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공산당
1. 개요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다. 창립자는 네덜란드의 저명한 공산주의자 헨드리퀴스 스네이블릿(Hendricus Sneevliet, Henk Sneevliet, Maring, 1883–1942)으로, 1914년 창당 당시의 명칭은 '동인도사회민주주의연합'(Indische Sociaal-Democratische Vereeniging, ISDV)이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이라는 명칭은 1924년부터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수카르노 정권에 참여한 적도 있었지만 1965년 수하르토의 정권 장악 후 이어진 1965–1966년 공산주의자 대학살에서 탄압의 표적이 되었으며, 1966년 3월 불법화되었다.
2. 역사
2.1. 식민지 시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는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에 속했다. 전통적으로 스마랑을 비롯한 자바 중·동부의 공업 지대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공산당 지지자가 많았다. 식민지 시대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1930년대부터)를 따르는 정통파 공산주의 정당이었으며, 초기에는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유화책에 의해 한동안 합법 정당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 전기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내부의 공산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상기한 스네이블릿 외에 언론인 하지 미스박(Hadji Mohamad Misbach, 별명 '붉은 하지'Hadji Merah, 1876–1926)이나 전투적 노조 활동가 스마운(Semaun, 1899–1971)[1] 등이 있었다. 많은 토착민 공산주의자들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이슬람 정치 단체 이슬람연합(Sarekat Islam)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특히 하지 미스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이슬람과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의 비전이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21년 이슬람연합에서 이중 당적 금지안이 채택되고, 이슬람연합 및 하지 미스박이 활동했던 무하마디야(Muhammadiyah) 등 이슬람 단체들이 공산주의자들과 선을 긋자, 1920년대 초부터 하지 미스박, 스마운 등의 공산주의자들은 인도네시아 공산당 활동에 집중하게 되었다.[2]
1925년 5월,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에서 비공산계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반제국주의 통일 전선을 이루라는 지시가 인도네시아 공산당으로 내려왔다.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 내부에서는 전면적 무장 봉기로 식민 정부를 전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무소(Musso, 1897–1948), 알리민(Alimin, 1889–1964) 등의 급진파가 득세하였다. 유사한 시점에 자바 중부 지역 공산당과 공산당계 노동조합들의 회합에서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노동자 총파업을 촉발하고 혁명을 일으켜 식민 정부를 붕괴시킨다는 계획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1926년 초, 식민 정부가 먼저 발빠르게 예방 조치에 들어가 공산당 탄압을 시작하였고, 공산당 내부에서는 지도부 내에서 봉기 시작 시점에 관해 견해가 갈렸다. 코민테른 동남아시아 지부의 지도적 인물이었고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에도 참가한 전적이 있는 탄 말라카(Tan Malaka, 1897–1949)는 신중론을 펼쳤고, 결국 탄압 국면에서 봉기는 1926년 6월까지 연기되었다. 이 와중에 섣부르게 바타비아, 파당, 반튼, 수라바야 등지에서 소수 급진파가 무장 봉기를 시도하다가 식민 정부에 의해 손쉽게 진압당해 버렸고, 본격적인 봉기는 시작도 못 해본 채 대대적인 공산당 탄압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체포되며 1927년 공식적으로 공산당이 불법화되어, 결국 공산당 세력은 지하화하고 크게 약화되었다.
1930년대, 급진파 무소는 주로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동인도와의 연락을 유지하고 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공산당 세력은 1927년 불법화 이후 1945년까지 뚜렷한 정치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나, 조용히 청년과 노동자를 지지 세력으로 끌어 모으며 때를 기다렸다.
2.2. 독립전쟁
1945년, 동인도를 점령한 일본 세력이 무력화되자 동인도에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고, 무소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여러 민병대를 거느리고 다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산당은 활발한 선전·선동 활동으로 세력을 급속하게 불려나가며, 돌아온 네덜란드군에 맞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일단 수카르노의 민족주의 독립파와 함께 싸웠다.
그러나 수카르노 지도부가 렌빌 협정(Perjanjian Renville, 1948)으로 네덜란드와 일단 타협하고 여러 공산당계 민병대에 무장 해제 및 해산을 요구하자, 무소와 공산당은 이에 반발하였다. 인도네시아군의 자료에 따르면 이때 공산당은 마디운에서 마디운 소비에트를 결성하고, 1948년 9월 18일 무소를 주석, 아미르 샤리푸딘(Amir Sjarifuddin, 1907–1948)을 총리로 하는 '인도네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며 봉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무소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마디운 봉기에 얼마나 동조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확실한 것은, 수카르노 지도부가 이 봉기를 매우 철저하게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무소를 포함한 지도부를 대거 사살하면서 공산당이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산당을 과하다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탄압한 것은, 수카르노가 당시 인도네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해 독립 지지를 유보하고 사태를 관망하던 미국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어필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은 수카르노의 공산당 탄압을 보고는 인니 독립을 지지하고 네덜란드를 압박해 인니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2.3. 독립 이후
전쟁 종결 후 1953년 서기장에 취임한 디파 누산타라 아이딧(Dipa Nusantara Aidit, 1923–1965)이 당의 생존 전략으로 무장 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의회 정치에 접근하여, 공산당은 대중적으로 탈바꿈했다. 이 전략은 크게 유효하여 1955년 독립 후의 제1회 총선에서 공산당은 총 257석 가운데 39석을 획득하고, 인도네시아 국민당, 마슈미, 나들라툴울라마에 이은 원내 제4당[3] 이 되었다. 이후 약 10년간의 전성기가 이어지며 공산당은 유력한 대중 정당 가운데 하나로서, 당시 인도네시아의 사회와 문화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1957년 공산당은 지방선거에서 합계 득표수 기준 자바 지역 제1당[4] 의 자리를 획득하는 기념비적인 선거 결과를 거두었고, 이어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1957–1966) 시기에는 나사콤(Nasakom)의 한 축으로서 1962년 3월 공산당에서 아이딧 서기장과 루크만 뇨토(Lukman Njoto, 1925–1965) 2인이 입각하여 완전히 주류 세력이 되었다. 중소결렬 이후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친중 노선을 취했으며, 1960년대 전반의 최대 확장기에는 당원의 수만 2백만에서 3백만 명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의 공산당 가운데 하나였다.
1965년과 1966년, 9월 30일 사건 이후 수하르토와 군부 세력에 의해 당 지도부를 포함한 50만에서 100만에 달하는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자와 동조자 및 화인들이 대거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정세가 혼란해지자 아이딧 서기장은 1965년 말 일단 피신하였으나, 친수하르토계 군인들에게 수라카르타에서 체포되어 11월 22일 보욜랄리(Boyolali)에서 총살당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수하르토에 의해 공식적으로 1966년 3월 12일 불법화되었으며, 공산당계 노동조합 조직이었던 전인도네시아노동조합중앙회(Sentral Organisasi Buruh Seluruh Indonesia, SOBSI)도 1966년 4월 불법화되었다. 잔존한 공산주의자들과 동조자들도 다수가 사형·투옥·유배·추방되었으며, 수하르토 정권은 강력한 반공 정책을 밀어붙였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었고, 전 인도네시아 공산당원들도 수하르토 정권에 의해 차별을 겪어야 했다.[5]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이 민주화 운동으로 붕괴되고, 인도네시아가 민주주의의 길로 접어들면서 드디어 전 인도네시아 공산당원들이 그간의 일에 대해 입을 열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사회적인 차별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남아 있었다. 대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도 군부에 의해 방해되고 있는 처지이고, 오늘날에는 인도네시아 대중들도 공산주의에 별 흥미를 가지지 않은 탓에 조직 복원은 요원해 보인다.
3. 여담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을 비롯한 공산주의 문헌이 최초로 말레이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전반이었다. 〈공산당 선언〉은 1923년 이미 파르토노(Partono)에 의해 말레이어로 번역되어 신문 《수아라 라얏》(Soeara Ra’jat) 지면에 게재(당시 동인도에서 공산당 활동은 합법이었다)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세력이 절정에 달했던 1955–1965년 시점까지도 마르크스의 대표작 《자본론》은 여러 2차 문헌들과 함께 필요에 따라 인도네시아어로 발췌 번역되었을 뿐 완역되지 못했으며[6] , 이후 수하르토 치하에서 공산주의 활동 자체가 거의 불법화됨에 따라 계속 번역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가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인 2006년에야 정식으로 인도네시아어로 완역되어 출간되었다.[7]
가끔 혼동되는 인도네시아 사회당(Partai Sosialis Indonesia, PSI, 1948–1960)과는 엄연히 다르다. 인도네시아 사회당은 마르크스주의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페이비언 민주사회주의를 추구한 정당이었다.
4. 관련 단체
- 전인도네시아노동조합중앙회(Sentral Organisasi Buruh Seluruh Indonesia, SOBSI): 인도네시아 공산당계 노동조합 조직.
- 인도네시아여성운동(Gerakan Wanita Indonesia, Gerwani):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여성 조직.
- 인도네시아농민전선(Barisan Tani Indonesia, BTI):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농민 조직.
- 인민일보(Harian Rakjat, 1951–1965):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기관지. 루크만 뇨토(Lukman Njoto), 물라 나이바호(Mula Naibaho, 편집장) 등이 편집 총괄을 맡았다.
5. 인도네시아의 다른 공산당
인도네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확고한 주류 정파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이었지만, 수카르노 시대에는 몇몇 소수 정파가 더 있었다.
- 아코마당(Partai Acoma): 트로츠키주의 정당. 1955년 총선에서 1석을 얻었으나 정치적으로 큰 존재감은 없었다. 1965년 불법화되었으며,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함께 수하르토의 학살 표적이 되었다.
- 무르바당(Partai Murba): 탄 말라카 계열이 따로 1948년에 결성한 민족 공산주의 계열 정당. 인도네시아 공산주의 정당 가운데 가장 온건한 편으로, 1955년 총선에서 2석을 얻었다. 교도민주주의 시대 무르바당은 수카르노 대통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무르바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비하면 크지 않았다. 1960년대 전반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과의 대립이 격화되며[8] 생존 전략으로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친중 노선과 달리 친소 노선을 취하며, 심지어 반공 세력과 협력하기도 했다. 수카르노 집권 말기 수카르노의 좌경화 시기에 무르바당에서는 당내 우파가 당내에서 득세하였는데, 이에 수카르노는 무르바당을 점차 경계하며 1965년 초부터 탄압하였고, 급기야는 1965년 9월 해산시켰다. 그러나 직후 일어난 9월 30일 사건으로 무르바당의 해산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무르바당은 수하르토 집권 이후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산계 정당이 되었다. 이후 정당 통폐합에 따라 1973년 인도네시아 민주당으로 흡수되었다. 당 소속 주요 인물로서 수카르노 시대 주소련 인도네시아 대사였던 아담 말릭(Adam Malik)은 1966년 탈당하고 수하르토 정권에서 외무장관, 부통령 등을 역임하였는데, 1970년에는 골카르당에 입당하였다.
- 노동당(Partai Buruh): 민족 공산주의 계통 정당으로, 독립전쟁 국면에 생겨나 단명한 인도네시아 노동당이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흡수되면서 구 노동당 통합 반대파가 따로 1949년에 창당하였다. 1955년 총선에서 2석을 얻었지만 정치적으로 큰 역할은 없었고, 1950년대에 소멸하였다.
6. 참고 문헌
- 양승윤. 2005. 인도네시아사. 서울: 대한교과서.
- Pontoh, Coen Husain and Ramon Guillermo. 2019. Penerjemahan dan Penerimaan Kapital di Indonesia. IndoPROGRESS.
- Sinaga, Edward Djanner. 1960. "Communism and the Communist Party in Indonesia." M.A.,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School of Government.
[1] 십 대에 철도 노동자로 일하다가 전업 노조 활동가가 됨[2]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공산당 내부에서는 공산주의와 이슬람의 정치적 양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정치적 지분을 차지하였다. 하지 미스박 외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전성기에 이론가로 활동했던 하산 라잇(Hasan Raid, 1923–2010)이 있다.[3] 당시 1석이라도 의원을 배출한 정당은 무려 28개에 달하였으나, 상위 득표 4당과 기타 정당의 득표율 차이는 현격했고, 상위 4당의 의석은 도합 198석으로 전체 의석의 약 80%에 해당하였다. 제5당이었던 인도네시아이슬람연합당(PSSI)과 인도네시아기독당(Parkindo)이 각각 8석, 제7당 가톨릭당이 7석, 제8당 인도네시아 사회당이 5석을 획득하였다.[4] 중부자바, 욕야카르타 지역 제1당, 자카르타(제1당 마슈미), 서부자바(제1당 마슈미), 동부자바(제1당 나들라툴울라마) 제2당.[5] 이 시기를 학살 가해자인 정치깡패의 시선으로 풀어낸 다큐가 액트 오브 킬링이다.[6] 당시 인도네시아어는 학술 언어로 갓 쓰이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며, 지식인들은 주로 네덜란드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학술 문헌을 읽었다.[7] (Pontoh and Guillermo 2019, 1)[8] 인도네시아 공산당에서 무르바당을 트로츠키주의자 소굴이라고 욕하는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