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도팽 루이
1. 생애 초반
1661년 11월 1일, 그랑 도팽 루이는 당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이었던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랑 도팽 루이 이외에도 동생들이 태어났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그랑 도팽 루이만이 루이 14세의 후계자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마리 테레즈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과도 만나 자녀들을 두었지만, 그들은 '''사생아'''여서 왕위를 이어 갈 수 없었고, 그저 역사 속에서 왕의 사생아로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루이는 딱히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성격은 성실하고 친절했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대명사답게 왕으로서의 삶(궁정 업무, 외교, 전쟁 대비 훈련, '''사치''' 등 )을 사느라 자녀들의 양육에는 무관심했는데, 어린 시절의 그랑 도팽 루이는 이에는 그다지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 결혼과 가정
그랑 도팽 루이는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1] 와 결혼했다. 그랑 도팽 루이는 본래 사촌인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을 사랑했으나, 아버지인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마리 루이즈는 스페인 카를로스 2세[2] 의 왕비가 되었다.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비텔스바흐 가문에 내려오는 우울증 증세가 있어서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았고, 외국의 궁정에서 외로워했다. 좋지 않은 건강상태 때문에 그녀는 가정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왕족으로서 요구되는 호화스럽고 웅장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만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여자였다. 결국 남편과의 마찰이 생겼고 그랑 도팽 루이는 정부를 들이게 된다.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그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을 들어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를 지키기 힘겨워 했고, 1683년 루이 14세의 왕비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가 세상을 떠나고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가 프랑스 왕실에서 가장 높은 여성이 되자 의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했다. 루이 14세와 그랑 도팽 루이는 그녀를 매우 싫어하여 단순히 건강을 핑계로 게으름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3명의 아들을 낳아 의무를 다했다. 그리고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1690년 4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29세. 사후 진행된 부검 결과 그녀의 몸 상태가 끔찍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병마로 인한 고통과 싸우면서 후계자를 생산하고, 프랑스의 퍼스트 레이디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그녀의 수명을 갉아먹었던 것이다.
3. 정치사
그랑 도팽 루이는 30대에 접어들면서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정치개혁에 관심을 가지게 된 루이는 아버지 루이 14세의 정치가 부당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차츰 아버지 루이 14세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그랑 도팽 루이가 추진하고자 했던 정책은 그저 '''그랑 도팽 루이의 추진 방안'''으로만 불렸고, 실제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랑 도팽 루이도 그다지 유능한 편은 아니었기에 신하들과 개혁에 대해서 논의'''만''' 했지 이를 실제로 옮기기에는 명분이 없었고, 그랑 도팽 루이를 받들어 줄 지지층도 아버지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흔히 그랑 도팽 루이가 조금만 더 장수했더라면 프랑스 왕실이 폐지되지 않았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명백한 '''착각'''이다! 설령 루이 14세가 일찍 죽거나 그랑 도팽 루이가 장수했더라도, 이미 루이 14세 때에 이루어진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의 폐해는 이미 골이 깊어진 상태였기에 아무리 유능한 군주라고 할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웠다. 이런 큰 문제를 그리 유능하지도 못했던 그랑 도팽 루이가 해결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앞에도 서술했다시피 그랑 도팽 루이는 지지층이 적어서 그의 개혁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4. 죽음
1711년, 프랑스에서 갑자기 천연두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랑 도팽 루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그랑 도팽 루이는 며칠간 천연두로 끙끙 앓다가 1711년 4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루이 14세는 비록 평소부터 자신에게 박박 대들던 루이를 경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들인지라 그를 깊이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시몽 공작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들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루이 14세는 그 충격으로 거의 실신하기 직전까지 갔을 정도였고,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죽기 직전까지, 왕세자 거처의 대기실에서 아들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만을 기다렸다.[3] 평소에는 아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 것에 섭섭한 감정을 느껴왔으나 골육의 정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1년 후, 1712년 2월 12일, 그랑 도팽의 며느리였던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마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6일 후인 1712년 2월 18일, 그랑 도팽의 장남 프티 도팽 루이도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1712년 3월 8일에는 프티 도팽 루이와 마리 아델라이드의 둘째 아들 루이가 홍역으로 죽었다. 프티 도팽 루이와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가 낳은 셋째 아들 루이는 당시 사혈치료를 결사반대한 가정교사 방타두르 공작부인에 의해 살아남았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형을 잃은 가엾은 '''4살'''의 루이는 70세가 넘은 증조할아버지 루이 14세가 죽으면 차기 왕으로 즉위해야 한다. 결국 루이는 1715년 9월 1일, 증조할아버지 루이 14세가 죽자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가 된다. 한편 그랑 도팽 루이의 차남 펠리페 5세는 카를로스 2세의 사망으로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난 상태였기에 전염병을 피해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