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

 



<color=#670000> '''고려 32대 군주'''
'''禑王''' / 驪興王
'''우왕''' / 여흥왕

<colcolor=#670000> '''묘호'''
없음
'''시호'''
없음[1]
'''왕호'''
'''우왕(禑王)'''
'''별칭'''
여흥왕(驪興王)[2]
전폐왕(前廢王)[3]
'''군호'''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성씨'''
왕(王)[4]
'''휘'''
우(禑)[5]
'''왕비'''
근비(謹妃), 영비(寧妃), 현비(賢妃)
'''부왕'''
공민왕
'''모후'''
순정왕후(順靜王后) / 반야(般若)[6]
'''생몰년도'''
음력
1365년 7월 7일[7] ~ 1389년 12월 14일
양력
1365년 7월 25일 ~ 1389년 12월 31일 (24세 5개월)
'''재위 기간'''
음력
1374년 9월 25일 ~ 1388년 6월 8일
양력
1374년 ~ 1388년 (만 13년 9개월)
1. 개요
2. 권력 쟁투에 따른 즉위
3. 막장 행보
6. 폐위
7. 처형
8. 야사
9. 혈통에 대한 논란: 우창비왕설
9.1. 발단
9.2. 우창비왕설의 형성
9.3. 우창비왕설에 대한 반박
9.3.1. 조선 시대
9.3.2. 현대
9.4. 혈통에 대한 기타 제설
10. 평가
11. 매체에서의 모습
12.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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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32대 임금. 폐위되어 묘호와 시호는 없다. 휘는 우(禑). 공민왕반야에게서 얻은 맏아들이다. 반야는 고려 말기의 개혁가인 신돈의 시녀 출신으로 이로 인해 우왕은 평생 동안 신돈의 아들이 아니냐는 정통성 관련 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공민왕이 홍륜에게 시해당한 후 갑자기 왕이 된 그는 재위 기간 동안 국정을 이인임권문세족최영에게 맡긴채 궁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향락에 빠져 지냈다.
우왕이 집권하던 시기 고려는 왜구, 홍건적 등 외침이 잦게 벌어졌고 이를 막기 위해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및 화기의 제조를 맡는 관청인 화통도감을 설치하는 한편 그 후 진포 해전, 황산 대첩 등 왜구와의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또한 중국 대륙은 북으로 쫓겨난 원나라와 새로 일어난 명나라가 각축을 벌이고 있어 혼란했고 내정은 이인임 등이 국정을 농단하는 동안 권문세족들이 대토지를 독점하고 백성들을 사노비화하였으며 절 등 종교 세력들 역시 대토지를 소유해 신도들을 종으로 부리는 등갑질의 시대였다.
우왕은 이인임으로 하여금 국보(國父)[8] 합하라고 칭하게 하는 한편 그에게 국정부터 흉년 구휼 및 대원, 대명 외교 등 모든 정사를 맡겼다. 이인임이 건강상 문제로 은퇴하자 임견미, 염흥방 등 신흥 귀족에게 전권을 옮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과욕을 부리다 실각하자 최영에게 전권을 맡기는 동시에 본인도 어느 정도 정사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이때 명나라가 무리한 요구를 계속해 대결이 심화되자 최영과 함께 요동 정벌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이후 고려 전군 5만이 이성계의 지휘로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며 최영이 죽고 우왕은 몰락하고 말았다.
정도전신진사대부들과 이성계는 이인임을 탄핵하는 한편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란 뜻)을 외치며 우왕과 창왕 모두 폐하고 조선 개국을 계획하였으며 강릉에서 부자 모두 처형당한다.
조선 초 《고려사》, 《동국통감》 등은 우왕을 신우(辛禑)라고 기록하며 정통성을 깎아내렸다. 폐위 후 복위 시도도 좌절되어 시호조차 올려지지 않았다. 이 점은 창왕도 마찬가지.
아명인 모니노(牟尼奴)에서 '모니'는 석가모니의 모니, '노'는 노비 노(奴)이다. 즉 모니노는 석가모니의 종이라는 뜻. 비슷한 예로 요성종의 아명은 문수노(文殊奴), 즉 문수보살의 종이라는 뜻이며, 당태종의 아내 문덕황후 장손씨의 아명은 관음비(觀音婢), 즉 관음보살의 종이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불교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었던 것.

2. 권력 쟁투에 따른 즉위


'''역대 강릉(江陵)의 가신'''
'''1대'''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만(王卍)
'''2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왕전(王顓)
'''3대'''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왕우(王禑)'''
우왕은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내다 신돈 처형 후 7세(1371년)에 궁에 들어갔으며 그에게 후계를 물려줄 생각이던 공민왕이 친모 반야는 살인멸구하고 궁인 한씨의 양자로 만들었다. 우왕 즉위 후 궁인 한씨는 순정왕후(順靜王后)로 추존된다.[9]
공민왕 22년(1373년)인 9세 때 우(禑)라는 정식 이름과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10]에 봉해졌다. 이듬해 부왕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의 도움으로 왕이 됐지만 너무 어려 할머니 명덕태후대리청정을 했다. 이인임의 독주와 탐욕에 반발해 지윤#s-1과 우왕의 유모 장씨 등을 통해 최영을 포섭하고 이인임을 숙청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인임에게 들켜 지윤은 숙청되고 최영 포섭 역시 무산됐다.

유모 장씨마저 살해되는 것을 묵과해야 했을 뿐더러 혈통의 문제까지 겹쳐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사실 명덕태후도 이인임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당시 어린 국왕이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인임의 노련한 정치력에 의해 최영은 훗날에도 이인임을 죽이지 못할 정도로 그를 믿고 어쩌지 못했었고 우왕의 친위 세력도 부패 세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소장파 유림과 양심적인 신료들은 물론 명덕태후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도 명덕태후 사후 명덕태후의 외척 세력[11]경복흥마저 숙청되어 이인임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3. 막장 행보


국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사냥, 음주가무, 엽색으로 소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질풍노도. 특히 사냥도 사냥터에서 안 하고 민가에서 말을 타고 백성들이 기르던 소, 닭, 돼지, 염소 등 가축들을 사냥했을 정도로 상당한 민폐를 끼쳤으며 그렇게 말을 달리다가 맘에 드는 예쁜 여자가 있으면 즉석에서 그 여자 집으로 들어가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비행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 간언을 하기도 했으나 우왕은 듣지 않았다. 하는 짓이 완전히 할아버지 충숙왕과 큰아버지 충혜왕 뺨친다. 실제로 최영이 이걸 가지고 충언을 하며 충혜왕과 충숙왕 얘기를 했는데 이때 최영은 "충혜왕께서 색을 좋아하신건 사실이나 남들이 안 보는데서 했고 충숙왕께서는 놀기를 좋아해도 때를 골라서 하셨는데 전하께서는 법도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출처:고려사 최영 열전)
다만 일부에서는 이러한 막장 행보가 조선 왕조가 건국의 정당성을 얻게 하기 위해 만든 뻥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유는 평가 항목 참조.
우왕의 부인들은 9비 3옹주(九妃三翁主)라고 불리며 유명했는데 그 중 3명의 비와 1명의 옹주 외에는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축출된 후에 폐출되었다. 폐출된 비들은 의비(毅妃), 숙비(淑妃), 안비(安妃), 정비(正妃), 덕비(德妃), 선비(善妃)다. 3옹주는 명순옹주(明順翁主), 화순옹주(和順翁主), 영선옹주(寧善翁主)를 말하는데 명순옹주만 폐출되지 않았다.
특히 우왕이 즉위했을 때 자기 아버지인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가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우왕은 자주 정비 안씨의 처소에 들렀는데 하루에 2~3차례 가기도 하고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 우왕이 어느 날에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정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로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출처:고려사 우왕 열전)
그러나 실제로 우왕이 이런 행동들을 보였다고 해도 고려사가 우왕을 지나치게 비하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정비 안씨의 일화도 후대 연산군월산대군 부인 일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우왕은 어릴 때 어머니와 유모를 잃었고 할머니 명덕태후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므로 의붓어머니가 되는 그녀에게 모성애를 갈구했을 수도 있는 일이고 생각해보면 우왕이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 10여 세였다. 다만 우왕이 성인이 된 재위 13년까지도 자주 정비 안씨의 처소에 들락거렸다는 부분은 좀 석연치 않기는 하다.
정치가 권신들에게 왜곡되어 공공성이 파탄난 상황에서 군부 역시 재정난과 몽골식 부호제의 영향으로 사병 집단화되어 있었고 장수들 역시 권신들이 맡아서 무능한 자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륙 지방까지 학살, 약탈, 납치가 자행되었으며 수도 개경까지 위기에 몰리기도 했고 최영이 재건해낸 수군이 격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왜구의 침입 격퇴에서 최영, 이성계, 최무선화포가 맹활약을 펼쳤고 이성계는 왜구 격퇴 과정에서 최영에 버금가는 무장으로서의 입지와 명성을 굳히게 된다.

4. 무진피화


그러나 조금 성장하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원나라가 완전히 북방으로 물러가자 왕은 이인임의 전횡을 보다 못해 실권을 되찾고 싶어졌다. 이인임이 사직한 후로도 그 일당인 염흥방임견미 등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막대한 토지를 약탈하고 있었고, 국고는 텅 비었으며, 중신인 경복흥은 자포자기로 술독에 빠져서 수수방관만 하다 실각하였고 또 다른 중신인 최영은 그저 탄식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이런 상황은 우왕의 사치 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방해했다.
마침 염흥방 등의 난행으로 인한 조반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군부의 실력자로 인망이 높던 최영이 현상 타파를 결심하게 되었고, 우왕은 그런 최영의 손을 잡고 이인임 일당의 제거를 획책했다. 최영은 친밀한 후배 무장 이성계를 끌어들였고 이 둘의 힘으로 결국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했다.
1388년 1월 이 공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재상이 되어 고려 정계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특히 최영은 정계의 실세가 된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우왕은 최영을 자신의 돈독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그의 딸을 아내로 맞기도 했는데 이때 맞이한 후비가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寧妃 崔氏)였다. 엄밀히 따지면 영비 최씨는 최영의 서녀였고, 최영도 이 때문에 곤란해 하며 딸과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우왕의 고집으로 인해 결국 영비를 들였다.
자신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최영을 중용해서 이인임 일파를 물리치고, 최영을 후견인으로 삼았다는 면에서 적어도 이 당시 우왕의 정치적 감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5. 위화도 회군


이 무렵 원을 몰아내고 새로운 대륙의 승자가 된 명나라와는 외교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재위 초 친원 정책을 취하던 실권자 이인임 등 권문세족들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해 버린 일도 있었으며, 금과 말, 포 등의 막대한 세공을 강제하여 고려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 더군다나 사신단이 세공을 위해 가져가던 말들을 비루먹은 말로 바꾼 뒤 차익을 이인임 일당에게 뇌물로 바치는 케이스도 많았다.
우왕 시대는 원과 명 사이의 일종의 양팔외교기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이인임의 영향으로, 이미 원나라는 공민왕 말기에 대도(베이징)을 상실한 뒤였다. 그리고 이인임의 친원 외교도 일시적인 것으로, 점점 친명 쪽으로 기우는 것은 분명했다. 이인임이 쫓겨나기 직전인 1387년에 '''명의 관복''', 즉 익선관곤룡포 등을 습용하기로 승인 받은게 그 예.[12] 그 이전엔 공민왕 어진에서 보듯 송의 관복을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인임 일당이 숙청된지 2개월만인 3월, 명 태조 주원장은 '''"철령 이북은 우리 땅. 그러니 내놓으셈"'''이라며 강짜를 놓았다(철령위 문제). 공민왕 때에야 어렵게 되찾은 이 땅을 내놓으라는 명에 반발한 재상 최영은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우왕도 이를 승인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반대하는 신하까지 죽여가며 강행했음에도 이성계는 그 유명한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고 요동 정벌 계획을 실현해 나갔다. 아직 왜구가 약탈을 지속하고 있던 농번기에 이는 백성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또한 가망없는 원정에 자신의 주 세력을 대거 참여시킨 이성계에게도 큰 타격이 될 터였다.[13] 이때부터 이성계는 우왕와 최영에게 본격적으로 불만을 품고 일을 벌일 시기를 노렸을걸로 보인다.
어쨌든 준비가 다 끝나고 출정 준비가 되자 최영도 총사령관 자격으로 출진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믿을 사람이 최영밖에 없었던지 '''"가지 마라"'''며 청했고[14] 마지못해 최영은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아 이성계와 조민수 등만이 북방으로 출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왕에게 결정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우왕은 사실 요동 정벌 때 서경(평양)까지 나아가 동향을 지켜보았고, 최영도 함께 서경에 있었다. 하지만 회군이 시작되자 빠르게 개경으로 후퇴해야 했다. 도중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이로서 대응 시간은 더욱 늦어졌다.

6. 폐위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음에도 출전했던 이성계는 조민수 등과 함께 군대를 돌려(위화도 회군) 개경을 포위 / 함락하고, 최영을 제압한 뒤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우왕도 다시 꼭두각시 군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우왕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기가 남아 있었는지 '''친히 무장을 하고 환관 80여 명을 무장시켜서 이성계를 참살하러''' 이성계조민수의 집을 찾아갔으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당시 군영에 그대로 남아있던 데다가 이성계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으려해도 이방원이 이미 대피시킨지 오래라 망했다.

우왕 14년(1388년) 6월 병오일. 이날 밤에 우왕이 환수(宦竪) 80여 명과 함께 무장한 채 태조와 조민수(曹敏修), 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고려사》 권137, 열전50 우왕5

혹자는 "이성계가 군영이 아닌 집에 머물렀다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일 이성계가 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사를 앞두고 이성계가 아무런 경계 태세 없이 편히 집에 머물러 있었을 리 만무한 데다가, 이성계라는 인물 자체가 무공으로 치면 한국 역사에서 손꼽을 수준의 인물이기 때문에, 무장한 환관 80명은 어떻게 생각해도 우왕의 무리수라고밖엔 볼 수가 없다.[15]
결국 이 때문에 분노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당한 뒤 강화도로 유배보내졌다. '''이인임을 몰아낸지 고작 4개월 후의 일이었다.'''

7. 처형


이성계는 사돈의 형인 정창군(공양왕)을 옹립하려 했지만 학계의 거두였던 이색과 정적 조민수의 결사 반대로 인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다. 또한 이들은 귀양간 이인임을 복권시키려 했지만 이인임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강릉으로 옮겨졌는데 아들 창왕 때 우왕을 복위하려 한다는 모략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성계가 조민수를 쫓아낸 후,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니 창왕을 폐위하고 진짜 왕씨를 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폐가입진론을 내세웠고, 이에 아들 창왕도 폐위당했다.
이후 옹립된 공양왕은 우왕과 창왕의 사형을 강하게 주장했다. 물론 폐가입진론에 따라 이성계 입장에서도 우왕과 창왕을 언젠가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동정하는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일단은 우왕과 창왕의 처분을 보류하자고자 했다. 반면 공양왕 입장에서는 우왕과 창왕의 존재가 본인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한편 사형시켰을 경우 이성계가 혼자 온갖 비난을 다 들어 먹을 게 뻔하므로 사형을 밀어붙였다.
결국 우왕은 신돈의 혈육으로 몰려 아들 창왕과 함께 향년 25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司宰副令尹會宗上 請誅禑 昌。王歷問諸宰相皆黙然 我太祖獨曰 此事不易。旣以安置江陵 聞于朝廷 不可中變。且臣等在 禑雖欲爲亂何憂哉 王曰 禑多殺無辜 宜其自及。命知申事李行下旨 遣政堂文學徐鈞衡于江陵 誅禑 藝文館大提學柳玽于江華 誅昌。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공양)왕이 재상들 하나 하나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다들 말이 없었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홀로 의견을 말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왕을 강릉에 안치했다고 명나라 조정에 이미 알린 터에 중간에 말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또 저희들이 있으니 우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들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우왕은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지은 후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분부해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鈞衡)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처형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유구(柳玽)를 강화에 보내 창왕을 처형하게 했다.

고려사》 공양왕 원년

무덤이 있다면 나폴레옹 3세처럼 현대과학으로 생부를 판별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덤에 관한 기록 자체가 없고 발견되지도 않았다. 다른 역사의 여러 폐위왕들이 일단은 왕족이긴 한데 다른 이런저런 잘못으로 폐위당하는 것과 달리 우왕은 조선 창업세력에 의해 반역자인 신돈의 아들로 간주당해 처형되었으므로, 무덤에 제대로 안장되었을지 의문이다. 아들 창왕과 함께 역적의 시신으로 간주해 들판에 그냥 버려졌을 가능성도 상당한 편. 다만 경기도 내에 예로부터 우왕의 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무덤이 있긴 하다.
이때 위에서 언급된 최영의 서녀, 영비 최씨가 우왕의 유배지까지 따라갔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이 처형된 후 밤낮으로 곡을 하다가 우왕의 '''시신을 끌어안고 자는 것은 물론 시신에 밥을 지어 올리고 하며 시신을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8. 야사


야사에는 사망할 당시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에게 '''"왕씨 일족에게는 겨드랑이에 의 비늘이 있다!"'''고 외치며 웃통을 벗어 그 용 비늘을 보여줬다고 한다.[16]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우왕의 최후 장면에서 이 이야기를 채용했다. 정도전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각색되어 우왕이 직접 '''자기 몸을 인두로 지져''' 상처를 낸 후 이를 용의 비늘로 주장하다가 참살당한다.
이 야사를 채택한 저술 중에 이중환의 《택리지》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녀에 대한 일은 믿을 수 없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태조(왕건)가 낳은 자녀들 중에 양쪽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다 한다. 태조의 외가가 용이고, 용녀가 바다로 돌아가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다시 용이 된 것은 어린 딸이 시집가서 혹 왕자를 낳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왕실의) 여자 중에서 비늘이 없는 사람은 신하에게 시집보냈으나, 비늘이 있는 사람은 모두 대를 잇는 임금의 후궁으로 삼아 윤기(倫氣, 윤리와 기강)를 더럽히는 부끄럼도 서슴지 않았다. 중기에 들어서는 여동생을 비로 삼는 임금까지 있었다. 송사(宋史)에서도 "이러한 일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 하였으나, 하지만 그런 일은 오직 왕가에서만 그러하였고 민간 풍속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에 왕우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시켰다. 그리고 공양왕 요(瑤)를 임금으로 세우고, 또 공양왕으로 하여금 우를 강릉에서 베어 죽이도록 시켰다. 우가 형을 당하게 되자 겨드랑이를 들어 보이면서 "나를 신씨(辛氏)라 하지만 왕씨는 용의 종내기이므로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는데, 너희들은 와서 보아라." 하였다. 참관하던 사람이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이것은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쓰는 택리지》 1권, 신정일 저, 166페이지

용 비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이성계 일파가 그의 목을 베려고 했는데 '''용의 후손'''이라서 병장기가 먹혀 들어가지 않아 죽이질 못하자 이성계가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버지 이자춘(환조)이 조상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나온 것을 자신에게 물려준 [17]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전어도를 꽂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박살난 전어도와 금간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 만큼 믿거나 말거나.

9. 혈통에 대한 논란: 우창비왕설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는 우왕의 혈통 문제로, '우왕이 진짜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가?(혹은 신돈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문제다.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주장을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우왕신씨설(禑王辛氏說)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조선시대에 저술된 모든 관찬 역사서에서 우왕은 신돈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우왕과 창왕은 왕으로 인정되지 않고 각각 신우,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아예 '''반역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사학계에서는 기록의 모순 등의 이유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일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9.1. 발단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시녀인 반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반야는 신돈의 시녀로서 신돈을 가까이했고, 왕비나 후궁들처럼 다른 남자의 접근(?)이 차단된 환경에서 산 게 아니었다. 물론 공민왕은 직접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 해 낳은 내 아들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목격자가 이인임밖에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 우왕이 즉위할 때부터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이성계 일파가 창왕을 폐위하면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니 창왕은 신돈의 손자'라는 무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사람들 사이에서 우왕의 혈통을 의심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우왕의 혈통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왕의 혈통이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기록은 우왕 재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9.2. 우창비왕설의 형성


우왕의 혈통을 문제삼는 최초의 기록은 우왕 치세가 아닌 창왕 치세에 등장한다. 기록상으로 볼 때에 처음으로 우왕의 혈통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음은 창왕 1년(1389) 9월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였다. 『고려사』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윤승순(尹承順)과 권근(權近)이 명나라로부터 귀국하는 편에 예부(禮部)가 황제의 지시를 받들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 왔다.

홍무(洪武) 22년(창왕 원년, 1389) 8월 초 여드레에 본부(本部: 예부)의 상서(尙書) 이원명(李原明) 등의 관리가 봉천문(奉天門)에서 다음과 같은 황제의 분부를 받았기에 그대로 전달합니다.

"고려 국내가 다사다난한 판에 배신(陪臣)된 자들 가운데 충신과 역적이 마구 뒤섞여 있으니 그 하는 일들이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왕씨(王氏)가 시해를 당하고난 이후 후손이 끊어지는 바람에 뒤에 다른 성(異姓)이 왕씨를 가탁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또한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켜나갈 좋은 규범이 아니다. 옛날에는 임금의 악행이 너무 심해 그 때문에 임금을 시해한 역적도 있었으니,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소행이지만, 또한 그 가운데는 어진 정치를 폄으로써 하늘의 뜻을 돌이키고 백성들을 평안히 만든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고려는 배신들이 음모를 꾸미고 온갖 거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설사 역모로 권력을 얻었다 한들 역모로 그 권력을 지키는 것이 옳은 행위인가? 만일 역모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역신들이 줄을 지어 역모를 일삼을 것이다. 이는 모두 먼저 반역한 자들이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 것이니 또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예부에서는 그 어린 왕에게 공문을 보내 우리 수도로 꼭 올 필요는 없다고 전하도록 하라. 정말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이 제 자리에 있어 위로 임금과 신하의 명분을 정하고 국내로는 백성을 편안히 할 정책을 마련한다면 비록 수십 년 동안 입조하지 않아도 무엇이 걱정이랴? 또한 해마다 입조한다고 한들 왜 싫어하겠는가? 또한 처녀를 보내지 말라고 지시하라."

『고려사』 권 137 열전 50 신우 5

여기서 보이는 바와 같이 명나라 예부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바로 '왕씨가 아닌 다른 성(異姓)이 왕위에 올랐다.'는 구절이었다. 당시에 창왕은 이색·권근 등의 권유에 따라 직접 명나라에 친조하려 하였는데, 이는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였던 이색 등의 기득권층이 창왕을 명에 직접 보내 입조하게 하는 등의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그 입지를 다져서 이성계 일파의 사전 개혁 시도를 견제하고자 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창왕의 모친인 이씨(李氏)가 나이 어린 창왕이 먼 길을 떠나는 것을 염려한 까닭에 이는 무산되었고, 다만 명에 사신을 보내는 데에 그쳤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정작 창왕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명에 사신을 보내 받아온 답서에 이러한 구절이 있었으니, 직접 명나라에 다녀왔서 문서를 가져온 권근은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권근은 예부자문을 도중에 사사로이 열어보았다가 그 내용을 보고는 먼저 우왕의 장인이자 권문세족으로 대표적인 사전개혁반대파인 이림에게 먼저 보이고 난 후에야 도당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두 달이 지나 창왕 1년(1389) 11월에 결국 큰 사건이 터졌다. 이 때에 김저·정득후 등이 이성계를 제거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당한 것이다. 이때에 정득후는 자결하고 김저만이 살아남았는데, 사로잡힌 김저는 우왕 복위 사건에 변안열·이림·우현보·우인열·왕안덕·우홍수 등이 연루되었다고 자백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변안열은 죽게 되었고, 이성계는 우왕을 강릉부로 옮기는 한편 창왕은 폐위시켜 서인으로 삼아 강화부로 보내버렸으며, 곧 이어서 고려 왕실의 종친이었던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그런데 당시 대간들이 올린 상소에서는 사건이 터진 지 두 달이 지난 후에야 권근이 예부 자문을 열어본 사건을 문제 삼았다.

이인임이 권세를 잡고 총애를 굳게 하려고 신돈의 아들 신우를 현릉(玄陵: 공민왕)과 동침했던 궁인(宮人)이 낳은 아들이라고 속여 왕위에 올린 후 그의 집안 동생 이림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 후 조민수가 이색과 공모하여 신우의 아들 신창을 왕위에 올리고 변안열ㆍ이림ㆍ이귀생ㆍ정지(鄭地)ㆍ우인열ㆍ왕안덕ㆍ우홍수ㆍ원상(元庠) 등이 또한 시중 이성계를 해치고 우리 왕씨의 종사를 끊으려고 하였으나 다행히 종사의 신령 덕분에 흉악한 계략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전에 만약 변안열의 계략이 실행되도록 놓아두었다면 시중 이성계가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왕씨의 종친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며 전하의 즉위도 실패하였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바로 천자께서 말씀하신 반역에 해당될 것입니다.

(중략)

권근(權近)은 천자가 다시 왕씨를 왕위에 올리라는 자문(咨文)을 가지고 오다가 도중에 사사로이 열어보고 밀지의 내용을 미리 안 후 도당(都堂)에 보고하지도 않고 먼저 이림에게 보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천자를 속이고 왕씨를 저버렸으며 다른 성붙이에 빌붙어 아부하며 몰래 모반을 꾀한 것으로, 조종에 지은 죄가 또한 큽니다.

(중략)

이림ㆍ이귀생ㆍ이을진ㆍ정지ㆍ우인열ㆍ이경도ㆍ왕안덕ㆍ우홍수ㆍ원상 등은 역적 변안열과 함께 사직의 대신을 해친 후 신우를 맞아들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대신을 죽이려고 모의한 것도 용서하지 못할 죄인데, 하물며 다른 성붙이를 옹립하여 우리 역대 임금들의 신령이 영원히 제사를 받지 못하게 한 죄는 어떻겠습니까? 만약 역모가 성공하게 놓아두었더라면 전하께서는 어찌 중흥의 대업을 이룩하실 수 있었으며 조종들께서는 어찌 효성스러운 자손의 제사를 받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이 역적 무리들은 역대 임금들의 자손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왕씨의 신하는 이 나라 땅 위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우리나라 사직을 깊이 생각하시고 만세의 자손을 위하여 계책을 세우셔서,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그들의 죄를 적절히 다스리소서.

(중략)

과거 변안열은 사전(私田)을 개혁한 데 대해 울분을 품고 있다가 명나라 예부의 자문(咨文)이 오자 왕씨를 모두 죽이고 신씨의 왕위를 굳히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림ㆍ우인열ㆍ왕안덕ㆍ우홍수ㆍ이귀생 등과 함께 몰래 반역을 모의한 후, 이을진ㆍ이경도를 자객으로 삼아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들을 살해함으로써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려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 계략이 실행되었더라면 왕씨의 중흥을 어찌 바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도리어 역적의 무리에게 관작을 더하고 총애가 특별하니, 이것은 만세토록 대역 모반하는 무리들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고려사』 권 116 열전 29 이림

당시 대간들이 말하는 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성계 일파는 우왕 복위 사건과 예부자문 사건을 모두 반역과 연결지어서 이미 처형당한 변안열 외에도 이림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사전 개혁에 반대하던 이들로, 이성계 일파의 주된 정적들이었다.
이때에 제거된 변안열은 비록 사전개혁에 반대하던 인물이었으나,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 말기의 혼란기에 무장으로 활약하여 군공을 쌓았을 뿐 아니라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했던 일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당한 이림 또한 우왕의 장인이었기에 이성계에게는 상당히 껄끄러운 정적이었다. 이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모두 죽거나 실각하였다. 이성계는 당시에 터진 사건들을 기회로 삼아 정적들을 한꺼번에 제거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우왕과 창왕 등은 신씨의 자손이므로 모두 폐해야 마땅하다는 주장, 즉 '폐가입진론'이 나왔다. 근거는 명나라에서 보내온 예부자문에 실려있던 '왕씨가 아닌 다른 성씨로서 왕이 되었다.'는 구절이었다. 이는 곧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연이어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흥국사에서 창왕을 폐위할 명분으로 '우왕은 공민왕의 자녀가 아닌 신돈의 자녀이니 신우와 신창 같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고려의 왕으로 앉히자' 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세웠다. 이후 공양왕 즉위와 조선 건국은 폐가입진을 주요 명분으로 했기에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핏줄이라는 주장은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버린다. 조선시대에 이 시기를 기록한 태조(이성계)실록이나 《고려사》(高麗史)에도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하고, 특히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을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세가(世家)편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列傳)편, 그 중에서도 반역열전에 기록하는 등 조선 정부는 철저하게 우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주장했고 현대까지 이어졌다.

신우(辛禑)의 어릴 적 이름은 모니노(牟尼奴)로, 신돈(辛旽)의 비첩(婢妾)인 반야(般若)의 소생인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당초 반야가 임신해 만삭이 되자 신돈이 자기 친구인 승려 능우(能禑)의 모친 집으로 보내 해산하게 했는데 능우의 모친이 맡아 길렀으나 돌도 못 채우고 아이가 죽어버렸다. 신돈의 책망을 겁낸 능우가 죽은 아이와 생김새가 비슷한 아이를 찾다가 이웃집 대졸(隊卒)의 아이를 몰래 훔쳐내 다른 곳에 숨겨두고는 신돈(辛旽)에게, 아이가 병이 났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서 기르겠노라고 청해서 신돈의 허락을 받았다. 그로부터 한 해 뒤 신돈이 자기 집으로 데려와 기르면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횡(金鋐)이 뇌물로 바친 노비 금장(金莊)을 유모로 삼으니 반야도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을 까마득히 몰랐다."

공민왕(恭愍王)이 후사를 두지 못했음을 늘 걱정하다가 하루는 평복차림으로 몰래 대궐을 나와 신돈의 집에 갔더니, 신돈이 그 아이를 가리키며, "전하께서는 이 아이를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으소서."라고 말했다. 왕이 곁눈질하고 그냥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심 허락했다. 신돈이 몰래 그 한 패거리인 오일악(吳一鶚)을 시켜, "부디 관음보살의 제자인 신돈의 소생 모니노가 이 나라에서 복록과 수를 누리며 살게 해주소서."라는 글을 지어 낙산사(洛山寺) 관음(觀音)에게 치성을 드리게 했다.

신돈이 수원(水原: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에 유배되자 왕은 근신(近臣)들에게 "과거 내가 신돈의 집에 가서 그 집 여종을 가까이 해 아들을 낳았으니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 아이를 잘 보호하라." 하고 당부했다. 신돈이 사형당한 후 왕이 모니노를 명덕태후전(明德太后殿)으로 데려다 놓고서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에게 "원자(元子)가 있으니 나는 아무 걱정이 없소."라고 말하고는, "신돈의 집에 예쁜 여자가 있었는데 아들을 낳을 수 있다기에 가까이 해서 이 아이를 얻었던 게요."라고 설명했다.

『고려사』 권133 열전46 신우 1

어렸을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인데,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반야(般若) 소생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반야가 낳은 아이는 죽고 다른 아이를 훔쳐다 길렀는데, 공민왕이 자기 아들이라고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왕이 훙(薨)하니 이인임(李仁任)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는데,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그를 죽였다. 참람하게 왕위를 차지한 기간이 14년이다.

『고려사절요』 제30 신우 1


9.3. 우창비왕설에 대한 반박



9.3.1. 조선 시대


조선을 따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원천석은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맞다"고 주장했다. 여말선초 당시에도 이성계를 중심으로 역성혁명에 찬동했던 세력들은 우창비왕설과 폐가입진론을 따르는 입장이었고 이성계를 역적으로 보았던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조선 건국이 한참 지난 18세기에 성호 이익성호사설에서 우왕이 실제로 누구의 씨냐 하는 (유전적인) 문제를 떠나서 공민왕 본인이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한 이상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말 신돈의 피라고 해도 일단 한 나라의 왕이었던 만큼 세가에 넣어서 기록해주는 것이 맞는데 열전, 그것도 반역열전으로 넣은 것은 맞지 않다며 중국의 선례(진시황진원제)를 들어 깐 바 있다.[18]
한편 안정복동사강목에서 창왕이 즉위한 뒤 경연에서 윤소종이 창왕에게 "상왕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는 총명이 학문으로 향하셨으나"라고 하는 부분을 들어, 우왕이 폐위되고도 창왕이 즉위했던 당대에는 상왕이라고 칭해진 점을 볼 때 우왕이 신씨라는 설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왕씨임이 틀림없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공민왕은 우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믿은 것은 분명한데, 신돈이 처형당한 후에는 우왕을 궁궐로 들여서 보호했고, 비록 목격자가 이인임 밖에 없기는 하지만 공민왕도 직접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 해 낳은 내 아들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무리수를 두면서 자신의 후궁(한씨)의 양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거기에 공민왕이 죽기 얼마 전에는 후계자 교육을 공식적으로 실시하려 하는 등 공민왕은 우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9.3.2. 현대


현대 한국사학계에서도 우창비왕설에 대해 근거가 부족하고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있어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정설이다.[19] 일단 우창비왕설의 주요 근거가 되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실록에서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인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이야기를 언급하기에 앞서 '누군가가 말하기를(或云)'이란 토를 달아놓았다. 그리고 해당 기록들은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던 이성계 일파와 그 후손들이 쓴 기록이므로 창왕을 폐하기 위해 공론화시킨 것은 어느 정도 확실하다. 고려사 신우열전에서도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고 누가 그렇다 카더라라는 식으로 소문만 제시하고 있다. 결국 당시에도 확실한 신돈의 아들이란 물증은 없었다.
또한 우왕이 신돈의 아들임을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로 명나라 예부자문에서 보낸 국서에서 '왕씨가 아닌 다른 성(異姓)이 왕위에 올랐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점인데, 정작 명나라 측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명나라의 『태조고황제실록』에는 당시 홍무제가 고려 사신들을 접견하면서 답서에 언급된 것과 흡사한 이야기를 말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성씨가 고려의 왕위에 올랐다는 따위 내용은 전혀 없다.

고려국(高麗國)에는 사고가 많고 신하들은 충성스러운 자와 역적된 자가 섞여있으니 하는 것이 모두 좋은 계책은 아니다. 왕을 폐하고 세움을 마음대로 하니, 삼한이 지켜야 할 길이 아니다. 저들이 그 임금을 가두어 놓고, 와서는 동자(童子, 고려 창왕)의 입조를 청하니 이는 반드시 음모가 있는 것이며 믿을 것이 못된다.

너희가 정말로 역적된 행위를 계속 일삼는다면, 모두가 이어서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지를 것이니, 인륜(人倫)이 없어지고 예의(禮義)를 잃을 것이다. 너희 예부(禮部: 고려 예부상서 이원명)는 그것을 고려에 타일러 동자로 하여금 반드시 와서 입조하게 하지 말 것이다.

과연 그 나라에 현명한 신하가 있어 군신(君臣)의 구분을 명확히하며,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를 안정케 한다면 , 비록 수세토록 와서 조공하지 않더라도 책망할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해를 연이어 조공하더라도 어찌 유익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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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고황제실록』 권286 홍무 22년(1389) 8월

홍무제는 "고려의 신하들 중에서도 충성스러운 자들뿐 아니라 역심을 품은 자들이 있어 마음대로 왕을 폐하고 세우는데, 얼마전에는 우왕을 폐위시켜 감금하더니 이번에는 아직 나이 어린 창왕을 입조하게 하려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강하게 책망했다. 이성계 일파가 명에서 보내온 예부자문을 우왕과 창왕을 폐하는 데에 악용하려고 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홍무제는 영 딴판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만일 정말로 명나라 조정에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 생각하여 책망하려 했다면 홍무제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겠지만, 그런 언급은 정작 명나라 측의 기록에는 전혀 없다. 이를 보면 본래 명에서 보낸 예부자문에 '다른 성씨로 왕을 삼았다.'고 책망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이성계 측이 사람을 부려 예부자문이 도당에 닿기 전에 내용을 고쳐놓고는 권근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성계가 우왕을 폐위할 때 내세운 명분은 우왕의 실정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었다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직후에 우왕을 폐위할 당시에 이를 주장하는 편이 보다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창왕을 폐위한 후에야 폐가입진론을 내세운 것은 실제로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한편 우왕이 아들 창왕에게 양위하며 올린 표문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제가 어릴 때 부친인 공민왕 왕전(王顓)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오로지 조모 홍씨(洪氏)의 가르침에 의지할 뿐이었는데 다시 불행히도 조모마저 별세했습니다. 그러자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인 최영(崔瑩)이란 자가 저에게 매와 사냥개를 바쳐 사냥판을 벌이도록 꾀고 아예 서연(書筵)을 작파해 버리는 바람에 저는 들어서 아는 바가 아무 것도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략)

『고려사』 권 137 열전50 신우 5

당시 우왕은 왕위를 내놓고 물러나면서 스스로를 공민왕의 아들라고 밝혔는데, 당시 우왕이 표문을 쓸 때에 그 내용에 이성계 일파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정말로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었다면, 이성계 일파가 우왕이 스스로를 공민왕의 아들라고 칭하게 내둘 이유가 전혀 없다.
이렇게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고 가정하면 기록들을 대조 및 비교해볼 때 많은 모순이 생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우왕신씨설은 정설처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9.4. 혈통에 대한 기타 제설


현재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냐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의견이 대다수이고, 공민왕의 아들일 것이라 보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요즘처럼 DNA 검사라도 하지 않고서야 당대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완벽한 입증 및 반박이 불가능했다.[20] 우왕의 유골을 찾을 수도 없는 마당에 이젠 영영 밝힐 방법도 없다. 우창비왕설에 의한 폐가입진론에는 명확한 물증은 없으며 둘 다 왕씨가 맞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우왕이 유달리 혈통 면에서 트집이 잡힐 만한 약점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반야가 우왕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사에선 반야가 만삭일 때 신돈이 친구인 승려 능우(能禑)의 모친의 집으로 보냈고 반야는 그 집에서 아이를 낳았으나 돌이 되기 전 아이가 죽어, 능우가 죽은 아이와 닮은 아이를 몰래 데려와 기르다가 신돈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참고로 현대의 사학계엔 우왕의 생모가 반야라는 것도 거짓이고 실제 생모는 순정왕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능우라는 인물이 순정왕후의 친척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 우왕이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고 학계에서도 반야의 아들도 공민왕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우왕은 순정왕후와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저 이야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명덕태후가 공민왕 시해라는 위급 상황에서 공민왕이 자기 자녀라 인정하던 모니노 대신 다른 왕씨 종친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점을 우왕의 혈통을 의심하는 증거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명덕태후가 우왕 대신 다른 종친을 보위에 앉히려 한 이유는 우왕의 혈통보다는 그의 모계가 천출이라는 것이 큰 이유였다는 게 중론이다. 조선은 정비 소생의 적장자가 없을 적차자나 후궁 소생, 중인 출신(경종) 심지어 서자(영조)라 해도 왕의 아들이면 후계 계승에는 문제가 없었으나[21] 고려는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의 혈통 또한 중요했다. 게다가 고려 왕조는 훈요십조를 를 통해 능력(?)이 있거나 명분이 있다면 부자 계승보다 형제 계승에도 정당성이 부여했고 실제로도 장남을 놔두고 형제 계승한 사례가 많다. 건국 초기부터 괜히 유력 호족이나 왕족 내 종친과 족내혼을 한 게 아니다. 우왕의 경우 부친은 공민왕이나 모친이 천민 출신인데, 명덕태후는 왕실의 큰어른으로 당연히 모계 혈통도 감안했어야 했기에 우왕의 즉위를 반대한 것이다.


10. 평가


후대로 내려갈수록 왜곡이 심해졌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임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소년기의 막장 행각을 뒤로 하고 청년기에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 줬지만 결국 충동적이고 혈기를 누르지 못해 폐위되어 끝내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일단 부왕을 시해한 홍륜을 벌하겠답시고 홍사우 같은 고려 말에 손꼽히던 무장도 함께 연좌제로 묶어 처형해버렸고, 거기다 홍사우 처형에 앞장섰던 최인철을 아꼈으나, 최인철이 왜구를 무찌르지도 않았음에도 거짓 보고를 해버리는 바람에 사헌부에서 탄핵을 받아 태형을 맞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실 홍사우를 죽인 것은 어린 우왕이 아니라 우왕을 휘둘렀던 권문세도가들이었지만 우왕이 이들을 제어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신흥 무인들의 분노가 이때부터 하늘을 찔러버렸다.[22] 더욱이 홍건적을 격퇴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와 같은 무인들이 선왕 공민왕 때 줄줄이 숙청되었는데 이때까지도 그들을 복권시키지 않았다. 결국 공양왕 때에서야 이들을 복권시키고 조선 왕조 시절에서 이들을 열전록에 올리고 특히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오히려 고려 왕조보다 조선 왕조에서 들어와서야 더 추모했을 지경. 주색에만 몰두한 채 임금으로서 해야 할 기초적인 일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순 없다. 경순왕이나 순종이 찬탈자에 순응해서 결국 왕위는 잃었어도 평생 잘 먹고 잘 살았던 것과는 대조된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했던 왕의 운명과 함께 고려 왕조의 운명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1. 매체에서의 모습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이 많아서인지 아버지 공민왕과 더불어 사극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고려 왕이다.
  • 용의 눈물에서는 위화도 회군으로 당황하는 모습과 이성계를 죽이려는 시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위화도 회군신에서는 드라마 정도전의 우왕보다도 더 배짱이 없는데, 1화에서 회군 소식을 듣자마자 기겁해서 죽을상을 하다가 이성계가 최영의 처벌을 요구하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최 시중을 보내주면 과인을 살려준다더냐? 그래라, 보낸다고 하여라!"라며 흔쾌히 말한다. 그러나 대비에게 제정신이냐는 돌직구를 맞자 바로 철회한다. 이는 왕실의 어르신으로서 정비 안씨의 위엄과 우왕의 무능함을 드러낸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정도전의 우왕이 패배하고 돌아온 최영에게 "중과부적이지 않았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장면과 큰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는 매우 당당한 편. 죽기 직전에도 창왕의 죽음을 묻더니 이성계의 폐가입진 논리를 듣고는 허탈해 한 뒤, 야사 내용대로 "허나, 나는 분명히 왕씨이니라. 내 비록 열성조에 죄는 지었으나 왕씨이니라. 가서 역적 이성계에게 분명히 전하거라, 왕씨에게는 겨드랑이에 용 비늘이 있느니라."라며 그것을 보여주고는, 열성조에게 사죄하며 당당하게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 신돈(드라마)에서는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
  • 대풍수에서는 우왕의 저런 난행들이 이인임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암군의 행동을 벌이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더욱이 생모인 반야도 살아남았다. 결국 이인임을 숙청하는 데는 성공해서 왕다운 정치를 펼치려고 한다.
  •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등장. 권신 이인임 일파의 국정 농단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거기에 출생의 비밀에 대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혈기 넘치지만 우유부단한 청년 군주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더불어 용의 눈물처럼 우왕의 최후에 야사를 각색하여 넣었는데, 용의 눈물과는 다른 해석을 내려 몸을 인두로 지져서 생긴 흉터를 용의 비늘이라고 주장하다가 칼에 베여 죽는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암군으로 나오는건 동일하다. 자세한 건 항목으로.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뜬금없이 원래 제작진의 말로는 고려의 왕은 공양왕만 출연시키기로 했었으나 도당 3인방이 몰락한 후에 풍악을 울리던 도중 악공이 실수를 하자(음을 틀리자) 죽이려는 모습으로 첫 등장했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살벌했다..... 그리고 최영에게 홍인방길태미에게서 몰수한 가산들 중 일부를 자신의 내탕금[23]으로 요구하며, 하라는 정치는 안하고 굉장히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후 이성계를 불러 사냥을 같이 하는데 그때 그에게 요동 정벌을 명한다. 정도전이 그것을 막으러 계략을 꾸몄지만 결국 이성계의 결정으로 실패하며, 그가 요동 정벌을 떠나자, 최영과 함께 이방원을 제외한 이성계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다. 하지만 압록강 위화도에서 병사들이 죽는 것을 보다못한 이성계가 회군하자, 개경에 있는 가족들은 이성계가 들어오는 순간 만월대 성벽에 세워 인질로 세우려고 했고, 서경에 있는 두 아들 이방우와 이방과를 죽여 효수하려고 했으나 개경 쪽은 이방원, 서경 쪽은 무휼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이성계는 성까지 쳐들어오게 되고, 몸을 피하라고 하는 최영에게 한마디 하는데…
> 당신들이 왕을 하라기에 왕을 했소. 당신들이 놀라기에 향락 속에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당신들이 정치를 해보라기에 하려고 했지. 헌데 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소.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허나 난 당신들이 그리 비교하던 공민대왕 보단 딱 한가지 나은 것을 보이려한다. 과인은 궁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오.
결국 최영은 패배하고 자신은 폐위된다. 이색과 정도전 일파의 거래로 강화도에서 여주로 옮겨지나, 이후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척가(척인광)를 소개받은 뒤 이성계에게 하사품으로 내린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계를 암살하려는 무명의 계획에 꼭두각시로 이용당한 것.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후 아들 창왕도 폐위되고, 그 뒤 사형당했다는 언급만 나온다.

12. 같이보기


[1] 우왕은 후대에 붙여진 왕호로, 이름인 '우'에다 '왕'을 붙여서 우왕이라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딱 2번 쓰인 사례를 제외하면 그냥 신우로 불렸다.[2] 폐위 후 여흥으로 귀양가 있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여흥왕(驪興王)이라 불렸다.[3] 아들인 창왕은 후폐왕(後廢王)이라고도 한다.[4] 우왕이 왕씨 핏줄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는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의 주요 명분이었으므로, 조선 5백년 내내 ''''신우''''로 지칭되었다.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도 신우라고 써 놨다. 조선이 망하고 우왕이 왕씨냐 신씨냐 논의가 자유로워진 현대에도 신(辛) 씨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긴 하나, 이는 이성계를 비롯한 신진사대부 일파의 왜곡이라는 것이 현대 한국 학계의 정설이다. 두산백과한국어 위키백과에도 우왕의 본명을 왕우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는 아들인 창왕도 마찬가지다.[5] 아명은 모니노(牟尼奴).[6] 공식적으로는 혈통에 대한 의혹을 피하기 위해 공민왕이 우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발표할 때는 궁인 한씨(순정왕후 한씨)가 친모라고 포고되었다. 물론 이후에 반야가 친모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조선 왕조 역성혁명 과정에서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근거로 써먹혔다. 그런데 반야가 생모라는 것부터 조작이고 순정왕후가 생모가 맞다는 주장도 제기된다.[7] 조선 제 3대왕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생월까지 같다. 이 쪽이 나흘 먼저 태어났다.[8] 부(父)-아비 부라고 읽지만 위인을 높여부르는 경우 보라고 읽는다. 공자영어 이름이 confu인 것 역시 공자를 공보라고 부르는데서 유래함[9] 보통 순정왕후는 1376년에 사망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사에서 그녀는 봉은사에 묻혀 있었고 1376년 의릉(懿陵)으로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1376년 이전에 사망한 게 된다. 그녀가 우왕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는 말도 있으나 사실 그녀가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10] 아버지 공민왕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이었다. 강령이 강릉의 별칭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버지와 같은 지역의 부원대군이 된 것.[11] 명덕태후의 친정 남양 홍씨김용의 난으로 홍언박이 죽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태풍 때문에 빠져 죽고, 공민왕 시해로 죽어 나가고, 이인임 일파에 밀려났다가 이인임 일파가 숙청당할 때 염흥방과 인척이라서 죽어 나가는 등 많이 죽는다. 참고로 공민왕을 시해한 홍륜의 증대고모가 명덕태후. 홍륜과 홍관은 국왕인 동시에 자신의 할아버지뻘 친척을 살해한 것이다.[12] 회흘 (위구르#s-1) 가문으로 공민왕 때 온 학사인 설송의 아들인 설장수가 사신로 다녀왔다. 4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후에 위화도 회군 후 창왕 폐위와 조선 건국에 동의하며 영달을 누렸다.[13] 원정에 대한 회의는 다른 장수들에게도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화도 회군 때도 창왕 때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이성계의 4불가론이 비판 받기도 하지만 당시 고려의 상황이나 이성계의 4불가론 내용들을 보면 대국에 허리를 굽히는 비굴한 태도라고만 말하기 어렵다. 그리고 요동 정벌을 하겠다면 무더운 여름이 아니라 병량을 확보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한 가을로 잡자고 건의한 것도 묵살됐다.[14] 최영이 목호의 난을 토벌하러 제주도에 내려가 있었을 때 우왕의 아버지 공민왕이 홍륜 일당에게 시해당했다. 이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는 우왕으로서는 최영이 곁에 없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15] 드라마 정도전 28회에도 나오는데, 방영 당시 몇몇 시청자들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지적했다가 엄연히 고려사에 기재된 정사였다는 사실에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16] 이 야사와 연결되는 설화로 작제건 설화가 있다.[17] 왕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칼, 즉 전어도(傳御刀)로 알려진 그 검이다. 이방원이 제작한 복제품이 실유물로 남아있다. 150cm짜리 괴물검.[18] 일반적으로 노국공주 사후 공민왕이 미쳤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신돈을 기용해서 개혁을 추진하고, 이후 신돈을 몰아 낸 사람이 공민왕이다. 또한 자제위 같은 경우에도 동성애적인 것이 아니라 근위세력 양성이였다라는 의견도 있는 만큼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19] 윤두수. 우창비왕설의 연구. 『고고역사학지』 5.6합집, 1990년 인용[20] 왕자가 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도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이 되었다. 물론 자라면서 외모가 왕과 빼다박았다든지, 그 외에 각종 유전적으로 동일한 특성이 나타나면 대체로 해결이 되었지만 재수없이 외탁이라도 해버리면 답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의혹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도록 왕과 결혼한 여자는 궁 안에만 박아두고 궁 안에 남자 구실 할 수 있는 남자는 왕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대규모 스캔들이 터지지 않고서야 왕비나 후궁이 낳은 아들은 무조건 왕의 아들이니까. 그러나 우왕은 공민왕이 밖에서 데려온 아들이므로 그러한 안전장치가 없는 사생아다. 하다못해 조선 영조도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일지언정 일단 후궁이 된 뒤에 낳은 둘째라서 아버지가 숙종인 것은 분명했다. 우왕은 영조만큼도 안되는 혈통증거력을 가진 셈이다.[21] 다만 정종에게 서자밖에 없다는 논리로 적자인 태종이 정종의 양자가 되어 즉위한 걸 보면 조선 초기까지는 관념이 남아있던 게 맞다. 거기다 조선 초기만 해도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방계 왕자들도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서 적자를 많이 낳았기에, 선조 이전까지 쭉 정실 소생의 적자가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각한 저출산과 요절을 겪으면서 조선 왕실에선 남녀 안 가리고 씨가 마르다시피 해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22] 사실 되려 우왕은 홍사우를 아꼈다.[23] 쉽게 말하자면 왕의 용돈이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