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카르
1. 개요
Partai Golongan Karya
인도네시아의 보수정당. 흔히 "골카르(Golkar)"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직능단체/모임"를 의미하는 인도네시아어명인 '''Gol'''ongan '''Kar'''ya의 줄임말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앞 단어의 일부 철자만 따서 줄이는 일이 일상화된 탓에 이렇게 불리게 된 것. 영어로는 Party of Functional Groups라고도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들은 그냥 "골카르(Golkar)"라고만 부르며, 번역하는 경우는 백이면 백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면 "직능단체당"이 되기는 한데, 정당도 모종의 단체/모임이라서 좀 어색한 감이 없지는 않고...
30년 넘게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으로, 수하르토 시기 내내 압도적인 원내 1당 지위를 유지하면서 반공을 기치로 사실상 일당 독재 통치를 펼쳐 온 정당이라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현대 인도네시아의 근간을 닦기도 한, 유서 깊고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정당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오랜 역사와는 달리 정작 정당으로 등록된 시기는 1999년인데, 이는 본디 골카르가 정당이 아닌 모종의 정치 조직으로 결성되었으며 수하르토 시기 내내 정치 조직에 그쳤지, 법적인 정당은 아니었기 때문. 즉, 1999년까지 골카르 당원들 모두 법적으로는 '''무소속'''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미 이 때부터 실질적인 정당이나 마찬가지였으며, 후술할 이유로 법적으로 정당으로 등록된 이후로는 죽을 쑤고 있는 중.
2. 역사
본디 이 정당은 1964년 공산당(PKI)에 대항하는 반공 성향의 단체들의 연합으로 조직된 "직능단체공동사무국(Sekretariat Bersama Golongan Karya, 약칭 Sekber Golkar)"이 시초이며, 이 단체들은 노동, 국방 등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즉, 쉽게 말하자면 '''협동조합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것.
1968년 수하르토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로, 골카르는 정당에 준하는 정치 단체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본디 수하르토는 수카르노의 국민당과의 연대를 원했지만, 곧 자신들이 수카르노 시대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별도의 활동을 개시한 것.[1] 다만 법적인 정당은 아니었는데, 이는 수하르토가 군부 출신이라 법적으로는 정당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봤자 사실상 정당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수하르토 시대 내내 총선 때마다 압도적인 원내 1당 지위를 차지하면서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야당으로 민주당이나 통일개발당(PPP)이 있기는 했지만, 정작 수하르토 정권을 제대로 비판할 수도 없었고, 제한적인 선거 운동만 할 수 있었던 관제 야당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5공화국 시절의 대한민국이나 1988년 이전의 대만과 비슷한 케이스.
1998년 수하르토가 퇴진한 이후 골카르의 입지는 위협받게 되었고, 이후 민주화를 거쳐 1999년 새 선거법이 제정되자, 골카르는 법적인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이유는 새 선거법이 그냥 정치 단체의 참여를 불허했기 때문에, 아예 법적으로 정당 등록을 해야 했던 것.
하지만 민주화로 십수개의 정당이 총선에 참여하게 되었고, 선거 제도도 100% 비례대표제로 바뀌면서 예전같은 명성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결국 1999년 총선에서 득표율 22.46%에 500석 중 단 120석만을 차지하면서 원내 1당 지위를 내주고 만다. 그 후 2004년에는 모처럼 원내 1당 지위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득표율 21.58%에 550석 중 128석에 그치면서 과반은커녕 단독으로 개헌저지선조차 차지하지 못 했고, 2009년 이래로는 줄곧 원내 2당 신세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중.
한때 인도네시아 정계를 호령한 정당이 무색하게 지금은 그저 일개의 중견 정당으로 전락했는데,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첫 번째는 1999년 대선 때 불참한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 악바르 탄중 대표를 미리 후보로 선출해 놓은 상황이었지만, 대선 직전 사퇴하면서 정권 연장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꼴이 돼 버린 것(...).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수하르토를 계승할 후계자들과 중축이 사라졌다는 점인데, 수하르토의 사위 프라보워 수비안토는 2008년 골카르를 탈당하고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을 창당했고, 수하르토의 아들 토미 수하르토는 근로당(BERKARYA)을 창당하면서, 수하르토의 명목을 이어야 할 이들이 당에서 사라진 것. 결국 당의 중축이 사라지면서 기반이 대규모로 붕괴되었고, 현재는 수하르토 시대와는 거의 무관한 별개의 정당이 되버린 꼴.
하지만 그럼에도 권력을 놓고 싶지는 않았는지(?), 1999년 대선에서 악바르 탄중 후보가 사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계몽당(PKB) 압두라만 와히드 후보를 암묵적으로 밀어 당초의 예상을 뒤엎고 와히드가 당선된 이변을 낳는 한편,[2] 2004년과 2009년 대선 때는 자당 후보들이 아예 3위로 광탈하고도 선거에서 당선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의 민주당[3] 정권에 연립 여당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수하르토 시절부터 유지된 여당 지위 자체는 법적으로 쭉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허나 2014년 대선 때는 후보를 내지 않고, 한때 골카르 출신으로 GERINDRA 후보로 출마한 프라보워를 지지했는데 문제는 프라보워가 낙선하면서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했다. 다만 투쟁민주당 후보로 당선된 조코위도 골카르 소속으로 부통령을 지낸 적이 있는 유수프 칼라를 또 러닝메이트로 지명했고, 일부 골카르 소속 당원들이 조코위 내각에 입각하면서, 아주 야당보다는 범여권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 듯 하다. 물론 첫 야당 생활이 힘들었는지(?), 2016년 공식적으로 조코위 지지를 선언하고 다시 여당 지위를 회복했다. 그리고 2019년 대선 때는 조코위를 지지했다.
2019년 총선에서 원내 2당 지위를 유지하기는 했으나, 득표율 12.31%에 575석 중 85석으로 '''창당 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한때 인도네시아 정계를 호령하던 정당이 무색하게 2010년대부터는 자체적인 대선 후보도 못 내고 세력도 위축되는 것은 시간적인 문제. 일단 당시 선거를 이끈 아이를랑가 하르타르토 대표는 아직까지 대표직을 유지하면서 2024년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지만, 이게 진짜로 성사될 지는 의문이며, 별도의 제대로 된 리더십을 구축하지 않는다면 극단적으로 원외정당으로 추락하는 것도 시간적인 문제다.
3. 비판
수하르토 독재 정권 당시 집권 정당이었던 탓에 일단 독재와 인권 탄압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정작 독재 정권에 깊숙히 관여한 인사들 상당수(예: 프라보워)는 이미 당을 깨고 나간 지 오래이며, 최근에는 조코위 정권에 참여하는 등 과거의 독재, 권위주의, 극우 색채는 사실상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독재 정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지만.
장기집권한 것도 모자라 민주화 이후에도 모든 정권에 꾸준히 연정으로 참여하면서 줄곧 권력을 유지한 탓에, 부정부패도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다른 정당들도 부정부패에서 아주 크게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려우나,[4] 골카르가 유독 심하다는 평. 실제로 1999년 총선 당시 최후 발악으로 유권자를 매수했다는 폭로가 터져 나온 사례도 있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1] 이후 국민당은 민주당으로 재창당되었다가, 1990년대 말 수카르노의 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탈당하고 투쟁민주당(PDI-P)을 창당한 이후 현재는 사라졌다.[2] 공식적으로 와히드를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와히드를 지지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간접 선거라서 민의를 반영할 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메가와티의 당선이 유력했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와히드가 당선된 것. 여기에는 메가와티가 좌파 성향인데다가 여성이라는 점이 무슬림 보수층의 반발을 샀고, 이 때문에 보수 성향인 골카르가 암묵적으로 와히드를 밀어준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시위가 발생했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메가와티는 와히드 밑에서 부통령을 지내다가 2001년 와히드가 탄핵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3] 언급한 메가와티의 민주당과는 별개.[4] 그나마 투쟁민주당이 가장 청렴한 축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이것도 조코위 이후 유독 부각된 것으로, 조코위 개인의 청렴, 반부패 행보가 당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