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서상돈
徐相敦'''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족보명'''
서상돈(徐相'''燉''')
'''자 / 호'''
윤리(潤璃) / 시찰(視察)
'''본관'''
대구 서씨[1]
'''출생'''
1850년 11월 10일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
(현 경상북도 김천시 지좌동 마잠마을)#
'''사망'''
1913년 6월 30일 (향년 62세)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계산동
(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서상돈고택)
'''묘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 천주교공동묘원#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소개
2. 생애
2.1. 가계 및 어린 시절
2.4. 국채보상운동 이후
2.5. 후손
3. 관련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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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제국 때의 민족 운동가이자 사업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가계 및 어린 시절


서상돈은 1850년 11월 10일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2]에서 옹기굴 막노동꾼으로 일하던 아버지 서철순(徐哲淳) 바오로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金) 아가다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선조의 서장녀인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인하여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진 서경주(徐景霌)의 9대손으로, 8대조 서정리(徐貞履)는 진사시에 급제하여 종3품 풍덕도호부사를 역임하였고 6대조 서종헌(徐宗憲)은 진사시문과에 급제하여 종2품 강원도관찰사에 올랐으며, 5대조 서명함(徐命涵)은 음서로 종6품 용안현감에 오르는 등 직계 선조들이 대대로 관직에 올랐던 문벌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고조부 서광수(徐光修)가 1784년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선교로 천주교로 개종하였고, 이듬해인 1785년 을사추조(乙巳秋曹) 적발 사건 때 연루되어 문중으로부터 제명당한 이후부터는 조정 및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해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서광수와 슬하의 6남 2녀는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서광수의 4남이자 그의 증조부인 서유오(徐有五)는 충청도 충주목[3]에 있던 문중 땅으로 숨어들었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조부 서치보(徐致輔)가 그의 아들 5형제, 서인순(徐隣淳)·서명순(徐名淳), 서철순(徐哲淳), 서익순(徐翼淳) 요한, 서태순(徐泰淳) 베드로[4]를 이끌고 경상도 문경현 여우목[5] 교우촌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훗날 서상돈의 아버지가 되는 서철순은 다시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에 정착하였고, 이 곳에 살다가 서상돈과 그의 동생 서상정(徐相定)[6]을 낳았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경상도 상주목 청동면 석단리현[7] 교우촌으로 다시금 이주하였는데, 1857년 10월 6일 부친이 이 곳에서 별세하자 서상돈은 1859년경 어머니·동생과 함께 대구도호부 성서면 새방골 죽전[8]으로 이주하여 인근에 살던 외조부에게 의탁하였다.#
그는 13세 때 집 근처 어느 상인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점차 장사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8세 되던 해, 대구에서 천주교 원로회장 서용서(徐用瑞)[9]의 후원과,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 그리고 외사촌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은 점점 번창하여 고령현 개포를 본거지로 삼고 부산에서 안동까지 800리에 달하는 사업 영역을 가진, 보부상 800명을 거느리는 대구에서 손꼽히는 거상이 되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그는 경상도 안동, 군위, 김천, 칠곡, 달성 등의 토지를 매입하여 대지주로 변신하게 된다. 등짐을 지고 재래시장을 전전하던 소년은, 35세가 지날 무렵 대구지역의 유력한 경제인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2.2. 국채보상운동 이전


1894년 45세가 된 서상돈은 조선의 탁지부 소속 시찰관으로 임명되었다. 담당은 경상도 세정의 총괄. 이때 공명정대하고 청렴한 모습이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서상돈에 의해 파직된 부패한 아전들이 투서와 고발로 저항하자,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로베르 신부가 증인으로 나서 이것이 거짓임을 증명해주었다고. 1898년 서상돈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였다.
1899년을 전후로 해서 서상돈과 천주교 신자들은 대구읍내 곳곳에 학당을 설립하였으며, 계산성당 교육관 내 한문서당인 해성재(海星齋)의 건립도 지원하였다고 한다.
1902년 6품으로 탁지부 재무관에 임용되었으며#, 이어 경상남북도 검세관에 임용되었다.# 1903년에는 정3품으로 경상남도 시찰에 임용되었다가# 곧 해임되었다.# 1904년에는 경상남북도 검세관에서도 해임되었다.#
1905년엔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정식 사립학교로 인가받은 대구지역 대표의 여학교인 달서여학교의 설립에 적극 관여하는 등 근대교육의 발전에 힘썼다.

2.3. 국채보상운동


1907년 서상돈은 "담배를 끊어 1,300만원 가량의 국채를 갚자"는 내용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며 즉석에서 800원의 거금을 출연했고, 이에 대동광문회 특별회에 참가 중이던 200여명의 회원들도 찬동하여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후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켰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된다. 자세한 내용은 국채보상운동 항목 참조.

2.4. 국채보상운동 이후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 활동에 전념하여 실업진흥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에 힘쓰다 1913년 6월 30일 64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돈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5. 후손


슬하에 서병옥(徐丙玉)·서병조(徐丙朝)·서병주(徐丙柱)·서병민(徐丙敏)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장남 서병옥은 1899년 중추원의관에 임명된 바 있다#. 차남 서병조일제강점기 때 경상북도 도평의원 및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대륜고등학교 설립에 적극 참여하여 대륜고등학교 재단인 대봉(大峯)교육재단 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후 친일인명사전 중추원 부문 및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차남 서병조의 장남 서정식(徐廷植)은 독립유공자 민영환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셋째 아들 서병주의 장남 서정덕(徐廷德) 루까는 경성제국대학 문과를 7회로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대학원 4대 원장을 역임했다.# 청구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0년 4월 25일에는 교수 시국선언에 참여하여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기도 했다.# 서병주의 장녀 서정서(徐廷瑞)는 오빠인 서정덕의 경성제국대학 문과 동기생인 류홍렬(柳洪烈)과 혼인하였다. 류홍렬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 대한민국 학술원 원로회원 등을 지냈다.
셋째 아들 서병주의 장손자 서영석(徐榮錫) 베드로는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농축산대학(현 자연자원대학) 학장을 지냈다.#
한편, 차남 서병조의 장손자 서공석(徐公錫) 요한 천주교 부산교구 신부를 비롯해 셋째 아들 서병주의 둘째 손자 서인석(徐仁錫) 바오로 천주교 대구대교구 신부, 서병주의 손녀 서준석(徐俊錫) 마오로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수녀 등은 성직자/수도자의 길로 나아갔다.

3. 관련 유적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 (계산동2가 84)에 서상돈고택이 있는데, 그 옆에는 시인 이상화(시인) 선생의 고택이 있다. 대구광역시에서는 서상돈 선생의 고택을 복원해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이 곳은 '대구 근대로의 여행' 골목투어 제 2코스로 편성 되어있다.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 (동인동2가 78)[10]에 조성되어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 도위공(都尉公) 경주(景霌)파. 24세 상(相) 항렬.[2]경상북도 김천시 지좌동 마잠마을[3]충청북도 충주시[4] 서익순(徐翼淳) 요한과 서태순(徐泰淳) 베드로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5] 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여우목[6] 이후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한 막내 숙부인 서태순(徐泰淳) 베드로에 입양되었다.[7]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8]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죽전동[9]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외조부이다.[10] 동인동 우체국 건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