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지
1. 소개
金自知
1367년 ~ 1435년
여말선초의 문관. 이름이 매우 야하나 고려 중기 문관인 왕자지에 비하면 포스가 조금 모자란다. 참고로 호는 일계(逸溪), 자(字)는 원명(元明),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이다.
2. 생애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 건국 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랐으며 음양, 천문, 지리, 의약 분야에서 전문가이다. 이쯤이면 만능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조선 시대 때에는 세종 때까지 벼슬자리에 있었으며 한 때 판결을 잘못 내려 파직을 겪었으나 뒷날 재기용되었다. 태종, 세종 때 형조 참의, 형조 참판, 호조 참판, 형조 판서 등 제법 품계가 높은 벼슬에 여러 번 올랐다.
대사헌 재직 시에는 방자한 세도 공신들을 탄핵하러 5번이나 상소를 올려 당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거기에 준재에다가 박학한 학자였다고도 하니, 이쯤이면 교과서에 나올 법도 한 인물이지만 교과서에는 전혀 없어서 안습. 그 탓에 김자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1]
김자지 선생 묘는 양평에 있으며 현재 양평군 향토 유적 30호로 지정했다. 동생의 이름은 김여지로, 김자지와 같은 양평에 묘가 있다. 가족 묘로 조성해서 같은 곳에 모셨다. 사실 김자지 선생 형제의 이름 뜻을 새겨보면 나를 알고(自知) 너를 안다(汝知)는 꽤 멋진 댓구가 된다. 그리고 당시 知의 발음은 '디'였기 때문에 '김자디'로 거시기와는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근대 국어 시기에 대대적으로 발생한 구개음화로 이렇게 된 것. 조선 초의 문관으로 '''김보지'''라는 인물도 있다. 공교롭게 이 사람도 세종대왕 시대에 활동하여 시대적으로도 가깝다.
3. 그 외
아들만 9명이었다고 한다. [2]
중종 대의 권신으로 유명한 '''김안로'''가 김자지 선생의 직계 후손인데, 안 좋은 방향이기는 하지만 현대인에게는 김안로의 인지도가 넘사벽으로 높을 것이다. 김자지가 김안로의 고조부이므로, 김자지에게 있어 김안로는 현손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