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환(영화제작자)

 


1930년 12월 4일 ~ 2013년 11월 8일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1960년 합동영화사를 설립했다. 이후 1979년부터 서울극장을 운영하며 멀티플렉스 체인이 생기기 전인 2000년대 초반까지 국내 영화 배급의 큰 손으로 충무로를 쥐락펴락했다. 1997년에는 서울극장을 증축해 7개 상영관을 만들고 국내 첫 복합영화관 시대를 열었다.
지금에야 CGV 등 대형멀티플렉스에 밀려 위상이 떨어졌지만, 당시의 서울극장 위상은 대단했다. 서울 충무로와 종로3가가 영화의 메카로 군림하던 시절[1] 서울극장은 명보극장과 함께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통하던 곳이었다. 영화인들은 영화 개봉 첫날 서울극장과 명보극장 매표소에 늘어선 줄을 보고 흥행 여부를 가늠했다. 이 두 극장 개봉작이라는 수식만으로도 비디오대여점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외국직배사들도 휘어잡는 위치였다.
영화제작자로서는 합동영화사를 통해 100여 편의 영화를 기획, 제작했다. 직접 감독으로도 나서 '쥐띠부인'(1972), '야간비행'(1973), '이중섭'(1974), '가고파'(1984), '이브의 체험'(1985), '무거운 새'(1994) 등을 연출했다.
1964년 합동영화사를 설립해 강대진 감독의 '새엄마' '청춘극장', 이만희 감독의 '협박자' '군번없는 용사' '싸리골의 신화' '망각', 이두용 감독의 '홍의장군' '초분' '경찰관',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신상옥 감독의 '증발', 김호선 감독의 '애니깽' 등을 제작하며 걸출한 감독들과 함께 작업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강우석 감독, 신철 신씨네 대표 등 젊은 제작자들의 영화에 투자자로 나서 '투캅스2', '초록물고기', '넘버 3', '편지' 등 히트작을 배출했다.
특히 강우석 감독과 돈독한 사이였다고 한다.# 성균관대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이 곽정환-강우석 체제는 당시 여러 편의 히트작들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강우석 감독은 흥행 영화를 제공하고 곽정환 회장은 전국적인 극장 배급망을 제공했다.
외국 직배사를 자신의 손안에 두고 국내 영화계 최고의 권력으로 일어서던 사례나 강우석이라는 감독을 선택할 수 있는 판단, 그리고 적절한 시점에 멀티플렉스를 확장시키던 모습을 보면 사업가적인 기질과 판단이 좋던 인물이었다.
아내는 배우 고은아씨다. 당시 매우 유명했던 여배우인데, 22살의 나이에 16살 연상인 곽정환과 결혼을 했다. 오늘날 고은아의 인터뷰를 보면 생전에 금슬이 좋았던 부부라고 보인다.##
당시의 서울극장과 합동영화사의 위세 만큼이나, 이곳 출신 유명인들이 상당히 많다.#
  • 무명이던 박중훈은 깜보(1986) 에 출연하기 위해 학교도 안가고, 합동영화사로 출퇴근을 하며, 매일 아침, 빗자루로 청소를 했다고 한다. 박중훈은 청소를 한 지 약 4개월 후 깜보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고, 그 해 충무로에 자신을 확실히 각인시키며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깜보의 제작사가 합동영화사다. 참고로 김혜수도 이 영화를 통해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 배용준은 합동영화사 연출부로 취직해 밑바닥부터 배웠다. 출연자 섭외, 장소헌팅 등의 일을 맡으며 현장 경험을 쌓은 배용준은 1994년 드라마 사랑의 인사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됐다.
  • 196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윤정희는 22세였던 1967년 합동영화사에서 공모한 <청춘극장> 신인공모에 유일하게 뽑혀 스크린으로 데뷔했다.
  • 이준익 감독은 합동영화사에 취직해 경력을 쌓았다. 처음 도안사(디자이너)를 맡았고, 이후 선전부장으로 변강쇠, 마지막 황제, 로보캅, 양들의 침묵 등 디자인, 카피, 포스터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실무를 익힌 이준익 감독은 1987년 씨네시티를 설립해 홍보 마케팅에 나섰다. 그리고 영화제작사 씨네월드를 설립하고 1993년 키드캅으로 데뷔했다.
  • 강제규 감독은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1985년 합동영화사에서 시행한 감독 공채에 합격해 조감독이 되었다.
[1] 단성사, 피카디리, 서울극장이 종로3가 교차로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