북송과 함께 거란을 포위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연대를 방해하려는 거란의 간섭에 의해 쉽게 좌절되었다고.[11] 백제나 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