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교육인)
1. 생애
1918년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부터 1941년까지 김천보통학교[3] 훈도를 지냈으며, 1952년 대구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교감을 역임했다.
이후 효성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1972년 1월 1일부터 1979년 2월 20일까지 경북대학교 제6·7대 총장을 지냈다. 1994년 7월 29일 별세하였다.
2. 학술 활동
영문학자로서 『대학 영문법』, 『현대 영어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다.
3. 총장 재임기 행적
총장 재임 시절 시대적 분위기 등으로 말미암아 학생운동이 많았다. 1974년 10월 18일 오전 10시 20분경 경북대 학생 1천 여명이 교내에서 언론자유 보장 및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학생 석방과 김영희 총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11시 40분경 6백 여 명이 학교 남쪽 철조망을 뚫고 나와 학교에서 1km 지점인 동구 신암 육교 앞까지 진출했다가 12시 20분 경 경찰의 저지로 귀교했다. 이들은 귀교해서도 해산하지 않고 본관 앞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경북대 학생 4명이 무기정학 당하였는데 1974년 10월 31일 문리과대학 일부 교수들은 김영희 총장의 데모 주동 학생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1975년 2월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8명의 경북대 학생들이 석방되고 복학 조치되었다. 긴급조치위반으로 이광하(농대 원예과 4학년) 등 8명이 1974년 3~6월 사이에 제명처분을 당하였는데, 김영희 총장은 “이들 학생이 구제되기를 희망하며 정부 방침이 구제로 결정되면 현행학칙을 개정해 복학을 위한 합법절차를 갖추겠다.”고 밝혔다.
1975년 12월 29일 경북대학교 총장에 연임 발령남으로써 제7대 총장으로 연임되었으며, 1978년 6월, 이란 테헤란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세계대학총장회(IAUP) 제5차 대회에 참석하였다.
1978년 11월 2일에는 당시 학생이던 김사열 교수를 비롯해 학생 4명이 시계탑 앞에서 ‘반유신정권 성명서’를 낭독하다 경찰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당시 김영희 경북대 총장은 교수회의를 소집해 4명의 학생들을 제적시켰는데, 이를 계기로 제적 학생을 구제하기 위한 서명 운동이 전교생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급기야 11월 7일 오전부터 야외박물관과 시계탑으로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1만 여명의 본교생 중 8천여 명이 제적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들이 투입되었고, 격앙된 학생들은 최루탄을 쏘는 경찰을 무장해제 시키고 서문(현재 후문)을 통해 학교 밖으로 행진한 사건이 있었다.
임기를 2년 남겨두고 1979년 2월 12일 사의를 표한다. 어떤 연유로 사퇴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4. 경북대학교 기독센터 재건
김재진 교수(경상대학장 역임)의 건의에 따라서 경북대 기독학생회관(현 경북대 기독센터)을 재건하였다. 경북대 기독센터의 시초는 1955년 설립된 경대기독학생회관이다. 초대 총장인 고병간 총장의 후원으로 1955년 경북대 기독학생회관이 건립되고 22명이 입사하였다. 1977년 초기 기독학생회관이 경북대 종합계획으로 헐리게 되자, 기독인 교수 및 유지 일동들이 회관재건위원회를 발족하여 15개 교회와 교수 20여명, 회관 동문 및 학생 30여명, 기독실업인 및 일반 교인 15명의 헌금과 경북대 총장의 지원으로 1976년 5월에 착공하여 1977년 완공하였다.
5. 총장 퇴임 이후
1994년 7월 29일 오전 4시, 서울강남성모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6. 여담
- 1975년 12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이다.
- 이시형 前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학생처장 시절 학생 28명이 정학,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때 이시형 박사가 너무 화가 나서 총장실에 쳐들어가서 의자를 들고 집무실 유리창을 모두 깨버린 뒤 사표를 던졌다. 이 사건 1년 뒤, 김영희 총장은 서울에서 이시영 박사에게 "사과할 일이 있다면서 만나자"고 한다. 이시영 박사와 만난 자리에서 김영희 총장은 "이 교수, 그 때 창문을 좀 더 깨지 그랬어. 총장실 밖에서 창문이 깨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난 속으로 야, 이 학교에 교수 같은 교수가 있긴 있구나 싶어서 통쾌했거든"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서울로 간 1년 동안 사표를 수리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