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베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장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裵說 | Ernest Thomas Bethell'''

'''출생'''
1872년 11월 3일
[image] 잉글랜드 브리스틀
'''사망'''
1909년 5월 1일 (37세)
[image] 대한제국 한성부
'''국적'''
[image] 영국
'''직업'''
언론인, 신문기자
'''종교'''
개신교 (성공회)
'''전직'''
대한제국 외무아문 자문관
'''묘소'''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한국 이름'''
[bˈɛθəl](베설), [bˈɛθˌɛl](베셀)
1. 개요
2. 상세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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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죽지만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하시오."'''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년 11월 3일 ~ 1909년 5월 1일)은 대한제국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영국인 언론인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데일리 코리안 뉴스'''의 '''발행인'''이다. 한국식 이름은 "배설#s-4(裵說)"이며 "E.T. 배설"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역사를 공부하는 뭇 학생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다만 영어 단어 Bethel이나 성씨인 Bethell은 [bˈɛθəl](베설)과 [bˈɛθˌɛl](베셀)로 발음하므로 오히려 그가 사용했던 한국식 이름, "배설"이 관용 표기로 굳어진 "베델"에 비해 본래의 발음에 더 가깝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교파는 성공회 신자였다.

2. 상세



'''역사가 술술 - 나라 빚을 갚자! 국채보상운동_#001'''

'''영국 청년이 지켜낸 '경천사지십층석탑' / YTN'''
영국 사우스웨스트잉글랜드 브리스틀(Bristol) 출생으로 16살 때부터 일본 고베에서 거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분쟁이 발생하여 사업을 접었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직에 지원하여 1904년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러일 전쟁 관련 취재를 위한 입국이었지만 일제가 한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분개,[1]을 보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2]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3]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신문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까지 달아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영국 정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하여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재판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향년 37세에 심장병 요소 중 하나인 심근비대증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눈엣가시인 그의 묘비 뒷면 비문(쓴 사람은 장지연.)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수난당한 묘비는 1964년 4월 4일 편집인 협회가 전국의 언론인 뜻을 모아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호머 헐버트와 함께 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외국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언인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해야 한다."'''는 베델이 진심으로 한국을 위해 힘썼음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가 죽은 뒤에도 신문사는 유지되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경술국치 바로 다음 날부터 그 유명세를 악용당해 '대한' 제호만 떼어낸 친일신문 매일신보로 바뀌어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고 말았다.
195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1995년 주한 영국 대사관에서 베델의 헌신과 공로를 기리고자 '베델 언론인 장학금' 을 제정하였다.

3. 기타


  •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당시 한국을 방문하고 쓴 책[4]에서 베델의 한국 사랑, 성정이 잘 드러난다.
  • 프리메이슨 한양 롯지의 주장에 따르면 1904년 롯지의 부 마스터이기도 했다고 한다.[5] #[6]
[1] 한국의 침탈에 관한 기사를 썼지만 그가 몸 담고 있던 런던 데일리 뉴스는 친일 성향이 있어서 베델의 기사는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2] 영어 이름은 'Korean Daily News'였는데, 본인이 종사하던 'London Daily News'의 영향이 보인다.[3] 발행인을 영국인인 자신의 이름으로 내세웠다. 일본의 입장에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한국인이 아닌 동맹국의 영국인이 언론사를 지배하는 입장이므로 이를 함부로 건드리다간 작게는 영국 크게는 국제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해질 수 있는 점을 이용했다.[4] 국내명 <아손 그렙스트, 100년 전 한국을 걷다>.[5] 알렉산더 S. 해밀턴이 롯지의 마스터였다.[6] 그런데 여기의 내용에 따르면 메리 스크랜턴 여사의 아들이자 마찬가지로 선교사 였던 윌리엄 스크랜턴도 프리메이슨이었다고 나오기에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드는 점이 없잖아 있다. 물론 실제로 스크랜턴이 1907년 6월감리교를 떠났기에, 1907년 겨울에 모임을 가졌다는 내용에 대해 시기상으로 맞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