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티 도팽 루이
'''하느님께서는 프랑스에 과분한 왕자를 보내셨도다. 이 땅은 그를 맞이할 만한 가치가 없었고 그는 이미 영원한 천복을 누리기 충분한 존재였다.'''
1. 개요
루이 14세의 아들인 그랑 도팽 루이의 장남으로 프티 도팽 루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가 아직 왕세자(Dauphin de France)였기 때문에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 아버지를 '''그랑 도팽 루이(Grand Dauphin Louis)'''라고 하고, 아들 부르고뉴 공작 루이를 '''프티 도팽 루이(Petit Dauphin Louis)''' 혹은 '''부르고뉴 공작 루이'''로 불린다.[1]
2. 생애
프티 도팽 루이는 당시 프랑스 왕세자였던 그랑 도팽 루이와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발루아의 엘리사베트의 먼 후손이기에 프티 도팽 루이는 모계로 발루아 왕조의 후계자인 셈이다. 동시에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의 어머니가 앙리 4세의 외손녀이기도 해서 부르봉 왕가의 핏줄도 있었다. 프티 도팽 루이는 8세에 어머니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를 잃었다. 루이는 두 남동생 앙주 공작 필리프와 베리 공작 샤를과 매우 사이가 좋았다. 프티 도팽 루이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았고, 대주교의 영향으로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성장했다.[2]
프티 도팽 루이는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3] 와 결혼해 아들 3명을 두었다. 아들 3명 중 장남과 차남은 일찍 사망하고. 3남이 루이 15세가 되었다. 프티 도팽 루이는 아내를 매우 사랑했으나, 그의 아내는 공식행사에서 민폐를 많이 끼쳤다.
프티 도팽 루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동생 펠리페 5세에 협력했고,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이 되었다. 더불어, 펠리페 5세는 1711년 ~ 1712년 프랑스 왕실에 천연두와 홍역이 유행했을 때 스페인에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프티 도팽 루이는 아버지의 개혁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할아버지 루이 14세와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에 비해 정치적인 활동이 극히 적었다. 또한 할아버지와 아들과는 다르게 소문난 애처가가 였다.
3. 비극적인 죽음
1711년, 프랑스에는 마치 저주 같은 비극이 일어났다. 1711년 4월 14일,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가 천연두로 사망했다. 1712년 2월 12일, 이번에는 아내 마리 아델라이드가 홍역으로 사망했다. 프티 도팽 루이는 아내를 병간호했으나 끝내 사망하자 매우 슬퍼했다. 곧이어, 프티 도팽 루이 본인도 몸져눕더니 6일 후인 1712년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4] 게다가 1712년 3월 8일에는 차남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가 홍역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3남 루이도 몸져누웠다. '''그러나''' 가정교사 방타두르 공작부인이 루이의 사혈치료를 막으려고 격리시켜서 루이는 살아남았고, 그는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가 죽자 루이 15세로 즉위했다.
4. 가족관계
- 할아버지 : 루이 14세(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 -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3대 왕.
- 할머니 :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1638년 ~ 1683년) - 스페인 펠리페 4세의 6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