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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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광제(金光濟)
초명
홍제(弘濟, 또는 洪濟)

덕재(德在)

동양자(東洋子)
시호
석람(石藍)
생몰
1866년 7월 1일 ~ 1920년 7월 24일
본관
경주 김씨
출생지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1]
사망지
경상남도 마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3. 학회 및 교육구국 활동
2.4. 말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2.1. 초년기


김광제는 1866년 7월 1일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미미하지만 일찍 한학을 수학했고 강연집과 많은 글을 남긴 것을 볼 때 일찍부터 문장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3세 때인 1888년에 관직으로 나아가 훈련원 참정, 비서원승, 호남시찰, 동래경무관 등을 두루 역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왕궁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김광제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래경무관 직을 사임한 뒤 같은 해 12월 배일 및 부패 대신 탄핵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친 듯한 물결이 이미 쏟아져 흐르고 들에 놓은 불길 이미 타올라 마침내 삼천리 강계와 오백년 종사를 쉽게도 이웃 나라에 주게 되었습니다. 저 이웃이란 바로 삼백년에 걸친 원수 나라인데 저 이웃나라가 이 뭇 간악한 자들을 끼고, 이뭇 간악한 자들이 저 이웃 나라에 붙은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인데, 폐하께서는 이 뭇 간악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이 뭇 간악한 자들을 총애하시고 이 뭇 간악한 자들을 믿으시니 그것은 그 어떤 연유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관리 등용의 임무를 맡았다는 자들이 관직을 팔아먹는데 폐하꼐서는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시어 쓰시고, 이른바 형벌을 담당한 관리는 제멋대로 사사로움을 따르는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믿으시어 부리고, 총애 받는 신하와 뭇 흉악한 무리들이 금방 러시아에 붙었다 금방 일본에 붙었다 하여, 마침내 외화를 초래하고 가렴주고하고 탐학한 무리들이 안을 좀먹고 밖을 갉아대어 마침내 여러 정무를 어지럽히는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총애하여 가까이 하시니, 이는 모두 수십년 내의 이미 싹든 폐단으로 비록 어리석은 평민들도 오늘의 화를 미리 염려했던 것인데 폐하께서는 뛰어난 천고의 성스러운 총명으로 오히려 헤아리실 수 없으셨습니까?

이미 비워보시고도 일부러 행하시고 이미 밝혀보시고서도 그만두지 않으시니, 이것이 진실로 신의 어리석음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진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일본을 배척하기보다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또한 지혜를 헤아리지 않고 일본에 붙는 것보다는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신이 일컬음은, 마땅히 해야 할 것과 마땅히 행할 것은 다른 일이 아닙니다. 저 간악하고 잡된 무리들과 나라를 어지럽히고 도리를 해치는 도당, 죽 일본을 배척하면서 화를 배양한 자들과 일본에 붙어 화를 초래한 자들이 모두 오늘의 종사를 망치고 기반을 뒤집는 역신입니다. 저 일인들이 비록 그들의 궤적을 같이하고 있으나 타고난 본성은 같을 것이니, 일인들도 그 사람들이 죽어야 할 적도들임을 반드시 알 것인데도, 폐하꼐서는 오늘날 도리어 총애하시고 높이 쓰시고, 사랑하시어 믿고 가까이 하시니,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날로 배반하고 여론이 날로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빨리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아 높은 거리에 매어 달지 않는다면, 밖에서 오는 재난과 이웃나라의 침입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에 속하리니, 흉포한 무리보다 이것이 가장 대처하기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외세에 의지해 나라를 어지럽히고 도리를 해치는 무리를 먼저 즉시 죽일 것이니, 특별히 성총을 힘쓰시어 맹렬히 살피시고 재야의 어진 이를 널리 구하여 일을 맡기고 부리옵소서. 교육으로는 넓히기를 힘쓰시고, 법률로는 맑게 하기를 힘쓰실 것이며, 안으로는 가렴주구하는 신하를 제거하시고, 밖으로는 탐욕스럽고 모진 관리를 엄히 다스리시면, 나라의 공업이 날로 공고한 데로 나아가고 이웃의 업신여김도 해가 감에 따라 점차 저절로 물러가서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은 강해질 것이며, 은혜가 흡족해지고 가르침이 행해지면 몇년 되지 않아 저들의 업신여김도 보복할 수 있고, 저들의 욕보임도 씻을 수 있고, 저들의 위협도 누를 수 있을 것입니다.(후략)

<석람김광제선생유고집>, 상유문

김광제는 상소를 올린 직후 전라도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1906년 1월 대구로 내려가서 광문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외국의 신학문을 도입하고 실학자들의 저술을 번역, 편찬하여 민족의 자강의식을 고양시키고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착수했다. 또한 1906년 2월에는 대구광문회가 설립한 사립보통학교의 교장을 맡았고 달명의숙(達明義塾) 부교장 및 강사를 겸임했다.

2.2. 국채보상운동


1907년 1월 29일, 김광제는 대구광문사 문회 특별회에서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빌린 차관 1,300만원을 갚기 위해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에 착수하자고 주장해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는 자신의 연죽과 연갑을 버리고 3개월치 담배값 60전과 의연금으로 10원을 냈고, 여기에 모두들 동참해 총 2천여 원이 모금되었다. 이후 그는 대구 지역 재계의 유력 인사인 서상돈과 함께 일제의 경제침략으로부터 경제권을 수호하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2월 21일, 김광제,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 등은 대구민의소를 설립하고 창립총회에서 500원을 모금했다. 같은 날 대구민의소는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군민대회를 개최했고, 김광제와 서상돈 등은 <국채1천2백만원보상취지서>라는 제목의 글을 대한매일신보에 싣고 본격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가 올린 국채보상운동 취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대저 신하와 백성된 자 충성에 따르고 의를 숭상하면 그 나라가 흥하고 그 백성이 편안하며, 충성하지 않고 의가 없으면 곧 그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멸하게 됩니다. 이것은 고금 역사상에서 분명히 증거가 있을 뿐 아니라 현금 구주에서 부강한 자와 멸망하게 된 자 또한 충과 의를 행하고 숭상하는 여하에 연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역대의 옛일과 구주의 먼 곳은 그만두고라도 우리 동양의 가까운 이웃의 일로 더구나 눈으로 직접 본 것이 곧 일본 그것입니다.

전번 청국, 러시아와 개전할 때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긴 것은 군사에 결사대가 있어 죽기를 결심하고 혈우육풍(血雨肉風) 속을 락지(樂地)에 나가는 것 같이 여기며, 집에 있는 백성들은 신을 삼고 패물을 팔며, 여자들은 가락지를 모아 군비에 보태어서, 마침내 동서 역사상의 처음 있는 절대의 큰 공을 이루어서 광영이 온 세계에 진동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저들 오천만 민족의 하나 하나가 열심 혈성으로 충과 의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찌 흠모 감탄하여 본받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지금 백성과 나라가 위급할 때에 있어서 한 사람의 결심과 한 일의 계획도 없이 다만 우리 황상의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일보시며 깊이 근심하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팔짱끼고 우두커니 앉아서 멸망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근세의 새 역사를 찾아본다면 나라가 망하면 민족도 따라서 멸족됩니다. 제 몸과 집이 있는 것만을 알고 임금과 나라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것은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스스로 멸망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정신을 가다듬과 충의를 분발함이 과연 이 때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국채 1,300만원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한국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형세 반드시 올 일입니다. 그런데 현재 국고에는 갚을 형편이 어려우니 삼천리 강토는 장차 우리나라의 것 백성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토지가 한번 없어진다면 회복할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월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국민으로서도 이 빚에 대하여 의무로 말하여 알지 못한다 할 수 없는 일이요, 시세로 말하여 갚지 않을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상하여야 하는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 않고 손해보지 않고 재물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천만 민중으로 3개월 기한하여 담배 피우는 것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매인에게서 매달 이십전 씩을 거둔다면 계산해서 거의 1,300만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1원, 10원, 100원, 1,000원의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그 당연한 의무에 있어서 이런 잠시간의 결심을 가진다는 것은 저들 일본의 결사대와 신 삼는 백성, 지환 거두는 여인들에 비해서 그 어느 편이 중하고 어느 편이 경하며, 어느 편이 어렵고 어느 편이 쉬운 것이겠습니까? 우리 이천만 동포 중에서 정말 털끝 만큼의 애국사상이 있는 이라면 반드시 두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여기서 감히 발기하여 취지를 알려 드리어 혈루로 호소합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대한 신민의 여러분들은 보시는 대로 곧 말로, 글로, 시로 알리어 고해서 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일이 없게 하고 기필 실시되어 위로는 우리 황상께 보답하고 아래로는 강토를 유지하게 된다면 이 이상 더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

담배는 당시 한국에 이주해 온 일본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는 대표적인 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엔 한국에 연초 전매법이 실시되기 전이어서, 일본 상인들은 관세료가 없는 군수품을 대량 유출하여 시판하거나 궐연을 만들어 시중에 팔았다. 담배는 항상 풍귀현상을 보일 정도로 잘 팔렸으며, 일본인 상인들은 서울과 부산에 담배공장을 세워 공급할 정도였다. 그래서 김광제, 서상돈 등은 담배를 3개월만 끊어도 막대한 돈을 모을 수 있다고 여겼다.
3월 9일, 대구민의소에서는 대구 서문 밖에서 구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고 국채보상 의연금을 모금했다. 국채보상금 의연 행렬은 줄을 이었으며, 그 가운데엔 행상이나 걸인까지도 동참했다. 그러나 국채 보상을 위한 일련의 활동은 일본 경찰의 방해와 탄압에 직면했고 국민대회가 강제 해산당하고 연설자가 구속되기도 했다.
한편 김광제는 3월 1일 대한자강회 임시 평의회에 국채 보상에 관한 의안을 제출했다. 본회는 <대한자강회월호> 9월 논설란에 <단연상채문제>와 잡록란에 채보상운동 발기 경위와 전국 각지에 조직된 국채보상단체 취지서 7건을 게재하였다. 이는 회원이나 지회원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결과 국채보상운동은 대구를 넘어서 전국에 널리 퍼졌고, 각 지방에서 잇따라 국채보상회가 설립되면서 총 27개의 보상소가 설립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자, 김광제는 여러 인사들과 함께 의연금 관리를 위한 통합 기구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4월 8일,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설치하고 임원진도 엄선하여 구성했다. 이때 그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으로 한규설을 추천했지만, 한규설이 응하지 않자 5월 하순에 다시 특별회를 개최해 윤웅렬을 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검사원을 맡았다. 또한 그는 국채보상기성회로 발기했다가 연합회의소 체제로 변경된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총무를 맡았고,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검사원 이강호와 함께 두 단체가 서로 협력할 방안을 마련하여 연합회의소는 국채보상운동의 지도, 권장 업무만 총괄하고 지원금총합소는 의연금을 수합, 관리하도록 했다.
이렇듯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되자, 일제 통감부는 국체보상지원금총합소가 위치한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했고, 1908년 7월 12일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죄로 구속해 재판에 회부했다. 재판 자체는 9월 29일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무죄 판결을 내림으로서 종결되었지만, 그 사이에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는 한층 꺾였다. 여기에 일진회 등 친일 세력이 국채보상운동을 배일운동으로 규정하고 방해책동을 끊임없이 전개했고,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더 많은 차관을 들이게 했다.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동안 모금된 국채보상금의 정확한 액수는 알려진 바 없지만, 황현매천야록에 따르면, 1910년 국채보상금 처리회가 각처 의연금 예치상황을 조사한 결과 금액이 159,253원 99전이었다고 한다.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 윤웅렬은 이 중 42,000원을 통감부로 이관했고, 통관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11년 은사공채 25,000원을 윤웅렬에게 전달했다.[2]
김광제 등은 국채보상금 처리를 위해 국채보상금처리회를 결성하고 1910년 4월 16일 전국대표자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전국대표 115명이 모여 국채보상 처리 문제를 논의했고, 그 결과 국채보상금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증식하여 적당한 시기에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이후 1910년 9월 20일, 국채보상금처리회는 교육기본금관리회로 변경되었으며, 국채보상금은 사립교육용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2.3. 학회 및 교육구국 활동


1906년 3월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가입한 김광제는 1907년 3월 1일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안건을 대한자강회에 제출해 수리받았다. 이후 대한자강회가 1907년 8월에 해산되었고 그 후신으로 대한협회가 설립되었다. 김광제는 대한협회 창립 초기부터 회원으로 활동하며 호남 지역 시찰원으로 선정되어 각 지회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7월 11일에는 실업부 평의원이 되었고, 11월 29일엔 특별 총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임기 만료된 임원에 대한 선거에 참여했다.
김광제는 교남교육회 창립에도 참여했고, 1908년 4월 15일에 교남교육회 임시총회에서 <교육과 회의 합동>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렇듯 그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교남교육회 등 각종 학회에 가입해 학회에서 발행하는 잡지나 계몽도서의 편찬과 민중 계몽을 위한 강연활동을 열성적으로 벌였다. 그는 이러한 강현 활동을 모아 1909년 9월 경성 광동서고를 통해 강연집을 발간했다.
김광제는 1906년 2월 대구광문회에서 설립한 사립보통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래 대한협회 직산지회 간사를 겸임하며 대한협회 회보가 폐간된 시기인 1909년 3월까지 약 3년간 임실, 부안, 김제, 금구, 함열, 광주, 목포, 지도 등 호남 지역을 돌아다니며 민중 계몽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하에서 민중 계몽과 강연 활동이 어렵게 되자, 그는 몇년 간 잠적했다. 일설에 따르면 김광제가 한일 병합 이후 마산에 은거하면서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비밀결사 단체 활동을 하다가 일시적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고 하지만, 이를 입증할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광제는 결국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중국으로 망명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14년에서 1915년 사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광제는 중국 망명 후 1915년 6월 압록강 건너편 홍경현 동로홍묘자에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이듬해인 1916년엔 교명을 흥동학교로 개명하였으며, 교장을 맡아 학생 31명을 가르쳤다. 교과목은 국어독본, 유년필독, 수신, 초등소학독본, 대한지지, 대한역사, 산술, 한문독본, 중국어독본, 동삼성지지 등이었다.

2.4. 말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김광제는 조선에 귀국하여 국내 민족해방 운동을 도모했다. 마침 이달(李達)이 1919년 2월 동경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한 후 이듬해 1월 독립 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로 잠입해 있었다. 김광제는 동경유학생 김영만(金榮萬)과 대구유지 홍천갑(洪千甲)․백의수(白義洙) 등과 함께 여기에 동참했다. 이들은 제2의 3.1 운동을 위해 격문과 독립선언서 등을 준비했으나 이달 등 세 동경 유학생들이 체포되면서 실패했다. 다행히 이달 등이 끝까지 동지들을 발설하지 않은 덕분에, 김광제는 무사할 수 있었다.
한편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 사회주의 이론이 전파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 운동 움직임이 고조되었다. 김광제는 이 분위기를 잃고 1920년 2월 16일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열린 조선노동대회 발기회에 참석했다. 이어 2월 25일 노동단 조직을 위한 노동단취지서를 발표했고 자신은 노동단 단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4월 11일,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직후 서울에서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노동대회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노동대회는 임시 사무소를 서울 재동 54번지에 두고 회무를 시작했는데, 얼마 안가 회원이 수천 명으로 불어나자 5월 2일 광무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정식으로 발족했다.
노동대회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주로 김광제, 최재학, 김사민 등이 교양을 위한 계몽적인 내용의 강연을 했다. 김광제는 강연 때마다 열정을 쏟아부었고, 강연 관람객이 갈수록 늘면서 최대 6~700명에 달했다. 이후 김광제는 조선노동대회 전국연합회 회장 및 경성본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돌연 사망했다. 향년 55세. 식사 후 수시간 복통으로 신음하다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세간에서는 그가 일제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927년 11월 20일, 김광제의 시신은 사망 후 7년 만에 객지인 마산에서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이장되었다. 당시 영결식을 갖기 위해 군산 노동조합원 7만명이 운집하자 일본 경찰이 유해 운구를 방해해 하루 지연시킬 정도로 그 열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김광제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2] 윤웅렬은 대한매일신보 사장이며 대표적인 친한파였던 어니스트 베델이 국채보상운동 모금액을 사취했다며 고소해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꺾이는 데 한 몫했다. 이 때문에 그가 통감부와 협력해 국채보상 운동 와해를 기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