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언

 


1. 소개
2. 생애
2.1. 관련문서


1. 소개


金良彦
1583년(선조 16년) ~ 1627년(인조 5년)
자는 선익(善益). 조선 중기의 무신. 진무공신[1] 3등에 책록된 공신.
조선의 복수귀이자 Badass.

2. 생애


본관은 진주 김씨. 김양언의 아버지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무관이었는데, 1619년(광해군 19년) 강홍립을 따라 후금의 군대와 싸우다가 심하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양언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며 '복수' 두글자를 크게 써서 몸에 차고다녔고,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자손 500여명을 모아 '복수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활동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는 조선초기 태종이 금지했던 사병에 해당하기에 말이 많았던것 같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사이가 안좋은 군관들이 복수군이라는 사병집단으로 난을 꾀한다고 보고했다가 무고로 잡혀가기도 하고, 김양언 본인도 구금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에게 자청하여 척후장이 되어, 안령전투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 3등에 책록되어 군기시주부와 태천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북방의 수비를 자원했다고 한다.

'''그 뒤 역적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는 김양언이 드디어 원수(元帥)를 따라 난에 뛰어들어 안현(鞍峴)의 전역(戰役)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그래서 진무 공신(振武功臣)에 녹훈(錄勳)하고 바로 본직(本職)을 제수하였는데, 김양언이 눈물을 흘리며 감개하여 남이흥(南以興)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아직 갚지 못한 터에 관작(官爵)을 바라는 바가 아니다. 오직 변방에서 목숨을 바칠 생각 밖에는 없다.'''"하였으므로, 이를 듣고 무릎치며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인조실록 8권'''

이에 이르러 김양언이 상소를 봉하여 남이흥을 통해 계문하고 끝내 서울에 올라오지 않았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신은 서쪽 변방의 미천한 유생으로서 본래 재식(才識)도 없고 집도 가난하기에 직접 농사를 지어 노친을 봉양해 왔는데, 불행하게도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아비가 전사하였습니다. 거적을 깔고 아무리 애통해 해도 소용없는 일이기에 자원해서 종군(從軍)하여 복수할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왕사(王師)가 정벌할 날이 오거나 노적(奴賊)이 준동하기라도 하면 먼저 나서서 쳐죽이다가 목숨이 끊어진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의 숙원인데 천은(天恩)이 잘못 내리어 경직(京職)을 제수하셨습니다. 특별한 은혜와 영광이 천지처럼 한이 없습니다마는, 신의 본심은 오직 아비의 원수를 갚는 것이니, 진실로 낮이나 밤이나 변에 대비하여 국경의 울타리를 떠나지 않아야 마땅합니다. 어찌 소복(素服)을 벗고 신면(紳冕)을 갖춘 채 적들의 소굴을 멀리 떠나 국도(國都)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신은 진취(進取)하는 영광을 탐한 나머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갚는 의리를 잊어버린 결과가 될 것이니, 신은 만 번 죽더라도 결코 그렇게는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아름답게 여겨 해조로 하여금 그의 소원대로 시행하도록 하고, 포상하는 특전을 내리게 하였다.

'''김양언의 상소'''

그렇게 벼슬을 마다하고 자원하여 북방을 지키던 그였으나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그는 남이흥의 휘하에서 후금의 군대와 싸우게 되는데...

김양언은 중영에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절의는 높지만 장부(丈夫)는 아니다.’''' 하고 성에 다가가서 적에게 활을 쏘다가 화살이 다하자 편곤(鞭棍)으로 많은 적을 쳐죽이고는 마침내 북당수(北塘水)에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인조실록 16권'''

안주는 원래 서북의 요충지로 수만명의 상비병력을 보유하는 병영이었지만 이괄의 난으로 모두 없어지고 텅 빈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후금이 쳐들어오자 민간인까지 3000명을 끌어모아 수비해보지만 후금의 군대에는 역부족이었고, 성을 지키던 남이흥 장군조차도 최후의 순간이 왔다고 판단하자 화약고에 불을 붙여 적들과 함께 폭사하였고 김양언은 적을 안주성밖으로 유인해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그야말로 사나이의 심금을 울리는 장렬한 최후가 아닐수 없다.
정묘호란에서 전사한뒤, 그는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진흥군(晉興君)에 추봉되었으며, 고향에 정려(旌閭)되고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조선 말기 고종실록에서도 관서지방에 대한 차별에 대해 상소를 올릴때 충의로운 관서사람의 예중 하나로 언급된것으로 보아 유교적인 충효사상에서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이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2.1. 관련문서


* 이괄의 난
* 정묘호란
[1] 이괄의 난 진압에 기여한 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