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룡

 



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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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
1922.8.24~1993.11.14
대한민국의 고고미술사학자로서,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학계의 태두이다.

2. 생애


1922년 8월 24일 평안북도 태천군에서 출생했다. 1929년 영변보통학교, 1931년 서울 혜화보통학교(전학), 193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0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문과)에 입학했다. 1942년 예과를 수료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로 진학하여 동양사를 전공했고, 1945년 졸업하여 문학사가 되었다.
해방 후 1947~1961년 국립박물관(舊 조선총독부 박물관, 現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승) 연구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김재원(독일 뮌헨대학 졸업) 박물관장과 함께 투톱으로 박물관을 이끌었다. 그러다 국립박물관이 1954년 당시 열악한 인력 사정에도 불구하고 장차 개설될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교수 자원이자 한국 고고학계를 이끌어갈 전문 고고학자로 만들기 위해 김원룡 연구과장을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미술사 전공)에 유학시키는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고, 이를 통해 김원룡은 1954~1957년 뉴욕에서 유학하며 알프레드 살모니(Alfred Salmony) 교수 지도하에『신라토기의 연구』(1960)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7년부터 1961년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했고,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고고미술사학과가 창설되며 최초의 전임교수로 부임하여 사실상 홀로 학과를 만들었고(링크) 이듬해인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으로 23년간(...) 장기집권하였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고 1958년부터 1992년까지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있었다. 1970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종신)이 되었다. 1971~1974년 한국고고학연구회 회장, 1976~1977년 고고학회 회장, 1979~1980년 역사학회 회장, 1985~198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다.
퇴임 후 1988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며서 1990~1993년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1993년 타계하였고,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되었다.

3. 평가


도유호가 북한에서 고고학을 이끌었다면, 이분은 남한의 고고학을 이끌었다. 다만 도유호와 달리 처음부터 고고학 전공이었던 게 아니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사학자였기 때문에 1957년 미국에 유학가서 고고학을 공부해야 했다. 당시 학문적 기반이 전무하다시피했던 한국 고고학의 여건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최대한의 발전을 일궈냈다.(정확히 말하면 대한민국 고고학의 기반은 사실상 이분이 만들었다. 물론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오류는 제자들이 알아서 까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오류들이 당시 너무나 적은 자료로 많은 것을 해석해야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구석기부터 통일신라까지 몇 명 되지 않는 학자들이 머리 싸매고 연구하며 다뤄야하니 오류가 나오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뿌려둔 씨앗은 싹이 트는 법으로, 고고학계의 논쟁거리 몇 가지는 여기서 발현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후회하는 일도 많아서 석장리 구석기 유적건[1]과 무령왕릉[2] 발굴에 대해 평생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한 분야씩 논문을 쓰도록 명했고 이 당시 제자들이 쓴 논문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아 물론 자신이 쓴 논문들도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긴 하다. 이분의 발굴 중 유명한 것은 무령왕릉 발굴과 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굴이 있으며 이외 업적으로는 한국 고고학 개설 3판에서 한국의 시대구분을 정립한 것도 포함된다.[3]
발굴 외에도 다방면의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고고학 개설, 한국고고학 연보 등 고고학 연구자들의 필독서를 남겼으며, 한국 미술사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미술사 연구, 한국미의 탐구, 한국문화의 기원 등의 한국의 미술사 관련 서적도 저술하였다. 괜히 서울대에 고고학과가 아니라 고고미술사학과가 개설 된 게 아니다.
김원룡의 작문 능력은 학술서 뿐만 아니라, 수필에서도 발휘되었다. 40대와 50대, 60대 인생여정을 엮은 수상록과 수필집을 60년대, 70년대, 80년대 각각 출판했는데, 40대 당시는 사회비판과 여러 지역 돌아다닌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50대는 영국 유학가서 고생한 것과 몸이 힘들어서 고생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60대는 인생에 있어 후회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게다가 수필을 보면 결국 자기가 하고 싶었던 즐문토기(빗살무늬 토기)편년도 하지 못했고, 자신이 만든 신라토기 편년의 오류는 결국 수정도 못했다.(물론 이쪽은 이후 신경철 선생님 등 영남지역 학자들이 많이 손 봤다. 다만 최병현 선생님 등이 와질토기론에 대해서 반발하는게 많아서리..)
이외에 문인화 등의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뭐 사람 인생이 자기 하고 싶은거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것만 하다 끝내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분은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거 못하고 어찌어찌 끌려다녀서 큰 실수도 몇 번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도 않는 선택도 여러 번 했다. 일례로 모어와 샘플에게 석장리 발굴 허용하지 않은 경우도 사실 민족주의 입장에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중동처럼 한국 고고학도 외국인들에게 끌려다니는 사태가 발생할까봐 어쩔 수 없이 외국인 발굴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는 약간 후회하는 듯한 말을 자신의 수필에 남기기도 했다.[4]
그래도 나름대로 한국 고고학의 기초를 세웠으니, 어찌보면 어느 분야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겪을 수 밖에 없는 한계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고고학계에서 말하는 김원룡선생의 비극 중 하나는 너무 넓은 범주에서 고고학을 다룬 것 이라고 한다. 논문을 찾아보면 알 수 있지만 선사부터 역사시대까지 거의 건드리지 않은 시기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오류도 어느 정도씩은 수반했고, 물론 그러한 넓은 저변의 연구가 한국 고고학계의 큰 발전으로 이어진건 사실이나 조금 범주를 좁혀 연구를 했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도 있다.
사족으로 제자들이 한국 고고학계의 거두가 된 경우가 많다.

[1] 이쪽은 고고학계 내의 정치적 문제와 연관 있으니 패스[2] 국내에서 유일하고 세계에서 드문 피장자 명칭이 명시되어 있는 왕릉급 무덤이다.(옆나라 닌토쿠 왕릉은 닌토쿠꺼 라고 써져있지는 않다.) 발굴 당시 박정희가 졸속발굴을 유도하였다고 봐도 될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역사학이 독재 정권의 필요에 의해 웅비사관적으로 바뀌고, 그 일환으로 눈에 띄는 유적이 나와서 무령왕릉 발굴에는 기자들이 접근금지선을 넘어 유물을 밟아대면서(구체적인 예로 숟가락이 부러졌다)취재, 아니 '''파괴'''하는 통에 극히 짧은 시간에 거의 도굴에 가까운 방식으로 유물을 빼냈다고 한다. 박정희는 여기서 나온 금제 유물을 서울로 올려서 직접 깨물어봤다는 유명한 일화는 잘못 알려진거고, 정확히는 삼불 김원룡이 1985년에 쓴 수필집인 하루하루와의 만남을 보면 왕비의 팔찌를 잡고 접었다 폈다하면서 "이게 순금인가?"하고 김원룡 선생에게 물었다고한다. 추가로 현재 무령왕릉 박물관이 공주에 위치하는데 당시 국박으로 유물을 옮기는 차량앞에 공주 시민들이 드러누워 반출할 수 없다고 시위를 했던 것이 유명하다.[3] 고고학계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원삼국-삼국시대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원삼국이라는 용어의 경우 사학계에서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 고고학 자료 상 청동기 시대 용어에 문제가 있어서 청동기 대신 무문토기 시대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4] 실제로 이렇게 석장리의 외국인 발굴을 금지시키고, 더 나아가 당시 빈포드가 주도했던 신고고학 또는 과정주의 고고학에 대한 비판 때문에 미국에서는 삼불 김원룡 선생이 국수주의자 또는 수꼴 같은 이미지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동삼동 패총 발굴로 캐나다에서 박사 학위를 딴 샘플은 이후 세계 고고학 학술대회에서 한국 고고학을 먼지가 되도록 깠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후 신고고학이 후기 과정주의 고고학에 의해 까일때 후기 과정주의 고고학자들의 주장과 김원룡 선생의 주장이 약간 비슷하다... 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