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김씨

 


'''청도 김씨(淸道 金氏)'''
'''관향'''
경상북도 청도군
'''시조'''
김지대(金之岱)
'''집성촌'''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인산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일원,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인구(2015년)'''
91,293명 (99위)
'''주요인물'''
김선장, 김한귀, 김점, 숙공궁주, 김봉상, 김난상, 김희방, 김정호(지리학자), 김윤정, 김동휘, 김재영, 김석규, 김호복, 김경진, 김기수, 김영희
1. 개요
2. 역사
3. 본관 연혁


1. 개요


청도 김씨(淸道 金氏)는 경상북도 청도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2. 역사


시조 김지대(金之岱)(1190~1266)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초휘(初諱)가 김중룡(金仲龍)으로 문과 급제 후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내고 영헌공(英憲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아버지는 고려 때 시중(侍中, 종1품)을 지낸 김여흥(金余興)이다.
고려 고종과 원종대(元宗代)의 명신(名臣)으로 1218년(고종 5) 거란족이 쳐들어 왔을 때 29세의 나이로 군문에 입영하여, 원수(元帥) 조충을 따라 출정했다. 당시 병사들은 방패머리에 기이한 그림을 그려넣곤 했는데 그는 충효쌍수(忠孝雙修)라는 순두시(楯頭詩)를 써넣고 전투에 임하였으며, 큰 공을 세우고 이듬해 3월에 개선(凱旋)했다.
전장에서 개선해 돌아오면서, 바로 5월에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해 전주사록(全州司錄)의 보임(補任)을 받았다. 이어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에 제배(除拜)되었으며, 그 후 진주목사(晉州牧使)를 했다. 1240년(고종 27)에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정3품)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승려 만전(萬全)의 횡포가 심해 지방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음에 공은 만전을 과감히 단죄했다. 만전은 당시 권력의 핵심인물인 최충헌의 손자로 감히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였으나 공은 개의치 않고 양민을 위해 그의 죄상을 엄정하게 다스렸다.
1243년(고종 30) 비서소감(秘書少監,종4품,비서성에 소속된 관직으로 비서감 다음의 고위관직)으로 몽고를 방문하는 사신의 임무를 수행했고, 1247년(고종 34)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1255년(고종 42)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정3품)로 과거시험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역임했으며, 1258년(고종 45) 북변에 몽고군이 침입하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정3품)로 승진하여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使)를 겸직, 몽고군을 격퇴하고 민심을 잘 다스려 서북 40여 성을 안정시킨 공훈으로 오산(鰲山:청도의 옛 이름)군(君)에 책봉되었다.
시조 김지대가 군호를 받았기에 청도 김씨 본관은 종중(宗中)이 만든 것이 아니라, 나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로부터 본관을 받은 성씨는 그렇게 많지 않다.
시조 김지대는 원종(고려)이 즉위한 1260년 12월에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시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1261년(원종 2)에 수태부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1266년(원종 7년) 음력 2월 계사일(癸巳日)에 향년 77세로 운명했는데 앉은 상태로 운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후 나라에서는 영헌공(英憲公)의 시호를 내렸다.
시조 김지대의 행장은 정인지의 「고려사」, 김종서의「고려사절요」, 서거정의「동국통감」등에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고증이 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명신으로 청렴결백한 청백리이며 공명정대하게 정사를 수행했던 재상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한 시조는 고려시대 10대 시인에 꼽히는데, 조선 성종 때 대학자인 서거정이 저술한 동문선(東文選)에도 시조의 시가 여러편 실려있을 정도로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시조의 후손들은 청도(淸道)를 관향으로 삼아 그곳에 살면서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명문으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경북 청도군 청도읍 대현상동에 있다. 시조 묘소는 본인이 사관(賜貫)을 받은 땅에 있는 예가 드문데, 청도 김씨는 관향에 유택을 갖고 700년 넘게 내려왔다.

3. 본관 연혁


청도(淸道)는 경상북도 남쪽 중앙에 위치한 지역으로 선사시대에는 이서소국(伊西小國)의 땅이었으나 신라 유리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다가 후에 구도성(仇刀城)의 경내 솔이산(率伊山)· 경산(驚山)·오도산(烏刀山)의 3성을 합하여 대성군(大城郡)을 두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에 구도를 오악현(烏岳縣)으로 개칭하였고, 경산을 형산현(荊山縣)으로, 솔이산을 소산현(蘇山縣) 으로 고쳐 밀성군(密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고려 태조 23) 오악·형산·소산현을 통폐합하여 청도군이라 하였다가 밀성군에 속하게 하였다. 1109년(예종 4) 감무를 두었고, 충혜왕 때 이 고을 사람 김선장(金善莊)의 공로로 청도군이 되었다가 곧 다시 감무가 파견되었다. 1366년 (공민왕 15) 청도군이 되었다. 1405년(태종 5) 10도제 실시로 경상도 청도군이 되었다가 태종 때 좌우도로 분할할 때 경상좌도에 속하였다. 1413년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대구도호부에 속하였고, 1433년(세종 15) 다시 밀양도호부로 환원하였다가 1458년(세조 4) 대구진에 속하였다. 1832년 (순조 32) 상읍내·차읍내·내서면·외서면·내종도·상북·차북·하남·상남·외종도·적암· 중동·동일위·동이위 등 14개 면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청도군이 되었고, 1896년경상북도 청도군이 되었다. 1906년(광무제 10) 대구군(大邱郡) 각북면(角北面)· 현내면(縣內面)·각이동면(角二洞面: 풍각면) 및 각초면(角初面: 각남면)을 편입하였으며, 1979년에 청도군청이 화양면으로 이전하면서 화양면이 화양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화양· 청도읍과 각남·풍각·각북·이서·운문·금천·매전면의 2읍 7면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