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시몽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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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티스트 반 루, 1728년 作
1. 개요
2. 생애
3. 생시몽의 회고록
4. 총평
5. 참조

루이 14세, 루이 15세 때의 프랑스의 인물. 풀네임은 '''duc de Saint-Simon, Louis de Rouvroy(생시몽 공작, 루이 드 루브루아)'''. 생몰년도는 1675~1755년이다.

1. 개요


프랑스 파카르티 지방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 출신의 공작으로, 단순한 공작이 아닌 왕족을 제외한 최고서열인 공작-중신이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직위와는 반대로 별다른 능력이 없었고 따라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도, 후대에 길이 전해질 이야깃거리를 만들지도 못한 인물이다. 이렇게 시대의 풍파에 잊혀져가는게 당연해 보이는 인물이 후대의 일반인들에게 이름이 오르내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남긴 방대한 양의 '''회고록''' 때문이다.

2. 생애


생시몽 공작, 루이 드 루브루아는 167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피카르티 지방의 유서 깊은 기사혈통의 대검귀족 출신이었고 수많은 왕들을 모셔왔지만 정작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그의 집안이 입신양명하게 된 계기는 생시몽의 아버지인 클로드가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고 공작-중신 계급을 하사받은 일이다. 클로드는 사냥을 잘 해서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러한 종류의 총애는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생시몽이 태어날 당시 그는 중앙 정계에서 멀어져 있었다. 클로드는 70대가 가까워지는 매우 늦은 나이에 생시몽을 얻었기 때문에 생시몽을 도와줄 사람은 주변에 많지 않았다. 이런 생시몽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생시몽을 건실하게 교육시켰고 이 과정에서 훗날에 회고록을 집필할 안목과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생시몽은 어린 시절부터 현시창에 빠진 아버지와 집안의 상황을 개탄하고 아버지가 행복한 시절이었고 귀족들이 대우받았던 루이 13세의 시절을 동경해왔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즉위 이후로 시대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대검귀족들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반대로 능력과 자산을 기반으로 법복귀족들이 치고 올라오는, 생시몽에게 있어서는 타락해가는(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진보해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출세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대검귀족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군대에 자원하고 여러 전투를 거쳐 연대장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생시몽에게는 불행하게도 프랑스의 군대 역시 변혁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예전처럼 신분과 혈통으로 높은 군대의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닌, 실력과 자산이 있으면[1] 신분과 상관없이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쪽으로 변하고 있었다.[2] 결국 생시몽은 자신의 연대가 해체되고 여단장승진에서 누락되어 버리자 이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군대를 '''불명예 제대'''하게 된다.[3] 이는 이후 생시몽의 인생의 길을 가른 중대한 변환점인데, 전쟁에 집착하던 루이 14세는 대영주라는 높은 직위를 가진 생시몽이 멋대로 제대한 것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후 생시몽은 아버지로부터 공작-중신 자리를 이어받고 군대 시절 자신의 상관이었던 로르주 원수의 딸과 결혼한 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궁정인으로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앞의 일로 밉보였기 때문일까, 생시몽 공작은 그 높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예전의 실수를 되돌릴 기회도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공작-중신이나 되고서도 국왕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권리인 '친견권'을 얻지 못하고 베르사유 내에서도 한동안 거주할 방을 얻지 못하다가 장인과 아내의 힘으로 겨우 방을 얻을 정도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궁정생활을 하면서 생시몽은 여러 귀족 및 대신들과 친분을 쌓고 이를 이용해 왕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 역시 그리 효과가 없었다. 루이 14세의 치세에서는 희망이 없으리라 생각한 생시몽은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고뉴 공작과 조카인 오를레앙 공작의 파벌로 들어가 활동하며 루이 14세의 사후를 기약하게 되나, 정말 재수 없게도 부르고뉴 공작은 루이 14세보다 먼저 죽어 버리고(...) 생시몽은 왕의 정부인 맹트농 부인의 파벌에 짓눌려 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루이 14세가 자신의 서자들을 총애하고 왕위계승자 속에 집어넣은 것에 대해 크게 분개한다. 그의 눈에는 왕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세상을 타락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생시몽에게는 정말 다행이게도 루이 14세가 죽은 후 루이 15세가 즉위하자 그의 친구였던 오를레앙 공작이 섭정이 되었다. 생시몽은 드디어 섭정참사회에 참여하여 권력의 중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에스파냐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보잘것없는 능력이 어디 가는게 아닌지라(...) 그는 여기서도 그리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마저도 10년이 안되어 오를레앙 공작이 사망하자, 생시몽은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아들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준 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정계 은퇴 후에도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생시몽은 당시 사람들 치고는 80세까지 오래 산 편이었는데 이 때문에 주변의 가까운 인물들이 먼저 사망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생시몽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사랑하던 아내를 먼저 보낸것은 물론이고 설상가상으로 아들 2명도 후손도 남기지 못한 채 모두 생시몽보다 먼저 죽어버렸다. 결국 공작-중신의 직위는 이후 누구에게도 이어줄 수 없게 되었고 그가 평생을 걸쳐 추구하던 가문의 역사를 영광스럽게 이어가는 것이 완전히 좌절되고 만 것이었다. 딸 쪽의 후손은 생시몽이 죽기 전에는 계속 이어져 외손자까지 본 것이 불행 중 다행일까. 인생의 말년에 회고록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경험 그리고 한에 대해 서술한 생시몽은 1755년 유언을 통해 자신의 유산들을 남은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분배하고 사망하여 먼저 간 아내의 관 바로 옆에 묻혔다.[4]

3. 생시몽의 회고록


회고록은 오늘날로 따지면 자서전과 비슷한 문학의 장르로,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행과도 같았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활동을 하면서 명예로웠던 일들에 대해 자랑하거나, 혹은 아쉽고 섭섭했던 일들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회고록을 작성하였다. 생시몽은 놀랍게도 세상을 제대로 경험하지도 못한 18세부터 회고록을 작성하기 위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는 역사와 문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그의 어릴적 교육 및 성향 때문으로 보인다.
생시몽은 오랜 기간 동안의 궁정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회고록에 왕과 왕족, 그리고 귀족들의 여러 가지 활동이나 중요 사건 및 가십거리들, 그리고 국정 운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었다. 앞에서 지켜봤듯이 베르사유 궁정에서의 그의 인생은 아싸(...)에 가까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들은 불평과 비판으로 가득 차 있다. 생시몽은 자서전 말미에 자신은 가급적 사심 없이 정확하게 묘사했다고는 하지만 '''글쎄올시다?''' 이러한 주관적인 관점 외에도 당시 정보력의 한계로 생시몽이 틀린 역사적 사실들도 여럿 존재하기 때문에 이 회고록을 온전히 루이 14세 때의 치세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서로 쓰는 것은 위험하고 다른 역사 기록들과의 교차검증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생시몽의 아웃사이더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당시 궁정의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그가 상세하게 추적하고 묘사한 인간들 사이의 관계들은 역사적으로는 참고자료로서의 가치가 있고 독자들에게도 배울 점을 제공한다.
궁정의 실세로서 국정에 참여하여 가문을 빛내는 것이 생시몽의 목적이었기에 궁정의 중심에 서 있는 루이 14세는 생시몽의 회고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루이 14세에 대한 생시몽의 감정은 그야말로 애증 그 자체다. 생시몽의 평가에 의하면 루이 14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선량하고 위대한 군주인 동시에 누구도 좌시할 수 없을 만큼 편협하고 무능한 군주였다."''' 왕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면서 도를 넘은 영광에 집착했고, 한없이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단련에 충실하고 관대하면서도 위엄이 넘치고 예의바르면서 행동과 말에 능수능란하며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왕권에 위험이 되는 동생 대공과 자신의 아들인 세자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는 냉혹한 태도를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사적으로 챙겨주려 하고 그들이 자리를 비우면 고통스러워 하기도 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5] 특히 대공의 경우는 조카의 과거 결혼 문제로 인해 말년에 크게 다툰 적이 있는데 그 직후 대공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 다툼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 생각하여 크게 괴로워하기도 했다. 생시몽은 회고록 전체를 통틀어 루이 14세의 행적을 냉혹하게 비판하면서도 말년에 그에게 들이닥친 모든 불운들[6]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고 한결같은 의연함과 강인함을 보여준 그에게 찬탄을 보낸다.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왕은 영광에 집착했고 모든 것을 자기가 직접 지배하고 관리하기를 원했으며 겉으로는 그렇게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생시몽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맹트농 부인, 그리고 많은 권력자들을 기반으로 엮여 있는 수없이 많은 인간관계가 그물처럼 왕을 옥죄고 있고 왕은 그들의 포로가 되어 무력하게 이용당할 뿐이었다. 그들은 왕의 허영심과 자만심을 파악하고 왕을 추켜세워주는 척 하면서 왕을 조종하여 그들이 원하던 바를 마음껏 성취했던 것이다. 왕 역시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이것을 감추기 위해 베르샤유 궁전을 짓고 화려한 궁정생활을 가장했지만 생시몽의 눈에는 그저 눈속임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생시몽은 왕의 천성은 선량했으나 주변 사람들의 잘못된 교육, 방치 및 감시가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하고 왕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자들에 책임을 돌리며 비판과 험담을 끊임없이 하는데, 이는 루이 14세 치하에서는 아웃사이더였던 생시몽의 경험에 의한 태도일 것이다. 생시몽의 관점으로는 존중받아야 할 특권층들을 밀어내고 '천민'과 '재정가' 출신이던 대신들이 왕을 포로로 삼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생시몽도 권력의 끝자락을 잡기 위해 그런 대신들과 친분을 쌓고 결혼을 통해 인맥을 획득하려 한 것에서 결국 시대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는 (생시몽의 관점으로는)추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생시몽이 지적한 궁정과 프랑스의 문제와 모순점들은 단순히 왕과 귀족들만의 문제가 아닌 당시 앙시앵 레짐 체재 자체의 문제였고 루이 14세와 생시몽 모두 이 시대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던 셈이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던 루이 14세와 앙시앵 레짐의 평면적인 면이 아닌 복합적인 면모를 생시몽의 회고록은 사실적이고 인상깊게 담아내었고 후세에까지 전해져 루이 14세의 재평가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생시몽이 회고록에서 루이 14세를 그렇게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고록에 간간히 나오는 생시몽의 찌질한 행동과 그런 생시몽을 공평하고 관대하게 봐주려 노력한 루이 14세의 모습을 보면 그래도 루이 14세가 생시몽보다는 나은 사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현재 생시몽의 회고록의 일부가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국내에 정발되어 있다.

4. 총평


생시몽의 회고록을 편집하여 책으로 내놓은 다니엘 데세르는 생시몽을 '''"보기 드문 인생 실패자"'''로 규정했다. 확실히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그의 이상과 야망에 비하면 순탄치 않은 배경에서 시작했고, 군대에서의 불명예스러운 제대로 왕에게 찍혀서 직위에 맞지 않는, 그러나 어찌 보면 그의 능력에 걸맞은 푸대접을 받으며 궁정을 떠돌았으며,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었던 짧은 섭정기에도 별 업적을 이루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최후의 목표였던 가문의 보존조차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는 과거의 귀족이 존중받던 시대를 동경하며 그때로 시계바늘을 돌려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시대의 시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흘러갔다. 회고록에서 드러나는 그의 구시대와 혈통에 대한 집착은 현대의 독자들이 보기에도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며 동정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아웃사이더로 평생을 살아온 덕에 생시몽은 루이 14세가 주연인 베르사유 궁정에서의 연극을 구경꾼으로서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루이 14세는 자신을 귀족 위에서 군림하는 절대군주로 만들고자 했지만 생시몽의 낡은 관점에서는 국왕은 그저 동등한 귀족들 사이에서의 우두머리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루이 14세 치세의 문제점과 모순에 대해 더 신랄하게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자신의 인생은 실패했으나, 생시몽 공작은 그 자신의 실패의 경험을 세상에 대한 모든 한을 실어서 기록으로 남겼고 이것이 그가 평생토록 애증했던 위대해 보였던 군주의 가면을 벗기고 후세의 사람들이 보다 복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의도하던 방식은 아니었겠지만 이렇게라도 후대에 명예를 얻게 되었다는 점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

5. 참조


'''루이 14세는 없다''', 이영림 지음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 생시몽 지음, 이영림 옮김

[1] 당시 프랑스는 매관매직이 공식이었기 때문에 공직들을 돈 주고 사고파는 경우가 흔했고 군대의 자리도 예외가 아니었다.[2] 특히 코르네유의 '르 시드'에서 동 로드리그가 가진 고뇌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주제이다.[3] 이 때문에 생시몽은 군대의 체제를 개편한 루이 14세의 대신인 루부아를 증오하여 회고록에서 그를 끊임없이 비판한다.[4] 당시 시대는 돈과 권력을 노린 정략 결혼이 많았지만 생시몽은 아내를 정말로 깊게 사랑했고 아내 역시 그런 생시몽을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부르고뉴 공작의 사망 시 큰 좌절감에 빠진 생시몽은 정계 은퇴를 고려했지만 그런 생시몽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이 그의 아내였다. 생시몽은 유언장에서 자신의 관을 아내의 관과 쇠사슬로 꽉 붙들어 매도록 부탁하여 영원히 함께 안식을 취하기를 원했다.[5] 다만 이게 세자에게는 그리 큰 위안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생시몽의 묘사에 의하면 왕은 세자의 정치적 무능함을 증명하기 위해 집요하게 굴었고 세자는 왕과 같이 있는 것도 두려워했다.[6] 전쟁에서의 패배, 국내의 어려운 환경, 왕족들의 잇달은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