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제

 



'''한 제16대 황제'''
'''世祖 光武帝 | 세조 광무제'''

'''묘호'''
'''세조(世祖)'''[1]
'''시호'''
광무황제(光武皇帝)
'''연호'''
건무(建武, 25 ~ 56)
건무중원(建武中元, 56 ~ 57)
'''출생'''
기원전 6년
전한 남양 채양현(蔡陽峴)
'''사망'''
57년 6월 10일 (63세)
후한 남궁(南宮) 전전(前殿)
'''능묘'''
원릉(原陵)
'''국적'''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재위'''
'''후한의 황제'''
25년 ~ 57년 (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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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劉)
''''''
수(秀)
''''''
문숙(文淑)
'''부모'''
부친 유흠
'''황후'''
광무황후 곽씨, 광열황후 음씨

1. 소개
2. 일대기
2.1. 유년기
2.2. 청년기
2.3. 기의
2.5. 견제
2.6. 사망
2.7. 후비와 자녀
3. 후세의 평가
4. 업적
5. 비판
5.1. 호족
5.2. 직언
5.3. 국방
5.4. 도참사상
6. 낙랑군과 한국 고대사 관련
7. 관련 일화들
8. 대중 매체에서
9.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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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고대 국가인 한나라의 16대 황제면서 복벽이뤄낸 군주다. 는 수(秀)며 자는 문숙(文叔)이다. 기원전 6년에 태어나 서기 57년에 붕어했다. 재위 기간은 서기 25년부터 57년이고, 묘호는 세조(世祖)다.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성군 중 한 명으로 특히 중국사에서 성군이나 명군으로 꼽히는 당태종이나 영락제, 강희제도 즉위 과정이나 후계자 문제, 말년의 실책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데 광무제는 후계 문제도 잘 넘어갔고 창업 군주가 흔히 타는 토사구팽 테크도 타지 않아서 크게 흠 잡을 만한 곳이 없다.
비록 전한의 황족이 특권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전한과 후한은 나라 이름도 같고 국성(國姓)도 같았다. 단지 왕망 때문에 잠시 끊어져서 전/후로 나누어 부르는 것뿐이다. 그래서 광무제 또한 왕조를 새로 세운 게 아니라 다시 일으킨 황제로 여겨서 묘호가 세조이고 대수도 16대로 세었다. 세조라는 묘호도 복벽을 이룬 공을 기려서 붙은 거다. 후한서에 따르면 시호인 광무는 한 왕조를 중흥시켰다는 뜻에서 광(光), 환란을 평정하였다는 뜻에서 무(武)의 문자를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후대처럼 일세 일원제를 시행한 황제는 아니지만 한 연호를 오랜 기간 사용한 군주이기도 하다. 건무(建武)이라는 연호를 31년간 사용했고 나머지 1년 동안에는 건무중원(建武中元)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사실상 한 연호를 쭉 썼다고 봐도 되는 수준.

2. 일대기



2.1. 유년기


본래 한미한 전한의 방계 황족, 정확히는 경제의 7남이자 무제의 이복형인 장사정왕 유발(長沙定王 劉發)[2]의 5대손으로, 남돈현령을 지낸 유흠(劉欽)의 아들이다. 9살에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유량(劉良) 밑에서 자랐지만, 이미 이 때부터 행동이 신중하고 격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원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身長七尺三寸, 美須眉, 大口, 隆準, 日角。'''

키가 7척 3촌이며[3]

눈썹이 아름답고 입이 크며 코가 우뚝하고 이마가 튀어나왔다.[4]

후한서 광무제 권1

관련된 전설에는 춘추전국시대진나라시황제의 조상 양공이 잡지 못한 장끼(숫꿩)가 달아나다가 그의 고향 남양군() 근처에 앉았고, 그대로 돌이 되어 그 돌꿩을 일대의 사람들이 사당에 모셨는데 그 덕분에 그 동네에서 태어난 유수가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5]
광무제가 속한 전한 용릉절후 가문의 적통 후손은 광무제 휘하의 유지(劉祉)[6]였고, 현한유현도 지파지만 광무제 가문보다는 적통에 더 가까웠다.

2.2. 청년기


청년 시절에는 장사를 하면서 태학에서 공부를 할 비용을 마련했다고 한다.
큰형 유연과 작은 누나 유원의 남편 등신, 그리고 채소공(蔡少公)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데 도참을 배운 채소공이 장차 유수가 천자가 되리라고 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광무제보다 훨씬 유명하고 권세 있는 인물인 국사공 유수가 있었다. 누가 “국사공 유수 말입니까?”라고 하자 광무제는 “제가 아니란 법은 없잖습니까?”라고 했고, 연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뒤집어졌다. 사실 국사공 유수의 원래 이름은 유흠(劉歆)으로, 그도 비슷한 도참을 듣고 스스로 천자가 될 꿈을 품고 개명한 건데, 국사공은 나중에 왕망 제거 계획에 함께했다가 들통나서 자살했고 황제가 된 건 광무제였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도 국사공을 유흠이라고 하지 유수라고는 잘 안 부른다.[7] 공교롭게도 유수의 아버지 유흠(劉欽)과 이름이 비슷해서 유수가 이 인물의 아들이라고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2.3. 기의


왕망신나라가 적미(赤眉)의 반란으로 붕괴 위기에 처하고, 각지에서 군웅들이 일어서자 유수도 한나라의 회복을 명분으로 하여 유연(劉縯, 유인이라고도 한다)과 함께 군대에 참가했다. 이때 말이 없어 를 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며, 사람들은 침착한 행동으로 명망이 높았던 유수가 나서자 신뢰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이때는 아직 지도자는 아니었고 형 유연의 부하였으며, 유연은 녹림병·신시병과 함께하여 어느 정도 세력을 얻은 후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을 추대하고 그의 신하로 활동하고 있었다.

2.4. 곤양대전


왕망은 급히 왕읍, 왕순으로 하여금 각지의 정예 병사 43만 명을 모아서 곤양으로 향하게 한다. 성을 지키던 녹림군은 9천 명에 불과했다. 왕망의 부대가 새카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많은 장수들이 철수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때 적군을 피해서 도망치면 마침 완성을 공격하던 주력 부대가 적군의 앞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유수는 여러 장수를 설득하여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리도록 하고, 그 자신은 13기를 이끌고 밤을 틈타 성을 탈출하여 언현, 정릉으로 가서 구원병을 모집한다. 왕읍, 왕순은 압도적인 병력을 과신한 탓에 부하로부터 완성의 포위를 푸는 것이 중요하니 곤양의 수비군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자는 건의를 따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나, 쉽게 함락하지 못하였다.[8]
6월 초하루 유수는 근 1만 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왔다. 유수가 직접 지휘한 선두 부대의 1천여 명은 왕망의 군대와 4, 5리 떨어진 곳에 진을 펼쳤는데, 왕순은 병력 수천 명을 보내어 공격했다. 유수는 '''선두에서 칼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천여 명의 적을 죽이고 왕망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후 유수는 완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성은 물론 왕망의 군영에도 퍼뜨렸다. 이에 성내의 수비병들은 사기를 얻었고 왕망의 군대는 사기가 흔들렸다. 이어서 유수는 3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비밀리에 곤수를 건너 왕망의 군대 측면과 후방으로 우회하여 강습, 왕망군의 본진을 강습한다. 왕읍과 왕순은 바로 각 부대에 위치를 사수하게끔 명령하고 스스로 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응전하였다. 양군이 격전을 벌이는데 유수가 이끄는 정예 부대가 용맹하게 싸워서 왕읍, 왕순의 군대는 열세에 몰리는데, 각 주둔병은 왕읍이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여서 구원하러 가지 못했다.[9] 결국 왕망군의 중심부는 붕괴되고 왕순이 전사했다. 이 마당에 곤양의 수비군까지 출성하여 적군을 공격하니 왕망의 군대는 협공에 당황하여 도망을 치다가 폭우가 내려서 불어난 강물에 물에 빠져죽은 자가 만 명이 넘었다. 결국 왕읍은 겨우 수천 명만을 데리고 겨우 낙양으로 도망쳤다. 과장이 섞였다 해도 40만을 칭할 수 있었던 대군이 고작 1~2만 명의 군사를 이기지 못하고 전멸 당했다.
열세의 형세를 역전시키고 적은 수로 수십 배의 적군 주력을 섬멸시킨 곤양대전을 대학자 왕부지는 후에 이렇게 평가했다.

한 번의 전투로 종묘를 온전하게 지키고 곧이어 천하의 광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광무제는 정말 불세출의 인물이다.

마오쩌둥은 1936년 《중국 혁명의 전략 문제》 및 1938년 《논지구전》에서 두번이나 '남양에서 작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기고 약한 병력으로 강한 병력을 이긴' 곤양대전을 언급한다.

2.5. 견제


얼마 지나지 않아 경시제는 유연과 유수가 황제의 자리를 놓고 자신과 쟁탈할 것이 염려되어 부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연을 죽일 구실을 찾아 결국 죽였다. 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수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여 유현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즉시 완성(宛城, 현재의 허난성 난양시)으로 달려가 유현에게 죄를 청하고, 형 유연이 죽어 마땅할 죄를 지었다고 말하며 말 그대로 싹싹 빌었다. 그리하여 형이 죽었어도 그는 형 유연을 위해 상복을 입지도 않고 평소와 같이 늘 먹고 마시며 유유자적하게 담소를 즐기면서 전혀 상심해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곤양 대전의 상황을 물으면, 그는 그것이 모두 장수와 병사들이 힘써 싸운 결과이지 자신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는 이불 속에 누워서 형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무자비한 유현을 원망하였다. 이러한 유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지 못한 유현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중용하지는 않고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에 임명하였다.
왕망이 망하고, 유현이 집권하여 다시 한나라(현한)가 세워졌으나 유수는 그 명성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위험 인물로 취급되어 당시 다른 군벌인 왕랑이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화북 지방을 평정하도록 보내진다. 소수의 병력으로 여러 군벌이 난립하는 화북으로 보낸 것은 사실상 사지로 보내려는 조정의 의도였지만, 거기서 유수는 유주의 상곡, 어양 두 군을 기반으로 동마, 청독, 대동, 우래, 녹림, 신시 등의 세력과 여러 차례의 싸움 끝에 화북 지방을 평정하였으며 후한 건국 1등 공신 등우를 만나게 되었고 아직 반란을 계속하고 있던 적미(赤眉)군과 회담하여 그들을 복속시켜 자신의 군대에 편입했다. 유수가 하북 북벌에 성공하자 현한에선 유수를 토사구팽하려 했는데...현한을 혼자 멱살캐리하던 유수가 이를 눈치채고 하북을 기반으로 독립해 버린다. 그리고 현한이 붕괴하자 유수는 본래 기반인 남양 근처 낙양을 근거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10]
놀라운 것은, 그가 황제가 된 것은 만 30세 때였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창업군주가 이 나이에 제업을 이룩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조상님도 50대에 제위에 올랐고 방계후손은 60에 제위에 올랐으니, 고대 사회에서도 이런 일은 거의 없었다.[11]
그리고 하남, 강회, 형초, 관중, 파촉 순으로 제패하여 거병한지 10여 년 만에 각지의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고 천하를 평정했다.

2.6. 사망


유수는 말년에 이르러 풍습과 현기증에 걸려 57년(건무중원 2년) 2월, 재위한 지 33년 만에 63세를 일기로 낙양 남궁(南宮) 전전(前殿)에서 붕어했다. 3월에 원릉(原陵,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 철사촌 부근)에 안장됐다.

2.7. 후비와 자녀



3. 후세의 평가


훗날 제갈량조식과 논쟁하면서 쓴 글에서, "한나라 고조의 개국 공신들은 흔히 광무제의 개국 공신들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무제가 너무나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에'''[12] 공신들의 능력은 부족하지 않지만 능력이 부각될 만한 위기 상황이 적었던 것뿐이다."라고 했다. 중국사에서도 적의 사정도 적당히 생각을 해주면서 전쟁을 하는 황제는 광무제가 유일하다.
예로 유림이라는 사람이 광무제에게 "적미군이 황하 동쪽에 진을 치고 있으니 재빨리 수공을 쓰면 이들을 전부 물고기 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그런 잔인한 방법은 쓰지 않겠다면서 거절한다. 그러면서도 천하를 여유롭게 제압했다. 위기에 몰렸던 적도 있기는 했지만 그런 상황에도 시종일관 여유롭게 해결한다. 또한 공신들의 일화보다는 본인 스스로 해결한 일화가 더 많이 소개되는 경향이 있는 군주인데, 한고제로 대표되는 중국의 영웅상보다는 전형적인 서양식 영웅상에 부합하는 인물로, 비범한 능력(무력, 용인술, 전술전략, 통솔 능력 등)을 바탕으로 큰 위기없이 본인의 능력으로 천하를 통일해 버린, 한나라가 낳은 최고의 명장이다.
이러한 광무제의 공신 중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면 베트남을 원정한 마원. 이 사람은 '노익장' 고사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또한 '운대 28장'이라 하여 훗날 당 태종의 능연각 24공신처럼 광무제를 도와 나라를 세운 28명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광무제의 명참모인 등우와 동료들과 공적 다툼을 할 때마다 큰 나무 뒤로 숨어버려서 '큰 나무 장군(대수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던 풍이가 있다. 하지만 마원은 운대 28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광무제의 며느리인 "마황후"가, 공신들이 득세할 것을 염려해 황제에게 부탁했기 때문.[13]
훗날 삼국시대에 조조의 앞길을 가로막은 상징적 대적이라고 할 수있다. 한나라는 사실상 중국 최초의 통일 대제국이었으며 중화의 중심이었다.[14] 그 이점으로 당시에는 유가사상과 함께 황제는 유씨만이 할 수 있다는 사상이 강력하게 지배하였다. 조조조차도 자신의 세력 내부에 남아있는 한나라의 황제, 국성 유씨에 대한 존경심을 경계하며 끝내 본인 생전에 위왕에서 그쳤는데 그러한 분위기의 시작은 광무제 유수부터라고 할 수 있다.[15]
전한 말기에 왕망이 나라를 강탈할 때만 하더라도 유씨가 국성이라는 느낌보단 황제이니 존경한다라는 분위기이며 무너지자 다들 왕망에 반항을 하기는 했지만 본인들이 왕을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또다시 황제에 위에 오른 것은 광무제라는 희대의 영웅이었고 다시 황성이 유씨가 되자 하늘이 유씨에게 한족의 황제의 자리를 주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실제로 후한(동한)말 반란은 기본적으로 전한(서한)과는 다른 게, 전한의 반란은 전한이 이미 왕망에게 망하고 나서 황제를 주장하며 일어났지만 후한말의 반란은 유씨를 황제로 내세우거나[16] 유씨가 황제를 자처하며[17] 세력을 키웠다. 물론 본인이 마음대로 자처한 원술 같은 케이스도 있지만 원술의 최후를 생각하면...결국 이런 기조는 촉한이라는 유씨의 한나라를 계승한 국가가 삼국시대의 한 축으로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큰 영향을 남겼다.

4. 업적


한나라를 재건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전한과 후한의 사회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다. 국가에서 민간에 할당하던 부역의 양도 크게 줄었고, 징병제이던 군사제도 역시 모병제로 바뀌었다.
광무제는 노비 해방 및 대사면령을 몇 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자유민을 늘려 전한 말엽 이후 무너진 농촌 생산력 향상과 민심 확보에 힘썼다. 징병제를 폐지하고, 평소에는 농업 생산에 종사시키다가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는 둔전병(屯田兵)을 운용해, 생산과 수요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서 발생한 기근이나 변경으로의 식량 수송 문제를 완화시켰다. 광무제는 조세를 기존의 1/3 수준으로 감면해 주었는데 이러한 감세가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둔전 시행으로 병사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도 한몫하였다. 또 징병된 병사들을 귀농시킨 뒤, 건무 15년(39년)에는 경지 면적과 호적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시행하여 국가통치와 재정 기반을 확립했다.
관료 체계 역시 여러 직책이 폐지되고 간소화되었다. 대사도, 대사공, 대사마의 삼공을 정치의 최고 책임자로 두었다. 실무상에서는 황제의 비서격인 상서(尙書)가 중용되었으며 재정 기관의 재편성으로 황실 재정을 국가 재정에 포함시키거나, 대사농 직속이었던 국가 재정의 중요한 기관인 염관(鹽官), 철관(鐵官)을 지방 군현에 속하게 하기도 했다.
또 후한 사회는 전한 시기보다 유가적인 분위기가 강해진 모습도 보여준다. 당장 광무제부터가 본디 태학을 다니던 태학생이었기에 태학을 설치하고 또한 노비 해방령을 여러 차례 내리고, 노비를 함부로 살해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매인법과 약인법을 발표하여 인신매매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건무 11년(35년)에는 '하늘과 땅의 존재 중에 인간이 가장 귀하다(天地之性、人爲貴)'는 문구로 시작하는 조칙을 내려, 노비와 양민의 형법상 평등을 선언하였다. 군국제를 채용하면서도 봉읍은 전한에 비해 줄어들었다. 제후왕의 봉읍은 1개 군을 넘지 못했고, 공신을 후로 봉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것도 몇 개 현만을 봉해줄 뿐이었다.
다만 동아시아 최초로 노예제를 폐지시켰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노비 해방령을 내린 인물은 유방이고, 최초로 노비제를 폐지한 인물은 왕망이다. 광무제는 노비를 해방시키고 이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기는 했지만 노비제를 폐지하지는 않았다.[18] 또한 광무제가 노비를 해방한 것은 사실이나 모든 노비가 해방된 것은 아니었고, 이후로도 노비의 매매는 계속되었다.[19]
또 왕망이 화폐 제도를 혼란으로 밀어넣은 바람에 후한 초기까지 조악한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으나, 건무 16년(40년)에는 과거 한 무제 이후의 오수전 주조가 다시 시작되어 화폐 제도도 정비되었다.
동쪽으로는 낙랑군을 다시 한나라의 수중에 넣었고 서쪽으로는 마원을 시켜 강족을 제압하여 천수, 농서 지역에 정착하게 했다. 남쪽으로는 역시 마원을 시켜 교지 쯩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농업을 진흥시키고 현지법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 지역을 안정시켰다. 북으로는 당시 분열되던 흉노 중 남흉노의 귀순을 받아내고 이민족들의 복종을 받아 내어 사방을 안정시켰다. 또 왕망의 신나라가 고구려를 후로 낮추었는데 광무제는 고구려대무신왕(서기 32년) 시기에 고구려에게 다시 왕호를 부여했다.

5. 비판


광무제 본인이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성군이긴 하나, 시대상으로나 비판점이 없지는 않아서 서술한다.
호족들의 경우는 난세에 일어난 터라 배제할 수가 없다. 고려왕건과 비슷한 경우인데 정말 순전히 개인 세력만으로 통일을 이루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참작의 여지가 있다. 특히나 광무제가 시작했던 아랫지방의 경우는 더욱 호족의 영향력이 컸기에 불가항력적인 부분이다.
직언과 국방 문제는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데, 일단 그 사례가 매우 적을 뿐더러 광무제 본인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많은 신하들과의 미담도 있긴 하지만, 일단 본인이 워낙 뛰어나니 본인의 의사를 더 중히 여긴 듯하다.
도참 사상은 광무제 전후의 몇몇 성군들에게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본인이 거기에 좀 심취하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후한은 철저히 유교 사회로 이루어졌다. 철저히 개인적 성향이었기 때문에 후에 일어난 수많은 도참 사상을 배경에 둔 세력들에 책임을 묻기는 좀 힘들긴 하지만, 황제로서 그 시발점이 된 것은 비판점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5.1. 호족


광무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보통 후세에 우환이 되는 실책을 하나 남겼다는 것을 꼽는다. 바로 호족 견제의 실패가 바로 그것이다.
광무제는 본래 남양 출신의 호족으로 그가 세력을 일으킨 남양 지역은 비옥한 토지로 인해 많은 호족들이 성장하고 있었고, 그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도움을 준 이들은 대부분 서한시기에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키운 대토지 소유 호족들로 등우, 경감, 두무 등의 공신들 역시 이런 남양 호족 출신이었다. 즉 후한 정권은 시작부터 어느 정도 호족 연합 정권의 색채를 띄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광무제는 호족에게 강경한 정책을 쓰지 못하였다. 실제로 건무 15년 광무제는 경지와 호적의 조사를 실시했으나 이 과정에서 부정 조사가 일어나 광무제가 관련자들을 처벌하였지만 하북 지역에서 이에 반발한 호족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이 사건은 구양흡과 장급 등의 일부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 그쳤으며 이후 다시는 재조사를 하지 않았다.[20]
이리하여 후한의 호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를 바탕으로 소작농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으며, 후한 말기에는 사실상 이러한 호족들은 중앙 관리를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게 되어 환제 대에는 호족들이 '''우리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그 횡포가 극에 달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후한 정권의 지방 통제력은 크게 약화된다.[21]
다만 후한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호족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후한 멸망의 원인은 '''외척'''과 '''환관'''의 전횡도 있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보면 광무제의 손자인 장제의 무능함과 그의 황후였던 장덕황후(章德皇后) 두씨의 전횡 탓이 컸다. 본래 장제에게는 유경(劉慶)이라는 태자가 있었는데, 장덕황후는 이 유경의 어머니인 송귀인을 모함해 죽여버리고 유경마저 폐태자 시켜버린다. 이후 장제가 죽자 조정의 실권은 장덕황후와 그녀의 오빠인 두헌(竇憲)에게 넘어갔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화제는 환관을 중용하여 두헌을 제거한다. 그러나 화제가 26세의 나이로 급사하자 다시 권력은 외척인 등씨(鄧氏)에게 넘어갔으며, 이후 후한의 역사는 외척과 환관의 다툼으로 점철되어 버린다.[22]
게다가 호족 문제는 당대에는 그리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전한 때에만 하더라도 호족 견제책은 여러 대에 걸쳐서 차례대로 행해져 왔으며, 호족의 힘이 강성할 때에는 황제조차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게다가 전한 때 실시한 향거리선제의 영향으로 지방의 호족들은 인재를 선발하는 인사권마저 틀어쥐고 있었고 이것 역시 전한 후기 호족의 세력이 강해지는 데 한몫을 하였다. 애초에 전한을 멸망시키고 광무제와 싸웠던 그 왕망만 하더라도 지나치게 호족을 견제하다가 역풍을 맞고 각지의 반란으로 사망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23]이었고, 광무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왕망과 반대로 호족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4]
즉 광무제 때의 호족 정책은 단순히 광무제 본인의 관대함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그보다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큰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오로지 광무제의 실책으로 돌리는 건 그에게 까다롭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치세는 신나라의 실정과 오랜기간 동안의 전란을 수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이것에 매진하여 번영을 가져온 것만으로도 광무제는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5.2. 직언


말년에 광무제 유수는 직언하는 신하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있다. [25] 예로, 대사도 한흠(韓歆)은 유수에게 곧 기근이 들게 될 것을 설명하면서 이를 매우 강한 어조로 직언했다. 그러자 유수는 직언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를 파면하여 농사를 짓게 했다. 그 다음에 또 조서를 내려 책망하자, 한흠과 그의 아들 한영(韓嬰)은 자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은 몇몇 일부분의 사례로, 실제로는 직언하는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에 속했다.
예로, 광무제가 하루는 사냥을 하다가 밤 늦게 성문에 도착했는데 성문을 지키는 질운이라는 신하가 밤이 늦어 황제인지 확인 할 수 없으니 성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하자, 할 수 없이 한참 돌아서 다른 성문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날이 밝자 질운이라는 신하가 광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 과거 문왕은 사냥을 즐기지 않으셨는데 폐하께서는 하루종일 사냥을 하시니 이 종묘사직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하며 강력하게 질타를 했는데, 광무제는 오히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질운에게 베 1백필을 하사하였다. 덤으로 어젯밤 다른쪽 성문을 열어 준 신하는 대신 벼슬이 깎였다.
또, 광무제의 누이인 호양공주의 충복인 노비가 사람을 죽여 동선이라는 신하가 그 노비를 체포하러 왔는데, 호양공주가 노비를 숨기고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동선이 큰 소리로 질책하고 노비를 끌어내어 법에 따라 사형을 집행했는데, 그로 인해 체면이 깎이고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호양공주가 동생인 광무제에게 동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였다. 처음엔 광무제도 화가 나서 동선을 불려들였는데 동선이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며 오히려 황제를 질타하는 말을 하자, 전후사정을 알게된 광무제는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 오히려 동선에게 30만전이라는 큰 상금을 내렸다.
이처럼 광무제는 직언을 하는 신하의 말이 옳을 경우,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5.3. 국방


중국을 통일한 후에 유수는 전쟁을 싫어하고 국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번은 황태자가 군사 전략의 문제를 물으니, 유수는 “이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유수는 중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군국병제(郡國兵制)를 폐지하고 군국의 도위를 파직시키는 등 국방의 약화를 야기했다.
후한 시절에 이르면 사실상 전국민 군역의무가 폐지되고, 상비군 위주로 국방을 담당하게 된다. 모든 제도에 명암이 있듯, 군사력은 강해졌지만, 각 지역별로 장기근속된 지휘관들에게 병사들이 충성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국가 행정력이 무너지는 후한 말-삼국시대에 이르면 군벌들이 도래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덧붙여 상비군 제도로 바뀌면서 군대 내 이민족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는데(주로 기병), 이는 장기적으로 5호 16국이 도래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5.4. 도참사상


광무제의 문제점 중 하나는 도참사상을 과도하게 추종했다는 것이다. 환담은 도참사상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다가 죽었고, 정흥은 도참사상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했으며, 가규는 도참에 나온 글에 주석을 달음으로써 후대를 받았다.[26]
문제는 이후 후한 사회에 참위설이 널리 퍼지면서 이 사상이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과 맞물려 태평도, 오두미도 같은 도교 계열 종교가 사회적으로 세력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민심을 동요케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당장 후한 황조가 무너진 결정적인 계기가 태평도가 주된 봉기 세력인 황건의 난이 아니던가. 이 부분은 광무제의 실책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다만 아라비아, 페르시아, 로마 제국, 인도 등 서쪽에서는 종교가 권력과 잘 융합했다. 듣보잡일 때 도참사상에서 용기를 얻고 결국 천하를 통일했으므로 좋아하는 것도 인간적으로 봤을 때 비난하기는 어렵다.

6. 낙랑군과 한국 고대사 관련


다른 황제들이 소득도 없는데 쫀심 때문에 무식하게 유지했던 요동군 등 옛 조선 지역의 주둔 병력들을 계속 골을 썩이느니 포기하는 게 좋다고 해체한 것을 보면 대인배+현실적인 군주다. 그렇지만 낙랑군만큼은 다시금 장악한 군주기도 했다. 정확히는 당시 왕조(王調)라는 인물이 당시 한나라에서 보낸 태수를 살해하고 혼란하던 한나라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고 독립하려 들자, 현지인들이 간을 보다가 진압군에게 순응한 것.
이 왕조라는 인물은 후한서의 왕경전(王景傳)에서 등장한다. 여기에 따르면 이 양반을 낙랑의 토착인이라고 하며, 한나라에서 파견한 태수인 유흔(劉憲)을 살해하고 자립해서 '대장군(...) 낙랑 태수'를 자칭한 인물이다. 이 '토착인'이라는 용어며 왕조의 출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개 고조선의 주민 혈통이나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한화(漢化)된 인물로 본다. 토착인이라는 용어는 대개 그 지역의 이민족 토착 세력을 지칭하지만 성씨가 중국식이라는 게 그 증거. 아마 이러한 배경을 믿고 처음에는 중국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를 제거하고 자립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토착 세력들은 이놈이 영 아니라고 보았는지 아니면 바짝 진격해 오는 후한군에게는 안 될 걸로 보았는지 뒤치기 당하고 5년만에 진압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이 시점에 대입해서 이때 낙랑군을 지배하고 있던 고구려까지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오늘날 학계의 연구에 다르면 대개 부정된다. 이 부분은 보충 설명이 필요한데, 흔히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설화로 알려진, 대무신왕이 점령한 '낙랑국'은 대체로 함흥-원산만 일대인 동옥저에 위치했던 소국으로 보고 있지만, 후한군이 낙랑군을 수복했을 때 이 지역은 이미 낙랑군으로부터는 분리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낙랑군을 완전히 점령한 적은 없다는 것. 이러한 얘기가 나온 이유는 삼국사기에서 기원후 44년경 고구려가 점령한 '낙랑'을 후한에게 빼앗겼다는 기사가 등장하기 때문이었다(대무신왕 27년조). 그러나 이 기사는 일종의 착종이다. 이것은 고구려 본기에서 그 이전 기사(기원후 32년)에 '낙랑'이라는 어떤 정치 체제를 고구려가 점령하였다고 나와있으며, 이것을 삼국사기 찬자가 중국의 낙랑군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점령해서 멸망시킨 낙랑군이 후한 때 멀쩡하게 등장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가 일단 점령-후한의 광무제에게 빼앗김이라는 구도를 세웠던 것이다.
본래 이 기사에서 '진짜 사건'은 이어지는 '후한과 고구려가 살수(청천강)로 경계를 삼았다'였으나, 이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서 '(한나라에게 점령했던 청천강 이남의 낙랑군 지역을 빼앗겼기 때문에) 살수로 국경을 삼았다'라는 기사가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하고 후한은 적어도 낙랑군을 놓고 다툰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영역이 확장돼 살수 이북까지 진출했다거나, 후한이 기원후 44년까지 살수 이남의 낙랑군의 체제 재정비를 완료했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 근래 학계의 설명. 현재 국내 학계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대무신왕대에 낙랑군 본토인 평양은 가본 적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고학 자료는 물론이고, 사료상의 교차 검증으로도 고구려가 대무신왕대에 낙랑군을 완전 점령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7. 관련 일화들


젊은 시절 황제의 행렬 앞에서 화려한 집금오[27]를 보고,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라고 했다. 후에 황제가 되고 이름난 미녀였던 음려화를 아내로 얻었다.
비록 음려화가 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 황후는 곽성통이 됐으나, 광무제는 음려화를 전쟁터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총애를 했고, 후에 음려화가 아들을 낳고[28] 곽 폐황후가 이를 질투하자 이를 구실로 황후를 음려화로 교체했다. 이때 태자도 장남 유강에서 음려화의 아들 명제로 바뀌었다. (다만 이건 어머니가 폐위됐음에도 계속 태자 자리에 있던 걸 부담스러워한 유강의 태자 퇴위 요청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곽씨 가문 및 곽 폐황후 소생 자식들을 모조리 죽인다거나 하진 않고 적절히 대접해 주었다. 황후에서 폐하긴 했어도 대우 자체는 황후 수준을 유지했다고까지 한다. 음려화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살아서 황태후가 됐고 죽어서는 광렬황후란 시호를 받았으며 광무제의 능에 합장되었다.
자식은 모두 11남 5녀. 이 중 폐황후 곽성통은 5남 3녀를 낳았고 광렬황후는 5남 1녀를 낳았다. 광무제의 후손 중 영제, 소제, 헌제 등의 황제들을 제외하고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이 2명이 있는데 바로 광무제의 6대손인 유우와 또다른 후손 유엽이 있다. 유우의 5대조가 곽 폐황후의 소생이자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 유강(劉彊)인데 원래 황태자였으나 어머니가 폐후가 되었고 광무제의 넷째 아들이자 이복 동생으로 음려화의 소생 명제에 밀려 황태자를 내주었다. 유엽은 광무제의 7남이자 유강의 동복 형제였던 부풍질왕 유연(劉延)의 후손이다.
왕망을 멸하고 중원 지역이 거의 평정되었을 즈음, 광무제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농서 진(秦) 지방의 외효와 촉(蜀) 지방의 공손술만이 남게 되었다. 신하들은 이 두 지방을 하루 속히 토벌해야 한다고 간했으나, 광무제는 "중원은 이미 평정된 지 오래이니, 그들은 이제 문제시될 게 없소(度外視)"라며 느긋하게 대처하였다. '도외시(度外視)'는 이러한 광무제의 말에서 유래된 단어. 참고로 2014년 11월 16일 도전 골든벨의 마지막 문제이기도 했다.
지역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저항하고 있던 최후의 적 공손술을 격파하기 전에, 뤄양의 후한 황궁에는 아직 황제의 집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광무제는 집기를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성도에 모두 만들어져 있으니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촉 지역의 중심지[29]로 공손술이 황궁을 짓고 있었으니 '''공손술을 격파하고 모두 빼앗아 오면 된다는 의미다.''' 이때 유수가 한 말이 득롱망촉(得隴望蜀). '농 땅을 이미 얻었는데 촉 땅을 바라고 있다'라는 말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표현한 고사성어가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범인들에게나 해당될 뿐 정작 고사성어 장본인인 광무제는 '''바로 이듬해'''에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했고, 이걸 실패한 예로는 한중을 얻고도 유엽사마의의 간언을 씹었다가 촉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재정비한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긴 조조가 있다.
후에 황제가 되었을 때 과거 글공부 같이 하던 친구인 엄광을 찾아서 후하게 대접하고 옛날 얘기를 같이 했는데, 그가 옛날에 하던 것처럼 자신을 막대하고 자면서 다리를 올리고 레슬링 기술을 걸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근데 나중에 웬 떠돌이 별(객성)이 황제의 별을 범하는 것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온 점성관에게 "친구인 엄광이 내 배 위에 다리를 올리고 자서 그렇다." 하고 허허 웃고 돌려보냈다. 함석헌은 이것을 보고 엄광에게 권력에 주눅들지 않는 들사람[野人]의 기개가 있다고 평가했지만, 이보다 황제라는 존귀한 지위에 올랐어도 그 지위나 권위에 연연하지 않고 옛 인연을 한결같이 벗으로서 대해준 광무제의 관대함에 초점을 두어야 할 듯 하다.
광무제의 누이인 호양공주의 일화도 유명하여, 조강지처라는 말이 그녀에게서 유래했다.
그녀에 대한 다른 일화로는 강직한 현령인 동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호양공주의 하인 중 한 명이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공주의 위세 때문에 다른 관원들은 감히 그를 체포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동선은 이런 위세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하인이 공주가 탄 수레를 몰고 나오자 그 자리에서 하인을 체포하고 공주에게 호통을 쳤다. 당연히 화가 난 공주는 광무제에게 고자질했고, 광무제는 당장 동선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그런데 끌려온 동선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폐하께서 천하를 일으키셨다지만 겨우 가노 따위가 살인하는 걸 놔두면 어떻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신은 자결을 하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나서며 궁궐의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서 자살을 시도했다. 깜짝 놀란 광무제는 이를 말리고 동선에게 '그만하고 공주에게 머리 숙여 사죄라도 해라'라고 명했지만 이 조차 따르지 않았다. 광무제가 신하들을 시켜서 억지로 동선의 머리를 숙이게 하려 했지만 끝까지 저항했다. 이 모습을 본 호양공주는 어찌 천자가 명령 하나 제대로 못 내리냐며 기막혀했고, 광무제는 웃으면서 '고개 뻣뻣한 현령(强項令)은 이만 나가도록 해라'라며 35만 전의 상금을 수여하고 내보냈다.[30]
그의 대인배적 일화가 또 하나있는데 광무제가 적미를 모두 토벌할 당시 적미군 잔당들은 모두 자신들이 죽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바로 본인들이 장안에 들어서며 광무제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전한의 황릉들을 도굴했기 때문인데 그당시 조상의 무덤이 털렸다는 것은 후손 입장에서는 치욕이나 다름없었고 적미들 입장에서는 조상들의 무덤을 도굴한 자기들을 죽일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무제는 대인배스럽게 주동자들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위에서도 한번 언급했지만 조조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식제갈량과 서신을 통해 현대로 치면 키보드 배틀을 펼친 적이 있다. 조식은 광무제를 추켜세우며 자기 아버지를 광무제에 비견하는 의도를 드러냈다. 반면 제갈량은 자신의 주군 유비한고제에 비견하는 의도를 드러내어 한고제를 칭송했다.

8. 대중 매체에서


아무래도 사람이 너무 먼치킨인지라 위기가 없다고(...) 해도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성군인 만큼 사극의 소재로 쓰기엔 적당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2016년에 중국 강소위성 TV에서 52부작으로 방영된 '수려강산지장가행(秀麗江山之長歌行)'이라는 임심여가 주연인 드라마가 나왔다. 광무제 유수 역은 보보경심에서 13황자 역을 맡았던 원홍이고 임심여는 광무제의 연인인 음려화 역. 실제 방송 기간은 2016년 7월 21일부터 2016년 8월 19일까지이다. 한국에선 2017년 1월 CHING을 통해 방영되었다.[31]
물론 실제 역사대로 가면 시나리오가 '덕이 있고 유능하신 광무제 폐하께서 일어나 적들을 다 쳐부수고 후한을 세웠다' 정도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적절한 수준으로 만든 듯하다. 이 덕분에 음려화도 본디 역사와는 달리 광무제의 공신 운대 28장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무력 본좌(...)가 되어 활약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사실 임심여 쪽에서 드라마 제작에 참여해서 이렇게 음려화 비중이 늘어난 거 같지만(...).
자세한 줄거리나 캐스팅은 해당 포스팅 참고.
즉위할 떄에 겨우 나이가 30세였고 사실상 유수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들은 그 이전에 다 일어났으므로, 트렌디한 스타일로 만들면 이야기가 될 것도 같은데도 인간적인 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의외로 위의 작품 외에는 거의 각색되지 않았다. 심심하면 나오는 초한 관련, 삼국지 관련 작품들에 비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9. 둘러보기(계보)


'''유한의 역대 황제'''
현한 1대 경시제 유현

'''16대 세조 광무제 유수'''

17대 현종 명황제 유장
'''후한의 역대 황제'''
현한 1대 경시제 유현

'''1대 세조 광무제 유수'''

2대 현종 명황제 유장




[1] 전조의 유연은 흉노는 한의 동생이라며 한나라의 계승을 칭하면서 한왕에 올랐는데 한고제, 광무제, 유비, 한문제, 한무제, 한선제, 한명제, 한장제를 모셨다. 이때 앞의 세 명, 즉 서한(전한)의 창건자 고제, 동한(후한)의 중흥자 광무제, 촉한의 건국자 유비까지 3조(三祖)로 두고 뒤의 다섯 황제는 5종(五宗)으로 모셨다고 한다. [2] 출생에 관련하여 경제가 어느날 밤 황후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 했는데 하필 황후가 생리 기간이어서 당희라는 궁녀로 대신했다고 한다. 겨우 하룻밤인데 별일 없겠지 하고 정을 통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3] 후한척이 당시 1척에 약 23.7cm로 볼 때 7척 3촌은 현재로 약 173cm정도이다.[4] 日角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관상학적으로 일각은 이마의 정중앙 즉 미간부터 이마의 중앙이 튀어올라온 형태를 의미한다.[5] 원래 까투리(암꿩)와 장끼가 한 쌍으로 있었고, 암꿩을 잡으면 천하의 패권을 잡고 숫꿩을 잡으면 왕이나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양공이 암돌꿩을 잡아 사당에 모시니 나중에 양공의 후손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했고, 남양 근처의 사람들이 숫돌꿩을 잡아 사당에 모시니 후에 그 지방 황족 유수가 황제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은 열국지에도 잠시 나온다.[6] 전한의 마지막 용릉후인 강후 유창의 아들로, 전한이 안 망했다면 마땅히 용릉후가 될 인물이었다. 이후 현한에서 용릉후, 정도왕에 봉해졌으나, 독립적인 세력을 일군 적이 없이 내내 광무제에게 충성했고, 현한 멸망 후 광무제에게 성양왕으로 봉해졌다.[7] 다만 유흠도 듣보잡 인물은 아니다. '설원'이라는 책을 쓴 유향의 아들로, 도가 사상을 비판하여 학문적으로는 나름 업적을 남겼다.[8] 이때 왕읍과 왕순이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있다. 유수를 목 빠지게 기다리던 곤양성의 장수들은 물량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려 했으나, 힘으로 반란군을 눌러버리겠다는 생각에 취한 왕읍 등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 당시 왕망군 수뇌부의 지휘 능력과 작전 수준이 개판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절대 우세에 있는 병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했다면 유수를 포위하여 적병의 바다에 고립시키고 압살할 수 있었던 것을, 사령관급 인사가 다른 부대는 대기시킨 채 직접 본대를 이끌고 적의 강습 부대와 정면 대결을 하다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10] 이때 유현은 전한의 수도인 장안에 있었는데 장안 일대를 중심으로 약탈과 전횡을 일삼던 적미군 일파가 장안에 쳐들어 온 것을 막지 못해 이미 죽었던 상황이었다. 이 적미군 일파 또한 광무제 유수에 의하여 쓸려나가게 되었다.[11] 항우는 25세에 천하의 패자가 되기는 했으나 5년만에 망해버렸다. 이후 여러 창업군주들은 대부분 인생의 후반기에 천하를 얻는다. 비교적 젊은 축에 황제가 된 주원장도 40세에 황제에 등극했다.[12] 이 글에서 제갈량이 조식의 글을 반박한 이유는 유비를 유방으로 치환해두어 "부하 덕을 보아 한중왕이 된 유비"라는 주장에 맞서 "한 고조를 변호함으로써 한실의 존립 취지를 되살림"과 동시에 "본인도 뛰어났고 주변도 뛰어난 준걸들이 있었던 광무제에 비할 수 있는 유비"라는 주장을 위해서라는 해석이 있다.[13] 마원 사후에, 마원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자들의 모함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작위가 잠깐 추탈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 또한 있다.[14] 이전 통일 왕조인 는 너무 고대이며 사실상 한족이 성립되기 이전인 데다, 진은 너무 통일제국으로서 존속기간이 짧았고 치세가 가혹했다.[15] 순욱과 같은 한나라에서 관리직을 시작한 호족들이나 청류파 귀족들 대부분이 한나라의 편을 들었다. 순욱이 사실상 토사구팽설이 유력한 가장 큰 이유중 하나이다.[16] 대표적으로 유우를 황족으로 내세우려 하였던 원소, 헌제를 황제로 모셨던 조조.[17] 대표적으로 유표, 유언, 유비 등이 있다[18] 출처: 자치통감, 후한서 광무제본기[19] 출처: 자치통감[20] 출처: 자치통감, 진한사,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21] 출처: 정론, 사민월령[22] 출처: 후한서, 자치통감[23] 왕망의 패망이 호족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광무제와 경시제의 집안인 남양 유씨부터가 남양의 유력 호족이며, 광무제의 외가인 번씨 역시 남양의 대지주였다.[24] 왕망은 왕전제(王田制)라 하여 호족의 토지 소유를 규제하였으며, 육관(六莞)이라 하여 소금과 철에 세금을 매기는 등 급진적인 정책으로 호족들의 큰 반발을 샀고 이는 대규모 반란의 원인이 된다. 출처 : 진한사,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25] 몇몇 사례가 있는 것이지, 광무제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26] 출처: 자치통감[27] 한나라 때 대궐문을 지키던 벼슬[28] 훗날 명제, 광무제한테는 4번째 아들이 된다.[29] 현재 쓰촨성청두로, 성도(省都)이기도 하다. 다만 공손술 치세 시기에는 파동 지역인 백제성 일대 역시 인근 형주 등 장강 이북-이남 지역과의 교류로 매우 중시되고 번영했다고 한다.[30] 후한서 77권[31] 이흠의 소설 〈수려강산(秀丽江山)〉이 원작이라고 한다. 원래는 타임슬립물인데 그 요소를 빼고 만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