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미합중국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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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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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8일 ~ 1948년 8월 15일'''
'''미군정 설치 이전'''
'''정부수립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제1공화국'''
'''위치'''
한반도 38도선 이남과 부속 도서
'''정치 체제'''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1945년 9월 8일 ~ 1947년 2월 5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김규식 (1946년 12월 12일 - 1948년 5월 30일)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 (1947년 2월 5일 - 1948년 9월 15일)
'''군정장관'''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1945년 9월 11일 ~ 1945년 12월 17일)
아서 러치(1945년 12월 18일 ~ 1947년 9월 11일)
윌리엄 프리시 딘(1947년 10월 30일 ~ 1948년 8월 15일)
찰스 헬믹(1948년 8월 15일 ~ 1949년 1월 11일)
'''주요사건'''
1946년 3월 20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
1946년 7월 1일 좌우합작운동
1946년 10월 1일 대구 10.1 사건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2]
1. 개요
2. 역사
2.1. 군정 이전(~ 1945. 9. 8)
2.2. 군정 초기(1945. 9. 9. ~ 1947. 2.)
2.3. 군정 후기(1947. 3 ~ 1948. 8. 14)
2.4. 여론 관련 자료
3. 같이 보기
4. 관련 인물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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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략) 북쪽이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친위공산세력을 기초로 하는 정부조직을 만들고 있을 때, '''남쪽은 미국이라는 강력한 또 하나의 세력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모든 정부를 불인정하고, 새 정부 건설은 자신들이 적극 주도하겠다는 노골적인 의사를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정객들은 정파와 이념에 따라 서로 갈등하고 분열되고 있었다. '''공산주의민족주의, 즉 역사에 큰 상처로 기록되는 분단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레이션 - 야인시대 51화에서.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약칭 '''미군정(美軍政)'''은 1945년 8월 광복 이후, 미 육군 제24군단이 진주하여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조선총독부에게서 한반도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이어받아 38도선 이하 한반도(및 그 부속 도서)를 통치했던 기구, 혹은 그 시기를 가리킨다.[3]
군정 사령관은 제24군단장 존 하지 중장이었고 이후 소장급 육군 장성이 군정장관을 맡았다. 하지 중장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예하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미군정도 맥아더가 주재하던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 집중하고 있어 한국의 미군정에 대해서는 간섭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고, 사실상 미군정은 미국 본토의 지시를 받았다.

2. 역사



2.1. 군정 이전(~ 1945. 9. 8)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들어가던 시기, 추축국 패배가 서서히 다가오자 연합국 측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미국, 영국, 중화민국 참여)에서 일본 제국을 해체하고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에서 이를 재확인하였다. 이에 앞서 1945년 2월에는 얄타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이 이루어져 독일 항복 이후 2 ~ 3달 안에 소련이 일본 전선에 개입할 것을 약조하였다.
한편 중국 충칭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이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었고, 1941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보다 북쪽인 연안에서는 1942년경부터 조선독립동맹마오쩌둥 등의 공산 정부와 합작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극심한 감시로 독립운동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여운형 주도로 1944년 조선 건국동맹이라는 비밀 결사가 세워져 있었다.
1945년 8월에 들어가면서 일본 제국은 말 그대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을 사실상 정리한 미국은 일본 본토 폭격에 들어갔고 종전을 앞당기기 위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대일본전 참전 요구에도 불구하고 관망하고 있던 소련은 히로시마 원폭이 이루어진 직후에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파죽지세로 만주를 장악하고 '''한반도 북부까지 진입했다.'''(원래부터 소련군 무장해제 지역에 두만강 하류의 함북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서술은 마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기회주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는데, 실제로는 나치 독일을 상대로 1945년 5월에 항복을 받고 3개월 가량의 시간을 달라고 했고 (부대 재편성 등의 시간도 필요했다.) 약속을 지켜서 5월로부터 3개월 뒤에 일본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대표로 여운형과 교섭을 시도했으며, 여운형은 일본인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5개조 요구를 들어 행정권, 치안권의 이양 등을 약속받았다. 여기에 송진우 선 교섭설이 존재하나, 신빙성을 놓고 말이 많다. '한국현대사 박사 1호' 연구자인 서중석은 '총독부의 송진우 접촉까지는 사실이나, 이는 명백히 여운형의 경우와는 다른 하급 수준의 것이었으며, 송진우가 총독부의 정권담당의뢰 또는 치안담당의뢰를 거절했다는 설은 한민당 측에서 자신들의 일제시기 행위를 은폐하고 건준과 여운형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요하게 주장했다'고 규정지었다.
조선총독부는 성급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운형의 요구를 사실상 전부 수락했다. 일례로 정치범 석방의 경우 엔도 정무총감은 최소한 연합군이 행정권을 이양한 뒤에 이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4] 결국 여운형의 안대로 즉시 석방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관하여 '''조선총독부에는 어떠한 훈령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당연히 이미 함경북도에서 조선주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소련군이 결국 한반도 전체를 접수할 줄 알고 급하게 신변이나마 보장받고자 했던 것. 같은 시기 이미 점령당한 만주국의 일본인들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물론 조선총독부가 자기 발등을 찍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일본이 항복하고 난 뒤였다.
한편 전쟁 말 처절한 혈투를 벌이며 겨우 오키나와 진입에 성공하여 주둔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지 사흘도 채 되지 않아 만주국을 함락시키고(만주 전략 공세 작전)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는 것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꼈다. 미국 측도 태평양 전쟁을 조기에 끝내면서 미군의 피해를 경감시키는 효과를 누리고자 소련의 참전을 요구하였던 것인데 현실은 일본의 마지막 카드였던 만주의 관동군은 이미 규모만 컸지 종이호랑이였으며,[5] 이 때문에 소련군은 만주에서 고전하긴 커녕 많은 물자들이 소련의 전리품으로 그냥 넘어가게 되었다. 여기에 소련군이 정해진 곳에서 멈추지 않고, 청진과 함흥을 지나 평양에까지 계속해서 내려오게 되면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이 점령하지 않을까 걱정한 미국은 1945년 8월 11일경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38선 한반도 분할론을 소련 측에게 제시하였다. 미국은 한반도를 분할하더라도 반드시 수도인 서울은 포함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마침 서울 북쪽을 지나고 있던 38선을 그 기준으로 삼았다. 미국의 이런 제안에 대해 소련은 생각 외로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소련이 전쟁을 유럽 지역에서만 하였고 동아시아, 태평양 전역에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정도가 매우 적었으므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발언권이 없다고 생각하여서 이러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 [6][7]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이 "우리가 먼저 들어와서 다 먹었으니 이거 다 내꺼야" 라고 할 줄 알았지만, 반대로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이 "우리는 태평양에서부터 일본 아작냈고 니네는 숟가락만 얹었으니 이거 다 내꺼야" 라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예상보다 훨씬 양보된 입장을 표명하니 양쪽 모두 놀란 것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다. 여운형 등은 건국동맹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8월 말까지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세력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행정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아 마찰이 벌어졌는데, 이는 일본 본국에서 행정권을 미국에게 이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김성수, 송진우 등은 '임시정부 봉대(奉戴, 받들어 추대함)'를 주장하며 건국준비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러던 중 9월 초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건국준비위원회 측은 마음이 급해졌다. 때문에 9월 3일 내각 개편이 이루어지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비중이 좌익측으로 기울자 안재홍 등 중도 우파 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 /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탈퇴하였다. 그러나 9월 7일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은 포고령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이에 얼마 가지 않아 실권이 없는 조선인민공화국은 와해됐다. 심지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임시정부나 조선인민공화국과 같은 여타의 독립운동 단체 및 자칭 정부들은 당시 국민들의 보통선거와 같은 공식적 정부 수립 절차를 갖추지 않아 이들이 국민들을 대표한다는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독립 운동 단체들을 공식 정부로서 승인하게 된다면 해방 후 조선 국민들이 직접 참정권을 행사하여 정부의 형태와 인적 구성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침해된다고 지적하였다.
미군정의 법률고문이었던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 1898~1975)은 미군정이 한반도를 점령한 것과 미군정이 유일한 적법 정부임을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우며 정당화 하였다.

1. 조선의 해방이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의 파기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았음.

2. 조선의 해방이 조선인들에 의한 혁명적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음.

3. 조선의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와 연합국의 결의에 따른 것이므로 현재 한반도는 어떠한 세력도 영향력이 없는 무주지(無主地)임.

미군정은 9월 9일 서울로 진주하였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2.2. 군정 초기(1945. 9. 9. ~ 1947. 2.)



1945년 9월 9일 미 육군에 항복하는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육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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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조선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8] 그리고 미군정이 선포됐다.
미군정 진주 이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당 형태로 정치 세력을 전환하고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들 또한 당을 조직하였다. 이 시기 난립한 당파는 수백 개를 상회하므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우나, 주요 정당들을 대략적으로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1945. 10. 이후)[9] - 우익
  • 김규식, 안재홍 중심의 국민당(1945. 9. 24. 성립) - 우익(중도우파)
  • 김성수, 송진우 중심의 한국민주당(1945. 9. 16. 성립) - 우익[10]
  • 김원봉 중심의 조선민족혁명당(1945. 10. 이후)[11] - 좌익
  •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1945. 9. 16. 성립) - 좌익(극좌)
  • 여운형 중심의 조선인민당(1945. 11. 12. 성립) - 좌익(중도좌파)
  • 이승만 중심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1945. 11. 이후) - 우익
이 중 한국민주당은 미군정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므로 미군정 측에서도 이들에 호의적이었으나 대중적 지지율은 낮은 편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지지율이 높았던 이승만을 한민당과 연대하도록 주선하였다. 또한 미군정은 김구와도 접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완고한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였던 김구와 거리가 멀어졌다.
이 시기에는 정치 세력 대부분이 한반도에 단일 정부가 수립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정치 대립이 그 이후만큼 격하지는 않았다. 이건 남한 지역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에도 마찬가지여서, 38선도 원래는 소상인들이 물건 팔러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경비가 느슨했다고.
다만 정치 부분을 벗어나면 일제 치하에서 눌렸던 각종 불만들이 민주주의 이식을 표방하던 미군정하에서 폭발하였으므로 이로 인한 혼란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해외 동포의 다수 귀국과 공출 - 배급제 해지에 따른 쌀값 폭등이었다. 이에 1946년 1월 미곡수집령이 발표됐으나 운영 미숙으로 다시 한번 혼란을 가져왔다. 이외에 소작제, 토지 분배 등을 놓고 쟁의가 계속되었다. 미군정 측은 소작료를 수확량의 1 / 3로 제한하고 일제 아래 지주의 토지를 매각하는 등의 노력을 하긴 했으나 이는 농민의 불만을 수렴하지 못했으며 사회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진 북한과 대비되면서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후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의 한국문제특별위원회에서는 3년간 5억 4천만 달러를 한국에 뿌리려 했으나 계획단계에서 그쳤다.
하여튼 다시 정치로 돌아와서,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위한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안이 전달되면서 남한 지역의 정치판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타국에게 정치를 맡긴다는 신탁통치안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견딜 만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감정적으로는 35년의 식민 통치를 겨우 벗어난 한국 시민들에게 악몽의 재림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이러한 전달이 미국과 소련 측 입장이 뒤바뀌어 전달된 것이다(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우익 측(이승만, 김구, 한민당 등)은 반탁 운동에 나서면서 나섰고, 좌익 측(박헌영 등)은 본래 대개 반탁 혹은 중립적 행보를 보였으나 박헌영 등이 소련에 갔다온 이후에는 찬탁으로 선회하였다.[12] 반면 중도 세력 측은 신탁통치안을 보류 혹은 수용하려는 반응을 보이되 한반도 안의 임시정부 수립안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시민의 지지는 우익 측으로 향했으며 좌익 측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한편 좌우파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파(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의 세력 또한 위축됐으며, 우익의 대표 인사였던 송진우마저도 신탁통치에 대해 (다른 우익층에 비해 비교적)호의적인 발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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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제1차 미소공위에 참여한 이승만, 김구, 테렌티 시티코프, 안재홍 (순서대로)
이후 1946년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위원회는 초기에는 그럭저럭 잘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참여할 정치 세력을 놓고 미소 양측이 대립하면서 결국 결렬되었다. 소련 측은 3상회의안에 반대하는 반탁 세력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 측은 3상회의 안에서 한반도 세력이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들어 한반도 안 정치 세력을 배제할 것을 논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모든 정치 세력을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5월에 회의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한 연설에서 남한 지역만이라도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할 것을 주장하였는데(정읍발언), 이는 사실상의 단독 정부 수립안이었다. 한편 격화된 좌우 대립과 단독 정부 수립안에 위기감을 느낀 중도 세력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46년 10월에는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았다. 이 당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대단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극좌와 극우 모두에게서 배척받는 중도의 한계점을 보였다. 가령 '무상 / 유상 / 유조건 몰수 → 무상 분배' 안의 경우 우익 측에서는 무상 분배를, 좌익 측에서는 유상 / 유조건 몰수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양측 모두 '돈 주고 사서 돈 없이 배분하면 재정이 파탄난다'는 반대 의견을 냈으며 이 또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판단은 알아서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좌우익 모두를 수렴하려는 노력이 결국 좌우익 모두의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는 동안 미군정 측은 중도 세력과 교섭하여 1946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과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세웠으나, 여운형 세력 등은 남조선 과도 정부 수립 단계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 초부터 국방경비대, 경찰 등을 창설하거나 강화하였는데 이는 좌익 측에 대한 압력으로 이어졌다.[13]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공산당(후에 남조선로동당)은 쟁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46년 9월 30일, 부산에서 철도기관사들이 일으킨 파업부터 시작해 총파업이 일어났고, 여기서 경찰의 민간인 발포로 우발적으로 터진 대구 10.1 사건이었다. 그러나 쟁의가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탄압 또한 격화됐으며, '정책의 역전' 이후 좌익 측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월북하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 북부에서는 1946년 초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 주도의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 정책으로 인해 많은 월남민들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문에 서북청년단 등의 정치 세력 등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민선의원과 관선의원 45명씩으로 구성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과도기적 국회의 역할을 하였다. 다음 해인 1947년 2월에는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로 바꾸고 한국인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였다.[14]
경제에 있어서는 일본인 자본 및 기술자의 철수, 만주 및 일본과 교역 단절 등으로 혼란이 심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의 황폐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일제가 통화발행량을 늘려버려서 통화량이 매우 팽창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이 물가안정이나 산업부흥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통화발행량을 오히려 늘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1945년 말에 미곡 가격 자유화 정책을 펴면서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랐기 때문이다. [15] 여기에 미군정이 정부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지폐 발행'''으로 조달하는 바람에 초인플레이션 현상까지 벌어졌고, 이러한 혼란을 틈타 매점매석이 판을 치며 서민들의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여기에 토지개혁을 차일피일 미루면서도 서울 등 도시에 필요한 쌀을 농촌에서 강제로 수매하기도 했고, 조선인들이 적산들을 사원들이 모여서 자체 운영하려고 했던것을 무효로 만들고 엉뚱한 자들에게 불하하는 등 개판의 연속이었다. 소군정이 재빠른 토지개혁과 물가통제 정책으로 경제가 재빨리 안정화되었던것과는 대조적이었고, 이 때문에 미군정에 대한 여론이 극히 나빠질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이 이렇게 한반도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을 실행한 것은 미군정이 한반도에서 얻은 정보들은 구 조선총독부가 넘겨준 정보가 전부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 중 미국에서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기자회견을 통해 알리자 그 어떤 미국인들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 식민지가 된 한반도가 근대화되지 않았냐는 식의 질문을 해 이승만이 울화통이 터질 정도였다. 이는 광복 뒤에도 마찬가지로 이승만이 미군정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해도 듣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였다가 낭패를 보았다. 심지어 한국전쟁 와중에는 구 일본군을 투입시켜 병력열세를 만회하자는 주장을 했다. 일본군이 한반도를 지배한 만큼 한반도 지리를 잘 알고 일본군이 한반도에 오랫동안 주둔한 만큼 일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친근감'''도 있어 빠르게 적응할 것이라는 황당한 판단이었다. 당연히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군이 들어오면 일본군부터 먼저 무찌르고 볼 것"이라며 비판하였고 미국은 이 계획을 철회하였다.
다만 미군정이 정말로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는지는 의문의 여지도 있다. 1947년 8월 26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보낸 특사인 앨버트 웨드마이어 중장(1897~1987년)은 조선에 들어와서 8일 후인 9월 3일에 떠났는데, 그 와중에 정인보를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해서가 아니라 친일 협력자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좌익의 길을 택했다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으나[16][17],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자신이 들은 조선인들의 말을 들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정책은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본다면,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우격다짐으로 무시해버렸다고 볼 여지도 있다.[18] 마치 2003년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이 수많은 이라크 관련 전문가들의 충고를 듣고서도 깡끄리 무시해버린 것처럼.
그리고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들은 조선인 여자들을 상대로 강간 범죄를 여러 번 저질렀다. 해방 이후 남한 사회를 지배한 반공 정서 때문에 소련군의 강간은 크게 부풀려서 선전된 반면, 미군들의 강간은 오랫동안 철저하게 금기로 취급되어 묻혔으나, 미군들의 강간 범죄는 엄연히 존재했던 사실이었다. 링크1, 링크2, 링크3 심지어 1945년 10월 17일, 부산에 사는 박씨 성을 가진 조선인 남성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은 미군들은 조선인 신부와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우기다가 박 씨가 거부하자 화를 내며 권총을 쏘아 박 씨를 죽여버린 일도 있었다. 링크

2.3. 군정 후기(1947. 3 ~ 1948. 8. 14)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 또한 뒤바뀌게 되었다(정책의 역전, Reverse Course). 이 트루먼 독트린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열풍이 불게 된다.[19] 이전까지의 정책이 좌익 측에 대해 비우호적일지언정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지키려 했다면, 이 이후의 정책은 아예 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성향이 강해져 좌익 측의 활동은 아예 불법화되었다. 이에 맞춰 좌우합작운동 등에 대한 지원 또한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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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목(영어통역관), 야코프 말리크, 테렌티 시티코프, 허헌
1947년 5월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는 초기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참가단체 선정문제를 놓고 제1차 미소공위 때와 같은 문제를 넘지 못하고 끝내 1947년 10월에 결렬되었다. 이 과정에서 1947년 7월에는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합작운동이 사실상 와해됐으며[20], 단독 정부 수립파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1947년 9월에는 미국 측이 제시한 한반도 내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이 UN 총회에서 가결되었으나, 소련 측은 북한 지역에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인구 수에 따른 의원 수가 적었다는 것이 그 이유로 꼽힌다). 이에 1948년 2월 UN 소총회에서 남한 지역만의 단독 선거 수립안이 결정되었다.

1947년 서울에서의 좌-우 대립 모습을 찍은 영상.
김구와 김규식 등은 이에 반발하고 1948년 4월경 남북 회담을 열었으나 이미 북한 단독 정부 수립안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던 김일성 등에게 형식상의 합의를 얻었을 뿐이었으며, 이는 이후 북한의 선전에 이용되는 불행만을 낳았다. 한편 무장 좌익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일어나 총선거를 방해하였고 미군정은 이를 진압했으나, 이에 대한 토벌 작전이 벌어지면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학살당했다(한편 여순사건이 4.3 사건에 연동하여 벌어지면서 군내 좌익 숙청 작업이 벌어졌다).
이후 선거가 연기된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지역에서 진행된 5.10 총선거로 제1대 국회가 성립되었는데, 여기에는 김구 세력이나 중도 세력 등이 대거 불참하였다(이는 당대에는 신념에 따른 일종의 보이콧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제1대 국회가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 위주로 편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선거에서는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는데, 이는 북한 지역 또한 대한민국의 관할에 있다는 상징성을 위해 남겨둔 것이다 7월 12일, 제헌 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같은 달 17일에 공포(제헌절의 기원)했으며, 7월 20일에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 이시영을 선출하고 본래 이승만이 맡았던 국회의장 직에 신익희을 선출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성조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걸리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미군정은 막을 내렸다. 미군정이 대행하던 각종 권한들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으며, 남아있던 미군정 관리하의 토지와 공장 등 적산 또한 대한민국 정부 소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군정장관인 찰스 핼믹은 1949년 1월 11일까지 군정장관으로 재임했고, 6월까지 정치, 군사고문을 맡았다.

2.4. 여론 관련 자료


광복 직후 1945년 10월, 중도우파 성향의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시민 2,000명에게 여론조사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image]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후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지지율
33%
21%
18%
16%
12%
후보
김일성
최현배
김규식
서재필
홍남표
지지율
9%
7%
6%
5%
5%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만식
김일성
사법부장
문교부장
경제부장
교통부장
노동부장
허헌
안재홍
백남운
최용달
박헌영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이 자료를 통해 여운형의 지지율이 매우 높았다고 단편적으로 해석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조금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일단 표본은 잡지사의 여론조사에 응할 수 있는 지식인층이었으므로, 일반 시민의 여론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여론조사는 '선구회' 잡지사에서 창간하자마자 기념으로 여론조사를 한 것이고, '그나마' 광복 직후 당시 정치색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 학계에서는 이 여론조사를 자주 인용한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여운형, 박헌영은 일제시대에 국내에서 활동을 하여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상태였고 특히 여운형은 일제와도 적당히 친분이 있어서 이런저런 공식 행사에 많이 참여하여 얼굴을 알렸고 라디오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여 대중들에게 매우 친숙한 민족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김구나 이승만 등은 일제시대 내내 거의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 대중들은 그들의 명성은 익히 알았지만 해방된 시점에서 실제로 직접 그들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어봤던 사람은 한반도에 거의 아무도 없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1945년 10월, 11월에야 각각 귀국했다. 즉 저 조사가 실시되었던 시점은 이승만은 아직 귀국하기도 전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단순한 수치보다 해외파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에 대한 지지율에는 또한 미군정과 교섭할 때 수월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좌익 측조차도 광복 직후 이승만을 미군정과 교섭할 인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9월 초 우익 측이 탈퇴하면서 좌경화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안에서 당시 국내에 있지도 않던 이승만을 주석으로 세운 점,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합류한 점(금방 탈퇴했지만) 등으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승만은 이러한 제안들을 거부했다. 이 시기까지만해도 이승만은 좌우익을 망라해 인지도가 높았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외에 1946년 7월,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는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29.2%), 김구(10.5%), 김규식과 여운형이 각 10.3%였다. 1948년 6월23일, 조선여론협회가 5개의 거리 행인에게 "누가 초대대통이 되기를 바랍니까?"라는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1,024), 김구(568), 서재필(118) 순이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인한 좌익 측의 위축이 눈에 띈다. 그러나 설문에 응답한 이들 가운데 '모르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전체에 30%가량이나 될 정도로 많았고 미군정에서 여론조작 공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설까지 있어 신뢰성이 떨어져 학계에서는 이 자료를 그다지 많이 인용하지 않는다.
이 두 여론조사에서 유추해보면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한민당 세력 인사들은 단 한 명도 뽑히지도 거론되지도 않았다. 이는 당시 민심이 한민당을 얼마나 혐오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광복 이후 당시 민심은 사회주의 성향이 다분히 강했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21]의 기사에 따르면, 미군정 당국에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시민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한다는 여론이 70%나 되었다. 반면,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응답한 이들은 각 14%, 7%정도였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3면 참조. 다만 1945년 당시 한국의 문맹률이 77% ~ 80%에 달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과연 정치 사상에 대해서 일반 시민이 얼마나 깊은 이해도를 갖고 있었을지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소작 등 부조리한 수취 구조에 대해 '부의 재분배'를 원하는 시민이 몹시 많았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해도 어디까지나 온건해 보이는 사민주의를 원하는 의견이 강했다고 봐야지, 공산주의를 찬성한다는 응답이 매우 낮은 것은 주목해야할 사실이다. 해당 조사에서 제일 지지받는 정당은 민중의 존경을 받았던 김구나 여운형이 속한 한독당과 인민당이었지만, 제일 지지받지 못하는 정당은 다름 아닌 공산당이었다.[22]
1950년 5월 벌어진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이 속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이승만에 대한 비토하는 여론에 의해 제3당으로 밀려난다. 물론 이 때는 전체 국회의원 당선자들 중 무려 절반이 정당이 없는 무소속이었다.[23]

3. 같이 보기



4. 관련 인물



5. 관련 문서



[1] 미국의 군정이었으므로 성조기가 곧 국기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1946년 1월 14일 존 리드 하지 중장 등이 참여한 행사에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역사 자료가 남아 있다. # [2] 경기도(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및 황해도(옹진군, 연백군) 일부. 그 전에 북한대한민국과 똑같이 한반도 전체를 자기 영토라 주장한다.[3] 한편 38선 이북에서는 소련 육군이 진주하여 통치하였다[4] 같은 시기 일본은 10월 GHQ의 인권 지령에 의거하여 치안유지법이 철폐될 때까지 정치범과 사상범이 그대로 수감되어 있었다.[5] 규모는 71만 3천 명이나 되었지만 격화된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최정예 사단들이 전부 빠진 상태라 관동군은 완전히 잡병으로 전락해 있었다. 오죽하면 일본 자체적으로도 관동군 전체 전력이 미군 4개 사단도 안 된다고 평가했을 정도.[6] 참고로 이 제안을 소련에서 불복할 시에는 37도선까지로 합의를 보려고 했다는 기밀 문서의 내용도 존재한다.[7] 북위 37도선은 아산만부터 울진 앞바다까지를 가른다. 즉, '''서울특별시를 포함한 경기도강원도 전 지역이 소련 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8] 사진을 보면 깨알같이 미군들이 성조기가 게양되는 순간 성조기에 경례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9] 김구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환하기를 원했으나 이를 거부한 미국 측과 한동안 마찰을 겪었으며, 결국 한국독립당이라는 정당의 형태로 전환하였다.[10] 송진우가 암살된 이후에는 극우 성향을 띠게 된다.[11] 이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된다.[12] 여기에 존스턴의 왜곡보도도 커다란 한몫을 했다.#[13] 다만, 국립 경찰을 강화하는 부분은 좌익 측뿐만 아니라 민심에도 상당히 부정적인 여론을 초래시켰다.(당시 국립 경찰에는 일제시대 때 일했던 친일 경찰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민들을 가혹하게 다뤘다.)[14]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인 군정장관이 우위에 있었다.[15] 1911년 조선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777달러였으나, 해방되던 1945년에는 1911년만도 못한 616달러로 내려 앉았다.링크[16]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8039[17]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 정무용(28)씨는 당시 한국인들이 미 육군 중국전구(中國戰區) 사령관 출신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 사절단에게 보낸 편지 450여 통을 16일 공개했다.정씨는 논문에서 한국인이 호소한 요구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 사절단이 남한의 대표로 우익 세력을 선택하기 위해 편지가 지적한 문제들을 묵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1951년 ‘우익이 한국 민중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 한다’는 부분을 빼고 보고서를 작성했다가 72년 이를 되살렸다.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3413313&code=11131100[18] 실제로 서울 주재 소련 부영사 아나톨리 샵신(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Шабшин, 1910년 10월 15일 ~ 1967년 1월 15일)의 아내로, 1940년에서 1946년까지 남한에서 살았던 파냐 샵시나(Фаня Исааковна Шабшина, 1906년 10월 25일 ~ 1998년 10월 4일)와 대화를 나눈 조선인 화학 교수는 "미국인들이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오만하게 대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전쟁 전까지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조선에 살았었답니다. 그들은 우리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대체로 우리처럼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양키들을 잘 알고 있지요."라고 말한바 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65449#09T0[19] 이는 한반도뿐만이 아닌 일본 GHQ에서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일본GHQ의 '레드퍼지'(역코스 정책) 이전까지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였다.[20] 이때 민정관 E. A. J. 존슨에 따르면 당일 미국은 여운형에게 민정장관직을 타진하려고 했고, 여운형 역시 당일 북한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문서를 지참했다고 한다.[21] 한국민주당김성수가 창립해서 한민당의 입장을 주로 대변하였다.[22] 이는 당연한 것이, '자본가놈들에게 착취받는 인민을 위한 혁명전사가 되어, 맨주먹을 쥐고 붉은 피를 흘리며 굳세게 싸워서 적의 배에 깃발을 꼽아 승리를 쟁취하자' 식의 사나운 말들을 쏟아내는 공산당 특유의 구호가 정치보다 생활수준 향상에 더 관심이 많았던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 너무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대다수 국민들이 반대했던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까지 엮이게 되자 공산당은 '나라 망치는 매국노'라는 평판까지 생겨 이미지가 더 나빠져 버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쯤 되면 공산당은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구속되고, 극소수만이 깊은산 속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등 사실상 자취를 감추게 된다. 6.25 전쟁 당시 '우리(북한)가 남침하면 굶주리고 핍박받는 남조선의 민중들이 우리에게 적극 협조하여 빠르게 한반도에 붉은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라는 북한 부수상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다르게, 전쟁 전 농지개혁법으로 인해 소작 문제가 개선되고 일정 토지를 얻게 된 남한의 민중들은 막상 위의 '붉은' 사상과 소수의 부역자들 위주로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인민군에게 비협조적이었고, 이는 초전박살로 남한을 쉽고 빠르게 먹을려던 북한의 작전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된다.[23]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자유당으로 개편하여, 공산당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구국의 이미지를 내세운 프로파간다를 잘 이용해서 1954년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과반수가 넘는 득표율을 얻게 되어 여당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24] 사건 자체는 일제강점기 때 일어났으며, 조선어학회 학자들이 광복 후 《조선말 큰사전》을 출판한 것은 미군정 시기인 194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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