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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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慶山炭鑛虐殺事件
Gyeongsan Cobalt coal mine massacre
'''발생 시기'''
1950년 7월 20일 ~ 1950년 9월 20일
'''발생 위치'''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관련 기관'''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국군, 형정국[2]
보도연맹
'''피해 내역'''
정부 추산[3]
2,574 명
유가족 추산
3,500여 명
부상
추정 불가
1. 개요
2. 위치
3. 피해자
4. 살해 방법
5. 사후 처리
5.1. 대중 매체 방영
6. 피해 보상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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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기간 중에 발생한 대한민국의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통칭 '''경산 안경공장 학살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나 이는 사건이 벌어진 지 30년 이상 지난 1988년 현장에 들어선 안경공장 '''국제광학'''[4] 건물이 폐업 후 공포체험 장소로 유명해지며 이 사건과 연계된 괴담이 네티즌들 사이에 유행하면서 잘못 불리는 이름이다.
6.25 전쟁 기간 중에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보도연맹 회원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주민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 20일 경부터 9월 20일 경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 관련 글,#, #

2. 위치




경북 경산 평산동에 위치한 코발트 광산에는 수평 갱도와 수직 갱도가 있어 이곳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 뿐 아니라 인근 대원골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5]

3. 피해자


사건의 피해자는 크게 대구형무소 및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의 두 부류로 나뉜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양민학살 특위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1,402명이 7월에 학살되었다고 한다. 또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기록된 1,404명 중 1,172명의 명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명단에 나오지 않아 이 사람들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당시 경산, 청도, 영천, 창녕, 밀양 등의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6.25 전쟁 직후 검속되었고, 이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유족들에 따르면 대부분 좌익 사상이나 반공 활동과는 무관한 단순부역자나 농민이었다.[6]

4. 살해 방법


피해자들은 대부분 보도연맹원으로서, 보도연맹에 가입할 당시 이름과 주소까지 기재했기 때문에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집에 있다가 군경에 의해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 2~3명 단위로 손과 발을 철사나 밧줄로 한데 엮고[7] 수직 갱도 앞에 세운다. 그리고는 앞에서 밀어서 혹은 갱도 쪽 사람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해 중심을 잃고 수직 갱도로 기울어지면 그 무게로 인해 함께 엮인 사람들도 덩달아 갱도 밑으로 끌려 떨어졌다.
게다가 일부 인원이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비해 갱도 밑으로 총격을 가하거나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발굴 과정에서 76mm 고폭탄까지 발견된 걸로 보아 폭약까지 사용한 걸로 보인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끔찍한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있었으나, 일부는 삶에 대한 의지로 갱도 위로 기어나오려다 힘이 다해 죽은 사체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5. 사후 처리


1960년 6월,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만에 유족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9]
이들은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웠지만,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강제해산시켰고 당시 유족회 간부들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위령탑은 쇠망치로 부서졌다. 출처,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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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는 폐쇄된 상태로 있었으나,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치되고, 정부 주도로 유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2009년 과거사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은 군경에 의한 학살이라고 판정했다.[10] 하지만 이후 수습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수습된 유해는 유족회가 마련한 컨테이너 안에 방치되어 있다. 참고
현재 이 컨테이너는 광주 비엔날레 전시관 광장에 전시되어 있다. 모르고 보면 전혀 설명이 없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다. 또한 전시실에는 과거사위원회 조사 당시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촬영한 영상을 상영 중이다. Navigation ID 참조.

5.1. 대중 매체 방영


그것이 알고 싶다 956회 보러가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2014년 9월 27일 다시 조명되었다.
배경이 되는 탄광이 뼈가 나오는 동굴이라 하여 인근 대학생들의 담력시험 장소로 알려진 폐광인데, 사실은 학살이 자행된 곳이었다. 수직으로 파내려간 갱도 입구에 사람들을 줄줄이 묶어 놓고 그대로 밀어뜨리거나, 앞의 몇 명만 총으로 쏘면 묶인 줄에 의해 나머지 사람들도 떨어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학살 이후 이 지역에는 개울이 핏빛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1년 동안 지속했다고도 한다.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학살도 그냥 죽인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죽은 곳은 수직 50m나 되는 굴이었다. 거기서 여러 명을 묶은 채로 일부를 쏴서 맞지 않은 사람까지 떨어뜨리게 한 것이다. 그리고 터지지 않은 76mm 고폭탄도 발견됐다고 한다.
문제시된 점은 바로 몇 해 전만 해도 이곳에서 유골 수습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예상되는 유골의 절반가량도 채 수습되기 전에 정부의 유골 수습은 중단되어 아직도 많은 유골이 이곳에 남아있고, 그리고 10년도 채 안 되어 다시 잊혀 주변 대학교 학생들은 그곳이 어떠한 장소인지도 모른 채 담력체험 장소로 사용 중이었다. 그나마 수습된 유골들도 정부 계약에 따라 특정 대학에 안치된 상태이나, 해당 대학은 유골이 있다는 이유로 괜히 혐오시설이 될까 봐 자신들의 학교 이름 노출을 절대로 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등, 이 보도연맹 문제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또 잊혀져 일종의 흉가체험 장소가 되어버린 비극을 보여주었다.
2020년 7월 22일 KBS 제보자들에서 다시 한 번 조명되었다. 영상
이것은 실화다 99회에서도 '동굴 괴담의 진실'로 방영되었다. 재연배우 신신범이 해당 사건의 유족들 중 한사람으로 재연되어 나왔다.

6. 피해 보상



7. 관련 문서



[1] 현재는 굳게 잠겨있으며, 허가받지 않은 자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아마도 흉가체험이나 담력훈련이랍시고 들어갔다가 시설을 파괴하거나 다치는 사례가 늘어서 인듯.[2]교정본부[3] 공식적으로 발견된 사망자다. 대구형무소의 피해자 1,402명과 부산형무소에서 재소자 명단에 없는 1,172명을 합친 수치[4] 1946년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당시 경상북도 대구부 원대동)에서 김재수 씨가 일본의 안경 제조 기술과 시설을 국내에 들여와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한국 최초의 안경테 제조공장. 1960년에는 한국 최초로 안경테를 홍콩수출했고, 대구를 한국 안경테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데 선도역할을 한 업체이기도 하다. 김재수 창업주가 작고한 후 아들 김태홍 대표 시절인 1980년 법인 전환하면서 국제광학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1988년 학살사건 현장 앞(경산시 평산동 591-2)에 신공장을 준공하여 확장 이전했으나 1992년 이후 안경테 시장의 침체로 어려움을 겪다가 1997년 부도로 폐업했고, 법인은 2002년에 청산됐다. 현재 국제광학 공장 건물은 리모델링되어 파티마 요양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5] 경산시의회 2003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진상조사 청원심사결과보고서』[6] 정부 추산 2,000여 명, 유가족 추산 3,5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노용석, 경산 코발트광산의 학살 실태와 진상규명 방안,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2006년 동계워크숍, 2006.[7] 이는 탄약을 아끼고 집행의 간편화를 위해, 세계대전 및 동시기 보도연맹원들을 바다 위에서 처형할 당시에도 암암리에 쓰였던 방식이다. 다만 대부분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익사가 되는 깊은 강가, 바다 위에서만 했으며, 돌이나 무게추를 함께 엮은 뒤 던지기도 했다.[8] 육해공(해병대는 해군 산하라서 독립된 정보부대가 없다.) 정보부대 중 이 사건에 당시 육군본부 지구정보파견대 CIC 소속(현재의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이었던 22헌병대도 연루된 걸 보아, 사용된 무기류는 최대로 38구경 리볼버, M1919 브라우닝, M1911, M1 카빈, M1 개런드, 소이탄, MK2 파인애플형 파편 수류탄 등, 혹은 기타 대검류 등으로 추정된다. '''시체를 태우려는데 소이탄을 안 썼을 리가 없으며,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기관총을 사용 안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최대로 사용한 무기종은 8종으로 추정되는데,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잔인하게 죽였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인 아픈 흑역사의 일면으로 남은 채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9] 대구·경북 지역의 경우 1960년 4.19 혁명 직후 유족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10]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결정서에 따르면 "육군본부 정보국 CIC경찰, 헌병,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소집, 연행, 구금된 후 집단학살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