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
서울 崇禮門 | Sungnyemun[1]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29)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시설'''
1동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1398년
재건 2013년
2008년 2월 방화 테러로 붕괴되기 이전의 모습[2]
2013년 재개방 직후의 모습[3]
1. 개요
2. '숭례문'과 '남대문'
3. 수난의 역사
4. 역사
5. 사건·사고
7. 다른 매체의 숭례문
8. 찾아오는 방법
9.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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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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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동안 한양을 둘러싸고 있었던 한양도성의 남쪽에 위치한 문. '''대한민국 국보 1호.''' 현재도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건축물이다.[4]
숭례(崇禮)는 '예절(禮)을 높힌다'는 뜻으로, 사서 중 하나인 유교경전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君子尊德性而道問學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면서도, 묻고 배우는 것을 길로 한다.

致廣大而盡精微.

넓고 큼에 이르면서도, 정미함을 다하며

極高明而道中庸

고상하고 현명한 것에 이르면서도, 중용을 길로 여기고

溫故而知新

옛 것을 쌓아가면서도, 새 것을 알며

敦厚以'''崇禮'''

'''예를 높이는 것'''으로써, 돈독하고 두터워진다.

是故 居上不驕 爲下不倍

이 때문에 윗사람이 되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되어도 배반하지 않는다.

중용》 27장 中

도시 남문의 이름에 '남' 자가 들어가지 않아서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인의예지를 동서남북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서울의 정문들의 이름이 붙여졌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기준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 동: 인(仁)을 기르는 흥인지문
  • 서: 의(義)를 두텁게 하는 돈의문
  • 남: 예(禮)를 숭상하는 숭례문
  • 북: 원래는 지(智)를 기르는 숙지문으로 정하기로 했지만 지혜를 뜻하는 지(智) 자 대신 정(靖) 자를 썼는데, 이는 "꾀하다", "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지혜 대신 살짝 비틀어 꾀라고 지었다고 한다. 또한, 일각에서는 숙지문으로 하면 백성이 똑똑해져서 다스리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하기도 한다. 북은 음을 상징한다고 해서 이 문은 쪽문으로 세워졌고, 대신 지어진 '정화하는 의미인' 숙정문마저도 안 된다고 해서 통행금지되었다.
  • 신(信)은 4대문 정중앙에 위치한 보신각이다.
알아둘 점으로는 숭례문이 한양도성의 최남단에 위치한 문도 아니고, 방향 역시 남향이 아닌 남서향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2010년에 복원하는 도중 밝혀진 사실로 숭례문의 원래 기단은 지금의 지면보다 1m 60cm 정도 아래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15세기 무렵의 도로는 지금보다 훨씬 낮았고, 상대적으로 숭례문의 성벽은 더 높았다. 그러나 결국 예산을 이유로 기단은 다시 묻혔다.

2. '숭례문'과 '남대문'


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명될 때 붙어진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소문이 언젠가부터 퍼졌다. 특히 숭례문 전소 이후 의식적으로 남대문을 피하고 숭례문으로 부르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이런 오해(혹은 악의적 왜곡)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는 잘못된 오해 중 하나로, 사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도 백성들은 이미 편하게 남대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많으며, 단어 수도 남대문이 숭례문보다 더 많다. 다른 분야에서도 정식 명칭과 통상 명칭이 다른 예는 매우 흔하며, 남대문 역시 숭례문의 통상 명칭으로 불린 것일 뿐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9월 24일 기사에는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이라 하여 보통 동대문, 남대문으로 부른다고 했는데 여기서 속(俗)은 속되다, 천박하다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간에서는, 백성들은' 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우리가 흔히 접하는 "속칭~~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백성들은 물론 신하나 군주들까지도 즐겨 남대문, 동대문 등으로 불렀다. 세종 9년 1월26일 기사에는 '上曰: 明日置于南大門外愼以衷之家'라고 했는데, 여기서 상은 세종대왕이다. 그 외에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도 남대문이라고 부른 기사가 있으며, 실록을 쓰는 사관조차 성종14년 12월 4일에 보면 '南大門內行廊失火, 延燒十餘間' 이라 하여 남대문이라고 적어놓았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리(千里)를 끌어다 지척(咫尺)을 삼겠으며 태산(泰山)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오?”라고 하였다.[5]

이에 많은 재상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는데 김병기가 머리를 들고 말하길, “천리를 지척으로 하려면 지척이 될 것이고, 남대문을 삼층으로 하려면 삼층이 될 것입니다. 대감이 지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태산은 본디 태산인데 어찌 쉽게 평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대원군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하길, “혼자 잘난척 하는군.”이라 하였다. 대저 천리 지척이라는 함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 함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 평지라 함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말이다.

ㅡ매천야록 권1, 갑오이전 상

매천야록을 저술한 매천 황현(1855~1910)은 경술국치 16일 후 절명시를 남기며 자결한 인물로, 야사임을 떠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기록임에 주목하자.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대문, 동대문 명칭은 잘못된 것도, 일제의 잔재도 아니다. 백성은 물론 군신이 모두 친근하게 아무 이견 없이 남대문, 동대문이라 한 것을 전소사건 이후 '남대문은 틀린 이름' 이라거나 '일제 잔재'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와 불성실일 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런 기사이런 국민청원이 나오고 있으니... 수원에서도 장안문팔달문을 북문, 남문이라고 부르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3. 수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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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숭례문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한국의 대부분의 도시 성곽들의 운명이 그러하였듯이 한양도성도 철거되기 시작했으며, 숭례문의 서쪽과 동쪽의 성곽 역시 헐렸다. 지금의 대한상공회의소 앞쪽에 성벽같이 생긴 담벽이 바로 숭례문 성벽이다.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보도블록에는 성돌이 박혀있다. 성벽이 지나간 자리를 표시해 놓은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숭례성터길이다.[6]이러한 것은 해방 이후 50년이 넘도록 복원되지 않았다. 사실, 실권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제국 말부터 일본은 교통을 위해 숭례문도 철거하려고 했지만, 숭례문이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온 성문이라는 이유로 보존될 수 있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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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뒤덮은 융단폭격에도 살아남아, 비록 건물의 일부가 피탄되어 무너졌으나 다행히 화재로 번지지 않아 전후에 복구될 수 있었다.
그러나...

3.1. 2008년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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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테러 7년 전인 숭례문의 모습 (2001년 4월)
2008년 2월 10일에 화재로 인해 숭례문이 소실되었다가 복원 작업을 거쳐 5년 뒤인 2013년에 완공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숭례문 방화 사건 문서 참조.

4. 역사


  • 1396년(조선 태조 5년) - 숭례문 시공
  • 1398년(조선 태조 7년) - 평도공 최유경선생이 준공함
  •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편액을 씀
  • 1448년(세종 30년) - 좌참찬 정분의 감독하에 '신작'이라고 칭할 정도로 개축
  • 1479년(성종 10년) - 중수
  • 1592년 5월 3일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으로 진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함정일까봐 여러 번 정탐병을 보낸 후 조심스레 흥인지문으로 서울 진입.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도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헐리지 않을 수 있었다.
  • 1907년 8월 1일(남대문 전투) - 일제가 군대 해산을 시행하자 이에 반발한 대한제국군 시위대 2개 대대가 이를 거부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 1907년 - 일본 황태자(뒷날의 다이쇼 덴노)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
  •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남대문을, 보물 2호로 동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
  • 1996년 11월 - 국보 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어 문화재관리국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자체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서울 시민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다. 문화재전문가 144명(문화재위원 49명,전문위원 95명)의 59.2%가 변경에 반대했다. 반면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 57%(150명)가 변경에 찬성했다. 변경 찬성 대답자들은 훈민정음을 1위로 지지했다.
  •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의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열고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열고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았다고 한다.
  • 2005년 5월 27일 - 숭례문 주변을 광장으로 단장함
  • 2005년 11월 - 감사원은 국보 1호를 변경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다.
  • 2005년 11월 -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 변경에 찬성했다.
  • 2006년 3월 1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출입이 금지된 숭례문이 이명박 서울시장에 의해 99년 만에 일반에 개방이 결정되어 3월 3일부터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 2008년 2월 11일 - 방화로 인한 화재로 붕괴되었다.
  • 2013년 4월 29일 - 숭례문 복원 완료. 정식 개방행사는 5월 4일.
  • 2013년 10월 - 숭례문 부실복원 논란

5. 사건·사고


  • 1991년 8월에 만취한 50대 남성이 훔친 승용차를 몰고 숭례문의 철제 출입문을 들이받았다.
  • 1997년 2월에도 만취한 30대 남성이 일본인 관광객 2명과 함께 숭례문의 통제구역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6.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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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하기 전날까지 숭례문을 지키는 사람(수문장)을 교대하는 의식을 보여주는 행사를 했다. 저녁때쯤 철수했다고 한다.
현재는 파수의식으로 대체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수문장 교대식 문서 참조.

7. 다른 매체의 숭례문


  • 비행 FPS 게임 디센트 시리즈 3번째 작품의 서울 미션에서 등장한다. 해당 미션의 최종 장소인데, 주인공은 PMTC의 부조리한 면을 이곳에서 입수하며 PMTC에서는 그러한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Pyro-GL 2대를 보스로 보내서 상대하게 한다. PMTC가 개조를 해 놓았는지 처마에 레이저 포탑이 달려있다. 문제는 제작진이 상상하는 서울의 이미지가 실제와는 달리 살짝 왜곡(?)되었다는 것이지만... 한글 간판도 등장하고 서울 느낌을 내려는 노력은 있었다.
  • 레이싱게임인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그란투리스모4(PS2)/그란투리스모(PSP))에서 서울 시가지 코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다르나서스 정문에는 숭례문과 똑같이 생긴 오브젝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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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온난화로 인한 빙하기가 배경인 영화 투모로우의 한국 한정 포스터가 얼어붙은 숭례문이다.
  • 괴혼 시리즈 중 '데굴데굴 쫀득쫀득 괴혼'에서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처 지형은 서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에이지 오브 코난에서 퀘스트로 '파괴된 숭례문 복구'를 한다고 밝혔다.
  • 야채부락리의 마을맵 중 하나로 나온다. 거기다가 몬스터로는 방화범(...)이 나온다.
  • 숭례문 복원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백괴사전에서는 '숯례문'(...)이라는 항목명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숭례문 복원 공사가 완료된 후에는 다시 숭례문으로 환원되었다.
  • 남성 듀엣 바이브 4집에 숭례문 방화사건을 모티프로 한 '숭례문'이 수록되었다. 남성 테너와 여성 소프라노까지 기용한 나름 웅장한 곡이다. 사실 전주 부분만 바이브가 부르고 성악 파트가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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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랑전설2에서 최초의 외국 게임 속 한국인 캐릭터김갑환의 스테이지에 최초의 한국 스테이지로 등장했다.
  • 레고 아키텍쳐로도 출시되었다. 품번은 21016.
  • 옥스포드도 한국문화유산 시리즈로 숭례문 한정판과 일반판을 출시했다.
  • 숭례문 복원뒤에 신한은행에서 CF를 찍어 홍보하였다.[8] 사실상 숭례문 복원 후의 최초 TV 광고이다.
  • 모두의 마블프렌즈 마블에서도 서울의 랜드마크로 숭례문이 나온다.[9]
  • 뽀롱뽀롱 뽀로로의 스핀오프작 중 하나인 뽀로로의 한국대모험에서는 뽀롱뽀롱 숲으로 돌아가려던 뽀로로크롱이 숭례문을 발견하고 문 앞에 앉아있다가 잠에 빠진다.
  • K리그1 2020시즌 공식 인트로에 남산서울타워, 서울월드컵경기장과 함께 FC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로 등장한다.

8. 찾아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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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야경
서울 지하철 4호선 회현역서울역에서 약 400m 정도 걸으면 도착한다. 버스의 경우 옛 YTN타워 앞의 정류장이나 숭례문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가 많으므로 이것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일부 노선들은 한쪽 방향에만 숭례문에 정차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확인해야 한다.
중앙차로는 서울역 방향에만 설치되어 있으며, 서울역버스환승센터 7번 승강장은 숭례문 쪽으로 직결되어 있다.[10]
버스 정류장명 중 서울역 방향으로 "서울역, YTN"으로 된 정류장이 있는데, 정작 서울역에서 이 정류장이 너무 많이 떨어져 있다. 게다가 노숙자들을 보면서 횡단해야 한다.
정류장이 옛 YTN타워와 신한은행 바로 앞에 있고 이 정류장에서 숭례문이 코앞인데다가 YTN이 본사를 마포구 상암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정류장명도 숭례문으로 통일했다. 하지만 버스들은 여전히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경기도 버스들이 이 낚시성 표기를 많이 하므로 수도권 외의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서울역과 숭례문을 오갈 때 유의해야 한다.

9. 같이 보기



[1] 로마자 표기법에서는 발음되는대로 적는 것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Sung'''n'''yemun이 맞다.[2]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숭례문 하면 떠오르는 모습이다.[3] 성벽이 일부 복구되면서 방화 테러 이전의 모습과 이질감이 많이 느껴진다는 의견이 많았다. 성벽의 한쪽은 짧고 한쪽은 길어서 숭례문이 가지고 있던 좌우대칭미가 사라졌기 때문. 다만, 원래 성벽은 일제시대~6.25를 거치며 심하게 파손된 것이므로 복원하는 것이 옳긴 하다. 저마저도 교통에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가능한 성벽을 길게 빼서 복원한 것이다. 수원 화성처럼 일부 성벽을 완전히 복원하지 않고 윗부분만 연결하고 나머지는 터널처럼 구멍을 내지 않는 이상 숭례문 도로사정상 이 이상 성벽 복원은 무리이기 때문. 게다가 숭례문이 위치한 지형은 숭례문을 벗어나면 곧장 비탈길이 있고 건물이 도로를 따라 빽빽히 나있는데다가 도로가 매우 크다. 따라서 한동안은 성벽이 더 복원되기는 힘들 것이다. 숭례문이 문짝만 있는 것이 아닌 엄연히 성벽과 이어진 성문임을 직관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에 의의를 두도록 하자. 당장 흥인지문을 보면 도로가 바로 옆에 있어서 터널 뚫기 외에는 숭례문처럼 조금이라도 성벽을 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4] 사실 2008년에 불타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국보가 소실되었을 경우 다른 여러 전례에 따라 국보에서 해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런 상징성 때문에 일부러 남겨둔 것이 크다.[5] 원문: 雲峴之始得政也, 甞因公會, 盛氣向諸宰曰, 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6] 여담으로, 이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2008년 숭례문 복원할 당시 숭례문 옆 아스팔트 도로 위에다 붉은색으로 숭례문을 연결한 한양도성이 지나간 자리를 성돌 모양으로 표시해놨었다. 하지만 현재는 도로 재포장으로 인해 지워진 상태이다.[7]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일본군의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 제거를 추진했다.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입니다. 조선출병(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숭례문 외에 몇 남지 않았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습니다."라고 설득했고, 이에 하세가와가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정책>에 실려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숭례문이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이유도 이 이유가 크다고 한다.[8] 숭례문과 신한은행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 아니, 바로 건너편이 신한은행 본점이다.[9] 월드맵 한정, 한국맵은 N서울타워[10] 그래서 750A/B번, 751번, 752번은 도로 구조 때문에 상행의 경우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 아예 정차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