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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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사, 의학 교수, 경북대학교 1,2대 총장,연세대학교 2대 총장 대한결핵협회 2대 회장, 숭실대학교 3대 학장.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병간은 1899년 12월 24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마룡동에서 부친 고승환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의주 신영소학교를 졸업하고 선천 신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렸을 때 말수가 적었고 국가에 관한 관념과 민족의식이 투철했다고 하며, 진실한 성격으로 공부에 열중해 성적은 늘 동기보다 앞섰다고 한다. 또한 기독교 교리에도 충실해 신성중학교를 운영하는 선교사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919년 2월 27일, 당시 20세였던 고병간은 신성중학교 4학년생으로 동창 3명과 함께 김지웅 선생에게 초대받았다. 김지웅 선생은 그에게 도쿄에 유학간 조선인 학생들이 2.8 독립 선언 문서와 1월 28일에 게재한 <매일신보> 번역문 및 베이징 영자신문 번역문을 등사하라고 부탁했다. 이에 그는 <조선독립선언서> 및 태극기 약 500매를 등사했다. 이후 3월 1일 홍성익 선생이 신성중학교 학생들을 모아놓고 독립의 취지를 설명하는 연설을 한 뒤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종이 위에 ‘조선독립’이라고 혈서를 썼고, 오후 1시 신성중학교 학생 150명과 보성여학교 학생 6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갔다. 고병간 역시 그들과 함께 했고 천만동 시장에서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거리를 행진하며 경찰, 헌병대와 맞서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상고했지만 1919년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가을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신성중학교 5학년에 복학했고 이듬해 졸업했다. 그리고 1921년 3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에도 신앙 생활은 물론 교우 관계나 학업에 있어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내 교수들에게 두터운 총애를 받았다. 1926년 26세 때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그는 학교에 남아 외과교실의 러들러 교수 밑에서 2년간 공부하고 일반외과를 졸업했다. 이후 1927년 8월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기독교계의 제혜병원 외과과장으로 부임했다.
고병간은 제혜병원에 8년간 근무했고 함흥제일교회 장로로도 재직했다. 1934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의 흉부외과교실에서 폐결핵의 외과적 요법에 대해 연구했고 <고환(睾丸) 내 항체발생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해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7년 4월 오긍선(吳兢善) 교장의 권고로 모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외과교수로 취임해 흉부외과를 새로 개설하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계획은 난관에 부딪쳤다. 게다가 미국과 일본간에 전운이 감돌고 교수로 와 있던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모두 철수하면서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세브란스 의학전문대학 교수로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8.15 광복 후, 고병간은 대구의학전문학교(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장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그는 대구의과대학으로 개명된 학교에서 흉부외과를 개설하고 흉부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항상 정도를 가려는 진지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옳다고 생각하면 그 소신을 결코 굽히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고불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대구의과대학 교장으로서 의대부속병원 뿐만 아니라 국립마산요양원과 마산교통요양원과도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폐결핵 환자의 외과수술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1948년 10월 6일, 고병간은 국립마산요양원의 문창모(文昌模) 원장의 요청으로 직접 그곳으로 출장가서 세브란스 외과에서 파견된 유승화(劉承華) 교수를 조수로 두고 광복 후 한국 최초의 흉곽성형술을 시행했다. 그리고 1949년 5월 5일에는 대구의과대학병원에서 한국 최초의 전폐적출술을 시행했다. 당시 수술은 전신마취기가 없어서 국소마취로 실시될 만큼 매우 열악했지만,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후 마산에 있는 국립요양원과 교통요양원에 출장해서 30회 이상 수술을 시행했는데, 대부분의 환자들이 수술 후 무사히 회복되었다. 그 결과 흉부 외과수술은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그의 지도를 받으며 수술에 참여했던 유승화 교수와 국립마산요양원의 이완영(李玩永), 대구의과대학의 이성행(李聖行)은 고병간의 뒤를 이어 한국 흉부외과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했다.
고병간은 1951년 문교부차관에 임명되었으며, 1952년 경북대학교 초대 총장 및 의과대학 학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1953년 대한외과학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같은 해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6개월간 미국의 대학 및 의료제도를 시찰했다. 1954년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 메노나이트 재단 이사장에 추대되었고, 대한결핵협회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와 계명대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했다. 1957년 경북대학교 2대 총장에 재선되었지만 4.19 혁명 이후 사임하고 1960년 9월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해 이듬해 9월까지 재직했다. 총장 사임 후에는 세브란스병원장으로 가서 병원 발전에 헌신했고, 1964년 5월에는 숭실대학 요청으로 학장으로 부임해 대학 행정과 운영의 경험을 살려 종합대학교로 발전시킬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1966년 12월 9일 문교부에서 개최된 전국대학총학장회의 석상에서 연설 도중 뇌일혈로 졸도했고, 곧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았지만 이틀 후인 12월 11일에 순직했다. 향년 67세. 그는 1954년에 결핵퇴치사업 공로자로 표창을 받았으며, 1958년에는 경북향토문화상을 수상했다. 순직 이듬해인 1967년에 경북대학교 개교기념일을 기해 경북대학교 본부 정원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고병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에는 본적이 평안북도 의주군 '췌면 마체동'(膵面 麻體洞)이라고 되어 있는데,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을 보면 의주군에는 췌면도, 마체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월화면(月華面)이 있어 월화면의 '월화'(月華)를 췌(膵)로 잘못 읽은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다. 또한 월화면에는 마체동이 없고 다만 마(麻)로 시작하는 동으로 마룡동(麻龍洞)과 마흥동(麻興洞)이 존재한다. 이 중 마룡동의 룡(龍)이 마체동의 체(體)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마룡동으로 비정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