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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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해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으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던 고종이 그나마 퇴위하는 비극과 훈련원에서의 조선 군대의 해산은 빈사의 목숨에 마지막 칼질이었다.
그로 인하여 참령 박승환은 자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무기고를 부수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들은 남대문에서 일군과 처참한 교전을 벌였다.
박경리의 토지 中
1. 개요
대한제국군 시위대 2개 대대 및 여러부대가 군대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서울 숭례문 등지에서 벌인 전투. 정미의병의 신호탄이 되어 의병전쟁으로 확산되었다.
2. 배경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위해 통감부는 1907년 8월 1일 아침 7시에 서울 내 모든 대한제국군 지휘관들을 소집하였고 이들이 모인자리에서 병부대신 이병무가 순종황제의 조서를 낭독했다. 대한제국군을 해산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일본군 주차 한국사령관 하세가와는 병사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도수체조를 한다는 내용으로 10시까지 비무장으로 훈련본부로 집결시킨다는 세부사항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한국군의 반발에 대비해 훈련원과 각 병영에 대기하였고 시위 1연대 1대대원들도 무기를 반납하고 훈련원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렇게 해산식을 치를 예정이었는데 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이를 장병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군대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방에서 권총으로 자결하였다.[4]
이에 격분한 장병들이 대대 일부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무기고를 부수어 반납했던 총을 꺼내 일본 육군과 교전을 시작하였다. 당시 대한제국 장병들이 사용하였던 소총은 베르단, 그라 소총 등의 볼트액션 소총이었다.
3. 전개
8시 30분 1연대 1대대가 봉기하고 바로 옆 병영에 있던 2연대 1대대 역시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식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마침 그때 제2연대 1대대는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며칠전 군을 통제하는 회의에서 해임되어 격앙되어 있었다. 이럴때 이웃 대대로부터 총성과 함성이 들리더니 1연대 1대대원 세명이 총을 쏘며 달려왔다. 곧바로 제2연대 1대대 병사들도 무기고를 파괴하고 무기를 되찾은 후 일본 육군과 격전에 대비하였다. 이 때가 9시로 제1연대 1대대, 제2연대 1대대원들은 일본군과 전면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두 대대 이외에도 300여명의 다른 부대들도 항전에 참여하면서 두 대대의 병영이 있던 숭례문에서 서소문(소의문)에 걸친 지역에서 대한 제국군 2개 대대와 이들을 진압하려는 일본군 사이에서 약 오전 9시부터 시작되어 1연대 1대대의 병영이 함락된 11시 50분까지 약 3시간에 걸친 시가전이 벌어진다.
물론 일본 육군 측도 대한 제국군의 해산 때 약간의 소요 사태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감시 병력을 배치했지만 대한제국 육군 1개 대대당에 겨우 1개 중대만 배치했다. 하지만 대신 호치키스 기관총을 배치해 압도적인 화력 우세를 가지고 있었다.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에 각각 일본 육군 보병 10중대와 9중대가 붙었다. 여기에 공병대와 기관총 부대가 더해졌다.
일본 육군은 재빠르게 투입되었다. 대한제국군은 일본군 선두가 접근하는 것을 알고 맹렬한 화력을 쏟아부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전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즉각 증원군을 요청하고, 9시 30분 일본군은 대기 중이던 10중대 전 병력을 투입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낸 1연대 1대대는 오히려 10시부터는 무서운 기세로 일본군에 총공세를 했다. 이때부터 일본군 10중대는 공격을 멈춘채 대치 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다 일본군은 남대문(숭례문) 문루 위에 2정의 기관총을 설치하고 병영을 내려다 보며 사격을 하였다. 이것은 한국군에게는 굉장히 불리했는데, 당시 서울에서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한국군의 병영이 남대문 근처에 있었는데, 일본군이 성루에 기관총을 설치한 것이었다. 참고로 숭례문과 돈의문까지의 성곽의 높이는 평균 8M에서13M까지 정도로 웬만한 민가들보다 2,3배 이상 높았다.
한편 일본 육군 9중대는 10시 20분경부터 기관총을 앞세우고 제2연대 1대대 병영 뒷문을 향해 총공격을 했다. 일본군은 기관총 돌격을 감행하지만 한국군은 벽과 철문을 이용해 방어하며 집중 사격했다. 때문에 일본군이 기관총 엄호를 받으며 시도한 돌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고전이 계속되자 10시 30분 일본군 지도부는 일본 육군 12중대와 7중대 병력을 증파한다. 증원 부대인 12중대를 고전하고 있던 제9중대에 붙여 한국군 육군 제2연대 1대대를 집중 공격한다.
증원군이 붙은 일본군은 계속해서 밀어붙였고, 9중대장 가지와라 요시히사(梶原義久) 육군 대위는 2연대 1대대 병영 부분을 돌파했다. 하지만 가지와라 대위와 함께 영내에 돌입한 9중대는 한국군 집중 사격에 노출되었고 가지와라 대위도 전사했다. 그런데 갑자기 병영에 있는 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일본 육군 공병대가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소리였다. 화염과 연기에 한국군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 틈을 타 일본 육군 7중대, 12중대가 잇따라 병영 안으로 돌입했고, 한국군은 마지막 저항을 해보지만 2연대 1대대는 10시 50분에 일본군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대한제국 육군은 1연대 1대대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2연대 1대대의 병영을 공격하던 일본 육군 제7중대, 9중대, 12중대와 공병대는 재빠르게 1연대 1대대 쪽으로 총부리를 돌렸다. 그러자 아직도 대치하고 있던 10중대는 마지막 총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1연대 1대대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분투했지만 밀려오는 병력수를 이길 수 없었고, 떨어진 탄약을 보급받지 못해 결국 11시 50분 병영을 점령당한다.
4. 결말
한국군이 분투하여 일본군도 단숨에 병영을 제압하지 못하고 3회에 걸쳐 돌격을 반복해야 했지만 전력의 차이가 명확했다. 애초부터 야포나 기관총 같은 중화기는 용산 육군 병기창을 비롯해 모조리 일본군이 장악한 무기고에 있었고, 소총 탄약(총알)도 거의 대부분이 일본군이 장악한 무기고에 있었다. 이 결과 소총 탄약이 개인이 소지한 10발 ~ 15발 뿐이어서 저항에 한계가 있었다. 대한 제국군은 탄약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었다. 그러나 개인이 보유한 탄약이 모두 바닥나자 총탄도 없는 총으로는 도저히 일본군에게 저항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개인이 보유한 10발 ~ 15발의 탄약과 극히 소량의 예비 탄약으로는 단시간의 저항 밖에는 불가능했다. 결국, 탄약은 전투 중 금새 바닥나고 말았다. 그리고 기관총 제압 사격과 견제로 인해 병영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결국 시가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전투 결과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일본 측의 기록을 참조하면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가 확실한 4명을 포함해 30명 ~ 40명의 부상자를 기록한 반면, 대한 제국군은 68명의 전사자와 100여 명의 부상자, 516명의 '포로'를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의 기록들은 대부분 신뢰성이 높지 않은 편.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고할 것
2개 대대의 규정상 정원이 장교와 사병을 합쳐 총 1,224명[5] 에 다른 부대원들 300여 명이 참여했음을 감안하면 최대 850명 가량이 서소문을 통해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다수는 후에 정미의병에 참가하여 항일 전선에 섰다.
덤으로 말하자면 이 교전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소총탄은 보병이 7,215발, 공병이 350발, 기병 / 포병이 8발, 기관총탄은 1,138발, 황색화약이 1.6kg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노획한 한국군의 무기는 소총 74정에 실탄 3,305발이었다.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일기에 의하면 일본군은 사망했거나 부상을 입은 대한 제국군 병사들을 들것에 싣고 가면서 헹가레를 치듯이 움직였다고 한다. 뮈텔 주교는 그 광경이 참담하다고 했을 정도.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남상덕 참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1990년에는 이준영 참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5. 대중 매체
-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2화 후반부에서 다루어졌다. 의병의 활동을 보고받은 이토 히로부미가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완용에게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1907년 8월 1일 아침에 일본군은 대한제국군 시위대 본영들로 파견되었고 해산에 저항하는 시위대원들에 대한 사살 명령을 받는다. 동대문 시위대는 비무장 상태로 모인상태에서 이병무로부터 해산 통보와 일본군이 나누어준 지폐 1장짜리 은사금을 받은 뒤 일본군의 위협에 그대로 해산당한다. 시위대 1연대 1대대장인 박승환 참령(소령)은 보고를 받고 자결을 한다. 이때 권총 소리가 남대문 시위대에 울려퍼졌고, 각각 연병장과 무기고 앞에 있던 시위대원들이 이를 듣고 당황한다. 곧이어 박승환의 자결 소식이 들려오면서 연병장에 있던 준영이 유진의 고별사 중 "일본은 조만간 원수부를 장악하고 무관 학교부터 폐지하려 들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상황을 파악하여 일본이 군대 해산을 목적으로 무기 반납을 명하고 있음을 알린다. 연병장에 있던 일본군은 시위대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즉시 사격을 실시했고 시위대원들은 즉시 연병장을 달려나가 무기 반납이 진행되고 있던 무기고로 달려간다. 무기 반납과 무기 관리를 맡던 소수의 일본군을 제압한 후 시위대는 총과 탄약을 가지고 전투를 벌이지만 일본군이 남대문의 성곽에서 개틀링 기관총을 비롯한 우세한 화력으로 밀어붙였고 설상가상으로 시위대의 탄약이 떨어진다. 장승구의 희생으로 시위대는 본영에서 빠져나갔지만 일본군은 성곽과 시내에서 토벌 작전을 펼친다. 이로 인해 많은 시위대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이들을 도와주던 백성들도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일부는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준영은 부상당한 입대 동기들과 함께 황은산의 의병에 합류한다.
- 북한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맹수 사냥군>>의 초반에 등장한다.
[1] 프랑스 언론인 Le Petit Journal에서 남대문 전투를 묘사한 1907년 당시의 삽화. 삽화가가 직접 교전을 보고 그리지는 않아서 고증 오류가 있다. 당시 대한 제국군은 서양식 군복을 입은지 오래인데도 흰색 한복을 그대로 입고, 옆에 일본군에게 부상을 당했거나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한복도 아닌 중국식 복색에 가깝다. 또한 당시 일본 육군은 흰색 군복을 입지 않았다. 당시 대한 제국군은 베르당, 그라스 등 유럽제 단발 볼트액션 소총을 썼으나 그림에선 롤링블럭소총을 들고 있으며 대한 제국군은 당시 세이버를 썼는데 앞의 대한 제국군이 쓰는 칼은 세이버가 아니다.[2] 한국 주차군 사령관[3] 13분 36초부터 남대문 전투의 전투과정이 재현된다[4] 군도라는 기록도 있다.[5] 단 두 대대의 대대장이 확실히 공석이므로 실제 인원은 최대 1222명이다. 상술했듯 1연대 1대대장은 자살했고, 2연대 1대대장은 해임된 상태로 후임자가 아직 임명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