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유억불

 

한자
崇儒抑佛
1. 개요
2. 배경
3. 억불 정책의 방법과 영향
4. 예외 사례
4.1. 태조
4.2. 세종
4.3. 세조
4.4. 예종
4.5. 중종
4.6. 명종
5. 반론
6. 평가
6.1. 긍정론
6.2. 부정론


1. 개요


억불 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 정책(排佛政策).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이다. 숭유(유교를 숭상함)라는 단어가 있지만, 포인트는 '''억불'''에 있음에 주의.
조선 초기 태조는 그 개인적으로는 불교에 매우 호의적인 사람이었지만[1] 건국 과정에서 급진적 개혁을 위해 기존 세력인 불교의 억불을 주장하는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았기에 조선 건국과 거의 동시에 하나하나 시행되었다. 2대 정종은 유교나 불교 같은 것에 큰 관심 없고 재위기간이 짧아 뭘 할 수가 없었다. 본격적인 억불정책은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2. 배경


삼국시대불교가 들어온 이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불교는 약 1천 년간 국교의 위치에 서서 정치권력과 관계가 깊었다. 지배계층이 불교의 교리에 자신을 끼워맞추어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라성골 왕실을 전륜성왕, 석가모니 가문과 동일시했다. 궁예견훤은 본인을 미륵과 동일시했고, 고려의 창업군주 왕건훈요 10조에서 불교의 입지를 대대로 공고히 하도록 못박아두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연등회 같은 불교행사를 국가적으로 치렀고, 수도에 궁궐보다 더 크고 높은 황룡사, 흥왕사 같은 거찰을 지었다.
일반인의 생활에도 불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영향력이 강했다. 예를 들어 조선 이전 장례에서는 화장(火葬)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2] 제사 음식도 절에서 차렸다.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도 말하는 것도 불교시대에 제사상에 차를 올리던 역사의 흔적이다. 조선시대부터 불교색을 빼기 위해 술을 대신 올렸지만 옛 이름은 남은 것이다.
조선 이전에도 김춘추[3]나 고려의 성종처럼 불교세를 누르고 유교적 정치를 추구한 군주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억불'은 조선의 억불과 비교하면 강도나 목적이 완전히 달랐다.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삼국~고려시대까지는 유불도 삼교가 융합된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이 주류였지, 이 중 어떤 것을 강압적으로 배제하려는 태도는 시대별로 강경한 일부 외에는 대세가 아니었다.
고려 때는 국가 종교가 불교라고 할 만큼 불교가 성행하고 불교의 권력도 강했는데, 이를 숭불호법(崇佛護法)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려 때는 초기부터 지눌 스님 등 많은 승려가 불교의 너무 큰 권력과 폐단을 막는 개혁을 계속 일으켰다. 고려 말기 불교는 원나라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원나라 공주가 시집와서 건축한 석탑 등, 소수의 불교 석탑에 티베트 불교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수선사 천태종 등 토착 불교의 세력이 강해서 티베트 불교가 전파되지 않았다.
고려 초기부터 불교는 귀족이나 지배층과 연계되어 막강한 교세를 누렸다. 고려 말기에는 사찰이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소작민들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고[4] 승려들이 권력을 부리거나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고려 초기 때부터 불교의 패단을 막으려던 지눌, 의천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세력이 강해졌다. 그래서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주장하고 불교를 억제하며, 불교계가 소유한 재산을 축소하려고 했다. 정도전이 '청렴해야 할 승려가 재산을 축내는 일이 많아졌다.'고 비판한 기록이 있다.
실제로 고려 말에는 총 1만3000개의 사찰이 있었고, 그 사찰에 20만여 결(結)의 토지와 10만여 노비 그리고 15만여 스님이 속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려 말 인구는 총 400만 정도, 경작 토지는 총 60만 결 정도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
이 때문에 조선의 신진사대부는 불교의 세력을 억제하여 불교가 가진 토지 등을 개혁하였다. 불교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필수적 절차인 것이었다. 무신정권의 최후의 승리자로 인정받는 최충헌이 왕이 아닌 권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기존의 '고려'라는 틀을 깰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동안의 왕조 변경은 분열된 나라들의 통합을 이룬 것이었다면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역성혁명은 특별한 명분이 없이는 그저 지배계층 내의 쿠데타일 뿐인지라 기존의 틀인 고려와는 확실히 달라야 함을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과거와의 결별의 목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강하게 펼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후 조선 후기 유림 세력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서원이 자기들이 그토록 비판한 고려 말 불교 사찰 모습과 똑같은 형태로 부패했다는 점이다. 결국 흥선대원군서원 47곳을 제외하고 죄다 쓸어버린 것도 선조인 태종이 몇몇 사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찰을 밀어버린 것과 흡사하다.

3. 억불 정책의 방법과 영향


아래는 여러 가지 사례를 언급한 것이다. 어떤 것은 여러 임금에 걸쳐 꾸준히 지속되었고, 어떤 것은 한 임금 때에만 시행하였다.
  • 산지로 사찰 강제 이전/도시 내 사찰 폐쇄
조선 이전에 은 산기슭만이 아니라, 지금의 성당이나 교회와 같이 도시의 길거리에 흔히 있는 시설이었다. 경주시에 있는 황룡사분황사니 사천왕사니 하는 큰 절 유적은 대부분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절들을 산중턱으로 보내면 접근성이 떨어져 자연히 신도가 줄고 시주도 줄어들어 규모가 쪼그라들고 세력확장이나 정치세력과 야합하기가 어려워진다.[5] 이렇게 남은 산사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의 불교와 다른 형태로 자리잡았고,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도 한국 특유의 산사가 형성된 과정을 설명하며 조선왕조가 도시사찰을 없애는 일 등 숭유억불 정책을 언급했다.#
도심지역 사찰 건물과 부지는 대개 향교로 재사용되었다. 고령향교나 부여향교의 건물에는 불교 특유의 연꽃 무늬가 새겨진 삼국시대 주춧돌이 쓰였다. 한편 승려의 신분이 낮아졌고 산에 산다는 이유로, 선비들이 행차할 때 산에서 잡일 일꾼이 필요하면 승려를 강제로 차출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금강산 등 명산을 유람하면 그 산에 있는 승려들을 가마중으로 차출해서 선비들이 앉은 가마를 어깨에 지고 산을 올랐다.[6]
  • 불교종파의 강제 통폐합
태종은 불교 종파를 11종단에서 7종단으로 줄였고, 세종대왕은 더 나아가 2종파로 줄였다. 본시 시초는 고려 광종 시절이고, 이후 고려 숙종 시절로 의천과 숙종이 주도했다.
  • 사찰의 숫자와 승려의 숫자를 강제로 줄이기. 태종은 전국에 242개 사원을 제외한 나머지 사찰을 폐지했다. 이는 고려 성종 시절 성종과 최승로가 첫 삽을 떴다. 단, 성종은 고려 왕 중 특별히 유교적인 케이스에 가까웠고, 팔관회 폐지 등은 2대를 못 가 현종이 되돌렸다.
  • 도성 내 절은 불태우거나 가정집 등으로 전환. 세종 대에는 조선 전국에 선종 18개소, 교종 18개소를 합쳐 총 36개 절만 인정하였다.
    • 승려들은 환속을 강요받았다. 초반기엔 도첩이 없는 승려에 한해 강제되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승려가 된 사람들이 속출한 것을 보면 가끔씩 한번 휘몰아치고 잊어버리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 과거 시험에서 승과를 폐지
승과는 중기 문정왕후가 다시 시행했다가 그가 죽자 다시 폐지되었다.
  • 사찰이 가진 모든 토지와 노비 등을 국유화. 승려들 보고 스스로 먹고 살라는 소리다.
  •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다른 억불정책이 오래 가지 않아 엎어지거나 완화된 것과 달리 이 정책만은 구한말에야 해제되었다. 오랜 억불정책 청산의 상징으로 불교계는 지금의 조계사를 조선시대 이래 처음으로 사대문 안에 창건했다.
  • 여성의 사찰 출입 금지
고려 말에는 1361년 어사대에서 '몇몇 승려 무리들이 과부나 외로운 여자를 꾀어 비구니로 만들고 음욕을 행하며 불사를 행한다.'고 주장하며 교정에 나섰다. 이후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써서 불교를 비판한다. 고려시대에 승려가 음욕을 행하려고 했다는 기록은 이것뿐이다.[7]
  • 승려를 양인이 아닌 천민으로 대우함.
  • 왕릉에 쓰일 혼유석(왕릉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돌) 운반을 승려들에게 맡김.
  • 도첩제
나중에 금승법으로 대체되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 국사(國師), 왕사(王師) 폐지
  • 사찰에 조상 제사 대행 금지
고려 시대에는 조상의 위패를 절에 맡겨서 제사를 대행시킨 경우가 많았다. 조선이 망한 후 현대에 들어 다시 절에 제사를 맡기는 경우도 늘었는데, 5만 원만 내면 대신 지내 준다고.
  • 국가적 불교 행사 폐지
팔관회는 건국되자마자 폐지되었고 연등회는 규모가 줄어들었다. 신라 때부터 열렸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 성종이 일시적으로 폐지한 적이 있었으나 이후 현종 시절 다시 부활해 고려시대 내내 번창했다. 두 행사는 고려 태조가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었다.
  • 면세 혜택 금지
지금으로 치면 종교인 과세와 비슷한 것인데, 조선 초에는 승려들이 조세는 물론 공물도 제공해야 했다. 정작 유생들은 오랜 기간 면세 혜택을 받아서 이후 호포법 등으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 사찰 재산 몰수
절을 부숴서 승려는 군인으로 바꾸고, 남은 땅은 향교에 붙이기도 했고, 절에 걸려있는 범종은 떼어내 녹여서 승자총통 등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에밀레종도 없애자는 여론이 있었지만, 이는 세종이 따로 지시해서 막았다.
[image]
국립경주박물관 경내에 소장 중인 삼국시대~남북국시대 불상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곤 모조리 모가지를 친 것을 볼 수 있다.
오래된 불상들 중에는 머리가 없거나 훼손된 것들이 있다. 그렇게 훼손된 불상 대부분은 조선 유학자들이 부순 듯하다. 지금까지 파괴된 채로 유물로 남은 사례로 남산 삼릉골 소재 불상군, 용장계 탑상골 용장사지 미륵장육상, 미륵골 보리사 석조여래좌상, 용장계 절골 약사여래좌상, 금강산 굴불사지 불상군, 분황사 경내 우물 속에서 발견된 목이 잘린 불상 20여 좌 등이 있다. 불상뿐 아니라 고승의 행적을 비석에 새겨 기록한 고승비와 그 고승비를 받치고 있던 거북 모양의 귀부 등 불교와 관련 있는 다른 문화재들도 조선 전기에 다수가 파괴되었다.
그 예시로 절은 유학자에게 파괴당하고 간신히 불상만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문화재로 지정된 울주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문서에서 조선 후기에 변질된 유학자들이 어떻게 사찰과 불교 문화재를 반달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자세하게 읽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의 목표는 교단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세력을 억압하고 교세를 강제로 축소하는 것이지, 부처의 가르침 자체를 금지하고 불교 신앙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뿌리뽑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진짜로 그럴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라면 금승법 정도. 내세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유교만으로는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모두 충족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불교에 대한 수요는 사라지지 않았다.
난잡해서 규율이고 뭐고 없는 토속신앙이였다면 모를까, 불교는 엄연히 체계와 규모를 갖춘 종교인 데다가, 조선 개국 시점에서도 민중에게 뿌리 내린 지 천 년에 가까웠기 때문에 완전히 없애기란 불가능했다. 불씨잡변을 쓴 정도전처럼 불교 혐오 성향이 짙은 강경파 사대부들도 그런 현실을 무시할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는데, 가령 태조가 무학대사를 왕사로 임명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간신앙으로서 불교는 접근성을 낮추는 간접적인 조치만 취하고 놓아두되, 교단에서 현실정치에 영향을 부릴 만한 힘은 빼앗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무엇보다도 불교와 지배층의 야합이 가장 경계되었고, 결국 사대부들과 관료들 사이에서는 불교를 멀리하고 불교를 맹렬히 공격할수록 개념인이라는 풍조가 정착했고, 경연이나 국가시책 회의에서 역대 왕조를 평가하면서 '이게 다 불교 때문'이란 식으로 책임을 돌리는 사례도 많았다. 특히 고려 왕조가 멸망한 이유가 하나도 둘도 불교였다는 건 거의 고정된 레퍼토리 수준.
또한 비록 불교신앙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으나, 혹세무민이나 기복신앙과는 담쌓고 부처의 가르침 자체를 가까이하는 사대부조차도 사대부답지 못하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율곡 이이 같은 당대의 거물 유학자도, 생전은 물론 사후 100년 가까이 지난 현종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때 절간에 들어가서 불경 좀 외우고 다녔다고 비난을 받았다.
정부 차원에서 억불을 행하기는 했어도, 그나마 한양이 지방보다는 덜 심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체로 왕은 불교를 그나마 옹호하려고 하고 성리학자 대신들이 주로 비판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태조 이성계조차 잠저 시절부터 독실한 불자였고, 효령대군 같이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왕족도 있었으며, 이후로 간간히 왕이나 왕실인사가 불교를 보호하는 경우가 잦았다. 정부에서도 두부 제조나 공사 등에 승려들을 동원했고, 동서활인원에서 일하는 이들도 노비와 승려였고, 매골승이라고 해서 한양과 성저십리에서 버려진 시체를 매장하는 것도 승려가 맡았다. 또한 유생들이 너무 승려들을 핍박하면 유생들을 처벌하기도 했고, 유생들이 절에 올라가서 행패를 부림을 알고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는 상서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풍조 속에서 지방 유생들이 개별적으로 회암사분황사 등의 절에 직접 테러를 가한 정황도 있다. 회암사 사례는 아래에 따로 서술했다. 분황사에선 근처 우물[8] 안에서 목이 잘린 불상 수십 좌가 나왔다. 불상은 비록 넘어지면 목이 쉽게 부러지는 구조이지만, 목 잘린 불상이 우물에 가득 쳐박혔음을 반 불교적인 사람들이 작정하고 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불상들은 건져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줄 세워 놓았다. 경주 남산에서도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의도적으로 파불(破佛)됐던 불상과 조각의 안면과 목을 다시 몸체에 붙여놓은 것을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509년에는 유생들이 청계사의 경첩을 훔치고, 1510년 3월에는 흥천사 5층 사리각을 방화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들은 일부 유교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한 듯하다. 조선 조정의 공식입장은 이 정도로 강경하지는 않았다. 또한 사찰에 이 짓을 하려다가 오히려 처벌받은 사례도 있다. 특히 아래에 나온 것처럼 왕실과 직접 연관된 사찰이나, 실록 보관 등 조정의 일을 맡은 사찰을 테러하면, 억불의 문제가 아니라 조정과 왕실에 도전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엄히 처벌했다.
임진왜란에서 불교계가 활약하면서 약간 억압이 완화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 예로 승려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삼국, 고려 시대에는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막 건국된 이성계 대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16세기 200여년 동안에는 억불정책에 의해 단 하나도 건립되지 못했는데, 임진왜란에서 활약해 광해군의 배려를 받은 유정대사를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세워져 19세기까지 170여 개가 세워졌다. 이는 인조대를 지나면서 왕실 후손 특히 아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적어진 것과도 연관이 있는데, 어떻게든 후사를 보아야겠기에 왕실 여성들이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왕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이후에 승려들이 승병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예비군 조직으로 편성되면서 예전처럼 마냥 억압되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의 경우는 아예 만년에 봉은사에서 머리 깎고 불교 수행을 하기도 했을 정도. 봉은사에는 오늘날에도 추사가 쓴 현판이 남아 전한다.
물론 억불이라고 해도 조선 후기에 들어온 천주교처럼 대놓고 박해한 건 아니다.[9][10]조선시대 동안 불교는 그럭저럭 명맥은 이었으나 숭유억불이 약 500년간 계속되면서 조선 말엽에는 한국 불교가 고사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불국사와 같이 조선 중기에는 전라도에서도 신도가 찾아가던 대찰이 다 무너져가는 상태로 사진이 찍혔다. 이 때쯤이면 제대로 구족계를 이어받은 승려도 나오기 힘들어졌다. 밀교 같은 소수 종파는 조선 중기까지 명맥을 잇다가 끝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갑오개혁을 전후해 억불정책이 끝나고, 천민 대우를 받았던 승려들이 서울을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억불정책은 일제강점기에도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불교가 친일을 행하게 된 것도 이 억불 정책의 잔재라는 해석이 있다. 오랫동안 한국 불교가 억압당했음을 알고 일제가 불교에 회유책을 폈고,[11] 불교계도 여기에 넘어가서 친일 성향이 강해졌다는 것.[12] 그 외에도 승려나 불교단체를 천시하는 풍습이 유교계에서 여전히 남아 있었다.

4. 예외 사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체로 왕은 불교를 나름대로 변호하려고 하고, 성리학자 대신들이 비판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즉 왕실은 불교계가 정치에 연관되지 않는한 온정적, 우호적이었던 편이다. 특히 어린 자녀를 잃은 왕은 대신들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자녀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일으키려는 시도도 종종 했다. 아무래도 국왕이나 왕비보다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둔 대비나 후궁, 공주, 옹주같은 왕실 여성들은 대놓고 불교를 믿는 경우가 많았다. 국왕도 이런 왕실 인사들의 불교 행사 참여를 비판하는 중신들에 맞서 변호를 한 경우가 많다.

4.1.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부터 원래 불교를 독실히 믿는 전형적인 고려인이었고 특히 무학대사를 '''왕사(王師)'''로 임명한 것이나[13] 그와 교류를 나눈 것을 보면 '''조선 최초(最初)이자 최고(最高)의 친불(親佛) 군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 국가 조선의 설계자이며 극렬 혐불주의자인 정도전조차도, 이성계에게 '왕위에 오르려면 불교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할 순 없었다. 그러나 신앙심과는 별개로 불교를 억눌러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상왕(上王)으로 물러났을 때에도 아들인 태종 이방원의 억불 정책에 반대하여 단식투쟁까지 하였을 만큼 불교에 매우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실제로 육식을 끊고 채식만 하자 태조의 건강을 염려한 태종이 육식을 권함에도 '주상이 불교를 탄압하지 않으면 고기를 먹겠소'라고 말해 태종의 불교탄압을 막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4.2. 세종


초기에는 태종의 억불정책을 계승하여 세종 6년(1424)에 불교 종단을 통폐합하여 선교 양종만 남겼고, 태종의 폐불정책 이후 전국에 남아 있던 사찰들을 다시 무너뜨려 오직 36개만 남겼다. 그리고 승려들의 도성 내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말년에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모후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 근처에 사찰을 지으려고 했으며, 차후 내불당을 설치하고 승려 신미대사를 총애하고 승과를 실시하는 등 상당한 친불 정책을 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처의 이야기를 석보상절로 낸 것을 보면 당시 백성들의 불교 신앙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은형 효령대군과 차녀 정의공주도 독실한 불자로 유명했다.

4.3. 세조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세종 대)에 이미 왕명을 따라 부처의 이야기를 《석보상절》이라는 책으로 냈다.[14]
불교를 옹호하는 발언을 많이 남겼는데, 몇 가지만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
  •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을 취하지 않겠다!"
왕자 시절의 발언인데, 이게 왕이 된 것마냥 한 발언이라서 문제가 되었다.
  •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
  •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 왕위에 오르기 전 사헌부에서 도첩[15]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권력에 대한 야심 표출이라는 해석이 있으며, 본인도 월권행위라는 걸 인식해 바로 다음날 해명서를 제출했다.
  • 원각사, 간경도감(불경을 간행하는 국가기관) 설립. 원각사를 짓기 위해서 집이 200채나 철거되고 많은 재물이 쓰였는데 그런데도 신하들은 "원각사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났습니다"라고 해야 했다. 한편 간경도감은 손자인 성종이 폐지해버린다,
  • 친필로 부처에게 봉안할 문서 작성

4.4. 예종


성종 때 도첩제 폐지 안이 나왔을 때 신하들이 "예종대왕께서도 불교 좋아했지만 명이 짧았습니다."라고 했는 걸로 보아, 불교를 신봉한 듯.

4.5. 중종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정현왕후의 숭불 정책에 대한 눈치를 많이 봤다. 사찰의 추가 건립 허가를 막기 위한 정책에서 정현왕후의 '''승낙부터 먼저 받았고''', 유생들이 사찰 훼손을 진행하는 사건때문에 조정에서 논란이 많았다.

4.6. 명종


중종의 중전이자 명종의 모친으로 아들의 즉위 당시에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가 불교 보호에 힘썼다.
본인도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금지했다.[16]
하지만 본인이 불교를 신봉했다기보다는 문정왕후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다물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문정왕후도 유서에 '왕이 친불교 정책에 반대하더라도 대신들은 나의 뜻에 따르라.'고 당부했다.

5. 반론



조선시대 불교 쇠퇴설은 대표적인 식민사학자 다카하시 도오루의 <이조불교>에서 확립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한 게 아니라는 연구가 나왔다.# 현존하는 사찰 대부분이 조선 후기에 중창·중수되었고 불서가 빈번히 간행되었으며, 수행 체계와 법통이 정립되고 강학이 성행하고 교학이 전수되는가 하면 사원 경제의 기반이 확대되고 염불 정토 신앙이 성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조선 불교의 쇠퇴론이나 멸절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한국 불교사에 관련하여 가장 학식이 깊은 손성필 교수도 2013년 <보조사상> 제40집에 게재한 '조선시대 승려 천인신분설의 재검토'에서 '조선시대 승려는 천인 신분이 아니었다. 승려 천인 신분설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직 정설은 아니며, 지금도 교과서에 실린 정설은 조선시대의 승려는 천인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전 삼국, 고려 때에 비해서 그 화려하고 창대했던 귀족적 세력과 지배층적 성격이 크게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특히나 돈줄이 되어 줄 수 있는 당대의 사대부 권력층이 워낙에 불교를 멀리하는 바람에.[17]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 불교나 승려 같은 단어를 검색하면, 불교를 공격하는 기사들이 한 트럭 쏟아진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많은 사찰이 중수됐지만, 폐허가 된 조선 후기 불국사의 경우 처럼 또 많은 사찰이 망해서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줄어들었지만 쇠퇴하지 않았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불국사는 삼국시대 이후로는 기록이 거의 없어 고려시대에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논란이 많으면 무엇보다 불국사의 기록상 첫 파괴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로 한 번 크게 불타 사라진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지금도 대웅전의 장대석 등을 살펴보면 당시 화재의 흔적이 남아있다.[18] 오히려 이후 조선 영조 41년(1765)에 불국사 대웅전이 다시 세워지고, 1779년 경주 지방 유림이 지원하여 중창하는 등(기사링크) 조선왕조와 선비들이 불국사를 재건하는데 노력한것을 보면 조선 후기에도 불교 탄압이 심했다는것은 과장일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일본 우익 세력 측에서 불교 탄압을 과장해서 승려들이 학살되고 불교문화가 크게 실전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9]

6. 평가



6.1. 긍정론


숭유억불의 실상이 무조건 정치적 보복 및 숙청 행위였다고 보기에는, 진짜로 불교가 저지른 폐단이 꽤 많았다.
고려시대 이전처럼 매년 국가 예산을 펑펑 들여서 팔관회를 열고 고래등 같은 절간에 화려한 가사 장삼을 두른 귀족 승려들이 활개치며 소작민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며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불교 본연의 시각에서 불교의 발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에서 센코쿠 시대까지의 오랜 폐단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싹쓸이를 시전했던 승병단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왕세자의 자리를 버리고 중생들 속으로 뛰어들어간 석가모니의 가르침 자체가 필요가 없고 불교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려 말에는 총 1만3000개의 사찰이 있었고, 그 사찰에 20만여 결(結)의 토지와 10만여 노비 그리고 15만여 스님이 속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려 말 인구는 총 400만 정도, 경작 토지는 총 60만 결 정도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 당연하지만 이러한 사찰의 비대화는 그에따른 커다란 부작용들을 초래하여 국가재정에 분명 큰 악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교가 말하는 윤회론은 불교 내에서도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실제로 부처가 이것을 말했는지 논란의 여지는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신자들끼리도 상좌부 불교대승불교간, 그리고 대승불교 내에서도 선종과 교종간 논란은 불교 신자들 사이에서 숱한 알력과 불신과 상처를 남길 정도였다. 선교 통합론이냐 아니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불교를 싫어하거나 안믿는 사람들 입장에선 밥그릇 싸움 그 자체이다.
후대의 입장에서는 유럽의 성당이나 일본의 사찰처럼 외국에 자랑할 수 있는 크고 화려한 문화재를 남겨주지 않아 비난하기도 하지만[20], 불교의 진정한 발전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파고들며 가련한 중생들의 번뇌를 얼마나 잘 달래주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번역에 문제가 생겼고, 계율에 의거하여 자질 없는 승려들을 쫓아내는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삼국시대나 발해와 신라, 고려는 이 부분에서 게을렀던 감이 많았다.
현재도 불교 탄압이 사라지고 오히려 기독교에 반감을 품고 불교에 호감을 품은 사람이 좀 늘어나면서 고려시대만큼은 아니라도 불교를 우대하자, 다시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져나왔다. 조계종 승려들이 범죄에 연루되어 불교 종단은 매우 엉망이 되었고, 이전에는 천성산 공사에 무리하게 반대하여 불교가 받는 지탄도 거세졌다. [21]

6.2. 부정론


불교 측에선 유학자들도 실은 불교를 믿었고 도교를 남몰래 믿고 좋아했다고 불교에 대해 폄하한 유학자들에 대해 높은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까기도 한다.
불교도 사실 고려 성종이나 최승로에 대해서 높은 평을 하기도 했는데 그들도 본시 불교 신자였고 최승로도 실은 절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김부식도 불교를 믿었고 정도전 역시도 승려와 접촉해 불교 지식이 꽤 높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을 했다. 다시 말해서 숭유억불은 불교 자체에서 불교의 업보라 인정했고, 그리고 동책정수에선 이런 점을 참작해서 불교를 미워하는 것은 좋으나 정치를 하는 유학자들이 유학자 노릇을 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다면서 깠다. 우리가 흔히 알던 유교는 이미 쇠락하여 그 유교의 장점들을 불교, 개신교, 천주교 3대 종교가 대부분 흡수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보면 숭유억불 자체도 초기면 모를까 중기나 후기에 이걸 적용하기란 무리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불교와 유교는 함께해왔고 조선왕조에서도 여러 민중들이 믿었기 때문에 일일이 다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조선의 억불정책과 비슷한 것을 찾자면,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가톨릭 박해와 소련의 러시아 정교 박해가 있을 것이다. 기존 종교의 도덕적 해이를 이유로 신흥 세력이 박해를 정당화했다는 점에서는 세 가지 사례가 겹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종교 박해에 대해서 "박해는 나쁜 것이 맞지만, 정황상 쉴드는 가능하다"는 투의 상황론적 변호는 있어도, 정말 막나가가자는 것이 아닌 이상, 정의로운 일이라고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결국 조선의 숭유억불의 경우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히 박해는 박해이고, 더군다나 그 지향점이 불교 쇄신 같은데 있는게 아니라 성리학적 반불교주의에 있었다. 또한 여말선초 불교는 지배층과 동의어가 아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을[22] 막론하고 퍼져있던 종교인데, 여기서 억불 정책을 마치 (피지배층과는 충돌하지 않으면서) 지배층만 쓸어버리는 개혁운동처럼 묘사할 이유가 없다. 구족계를 끊어버릴 정도의 억불은 종교 박해이지,기득권 대상의 개혁 운동이 아니다. 조선이 성리학적 건국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황론적 쉴드는 가능할 수 있으나, 정의롭다는 합리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외에 숭유억불은 훗날의 불교-유교 관계에도 악영향을 줬다. 특히 현각 스님이 한국 불교를 깔 때 유교적 상명하복이라 깐 것을 봐도, 불교계에서는 反유교 감정이 상당히 강하다.

[1] 일단 불교국교이던 고려 사람임을 차치하고서라도, 무인 출신이라서 별다른 공부 없이도 열심히만 살면 누구든지 부처가 되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불교(정확히는 선종)의 교리가 좋을 수 밖에 없었다.[2] 21세기에도 화장 비율이 늘긴 했지만, 조선시대부터 20세기까지는 매장이 대부분이었다. 고대부터 매장을 일삼았다면 지금 전국에 남는 땅이 없었을 것이다.[3] 김춘추가 사실상 실권을 쥐었던 진덕여왕 재위기 포함[4] 승려가 재산을 축내고 패단이 심했다는 것은 고려 초기부터 기록이 있다. 그래서 지눌 등이 수선사를 통해서 개혁하려고 했던 것.[5] 대신 승려들의 수행에는 도시보다 산 속이 오히려 도움이 되므로, 조용히 수행하고 싶은 승려들은 오히려 환영(?)했다고도 한다.[6] 정선의 회화 백천교에서도 이런 가마중이 나온다. 조선 조정에서는 선비들이 절에 올라가 행패를 부림을 좋지 않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산사금지령을 내렸으나 실효는 없었다.[7] 네이버지식백과[8] 경내에 있는 돌우물이 아니라, 분황사 북쪽 담에서 약 33 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신라 우물이다.[9] 가톨릭은 예의 그 전례 문제, 즉 '제사 허용' 여부를 놓고 유교 문화가 뿌리내린 조선에서 용납이 되기 어려웠고,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로는 아주 '''나라를 외세에 팔아먹으려는 역적'''으로 판이 박혀버렸다. 교황 비오 12세1939년 동양의 제사를 '동양 고유의 조상 공경 의식의 한 발로일 뿐 기독교 신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가 가톨릭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인지, '''가톨릭 신자들이 불교 사찰이나 암자를 예배 집회장으로 쓰는 경우도 많았다.''' 광주 천진암이나 여주 주어사 같은 곳이 대표적인데,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이곳을 가톨릭 성지로 기념하고 성지화 사업을 벌이지만, 가톨릭과 연이 깊다고는 해도 엄연히 불교 사찰이 있던 곳인지라 불교계에서는 이를 다소 껄끄러워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 [10] 이후 천주교는 조선 말기의 피를 뿌리는 박해에 이를 갈아 일제에게 적극 협력했다.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은 '''눈길을 걸어가''' 독립운동을 밀고해 105인 사건의 원인을 제공할 정도였다. 다만 불교와는 달리 천주교의 주교들은 대부분 외국인, 특히 유럽인들이라 조선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고, 제국주의 시대라 같은 열강인 일본에게 우호적인 것도 있었다.[11] 물론 이는 불교를 아직 깊게 신봉하던 일본의 문화적인 이유 또한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친일파를 늘리려는 정치적인 이유 또한 있었다.[12] 물론 백용성이나 한용운처럼 적극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나서거나 만공처럼 조선불교의 일본화를 비판하며 조선 고유의 불교를 지키려 한 승려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13] 이로써 무학은 조선 시대에 왕사 칭호를 받은 유일한 사례가 된다.[14] 흔히 세조의 불교 애호를 조카에 대한 죄책감으로 해석하는데, 석보상절에서 보다시피 세조는 계유정난 이전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왕명에 따른 것이라고 하나, 세종이 굳이 당대의 명신들을 놔두고 수양에게 편찬을 맡겠겠는가?[15] 조정에서 승려들에게 발부한 면허증. 현대로 치면 자격증으로, 도첩이 없는 승려는 야매라는 뜻이므로 국가가 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도첩제는 고려 말기의 부패한 절들을 목격한 태조 때 도입하였으나 성리학의 화신 성종 때에는 아예 도첩제를 폐지해버렸다. 즉 승려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이후 절들은 산속으로 들어간다.[16] 그런데 이 일을 기록한 사관은 '왜 밖에서 그런 소문이 왕한테까지 들어가서 일을 못하게 되었냐?'는 식으로 소감을 남겼다. 임금님 모르게 불태워야 했다는 말. 얼마 가지 않아 실제로 불타고 말았다.[17] 특히 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된 사림파가 더더욱 멀리했다. 더군다나 호불군주인 세조에 의해 형성된 훈구파 또한 불교에 관대한 것과 별개로 기본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했다.[18] 불국사 가이드 투어의 설명에 따르면 해당 방화는 처음부터 절을 파괴할 목적으로 방화한 것이 아니라, 당시 경주 일대를 점령한 일본군 병사들이 굉장한 절이 있다고 구경왔다가 의병이나 승병을 무장시키기 위해 절에 보관중이던 대량의 무기를 발견하고 본대에 연락해서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맹독을 감추고 있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 신자였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는 정확하게는 가마쿠라 시대에 승려 니치렌이 창시한, 법화경만을 유일무이한 경전으로 떠받들고 다른 경전은 싸그리 무시하고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련정종의 신자였다. 일련종은 일본의 기존 교단들에게도 이단이라면서 심한 적대를 받았고 일련종 자신 또한 같은 불교라도 법화경 외의 다른 경전을 사용하는 교단은 배척하는 극단적인 종단이었기에 역시 법화경 외의 다른 경전도 인정하던 한국 불교에는 자비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국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워낙 승병들의 활약(?)이 많았던지라 이미 승병에 학을 뗀 상태였는데 승병을 무장시킬 무기도 발견됐겠다, 명분은 충분하다.[19] 물론 일본도 폐불훼석 등으로 잘만 탄압했다.[20] 조선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정부가 나라를 비교적 검소하게 운영했다. 사실 이러한 문화재들은 대부분 중간에 자연재해로 박살나고 다시 중건한 것들도 꽤 많다. 예를 들어 일본의 오사카성 천수각 같은 경우는 19세기에 한번 벼락으로 박살났다가 193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구되었고, 이전에도 몇 번 박살난 적이 있다. 중국에서도 만리장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번 훼손되었다. 자금성도 문혁의 여파로 박살이 날 뻔 했으나 저우언라이 총리가 군대를 보내 보존되었고, 베이징 성은 혁명의 여파로 아예 사라졌다. 그리고 애당초 크고 화려한 문화재는 당시의 기술로는 인력으로 지을 수 밖에 없으며 그 동원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없다. 그러면서도 자재를 마련하는 등의 일에 막대한 금전적, 시간적, 인적 손실이 발생하니 후손인 우리 입장에서야 왜 그런 걸 안 지었냐고 아쉬워하겠지만 조상들이 들으면 기가 막히고 어이를 상실할 일이다.[21] 다만 종교세 항목 보면 알겠지만 '''종교인 과세를 가장 적극적으로 대놓고 반대하면서 실제로도 몇 번이나 관련 입법을 무마시킨''' 것은 개신교였다.[22] 애초에 기존 종교를 기득권과 동일시하고, 피지배층을 수동적으로만 바라봐서도 안된다. 한국의 사례는 아니지만, 잉글랜드를 예로 들면, 많은 사료가 중세 말 잉글랜드의 평신도 주민들이 수동적이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스스로의 종교적 환경을 만들어나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사에 적용하자면, 여말선초 불교를 기득권과 동일시하고, 억불을 기득권 공격으로 단순화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