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비판

 



1. 개요
2. 북만주 활동 문제
3. 김구의 증언
4. 동아일보
5. 청뢰 이강훈 증언
6. 정화암 증언
7. 원홍기의 증언
8. 간민호회 테러와 최계화 암살
9. 지혜겸의 증언
10. '마왕', '폭군'이라는 별명
11. 김좌진이 살해된 근본 이유
12. 독립기념관 편찬도서에서
13. 본 내용은 조선족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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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민부는 군자금의 대부분을 신민부의 관할구역에 거주하는 재만동포의 의무금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창립총회에서 논은 소상(小) 2원(元), 대상(大) 3원, 밭은 소상 1원, 대상 2원 5각(角)씩, 상인들에게는 소유재산의 20분의 1을 징수하도록 하였고,註 186 1925년 10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매호당 6원의 의무금을 징수할 것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 ''우선 당시 북만동포의 대부분이 소작농으로서 경제사정이 좋지 못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북만청년총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의 조직적인 반대공작이 있었다. 그 결과 1928년 11월 18일에는 빈주사건(賓洲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북만지역에 있던 재만농민동맹과 주중청년동맹(住中靑年同盟) 등이 빈주현의 주민들을 설득하여 신민부를 탈퇴하도록 한 데서 일어났다. 빈주현은 신민부의 관할구역으로 오래 전부터 의무금을 내던 곳이었다. 이에 ''신민부원인 이백호(李白虎) 등이 이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권총을 발사해 사상자를 낸 것이다''...또한 훈춘(琿春)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신민부원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재만동포를 살해하기도 하였다''.註

'''국사편찬위원회''' 1988년 12월 30일#

대립의 결정적인 계기는 빈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민정파에서는 동포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한 살인행위라고 하고, “''민중의 생명을 학살하고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賣族的) 주구(走狗), 혁명적 사기한의 장본인 김좌진·정신 등을 매장하라”라고 김좌진·정신 등 군정파의 주요인물을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 주구, 혁명적 사기한 등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이때 군정파에서도 성토문을 내어서 군정파와 민정파는 적대관계에 이르게 되었다.註 220 이러한 양자의 대립은 곧 신민부의 세력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결국 해체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군정파, 즉 무장투쟁단체의 폐단...무장부대는 적을 토벌하고 적 기관을 파괴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었다. 실제 친일한국인의 암살 및 국내진입을 위한 예비공작 등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공작의 수행은 희생적 모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민부가 통치하고 있는 구역의 농민들이 안식처를 제공해 주고 생활을 보장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농민들이 가난한 탓도 있었지만 그들이 무장대원들에게서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협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일부 주민의 항일민족의식의 부족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무장대원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마치 무슨 권력이나 쥔 듯이 위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농민들을 사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군정파의 중심 인물인 김좌진의 총애를 받던 이백호였으며, 앞서 언급한 빈주사건은 그러한 이유로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농민들은 자연히 군정파에서 멀어져 갔다''. 또한 ''김좌진을 “마왕(魔王)·폭군”''이라고까지 칭하게 되었다.

...일반동포들은 표면적으로는 독립운동 단체라고 존경하는 척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공포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1988년 12월 30일#

한국에서 만주 독립군 중 이정도로 한인들에게 폭력적인 면이 서술되는 사례는 드물다.
김좌진의 과격성 서술은 한 때 나무위키의 독자연구로 의심받았지만 이미 1988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 이미 나온 내용이며 특히 농민들의 마왕이란 평가는 국사편찬위원회 저서에서 그대로 언급된다.

2. 북만주 활동 문제


당시 북만주에 사는 한인들은 가난했고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괴로운 삶을 살았다. 그런 상황에서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는 것도 힘겨웠다.
게다가 북만주 지역에 이주한 한인은 대부분 "무자력 농민"이었다고 한다. 특히 기본이 되는 농기구조차 스스로 갖고 있지 못했다. 또한 지주의 구휼이 없으면 당장 굶어 죽게 생긴 사람도 많았다. 거기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주와 소작관계를 체결할 때 농민의 처지는 너무나 불리했다.[1]
또한 북만주지역 한인들에게 도시는 멀었기에 땅은 넓은데 도시에 벗어난 지역에서 생활했다. 그러니 이 지역 한인들에게 근대적 금융기관은 먼 곳이었고, 돈이 필요하면 대부분은 은행이 아닌 중국인 지주에게 돈을 빌려서 빚을 지어야 했다. 이 빚 때문에 한인 농민들은 더욱 중국 지주에게 붙잡혀 살아야 했다. 당시 중국인 지주는 고리대금업자이자 상업자본가이기까지 했다.[2]
그런데 김좌진 세력은 북만주 한인들에게 강제로 돈을 뜯어냈다. 돈을 내는데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협박과 테러를 하며 위협을 했다. 그랬는데도 끝내 따르지않고 거부하면 죽여버렸다. 이런 테러활동에 대표적인 사람 중에는 이백호가 있다. 그는 신민부 군인세력의 중심인물인데 김좌진 장군에게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3] 농민들을 갈취하고 살해하는 테러범을 김좌진 장군은 총애했던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그런 낌새는 1924년부터 드러난다. 김좌진은 1922년 북만주 일대에서 대한독립군단(본부는 중소 국경지대인 동녕현)을 조직해 총사령관을 하였다.[4] 김좌진은 1924년 3월부터 부령 11호를 발표했다. 자신들이 군자금을 요구하면 돈을 줘야 하며 주지 않으면 "중형"에 처하게 할 것이며 본 군단을 외국 관헌에게 고발하면, 그 외국 관헌이 적국이 아니면서 신고자가 친일파가 아니라 해도 죽이겠다는 것이다.[5]

<부령 11호>

제1조 각 지역에서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순직한 씨명을 조사해서 역사책에 기입한다.

제2조 나라 일을 위해서 부상 또는 환자에 대해서는 상당한 구휼을 한다.

제3조 적의 우롱을 받아서 귀순한 자와 생활을 위해서 일시적 수종 동화한 자에 대해서는 정상을 작량해서 벌하는 것을 논의하고, 개정의 정이 확실한 자는 사면한다.

제4조 본 군단의 징모대 또는 모연대를 적 또는 외국 관헌에 고발한 자는 극형에 처한다.

제 5조 본 군단에 있어서 징모한 병사로서 병역의 복무를 기피하는 자는 중벌에 처한다.

제6조 본 군단에서 청연한 군자금의 납부를 거절한 자는 중벌에 처한다.

대한민국 5년 3월

대한독립군단 총 사령과 김좌진」

[부령 제 11호] (흑룡강성 당안관 소장),[6]

<부령 제12호>

일금 5천 원정

위 금액은 본년 음력 4월 말 까지 본 사령부 경리부에 직접 난입해야 한다. 만약 기일을 어길 경우에는 부령 제11호 제6호에 의거하여 처벌한다.

대한민국 5년 음력 4월 20일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

[부령 제12화](흑룡강성 당안관 소장),[7]

일본 제국은 조선(=대한제국)을 침략했고 한국인들은 일본에게 국가를 빼앗겼고 자신들의 영토를 일본에게 강제 점령당해야 했다. 일본에게 강제점령 당한 영토는 한반도다. 하지만 만주는 다른 국가인 중국의 영토였지 한반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재만한인들은 친일반역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도 중국 관헌에게 김좌진 측 군인을 고발할 권리도 없었고, 돈을 필수로 내야 했다. 물론 기존 중국 측에서 김좌진 측에게 정식으로 자치권을 허용해준 것도 아니다.
물론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이 들어오는 루트는 사실 위와 같이 지역 한인들을 괴롭혀서만은 아닌거 같다. 일제의 관동청경무국(關東廳警務局)은 1924년 11월 26일 일본외무성 아세아국과 조선경무국 등에 '김좌진金佐鎭 군자금 확보' 건을 보고한다.(秘 關機高授 제32743호)
"최근 김좌진은 자금이 부족하여 부하를 해산하고 모든 활동이 불능한 상태가 되었으나 금년 봄 조선 내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2만여 엔의 군자금을 제공하여 김좌진이 이 돈으로 옛 부하들을 소집하여 무장대를 편성하여 동지들을 거느려 동령현(東寧縣)으로 들어왔다. 김좌진이 보천교를 배경으로 행동하는 그의 장래는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김철수, P97)
독립군 북로군정서 김좌진 총사령관이 보천교 교주 차경석으로부터 수만 엔의 자금을 지원받아 조직을 재건하여 무력행동에 나섰다는 관동청 경무국장의 보고 내용이다. 그런데 차경석이 제공하기전까진 활동이 불능 상태될 때가지 절박했던 건 사실로 보인다.
그 뒤 1925년 3월 10일. 북만주엔 신민부라는 새로운 조직이 생겨났다. 북만주에 있는 여러 단체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였다.[8]
신민부는 제도만 보면 창립 때부터 삼권분립을 하긴 하였다. 신민부에서는 원로들로 참의원을 구성해놓았고,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검사원을 두었고 중앙행정위원회에 민사부 군사부 참모부 외교부 법무부 경리부 교육부 선전부 실업부 등을 두었다. 그러나 실제 조직 운영은 김좌진과 군정 세력이 주도했다.[9]
1920년대 후반부터 김좌진은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아나키스트와 연합했다. 신민부를 해체하고 혁신의회를 조직했다가 다시 해체한 뒤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다.[10]
이 과정에서 김좌진 세력이 벌인 테러는 당시 북만주 한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이러한 김좌진 측의 테러활동은 여러 자료가 증언하고 있다.

3. 김구의 증언


우리 한인들은 비록 중국 경내에 거주했지만 처음에는 가가호호에서 해마다 독립운동 기관인 정의부나 신민부에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세금을 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박한 동포들도 우리 무장대오의 지나친 위력과 침탈을 당하게 되자 점차 반발심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이 자기 집이나 동네에 도착하면 비밀리에 왜놈에게 고발하는 악풍까지 생겼다.'''

백범김구, 도진순 주해 2016년 전자책


4. 동아일보


당시 김좌진 측의 테러는 한반도의 언론인 동아일보에도 실릴정도였다.

신민부원체포. 중국 연길도윤은 훈춘 방면에서 활동하는 신민부원들이 군자금을 구하다가 응하지 않는다고 조선인 다섯명을 살해한 일이 있음으로 각현에 체포령을 내렸다가 며칠전에 잡히였다더라.[11]

신민부원과 주민충돌 여섯명 사상의 대참극

자금 모집 관례로 충돌되어

북만빈주현에서 돌발

북만빈주현에서는 지난달 그믐날 저녁 여섯시경에 신민부원이 그곳 주민 다섯, 여섯명을 살상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빈주현은 본래 신민부구역으로 오래전부터 ○○운동비로 주민들로부터 돈을 거두어갔는데 근자에 이르러 주민일동은 주민대회를 열고 신민부로부터 탈퇴하기를 결의하고 이 소식을 신민부에 통지하였더니 그말을 들은 신민부원들은 무장대 다섯, 여섯명을 보내어 주민과 충돌되어 그와 같은 참극이 생긴 것이라는 바. 류연동, 김봉진, 황혁 세 사람은 즉사하고 윤필한, 김유문, 장문숙 세 사람은 중상하여 목하생명이 위태하며 그밖에도 경상자가 많은 모양이더라. 」[12]


5. 청뢰 이강훈 증언


김좌진의 측근 이강훈도 그 점을 증언했다. 이강훈은 김좌진 장군의 측근인데 그런 측근조차 김좌진 측의 부당한 테러 활동을 증언하며 변호는 커녕 어떠한 변명조차 하지않고 있다. 또한 휴머니즘이 없는 테러리스트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김좌진 장군은 저자가 그 밑에서 오랫동안 일해왔기에 그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안다고 자부하는 일장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저자의 소견으로 김좌진장군의 치명적인 결점은 사람을 잘못 쓰는 데 있다고 본다.

총을 잘 쏘고 모험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중용하는 인사경향 때문에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북만주에서의 이른바 빈주사건이며, 집안 동생되는 김종진 학살사건도 이백호 박래춘 등 잔인한 사람들에게 모험을 잘한다고 무기를 주고 자유롭게 풀어 놓은 결과였다. 일제의 무리배나 그 주구 외의 동족에 대한 살상은 신중히 검토한 뒤에 혁명적 규범에 따라 처벌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난장판이었다.[13]

나는 북간도에서부터 동경하던 바와는 달리 민족 진영에 대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 광복이라는 대전제 밑에 모여든 인사들인만큼 항일의식은 욱일승천의 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행동은 제각기였고 이율배반적인 모순들을 안고 있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내가 경애하던 김좌진 장군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사람을 선택하는 면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름지기 적을 없애는 데는 용기와 예지, 기술 모두 필요하지만 특별히 없어서는 안될 것이 참된 휴머니즘이다. 참된 테러리스트는 최고의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백호 라는, 총을 잘 쏘는 자가 있었다. 그는 어떤 인연에서인지는 몰라도 신민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지방 출장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동빈 지방에 가서 거류 동포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총을 난사하여 여러 사람을 사살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최고 책임자인 김좌진 장군에게 갖은 악평이 퍼부어졌고 크게는 신민부 해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나중에는 김좌진 장군의 족제되는 시야 김종진과 이준근 및 김야운 등도 이백호 무리에게 학살을 당해 민족적 손실을 보게 되었다. 그밖에 이백호는 경박호에 살던 김만산이라는 중국 통역도 살해해 그가 입었던 옷까지 입고 다니는 행패를 부렸는데 결국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타살되었다.」[14]


6. 정화암 증언


같은 아나키즘 진영이지만 측근보다는 거리가 먼 사람의 증언도 있다. 정화암의 증언이다. 정화암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내가 현장에서 직접 보니 한족총련의 활동 가운데도 문제가 없지 않더군요. 이것은 정말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합시다. 그 가운데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더란 말입니다. 악한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뭘 하는고 하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넓은 지역에서 자기네가 중앙총본부라 해가지고 각 지역을 다니며 우리 농민들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중앙총본부에 세금을 내라> --- 그래서 그것 갖고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 중국의 사천성에서는 10년 뒤의 세금까지 미리 거뒀다더니.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놈들이 총들고 와서 계집도 빼앗아가고 소도 잡아가고 하는, 이런 일들이 있었거든요. 공산당원들 눈으로 볼 때는 이런 종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싸움이 났는데...[15]

정화암의 증언에 따르면 김좌진 세력("한족총련", "중앙총본부") 은 농민을 약탈하면서 위협했다. 그 탓에 공산당들이 분노하여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정화암과 아나키즘 세력은 공산당과 죽기살기로 싸웠다. 언제 공산당에게 죽을까봐 두려움에 떨기까지 했다.

만주에 있을 때 왜놈보다도 우리 동포인 공산주의자가 무서워 잘 때도 신을 신고 옷을 입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보초로 세워놓고 두가지를 경계하게 했습니다. 우리 동포 공산당원이 넘어오느냐? 왜놈이 넘어오느냐? 이 두가지를 경계하게 했습니다.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온다고 하면 신을 신고 옷을 입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대처해야 했습니다. 내가 만주에서 몇 해 동안 직접 겪은 일입니다.[16]

그렇게 공산당에게 위협당하고 대립하던 사람인데도 위와 같이 증언한다.

7. 원홍기의 증언


원홍기라는 사람은 이렇게 증언한다.

신청룡이 북로군정성서 리탈하여 흑룡강성 동빈현에 가서 혁신군을 조직했고 김좌진은 1924년에 흑룡강성 해림현에서 신민부를 조직했다. 김좌진과 신청룡과의 모순내막은 모르나 갈등이 심한 나머지 김좌진이 두번이나 암살대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1926년 전에 김좌진이 두번이나 암살대를 파견하여 신청룡을 살해하려했으나 혁신군의 경각성이 높아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1926년 가을에 8명의 혁신군대원들이 희생되자 (일본에게 희생당했다고 함 - 옮긴이) 혁신군에는 세자루의 무기밖에 없었다. 이 정황까지 알게된 김좌진은 1927년 9월에 세번째 암살대를 파견했다. (...)

아버지와 형님이 쌀팔러 떠나간 바로 그날 (...)나는 그때 13살이므로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였다. 갑자기 중국 족도리모자를 쓰고 다부산즈를 입은 조선사람이 교실에 불쑥 들어오더니 선생과 학생을모두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가는 그때 그 교실에 있었다. 다른 두 암살대를 (...) 원재룡(원홍기 아버지 - 옮긴이)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로친의 뺨을 후려치며 총을 내라고 협박했다. <당장 대놓지 않으면 집에 불을 지를테다> 갑자기 떨어진 불호령에 한농촌녀인이 어찌 버틸 수 있었겠는가. 이불속에 감추어두었던 두 자루의 권총(부로링과 6철포)을 내놓았다. 이제 혁신군에는 신청룡의 쌰즈 한자루밖에 없다는것까지 알고 신청룡의 집을 습격했다. 신청룡의 부인이 홀로 집에 있었다. 집수색을 했으나 딴띠를 발견했을뿐 쌰즈는 가지고 나간것이 분명했다. 6명의 암살대는 현성에 간 신청룡이 마음로 돌아올 때 잡으려 계획했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점심까지 해먹고 떠나갔다. (...)신청룡의 행방까지 알게 된 암살대들은 걸음을 재촉해 먼저 리전갑의 집을 포위했다. 이때 보슬비가 내렸다. 암살대 두 사람이 열려진 문으로 들여다보니 신청룡과 리전갑이 누워서 약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두 암살대는 갑자기 뛰어들어 몽둥이로 신청룡의 머리를 내리치고 무기를 압수했다. 원래 체력이 약한 신청룡은 머리까지 얻어맞았는지라 꼼짝 못하고 묶였다. 암살대들은 손쉽게 신청룡을 끌고 나와 마을에서 1리가량 떨어진 수수밭속에서 암살했다.

신청룡은 당시에 혁신군 대장이면서 내가 다니던 동빈현 북류수하 진단학교 교장이였다. 교장이 사망했으니 우리 고급학년학생 10여명이 마을에 있던 혁신군대원들과 함께 사건현장으로 갔다. 13살인 나도 고급학년 학생이라 현장에 가서 신청룡의 주검을 보았다. 신청룡은 길에서 대여섯이랑 들어온 수수밭속에서 머리에 두방의 총을 맞았었다. 신청룡과 사이좋게 지내던 동빈현 주둔 지방부대에서도 군관이 여러명 왔고 지방부대에서 돈을 내여 중국식 관을 사서 후하게 안장해주며 후사처리비용을 전부부담했다.」[17]


8. 간민호회 테러와 최계화 암살


신민부 군정파는 간민호회에 대한 테러를 하기도 했다. 간민호회는 '영안현 입적간민호회'를 가리키는데 당시 중국정부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 등의 권한을 획득해 실질적인 자치기관의 면모를 갖춘 곳이라 한다. 최계화(구영필)의 간민호회와 김좌진의 신민부는 시대적 상황과 이념적 차이 같은 여러점으로 인해 대립을 하였고 대립을 보여주는 기록은 수없이 많다고 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대립도 있으나 영고탑 일대 주민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강제 징수하려는 신민부와 이에 저항하는 간민호회 간의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18]
옌볜대 박창욱 교수는 ‘1928년 길림성 동부지방상황 기록문건’이란 걸 공개했었는데 신동아에 의해 소개된 내용을 재인용한다.

신민부는 영안 지방을 자기 세력범위에 넣고 '''군자금'''을 모으고 자기 단체 세력을 뻗치는 데 매우 필요한 지방으로 느꼈다. 때문에 간민호회를 타도하고 전 영안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정 14년 9월 먼저 '''보안대를 파견하여 길에서 간민호회 수령 최계화(구영필)를 암살'''하는 것으로, 기타는 위협, 공갈하였다. 영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은 신민부의 이러한 태도에 질겁을 먹고 이전에 구영필을 수령으로 한 경상도파는 신민부와 연계를 갖고 있는 평안도파에 눌리게 됐다.

'''신민부에는 3개 보안대가 있었는데, 문우천을 대장으로 한 제3대가 영안지방을 관리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영안, 해림, 수문하와 기타 성시에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강제로 징수했다'''(제3보안대장 문우천은 구영필을 암살하였다는 혐의로 현(縣)공서에 구류되어 지금 심문을 받고 있다).’

-1928년 길림성 동부지방상황 기록문건,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4317/2 것을 재인용 재인용

우성박용만기념사업회 사무국장 한애라가 최계화(구영필)를 언급한 글도 발견된다.

황상규, 김대지와 함께 의열단 지도부였던 구영필은 영고탑에 한인마을을 조성하고 쏟아져 오는 유민들을 받아들여 터전을 닦게 도와주었다. 구영필은 이 곳을 독립운동의 터전으로 만들어갔고 의열단 의거 자금을 댔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을 피해 만주 영고탑에 도착한 김좌진의 신민부는 구영필의 기득권을 빼앗기 위해 구영필을 친일파로 몰고 결국 살해했다. 김좌진의 부하들이 죽였으니까 구영필은 친일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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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혜겸의 증언


훗날 공산주의자 측 인물도 그점을 증언했다.
양환준이 말하길 지혜겸에게 이런 증언을 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근거라면 지혜겸선생(같이 공산당을 했고 조국이 광복된 후에 연변대학 역사과 주임교수가 됨)이 말씀하기를 (...) "한번은 금방 조선에서 망명해 들어오는 사람을 붙잡아 내리고 공산당 혐의 분자라고 때리다가 공산당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자 돈 500원을 내면 놓아 준다고 했답니다. 그의 가족이 급히 조선으로 되돌아나가 안달복달 500원을 구해가지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벌써 죽은 뒤였습니다"」[19]

공산당의 증언 하나만 보면 정말인지 모함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증거들을 보듯이 증언내용과 비슷한 증언은 김좌진 세력 측에서도 나오고 있다. 공산당 측이 일방으로 주장한 거짓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10. '마왕', '폭군'이라는 별명


북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은 점점 존경심을 잃어갔다. 사람들에게 김좌진 세력과 테러는 무서운 존재였다. 북만주 한인들은 김좌진 장군을 '''마왕, 폭군'''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하고 멸시했다.[20] 김좌진 장군은 북만주 재만한인사회에서 마왕처럼 군림했고,재만한인들은 그런 김좌진 장군을 점점 멀리했다.

11. 김좌진이 살해된 근본 이유



1928년 11월, 북만주 빈주현에 있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만주 빈주현은 원래 신민부에서 돈을 걷어가던 지역이다. 그러나 빈주현 주민들은 더이상 신민부와 연결되기를 거부했다. 주민들은 주민대회를 열고는 신민부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하고 신민부에 그것을 통지했다. 그러자 김좌진의 부하 25명은 무장을 하고 빈주현에 들이닥쳤고 주민대회장에 '''총탄을 퍼부었다.''' 이때 류연동, 김봉진, 황혁은 곧바로 죽었고 윤필한, 김유문, 장문숙은 중상을 입었고 그 밖에 여러 사람이 총탄에 맞았다.[21]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뿐만 아니라 같은 신민부원인 최호 진영도 적극 비판했다. 최호 진영에서는 "민중의 생명을 학살하고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 주구(賣族的 走狗), 혁명적 사기한의 장본인 김좌진, 정신 등을 매장하라”고 강하게 규탄했다.[22]
그리고 1930년 1월 24일에 산시참에서 "박상실"(=공도진)에게 총탄을 맞고 살해됐다.
일본내부기밀 문서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김좌진 일파에 대한 지방의 반감으로 특히 빈주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재중청년동맹의 일파는 계속 김좌진의 살해를 계획해 왔다. 지난 달 25일 그는 중동로 산시참에서 암살당했다.[23]

즉 빈주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김좌진을 죽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썼던 정화암 선생의 증언을 다시 보자.

"이놈들이 총들고 와서 계집도 빼앗아가고 소도 잡아가고 하는, 이런 일들이 있었거든요. 공산당원들 눈으로 볼 때는 이런 종자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싸움이 났는데..."

공산당에게 테러위협을 받던 사람조차 한족총련(지난날 신민부) 사람들이 협박하고 강탈하니 공산당원들이 분노해서 싸움이 났다고 증언한다. 일본내부기밀 문서는 실제 정황과 그대로 들어맞는다.

12. 독립기념관 편찬도서에서


빈주사건은 독립기념관 학술서에서도 나올만큼 독립운동계에서는 유명한 사건이다.

1927년 2월 일제는 석두하자의 신민부 본부를 습격하여 김혁과 유정근兪正根등을 체포했다. 이에 신민부는 수습책을 논의했으나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군정파와 민중본위의 자치를 실시하자고 주장하는 민정파로 분열되었다. 그리하여 군정파는 1927년 5월 김좌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부를 독자적으로 편성하고 영안현 밀강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군정파는 1927년 8월 북만한인교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인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반면에 민정파는 1927년에 고려국민당을 조직하고 주하현 신개평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나자 신민부는 군정파와 민정파가 서로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대립하였다. 특히 ‘빈주사건賓州事件’을 계기로 민정파와 군정파는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1928년 10월 20일 신민부가 관할하는 지역인 빈주에서 한인 40여 명이 회합하여 군정파 보안대의 무력적인 행동에 대해 자위책을 협의하고 있었는데 군정파 군인들이 이를 두고 자신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모의한다고 판단하고 '''무장대를 파견하여 황혁 등 여러 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1928년 11월 하순 영안현에서는 민정파 지지자 중심의 대표들이 모여 북만주민대회를 열고 군정파의 영수인 '''김좌진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현주,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 47권 1920년대 재중항일세력의 통일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32-233면

신민부의 경우 민정과 군정 양파의 분쟁이 3부 통일회의를 결렬시키는 큰 원인이었다. 이 같은 신민부 내의 내분은 통일회의가 결렬된 후에도 계속되었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더욱 치열해졌다. 3부 통일회의가 결렬되었다는 정식의 통고가 있기 전인 1928년 10월 20일 빈주賓州에서는 신민부의 관할 한인 4~50명이 회합하여 일제의 무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자위책과 관련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좌진이 이끄는 군정파측에서는 이 회의를 민정파가 주최한 비밀회의로 오해하였다. 따라서 군정파에서는 회의장소에 무장대를 파견하여 회의의 책임자인 황혁黃赫등 수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한인들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 같은 불화가 생기자 1928년 11월 하순 영안현에서는 민정파를 지지하는 신민부 관할의 6개현 16지역의 한인들이 회합하여 북만주민대회北滿住民大會를 개최하고 빈주에서 발생한 군정파의 행위를 성토하였다. 그리고 군정파의 지도자인 김좌진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며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채영국,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0권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7, 282면


13. 본 내용은 조선족들의 주장이다?


이강훈 선생은 강원도쪽이고, 대한민국에서 돌아가셨다.# 정화암은 전라북도 김제고 대한민국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당연히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언론이고, 거기다 당시 중국측 문서와 일본내부문서도 조선족과 무관하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역시 대한민국 단체다. 조선족과 전혀 무관하다.
[1]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아세아문화사, 1999, 50쪽[2]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같은책, 50쪽[3] 박환, 『만주벌의 항일영웅 김좌진』, 도서출판선인, 2016, 205쪽.[4] 박환, 『만주벌의 항일영웅 김좌진』, 2016, 163쪽.[5] 변명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국권피탈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광복의 기반으로 생각하고, 준비하던 곳은 남만주 지역 특히 서간도와 두만강 유역의 북간도 지역이였다. 이곳은 청나라가 약화되면서 지방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비교적 오랜기간 동안 유랑하던 조선인들이 많이 유입된 지역이였으며, 한반도와 접경지역이어서 제법 기반이 탄탄한 편에 속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기반으로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나, 이후 일본이 강 건너 간도에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인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옮겨간 북만주지역은 이전의 지역들보다 광활한 지역에 보다 내륙이라 일본군의 공격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이전보다 이주한 조선인들의 지원이 적을 수 밖에 없었다.[6] 박환, 『만주벌의 항일영웅 김좌진』, 2016, 165쪽에서 재인용.[7] 박환, 『만주벌의 항일영웅 김좌진』, 2016, 165쪽에서 재인용.[8] 박환, 『만주벌의 항일영웅 김좌진』, 2016, 167쪽.[9]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1999, 93쪽;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 선인, 2005년.[10] 이호룡,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 혁명근거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6』, 2001, 290 - 292쪽;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지식산업사, 2015, 339-340쪽.[11] "신민부원 체포", 동아일보 1926. 12. 14.,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121400209202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12-14&officeId=00020&pageNo=2&printNo=2254&publishType=00020# (검색날짜: 2017. 7. 9.)[12] "신민부원과 주민충돌 여섯명 사상의 대참극", 동아일보 1928.11.18.,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811180020920202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8-11-18&officeId=00020&pageNo=2&printNo=2959&publishType=00020# (검색날짜 2016. 7. 9.)[13] 이강훈, 『이강훈 역사증언록』, 서울: 인물연구소, 1994, 90쪽[14]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서울:제삼기획, 1994, 97~98[15] 「3부 정화암」, 면담: 이정식; 편집해설: 김학준; 수정증보: 김용호,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 김성숙·장건상·정화암·이강훈의 독립투쟁』, 서울: 민음사, 2005, 371쪽[16] 「3부 정화암」, 365쪽[17]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000, 308-310 (어째서인지 RISS에선 "강용권, 동북항일유지고찰기 : 장편답사기"라고 뜬다.)[18]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4317/3[19] 양환준선생방문록(강용권발표), 박영석, 「白冶 金佐鎭將軍硏究」, 『國史館論叢 第51輯』, 207쪽[20] 박환, 같은책, 2016, 205쪽; 이호룡,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 혁명근거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6』, 2001, 291쪽;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지식산업사』, 2015, 339쪽[21] "신민부원과 주민충돌 여섯명 사상의 대참극", 동아일보 1928년 11월 18일자 신문, (검색날짜 2016년 7월 9일)[22] 박영석, 같은책 199쪽[23]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일본 본국에 보낸 보고" , 1930년 2월 27일, 일본외무성 경찰사, 일본외무성육해군성문서(마이크로필름), SP205-4, 12886쪽, 김광옥, 같은책, 5쪽, 63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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