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요전쟁

 


'''여요전쟁(麗遼戰爭)'''
'''고려-거란 전쟁 / Goryeo–Khitan Wars'''
'''시기'''
993년(성종 12년) ~ 1019년(현종 10년)
'''장소'''
한반도 북부 전역
'''원인'''
고려의 대요(對遼) 강경 외교
요나라의 예방전쟁.
'''교전국'''
고려 [image]
요나라/거란
'''지휘관'''
고려 성종[1]
고려 현종[2]
서희
강조
양규
김숙흥
정성
지채문
강감찬
강민첨
이현운
하공진
최사위
탁사정
최질
김훈
대도수
유방
조원
김종현
<^|1>요성종
소손녕
소배압
야율적노
야율분노
야율팔가
해리
고청명
아과달
작고
'''총병력'''
1차 [3]
2차 300,000
3차 200,000[4]
1차 800,000(호왈)[5]
2차 400,000
3차 100,000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려의 승리. 고려 - 요나라 사대관계 체결.
'''영향'''
'''북송 - 요나라 - 고려의 균형 관계 구축'''
1. 소개
2. 명칭 문제
3. 제1차 침입
3.1. 전쟁 직전 상황
3.2. 말로 거란군을 되돌리다.
4. 제2차 침입
4.1. 전쟁 직전 상황
4.2. 40만 대군의 침공
4.3. 현종의 피난길
4.4. 양규, 김숙흥의 맹활약
4.5. 요나라의 퇴각
5. 제3차 침입
5.1. 전쟁 직전 상황
5.2. 고려의 대비
5.3. 요나라의 침공과 귀주 대첩
6. 전쟁 결과
6.1. 결과
6.2. 동북아 정세에 미친 영항
6.3. 세계사에서
6.4. 미디어에서
7. 이후의 충돌
7.1. 소규모 국지전
7.2.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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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993년(성종 12년)부터 1019년(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3차례에 걸친 거란(요나라)의 고려 침략으로 발발한 전쟁.
끝까지 맹렬히 저항한 고려의 대승으로 끝났으며 거란중국몽골에 흡수되어 더 이상 지구 상에 현존하지 않는 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이나 조선시대임진왜란 등 다른 주요 전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간략하게 다뤄지는 경향이 있지만, 동원된 군인의 수만 봐도 앞에 적은 전란들에 결코 덜하지 않았던 큰 전란이며 '''후일 고려사의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큰 전쟁이다. '''
특히 발해를 무너뜨리고 만주를 차지한 '''외세''' 요나라를 임금인 현종부터 강감찬, 양규를 비롯한 고위관료 그리고 고려의 온 백성들이 합심하여 자력으로 완벽하게 격퇴한 대한민국 역사에서 마지막이라고도 볼 수있는 정석적인 전쟁이다.[6]
이 전쟁에서 망국 발해의 유민들은 고청명과 같은 요나라 소속과, 대도수처럼 고려 소속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았다. 이후 발해인들은 여요 각국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된다.

2. 명칭 문제


이 전쟁의 명칭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신편) 한국사' 등의 서적과, 공무원시험 등 주요 공식 시험, 학술논문 등에서는 '''여요전쟁'''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다만 국사 교과서에서는 '거란의 침입'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거란족이 처음으로 공격한 993년부터 귀주대첩으로 전쟁이 끝나는 1019년 당시까지 사용한 정식 국호는 '거란'이었다. 거란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국가의 명칭을 종족-민족명에서 유래한 '거란'과 요태종 때 만들어진 ''를 쓰다 말다를 반복했는데, <요사> 성종 2년(983년)에 '국호를 다시 거란으로 바꾸었다'는 기술이 존재한다. 거란이라는 국호를 다시 '요'로 바꾼 건 1066년 요도종 때인데 그나마 요가 국호이던 시절에도 귀족들은 거란어를 사용했기에, 물론 한자로는 요라고 썼어도 거란어로는 '모스 키탄(대거란)'이라고 계속 칭했다. 따라서 정작 전쟁 중에는 '요'라는 국호를 사용한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란이나 요나라 항목도 참고.
하지만 하나의 국체를 끊임없이 유지한 나라가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을 때 그중 가장 유명한 이름으로 그 국체의 전 시기를 다 지칭하는 경우는 흔하다. 대표적으로 고구려만 해도 장수왕 때부터 국호가 고려로 바뀌는데, 후의 왕건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변경 이후도 고구려라고 부르고 있다. 백제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했다는 기사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백제라고 불린다.[7]
비슷하게 당대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명칭임에도 후대인들의 편의를 위한 통용명칭이 역사용어로써는 정식명칭으로 자리잡는 경우 또한 흔하다. 예를 들자면 일본 전국시대부터 영주들이 다스리던 영지를 일컫는 번(제후국)(藩)도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편의를 위해 통용하던 명칭이 정식으로 자리잡게 된 경우이며, 중국사의 수많은 국호들도 당대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지만 후대인들의 편의를 위해 통용된 명칭이 정식명칭으로 자리잡았다(북연, 후연, 전진, 서진 등). 한국사에서도 물론 예외는 아니라 고조선, 북부여, 동부여, 후백제 같은 정식명칭으로 자리잡은 통용명칭이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여요전쟁 또한 특별히 혼동을 유발하는 게 아닌 이상 후대인들의 역사용어로써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위키백과 한국어판에서는 '고려-요 전쟁'과 '고려-거란 전쟁'이 같이 쓰이며, 일본어판에서는 '契丹の高麗侵攻(거란의 고려 침공)'이라고 쓴다. 한편,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Goryeo–Khitan Wars(고려-거란 전쟁)'라고 표기하고 있다.[8][9]
한국에서도 고려-거란 전쟁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부 쓰이기도 한다. 예로 안주섭씨의 명지대 박사 논문 제목은 '''고려-거란 전쟁사 연구'''이다.

3. 제1차 침입



3.1. 전쟁 직전 상황


거란은 916년 나라를 세운 지 10년만인 926년에 만주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발해를 공격해 무너뜨려 만주 지역을 손아귀에 넣은 뒤, 곧이어 인접한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942년에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냈었다.[10] 그러나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거란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로 인식[11]하여 그 사신들을 섬으로 모조리 유배보내고, 낙타는 모두 개성 만부교 아래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 만부교 사건으로 인해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고, 고려에서는 태조 이래로 거란에 대한 적대노선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아직 이때까지는 본격적인 전란으로까진 이어지지 않았는데, 거란 입장에서는 중원에 자리하고 있던 송나라를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후방의 안정을 도모해야 했고, 아직 정안국 같은 발해 부흥 세력들도 거란을 상대로 저항하고 있던 판국이었기 때문에 그 후방에 있는 고려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고려는 당시 멸망한 발해의 잔존세력을 계속해서 흡수해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므로 그들 때문이라도 정치적 역학관계상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려는 이후에도 북진 정책과 왕건의 훈요 10조를 충실히 따라 거란을 배척하는 한편 송(북송)과의 친선을 도모했고 광종대인 960년에 본격적으로 송나라와 통교하기 시작했다. 이 때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북방에 주둔 중이던 거란에 대한 경략을 시도했고, 발해 유민들이 세운 국가인 정안국송나라와 화친하면서 거란에 대항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986년 정안국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멸망시키고는 만주 전체를 장악한 다음 고려에 송과 친교를 끊고 거란에 화친할 것을 요구해왔다. 결국 993년, 10월 요나라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때 소손녕은 봉산[12]에서 윤서안이 이끄는 고려군을 무너뜨리고는 윤서안을 포로로 잡고 봉산을 점령했다. 그 다음엔 거란의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면서 빨리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향해 윽박질렀다. 물론 80만 대군은 소손녕의 허풍이었고 실제로는 많아봐야 10만 이하 병력만 동원했다는 게 통설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거란 측 선봉장이었던 소손녕의 직책이 동경유수였다. 동경유수의 위치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의 수는 최대 60,000명 정도였다고 하니 소손녕이 이끌고 온 거란군의 규모도 그 정도 규모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나마도 최대치이니 실제로는 더 적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 청천강을 건너기 위해선 안주성을 공격하는 것이 더 빠르다. 그리고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압록강 이후 안주를 거쳐 평양을 가는게 큰 길이다. 그런데 소손녕의 병력은 안주성을 빙 돌아가 조그마한 토성인 안융진을 공격한다. 즉, 현대로 바꿔 얘기하면 부산 - 대구 - 대전 - 서울로 통하는 큰 길 고속도로 놔두고 부산 이후 김해 등을 거쳐서 국도로 빙 둘러가는 식이다. 심지어 그 자그마한 토성 안융진을 공격하다 대도수에게 패했다. 즉, 고려군의 정규군 병력이 많이 있을 만한 곳은 의도적으로 피해서 길이 안 좋더라도 고려군이 적은 곳을 공격하는 식이다. 이 전략을 사용하면 고려군이 예상치 못한 곳을 공격할 수는 있더라도, 수도인 개성까지 속전속결로 가는 전략을 쓸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이후의 거란군과 달리 1차 침입 때는 개성까지 쳐들어갈 생각이 없었다는 것. 거란이 대군을 투입한 2차 침입부터는 둘러가지 않고 개성으로 직진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 안융진 전투 이후 거란이 줄기차게 회담을 요청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1차 침입은 일종의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했다.
  • 사실 소손녕이 고려로 공격을 온 것은 거란이 본격적으로 고려를 침공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여진에 약탈할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아 고려로 넘어온 것이다.

3.2. 말로 거란군을 되돌리다.


[image]
'''자북령 이북 할지론에 의거한 고려 영토.'''
그러나 이러한 거란의 침입에 고려는 매우 동요했으며, 신료들은 "항복하자"(항복론)와 "항복만 하면 받아주겠냐, 땅도 같이 떼줘야지."(자비령 이북 할양론)로 나뉘었다. 이때 오로지 서희만이 소손녕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다. 이어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이 소손녕의 거란군을 격퇴하자 조정은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이때 소손녕이 다시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image]
'''서희와 소손녕(蕭遜寧)의 담판'''
회담은 처음부터 서희와 소손녕의 기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의전 분쟁'''이라고 한다. 의전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의전이라는 것은 유럽이든 아시아든 어디에서든 간에 존재했으며, 의전 싸움으로 인해 회담 자체를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 소손녕과 서희는 회담의 성격을 결정하기 전에 '''누가 더 높은 지위인가'''에 대해 의전 싸움을 벌였으며 결국 서희가 주장한 '''동등 의전'''을 관철함으로써 의전 분쟁에서 승리했다.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라고 당당히 되받아쳤다. 이 과정을 두세 번 반복해도 소손녕이 계속 이를 고집하자 서희도 숙소로 철수하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결국 소손녕이 한발 물러나서,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로 마주 앉았다고 한다. 사실 협상은 현대 국가에서도 협상 전의 기싸움이 적어도 결과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기싸움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오해하기 쉬운 점이지만, 이것은 서희가 무턱대고 뻗대서 주장을 관철시킨게 결코 아니다. 소손녕의 진짜 목적(회담 타결)과 약점(실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시 거란의 주적은 고려가 아닌 연운 16주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이던 '''송나라'''였고, 고려 침공은 송나라와의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사전 정지(整地) 작업이었다.[13]
회담은 고려가 어느 나라를 계승했으며(역사적 연고권), 왜 고려가 가까운 요나라가 아니라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느냐(외교 문제)는 이야기를 주된 화두로 삼았다.

'''소손녕''': 고려는 옛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우리 영역 안에 있는데 어찌하여 옛 신라 땅에서 일어난 나라가 옛 고구려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것이오? 우린 이미 옛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차지했단 말이오.

'''서희''':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소.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려라고 이름을 지었고,[14]

수도가 평양인 것[15]도 고구려를 이으려는 것이오. 그러니 따지고 본다면 거란의 동경(지금의 랴오양)도 우리의 땅인데 누가 누구한테 침략을 한다는 것이오?

'''소손녕''': 그럼 도대체 왜 우리 요나라랑 더 가까운 위치이면서 송나라하고만 교류를 하는 것이오?

'''서희''': 요나라와 교류를 못한 건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러하오.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을 우리한테 준다면야 어찌하여 요나라와 교류를 아니하겠소?

이 회담으로 거란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북도 서쪽 일대인 강동6주[16]를 얻게 되었다. 위의 대화는 꽤나 간략하지만 서희가 거란 진영에 머무른 시간은 7일이었다. 다만 '''실제 담판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현대의 외교 협상에서도 5일(월요일~금요일)짜리 협상을 한다 했을 때, 협상 수석대표들이 실제 담판을 하면서 협상의 큰 틀을 짜는 시간은 1일 중 길어야 2~3시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본국과 연락하며 협상 조건이 본국 방침에서 수용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과, 수정 제안을 위해 회담 실무진과 수석대표 간 사전조율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내용은 요약된 것일지언정 그리 많이 축소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기록에 남은 공식회담 외에 치열한 막후협상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과거나 현대나 외교전에서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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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6주(江東六州)'''
다만 강동6주는 정확히 말하면 거란의 영토라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미개발 상태로 일정한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여진족(말갈)의 영역이었기 때문. 그러므로 영토 할양이라기보다는 고려가 강동 6주를 공격해 점령하더라도 이것을 인정하겠다는 뉘앙스의 담판이었다. 이 때 거란은 고려가 그렇게 쉽게 강동 6주를 평정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겠지만, '''고려는 그렇게 했다.''' 게다가 험한 지형인 이 일대에 방어 시설까지 갖추게 되자 훗날 거란이 몇 번이고 고려를 쳐도 이 요새들의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며 '''거란군은 멸망 전까지 단 한번도 이 강동 6주의 요새 지대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일부 도서에서 서희의 (거란과 고려의 영토싸움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고려라는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명분론의 승리'라고 칭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쪽이 아니라, 거란이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속셈과 고려에 대한 걱정, 변경에서 활개치는 여진족이라는 국제정세를 잘 파악한 서희의 정세 파악과 협상 능력을 중점에 두어야 한다.
국내 위인전이나 교양 역사서에선 소손녕이 멍청해서 서희한테 말빨로 발렸다거나, 혹은 고려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에 무턱대고 일리가 있다며 물러났다는 내용을 싣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 몇 마디에 자기 나라 영토를 떼어주고 좋아서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소손녕이 자기 마음대로 강동 6주를 넘겨줬다면 거란 황제가 소손녕을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의 반박에 소손녕이 순순히 물러났던 것은 거란의 진짜 목표가 고려의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당시 요나라송나라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배후의 고려가 송을 돕는답시고 뒤에서 치고 들어오면 골치가 아팠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고려와 친교협상을 맺거나, 적어도 송나라와의 관계를 접게는 만들어야 했다.
즉, 요나라는 주적인 송나라를 치기 전 고려와 협상을 맺어 배후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일 뿐, 고려에서 국력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이 계획의 일환이었으며 소규모 전투만을 반복하다가 안융진 전투 이후로 거란 쪽에서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했다. 소손녕은 당시 거란의 의도를 충실히 대변했던 것 뿐이다.
그 뒤 '''고려는 잠시나마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쓰면서 거란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서희는 이걸 간파하여 이 부분에서만큼은 고려가 갑질을 해도 괜찮으리라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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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동 6주는 애시당초 거란의 영토도 아니었다.''' 본래 이곳은 발해의 영토였으나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거란의 중앙 세력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해서 이곳은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되었다. 발해의 지배층 대부분이 거란에 끌려가거나 고려에 투항한 후 그곳은 미개발 상태로서 여진 세력이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도 없이 살고 있었다.[17] 서희는 거란과 고려가 힘을 합쳐 여진족을 몰아내고 통상로를 만들면 자연히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할 것이라 말했는데, 거란 영토를 할양받은 것이 아니고 고려가 압록강 이남의 서 여진 세력을 밀어내고 강동 6주를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고 이를 거란 황제가 하사하는 식으로 형식만 갖추겠다는 뜻이다. 앞뒤로 적을 만들 순 없었던 당시 요의 입장에선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후 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전연의 맹을 맺은 요나라는 기존 고려와의 관계도 재설정할 필요성을 느꼈고[18]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요를 사대하겠다고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와, 고려국왕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하여 고려 현종시대에 2차 침략을 감행했다.
한편 고려는 강동 6주를 얻음으로서 압록강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고 이 지역은 북방 방어의 중심지로서 여요전쟁 때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윤관여진 정벌 이후 보주를 얻게 되면서 압록강 이남이 완전히 고려의 영토에 편입된다.
그런데 서희의 원래 구상은 강동 6주를 되찾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압록강 너머까지도 염두에 둔''' 듯한데, 《고려사절요》에는 소손녕과 협상하고 돌아온 뒤, 거란에 사신을 보내려는 성종에게 "제가 소손녕과 이야기 하기로는 압록강 안팎으로 우리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몰아내고 옛 땅을 수복한 뒤에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고 약속하고 왔습니다만,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의 땅만 되찾았을 뿐입니다. '''압록강 바깥의 땅까지 마저 회수하고 나서''' 거란과 국교를 맺어도 늦지 않을 겁니다."라고 아뢰었지만, 성종은 "그럴 때까지 거란이 기다려주지 않을 텐데? 괜히 시간 끈다고 트집 잡혀서 전쟁 나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다."라며 거란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弊使)로 보내 국교를 맺었다고 한다.# 서희가 여러 모로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 셈.
한국고대전쟁사 시리즈의 저자 임용한 박사에 의하면, 청천강 이북 지역이 여요전쟁 및 대몽항쟁에서 제대로 된 방어전을 펼 수 있었던 곳이라며 서희의 담판에 대해 꽤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지역의 흥화진(지금의 의주), 귀주 등의 지명은 이후 여진과의 전쟁, 대몽 항쟁, 홍건적과의 전쟁 등 고려의 대외 항쟁사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름이 등장한다. 가히 고려 국방 전략 상 최중요 지역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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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徐熙)'''
이런 점에서 1차 침입은 변변한 전투는 없었지만 '''외교관 한 명으로 가히 나라를 구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의미있는 전략적 승리를 거뒀다.'''

4. 제2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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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장수'''
'''고려 초기 최대의 국가적 위기이자, 고려판 병자호란'''. 이 침입 때 '''고려는 수도 개경이 함락당하는 등 정말 멸망 직전까지 갔었다.'''[19]

4.1. 전쟁 직전 상황


고려는 994년 즉각 북송과 국교를 끊었으나,[20] 성종이 994년 6월, 송나라에 '고려는 진심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증오한다'는 국서를 보냈으며, 성종이 승하한 후에도 목종이 997년에는 이부시랑 주인소를 송에 파견하여 고려가 중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국서를 보내는 등 계속해서 북송에 비밀리에 사신을 보냈다.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한 후 하공진은 강조에게 협력한 대가로 동료 유종과 함께 북방 양계에 주둔하게 되는데 1010년(현종 1년) 봄, 조정의 명도 받지 않은 채 무단으로 동여진 부락을 공격했다 패전한다. 이에 당시 화주를 맡고 있던 유종이 앙심을 품고, 고려 조정에 조회하려고 화주에 들어와 있던 여진 추장과 그 수행원 95명을 모조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학살로 고려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된 여진은 거란에 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대신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했다. 여진의 협력을 얻게 된 요성종은 한 껏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이것도 잘봐야 할 것이 본시 거란 측에서 강동 6주를 주는 대신 여진을 정벌하겠다는 약속이 고려와 이미 있었다. 즉, 하공진이 조정의 명을 받기 이전에 고려 성종과 서희, 그리고 거란 측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했던 셈이다. 무단으로 동여진 부락을 공격했다 패전했다고 하지만 이미 거란과 했던 약속도 깰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본시 거란도 고려보단 오히려 여진이라는 세력부터 제거했어야 했다. 실제로 이후 여진에 대한 제어가 풀어지자 거란이 여진에게 처참히 몰락한 것이 바로 고려의 여진 정벌이 실패하며 여진족이 급성장한 후의 일이다.
즉 하공진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고, 고려 성종과 서희가 강동 6주를 받은 조건에 있던 여진 정벌을 자신이 직접 나선 셈이었다. 더욱이 조정의 명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강조의 정변이 터지고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현종 본인이 왕명을 내릴 상황도 아니었고, 일선 지휘관이 명을 듣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목종 시절 여진 정벌 이야기가 잠잠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김훈, 최질의 난이 터지자 현종은 제대로 된 왕명을 내리지 못했다. 고려 역시도 본격적으로 여진족에 대한 견제가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하공진이 인질로 잡혔을 때 본시 요성종은 하공진을 회유하였고, 하공진도 이것을 이용해 시간을 꽤 지연시켰다. 하공진의 경우는 이전에 있던 나라간의 중대 약속을 지키려다가 행정권의 붕괴, 천추태후의 실정, 원할하지 못한 군량 보급, 그리고 사병 체제의 문제 등으로 패배한 것이었다. 유배 문제의 경우는 오히려 강조에게 협력한 것에 있지, 패전에 문제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강조의 정변이 터지고 현종 1년이면 조정의 명을 내리기엔, 행정권이 붕괴된 상태였다.[21]
현종이 즉위하고 요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린 것을 비롯하여 몇 차례의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요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 정벌의 군령을 내려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사신을 파견하여 목종 시해의 이유를 정식으로 물어왔다. 고려는 두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고, 특히 9월에는 거란의 수도인 동경의 유수에게도 특사를 보냈으나 거란의 강경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4.2. 40만 대군의 침공


고려 조정은 이에 대비하여 10월, 실권자인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에 임명하고, 출정 부서를 정한 뒤 고려 전역에 있던 병력을 있는대로 긁어모아 30만 대군을 꾸려서 통주로 파견보냈다.[22] 또한 귀양보냈던 하공진유종도 복직시켜 거란군의 침입에 대비토록 하였다. 총사령관이 된 강조는 통주[23]에 진을 치고 주둔하며 거란군을 기다렸다. 조정이 명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는 요식행위였고 실권자인 강조 본인이 처음부터 직접 작전을 계획하고 출전했다는 해석이 더 가능성 높다.
이 때 강조는 출전하기 싫었다고 가정해도 어차피 출전을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강조는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라서 아직 권력 기반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본인이 아니면 3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총지휘할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도 문제. 게다가 거란의 침공 명분도 강조 본인의 쿠데타였으므로 이 명분을 지워내기 위해서라도 강조 본인이 직접 출전해야 했다. 그리고 아래에 언급할 강조의 장렬한 최후와 연계해 보면, 강조 본인도 정말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 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 성종은 친히 '''보기(步騎) 40만을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고 칭하며''' 거란군을 진두지휘했는데, 친정이지만 실제 군세를 주도하는 도통(都統)에는 대송 전쟁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선보였던 소배압을 임명하였다. 또한 이전 침공과는 다르게 사신을 보내어 미리 출병 사실을 통지하는 일종의 선전포고를 했는데 이는 단순한 요식 행위가 아닌 고려 조정 내 주전파와 주화파의 분열을 유도한 전술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거란군은 1010년 11월 기존에 알려진 진군로를 따라 내원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까지 행군하였는데, 이곳은 강동 6주를 말발로 털어 잡수신 서희가 안정화시킨 이후 주요 거점이 모두 요새화된 지역이었다. 특히 흥화진은, 11월 중순 경부터 일주일 이상 공략하고도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진사 정성 등이 이끄는 방어군의 거센 저항으로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요 성종이 수비군 20만을 무로대에 남기고 남진을 결정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아무리 흥화진에서 고전했다고는 하나 총병력 40만 중 반이나 되는 20만의 대병력을 후방에 두고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과 대결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라 이 대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 일단 기록을 긍정하여, 내원성이 고려 침공의 중간 기지였다는 점이나 거란군 특유의 기동전 선호 등에서 이유를 찾기도 한다.
  • 기록의 행간을 읽어, 거란이 북송과의 전쟁에서도 20만 넘게 끌고 내려간 적이 없다는 점을 들며, 당시 거란군의 실제 병력을 20만 정도로 파악하는 주장도 있다. 즉, 후방에 남긴 20만은 거짓말, 혹은 일부 병력을 놔두긴 했는데 20만으로 뻥튀기 된 것.
  • 또다른 설로는 실제 병력은 20만이고, 남은 20만은 잡병.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라 그냥 후방에 놔뒀다는 말도 있다. 사람이란 사람 다 끌어모아 치르는 방어전이 아닌 이상, 원정군 입장에선 보급 물자의 소모도 계산해야 하기 때문. 덤으로 잡병은 전투에선 크게 도움되지 않는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은 말기로 갈수록 머릿수만 채워서 병력 수는 늘어나는데, 전투력은 떨어진 것도 이 때문. 그럴거면 20만이나 왜 모았냐고 할 수 있는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예비군의 일종이 아니었을까로 보기도 한다. 40만 대군을 모았는데, 20만이나 놔뒀다는 기록을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의 해석이다.
통주에서는 강조군이 초전에서 거란군을 격퇴시켰지만 강조가 탄기(彈棊)를 하며 방심한 사이 크게 격파당하고 만다. 이로 말미암아 강조를 비롯한 부통사 이현운(李鉉雲) 등 많은 장수가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강조와 이현운도 모두 거란에 포로가 되는데, 이현운이 배신하고 거란을 섬긴다고 하자 강조는 그에게 욕을 하면서 발길질을 했다고 하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결국 죽음을 당했다. 이 때 목종의 혼령이 나타나서 강조를 꾸짖고, 강조가 죽을 죄를 지었다며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이야기가 '''정사인 고려사'''에 나온다. 물론 실제 혼령이 나타났을 리는 없다. 그러나 굳이 사실이라고 본다면, 항복을 거부하며 장렬하게 죽은 강조의 모습과 연관시켜 볼 때 자신의 잘못이 고려의 파멸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목종을 떠올리며 후회한 것을 애둘러 표현한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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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철갑기병'''
그렇게 죽은 강조를 포함해서 죽은 자가 30,000명에 이르렀다. 이 패배로 사실상 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군 주력은 여기서 소멸했다. 이는 2차 여요전쟁 때 3차 여요전쟁과 달리 고려군이 거란군을 상대로 야전으로 승부를 걸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으며, 개경을 그대로 방폐하고 몽진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 때 서경 공방전에서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현종은 거란군을 막기 위해 동북면 도순변사 탁사정과 함흥의 중랑장 지채문을 서경으로 급파했다. 먼저 도착한 지채문이 탁사정과 합류해서 서경으로 입성하기 위해 서경 인근 성천에서 대기하는 동안 서경 유수 원종석은 이미 항복을 결정한 상태였다.
먼저 지채문이 급히 서경에 도착했으나 이미 항복 분위기로 돌아선 서경은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24] 마침내 지채문 막하에 있던 최창이 서경 내의 조자기와 연락해 문을 열었지만 이미 항복 문서는 서경을 뜬 상황. 결국 지채문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하고, 항복 사절을 추격하여 그를 죽인 뒤 항복 문서를 불태웠다. 그러나 이 극약 처방에 서경 민심이 "지채문 저놈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며 극도로 흉흉해졌고, 이에 이기지 못한 지채문은 다시 서경 성내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이 순간 거란군 진영에 현종의 시간 끌기용 항복 표문이 도달해 요성종은 스스로 서경유수와 부유수를 임명해 파견하였다.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용이었지만, '''서경이 함락됐다면 진짜 항복 사절이 됐을 것이다'''(...).
서경은 항복을 결정하고, 거란의 새 서경유수 일행이 남하하던 그 결정적인 순간… 드디어 탁사정의 동북면군 주력이 서경에 도달했다. 지채문은 바로 탁사정을 만나서 정세를 이야기하고, 대군을 이끌고 온 탁사정에 의해 매국노 원종석은 처단되고 서경의 혼란은 진압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서경에 강화 사절의 선발대로 새로운 서경유수, 거란의 한기가 이끄는 기병 200기가 도착했다. 만약 탁사정이 단 하루만 늦었더라면 서경은 함락되고, 전투는 여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전투가 다 끝난 줄 알고 여유만만이던 이들은 당연히 매복한 고려 기병의 기습에 반은 죽고 반은 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들이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한 덕분에 사절 본대인 서경 부유수 울름의 기병 1,000기 역시 고려군의 포위 공격에 걸려 궤멸당했다. 분노한 성종은 거란군에 서경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거란군의 공세가 거세어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탁사정은 대도수에게 동문으로 공격해 거란군의 주의를 끌도록 하고, 자기가 이끄는 주력이 서문에서 출격해 거란군을 기습하자는 작전을 내놓았다. 그런데 탁사정은 서문을 나오자마자 거란군을 공격하기는커녕 남쪽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로서 그는 기껏 패전을 막은 영웅에서 하루 아침에 졸장으로 돌변(...). 배신당한 대도수는 결국 분전 끝에 패배하여 거란에 항복했다.
'''지휘부와 주력군이 하룻밤 새에 증발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한 서경은 잠시 혼란에 빠지지만, 중간급 간부던 통군 녹사 강민첨과 조원의 활약으로 서경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강민첨은 후일 3차 여요전쟁에서 강감찬에 다음가는 부원수의 자리에 이른다.
한편 흥화진을 고수하던 양규는 정예 기병 700기를 뽑아 출격, 일단 적에게 빼앗겼던 곽주를 탈환하여 주둔하고, 성 주민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겨 작전 지역을 넓혀 나갔다. 이에 전국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려고 초조히 굴던 거란군은 곽주, 통주, 서경의 요충지를 후방에 그대로 방치한 채 개경을 향하여 남하해왔다.

4.3. 현종의 피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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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의 피난길'''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 성종의 무척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했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전의 뜻을 굳히고 왕의 몽진을 전격 결정했다. 그러나 이 '''피난길에서 신하, 병사, 노비들은 다 달아나 버리고''' 현종과 두 왕후[25]를 수행하는 이는 지채문 등 신하들과 금군 50여 명이 전부였다. 앞서 '''주전론을 펼쳤던 문신들과 장수들마저 태반이 왕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26] 이때의 몽진은 안습의 연속이다.

"적성현(경기 연천)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지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서 길을 막았는데, 지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고려사절요》 현종조 원년

밤중에 적도들이 다시 오니 시종하던 신하와 환관, 궁녀들은 모두 도망쳐 숨고 오직 현덕 왕후와 대명 왕후, 시녀 2인, 승지 양협과 충필 등만 시종했다.

<<고려사>> <지채문 열전>

특히 몽진 도중 지방 호족들에게 푸대접을 비롯 신변의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나중에 '''똑같이 몽진하던 선조도 이런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27] 당시 고려는 강력한 중앙 집권제였던 조선과 달리 지방 분권에다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갈 때만 봐도, (조선과 고려) 백성들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요. 왕에 대한 개념 말이에요. 선조가 피난갔을 땐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중략) 근데 고려는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봉건제와 같아요. 왕이 궁 밖을 나가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모두의 라이벌 속으로 뛰어 드는 거에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어쨌든 추격하는 무리들을 떨쳐낸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 이르렀을 때 고을 아전이 왕의 일행을 보고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하고 거만을 떨었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시절의 아전'''은 조선의 하급 공무원인 아전과 다르게 '''지방 호족으로 사실상 지방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아는 아전 = 이방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현종은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났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종의 태도에 화가 난 아전은 사람을 시켜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고 외치게 했다. 당황한 지채문이 무슨 이유로 오느냐고 묻자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고 답했다.
이 말에 현종 일행은 크게 겁을 먹었다. 채충순과 김응인은 현종의 최측근이었으며, 하공진은 강조파에다가 이번 전쟁의 원인에도 관여한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린 김응인은 시랑 이정충, 낭장 국근 등과 함께 달아나버렸으며, 밤이 되어 다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적[28]이 공격해오자 그나마 남아있던 신하, 환관, 궁녀들까지 죄다 도망가 숨어버리고 경종의 후궁 대명궁부인, 성종의 2비 문화왕후[29]와 시녀 2명, 승지 몇명만 남았다. '''게다가 문화왕후의 딸인 현종의 1비 원정왕후는 이 때 임신중이었다!'''[30] 지채문만이 남아 한 줌 남은 근위대 병력으로 적을 물리쳤지만 말과 기물을 빼앗겼으며 경황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상황을 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새벽이 되자 지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채충순이 뒤따라 왔다. 지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하공진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지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고려사절요》 현종조 원년

우여곡절 끝에 양주로 향한 지채문 일행은 달아났던 국근을 만나 합류하게 되고, 다시 하공진과 유종을 만났다. 지채문이 그들을 만나 정말 반역하였냐고 묻자 하공진은 극구 부인하였다. 지채문은 하공진이 이끌고 있던 병사 20여명을 데리고 양주로 돌아가 빼았겼던 안장을 되찾아왔다.
이처럼 안습에 안습을 거듭하였지만[31] 거란군이 물러날 때까지 현종은 2차 침입 내내 전라도 전주, 광주, 나주를 전전하면서 무사히 몽진을 마치고 충청도 공주에서 새 장가를 드는 성과도 올렸다.[32]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거란군은 수도 개경을 함락하고,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 때 대량의 고서적, 특히 사서(史書)들이 불타 없어졌다. 역대 고려 왕조의 실록들도 소실되어서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7대 실록'''. (7대 실록의 완성은 덕종 때 이루어짐) 하공진은 스스로 요성종에게 화친을 설득하겠다고 말하고, 고영기와 함께 사신으로 북쪽으로 향했으며 현종은 남쪽으로 떠났다. 당시에 현종 일행은 앞서의 창화현(현 경기도 양주)에서 갓 벗어난 상태였다. 현종의 표문을 얻어 거란군 쪽으로 향하던 하공진은 창화현 관아에 닿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과 조우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실로 고려사에서 최고로 긴박한 순간이었다! 당시 거란 선봉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십수리에 불과하였다.''' 만약 여기서 붙잡혔다면 한반도의 왕이 북방 유목민족의 군주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수백년 전에 경험했을 것이다.
1010년 12월 16일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으로부터 병사 700여 인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이르러 병사 1,000인을 수습하였다.
하공진은 거란군의 안내를 받아 성종을 만났다. 그리고 고려의 남방은 수천리에 달하며, 고려 왕은 이미 그 밖까지 도주하였다고 거란 성종을 속였다. 이미 퇴로가 위험하여 전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거란 성종은 이 말을 믿고 고려 왕의 친조(직접 황제를 알현함)를 조건으로 하공진을 인질로 잡아 퇴각했다. 훗날 하공진은 결국 요성종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 이유는 요 성종이 하공진을 회유하려 무던히 노력하였지만 하공진은 고려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잡혔고, 이때도 하공진은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죽인 후 심장을 꺼내 먹었다고 한다(...).

4.4. 양규, 김숙흥의 맹활약


전쟁 초기로 시계를 되돌려 개전 초기, 흥화진을 지키던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 都巡檢使) 양규는 거란 성종의 거짓 항복편지에 "난 임금의 명을 받고 왔으므로, 의 명은 받지 않는다.(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는 패기 넘치는 답변으로 사신을 돌려 보냈고, 흥화진 방어에 성공했다.

1010년 11월 16일, 거란(契丹)의 군주가 스스로 보병과 기병 400,000명을 거느리고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호명하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순검사(巡檢使)인 형부낭중(刑部郞中) 양규(楊規)가 진사(鎭使)인 호부낭중(戶部郞中) 정성(鄭成), 부사(副使)인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인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원년 11월.

단 3,000명의 군대로 400,000명의 대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한 양규는 성종의 군대가 흥화진을 빗켜 내려가자 12월 16일일 단 700명의 흥화진 병력을 차출해 내려간다. 이후 통주성에서 통주 전투의 패잔병으로 보이는 병사들 1,000명의 병사를 수습해 총 1,700명의 병력을 모으게 된다. 그리고 이 양규와 1,700명의 타격대는 여요전쟁의 흐름을 뒤바꿔버리게 된다. 거란군 6,000명이 지키고 있던 곽주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한 양규는 흥화진과 통주성을 바탕으로 거란의 후방을 거침없이 공략했다.

곽주성은 거란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압록강을 건너서 구축한 유일한 중간기지입니다. 그 병참기지가 뺏겨 버리면 전방에 나가 있는 군사, 본국에서 지원 오는 병사는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왜? 흥화진과 곽주성이 아직 막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거란의 선택은 단 하나뿐이죠. 바로 회군하는 것입니다. 양규는 그것을 노렸죠.

그 당시 거란군은 서경을 포위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곽주가 탈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거란 지휘부에서는 난리가 났죠. 이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냐면, 마치 서경이라는 가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뒤에서 창이 겨누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JTBC 창사특집 평화전쟁 1019

통주, 귀주 등지를 확보하여 적진 후방을 위협하고 있던 양규 휘하의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섬멸적인 대 타격을 가하였다.
적병 10,000명을 격살한 귀주 별장 김숙흥의 대전과를 필두로 양규의 의주 지방 무노대 전투에서는 적 사살 2,000명, 포로 3,000명, 이수 석령의 추격전에서 적 사살 2,500명, 탈환인 1,000명, 여리참 전투에서 사살 1,000명, 탈환 1,000여명, 애전 전투에서 사살 1,0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 전과를 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단순히 거란군의 섬멸 뿐만이 아니라 많은 고려인 포로의 구출을 함께 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그들의 거의 모든 전과에는 항상 포로 구출이 들어있다. 양규와 김숙흥이 구출한 포로는 물경 '''30,000명'''에 달한다.

귀주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만여 급을 베었다. 양규는 거란군을 무로대에서 습격하여 2천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천여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고 추격하여 석령까지 가서 2천5백여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천여명을 되찾았다. 3일 후에는 다시 여리참에서 싸워 1천여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천여명을 되찾았다. 이 날 세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고 다시 그들 선봉을 애전에서 맞아 싸워 1천여 급을 베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전력이 계속 갉아먹히고, 정체불명의 군대는 계속 뒤에서, 동에서, 서에서 번쩍하고, 병력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서) 거란군은 황제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을 거예요. 어디에서도 이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정명섭 |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평화전쟁 1019 中


4.5. 요나라의 퇴각


이처럼 곳곳에서 거란군을 섬멸한 양규, 김숙흥 부대는 마침 회군 중인 거란 성종의 주력 부대와의 조우전에서 분전하다가 마침내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전사하고 말았다.[33] 그렇지만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으니 거란은 자칫 주력군에 괴멸적 손실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어 왕의 친조 조건을 수락하여 겨우 체면을 유지하고 회군하고 있던 것이었다. 또 황급히 철군하는 그들이 양규 휘하 부대의 요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으므로 강동의 성들을 점령할 수도 없었거니와 회군 후에도 명분상 즉시 강동 6주의 노른자를 요구하지 못한 것이었다.

'''군사를 돌이킴에 항복하였던 여러 (고려의) 성이 다시 배반하였다.''' 귀주 남쪽 준곡령에 이르자 큰 비가 날을 연하여 내려 말과 낙타가 다 피로하였으며, 갑옷과 병기를 많이 내버리고 비가 개인 뒤에야 강을 건너게 되었다.

'''《요사》 성종 본기 통화 29년 정월.'''

거란군의 악몽은 양규 부대로 끝나지 않았다. 압록강을 도강하여 고려 경내를 벗어날 무렵 흥화진사 정성의 고려군이 거란군의 후위를 급습하였기 때문이다. 이 기습에 많은 거란군이 목숨을 잃었던 것.

정성이 (거란군을) 따라가서 후위를 맹렬히 추격하였다. '''거란군이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고려사》 현종조 원년'''

거란군이 철수한 이후 고려에서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어 회군한 것에 감사를 표하고 동지사, 생신사를 파견하여 양국 간의 화평 유지에 노력하였다. 거란군은 명목상 고려 왕의 친조를 약속받았을 뿐 그 이상의 이익은 얻지 못하였으나 고려와 송의 군사적 연합을 저지하는 것에는 성공하였다. 고려는 거란에 대한 친조를 다시 한 번 약속하였으나, 끝내 친조하지는 않았다.

거란이 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니 순(현종)여진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막았다. '''거란이 크게 패하여 장족(귀족을 지칭)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관속들도 태반이나 전몰했으므로 유계에 영을 내려 벼슬을 구하던 자와 '''조금이나마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그 결원을 보충'''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 74 대중상부 3년(1010년) 11월'''

고려는 수도가 함락되고 서북 지방이 초토화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거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많은 병력이 몰살당하는 바람에 장수를 뽑을 때 조금이라도 글만 읽으면 특채로 뽑아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또한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수많은 여진 난민이 발생하였다. 고려는 이들을 내지에 집단 이주시키고, 수공업 등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기록을 보면 직역상 천민으로 된 것 같다.[34]

5. 제3차 침입



5.1. 전쟁 직전 상황


2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는 계속해서 북송과 비밀리에 통교하였으며, 특히 1010년 북송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북송은 고려가 오래도록 조공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35]
원래 고려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군사적 예봉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서 '거란군의 철수'에 대응한 '국왕의 친조'라는 강화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 또 아직 강동 6주 반환 떡밥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구는 실제로 실현하기 어려운 요구였으므로 결국 3차 침입의 구실이 되고 말았다. 고려 왕의 입조 요구가 고려 측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자 거란 성종은 강동 6주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해왔다.
고려에서 현종 3년 (1012년) 6월에 전공지를 문후사로 파견하여 '왕은 병이 있어 친조가 불가능하다'고 통고하자 분노한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빼앗겠다는 공식 성명을 내고 직접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이 문제는 이후 계속되어 거란이 국경 지방에 소규모로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해왔다. 거란은 해를 거듭하며 고려에 침입하였으나 소득 없이 철병해야 했고, 그 때마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계속되는 군사적 침입의 실패는 요나라에 복속해있던 여진족들이 고려에 연줄을 대기 위해 개경으로 조공 사절을 줄지어보내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거란의 군사적 행위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 현종 6년(1015년)에는 거란이 용주(龍州)를 침공해 물리쳤다. (1월) 거란군이 통주(通州)와 영주를 공격했으나 막아냈다. (9월) 거란군이 선화진(宣化鎭)[36]과 정원진(定遠鎭)[37]를 침공해 성을 쌓았다. (12월)
  • 현종 7년(1016년)에는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열(蕭屈烈)이 곽주(郭州)[38]를 침공해 대승을 거두고 물자를 챙겨 돌아갔다.
  • 현종 8년(1017년)에는 거란의 소합탁(蕭合卓)의 부대가 흥화진을 포위해 9일간 공격을 했으나 건일, 홍광, 고의가 성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5.2. 고려의 대비


대규모 전쟁은 불을 보듯이 뻔했고, 고려는 대대적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개경의 방비를 점검하고, 송악산에는 산성을 새로이 건설함과 동시에[39],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중앙군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헌데 그러다가 사단이 터졌다. 1014년, 영업전[40][41]을 빼앗겨 분개한 중앙군인 경군과 관직 체제의 문제로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상장군 최질과 김훈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것이다.''' 솔직히 아무리 국가 재정을 살린다지만 죽도록 싸운 무신들과 중앙 군대의 땅을 빼앗았으니 배은망덕한 것 맞다. 더구나 빼앗은 영업전은 국가 재정을 확보한 것도 아니고, 문신들의 녹봉 확보용으로 들어갔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다.[42] 무신정권의 프리퀄 판이라고 할 수 있는[43] 이 정변은 현종이 서경 유수 이자림과 짜고 반란을 주도한 고위 무신 19명을 잔치를 벌인다는 명목으로 불러들여 전부 살해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났다.[44]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난을 처리한 1015년, 고려는 북송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북송은 거절하였다.[45]
결국 요성종은 이 기회를 노려 고려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결심하게 된다.

5.3. 요나라의 침공과 귀주 대첩


  • 3차 여요전쟁 때의 자세한 전투 정황들은 귀주 대첩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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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姜邯贊)'''
거란은 현종 9년(1018년)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소굴렬(蕭屈烈)을 부통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침하였다. 고려에서는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으로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명을 이끌고 영주(寧州, 安州)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강감찬 등은 흥화진(의주)으로 나가 정예 기병 12,000기를 뽑아 산곡 사이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써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의 큰 내를 막은 후 거란군이 마음 놓고 건너가기를 기다렸다가 수공을 가해서 도하하는 거란군의 허리를 끊고 매복한 기병을 돌격시켜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일화가 너무 유명해서 흥화진 대첩귀주 대첩의 일화로 잘못 아는 예가 많다.''' 그냥 흥화진대첩을 귀주대첩과 합쳐서 퉁치는 학습만화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거란군의 기세가 여전한 상황. 고려군이 매복 작전으로 큰 타격을 주자 소배압은 기존의 거점을 무시하고, 남진하여 그대로 개경을 위협하기로 결심하였다.[46][47] 2차 침입 때에 개경으로 직진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이때에도 남진을 꾀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고려 조정에서는 항전과 후퇴 사이에서 분명한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려사에 보면 당시 여러 귀족들이 2차 전쟁의 상황을 설명하고 후퇴를 이야기한 흔적들이 있다. 실제로 옛 고려의 개경 성터에 관한 조사서를 보면 개경은 평시에 수도로서 기능하기에 최적이지만 평야지대의 성으로서 수성에는 좋지 않아 고려 시대 전쟁이 일어나면 서경 중심으로 군사 거점을 확보하거나 강화도로 천도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음을 알수 있다. 하지만 현종은 과감한 결단을 내리며 물러서지 않고 항전한다는 기조를 확실하게 한다.[48] 이에 고려에서는 개경의 방어에 진력하였다. 거란군이 무리하게 남하하여 개경으로 향하였으므로, 고려군은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서 타격을 주었다.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이 계속 개경으로 공격해오자 태조의 재궁을 북한산의 향림사(香林寺)로 옮기고 개경을 계엄하였다.
마침내 현종 10년 정월 3일에 소배압이 이끈 거란군이 개경에서 150리 정도 떨어진 신은현(新恩縣 황해도 신계)에 이르자, 현종은 청야전술을 써서 성 밖의 민호를 전부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토록 한 후 도성의 방비를 엄하게 하였다.
제2차 침입의 교훈을 받아들여서 개경의 주산인 송악산에 산성을 구축하는 등 수도 일원의 경비가 굳건한데다가 거듭되는 패전으로 군사들의 사기마저 떨어지니, 소배압은 더 이상 개경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함을 알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49][50] 또 소배압이 탐색전 삼아 300명의 기병을 개경 주변 금교역으로 파견하자 현종은 100기를 보내 야간 기습으로 거란군 정찰대를 전멸시킨다.
상식적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었으며, 개경의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거란군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굳이 적보다 적은 병력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당시 개경의 수비 병력이 부족했다는 의미이며, 이 100기가 오히려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소배압도 결전을 택할 수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수를 걸었던 셈.따라서 저 100기도 일반 병사들이 아니라 현종의 근위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거란군의 정황을 포착해 내고 기민하게 대처한 개경의 고려군 지휘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낼 만하며 당시 개경 고려군의 사실상의 총사령관이었던 현종의 군사적 능력과 대담함, 용기에도 고평가를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려군은 2차 침입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전쟁에 대비하였고 수적으로도 적을 압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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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龜州大捷)'''
후퇴하던 거란군 '''10만'''은 전략 / 전술적 길목인 귀주에서 기다리던 고려군 '''보병 + 기병 20만'''과 대회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수일 간의 격전 끝에 등 뒤에서 튀어나온 고려군 10,000명에 의해 등짝이 쪼개지면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이다.
  • 참고로 한국에서는 대첩이라고 하면 대부분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대파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귀주 대첩은 두 배나 되는 다수의 병력이 자신들이 의도한 전장에서 피곤하고 상대적으로 소수인 병력을 대파한 전형적인 대회전이었다. 귀주 대첩이라고 하면 살수대첩 이미지와 섞이는 이유 중 하나가 주장의 특출난 전략이 표현되지 않고 그냥 정면 충돌하다시피한 회전의 승리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2배의 병력으로 밀어붙이다가 포위해서 끝장냈다고 전투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일부 있는데, 이건 전술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소수로 다수를 이겨야만 가치가 있다는 발상은 무리수에서 나오는 발로일 뿐이다. 전쟁의 기본이 적보다 다수의 병력을 갖추고 잘 운용하는 것이며, 그 병력을 통해 전략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상대보다 더 많이 갖추는 것이 소수로 다수를 이기기보다 어려우며, 대군을 운용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미리 갖추는 것의 가치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게다가 교통과 통신 수단이 발달한 현대가 아닌 전근대 시대 전투에서 대규모 병력이 회전에 시간 맞춰 집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의 도로가 지금처럼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은 항상 쪼개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것도 치밀하게 계획을 짜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병력이 모이기도 전에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거란은 자국이 보낸 10만 병력을 고려가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요격하는 것을 보고 고려의 역량을 진지하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후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고려에 대규모 전쟁을 걸지 못했다.
그리고 뭣보다도 거란군은 대체로 주력이 기병이었던 반면[51] 고려군은 있는 거 없는거 다 끌어모은 군대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당시 야전에서 기병의 위력을 생각하면 절대 유리한 전투가 아니었다.[52]
고려군은 수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군마와 낙타, 갑옷, 병기 등을 무수히 노획했다. 게다가 거란군 가운데 살아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에 불과하였으니,[53] 4반세기에 걸친 여요전쟁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의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요의 성종은 참패 보고를 듣고는 크게 분노하여 사자를 소배압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네가 적을 가벼이 여기고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 하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일 것이다”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소배압은 성종의 어머니인 승천태후 소씨의 일가였고, 승천태후 소씨가 이룬 공적이 워낙 컸으므로 실제로 낯가죽이 벗겨지거나 죽지 않고 파직만 당한 후 1023년 복직해서 그 해에 죽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사일생.
1019년 2월 5일, 고려의 국왕인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나아가 강감찬을 맞이하였다. 전하는 글에 의하면, 이때 임시로 지은 누각에 현종이 친히 올라 주연을 베풀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직접 꽂아 주었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파역을 흥의역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지. 그리고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54]과 식읍 300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한 마디로 국가를 구원한 '영웅'이 된 것.
이후 고려는 개경 주위에 외성을 쌓고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구축하는 등 방어에 신경쓰게 되며 당대 동아시아 최강 전력인 거란군을 격멸함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굳건하게 함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맞이하게 된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이후 120여년간의 값진 전성기를 얻어낼 수 있었다.

6. 전쟁 결과



6.1. 결과


'''대 거란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로 인해, 아시아의 세계 질서는 재편된다.''' 거란을 제압한 고려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만주 지역의 철리국(鐵利國)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하기를 원하는 표를 올렸다. 연이어 탐라국이 곡물을 바치고, 흑수말갈추장이 찾아왔다. '''고려는 주변 소국을 거느린 나라로 성장해 갔다. 고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송나라와 교류를 하고, 거란과도 교류를 하는 독자적인 세력이 된 것이다.''' 송나라를 대국으로 생각하던 고려의 태도도 달라졌다. 대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려 했다.

'''2009년 11월 21일 역사스페셜 中'''


고려판 병자호란이었거든요. 초반에 실수도 있었죠. 처절한 패배도 있었고. 하지만 고려는 침착하게 대처해 나갑니다. 침착하게 제도를 정비해 나가고. 중요한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이 이후, 고려와 요나라, 송나라 간의 삼강체제가 확립된다는 겁니다. 고려는 (귀주 대첩 이후) 120년에 달하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죠.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이후 고려는 개경 주위에 외성을 쌓아 견지하는 한편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구축하는 등 북방 민족들에 대한 방어책을 완비하게 되며 당대 동아시아 최강 전력인 거란군을 격파함으로서 고구려의 후계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맞이하게 된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이후 120여년간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본토에서 벌어진 전쟁인 만큼 상당한 규모의 전쟁 포로들도 발생했고 전쟁 후에도 고려는 국경 문제 등으로 거란과 여러 차례 트러블을 겪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규모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 이후에 고려는 거란에 사대를 했지만,[55] 국경 분쟁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식으로 거란에 대해 어느 정도 자주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서로 분위기도 생각보다 꽤 괜찮았던지, 1085년에 고려 왕 선종의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온 거란 사신 '이가급(李可及)'이 제 날짜보다 늦게 당도하자 고려에선 "이름은 (제때) 다다를[及] 수 있다[可]고 해 놓고 제때 못[不] 다다랐네[及]? '가급'이 아니라 '불급' ㅋㅋㅋ"이라며 개드립을 날리기도(...). 참고[56]
'''거란'''은 사실상 고려의 완전 병탄과 강동6주 자체를 포기하였다.[57] 포기뿐만 아니라 속자치통감장편에서는 귀주 대첩에서의 대패 이후, 고려를 두려워한다는 기록까지 나타나고 있다.

천성(天聖)[58]

3년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 (중략) 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이 (고려를)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이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거란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나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거란이 반드시 고려가 후환이 될 것을 의심하여 끝내 감히 무리를 다하여 남하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는 중국의 큰 이로움입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150 인종 경력 4년 6월 무오.'''

이렇게 서로 체면과 실리를 챙겨가며 동북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문제는 거란은 이때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고 요성종의 다음 왕인 요흥종 대에 들어서부터는 서하북송, 심지어 거란이 통제하고 있던 몽골족여진족을 상대로 과거와 같은 힘을 쓰지 못했다는 것. 임용한이 "귀주 대첩의 결과가 거란이 멸망한 하나의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여러모로 북방민족 버전 수나라라고 할 수 있을지도.[59]
그러나 거란은 여요전쟁 이후 100년간 더 명맥이 이어졌다. 수나라가 양제의 고구려 원정 이후 5년 뒤에 망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거란이 수나라보다 20배는 더 오래간 셈. 게다가 거란(요)은 귀주 대첩 이후, 흥종 대까지 경제적으로 번영하면서 평화를 누렸다. 서하와 북송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귀주 대첩 이후에 서하와 북송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상단의 평가와 달리, 거란은 북송과 서하에 대해 과거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송과 서하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거란은 북송이 서하와의 전쟁으로 지쳐 있는 것을 이용해 관남 10현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며 북송을 압박했다. 서하와의 장기전으로 국력을 소모한 북송은 거란이 침공해오면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폐를 각각 10만냥씩 증액해주는 식으로 사태를 무마해야 했으며, 이후에도 거란이 군사적 압박을 가해올 때마다 영토를 할양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거란은 서하와 싸워서 2번의 대패를 당했으나, 서하는 북송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고갈되어 거란을 더 이상 압박할 수가 없어서 대승을 거두고도 거란에 허리를 굽혀야 했다.[60] 그리고 거란과 서하는 전쟁 이후로 혼인 동맹을 맺는 등, 이전보다 더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귀주 대첩 때문에 영향력이 줄어들기는커녕, 거란은 북송 - 거란 - 서하의 삼각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북송과 서하로부터 많은 이익을 취한 것이다.
물론 흥종대부터 몽골과 여진족의 반란이 증가하고, 이전만큼 그들을 쉽게 제압하진 못했지만, 국가의 체제를 무너뜨릴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진짜 요가 휘청거리던 시기는 도종과 천조제 시기로서 이 때부터 요는 귀주 대첩의 후유증이 아닌, 지배층과 불교계의 사치와 부패, 황제들의 무능, 사회적 모순과 민족간의 갈등의 심화로 국력이 쇠퇴하고 끝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간신 야율을신이 황후와 황태자를 시해하는 등 전횡을 벌이고, 과중한 부역과 세금에 분노한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외부적으로는 몽골족과 여진족의 반란이 빈발했다. 그리고 요는 도종 말년에 일어난 마고사의 난을 진압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몽골과 여진족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마지막으로 천조제는 내·외부의 문제를 등한시하고 사치를 일삼은 끝에 요의 멸망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귀주 대첩은 요에 타격을 주긴 했지만, 멸망 원인으로 보기에는 어려우며 몽골과 여진족에 대한 통제력 상실도 귀주 대첩이 일어나고 수십년이 지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고려'''는 강동6주천리장성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키워 이후에도 거란의 산발적인 침입을 저지시켰으며, 내부적으로 여러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였다. 무엇보다도 고려 - 거란 - 북송의 명백하고 안정적인 3강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61][62]

6.2. 동북아 정세에 미친 영항


또한 거란과 고려 사이에 끼어 있었던 '''여진족'''들도 당시 고려 못지않게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위의 1차 여요전쟁에서 서희가 내건 조건을 보자. 군사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고려가 차지하기 위해 여진족의 침략을 핑계삼았다. 결국 여기 살던 여진족들은 영문도 모르고 고려 - 거란 간의 군사적, 외교적 분쟁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서 제대로 얻어터졌고(...), 상당수가 고려 사회에서 천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란도 국력을 기울인 전쟁으로 인한 출혈이 적지 않았다. 비록 이후에도 오랫동안 안정세를 유지했으나 거란은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게 된다. 이미 제대로 고려를 침략한 2차 전쟁 당시 거란은 유목민족 특유의 폭발적인 초기 성장 동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여진은 막심한 피해가 누적되었음에도 거란보다 더 크게 성장해서 결국 100여년 뒤에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란을 집어먹게 된다.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북송'''은 여전히 거란의 위세에 눌려 있었으며 후일 이런 치욕을 설욕하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하여 고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일 금나라와 손을 잡아 거란을 멸망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이후에 금에게 화북을 빼앗기고 말았다(...).[63] 늑대를 내쫒으려고 호랑이를 부른 셈.
참고로 3차례 걸친 여요전쟁에서 고려는 송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송은 동맹국인 고려의 요청을 모두 거절하였고 이는 훗날 정강의 변으로 송이 남송으로 몰락하면서도 고려가 지원해주지 않은 원인이 된다. 사실 송이 금을 끌어들이자 고려는 금의 강력한 군사력과 신의가 없음을 경고했으나 송은 이를 무시하고 금과 동맹을 맺였고 그 다음은 알다시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 전쟁은 오늘날 현충일의 날짜를 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64]

6.3. 세계사에서


거대 유목제국을 패퇴시킨 대규모의 전투임에도, 세계사적인 인지도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한국사가 동아시아사의 마이너 장르이기도 하거니와, 요제국이 귀주대첩 이후에도 오랫동안 건재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거란족은 몽골제국에게 잡아먹혀버려 흔적도 남지 않았고 같은 기마제국인 몽골제국에 비해 세계사적인 존재감도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계사적으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사에서도 이웃국가 중국과 일본에서조차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 여요전쟁이다.
위키피디아의 문서의 양적 측면에서도 한국사의 다른 전쟁들보다 인지도가 많이 떨어진다.

6.4. 미디어에서


KBS 드라마 천추태후가 여요전쟁을 다루었으나 드라마의 특성상 각색이 많이 되었다.
정확하게 제대로 여요전쟁을 다룬 미디어는 jt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로, 역사학자들의 자문을 얻어 제2차, 3차 여요전쟁의 전반적인 흐름을 잘 다루었다.

7. 이후의 충돌



7.1. 소규모 국지전


3차에 걸친 여요전쟁 이후에도 그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국경 근처에서 소규모의 충돌이 몇 번 발생했다.
현종 연간에는 요나라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발해부흥운동의 하나인 흥료국을 일으킨 대연림(大延琳)이 주도한 봉기였다. 흥료국의 대연림은 고려에 지원요청을 하는데 이일로 고려 조정은 매파비둘기파로 나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참지정사 곽원은 강한 매파로 이렇게 주장했다.

'''"압강(鴨江)의 동쪽 땅을 거란이 차지해 막고 있습니다. 지금 가히 기회를 타 취해와야 합니다."'''

하지만 고려는 반대기류가 강하였고 결국 곽원이 독단적으로 군사를 끌고 갔으나 두세달만에 실패하였고 이후 곽원은 부끄러움에 화병을 얻어 얼마안가 등창이나서 분사(憤死)한다.
덕종 연간에는 거란군이 정주를 침입하자 이를 격퇴시켰다.
정종 연간인 1037년 10월에 거란해군이 압록강을 침입하였으나 성과없이 되돌아 갔다.

7.2.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요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여요전쟁의 외전격으로 고려는 후에 한번 더 거란족의 침입을 맞게되니 이것이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다. 이때는 이미 요나라가 망하고 거란의 남은 잔당들과의 전쟁이었으나[65] 당시의 최충헌 정권은 무능하여 자체적으로 격퇴하지 못한다. 그래서 몽골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도움을 받아 섬멸한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골의 간섭이 시작되었고 이후 반몽정서가 생겨 여몽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8. 같이보기




[1] 1차 여요전쟁[2] 2~3차 여요전쟁[3] 안융진 전투같은 소규모 국지전이 있었으나 대규모 전면전 없이 그 유명한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끝이난다.[4] 통주 전투에서는 30만, 귀주 대첩 당시엔 20만을 동원했다.[5] 실제 병력은 6만명 정도로 추정[6] 이후 여진과의 전쟁에선 결과적으로 졌고, 몽골의 침입 때는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사실상 망국 상태가 됐으며, 공민왕의 북벌은 성과라 할 수 있는 쌍성총관부 수복마저 결국 원 간섭기 이전 영토 + 추가적으로 약간의 영토를 얻어낸 수준이었다. 조선 세종 대의 4군 6진 개척과 대마도 정벌은 승리이긴 하지만 국지전이었고, 임진왜란도 결과적으로 승리하긴 했으나 명나라를 끌어들였을 뿐더러 전 국토가 황폐화되어 이름 뿐인 승전이었고,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는 완벽하게 발렸으니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이 짙은데다 양측 모두 외세가 개입했고, 그나마도 무승부다.[7] 물론 이는 남부여라는 명칭이 당대에도 잘 정착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다.[8] 전쟁의 형식이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침략 전쟁이므로 영어식으론 Khitan Invasion of Goryeo(거란의 고려 침공, 내지 거란의 고려 침략이란 의미)가 돼야겠지만, 한국에서 여요전쟁이라 하는 것을 감안해서 Goryeo–Khitan Wars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9] 보통, '''Wars'''는 영토 분쟁, 정치 / 이념적 분쟁(베트남전 등), 계승권 분쟁 등, 특정 국가를 완전 장악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전쟁에 붙는 명칭이다. '''Invasion'''이 특정 국가의 완전 장악을 위한 전쟁, 즉 침략 전쟁을 의미한다. Invasion 형태의 전쟁이 격 있게 명명되면, 혹은 그 규모가 국가 하나 단위급으로 크지 않은 몇몇 지역에 국한된다면 '''Conquest'''(정복)가 된다.[10] 915년 고려가 거란에 보검을 보낸 기록이 있는데, 이 때는 왕건 이전 궁예태봉 시기였다. 궁예의 외교 관계 관련 기록이 요사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꽤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11] 이는 태조 왕건 개인의 인식뿐만이 아니라, 발해 멸망 후 유입된 유민들과 발해 지도층에 대한 회유를 위해 취한 태도이기도 했다.[12] 현재 북한의 황해북도 봉산군이 아니다. 평안북도 쪽, 그 당시 국경선인 청천강 근처로 추정.[13] 이 상황은 나중에 조선 - 후금 - 명나라 사이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광해군인조도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고려와 유사하였다. 즉 친화(華)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요령껏 오랑캐(夷) 자극을 자제하는 것. 때문에 조선 역시도 정묘호란 때는, (서희 급의 결과가 아니어서 그렇지) 납득할 수 있는 조건으로 후금의 병력을 되돌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조선은 어설프게 고려를 따라하다가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항복하는데… 국왕이 위기에 몰리고 항복했다는 건 2차 여요전쟁과 비슷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정예병이 결딴 난 후 10년 동안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아 시원하게 털린 조선과 다르게, 고려는 강조가 대군을 끌고 야전을 벌일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었고, 강조가 패배해서 야전군이 소멸한 뒤에도 강동 6주의 요새들과 서경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양규를 비롯한 맹장들이 요군의 후방을 미친 듯이 두들기고 있어서 더 이상 버티면 황제가 위험해 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요도 직접적인 항복 대신 친조 약속만 받고 순순히 물러갔다. 거기에 고려는 3차 여요전쟁에서 이전의 굴욕을 복수할 수 있었다. [14] 고려를 건국한 시조인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고구려를 계승을 표방하여 고려로 국호를 정한 것이다. 장수왕 11년(423년)에 고구려의 국호가 고려로 변경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예 간판을 바꿔 달지도 않은 셈이다.[15] 물론 왕실과 조정이 상시 위치하는 실질적인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 맞다. 하지만 북진 정책을 추진하던 고려 초까지 서경은 개경과 사실상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분사 제도(分司制度)라 하여 개경의 관청을 서경에도 동등하게 설치했다. 쉽게 말하면 서경(평양)은 고려의 제2수도였다. 훈요 10조에도 고려 국왕은 1년에 최소 3개월은 평양에 머물러야 한다고 명시하였는데, 이는 고려 문종 때까지 지켜졌다. 서희는 이 점을 들어서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서경을 수도라고 주장할 수 있던 것이다.[16] 흥화진(의주군), 용주(용천군), 통주(선천군), 철주(철산군), 귀주(귀성군), 곽주(곽산군)이다. 여기의 귀주는 귀주대첩의 그 귀주.[17] 요는 초창기에 영토가 너무 커져서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에 발해 지역도 동란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통제했고, 통치의 편리를 추구하고 발해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요양 지역으로 발해인들을 이주시켜서 요동에 대한 통제력은 매우 떨어지는 상태였다. 애초에 압록강과 백두산 인근의 여진족을 정벌해 복속시키고 요동 일대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한 게 성종 초의 일이었다.[18] 이건 후일의 몽고나 청이 처음에는 형제 관계에 만족하다 중원의 한족 왕조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후 군신 관계를 요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19] 병자호란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 2차 고려-거란 전쟁이 그냥 항복으로 끝난 반면, 병자호란은 왕이 직접 굴욕을 당했다는 점이다.[20] 송이 원병을 보내주지 않은 것도 한몫 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후에도 송과 고려는 서로에게 군사적 지원 요청을 꾸준하게 보냈고, 동시에 서로의 군사적 지원 요청을 꾸준히 무시했다(...). [21] 안 그래도 고려는 조선에 비해 행정력이 약한 편인데 정변까지 있었으니 그 행정력이 정변 이전 수준이 되지 않는건 당연하다.[22] 주현군과 비전투 병력을 합치면 40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반대로 30만조차 과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일부 있다.[23] 지금의 평북 선천, 정확히는 평북 동림이다. 북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선천에서 동림이 떨어져나왔는데 강조가 주둔한 통주성 일대는 현 동림군 지역에 해당한다.[24] 고려사에는 그냥 서경 사람들이 열어주지 않았다고 쓰여있다.[25] 당시 현종은 왕비로 1비 원정왕후, 2비 원화왕후를 두었다.[26] 심지어 이때 항전을 주장한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도망갔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파견을 갔다는 이야기.[27] 도중에 백성들이 여기를 지키긴 할 거냐고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선조가 나서서 지킬 거라고 말을 하자 모두 순순히 돌아갔고, 그나마 평양에서 백성들이 폭발해서 왕의 행렬에 있는 사람들을 구타하긴 했지만 이 역시 주동자 몇 명을 잡아죽이자 해결되었다.[28] 아전과 연관된 군대라고 추정된다. 특히 고려의 호족들은 사병을 보유했다.[29] 당시 천추태후는 황주에 유배된 상태였다.[30] 참고로 원정왕후는 전쟁 당시 임신중이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녀 소생의 자식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를 보면 이때 임신한 아이는 유산했거나, 태어나긴 했는데 너무 일찍 죽었거나 둘 중 하나로 추정된다.[31] 중간에 왕후를 버려두고 뛰는 경우도 있었다[32] 이 때 자신의 몽진길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대접해주었던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두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추후에 또 한 명을 왕비로 맞했다. 앞서 혼인한 둘은 원성태후원혜태후로 이들은 각각 덕종정종, 문종의 모후가 된다.[33] 이들이 퇴각하지 않고 전멸할 때까지 싸운 이유는 '''구출한 포로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는 견해도 있다.[34] 이들이 이후에 양수척(=화척), 진척, 재인 등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양인이지만 호적에 등재되지 못하고 차별을 받던 이들은 이후 몽골이 침입할 때 길잡이 노릇을 하는 등 몽골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된다.[35] 사실 거란의 침공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36]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37]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혹은 평안북도 정주군[38]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39] 개경 나성 건설은 현종 즉위 원년부터 현종 20년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3차 침입을 앞둔 이때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40] 고려시대에 군인들에게 지급된 군인전의 일종.[41] 같은 용어 :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토지개혁책으로 한전론을 주장했는데, 한전론이란 매매가 불가능한 토지인 '''영업전'''을 두어 토지 소유자들이 생계에 지장이 없게 하고, 나머지 토지들은 매매를 허용해 토지들이 매매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토지분배가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영업전'의 한자는 동일하다.[42] 애초에 영업적 박탈 이유가 문신들의 녹봉이 제대로 지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걸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 반란이 터지자 마자 최우선 요구 사항이 이런 방법을 주장한 문신들을 귀양 보내는 것이었다.[43] 덤으로 이후의 역사까지 보면 임오군란과도 흡사하다.[44] 물론 정변이 벌어진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안되는지라 현종은 이 19명을 빼고는 아무도 죽이지 않고 단지 그 일가만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영구히 서용치 않는 선에서 처벌을 마쳤고,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이며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높이고,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합쳐서 10,000여명씩 포상을 주었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1016년에 북송의 연호를 사용하였다.[46] 거점을 무시하고 곧장 수도로 돌격하는 것은 많이 애용된 군사 작전이다. 특히 기동력이 좋은 유목기마민족이 좋아하는 전법이었다. 몽골이 그랬고, 거란이 이 방법으로 발해를 무너뜨렸다. 병자호란 때도 후방에는 약간의 병력만 배치하고 본군은 수도인 한양으로 진격했었다. 기마민족 외에도 제당전쟁, 여수전쟁, 여당전쟁, 견훤의 서라벌 기습, 임진왜란과 근대 나폴레옹러시아 원정, 현대의 나치독일이 사용했다 전해지는 전격전도 다르지 않다. 어렵게 하나하나 무너뜨리기보단 단숨에 수도로 진격해 적정부한테 항복을 받아낸다는 전략인데 장단점이 공존하는 전략이다. 성공하면 적국의 항복을 받아 비교적 적은 피해로 승리할 수 있지만, 사전에 발각되는등 계획이 실패하면 오히려 주력군이 적진 한복판에서 포위되어 섬멸되어 버린다. 이러면 피해는 입을대로 입고 얻는것은 아무것도 없게된다.[47] 실제로 뒤에 설명되겠지만 3차 침공 당시의 소배압이 지휘하는 거란군은 개경 앞까지 진군하는데 성공했으나 고려에서 이미 침공루트를 예상하고 청야전술과 군사적 대비를 갖추어 놓았기에 어떠한 전략적 이득도 얻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섬멸당한다.[48] 현종은 고려사를 넘어서 한국사에서도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굉장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성장하며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당대의 유학자들의 평가에서 항상 무문에 치우침이 없이 이치에 맞는 일을 행하는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3차 전쟁에서도 본인이 물러선다면 기세에서 밀린다는 것을 파악하고, 후퇴는 없음을 확실히하며 항전의 의지를 선언하였다고 볼 수 있다.[49] 여기까지의 전쟁 전개 과정은 영락없이 살수대첩의 재판이다. 실제로 근대에 들어오면서 살수대첩과 귀주대첩, 아니 흥화진 전투의 수공 에피소드가 섞이기도 했고. 그만큼 모범적인 청야전술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지만, 청야 전술의 실패와 기동 야전군 집결 실패 등의 각종 병크가 겹쳐져 조선군은 패배하고 말았다.[50] 앞서 언급했듯 거란군은 전방의 고려 거점들을 모두 무시하고, 목표인 개성 점령을 위해 무리하다시피 남진했다. 따라서 개성을 재빨리 함락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1차 전쟁 때 양규 등에게 당했듯이 후방 보급로가 무사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퇴각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괜히 고려의 청야 전술이 완벽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51] 화약이 개발되기 전까지, 중세 유럽에서는 말을 탄 기사는 보병 10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평가를 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에서 기병의 역할은 전차를 비롯한 기계화보병이 계승하고 있다.[52] 현대로 치면 거란군은 전원 기갑부대인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이뤄진 반면 고려군은 기계화보병사단 + 일반보병사단 + 향토보병사단 등 가용 병력 전체를 끌어 모은 것으로 보면 된다.[53] 즉 전 병력의 '''90%'''가 전사 혹은 포로로 잡혔다는 소리다! 게다가 거란은 본질적으로 유목제국이었고 유목제국은 지형과 기후의 특성상 인구가 매우 적다. 때문에 소배압이 이끌고 온 거란군이 순수 거란족인지 아니면 거란족+피지배민족 혼합군인지는 몰라도 인구상으로 요나라에 제법 타격이 되었을 것이며 특히 전자의 경우에는 지배민족의 인구가 대규모로 날아갔다는 말이 된다.[54] 검교는 명예직이란 뜻으로 명예태위와 문하시랑(재상), 문하성평장사를 수여하고, 천수현에 물려받을 수 있는 식읍을 작위로 내린다는 것.[55] 전쟁의 승리 여부와 상관없이 당대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던 거란과 화친을 맺어야 하는 게 당연하기도 했지만, 승승장구하던 거란의 최정예 10만 기병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황에서 제의한 사대였기에 고려는 사대를 먼저 제안했음에도 거란에 말빨도 서고 우대를 받았다. 거란에서도 더 이상의 침공은 무리인 상황에 고려에서 먼저 사대를 제안하니 좋은 대우를 해준 것.[56] 사료의 기록이 간단하여 사신 면전에서 드립을 쳤는지, 뒤에서 깠는지는 모른다.[57] 1차 침공 당시 거란은 고려를 완전 병탄할 의도 자체가 없었다. 때문에 이런 제스처를 미리 취했다면 2차 전쟁부터는 애초에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북송은 고려와 서로 1전 어치의 군사적 도움도 서로 주고 받지 않았고, 거란의 입장에서는 사대까지는 아니라도 고려가 중립적 입장만 표명했어도 당면 상대인 북송을 버려두고 고려를 먼저 선제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의 주장. 그렇지만 2차, 3차 침입 때의 거란은 '''강동 6주의 탈환'''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고려 입장에선 전쟁을 피하려면 전략적 요충지인 땅을 내주어야 한다는 상당한 무리수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외교로 단순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거라는 가정은 옳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58] 천희(天禧)의 오기.[59] 수나라는 수양제의 사치와 고구려 원정에 중국이 개막장 테크를 탔음에도, 복구 할만한 인구와 세력, 문명적 능력이 있었으나 거란은 그런 거 없었기 때문에 민족 자체가 소멸한다.[60] 호전적인 것으로 이름난 그 이원호조차 거란과의 전면전은 회피하려 했으며, 하곡에서 대승을 거둔 뒤에도 칭신과 조공을 조건으로 강화를 청했을 만큼 서하의 국력 소모는 꽤 심각했다.[61] 세 나라가 동등한 국력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세 나라 간의 존재와 견제 심리로 인해 무려 100년 이상을 상호간에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 채 평화의 시기를 보냈다.[62] 참고로 동아시아는 서쪽에서도 삼강구도가 벌어졌는데 동쪽에 고려가 있었다면 서쪽에는 서하가 있었다.[63] 이렇게 된 뒤에는 고려에 도움을 청하지만 고려 입장에서 이미 남송은 도움도 안 되었기에 고려는 이를 무시한다. [64] 현충일이 6월 6일로 지정된 이유는 6.25 전쟁과 겹친 달이라는 것도 있지만, 이 날은 24절기 상으로는 '망종'인데, 고려 현종 5년(1014) 6월에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유골을 집으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망종일에 제사를 지냈던 전통을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65] 다만 잔당이라고 우습게 볼 것은 아닌데, 거란족은 기본적으로 유목민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말을 타고 다녀서 고려군이 공격하려고 하면 재빨리 달아나 버려서 고려군이 상대하기가 무척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