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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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24년 1월(조선 인조 2년)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정치적인 혼란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
조선 역사에서 '''한양과 경기도가 아닌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한양을 점거한''' 유일무이한 반란이다(반란군이 한양을 점거한 반란 자체는 이괄의 난이 유일한 예시는 아니다. 바로 직전의 인조반정만 하더라도 큰 피해 없이 성공하기까지 한 반란이다). 또한 도성을 점거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도 실패한 유일한 반란이다.
특히 한양(서울)과 경기 지방에 한 방 먹여줬다는 지역 감정 때문에 북쪽에서 꽤 인기있는 반란(?)이다. 조선 멸망 이후, 이북 지역에서 뜬금없이 이괄의 가문이 각종 유사 역사학이나 환단고기 같은 야사 등의 주인공으로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인데, 주로 이북 지역에서 한양을 박살낸 것이 통쾌하다며 이괄의 능력이나 그의 멸문된 가문을 과대평가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2. 배경
조선 중기의 무신 이괄은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실각시키는데 동참했으나, 김류와 이귀처럼 다른 공신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2등 공신으로밖에 배정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지만 이는 결코 부당한 인사가 아니었다. 김류가 자신의 집에 숨어있는 동안, 반정군을 지휘한 것이 이괄이고 그 결과 반정이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괄의 공은 매우 컸고 이를 인정받아 '''무려''' 2등 공신에 오른 것이다.
다른 무관의 사례를 보면, 이수일은 이괄이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선전관으로 경력을 시작할 때 이미 종2품 가선대부를 지내던 군부의 원로이며 임진왜란 시기 일선에서 목사와 병마사를 역임했을 정도로 공적도 있고, 반정 당시에는 도성의 문을 열고 광해군을 붙잡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런 인물도 공로가 인정돼 공조 판서에 오르기는 하나 공신 3등록에도 오르지 못했다. 무인이 1등 공신이 되려면 거의 이순신급 공적을 세워야 한다.[3][4]
거기에 이괄은 인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는데, 반정 이후 한성부 판윤을 거쳐 조선 최강의 정예병 1만 5천명을 통솔할 수 있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꽂아준다. 거기에 심지어 인조는 이괄이 평양에 가는 길에 '''손수 수레를 밀어주었다.''' 이괄에 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커버해준 인물도 바로 인조이다. 이괄의 난의 촉발점이 된 아들 체포도 보면, 조선 역사상 연좌제 없이 오로지 대상자만 체포하라는 명도 처음 있던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당장 도성에 있는 가족들부터 싹 잡아놓고, 이괄과 아들을 같이 압송해야 한다. 그런데 '''아들만''' 압송하도록 시켰다. 그야말로 엄청난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이괄이 큰 업적이 있음에도 공신이 되지 못한 인조의 무능이라는 평가가 있으나, 이괄에 대한 대우는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절대로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이괄 본인의 행실도 심각했는데, 군사를 조련하고 부리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다혈질에 자만심이 강하고 협조성이 떨어져서 광해군 때부터 품행 문제를 지속적으로 지적받았다. 반정 후에도 이런 점은 변하지 않아서 한성판윤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잠깐 치안 담당으로 그를 시험할 때 부터 월권을 행하여 북인의 연달은 반란기도로 생존 자체가 불확실했던 서인들이 그를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괄이 맡은 한성판윤이 당시는 며칠마다 사람이 바뀌는 한직에 불과했다는 말이 있는데 '''자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이괄이 한성판윤을 역임하며 맡은 직책은 역모감찰로 북인 잔당의 실제 역모기도가 적지 않아, 생존이 불확실했던 서인들의 사정을 고려하면 한직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봐도 수도를 담당하는 관직은 결코 푸대접받는 자리가 아니다. 공자가 노나라 군주의 신임을 받아 처음 받은 관직이 중도재인데, 중도는 노나라의 수도이며 중도제는 즉 수도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는다. 삼국지에 나오는 원소가 지낸 사례교위는 낙양과 장안을 관리하며,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겸 경기도지사 + 수도방위사령관 + 감사원장을 합친 요직이었다. 명판관 포청천이 이름을 떨쳤던 때도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책임지는 개봉부윤 시절이었다. 즉 요직 오브 요직에, 어지간한 황제나 왕의 신임이 없으면(임금이 사는 수도인데 당연히 믿을만한 심복을 앉혀야 안전하다) 눌러앉기 힘든 위치였다. 조금 뒤의 일이지만 인조 정권 초기에 북인 잔당이 모의한 여러건의 반란에서 단골로 거론된 이름이 기자헌, 인성군, 정충신, 그리고 이괄이다.
이괄은 반정 당시에 집에서 벌벌 떨다가 막판에나 등장한 김류가 1등 공신이 되고,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했던 자신이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었는데 이는 이괄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김류는 능양군을 왕으로 추천한 인물, 즉 킹메이커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1등 공신이 확정되어 있는 거물이었던 만큼 이괄이 무턱대고 동급으로 접근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신책봉은 이런 정치적 요소를 감안해서 내리는 결정이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책봉된 정사공신 명단을 보면 이숙번과 민무구, 민무질 같은 핵심 무장들은 2등 공신이고 관망하다 와서 절한거 밖에 없는 조준과 김사형, 정도전측 사람이었다 슬쩍 합류한 이무가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소견머리는 정사공신 책봉 2등 책봉에 불만을 품고 소란을 피우다 귀양간 박포와 다르지 않았다. 김류가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재주 있는 관료라면 당색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밀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폐비 논의에 참여해서 인조가 꺼림칙하게 여겼던 김신국, 아예 서인쪽에서 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던 윤휘[5] 같은 서인계 실무관료 여럿이 김류 줄타고 인조 정권에 연착륙했으니 겸허하게 처신했다면 오히려 지지자가 되어줄 수도 있었다.
인조의 신뢰도 확고해서 한성판윤으로 제직하던 이괄이 사직 의사를 내비치자 공이 있어 임명한 자리이니 그러지 말라야 만류했다. 평안도에 부원수로 보낸걸 두고 인조가 이괄을 가볍게 대한 증거라는 주장이 있지만 엄연히 이괄을 신뢰했기에 보낸 자리였다. 이괄을 관서 지방에 보내달라고 추천한 인물은 장만[6] 인데, 장만은 고령인데다 눈 질환 때문에 업무를 자주 쉬었으므로, '''이괄은 유사시 장만의 도원수 역할을 실질적으로 대신할 수도 있는''' 위치였다. 게다가 정충신도 이괄보다 고참이라 이때 상당히 노쇠해있었다.[7]
무엇보다 이괄이 이끈 1만 5천 병력은 조선을 침공한 후금군이 거점을 차례로 공략하는 대신 변칙적인 기동을 할 때 대응하기 위해 삼남지방 병력 5천까지 더해서 모은 기동예비군이었다. 광해군대에 육성을 포기했던 기병대까지 포함한 최중요병력인데 이런 병력을 신뢰없는 사람에게 맡길 리가. 이 병력은 광해군이 궁궐공사만 빼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심지어는 자신의 호위까지 포기하면서까지 만들어낸 병력이었다.[8] 이괄은 반란 멤버라는 이유로 역사 평가를 종합했을 때 본인보다 더 뛰어난 장수들과, 심지어 서인들조차 제치고 그 정예 군대를 이끄는 신뢰를 얻은 것이다. 이괄은 지금 당장 국가를 좌지우지 하는 자리에 못 올랐을 뿐, 군사적으로는 '''국가의 생명을 대신 맡아두는 것이나''' 다름없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것이다.
3. 전개
3.1. 반란 고변
반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정치 암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회, 이우, 권진 등이 "이괄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인조는 '나의 이괄은 그러지 않아'라고 상당히 비호했으며 김류 또한 이괄을 두둔했으나, 이귀는 표독스러울 정도로 이괄을 잡을 것을 역설하며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귀의 행적은 그의 문집인 《묵재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적인 기록이라 신빙성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실록에서도 이귀가 "당장 이괄을 잡아와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묵재일기의 내용 역시 상당 부분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전 교수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전 첨사 권진(權聄), 전 참봉 정방열(鄭邦說), 충의(忠義) 윤안형(尹安亨), 허통 한흔(韓訢) 등이 대궐에 나아가 상변(上變)하니, 곧 궐내에서 추국하였다. 문회가 공초하기를,
"(중략) 대장(大將)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괄(李适)이 거의(擧義)한 날 집에 돌아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 하였다. 이때부터 불궤(不軌)의 뜻을 품고서 한명련(韓明璉)의 세 부자와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모의하고, 그 아들 이전(李栴)은 정돈·정찬과 함께 유산(游山)한다는 핑계로 외방을 두루 다니며 일을 같이할 사람을 맺었는데, 안변(安邊)의 수령인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도 그 일을 알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바로 훈신(勳臣)들에게 밀고하고 왕복한 서찰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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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변에는 어떤 명확한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인조와 김류가 이괄을 두둔한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이귀의 태도도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군권을 가진 사람이 수도에서 자신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면 없던 역심도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류의 주장처럼 '''처음부터 이괄을 건드리지 말거나''', 이귀의 주장처럼 '''이괄을 확실히 죽여야''' 뒤탈이 없었을 것이다.
인조는 이괄이 반란을 일으킬 거란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듯하다. 과거 이괄을 평안도로 파견할 때도 마차를 손수 밀어주는 신뢰를 보여줬으며, 북쪽에 경험이 뛰어난 다른 서인 계통의 장수들도 있었음에도, 굳이 이괄에게 조선의 주력군 거의 대부분을 맡기기도 했고. 상식적으로 이괄을 의심했다면 그 정도로 막중한 권한을 맡겼을 리가 없다.[9]
결국 조정에서는 "이괄의 아들만 체포하여 국문하자."는 위험한 결론에 도달했고, 그 결과는...
3.2. 금부도사를 죽이다
인조는 주모자로 거론된 이들 중에 이괄과 정충신에 대해서는 체포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금부도사 고덕상을 보내 이괄의 아들은 압송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분노한 이괄은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다더냐?'''"라고 묻고는, 검을 빼들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살해하였다.'''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인 이괄은 1월 24일에 항왜 100여 명과 휘하 병사 1만여 명을 모두 통솔하여 영변에서 남하하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또한 후술하다시피 공산성으로 피난하기 전 반란군과 내통할 수 있다며 김류가 지목한 전 영의정 기자헌, 전 훈련대장 이시언 외 37명을 심문 없이 처형하여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다.[10] 한편 이괄과 내통했다고 알려진 한명련은 붙잡혀 압송되고 있었으나 이괄이 구출해내어 자신의 군에 편입시켰다. 반대로 함께 이괄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은 안주 목사 정충신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군무지를 이탈, 도원수부에 합류해 토벌군의 선봉에 섰다.
3.3. 반란 초기, 양측의 삽질
반란 초기에는 변변한 전투가 없었다. 아무런 명분 없이 '임금님 옆 간신배들을 몰아내자.'는 식의 주먹구구식 궐기였으니 제대로 된 전략이 있을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괄이 택한 전략은 빠른 전격전이었다. 이괄 군은 토벌군과의 전투를 극도로 회피하며, 철저하게 산속 오솔길만을 통해 진군했으며[11] 관군이 징발되어 비어있는 고을들을 빈집털이하여 쌀과 군수품을 노획하는 식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이들은 영변대도호부의 관아를 점령하고 영변행궁에 처들어가 행궁 내부의 무기고속 무기를 탈취하였다.
하지만 이괄 군이 후발대로 남겨둔 김효신이 투항해버렸고, 한명련의 옛 부하들 역시 투항한데다가 이괄의 중군 이윤서 등이 병력을 이끌고 이탈하는 바람에 이괄 군은 숫자가 많이 줄었다.[12] 그러나 장만이 자만하여 정찰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이괄 군은 산속으로 숨어 이동했고 결국 평양을 우회해 배후로 돌아갈 틈을 내주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장만은 이괄의 난을 진압한 최고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13] 심지어 '애초에 네(장만)가 일을 똑바로 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진 안됐는데 지가 일을 키워놓고 역적 토벌 공신이라니, 아이고'라는 사관의 기록도 있다.
3.4. 황주 전투
1624년 2월, 평양 남쪽의 요충지인 황주를 우회하여 진군하던 이괄 군은 황주와 봉산 사이의 산산(蒜山)에서 관군에게 덜미를 잡힌다. 장만이 이끄는 관군의 본대는 중화로 나아가 이괄 군을 쫒는 한편, 황해 감사 임서(林㥠)로 하여금 황해도의 병사들로 황주 동쪽에 위치한 상원과 수안을 지키도록 하였다. 황주 남쪽의 봉산에도 관군이 집결하여 이괄 군을 막을 준비를 하니, 이괄 군은 북, 동, 남 삼면으로 포위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은 봉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관군에 의해 차단되자, 남쪽으로 이동하던 군을 되돌려 지나쳤던 황주로 되돌아가서 포위망을 살짝 흔들어본다.
뜻밖의 움직임에 당황한 장만은 선봉이었던 정충신에게 남이흥을 비롯한 지원군을 보내 맞서게 하였다. 하지만 정충신 군은 기동 병력에 약간의 지원군만 받고 이괄 군을 상대해야했으므로, 장만의 포위망은 단순히 관군의 병력만 여러 갈래로 분산시킨 채 정작 전투 부대에는 큰 지원을 못해주는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마침내 2월 2일, 황주 신교(薪橋)에서 이괄 군과 관군은 처음으로 회전(會戰)을 벌이게 된다. 정충신, 남이흥의 관군은 급작스러운 작전 변경으로 휘하 병력만 이끌고 왔기에 규모가 크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기록된 정충신의 병력은 2천여 명 이하이며, 다른 장수들도 포함한 것이기에 추가 병력도 확실치 않다. 최대로는 8,000명을 초과한 이상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 북방 병력들의 분포를 보면 굉장히 미심쩍은 수준이다.
그런데, 교전이 시작될 무렵 이괄의 병력이 대규모로 관군에게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실록에 따르면 교전 중 정충신과 남이흥이 반군을 향해 "올바른 이치"에 대해 크게 소리치자 반군 1천여 명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이괄 군의 선봉이었던 허전, 송립 등이 관군으로 투항해 왔다고 한다.[14] 흩어진 병사 1천여 명도 대부분 토벌군에게 귀순했으나, 관군이 투항병들로 어수선해져 진형이 무너지자 이괄은 과감하게 항왜들을 앞세워 기습하여 관군을 패퇴시킨다.[15]
의아하게도, 관군은 와해되고 장수 중에서 사상자와 포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사 30여 명, 포로 30여 명에 그쳤다고 연려실기술은 기록하고 있다. 이토록 황당할 정도로 적은 피해자를 두고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충신은 패배 이후에도 큰 타격없이 이괄을 추격하기 때문에 정말로 피해 자체는 적었다고 볼 수 있다.[16] 즉, 애초부터 관군 장수들이 적은 병력으로 싸움을 걸었고, 첫 번째 해프닝만으로도 병사들이 붕괴되어버리고, 장수들만이 계속 싸우려고 하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 자체는 아귀에 맞는다.
즉, 당시 관군 측에서는 지휘관들을 제외한 병사들은 싸움없이 흩어질 정도로 병사들의 상태가 안 좋았다. 한편으로 전투는 승리했을지언정 1천이 넘는 병사가 관군에 투항한 이괄 군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은 결속력과 명분[17] 을 확인할 수 있는 전투이다.
3.5. 마탄 전투
황주에서 패배한 것은 정충신의 선봉대 뿐으로, 관군의 포위망은 아직도 건재했다. 또한 이괄 군이 한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영변에서 황주까지 진군해왔던 거리보다 먼 거리를 가야 했다. 따라서 황주 전투 이후에도 이괄은 소모전을 피해서 오솔길을 골라 진군하고, 정충신은 이괄의 뒤를 지독하게 추적했으며, 장만의 본대는 투항병들과 패잔병을 추스려 봉산 남서쪽 서흥에서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수일과 합류하는 전개가 이어진다.
이괄 군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각 지역의 관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한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예성강을 건너야 했으므로 스스로 사지를 돌파해야 했다. 때문에 관군은 예성강을 방어선으로 설정하여 방어사 이중로 등의 방어군이 강을 지키고, 정충신의 추격 부대와 장만의 관군이 뒤에서 협공을 가해 이괄 군을 포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괄 군이 예성강을 건너게 된다면 개성이 지척일 뿐 아니라 계속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관군의 입장에서 예성강은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설령 이괄 군을 섬멸하지 못한다고 할 지라도 방어선이 제대로 형성되어 삼남(충청, 전라, 경상)의 병사들이 집결하는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이괄의 반란은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18]
결국 이괄은 최대한 소모전을 피하고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으로 이동한다. 이중로 또한 이괄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마탄에서 미리 병력을 결집했다. 문제는 황해도 지방군이 나름대로 훈련 수준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이괄 군에 합류한 북방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데다가, 지원군이라고 도착한 경기도 지방군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에 160리나 되는 거리를 강행군한 끝에 겨우 도착한 상황이라 절대로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이들의 후방에는 재편성을 마친 정충신 군[19] 이 이괄을 뒤따라 오고 있었지만, 당시는 한 겨울인 데다가 이괄 군이 앞서 진격하면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불살랐고 배후에는 항상 복병을 두어 10리간의 간격을 유지했다. 게다가 이괄 군의 진로가 험악한 산길이었기에 그 뒤를 뒤따르는 정충신 군의 고생은 엄청났고, 결국 지치고 굶주린 정충신 군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장만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병사들이 먼 거리를 행군하여 피곤하니 안타깝고 염려된다고 썼을 지경이다.
결국 2월 7일, 마탄에서 관군은 이괄의 기습으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고 인조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20] 전투의 양상은 황주 전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괄 군은 기동력, 훈련도, 숫자까지 관군을 크게 웃돌았고, 순식간에 얕은 여울을 건너 관군을 격파해 버린다. 이중로를 포함한 8명의 장수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강을 건넌 이괄 군이 역으로 관군을 강쪽으로 몰아서 포위해 버려 전멸한다.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항복했다고 하며 관군을 이끌던 장수들이 7명이나 전사했다. 이 중 이중로는 직접 조총으로 군관 7명을 '''쳐 죽였다'''(擊殺)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을 정도니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21] 그나마 살아남은 평산 부사 이확(李廓)은 자신의 말을 일부러 죽인 뒤 피를 바르고 밑에 숨어 죽은 척 해서 살아남았을 정도니 관군의 참상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22]
이괄은 전사한 관군의 충성파 장수 7명의 목을 베어 뒤늦게 도착한 추격군에게 보내 일시적인 공황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본 남이흥이 "잡혀간 우리 장수는 나와 잘 아는 자들이다. 이 얼굴들을 보니 모두 장수가 아니다. 틀림없이 군졸들의 머리인데 적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다." 라고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하여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물론 충성스러운 장수들이 7명이나 사망하고 반란군에게 효수까지 당한 사건으로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23]
3.6. 임진강을 넘어 한양으로
관군은 최종 방어선인 임진강이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기서도 엄청난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 이괄 군의 기동력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임진강 하류에는 이귀, 상류에는 수원 부사 이흥립, 임진강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인 청석령에는 이서를 배치해놓았는데, 정작 도하 지점인 임진나루에는 파주 목사 박효립이 지방 포졸도 아닌 민병대 수백(...)만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24]
이괄은 이를 신속한 기동으로 돌파했는데, 일단 청석령에는 항왜 병사들을 보내 밤중에 소리를 질러 마치 포위되었다는 인상을 주어 이서 군을 묶어둔 후에 샛길로 지나쳤으며, 너무나 신속한 나머지 이귀는 임진강 방어선에 도착하지도 못했고, 게다가 이흥립 군은 무질서하게 패주하여 통제가 되지 않았다.[25] 결국, 이괄은 임진강의 나루가 허술하다는 점을 간파해 신속하게 강을 건넜다. 결국, 인조는 음력 2월 8일 밤에 급히 공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이괄은 음력 2월 10일에 한양에 입성했다.
3.7. 단 하룻밤 동안의 한양 생활
인조는 내통 위험이 있다는 김류의 주장으로 기자헌 외 37명의 정적들을 몰살시키고 도망쳤다. 이런 명분이 없는 숙청 덕분에, 백성들의 민심이 매우 악화되었다. 게다가 기자헌은 북인이었지만 폐모론에 반대하여 서인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때문에 조정에 등돌린 민심은 이괄을 지지했고, 이괄은 한양에 입성했다. 그때 이괄의 아우 이수는 이충길과 이시언의 아들 이욱[26] 등을 데리고 급히 모은 수천명을 거느리고 무악의 북쪽에서 이괄 일행을 영접하여 앞을 인도하였다. 또 각 관청의 서리와 하인들도 의관을 갖추고 나와 영접하였으며 도성민들은 길을 닦고 길 위에 황토를 펴고 극진히 환영하여 맞이하였다. 이괄은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살아남은 북인들을 등용하려고 했으며,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려고 했다. 실제로 광해군 때의 권세가들의 빼앗긴 집은 그들의 살아남은 친족과 노비들에게 도로 점거되었다.
수도 한양을 내어준 관군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최고 지휘관인 장만조차 "군사를 물려 힘을 기른 다음 다시 싸우자" 라고 할 정도였다. 사실상 패배를 인정한 셈. 하지만 이괄이 한양에 입성한 것부터가 큰 실수였는데, 정충신이 예언한대로[27] '''왕인 인조를 붙잡는데 실패하자 추격할 생각은 안하고 한양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스스로 관군의 포위를 기다리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28]
한양에 도착한 정충신은 후퇴를 주장하는 장만에게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안령(무악재)을 점거하면 한양을 내려다 보니 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높은 곳에 있으니 적을 이길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남이흥이 동조하여, 2월 10일 저녁에 정충신의 추격 부대는 병사 2천 명으로 야음을 틈타 안령을 점거한다. 안령을 점거한 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상없다는 봉화를 올려 반란군을 안심시키는 바람에 2월 11일 아침이 되어서야 이괄은 안령이 점령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3.8. 안령 전투
정충신의 예측대로 이괄은 관군이 안령(무악재)에서 자리를 잡으면 한성의 민심이 이반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한성 농성을 포기하고 정면으로 대결을 결심한다.
이괄은 안령을 점령한 정충신의 병력이 작은 규모라는 점을 파악하자 '저 정도 병력은 점심 먹기 전에 처리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지, 방을 붙여 '''큰 싸움이 있으니 구경하고 싶은 자는 오라, 관군을 정복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백성들도 얼씨구나하고 구경을 갔다. 당시 한성의 백성들 입장에선 누가 이겨도 상관 없는 전투였다. 전쟁영웅인 광해군은 궁궐공사로 민심이 낮았으나,[29]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의 인망도 폭망 수준이었고, 여기에 이괄 측도 별다른 사직 상의 드라마도 없고 선조의 혈통답게 날라리로 유명했던 흥안군을 내세워 인조보다 명분이 빈약했다. 그냥 재미있는 구경거리이자 높으신 분들이 벌이는 병림픽 정도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30]
이리하여 이 전쟁의 메인 이벤트는 2월 11일 묘시(5~7시)에 수많은 백성들이 몰린 가운데 펼쳐지게 된다. 이괄의 군대는 이미 실력을 보인 항왜들을 앞세웠고, 북방에 배치되었던 조선의 최고 정예 군단을 끌고 내려온 것이었으나, 이에 비해서 관군은 급조된 지방 병력인 데다 2천 명밖에 안 되는 등 전력이 딸렸기에, 선봉을 맡은 선천 부사 김경운이 전사하고 토벌군 전체까지 궤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정충신이 높은 곳에 견고한 진지를 확보해 놓았기에 이괄 군은 진격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고, 점심을 먹기 전에 끝내겠다던 생각과는 달리 전투는 2시각(4시간)이 지난 사시(9~11시)까지 지속되어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는다.[31]
그런데 하필 이괄의 진영으로 엄청난 돌풍이 불었고, 이 틈을 타 관군이 (이괄군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하려고) 고춧가루를 살포하는 화학전을 걸면서 전세는 이괄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운다. 돌풍에 이괄의 군기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자꾸 기우는가 하면 부장인 한명련이 화살에 맞아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하는데, 때마침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이양이란 군관이 탄환에 맞아죽자 남이흥이 기지를 발휘해 "'''어익후 한명련이 죽었네? 늬들 다 엿됐다! 이괄이 도망친다!'''" 라고 외쳤고 화학전 상황이라 눈이 보이지 않던 이괄의 군대는 그 소리를 듣고 '''헐 우리가 정말로 졌나''' 하면서 모랄빵이 나[32] 이괄 등의 명령도 무시하고 전부 도망가서 와해되고 만다. 여기서 패병 400여 급의 머리를 베고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괄 측은 숫자·숙련도·사기까지 절대적으로 우세했으므로 더 공세를 퍼부었으면 정충신의 군대는 패배했을 것이고, 관군의 본대를 이끌었던 도원수 장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관군 입장에선 말 그대로 기적같은 역전승이었다.[33] 반군은 죽음을 면할 겨를이 없어 민가에 달아나 숨기도 하고 마포 서강으로 달아나 강물에 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
성벽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성 주민들은 이괄 군이 패배하자 서대문을 지키던 이괄 군을 몰아낸 다음 '''성문을 걸어 잠가버렸고'''[34] 결국 이괄 군은 성을 뺑 돌아 남대문으로 겨우 입성하지만 지킬 병력이 없어서 한성에서 물러나게 된다.[35] 사기가 오른 관군이 이괄을 추격하러 했으나 남이흥·정충신이 궁지에 몰린 적은 쫓으면 안 된다고 극구 말리며 '''이괄의 목은 앉아서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 관군은 추격을 멈춘다.[36]
4. 결말
결국 이괄은 예상대로 경기도 광주에서 도주 중 밤중에 잠을 자다가 부하 장수이던 기익헌·이수백에게 배신당해 한명련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둘은 참수를 면하고 유배되었으며 기익헌은 7년 뒤 유배가 풀려 하위 군관으로 평생을 잘 살았던 반면에, 마탄 전투 막바지에 관군 8대장의 목을 베어 보내게 한 모략을 꾸민 장본인이었던 이수백은 유배로 풀려난지 몇 해 안 있어(실록에 의하면 이괄의 난이 끝난지 10년 후) 희생양으로 죽은 이중로·박영신의 아들들인 이문웅(李文雄)·이문위(李文偉)·박지병(朴之屛)·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藩)에게 대낮에 끔살당했다.[37] 이들 형제는 이수백의 목을 자른 뒤 대궐을 찾아가 자수하는데[38] 이에 대한 처벌을 놓고 비록 역적이었다곤 하나 이미 왕이 용서를 해주었는데도 사적인 복수를 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수백은 수절하는 과부를 모욕하고 겁탈한다든지 거리에서 행패를 부려 민심도 나빴고, 정작 이수백이 5명에게 끔살당하자 주위 반응은 '고놈 당해도 싸다'라는 분위기라서 안습… 삼정승은 이수백이 역적이라는 점과 효도라는 가치관을 들어 용서해줄 것을 청했으나 인조는 거부하며 법 기강 확립을 들어 처벌할 것을 명했다. 다만 부친들이 충신이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이씨 형제는 익산·전주에, 박씨 형제는 창평·의성에 유배보내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지리 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부분 햇빛 잘 받고, 밥 잘 먹을 수 있는 평야 곡창 지대다. 대부분의 유배지가 섬이나 산골 마을이라 밥은 커녕 수수깡이나 배불리 먹을까말까한 척박한 곳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강제 이사 수준이다.
이괄의 아내 예이와 며느리 계이는 마탄 전투가 있던 시점에 빡친 인조의 명령으로 칼이 채워진 채 연행당한 후 모두 참수되어 효수당했다. 이괄이 승승장구하던 시점인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에 입성한 만큼 거리에 매달린 이들의 수급을 봤을 이괄의 입장에서는 참 암담했을 듯… 물론 이괄 본인도 마탄 전투에서 충성파 장수들의 목을 베는 짓거리를 했으니 별로 불쌍할 것은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이괄 이야기지 역적의 식솔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이 잘린 여자들 얘기는 아니다. 게다가 역적의 일가라고 해도 여자는 죽이지 않는 것이 조선의 법이었고, 사육신의 식솔들도 여자는 노비는 되었을지언정 참형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인조의 조치는 상당한 폭거가 맞다.
이괄의 난으로 북방의 정예 부대와 임진왜란 때부터 유지되었던 명장들은 패가 갈려서 와해되었고,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 등 이괄 밑에 있던 장수들은 후금으로 도망가서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겼다. 여진족을 상대해야 할 관서군의 기병 상당수가 이 난으로 인해 사라져버려 조선은 전투다운 전투를 할 수 없었고, 도망친 이들이 '''이괄의 난 진격 루트를 그대로 알려주는''' 바람에 청군은 이전의 어떤 침략군보다 빠르게 내려와 왕을 붙잡아버린다. 이괄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던 흥안군 이제는 대역죄로 심기원에게 참수당하는데 흥안군이 참수당할 때 억울하다고 외치며 심기원에게 "네놈도 억울한 대역죄로 죽을 것이다!" 라고 저주했다는 야사까지 전해진다. 허나 흥안군은 이괄의 난 초기부터 내통했다는 기록이 많으며 인조를 호종하다가 중간에 달아나 한강을 도로 건너서 이괄과 합류했다.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그냥 배신자 맞다. 200여 년 뒤인 고종 초기(1871년)에 복권되었다가 30년 뒤인 1900년에 도로 복권이 취소된다. 근데 심기원은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세우는 역모를 모의하다가 소현세자가 왕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곤 인조와 소현세자를 모두 몰아내는 역모를 꾀하다 들켜서 이제의 말처럼 진짜로 능지처참을 당하는데, 자신의 처형에 관여한 김자점에게 '''너도 나와 같은 방법으로 죽게 될 거다'''라는 저주를 남긴다. 웃긴 건 김자점도 7년 뒤 아들들과 난을 꾸미다가 들키는 바람에 정말로 일가와 함께 처형당한다.
반란 당시 선봉에 선 항왜들이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발휘하자 동래에서 왜인 1천 명을 용병으로 사용하자라는 건의가 올라오니 다들 정신 없던 차에 좋다고 했으나 이원익이 "천 명보다 많이 보내면 어쩔 것이며, 그 왜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아는데?" 라고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당시 인조는 가도의 모문룡에게도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다급했는데 이괄의 항왜들은 무악재(안현)에서 섬멸당했다. 안현에서 살아남아 이괄과 함께 도망쳤던 항왜들은 왜관이 있는 경상도 쪽으로 도망쳤으나 그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같은 항왜 출신 장수 김충선이었다. 당시 김충선은 대구 우륵동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전란의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경상 감사의 명을 받아 자신을 따르는 항왜 25명과 조선인 포수 17명을 데리고 52세의 노구를 이끌고 추격전을 벌여 서아지를 비롯한 항왜들의 목을 베어 난을 마무리 짓는다. 다만 같은 항왜들을 처벌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김충선은 상으로 받은 벼슬과 토지를 극구 사양했고 억지로 떠받은 서아지의 토지조차 수어청에 반납하여 둔전으로 쓰게 했다(서아지와 김충선은 사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그런 사람을 직접 목 베었으니…). 심지어 13년 후 김충선은 다른 장교들이 은퇴할 나이에 다시 한 번 전쟁에 참가한다.
이 사건으로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 양화전(養和殿), 환경전(歡慶殿)이 불탔고, 춘추관 사고도 불타 전란 이후 복원한 조선왕조실록 5질 중 1질이 소실된다. 이후 조선이 존재하는 한 춘추관 사고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이괄의 형제들 중 첫째 형 이적의 첫째 아들 이로와 간성군수를 지낸 다섯째 동생 이돈, 호조정랑을 지낸 여섯째 동생 이수와 그 아들 이개동은 사형당했다. 둘째 형 이운의 손자 이복령은 어머니 류씨를 모시고 서산 해미로 달아났으며, 첫째 형 이적의 둘째 아들 이만세는 목숨을 잃은 형과는 다르게 제주도로 도주에 성공했다. 그나마 조정이 작정하고 도망가 천민을 자처한 자들까지 싸그리 죽이려 들지는 않아서 이괄의 아버지 이제의 후손들이 저 두명으로부터 이어지기는 했다. 이괄의 사촌이자 경기감사, 전라감사를 지낸 이구는 가까운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있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이후 사직하여 낙향한다). 연좌는 이괄과 그 형제들의 일가에만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5. 평가
반란의 전후 사정이 상당히 복잡해서 인조 대의 실책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일단, 광해군 중기의 대숙청에서 시작되었던 원한과 피바람이 해소되지 못했던 것, 그 외에도 단순한 1위 권력 다툼의 문제로만 보기 힘든 다양한 생존 문제들이 겹쳐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특정한 일부 서인들이 반란을 꾸몄다는 기존의 기술은 당시 시대 배경을 마음에 드는 것만 뽑아서 축약한 지나친 단순화이다. 재앙의 시작은 서인들이 이괄보다 능력과 충성심이 더 뛰어난 장수들을 제치고 검증이 충분히 되지 않았던 이괄에게 큰 책임과 권한을 맡긴 것이었다. 이때 서인들은 '''설마 누가 이득을 보겠다고 반란을 일으키겠어?''' 라고 심각하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정황이 여러 기록에서 드러난다.
이런 안일함의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광해군 통치 후반기 때는 이미 인재들이 광해군의 기분 따라 쓸려나가서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한 경각심을 가질 만한 '똑똑한' 정치 세력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서인들의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을 제외한 정치 세력들까지도 대부분 정리된 상황이었다. 여기서 이괄처럼 더 이상의 반란을 일으켜봐야 국가 멸망 테크가 현실화될뿐, 아무도 이득을 볼 수 없는 진짜 막장이 찾아올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합리적으로 따졌을 때''' 더 이상의 반란은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다.
광해군의 대숙청부터 시작된 피바람이 인조반정 이후에도 수습되지는 못하여, 쿠데타에 성공한 1등 공신들마저 생존을 걱정하며 도성에서 떠도는 소문들의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도 힘든 정보 혼란 상황이었고, 이괄은 광해군때 지적받은 성격적 결함과 부적절한 처신을 끝까지 고치지 않았으며, 인조는 그런 이괄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그 결과 반란의 방아쇠를 당겨버렸고, 이괄은 인조와 장만 등이 맡긴 신임과 막중한 사령관의 도의를 현실적으로 배반하여서, '''제각기 살아남기 위한 심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다만, 아주 옹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닌 게, 이괄이 난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아들'이 반역 혐의로 압송되게 된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불만이 있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중용도 되었고, 국방 의무도 성실히 잘 지키고 있었던 걸로 보아, 이 사건만 없었다면 반란까지 일으키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막중한 사령관의 도의를 져버렸다고는 하나, 당장 자신의 아들로 인해 짤없이 역모죄로 처형당할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이괄이 이기심이 심해서 그랬다고 하는 건 조금 심한 평가다. 저 상황에서 이괄한테 '반란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조정 말 따르라'는 건, 즉, '얌전히 조정으로 압송되어서 니 아들이랑 같이 목 잘려라.'고 하는 거랑 똑같은 소리다. 이 과정에서 이괄이 잘못한 게 있다면 아들 교육을 똑바로 못해서 역모에 말려들게 했다는 거지만, 이것도 당시 분위기로 보아 '모월 모일 이괄 아들내미가 불충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를 하더라.' 같은 카더라 통신에 불과했다는 게 정설이다. 현대 기준에서 생각하면 그런 걸로 압송까지 시키나 싶겠지만, 저 당시 조정 분위기는 해당 문단에서 전술한 대로 심히 서슬이 시퍼랬던지라 1등 공신들까지 목숨 장담 못하는 상황이었다.
내전이며 긍정적 사건은 아니지만 이괄의 난은 관련 기록이 실록과 승정원일기는 물론이고 이괄의 난 진압에 참전하거나 관련된 사람들의 증언이 담긴 문집 등에도 자세하게 남아 있어서 이 관련 기록들은 17세기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나 조선군의 전투 방식을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이괄을 홍경래와 동급으로 존경하다고도 한다. 이유는 썩은 나라를 빨리 망하게 만들어서라는 패기 넘치는 주장이다.
5.1. 이괄의 난과 호란 관련 논란
이괄의 난이 호란의 발발에 영향을 준 것은 주로 부정적인 영향이었다. 당장 후금을 방어할 북방의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는데, 후금 입장에선 100의 전력으로, 방어 준비도가 0인 적을 공격하는게 쉬울까? 아니면 방어 준비도가 20인 적을 공격하는게 쉬울까? 이괄의 난 이후 호란 때 조선군의 북방 방어 태세는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심지어 이괄의 난의 패잔병 일부는 후금에 항복해 그들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후금의 쾌속 진격에 기여한다.[39]
가장 중요한 점이 병자호란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닌 정묘호란이 먼저 벌어지고, 그 이후에 정묘호란을 통해서 얻은 이익으로 주변을 정리한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며 압도적인 군세를 선보인 것이었단 거다. 이괄의 난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는 후금에 대한 방비가 잘 되어있었고, 이것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정묘호란은 일어날 수 없었다.[40] 정묘호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후금은 물자 보충 및 주변의 세를 장악하는 등의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괄의 난에 의해 북방선이 없어지지 않았고 인조 정권 초기에 세운 로드맵이 작동되었다면 후금으로는 조선 침공이라는 모험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홍타이지도 정묘호란을 일으키기 전에 가능성이 있는지 의심하면서 망설였는데 이괄의 난 때 도주한 이들이 열성적으로 조선의 방비가 없다고 설득해 정묘호란을 부추겼다.
이괄의 난이 없었더라면 병자호란이 일어날 수 있게 한 정묘호란 자체가 없었기에 후금은 세력을 키우기도 보다 어려워졌을 것이고 물자 보충도 힘들어 더욱 고전했을 것이며, 병자호란 때와 같은 세력 규모를 얻어낼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이괄의 난이 그야말로 위기의 상황이던 후금에게 있어서 구원이던 셈이다.
즉: 만주의 식량난=>이괄의 난으로 망가진 조선을 쳐 식량을 탈취한다(정묘호란)=>조선의 식량을 먹고 명을 밀어낸다=>이자성의 난으로 만주의 방비가 줄어든 틈을 타 조선을 정복한다(병자호란)=>조선의 식량을 왕창 먹고 명을 친다... 식의 구도가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이괄의 난은 명나라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난과 더불어 후금의 청나라화를 가능케한 양대 삽질로 평가받고 있다.
명나라와 조선의 연이은 제 살 깎아먹기로 인해 소빙하기로 극도의 식량난에 시달리던 후금을 가사회생케 한 것이다. 만일 이 두 사건이 없었다면 과연 만주족의 청나라 건국은 커녕 만주 건주의 존속이나 보장받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만일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병자호란이 해볼만한 전쟁이었을 것이란 의견이 자주 보인다. 애초에 "병사들이 전투를 하지도 않고 붕괴 혹은 도주했다" 라는 기록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졸렬한 지방군을 이끌고 장렬히 싸운 관군 장수들이 너무 저평가당한 것이다. 덤으로 이괄 군이 수도를 휩쓸었다는 업적 자체도 인조반정에서 약점을 노출했던 광해군 시대의 군사 전략이 2년만에 다시 터진 문제에 가깝다. 사실상 인조 정권 초반의 실패는 광해군의 군사 배치와 같은 원인으로 인한 실패였는데, 이때의 군사 배치는 몇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북방이 무너지면 왕으로서는 더 이상의 전략을 준비할 여력이 없어 수정이 불가피함을 드러내게 된다.
편곤으로 무장한 기병대와 창검에 능숙한 항왜병과의 근접전에 크게 고전한 이괄의 난 때의 전훈을 반영해 기병 육성과 창검수 육성이 진행되었고(둘 다 광해군 때는 방기되었다)[41] 기존에 세운 방어계획을 수정해 임진강과 한강, 강화도를 중심으로한 수도권 방어로 수정해 중앙군영을 강화했다.
인조 시대의 평가를 죄다 부정하는 흐름이 있으나 오늘날 인조 정권에 대한 훈수는 대부분 인조 시대에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행했던 방법들이다. 농업 생산력의 복구를 통한 병력의 수효 증강이나 장기전 대비 면에서는 조선도 딱히 부족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괄의 난으로 인해, 관서의 사령탑이었던 장만과 정충신 세력을 뒷받침해 줄 정치 여론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점. 게다가 준비되지 않은 반란에 잔존 북인, 남인들이 성급히 호응했다가 쓸려나가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척화로 기울어진 조정의 여론은 후금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전쟁에 관한 논의에는 지지부진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귀, 최명길 등 소수의 상식인들이 이런저런 방책을 건의했지만, 김류를 비롯한 척화파들은[42] 그런 논의들을 모두 묵살했기 때문에, 결국 조선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6. 관련 인물
6.1. 이괄 군
- 이괄 - 주모자. 문서 참조.
- 김효신 - 후발대로 남겨두었으나 관군에 투항. 공을 세워 속죄하겠다며 전투 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장만이 이를 위장 투항으로 의심하여 전투에 기용하지 않았다. 결국 역모에 가담했다는 비난과 질책, 그리고 죄책감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 한명련 - 이괄 측근으로 있어 함께 엮여들어간 인물. 임진왜란부터 활약한 인물인데 이 사람도 정충신처럼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자신을 잡으러온 금부도사 일행을 죽이고 30여 기병을 이끌고 이괄에게 합류했다고도 하고 금부도사에게 붙잡혀 호송 중에 이괄에게 구호를 받아서 반란에 동참했다고도 한다. 한성 전투 도중에 부상을 받고 사망한 걸로 알려지면서, 관군의 기적적인 역전승의 원인이 되었다.
- 기익헌, 이수백 - 부장들. 패주한 이괄의 목을 베어 바친다. 위 항목에서 소개한대로, 이수백은 그야말로 인간 쓰레기(…).
- 한윤 - 한명련의 아들. 패잔병들을 이끌고 청으로 도망가서 호란을 일으키는 원흉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청나라에서 귀족이 된다. [43]
- 이윤서 - 이괄의 중군. 반란 초기 병력을 이끌고 이탈해 관군에 투항한다. 투항 후 반란에 동조했다는 죄책감에 자결한다.
- 안늑, 송립, 허전 - 이괄의 부하였으나 관군에 투항. 그러나 이들의 투항으로 혼선이 생겨 관군은 반군에 패배한다.
- 이수, 이충길, 이욱 - 이수는 이괄의 동생, 이욱은 김류에게 숙청된 이시언의 아들로 반군이 한양에 입성하자 합류한다.
6.2. 조정
- 인조 - 인조 재위기간 동안 이괄만큼 전폭적으로 믿어줬던 사람도 드물다. 그리고 그게 독이 되었다.
- 이귀 - 이괄에게 유달리 잔혹하고 비정한 태도를 보였다. 이귀의 저서인 묵재일기를 보면, 이괄이 정말로 역심을 품고 있다고 믿었던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격한 행보를 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묵재일기(默齋日記)-치역논변(治逆論辨) 묵재일기에 따르면, 이귀는 사람들이 고변에 대해 발표하기를 꺼리자 당장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국청의 추관들이 "증거가 없는 것이 무고(誣告) 같다."며 고변자들을 처형하려 하자 직접 나서서 이를 막았고, 조정에서 이괄은 두고 아들만 체포하기로 결정하자 "군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아들 잡혀가는 걸 그냥 지켜만 보겠는가. 일단 이괄을 체직해놓은 후에 조사하고, 결백이 밝혀지면 복직시키자."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반란이 터졌다고 한다. 묵재일기가 이귀 본인이 남긴 사적인 기록이라 신빙성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반란에 대한 고변이 들어오자 바로 "이괄을 국문하자."는 주장을 펼쳤다는 기록은 실록에도 남아있으므로, 묵재일기의 내용 역시 상당 부분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작 고변에 연루된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반란에 가담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 일단 국문을 통해 진위 여부부터 밝히자."면서 이괄을 대할 때와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이후로도 이괄의 난에 휘말려 처형당한 기자헌을 사약형으로 감해줌은 물론, 그의 신원에도 도움을 줬다.
- 김류 - 실록에 직접적으로 김류가 무엇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반란 고변이 있을 적에, 김류는 이괄을 두둔했다."는 양사의 간언이 있어, 이를 통해 당시 김류가 이괄을 옹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작 고변에 연루된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국문을 할 여유가 없다."면서[44] 모조리 처형시키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 인조반정 당시 계획이 누설되자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려 한 것이나, 병자호란 이전까지 척화를 주장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슬그머니 주화로 돌아서서는 척화파의 처벌에 앞장선 것 등의 행보를 감안하면, 이괄이 진짜로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두둔했던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두려워 입장을 급선회했던 것으로 보인다.
- 장만 - 도원수. 관군 총지휘관. 문인 출신. 행적을 보면 딱히 유능한 군인은 아니었지만, 반정공신이었기에, 당시 조선의 군사 활동을 총괄한 인물. 관서에 이괄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람도 바로 장만. 하지만 조기에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실패한다. 이괄의 난 과정에서는 자기 한계를 알고 처신했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병력을 전부 정충신에게 맡겨 실전을 치루게 하고, 자신은 후방에서 예비 전력을 편성하고 보급품을 마련하여 바로바로 정충신에게 보내주었다. 때문에 이때 장만을 가리켜 도원수는 군사 없는 장수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황주에서 정충신이 패전하고 조정에서 정충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자 오히려 패전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정충신을 감싸고 계속 이괄 군 추격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이원익 - 당시 영의정이자 전시 도체찰사. 쿠테타를 일으킨 인조 세력에게조차 필요한 인재로서 평가받은 내정의 1인자이다. 평안도의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던 건 선조 초에 전염병이 돌던 평안도 지방을 구제해내면서 평안도 백성들이 따랐기 때문이었다.[45] 이괄의 난에서는 김류 주도로 기자헌 등이 숙청되자, 공주에서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탄식했다고 한다.
- 흥안군 - 인조가 수원으로 도망갈 때, 이괄이 왕으로 옹립했다. 행실이 무척 나빴으나 인조가 감싸주던 인물인데, 이괄이 패하자 도주했으나 심기원에 의해 교살된다.
6.3. 관군
- 정충신 - 이괄의 난에서 관군 측의 진 주인공. 각 상황에서 예언자 수준의 기록을 남긴 인재다. 당대부터 고령, 질병, 정치적 요인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기록이 있었다.
- 남이흥 - 정충신과 함께 활약한 무관. 정충신이 철두철미하고 예리한 참모라면, 남이흥은 호탕하고 임기응변이 뛰어난 호걸이다. 황주 전투부터 정충신과 나란히 관군을 이끌어 관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안타깝게도 정묘호란 때 전사하여, 충장공 칭호를 받는다. 이전 문서에는 왠지 조정에서 이쁨을 받았다고 되어 있으나, 오히려 인조에게 직언을 했다가 보복성으로 제대로 된 군사 지원을 못 받고 폭약으로 자폭까지 했던 불행한 인물이다. 대신 명나라에서 그의 최후가 인상 깊었는지 그의 죽음을 기리기도 했다.
- 김충선 - 네임드 항왜 출신 명장. 대구 지방에 은거하여 잘 살고 있었으나, 이괄의 패잔병 토벌에 나서서 항왜들을 썰어버렸다. 그리고 병자호란까지 참전한다.
- 이중로, 이성부, 이시발, 이확 등 - 마탄 전투에서 대패. 앞의 두 명은 사망. 이확은 말의 피를 바르고 생존. 참고로 이중로는 사격술이 뛰어나 마탄 전투에서 이괄군 군관 7명을 조총으로 저격했다고 한다. 그래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이후 사망한 7명은 반란군에게 효수당하여 후대까지도 큰 문제가 되었다.
- 임회 - 패주하던 이괄을 막다가 역습으로 사망했다.
7. 관련 링크
8. 관련 서브 컬쳐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같은 야사를 다룬 서적에는 이괄의 평이 극과 극. 악역 같이 나온 장면이 많다. 가령 인조반정 직후 인조가 용상에 앉기 머뭇거리자, 뭐가 두려울 게 있겠냐면서 자기가 용상에 털썩 주저앉아 어그로를 산다거나, 벼슬에 불만이라는 점과 무작정 왕을 추대하고 군림했다든지 백성들이 이괄의 횡포가 싫어 한양 문을 열지 않았다고 나온다.[46] 하지만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이괄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인정하며, 무인임에도 시와 글 짓기에 능하며, 왕이 되기 전 인조의 성품을 테스트 하는 등 복합적인 인물로 나온다. 대체로 이괄이 악역이 된 계기를 만든 김류가 나쁜 놈이라는 분위기. MBC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안하무인으로 나온다.
네이버 웹툰에서 고일권이 연재하는 만화. 이괄의 난을 배경으로, 굉장히 좋은 고증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괄 미화 논란이 있는 편이다.
- 고금청담
[1] 한번에 3만이 집결한 적은 없고, 중간중간 이괄이 하나씩 부수고 내려온 관군 방어선의 병력 총합이 3만이었다.[2] 최대 500여 명까지 있었으리라 추산되지만, 실제로 기록된 건 120명이 전부다.[3] 권율도 1등 공신에 제수되는데 군공이 큰 몫을 하긴 했으나, 어쨌든 문과로 급제한 인물이라 급이 다르다.[4] 중종,인조반정을 통틀어 반정 1등공신에 오른 무신이 신윤무,박영문(중종반정),구굉,신경진(인조반정)이 있다. 이들은 중간에 영입된 이괄과 다르게 창립멤버였으며 신윤무,박영문은 반정군의 실질적인 무력을 담당했고(임사홍,신수근을 처단했다.) 구굉, 신경진은 왕실의 인척관계에 조선 양대 무반 명가인 능성 구씨와 평산 신씨라서 이괄과 처음부터 끗발이 달랐다. 그나마도 신윤무,박영문은 이괄처럼 불만을 품다가 고변당해 처단된다.[5] 이쪽은 더군다나 서인의 원로였던 윤두수의 아들이라 서인으로 이루어진 반정공신들 대다수가 그의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6] 중립 외교와 조선의 수비 태세에 있어 중요한 존재감을 차지하던 인물로서, 서인 측과 가깝기는 했으나 딱 잘라 서인이라고도 볼 수는 없는 다소 중립적인 인물이었다.[7] 역사적으로 봐도 총사령관 정도 돼서 직접 칼들고 지휘하기보다 부사령관을 앉혀놓고 지휘를 일임하는 식이 다수였다. 총사령관 정도면 조정에서 맡길 만한 노회한 관료나(귀주전투에서 강감찬. 일선 야전의 지휘는 부원수 강민첨이 담당.), 왕실의 혈통이였기에(안록산의 난때 당대종. 군지휘를 곽자의와 이광필이 맡았다.) 이들이 나서서 직접 지휘했다가 자칫 포로나 전사처리되면 전황이 불리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가령 임란 초창기때 류성룡이 도체찰사, 김명원이 도원수로 후방에서 전체적인 틀을 짜고, 일선 야전사령관인 이일,신립이나 부원수 신각이 나서서 실질적인 지휘를 담당하는 구조였는데 신립과 이일이 전사,패주하고 신각이 처형당하면서 졸지에 문신인 도원수 김명원이 지휘를 하는 바람에 그가 많은 비난을 받은 원인이 되었다.[8] 이전판에는 광해군 대에 없어진 병력을 인조반정 이후에 만들어냈다는 주장이 있으나 현실적으로 단 1년 만에 정예 1만을 육성하는 것도 쉽지 않다. 실제로 이괄의 난 이후 정묘호란까지 3년의 세월이 있었으나, 이괄의 난 시절의 병력을 육성하지는 못했다. 또한 광해군은 궁궐공사와 국방에는 막대한 투자를 했으며, 민생이 도탄에 빠져도 이 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훈련도감에서 국방경비에 병력을 추가 파병할 경우 궁궐호위가 힘들어진다는 상소까지 올라왔으나 묵살하고 국방에 인력을 배치했다.[9] 현실적인 판단도 작용하긴 했다. 광해군이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들의 목을 날린 대숙청부터 시작되었던 피바람이 인조반정으로 겨우 마무리되는 상황이라서, 이제는 반란을 일으켜봐야 새 정권을 세울 만큼의 정치 파벌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반정공신까지 된 인물이 또 반란을 일으키리라고 생각치 못한 것이다. 인조 이전의 조선사에서도 반정공신들이 불온한 말을 건네받는 일이 있었으나(신복의의 옥사) 그뿐이었고 '이과의 옥사'라는 사건이 있긴 했지만 주모자 이과는 원종공신에 불과했다. 그나마 유사한 게 있다면 정난공신 봉석주가 역모죄로 죽은 사례였는데, 이 사람은 연산군 때 복권되었으며 선조 때는 아예 시호까지 받았다. 그러니 인조는 아들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리면 수 차례 신뢰를 보여준 이괄이 자신의 뜻을 알고 순순히 따라와서 해명할 거라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10] 이괄의 난에서 김류의 잘못은 이런 숙청으로 백성들의 여론을 크게 악화시킨 점에 있다. 백성들도 눈과 귀가 있었으므로, 왕이 아무런 명분 없이 정적들을 몰살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또한 기자헌은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았고 사촌동생 기익헌이 이괄에 협력했기에 덩달아 피해를 입었지만 인조반정의 모토인 폐모살제에서 인목왕후 폐모론을 반대한 인물이였다. 기자헌의 죽음은 폐모론에 찬동한 이이첨을 죽였던 김류와 반정 세력의 행보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또한 이시언은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고 왜적과 싸운 전쟁 영웅인데, 이런 인물들을 내통죄로 죽였으니(게다가 이시언은 이전에 이 역모를 고변한 바 있었는데, 이게 그만 "사실 이시언도 가담했는데 의심받을까봐 고변한 거래요" 라는 역주장의 명분이 된다) 민심 이반은 자명한 일이었다.[11] 나중에 정충신의 관군이 이괄 군의 진격로를 따라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 길이 말 그대로 절벽을 타고 벼랑에 매달리는 엄청난 악조건이었다. 결국 추격군은 전부 녹다운되어 지쳐서 제 시간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만큼 인조가 이괄에게 맡긴 군대는 조선 최강의 강병이었고, 나머지 장수들이 이끌어야 했던 군대는 포졸 수준의 약한 병사들이었다는 뜻이다.[12] 이괄의 중군이었던 이윤서의 투항이 결정적이었다. 이윤서는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심복들과 이괄을 제거하려다가 실패, 대신 휘하에 이끄는 군 4천여 명을 해산시키고 장만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직후 죄책감을 느끼고 자결했다. 이윤서의 희생으로 그의 가문은 안위를 보전받았고 이윤서도 사후 공신에 추증된다.[13] 덕분에 이괄의 난 직후 장만은 책임지고 형식상 잠깐 백의종군하기도 한다.[14]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 해서 적진을 혼란케 하려는 이괄의 계략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당시 투항한 송립은 훗날 병자호란 때 왕을 보호해 남한산성으로 피난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 아니라 정2품 관직인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기 때문에 단순한 거짓 투항으로 보기 어렵다. 사후엔 장정(壯靖) 이라는 시호까지 받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히려 이괄 군에 거짓으로 동참했다가 기회를 엿봐서 휘하 병사들을 이끌어 투항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15] 투항병들을 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이라 착각한 관군이 스스로 와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16] 실제로, 정충신의 부대는 패배를 겪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괄을 꾸준히 추격한다. 마지막 날짜 기록을 보더라도, 이괄은 한양을 점령한 바로 다음날, 정충신이 밤중에 만들어놓은 진영에 싸움을 걸었다가 패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충신의 병사들이 황주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17] 병사들은 유닛이나 기계가 아니다. 이괄의 병사들이 국가의 이치에 대해 논하자 줄줄이 탈주하고 마지막 패배조차 이런 언급이 있는걸 볼 때 국가의 명분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다.[18] 실제로 2월 7일에 전라도 병마 절도사 이경직이, 2월 9일에 충청도 병마 절도사 이완이 병사를 이끌고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미 2월 7일에 관군이 마탄에서 대패하고 한양까지 한번에 뚫리는 바람에 구심점을 잃은 상황이었다.[19] 모자라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이괄 군 투항자들까지 그대로 뽑아 올릴 정도로 반란군에 비하면 숫자와 훈련도가 부족했다.[20] 황주 전투와 마찬가지로, 마탄의 수비군 자체가 이괄 군에 비하면 질과 양이 모두 빈약한 병력이라서 패배는 확정이었다. 하지만 마탄 전투는 황주 때와는 달리 관군이 전멸해버렸고, 죽은 장수들이 임진왜란부터 활약한 베테랑 장교들이자, 순수하게 국가의 위기 사태를 방지하겠다고 목숨을 바친 충신들이라서 굉장한 파장을 일으켰다.[21] 저격(狙撃)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격살은 총으로 저격해 죽였다는 의미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본 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변역한 조선 왕조 실록을 참조하고 있다.[22] 이 패전으로 이확은 죽을 고생을 하고 겨우 목숨만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괄 군과 내통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아 이를 해명하기 위해 고생했다. 그리고 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의 원수인 청 황제한테 절하고 왔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훗날 해명이 될 때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안습.[23] 이괄의 난에서 죽은 선전관이나 이괄의 처자식들과 함께 대표적인 비극으로 언급된다. 결국 충성파 장수들의 목을 베어서 욕보이는 계책을 냈던 이수백은 이후 그 장수들의 아들들에게 백주 대낮에 참살당한다. 같이 계책을 냈던 부장들과는 달리 죽어도 싼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24] 당연하게도 박효립의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으며 박효립 본인은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애초에 민병대만을 이끌었음을 생각해보면 좀 안타까운 죽음이다. 갖춰야할 것을 갖춰주지도 않고 처형한다는 것 자체가...[25] 이흥립은 본래 박승종과 인척 관계였다가 인조반정 때 슬그머니 참여해 공을 세운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이괄의 반란군에 투항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옥에서 자결하였다.[26] 이시언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무인이었으나, 김류가 내통을 우려해 기자헌과 함께 이괄의 일파로 몰아 억울하게 참살된다.[27] 정충신은 장만에게 이괄이 바로 추격하여 어가를 사로잡는다면 상책이고, 가덕도에 주둔 중인 모문룡과 합류한다면 중책이며, 한양에 머무른다면 하책이라고 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장만이 이 말을 했다고 하거나, 청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상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야사에 기록된 것이라서 그리 정확한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다. 다만 당시 군중이나 백성에서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8] 이괄의 반란군이 장만이 펼쳐놓은 포위망에 '''갇히기 전에''' 도망치듯이 한양으로 달려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미래가 없는 판단이었다. 물론 장만이 인정했듯이 관군 측에 이괄 군을 쫓아낼만한 정예 병력이 모자랐으며, 수도를 점령한다는 상징성 자체는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29] 인조는 폐모·살제를 주장하여 폐위하였다.[30] 지배 계급끼리의 전투를 일반 백성들이 남 일 보듯 구경했다는 사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발견된다.[31] 정충신은 유효걸(이순신의 부하인 유형의 아들)을 거느렸고 휘하에 남이흥과 변흡은 고개 안에서 진을 쳤으며, 김완(이순신 휘하의 장수와 동명이인)이 고개 서쪽을, 신경원과 이정이 고개 북쪽을 막고, 황익·안몽윤·최응일·이경정을 중견사(中堅使)로 삼고, 이확은 포수 100명을 거느리고 치마 바위에 주둔해 창의문 길목을 틀어막았다. 정충신이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의 종자임을 고려해보면 입지 선정을 잘 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 측의 명장이나 우수한 참모들이 죄다 달라붙었음에도 승리했던 전투를 권율 곁에서 함께 경험해본 인물이다.[32] 애초에 이괄이 데려온 정예 병사들은 이괄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같은 조선군과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이괄의 지휘 능력이 관군 지휘관들에게 압도적으로 이기는 입장이 아니라는 불안감이 현실화되자 더 이상 싸움을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33] 실록에서도 승장인 정충신이 "하늘이 도와 이겼다"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뒤집어서 보자면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서 진을 쳤던 정충신의 깡이나, 황주 전투에서부터 미약한 병력으로 이괄을 상대했던 관군 장수들의 용기도 대단했지만.[34] 관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 이괄 측이 고립되리라는 점은 한성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의 눈으로도 명확했을 것이므로, 이괄 일당과 한편으로 취급돼서 반역죄로 연좌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관군이 한성에 입성한 후에 무고하게 처형당한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이런 사람은 극히 일부여서 별로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35] 이후 한양에서는 '''이괄은 꽹괄이고 장만은 볼 만했네'''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이괄이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꽹과리를 쳤으나 당해낼 수 없었다'는 다른 어원도 있다.[36] 이 전투의 승리 자체가 정충신 등의 소수 특공 작전으로 기어이 만들어낸 기적이었으니 이게 옳은 판단이었다. 이후에 이괄을 막던 부사 임회(송강 정철의 사위)는 잔당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37] 《성호사설》 제17권 〈이문웅〉 편을 보면 이 형제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말 그대로 영화같은 일까지 벌였는데, 어엿한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비로 위장하여 가짜 노비 문서까지 만들었으며 이수백의 이웃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심지어는 이수백의 집 여종과 위장 결혼까지 하여 이수백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하나 추적했다.[38] 조선은 특히 효(孝)를 가장 중한 가치로 삼은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만큼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보복에 대해선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인조실록》 권29 12년 3월 13일 기해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203013_002[39] 6.25 당시의 상황으로 예시를 들면 북한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남침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당시 경기도 지방을 방어하던 1사단과 7사단이 쿠데타로 인해 증발해 수도 사단 혼자서 북한군 대부분을 막아야 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12.12 군사반란 당시 노태우가 가장 욕을 먹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전방 9사단의 병력 일부를 빼돌리는 미친 짓을 저질렀기 때문. 만약 북에서 이 움직임을 알고 무력 도발이나 더 나아가 남침을 했다면 그야말로 남한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드라마 5공화국에도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입을 빌어 '설마 (노태우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은 안하겠지?'라고 비난한다.[40] 정묘호란의 초창기 군세는 3만이고, 그마저도 오래 유지하기 벅찼기에 강화를 맺고 급히 돌아가야했다.[41] 광해군의 후금 대비라는게 모순적이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군사력을 키운다면서 그 군사력을 감당할 내정은 개판치고, 외교에 신경쓴다면서 친명배금만 주장하는 북인 강경파로 조정을 가득 채우고, 기병 위주인 후금에 맞설 군사력이라면서 기병과 살수는 내다버린채 조총병만 육성하고, 조총을 그렇게 중시하면서 인경궁에 올릴 청기와 만든다며 화약을 낭비하는 모순의 상황의 연속이었다. 조총병만 육성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쌍령 전투를 보면 알 수 있다.[42] 흔히 김류는 주화파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전쟁 이전까지 척화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나마 대국 보는 눈은 있었는지 병자호란이 본격화되고 조선군이 청군과 맞서는 족족 깨지는 걸 보자마자 곧바로 주화파로 돌아섰는데 그 덕택에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43]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에서는 유운이라는 인물이 청에 투항한 한윤을 암살한다는 결말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으며 한윤과 그 사촌 한택은 팔기군의 일원이 되어 건륭황제 때까지 기록을 남긴다. 그러나 정묘호란 때 한택은 열심히 조선인을 학살했으나 한윤은 비교적 그렇지 않아서, 이후 최명길 등이 그에게 다시 줄을 대 보자는 논의가 있기도 했다. 건륭제 시대 이후 그들의 자손에 대한 기록은 확실치 않다. [44] 이괄의 군세가 한양으로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다.[45] 실록의 표현을 옮기자면 평안도 백성들이 이원익의 말이라면 어버이처럼 따랐다고 한다.[46] 이괄이 한양에 도달할 당시에 백성들이 반군을 죄다 반겼다고 한다. 다만 이건 김류가 기자헌을 국문없이 처형하는 병크를 저질러서, 인조에 대한 여론이 '''인간 쓰레기''' 급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결국 관군에게 패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아마도 권세가들이 주축이 돼서) 한양 성문을 잠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