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황후 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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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광무제의 첫 번째 황후이자 후한 왕조의 첫 번째 황후로, 이름은 성통(聖通)이며 진정(真定) 사람이다.
2. 생애
그녀의 집안은 진정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곽씨 가문은 전택 등의 재산이 수백 만을 가졌던 집안인데 아버지 곽창(郭昌)이 이를 상속받게 되자 이복동생에게 양보했던 일화로 더욱 유명해졌다. 어머니는 경제의 7대손인 진정공왕(眞定恭王) 유보(劉普)의 딸로, 전한의 황족 출신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하북으로 진출했던 광무제가 그녀를 맞이함으로서 왕랑을 공격하여 하북을 장악하고 장차 천하를 통일할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광무제 건무 원년에 맏아들인 유강을 낳았고, 이듬 해에 바로 황후로 되었고 유강 또한 황태자가 되었다. 일족들도 여러 관직과 봉작을 받는 등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광무제는 비록 아들은 없었어도 곽성통보다 먼저 아내로 들인 음여화, 그러니까 훗날의 광열황후를 총애하게 되면서 점차 사이가 소원해졌고, 원망과 투기하는 마음을 품었다가 폐위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낳은 여러 아들들도 규모가 큰 지역을 봉국으로 하는 왕으로 봉해졌고, 곽씨 일족도 여전히 정치에 참여하면서 더욱 우대를 받았는데, 그녀의 동생인 곽황(郭況)도 큰 규모의 봉지로 옮겨졌다. 곽황에게 진귀한 은상을 내리는 일이 많아서 낙양에서는 곽황의 집을 금혈(金穴)이라고 불렀던 일화도 있다.
그녀 또한 황후 시절의 예우를 거의 그대로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아들 유보가 봉해진 중산국으로 가서 중산왕태후(中山王太后)라 칭하였고,[1] 유보가 패왕으로 옮겨 봉해지자 패태후(沛太后)라 칭하였다. 그래서 중산태후, 패태후라고 불렸다.
그녀의 어머니인 곽주(郭主)가 죽자 광무제가 친히 문상하였고, 백관들이 대회하였으며, 곽씨 일족에게 상을 내리는 일이 많았다. 또한 황후의 동생 곽황의 아들 곽황(郭璜)에게 육양공주를 시집보내면서 낭(郎)으로 봉하였다.
광무제 사후 명제가 즉위하고서도 이러한 예우는 변함이 없어서, 곽씨 일족은 음씨 일족과 함께 외척으로서 두터운 예우를 받았다.
광무제보다 몇 해 앞선 건무 28년에 사망하여 북망산에 장사지냈다.
3. 둘러보기
[1] 그녀는 폐위되었지만 그녀와 광무제의 맏아들인 유강은 황태자의 지위를 아직 유지하고 있었기에 둘째 아들 유보를 의지하여 그의 봉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후 맏아들인 유강은 스스로 폐태자를 자처했고 동해왕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