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1. 개요
6.25 전쟁이 터지자 전국의 형무소에서는 일반 재소자들을 석방하였고, 형무소 직원들은 피난시켰다. 그러면서 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후퇴와 동시에 대한민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피학살자들은 대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좌익 혐의를 받아 형무소에 소감된 좌익수와 정치범들이었다.[2]
2. 수도권/강원권
2.1. 서울형무소
2.2. 마포형무소
2.3. 인천소년형무소
2.4. 춘천형무소
3. 충청권
3.1. 대전형무소
3.2. 공주형무소
공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109명의 직원과 1000여 명의 재소자가 위치하고 있었다. 대전교도소에서 많은 좌익수를 수용하고 있었다지만 공주형무소도 여순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수감되며 수백여 명의 좌익사범을 가둔 상태였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얼마 되지 않아 공주 지역의 군대와 경찰에게 '''"좌익과 보도연맹을 처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러자 특무대는 공주교도소로 가서 좌익사범들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형무소가 이를 수용하면서 좌익사범들은 50여 명씩 여러 대의 트럭에 실려 이송되었다. 이 이송작업에는 공주형무소 특별경비대, 공주 경찰, 헌병대, 청년방위대, 우익 청년단체까지 동원되었다. 개머리판으로 두드려 맞으면서 이송된 수감자들은 '왕촌 살구쟁이'[4] 라는 곳으로 이송되어 학살되었다.[5] 군인과 경찰이 학살지 부근을 통행금지 시키는 바람에 피난민들은 길을 우회하며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실제로 한 주민에 증언에 따르면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해질녘까지 총살이 벌어졌다고 한다. 공주경찰서가 쓴 <경찰연혁사>에서도 6.25 전쟁 관련 부분에 '''"형무소 수인 처치, 보도연맹원의 조치"'''라고 자신들의 학살행위를 시인하고 있다.
학살 59년 후인 2009년 6월부터 7월까지 진실화해위원회의 주도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6개 구덩이 중 3개 구덩이에서 317구의 유해와 수백 개의 탄피를 발굴해냈다.[6] 그리하여 약 400명에서 700여 명의 사람들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3.3. 청주형무소
청주형무소는 전쟁 당시 14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고, 1600여 명의 재소자가 수감되어 있었다.[7] 전쟁이 터지자 특무대가 형무소의 지휘권을 장악했고, 곧 형무소 좌익사범들과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 지시가 내려왔다. 이렇게 되자 1950년 6월 28일 만기출소했던 사상범들도 잡혀왔고, 수백 명의 보도연맹원들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쟁 직후 형무소는 면회와 차입도 금지시켰고, 더 이상의 출소와 주변 통행까지 막아버렸다. 6월 30일부터는 여순사건 관련자 36명을 시작으로, 800여 명의 재소자들이 피학살지로 이송되어 7월 초까지 전원 총살당했다. 학살은 청주 부근의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는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약 12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4. 호남권
4.1. 광주형무소
광주형무소는 전쟁 당시 1700여 명 정도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전쟁 직후 좌익사범들은 헌병에 호출되어 광주광역시 산동교 인근에서 학살당했다고 생존한 재소자들과 형무소 직원들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서 증언한 바 있다. 그리하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피학살자 55명의 유족들이 진상규명 신청을 하여 이 중 29명이 광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공식 문서에서는 좌익사범에 대한 처리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생사는 여전히 불명이다.
4.2. 목포형무소
목포형무소는 전쟁 당시 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좌익사범에 대한 처리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응한 형무소 간수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 법무부에서 '''"사상범은 군에 인계하고, 잡범은 석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직후 소속 미상의 군인들이 좌익사범들을 트럭에 싣고 가 사라졌는데 아마 이들은 목포 인근 바다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39건을 확인하였다.
4.3. 전주형무소
전주형무소는 전쟁 당시 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좌익사범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경 군인들에게 끌려나가 전부 공동묘지 부근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면회인, 형무소 근무자, 군인이 공통으로 비슷한 증언을 하였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70건을 확인하였다.
4.4. 군산형무소
군산형무소는 전쟁 당시 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전쟁 직후 일반 수용자는 석방하고, 중형을 받은 수형자는 타 형무소로 이송하였다고 하는데 좌익사범의 처리는 역시 기록되지 않았다. 간수의 증언에 따르면 좌익사범들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한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9건을 확인하였다.
5. 경상권
5.1. 대구형무소[8]
1950년 7월 중순, 특무대와 경찰이 주도하여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들이 학살당했다. 이들은 대부분 가창 계곡이나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 4대 국회에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402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던 1172명의 행방이 모연하여 이들도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최소 1402명, 최대 2574명이 학살당했다.
[1] 현재 대구 중구 삼덕교회 뒷편에 있었다.[2] 이 재소자들은 남조선로동당, 여순사건, 제주 4.3 사건, 숙군, 공안사건 등의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었다.[3] 이 사진은 사진기자 헤이우드 마기(Haywood Magee)가 찍어 1950년 7월 「픽쳐포스트」지에 실렸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동조 혐의자", "스스로 무덤을 파서 총살됐다"라고 적어놓았는데, 나중에 '''"전쟁 초기에 양쪽 모두 야만적인 행위가 저질러졌다. 다소의 재소자들은 다른 편에 의해 당했다"'''라고 바뀌었다. 사진에는 빡빡 깎은 머리를 한 재소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트럭에 타 있고, 그 주위로 군인, 경찰, 특무대원 등이 지키고 있다.[4] 공주시 상왕동 산 29-19[5] 당시 이 학살을 유엔한국위원단 야전관측조에서 복무하던 호주군 장교 피치 소령이 목격했는데, 그는 "바로 내 눈 앞에서 2~3명이 죽는 것을 봤다. 그들의 머리는 소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계란처럼 으깨졌다'''"고 후일 증언했다.[6] 유해들은 모두 구덩이를 향해 시선을 향한 채로 두 손은 결박당하거나 목을 움켜쥐고 무릎은 꿇린 채로 사살되었다. 피학살자들은 전부 남성이었으며 20대 이상으로 추정되었다.[7] 이 교도소는 사실 수용정원이 500여 명이 불과하여 그 3배가 넘는 인원이 수감되자 재소자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공장 하나를 임시감방으로 사용해야 했을만큼 시설이 열악했다.[8] 현재 대구 중구 삼덕교회 뒷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