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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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하르토(Soeharto[1] , 1921년 6월 8일 ~ 2008년 1월 27일)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이자 독재자이다. 1965년 9월 30일 일어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를 진압하고, 1967년 3월 12일 대통령에 오르며 권력을 잡은 후 1998년 5월 21일 시위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려 '''31년'''간 인도네시아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집권기간 동안 철권통치를 일삼아 수많은 인권유린이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100만명에 이르는 정적과 반대파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내에서도 수하르토의 대한 평가는 꽤나 엇갈린다고 하는데, 일부에선 인도네시아 독립에 기여한 독립운동가 출신에 인도네시아의 괄목하고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뤄낸 지도자로 평가하기도 하나, 일부에선 수백만명 이상을 학살한 학살자란 오명과 더불어 부정축재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 모하맛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라고도 하는데 '하지 모하맛'은 그가 1991년 메카로 순례를 다녀온 후 붙인 칭호이며, 그의 공식 이름의 일부는 아니다. 그의 공식 이름은 그냥 '수하르토'이다. 자바인은 성이 없고 1어절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저 앞에 붙은 칭호들을 공식 이름의 일부로 오해하는 일이 잦다.
독재를 하며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싱가포르의 리콴유, 한국의 박정희와 비교되곤 한다.
2. 초년 생애
수하르토는 1921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자바 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는데 수하르토는 정규교육을 받은 후 1940년 네덜란드 식민지군에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 제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자 일본군이 지원하던 군대에 장교로 입대하였다.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인도네시아 독립진영이 독립을 선포하자, 인도네시아 국군의 전신인 인민보안대의 부대장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좋은 전공을 세움으로써 군대 내에서 승승장구하게 되고 1963년에는 육군 전략 예비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3. 9.30 쿠데타 그리고 제노사이드
그러나 수하르토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군부 인사 6명을 살해하면서 일으킨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 이른바 9.30 쿠데타를 진압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반공적 색채가 짙었던 군부는 점점 자본주의 진영과 멀어지던 수카르노 대통령과 대립하던 상황이였고, 마침 공산당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수하르토가 이를 진압하면서 인도네시아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9․30 쿠데타는 수하르토를 비롯한 군부 세력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이 매우 많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라는 게 고작 7명 정도의 사람들이 몇몇 고위 장성들을 암살한 것에 불과하며, 당시에 무려 3백만 명에 달하는 당원을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고작 하루 만에''' 순식간에 진압당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 그 증거라는 주장이다. 또는 9․30 쿠데타는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가던 공산세력을 막기 위한 미국과 인도네시아의 권력을 잡으려던 수하르토와의 밀월관계에서 발생한 정치적 공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친공산정책을 추구하던 수카르노를 축출하기 위해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반공세력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인도네시아 군부의 쿠데타를 지원하고 수하르토의 집권을 도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9.30 쿠데타의 진압 이후 수하르토는 수카르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공산주의자들과 좌파, 친 수카르노 인사 등에 대해 대규모 숙청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학살당한 사람만 해도 '''무려 100만 명에 이르며 투옥된 사람들은 2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수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고문과 사찰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살해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인들, 노조원, 농부, 그리고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학살은 9.30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65년 10월에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시작되어 자바 섬과 발리로 퍼져나갔고, 수마트라를 포함한 다른 섬들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이러한 대학살은 1965년 말에 정점을 찍었다가, 1966년 초부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천개의 이르는 자경단과 준군사조직이 공산당원과 공산당원으로 '''추정되는''' 무고한 시민들을 대학살했다. 이 학살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발생한 학살이였지만 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수마트라 북쪽과 자바 섬, 발리에서 특히 학살의 잔혹도가 심각했다.[2] 학살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처럼 기계적인 방식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학살처럼 이루어졌다. 때로는 군부대가 학살에 나서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전면에 나선 세력은 무장한 자경단원, 곧 이슬람교도로 구성된 민병대원들이었다 물론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후원한 세력은 반공기치를 내건 군부였다. 군대는 총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죽였지만, 민병대는 종종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민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자경단은 사람들을 목을 베 죽이기도 하고, 각종 칼과 죽창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기도 했다. 또한 사람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철사로 목이 졸리거나 산 채로 목이 잘렸으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잘린 머리를 쇠꼬챙이에 꽂아 행진하기도 했고, 시체들은 대부분 강물에 버려졌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죽었으면 수라바야에서는 시체로 인해 강물이 흐르지 못한다고 군대에 공무원의 민원을 제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이 학살에서 최소한 50만 명에서 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자료들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처형될 뻔하다가 간신히 탈출한 마르쿠스 탈람(68)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1968년 울창하고 습한 정글 속에 숨어서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수갑을 찬 포로들을 트럭에서 끌어내 자동소총을 갈겨 죽여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타탓- 타탓, 타탓- 타탓, 타탓-타탓...지금도 그 총소리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면서 "이렇게 살해된 사람들은 다른 포로들이 파놓은 거대한 웅덩이에 쓸어 넣어졌다" 증언했으며, 집단 살해 장소로 쓰인 한 바닷가에 살아왔던 수리엔(70)이라는 한 여인은 "군인들이 시체들을 이곳에 버려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곳을 '악취가 나는 시체의 해변'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했다.
또한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구속되었는데 재판 절차도 없이 이루어진 초법적인 행위였다.
또한 수하르토는 독립을 요구하는 인도네시아 지역들에 대해서 "인도네시아는 수만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만약 모두 독립을 허용한다면 인도네시아는 사라지고 만다."면서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유엔의 조사에 따르면 1975년~1999년 동안 동티모르를 점령하면서 18만 3000명이 살해, 실종, 기아, 질병 등으로 죽었다고 하며, 인권단체들은 이보다 더 많은 35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독립을 요구했던 서파푸아에서도 10만 명이 죽어나갔으며, 아체 주에서도 1만 5000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수하르토는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신문사를 폐간하는 등 언론통제 정책을 펴는 한편 인도네시아의 정당체계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었다. 그는 1964년 10월 만들어진 군부의 정치조직인 골카르 당을 확장시키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1967년 말까지 약 281개 조직이 골카르당에 편입되었고 이로 인해 수하르토의 정치적 기반이 탄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인 공산당을 불법화해 공산당을 와해시키는 한편 관료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공무원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으며, 선거 집회를 열려고 하는 모든 정당들은 정부 당국의 심의를 거치게 했다. 이러한 독재 정치로 수하르토는 1968년 3월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4. 판차실라와 언론 검열
'판차실라'(Pancasila)는 '다섯(pañca) 원칙(sīla)'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 합성어로, 인도네시아의 근대적 정치 이념을 가리킨다. 판차실라의 내용인 다섯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일신교 신앙
- 정의와 문화적인 인간성
- 인도네시아의 단결
- 합의제와 대의제를 통한 민주주의의 지혜로운 길잡이
- 인도네시아 국민에 대한 사회 정의
말만 들어보면 좋은 말인 것 같지만 문제는 이 판차실라가 수하르토의 독재를 미화하는 데 쓰였다는 것이다. 수하르토는 독재 정치 합리화를 위해 인도네시아에 맞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면서 수카르노를 푸대접하면서도 판차실라 이념만은 치켜세웠고, 학생들은 이 판차실라를 달달 외워야 했고 중고등학교 각종 시험에도 출제되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국민교육헌장이나 유신헌법을 배운 것과 같다. 모든 언론과 뉴스 라디오는 판차실라를 홍보하고 수하르토를 찬양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수하르토 정권에 밉보이면 그날로 언론사는 문을 닫아야 했고, 언론사에 판차실라를 홍보하라고 정권에서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자체 검열제에 의해 언론은 통제되었으며, 반대논리를 펴는 언론은 폐쇄되고 학자들의 연구는 금지되는 독재 정치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판차실라가 수하르토의 독재정치를 위해 사용되었고, 수하르토 시대에 국가 공식 이념으로 교조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내에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판차실라가 상술한 원칙만 보면 굉장히 단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국가 이념으로 적용하기 위해 이에 맞는 제도와 법률을 구축해 나가며 수카르노, 수하르토 시대에 관련 법학, 정치(철)학적 논의가 축적되기는 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므로 판차실라 연구는 한국의 박종홍류 어용 학문이나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도 비슷한 위치였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현재까지도 판차실라 자체는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현대에는 그 자체의 지지만으로는 실제 이념적 지향과 무관하게 '인도네시아적' 정치 이념을 지지한다는 정도만을 함의하기도 한다. 당장 2020년대 들어서도 중도 좌파 성향의 여당인 민주항쟁당(PDI-P)과 우파 빅텐트 정당인 골카르당, 골카르당에서 분당해 나간 우익~극우 스탠스의 대인도네시아운동당, 중도 우파 성향의 이슬람 전통주의 정당 국민각성당(PKB) 등이 모두 명목상으로는 자신들의 강령이 판차실라에 합치함을 내세우고 있다.
5. 미국과의 밀월 관계
수하르토의 이러한 철권통치와 대학살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속내야 어떻든 일단 겉으론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의 독재자로 집권했음에도 꾸준히 지원해 주었다. 1969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수하르토에게 "미국인들은 당신이 시도하고 있는 모험을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으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수하르토의 정책에 대해 인도네시아 전 지역에 "자유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미국과 수하르토 정권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1975년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이다. 1975년 12월 수하르토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동티모르를 침공해서 20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을 학살했는데, 수하르토의 동티모르 침공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인도네시아 군의 동티모르 침공을 묵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티모르 침공 전날 수하르토는 자카르타를 방문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을 만났는데, 당시 미국은 수하르토의 동티모르 침공작전을 정보기관을 통해서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헨리 키신저는 이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이날 기자들에게 '''“미국은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미국의 묵인하에 동티모르에서는 20만명의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더구나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에 대해 유엔에서 제제조치를 취할 것을 반대하며 인도네시아를 도와주는 대신, 인도네시아가 약 1억 달러가 넘는 헬리콥터 등 미국의 신무기를 이후 20년간 계속해서 구입한다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미국은 유엔에서 인도네시아 비난 결의안이 통과되려고 할 때 미국은 이 비난 결의안을 기권하여 수하르토 정권을 도와주었다.
미국이 이렇게까지 수하르토를 지지했던 이유는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패배 이후 동남아시아가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도미노 이론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수하르토의 만행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반공 전선으로 인도네시아를 얻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인도네시아를 미국의 무기를 잘 사는 수입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6. 경제발전과 부정부패
집권 이후 수하르토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경제발전에 집중하게 된다. 인도네시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다섯 번째 산유국이었고[3] , 서방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자원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수하르토는 서방 세계의 투자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고, 석유와 가스 산업으로 연평균 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특히 오일쇼크는 수하르토에 있어서 엄청난 행운이었다. 1972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90달러 아래에 불과했던것이 1982년에 583달러까지 도달했고, 이 시기부터 도시 중산층들이 성장하기 시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한편 그는 전체 국민 중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인도네시아의 성격을 고려해 농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고, 수카르노 정권에서 식량 수입국이었던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정권 때에는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식량 수출국이 되었다. 비록 1980년대 초중반에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경제가 잠시 침체되기도 했지만 저가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공업 및 제조업 육성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재빨리 위기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는 다시금 성장가도를 달렸고 1995년에 1인당 GDP 1000달러대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외자 유치를 목적으로 단행한 금융규제 완화로 인해 기업들의 채무가 급속히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고, 당장은 큰 성장을 누릴 수 있었지만 경제의 건전성을 크게 해치며 외부 위기에 취약해진 탓에 1997년 IMF 외환위기에 인도네시아가 말려들어가고 수하르토가 하야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수하르토의 주도 하에 이뤄진 경제 발전은 그가 독재자란 이미지를 희석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이로 인해 지금도 상당수 인도네시아인들이 수하르토 시절을 추억보정하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이 성과란 것도 갑론을박이 있긴 하나, 아예 성과가 없는건 아니어서 1966년에는 630%에 달하던 인도네시아의 인플레이션 비율이 1972년에는 9%대로 떨여졌고, 1970년대 중순~80년대 초와 19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의 고도성장기때에는 실제로 소득수준이 크게 올랐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발전의 이면에는 수하르토 가문의 부정부패가 있었다. 수하르토는 슬하에는 3남 3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수하르토의 정치적 입김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재벌이 되었다. 수하르토 또한 자선재단을 운영하며 엄청난 규모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하르토 집안은 현재까지도 인도네시아의 항공사, 은행, 방송국, 택시회사 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경제 권력을 쥐고 있다. 당시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최상의 사업 파트너를 찾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는데, 왜냐하면 수하르토 대통령과 그의 자식들이 바로 인도네시아 최대의 재벌이자 사업가였기 때문이였다.(...)
수하르토 일가의 사업체는 모두 수백 개에 이르고 총자산 가치는 4백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며 텔레비전 및 라디오방송, 상업위성방송[4] , 은행업, 제약회사, 화학공장, 제지, 펄프, 해운, 항공, 호텔, 쇼핑몰, 택시운수, 자동차제조[5] 등 돈이 될 만한 사업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어 해외 언론에서 '수하르토 공화국'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그렇게 32년간 집권하는 동안 국고에서 최대 4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을 빼돌렸다. 지난 2004년 국제투명성기구(TI)는 수하르토를 '''세계 최악의 부패 지도자로 꼽았으며, 재임기간 동안 그가 350억달러를 챙긴 것으로 추정했다.'''
수하르토의 장녀 시티 하르디얀티 루크마나(Siti Hardiyanti Rukmana)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관리했으며, 차남 밤방 트리하트모조(Bambang Trihatmodjo)는 코코아, 목재, 호텔, 텔레비전, 자동차, 쇼핑, 보험 등 다양한 업종의 90여 개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 경영인이고 또 다른 아들은 석유 독점 사업을 했다. 또한 수하르토의 부인은 규모가 큰 인도네시아 기업 간의 거래에 개입해서 무조건 10%의 수수료를 받아 '10% 부인'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재산은 개인적으로 설립한 재단으로 흘러들어갔고 수하르토의 추종자들과 비판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뇌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수하르토의 32년 동안에 이르는 장기집권은 족벌경영의 폐단이 계속해서 누적되는 과정의 연속이었으며, 그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경제가 파탄이 났다는 것이 여러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네시아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결국 수하르토의 실각을 가져오게 되었다.
7. 경제위기와 실각
수하르토가 실각한 직접적인 계기는 1997년 일어난 동아시아 금융위기이지만, 정확하게는 IMF와의 협상 과정에서 수하르토가 보인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IMF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는데 수하르토가 32년 동안 이뤄놓은 부패구조를 없애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하르토는 IMF의 구조조정안을 거부한 것은 물론이고 7번째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되는 데에 성공한 후 단행한 개각에서 IMF에서 개혁대상으로 지목한 자신의 딸을 내각에 포함시켰다. 딸이 운영하는 택시회사는 이미 거액의 외화를 빌리다가 홍콩의 한 은행과 함께 부도가 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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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결과 IMF의 자금을 받지 못하게 되고 인도네시아의 생필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다. 그러자 이에 국민들은 생필품 가격을 내리라는 시위를 연일 계속하게 됐고, 이에 유류 및 전기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철회하자 시위는 급격히 과격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수하르토는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시위 중이던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시위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자카르타를 비롯한 전국에서 약탈과 방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수하르토의 지지기반인 군부마저도 동요하기 시작하자 각국은 인도네시아의 자국민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수하르토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개발도상국정상회담에 참석해 골프나 치고 있는 등 아직까지도 시위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수하르토는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다가 5월 15일 급히 귀국해 “곧 총선을 실시하고 전 장관을 경질하고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등을 돌린 국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즉각 하야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과도기 대통령인 (자기 밑에서 부통령을 한) 하비비에게 장관 몇 사람의 임명권만 주면 퇴임하겠다고 권력을 구걸하였고, 마지막에는 사위인 수비안도 준장과 자카르타 수도 경비사령관을 시켜 국민의 데모를 중국계가 조직했다는 조작된 소문을 퍼뜨리고 민심을 호도해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정부의 조작만으론 이미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고 미국과 군부마저 수하르토에게 등을 돌리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던 수하르토는 결국 32년 만인 1998년 5월 21일에 인도네시아 대통령직에서 사퇴한다.
8. 이후
이후 수하르토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자택에서 칩거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고, 그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인도네시아의 경제권력을 가지고 있는 수하르토 일가와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골카르당과 수하르토의 추종 세력이 수하르토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2000년 인도네시아 검찰은 각종 부정부패 혐의로 수하르토를 기소했으며, 2004년 국제투명성기구에서 수하르토가 국고에서 빼돌린 돈을 조사한 결과 '''150∼350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하여 그를 '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 '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법원은 수하르토가 2006년 5월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수하르토에게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그 와중에 지병이 악화되자 수하르토를 용서하자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죽을 때까지 편하게 살다가 사망했는데, 이것은 수하르토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인도네시아 집권세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때문에 수하르토는 집권 기간 동안 학살과 고문 등의 인권유린을 일삼은 독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안락한 노후와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물론 쫓겨났다는 것 자체가 본인 입장에선 상당한 수치였을지도 모르지만..
골카르당은 분위기 파악 못하고 그에게 ‘국민영웅’ 칭호를 부여하는 입법까지 제안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수하르토는 '''2008년 1월 27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실 수하르토는 퇴임 이후 자카르타의 자택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1999년부터 병세가 악화되어갔으며,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심장, 신장 및 폐 기능 저하에 따른 빈혈과 저혈압이었다고 한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다. 그의 시체는 자카르타에서 400㎞ 떨어진 솔로(Solo)시 인근 수하르토 가문의 가족 묘로 옮겨져서 장례에 치러졌는데, 이곳에는 1996년 사망한 수하르토의 아내 시티가 이미 매장되어 있었다. 수하르토가 자신의 아내였던 시티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해 그의 말을 따른 것이다. 한편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수하르토 사망일로부터 7일 동안을 공식 애도기간으로 선포하고 전국 각지의 관청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를 내걸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9. 여담
그가 실각한 이후 인도네시아는 민주화되었지만[6] , 그의 집권 기간 키워진 정재계 세력들은 여전히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수하르토 당시 집권여당인 골카르 당 역시 지금도 인도네시아 정계에서 위상이 상당한 주요정당 중 하나이다.[7] 때문에 부정부패 등으로 말썽이 벌어지기도 하고[8] , 21세기 들어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보수화를 주도하고 있는 주류 종교에 속하는 이슬람 강경파 상당수도 이들 세력과 커넥션이 있다고 한다.[9]
또한 학살에 관여한 책임자들은 수하르토 퇴진 이후인 2010년대에도 여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상당하다보니 학살에 대해선 여전히 쉬쉬하고 있으며, 후임 정부들도 진상규명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다 보니 민간단체 'YPKP65' 주도 하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운동을 군부가 '공산당 활동'으로 몰아 탄압하는 황당한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이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서 상세히 다뤄지고 있다.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 22부에 잠깐 등장한다. 다만 하나도 안 닮았고 인종도 전혀 다른 배우가 맡았다.
10. 관련 문서
[1] 네덜란드어 정서법의 영향을 받은 표기이다. 1970년대 인도네시아어 정서법 개정 이후로는 Suharto라고 쓰는 게 맞는데 본인은 Soeharto를 선호했다.[2] 반면 공산주의자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자바 섬 서부에서는 학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3]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석유생산이 파크를 찍었던데다가 외환위기의 후유증을 극복한 이후에 인도네시아의 경제가 다시 성장세에 접어들면서 석유소비가 급속히 늘어나는 바람에 석유수입국으로 전락했고, 덕택에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잠시 OPEC를 탈퇴했다.[4] 1980년대까지 인도네시아 방송사업을 독점했던 국영방송(현재는 공영방송으로 전환된) TVRI는 물론이고 1980년대 후반 방송법 개정으로 민영방송이 허가 된 이후로는 아예 민영방송 사업에도 손을 댔다.[5] 자동차 매니아였던 아들 토미가 기아 세피아를 자국 브랜드로 도입하였으며, 오스틴 메트로 기반의 고유모델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세피아 도입을 할 때 아들 고집에 넘어간 수하르토가 직접 국영은행들에 자금 대출을 지시했다. 그 사업이란게 한국에서 완성차를 수입해서 로고만 바꾸는 수준이라 관료들이 필사적으로 반대했지만 대출 금액을 줄이는 선에서 끝내야 했다. 그리고 토미의 회사는 경제위기 때 부도를 내 인도네시아 국민들 세금을 날려먹었다.[6] 압두라만 와힛,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처럼 야당쪽 대통령이 간선제로 나오기도 하다가, 2004년부터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고, 최초의 직선제 정권교체는 2014년 이뤄졌다.[7] 다만 인도네시아 정당들 자체가 원체 난립하는 다당제긴 하다. 덕분인지 민주항쟁당과 골카르당이 합심하는 골때리는 상황도 발생한다.[8] 수하르토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난 2018년 7월에 수하르토의 막내 아들이 인도네시아 정치가 부패하여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는데#, 자신의 아버지가 집권 시절 부정부패를 자행한 독재자인데다 부정부패, 빈익빈 부익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세력 간 정치적 분란 등 인도네시아의 온갖 문제들을 다 초래한 작자들임을 감안하면 이 발언은 그야말로 적반하장 격.[9] 다만 수하르토는 아체 독립주의자는 때려잡았고, 수하르토 정권 시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정치 활동도 억제되었기 때문에 정책 공조는 몰라도 인도네시아내 이슬람 보수 세력이 무조건 수하르토와 커넥션이 있거나 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