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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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및 미군정 시기에 활동한 지질학자로, 8.15 광복 당시 경성제국대학의 유일한 조선인 교수였으며 국립서울대학교의 교수 및 대한지리학회 초대 부회장을 역임했다.
2. 생애
1900년 10월 4일 경상북도 김천군 농소면 월곡동에서 부친 김학배(金鶴培)[2] 와 모친 윤연봉(尹延鳳)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개령공립보통학교[3] 를 거쳐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191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히로시마의 산요(山陽)중학교와 마쓰야먀고등학교[4] 을 졸업하고 1928년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지질학과에 입학하여 1931년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주가이(中外)광업주식회사 상주광업소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 일본 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지질학교실 대학원에 들어가 연구생활을 했다.[5]
귀국하여 조선광업진흥주식회사의 조사과장 및 기사로 근무하다가 경성제국대학에 지질학과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공학부 광산야금학과의 강사로 채용되었고 1945년 7월 13일 교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경성제대의 유일한 조선인 교수였으며, 경성제대의 역사를 통틀어도 조선인 교수는 김종원을 포함하여 4명에 불과하다.
교수가 된지 불과 한 달만에 8.15 광복을 맞았고 경성대학을 거쳐 국립서울대학교로 소속이 바뀌었다.
조선총독부 산하 대륙과학연구소 연구원과 조선자원과학연구소 소장을 겸임하였고, 대한지리학회 및 대한지질학회 창립에 공헌하여 대한지리학회 초대 부회장을 역임했다.
온순하고 과묵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항상 허름한 복장으로 자주 답사를 다녔다. 배낭에 항상 돌을 넣고 다녀 부친으로부터 "돈들여 공부시켰더니 돌멩이만 지고 다닌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1947년 동두천의 광산에 답사를 갔다가 식중독에 걸려 서울로 돌아온 지 사흘만인 1월 23일에 별세했다.
1915년 15세의 나이에 이웃 동네의 16살 이홍보(李洪甫)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1933년생 외동딸 김정희(金貞姬)를 두었다.
3. 참고문헌
허우긍, 대한지리학회 초대 부회장 김종원(金鍾遠)의 일대기: 1900~1947, 대한지리학회지 제54권 제3호 2019(42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