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립

 

姜弘立
1560 ~ 1627
1. 생애 초반
2. 강홍립 밀지설에 대하여
3. 인조반정 이후
4. 강홍립을 연기한 배우


1. 생애 초반


조선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 본디 문관의 가문이였으며 강홍립은 임진왜란 기간 중인 1597년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선조 치세 말기 동안 함경도 일대의 군비를 감독하고 시찰하는 등 군사 부문을 포함한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며 광해군의 눈에 들어왔다.
1605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로부터 허락받는데 성공하여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선조가 사망했다.

2. 강홍립 밀지설에 대하여


승정원일기》와 《청태종실록》 등을 따라서 광해군이 사르후 전투에 조선군을 파병하면서 사전 투항 지시가 있었다는 해석이 일찍이 제기되었고, 최근에는 반대급부로 밀지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도 하나, 전쟁 상황을 관망하고, 출병의 이유가 상국의 독촉에 따른 것임을 전달하라는 이중외교가 있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1]
광해군은 칙서의 도착으로 출병이 명확해지자, 명군이 패전할 경우를 대비하여, 조선군이 명 장수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하여 도원수 강홍립의 지휘권을 지키는 한편, 조선군을 명의 동로군에 예속시켜 자의에 따른 출병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했다. 또한 동로군이 출병하기 직전에도 후금과의 초피 교역을 시행하고 녹봉을 지급했으며, 이 과정에서 회령부사 한명련으로 하여금 누르하치의 차관 쇼롱오(šolonggo)에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냈지만 명군의 진[唐陣]의 뒤에 있을 것"이라 유시하였다. 한명련과 같이 광해군의 밀령을 받은 강홍립은 배동관령에 이르러 호역 하세국을 허투 아라(hetu ala)로 보내어 조선 측이 후금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이번 출병은 상국(명)의 재촉을 받아 부득이하게 한 것으로, 얼마안되는 군졸들은 명군 진 뒤에 있었다고 전했다. 마찬가지로 사르후 전투 현장에서는 조선군 좌우영이 전멸하자, 다이샨은 조선군 중영에 통사를 요구했고, 이에 강홍립은 통사 황연해로 하여금 "지금은 부득이 해서 온 것"이라 전했으며, 후금 측도 과거 조선의 번호들을 보내어 조선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삼사에서는 강홍립 등을 적신(賊臣)이라 칭하면서 처벌을 주장했으나 이들에게 밀지를 내린 광해군은 그들의 처벌 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2]

3. 인조반정 이후


사르후 전투에서의 투항 이후, 후금에서 지내던 강홍립은 변발을 거부하고 한족 여성과 결혼을 했다.[3] 그러다가 후금의 2대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하려 했고 후금의 1차 조선 침공, 즉 정묘호란에서 조선인이었던 강홍립은 길잡이를 강요받아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가는 것을 도왔다.[4] 그리고 그 결과는 하루 평균 진군거리가 100km가 넘는 후금군의 경이적인 쾌속진격.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주선으로 강홍립은 조선에 다시 귀환하게 된다. 신료들은 적에게 항복했다는 사유로 강홍립을 참수하라 했으나, 인조의 의지로 강홍립은 삭탈관직 당하는 선에서 끝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강홍립은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복권되는 듯 했으나, 사대주의파들의 반대로 취소되었고, 강홍립의 후손들은 평생 숨어 살아야 했다.
삼전도비에도 그의 이름이 실려있는데, 이후 건륭제의 이름(애신각라 홍력)과 발음이 같은 게 문제가 되어 비문의 이름이 강황래(姜黃來)로 개조당하기도 했다.
묘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다.

4. 강홍립을 연기한 배우


이 드라마에선 강홍립을 가여운 장군으로 묘사했다. 광해군의 명으로 전쟁을 치루지않고 항복했으며 이괄의 난 때 달아난 한윤이 청으로 달아나서 강홍립에게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왕이 바뀌자 조정에서 강장군 및 부관들의 식솔을 3대 몰살시켰다고 거짓말을 하는 통에 경악한다. 부장인 김경서가 피를 토하고 분통터져하다가 분사하고 강홍립의 꿈에 나와서 왜 우리들 식솔이 억울하게 죽어야 하냐며 조선이란 나라는 이제 조국도 아니라고 하소연하며 청군을 도와 그 조선을 뭉개시오! 라고 피를 토하며 애통해하는 꿈에 괴로워한다. 결국 청군이 조선으로 쳐들어올 때 도우며 비로소 한윤이 거짓말을 한 걸 알고 조선에 남는데 그의 처형을 주장하던 대신들에게 인조가 거부하고 조선에 살게한다.
강홍립은 유배되어 있던 광해군에게 찾아가서 "전하의 생각이 맞았사옵니다. 그저 전하를 몰아내고 쓸데없이 명나라나 찾다가 결국 청에게 이렇게 시달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라며 아쉬워한다.
  • 화정 - 정해균이 맡아서 열연했다.

[1] 한성주(2018), 《조선시대 藩胡 연구》, p. 334~337;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2]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184~196.[3] 다만 이때 강홍립은 결혼하여 조선에 아내와 자식 6명이 있었던터라 이 한족 여성은 첩이었다. 이 여성은 강홍립이 조선으로 갈때 따라가서 그의 집에 같이 살다가 강홍립 사후 청나라로 돌아갔다.[4] 당시 강홍립은 원정군에 차출된 후 봉황성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정벌길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