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덕

 




성명
남상덕(南相悳)

인옥(仁玉)
본관
의령 남씨[1]#
생몰
1881년? ~ 1907년 8월 1일
출생지
경상도 의령현
(현 경상남도 의령군)
사망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 숭례문
추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남대문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항전한 인물.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남상덕은 경상도 의령현(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남철희(南哲熙)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1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이후의 성장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일찍이 육군 보병 견습 참위가 되어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1907년 8월 1일, 정미 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때 시위대 제21연대 1대장 참령 박승환이 "군대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했다. 남상덕은 상관의 자결에 격분해 부하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윗 장교가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의로움을 보였는데 내가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마땅히 저 적들과 결사 항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

이후 그는 "함께 싸울 자 누구인가?"라고 부르짖었고, 부하 천여 명이 각기 총칼을 지니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 적을 치고자 했다. 남상덕은 천여 병사들을 이끌고 병영을 나가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에 일본군은 남대문 담장 위에서 기관총을 앞세워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남상덕과 시위대 병사들은 굴하지 않고 격전을 벌였고, 가지와라 요시히사(梶原義久) 장교를 비롯한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전사했다.
그러나 때마침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빈약한 무기와 부족한 탄약을 가지고 백병전을 벌이던 그는 결국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또한 병졸 98명과 장교 7명 역시 전사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일본군에게 붙잡히거나 흩어졌지만, 후에 정미의병에 가담해 전국에서 항일 투쟁을 벌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 24세손 상(相)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