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카르노

 



1. 개요
2. 생애
3. 건축가로서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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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Sukarno 혹은 Soekarno, 1901년 6월 6일 ~ 1970년 7월 21일)
인도네시아독립운동가이자 국부.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독립 이후 독재자가 되어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다가 결국 수하르토에게 권좌를 빼앗겼다. 물론 건국 영웅이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격하당하지는 않았고 표면적으로 대접해주는 '척'은 했으며 70년대 초반에 수카르노를 격하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반발 끝에 좌절되었다. 수카르노가 직접 발표한 판차실라[1]를 수하르토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이용해먹은 건 덤이었다. 수카르노 정권의 세부 치적은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야 실질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독립에 큰 공헌을 했으나, '교도민주주의'에 기반해 독재 정치를 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현재까지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문화 정책 면에서는 각종 학술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고 대학과 연구 기관을 어느 정도 확충하였으며, 새로운 국가의 국어로서 인도네시아어를 진흥하여 수카르노 시대에 문학 창작, 언어학 연구, 세계 문학 고전의 인도네시아어 번역이 정치 기구 또는 국가 기관 주도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반서방 경향을 드러내 인도네시아로의 서구 대중 문화(음악, 영화 등) 유입이 일시적으로 차단되었다는 점은 평가를 깎아먹는 부분이며, 수카르노 시대의 문화 정책은 근본적으로 문화를 과도하게 정치적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는 한계도 있다. 경제 정책 면에서는 일관되게 실정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현대 수카르노 지지파조차 수카르노 정권의 경제 성적이 형편없었다는 것만은 대체로 인정(설령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거나 상대적으로 수하르토를 깎아내리며 정당화하더라도)하고 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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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수카르노
수카르노는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 자바섬 동북부의 도시인 수라바야에서 태어났다. 수카르노의 아버지는 자바섬의 하급귀족 출신 초등학교 교사이자 이슬람교 신자였고, 수카르노의 어머니 역시 발리섬의 귀족 출신이었고 믿는 종교는 힌두교였다. 수카르노 자신은 수니파 무슬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았던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원주민 학교를 졸업하고, 유럽인의 자제들이 다니는 소학교를 거쳐 수라바야의 고등시민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 그는 곱상하고 예쁜 미모로 인해서 연극부에서 종종 여장을 하고 연기를 했다고 한다. 출처는 자기가 쓴 자서전. 또한 이 당시 백인 네덜란드인 소녀를 좋아하여 고백을 하였다가 소녀의 아버지에게 죽도록 처맞고 반네덜란드 감정에 눈을 떴다고 한다. 1921년에 학교를 졸업한 뒤 네덜란드가 1920년에 설립한 반둥 기술대학(Technische Hogeschool)에 입학하여 토목공학건축학을 공부하고[2] 1926년 5월 대학을 졸업했다.
수카르노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 네덜란드의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1927년 7월 4일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하다가 돌아온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국민당(Partai Nasional Indonesia, PNI)을 결성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목표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집회를 열면서 단상에서 뛰어난 웅변술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이로 인해 수카르노는 '민족의 지도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물론 네덜란드가 그냥 놔둘 리가 없었고, 수카르노는 1929년 12월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았지만 1931년에 특사로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다시 1933년 체포되어 플로레스섬의 엔데(Ende)에 갇히게 되었으며, 1938년에는 유배 장소가 변경되어 수마트라섬븡쿨루에서 유형생활을 해야 했다. 다만 무지막지하게 통제된 삶은 아니어서 유형생활을 하던 븡쿨루에서 첫번째 부인이 된 파트마와티와 만나 결혼도 했다.
그러던 중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일본군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자 제16군 사령관이던 이마무라 히토시는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구금 상태에 있던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수카르노와 모하맛 하타를 석방하고 그들과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일본 제국일본군에게 협력하라고 부탁했다. 수카르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카르노는 민중총력결집운동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협력해서 네덜란드와 싸우게 되었다.[3] 일본군은 수카르노의 이용가치가 높다고 생각했고, 수카르노 역시 장차 인도네시아의 완전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군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니 서로 손발이 맞은 셈.
이후 네덜란드를 몰아냈지만 일본 제국도 식민지 열강과 별반 다를 바 없었고 인도네시아를 여러 모로 착취했다. 일본인들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자바섬의 인도네시아인들을 강제 징용하고 혹독한 강제노동과 전쟁동원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을 내몰았다.
다만 일본인들은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내고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어느 정도 자치권을 주어 훗날 독립했을 때 이때의 행정경험은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네덜란드어를 금지하고 일본어는 권장했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기에 인도네시아가 건국되었을 때 인도네시아어가 자국어가 되는 것이 수월해졌다. 또한 일본 제국의 필요에 위해 길러진 군대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힘이 되었다. 어쨌든 수카르노는 일본에 계속 협력했고 인도네시아를 안정시켰다. 그러다가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은 네덜란드는 군대를 인도네시아에 보내서 인도네시아를 다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으나, 인도네시아는 당연히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전쟁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와의 전쟁에서 게릴라 전술에 굉장히 애를 먹었다. 또한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군대를 동원한 것을 두고 "저놈들 또 식민지 만들려고 학살이나 해대네" 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고, 수카르노는 실제로 이 당시에 다른 서양 국가들에게 저걸 그냥 둘 거냐고 외교 공세를 펴기도 했다. 또한 인도네시아는 당시 서방에서 경계하던 공산화와는 거리가 먼 지역이었으므로 미국이 인도네시아 편에 서서 중재를 시작하자 네덜란드는 더 전쟁해봤자 이득도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인도네시아와의 협상에 나섰고 결국 인도네시아는 독립하게 된다.
수카르노는 1948년 12월에 네덜란드군에 의해 임시수도였던 욕야카르타가 네덜란드군의 공격을 받자 결국 붙잡혀 포로 신세가 되어 방카섬에 유배되었지만, 1949년 12월 네덜란드가 협상하면서 얻어진 덴하흐 협정이 통과되면서 인도네시아의 주권과 독립이 이루어지자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어서 치러진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는 1955년에 자바 섬 서부의 도시인 반둥에서 제1회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일명 '반둥 회의'를 열어 제3세계의 결속을 주장하며 그 자리에서 주도적으로 회의를 진행하며 국제 사회에서 인지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물론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인도네시아의 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다. 3년 간의 일본 점령 그리고 4년에 걸친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여러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고 학살로 인한 문제 수습 등도 문제가 됐지만, 특히 가장 큰 문제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성장한 지방 군벌들의 세력이었다. 수카르노 정권은 이 군벌들로 인해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겪었다. 의회에서도 당파가 갈려서 서구식 민주주의 지지자,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식 민주주의' 지지자, 공산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세력이 의회에서 서로 다툼을 하고 있었다.
수카르노는 네덜란드에서 독립할 때 제정된 신 헌법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이 있었지만 국정운영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다른 정치가들과 인도네시아 군부에서 그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혼란을 해결하겠다는 명분 아래 1955년 최초의 총선을 실시해 의원내각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국은 여전히 군벌들로 인한 문제에 시달렸고 결국 국가분열의 위기에 처한 수카르노는 이른바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 guided democracy) 체제를 전면 도입하였다. 이것은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된 의회제도를 정지시키고 수카르노 자신이 국내 세력의 조정자가 되어 국가를 지도한다는 것인데 사실상 비상계엄령이나 다름없었다. 이 계엄령으로 1959년 7월 5일 인도네시아 의회는 해산되었고 수카르노는 헌법을 정지시키며 독재자가 되었다.
수카르노 정권의 슬로건은 나사콤(NASAKOM)이었다. 이것은 내셔널리즘, 종교, 공산주의에서 따온 말로 국내의 여러 대립 세력의 단결을 요구하고 수카르노가 그 대립 세력들의 조정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카르노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실권을 쥐고 있는 군부와의 갈등을 조정하여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수카르노는 애국을 주장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1961년, 인도네시아가 같은 네덜란드령이었던 서파푸아(이리안자야)를 대규모 무력 침공으로 점령해버린 전과가 있다(이에 대해 전후 사정은 인도네시아/역사 참조). 이때의 강제 점령 및 나중의 합병 등 정치적 문제와 인도네시아 점령군이 벌인 학살, 강간 등의 문제로 서파푸아 지역은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으며, 서파푸아 독립 반군은 현재도 활동 중이다. 또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를 내걸고 비동맹 운동을 이끌었지만 1963년에 비교적 평화적으로 독립한 말레이시아와 영토 문제로 마찰을 빚게 되었는데, 이로 급기야는 북보르네오[4]를 침공하여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전쟁을 일으켜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원조가 정지되었으며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악화 일로를 걸었다. 이에 수카르노는 공산주의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며 1964년 국제 올림픽 경기대회에서 탈퇴해 사회주의 독립신흥국가들만의 가네포(GANEFO, 신흥국 국제 경기 대회)를 만들었고, 1965년 1월에는 UN에서 탈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과 협력하여 코네포(GONEFO/신흥국 세력 회의)를 창설했다.
그러나 공산당에 의해 군 수뇌부에 대한 암살쿠데타가 자주 발생하며 군부와 공산당은 계속해서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같은 해 9월 30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이에 수하르토가 이들을 진압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척결, 인도네시아 부패척결을 내세우며 수카르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냉전 하에서 동남아시아의 가장 큰 공산 세력 중 하나였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소멸하는 계기가 되었고 베트남 전쟁에서 대차게 깨진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 태국은 도미노 이론으로 불안감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수하르토의 정권 장악을 환영했다.
공산당과 친밀한 관계를 쌓으며 권력 기반을 다지려 했던[5] 수카르노는 대통령의 권한을 박탈당하고 1966년 3월에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며 실권을 잃었다. 그 후 1968년 3월 27일에 정식으로 수하르토가 제2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여담으로 한겨레 기사에 의하면 1966년 1월 수하르토와 수카르노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수카르노: "수하르토,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

수하르토: "나는 당신을 민족의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부모님처럼 여겼소. 그러나 당신은 불행하게도 기대를 저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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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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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의 무덤
수하르토에 의해 축출된 수카르노는 연금 상태에 처해졌고, 쫓겨난 지 4년 정도가 흐른 1970년 6월 21일 수도 자카르타에서 사망했다. 수하르토 독재기 동안 수카르노는 수하르토에게 이름이 팔리는 안습한 신세였었다가, 1998년 수하르토 정권 붕괴 후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다.

3. 건축가로서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수카르노의 주 수입원은 건축가로서의 업무였다. 1926년 반둥 기술대학을 졸업한 수카르노는 대학 시절 친해진 친구 안와리(Anwari)와 반둥에 건축사무소 '수카르노 & 안와리'(Soekarno & Anwari)를 개설하고 건축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반둥 건축사무소 시절 수카르노는 주로 반둥에서 주택 여러 채를 지었다. 이때 수카르노는 반둥 기술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쳤던 은사인 네덜란드인 건축가 볼프 스후마커르(Wolff Schoemaker, 1882–1949)에게 건축 실무를 배웠고, 스후마커르와 합동으로 설계를 하기도 했다. 수카르노는 스후마커르 등의 영향을 받아 건축에서 모더니즘과 합리주의를 선호하였다.
수카르노는 독립 후 인도네시아의 국가적 위신을 여러 기념비적 건축물을 지어 드높이고자 했고,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도 대형 건축 프로젝트의 기술 감독을 겸직하는 등 건축에 자주 관여하였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바빴던 수카르노가 직접 세부 설계까지 한 경우는 드물지만, 여러 건축물의 입지 선정, 설계, 시공 전체에 걸쳐 조형적, 기술적 세부 사항에 관해 꼼꼼히 간섭하였다. 주로 프리드릭 실라반(Friedrich Silaban, 1912–1984), 수다르소노(R.M. Soedarsono, 1933–2018), 수유디 위료아트모조(Soejoedi Wirjoatmodjo, 1928–1981) 등 인도네시아의 1세대 건축가들이 실무를 맡아 설계해오면 수카르노가 직접 검토하고 수정하는 식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수카르노가 관여한 건축물로 대표적인 것만 들어도 자카르타의 모나스 타워, 이스티클랄 성원(Masjid Istiqlal)[6], 신흥국 회의 빌딩(Gedung CONEFO), 사리나(Sarinah) 쇼핑 센터, 호텔 인도네시아(Hotel Indonesia) 등이 있다.
가령 모나스 타워는 처음에 설계 경기에서 수카르노의 입맛에 맞는 작품이 없자 프리드릭 실라반에게 설계 초안을 만들어오게 했는데, 수카르노는 실라반의 설계 초안을 보고 링감(힌두교 조형 문법에서 시바 신의 남성적 생명력의 상징물)과 요니(링감과 한 세트가 되는 여성적 원리[샥티]의 상징물)의 형상으로 기념탑을 지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실라반에게 이에 맞게 설계를 변경하도록 지시했다. 실라반이 새로 설계한 안은 너무 거대한 나머지 건축 비용이 너무 많이 필요했고, 실라반이 설계안 축소를 거부하자 결국 수카르노는 수다르소노에게 설계 변경을 맡겨 완성시켰다. 오늘날의 모나스 타워는 최종적으로 이 수카르노-실라반-수다르소노 설계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4. 기타


수카르노라는 이름은 가옹고 국왕의 이름인 수르요푸트로의 첫 글자와 인도의 고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무예의 달인인 카르나의 자바어 표기인 카르노를 따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이 때문에 그는 서명을 할때 S.Karno라는 서명을 자주 했었다고 한다.
아크멧 수카르노(Achmad Sukarno)라는 이름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아랍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 '아흐메드'와 같은 이름인데, 이는 성씨가 없는 인도네시아 일부 민족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서구 기자들이 잘못 붙였거나, 이슬람 국가들의 인도네시아 독립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지자들이 일부러 붙인 것이라고 추정된다.(영어 위키백과 참조, In Search of Achmad Sukarno Steven Drakeley, University of Western Sydney)
그의 이름 표기는 Sukarno와 Soekarno가 모두 쓰이는데, 생전의 정서법으로는 Soekarno가 맞았지만 1970년대에 바뀐 정서법으로는 Sukarno가 맞다. 1970년대 이전 인도네시아어로마자 정서법은 본래 네덜란드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네덜란드어에서는 /u/를 oe로 쓰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말레이시아말레이시아어와 맞춤법을 통일하면서 oe를 영어식 철자법인 u로 고쳤다. 학교를 다닐 적에 자신의 생각으로는 'oe'가 아닌 'u'로 쓰는 게 맞는 것 같아 u로 쓰는 걸 고집했는데 학교에서 지적을 받고 결국 oe로 고쳐 썼다고 한다.
수카르노는 무슬림답게 4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4번째 부인이였던 하리아티의 장녀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는 훗날 인도네시아의 5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4번째 부인이었다가 3번째 부인이 된 데비 수카르노는 일본 출신으로 본명은 네모토 나오코(根本 七保子). 긴자의 고급 술집 접대부로 있다가 수카르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눈에 들의 세번째 부인이 되면서 이름도 데비 수카르노로 개명하였다. 통칭은 데비 부인. 수카르노가 쿠데타로 축출되어 연금중 객사한 후 사치 등 행실이 좋지 않아 많은 비판을 받았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며 특유의 직설적 화법과 독특한 캐릭터로 일본 연예계의 셀럽이자 사회사업가로서 왕성히 활동 중이다.
현재 수카르노를 기리며 수카르노 상이 주어지기도 하는데 별로 좋지 못한 사람(독재자)들한테 상이 돌아가서 비판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정은.'''
수도 자카르타의 공항 이름은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 및 모하맛 하타 부통령의 이름을 따 온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이다.

5. 관련 문서


[1] 사실 수카르노는 초안 정도만 제시한 거였고, 판차실라의 정치철학적, 제도적 정교화 작업은 가자마다 대학교의 법학자 수캄토 노토나고로(Sukamto Notonagoro, 1905 ~ 1981) 등이 주도했다.[2] 당시 반둥 기술대학에서는 건축학이 토목공학 전공의 세부 전공이었다.[3] 수카르노와 이마무라는 서로를 높게 평가했다. 훗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는 방일 중 일부러 이마무라를 방문하기도 했다.[4] 동말레이시아의 사바, 사라왁[5] 다만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해석이 엇갈린다. 몇몇 주장에 의하면 수하르토가 수카르노를 몰아내기 위해서 이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주장도 있다.[6] 이 모스크가 자카르타 대성당과 임마누엘 교회 인근에 위치하게 된 것도 종교적 화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수카르노의 안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