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 (國債報償運動)
1. 개요
2. 배경
3. 발단
4. 전개
5. 결말
6. 이야깃거리
7.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8.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9. 같이보기


1. 개요


일본 제국대한제국에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들이 상환을 주도한 운동이다. 1907년 2월 21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윤필오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대중들의 크나큰 호응을 바탕으로 전국으로 발빠르게 번져나갔다. 여러모로 약 90년 후(1998년경) 금모으기 운동과 닮은 점이 많다.

2. 배경


러일전쟁 이후 동북아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고 한반도의 세력 균형이 모두 일본으로 넘어오게 된다. 이후 일본 정부는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탈에 나섰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진행 중이던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통해서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大郞)를 재정 고문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이 끝나는 1905년 9월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권을 박탈하고, 전환국을 폐쇄하였다. 이어서 메가타는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는 등 조선의 경제권을 일본의 경제권 하에 차근차근히 예속시켜 나갔다. 이어서 1905년 11월 맺어진 제2차 한일협약, 일명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일본 제국은 자칭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강제적인 차관을 도입시켰고 결국 1907년 이 운동이 시작될 당시에 그 액수가 1,300만원에 육박했다.
당연히 대한제국이 이 거액을 갚을 능력은 없었다. 더 정확하게는, 메가타가 재정고문으로 있으면서 모든 수익을 다 빼돌린 대한제국의 수익은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의 1년 총 수입의 1/3 이하 수준이 된 상황이었다. 단적으로 1903년 대한제국의 1년 세입은 1,000만 달러, 엔화 기준으로 따지면 2천만엔을 넘어섰다. 그래서 적자도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내장원 수입을 포함한 수익 수단은 털어내고 빚만 늘린 메가타의 작업으로, 대한제국은 빚더미에 앉게 된 것이었다. 이 시점의 대한제국의 1년 세입은 600만 조선 엔. 일제의 강제 차관 1,300만엔의 절반도 안되었다.

3. 발단


이런 상황에서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독자 투고가 실린다. 2010년대의 한국어로 번역하면...

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충성의로움을 떨칠 때이니, 국채 1,300만 엔은 우리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와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유지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가 못 갚는다면 그 때는 이미 3천리 강토는 내 나라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 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국민들은 국민으로서의 의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국채를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모아서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도 않고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2천만 명의 국민들이 3개월 동안 금연을 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0.2엔만큼 거둔다면 1,300만 엔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원해서 1엔, 10엔, 100엔, 1,000엔을 특별히 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호소는 민중들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빠르게 전국으로 국채보상운동이 퍼져나간다. '''"남자담배를 끊고, 여자비녀가락지를 내어 국채를 갚자!"'''라는 목소리가 커져간 것.

4. 전개


이때 주도적으로 운동을 이끌어 나간 사람들은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특히 부유 상인층들은 일본 차관과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있는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에 인천, 부산, 원산, 평양의 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자료집(총5권)에는 약 8천여점에 이르는 그 당시 사료들이 원문 사진까지 첨부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이 당시 실업가 및 지식인 층의 주요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특히 한국 최초의 여성운동이라고 불릴 만큼 부녀자 계층의 참여율이 매우 높았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1] 대구 남일동 7부인회[2]를 시작으로 전국에 약 30여개에 이르는 의성회, 부인회, 기성회가 창립되고 가락지, 패물 모으기 운동이 벌어져 수많은 여성들이 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생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한 대구 지역 기생은 처음 운동을 발족시킨 서상돈이 최초로 내었던 800원보다 더욱 많은 금액인 1,000원을 헌금하기도 하였고, 진주 기생인 부용이 논설문 부용토향(芙蓉吐香)[3]을 싣고 기부금을 내는 등 많은 기생들이 애국 의식을 가지고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4]
물론 하층민들이 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괜히 금모으기 운동의 뿌리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당시 하층민들의 열광과 참여는 엄청난 수준으로 가히 범국민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의연금을 의연소로 이동시키던 중 도적떼를 만났는데 도적들이 눈 앞에 있는 재물들이 국채 보상금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안 훔치고 그냥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까지 모조리 던져주고 간 유명한 실화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고종의 운동 참여 선언을 시작으로 윤웅렬[5], 유길준, 양기탁, 이상재 등 조정의 주요 관료들도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1908년 쯤에 이르면 약 80만 금엔 정도의 거액이 모이기에 이른다.

5. 결말


당연히 일본이 이를 두고 볼리가 없었다. 통감부는 친일단체 일진회를 동원하여 "누가 모금한 돈을 횡령한다더라"는 가짜뉴스를 쫙 퍼트렸고, 당황한 국채보상기성회는 일진회에게 너 고소를 시전했지만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채보상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양기탁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물론 물증이 없기 때문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했지만, 이 정도로도 국채보상운동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6] 그리하여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빠르게 식어버리면서 결국 실패로 끝났다.
실패한 또 다른 이유로는 처음부터 구심점 없이 순수한 애국 충정에서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기 때문에 구심점 세력이 든든하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일본 제국은 이미 대한제국의 재정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원하는 만큼 대한제국에 차관을 도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국채보상운동으로 차관을 열심히 갚아준다면 일제는 또 돈을 강제 대출해주는 것으로 대응하면 된다. 일본의 주도로 대한제국 정부 예산을 확대 편성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은 일본 정부에 채권을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하면 되었다. 국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면 현대 중국일대일로 사업처럼 갚지 못할 부채를 국책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떠넘길 수 있다. 이 경우 채권국은 정치적 이권을 얻는 대신 구입한 채권은 모조리 부실 채권이 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 리스크를 안게 된다.[7] 일대일로 사업은 대상 국가가 많아 부실 채권이 중국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버렸지만, 당시 대한제국의 경제 규모는 일본이 채권으로 장난을 쳐도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중들의 힘으로 국채를 갚으려 했던 경제적 구국 운동이었다는 의의까지 폄하될 수는 없을 것이다.

6. 이야깃거리


경술국치 이후엔 양기탁 등이 이 때 모인 돈 중 일부를 이용해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벌였다. 관련 기념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대구광역시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있으며, 국채 보상 운동을 기념하는 이름의 도로인 국채보상로도 있다.
골때리게도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일본인 지지자들이 있었다.
금모으기 운동의 모티프 중 하나가 국채보상운동이다.
108년 뒤 후손들이 다시 한번 국채 보상 운동을 벌이는 일이 발생했다. 국가보훈처에서 벌인 이벤트로, 국가보훈처가 ‘2015년 국채 보상 운동’이라는 이벤트를 벌였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23일 페이스북에 게재한 국채 보상 운동 이벤트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종교를 뛰어넘어 한말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을 2015년에 재현”한다고 취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어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을 갚기 위해 1907년에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던 국채 보상 운동이 우리 시대에 펼쳐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부할 수 있을까요?라고 사람들의 기부품 추천을 받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1904년 일제의 고문 정치가 시작되면서 도입되면서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운동”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서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논란이 되었다.

7.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대구시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2015년 8월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약 2,500여종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것을 문화재청에 신청했고, 문화재청이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했다. ##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는 2017년에 열리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를 거쳐 결정될 예정이다.
'''그리고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정식 등재되었다.''' 제13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국채보상운동이 세계 열강에 맞서 주권을 회복하고자 가장 앞선 시기에 일어났던 국권수호운동이라는 점을 들어 등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8.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9. 같이보기



[1] 대구시에서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활동한 최초의 여성운동으로 홍보 중이다.[2]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가보면 이를 기념하여 남일동 7부인회가 처음 발족한 자리에 여성기념비(일명 쌍가락지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3]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 3면.[4]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에 가보면 이 당시 여성들의 활동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국민들에게 알리려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5] 윤치호의 아버지[6]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대한매일신보의 사주였던 어니스트 베델이 모인 돈 중 일부를 투자했다가 날려먹는 사태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7] 물론 이 부실 채권 대신 다른 대가를 뜯어낼 수는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 사업으로 만들어진 인프라를 사실상 강탈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