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군대해산

 



1. 개요
2. 배경
3. 해체 준비
4. 해산식과 저항
4.2. 강화 진위대 봉기
4.3. 원주 진위대 봉기
5. 결과
6. 관련 문서


1. 개요


大韓帝國 軍隊解散
1907년 8월 1일부터 9월 3일까지 일제의 강요를 받은 순종의 황명으로 대한제국군 병력 대부분이 공식적으로 해산된 사건.

2. 배경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9일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한일의정서를 체결 후 군축을 요구하여 1905년 4월 16일에 3000여명의 대한제국군 친위대를 해산시키고 5000여명의 시위대를 2500여명의 혼성시위여단으로 감축시켰다. 지방의 진위대의 병력도 크게 감축시켜 1901년 이후 6개 연대이자 18개 대대 18000명의 병력이었던 진위대는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시켰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도 2,365명에 불과했다.
1907년 고종네덜란드 헤이그에 만국평화회의 특사를 파견한 일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매국노 이완용, 송병준에 의해 강제 퇴위하고 순종이 왕좌에 등극하면서 동년에 체결된 정미 7조약을 통해 사실상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兵務) 분야를 통감부일본군에 일임하는 취지하에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논의된 것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고종의 퇴위에 즈음하여 대한제국의 중앙군인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을 포함한 상당수 장교단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 퇴위를 막으려 시도하다 기밀이 새어 봉기를 포기한 사건이 벌어짐으로서 해산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대한제국군은 러시아 교관단의 교육을 기반으로 편성된 부대였고 러일전쟁 때 들어온 일본군에게 굉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 체류하던 러시아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군 사병들은 일본군 장교에게 경례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일본군 사병들도 한국군 장교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양군 장교들끼리도 서로 쌩깠다. 일본 측은 이 문제를 괜히 건드렸다가 더 큰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을 감안하여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을 일본이 강제로 퇴위시키자 이에 반대하는 군중 시위가 연일 발생하였다. 7월 20일에는 시위혼성여단 소속1연대 3대대 소속 병사 100여 명이 동조하여 종로의 병영을 뛰쳐나와 고종 퇴위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과 함께 종로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 경관들을 살상한다. 대한제국군의 항일봉기가 확산될 것을 염려한 일본은 준비해 온 대한제국군 해산을 결행한다

3. 해체 준비


앞서 일본통감부를 통해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일임받기 전에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위한 비밀리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대한제국군화포, 기관총 등의 중화기를 보관하던 용산 육군 병기창을 점령하고 '''600만발의''' 탄약과 무기류의 관리를 일본군 일임하에 두도록 했으며, 대한제국군 사병들이 반발하여 봉기할 것을 대비하여 대한제국군 일원에게 금족령(禁足令)를 발령하여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의 탄약고 및 무기고를 관리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미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병들에게 신형 총기 및 탄약을 추가 보급하였다. 마침내 1907년 7월 31일 순종에게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발령과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통감부와 일본군에게 인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군부에서는 다음날인 8월 1일 시위대의 해산을 시작으로 8월 3일부터 9월 3일에는 진위대 해산까지 일부 병력을 제외한 전 대한제국군을 해체하기로 하고 시위대의 각 대대장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알렸다. 예하의 각 중대장들에게만 비밀리에 통보하고 사병들에게는 절대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포함하였다.
시위대가 먼저 해체 대상이 된 것은 9천 명 남짓한 대한제국군 중 절반 이상이 시위대일 정도로 주력이었고, 서울이라는 한 곳에 몰려 있었으므로 조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반발이 거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4. 해산식과 저항


사병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도수체조 연습을 할 것이니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에 집결하라는 지시가 시위대 전 병력에게 내려갔다. 그러나 다수 장병이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므므로, 오후 4시가 되도록 절반 가량의 인원밖에 모이지 않았다. 이날 해산 군인 대상은 3,441명이었는데, 훈련원에 모인 수는 1,812명으로 52.7퍼센트의 군인만이 모인 것이었다. 더구나 남대문 전투로 인한 총성까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일본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소수 인원만으로 해산식을 거행한다.

“짐은 생각건대, 나랏일이 매우 어려운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크게 절약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일에 쓰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라고 본다. 가만히 생각건대, 현재 우리의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어 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이루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따라서 짐은 이제부터 군제(軍制)의 혁신을 꾀하여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데에 전력하고 후일에 징병법(徵兵法)을 반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갖추고자 하는 바이다. 짐은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 시위(侍衛)에 필요한 자들을 뽑고 그 외의 군대는 일시 해산하고자 한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들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특별히 금일봉을 하사하니, 너희들 장교, 하사, 군졸 들은 짐의 뜻을 잘 헤아려 각기 자기의 생업에 나아감으로써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황실 시위에 필요한 자들을 뽑고 그 외의 군대는 일시 해산한다는 조령[1]

순종의 군대 해산 칙서(勅書) 및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통감부일본군에게 일임한다는 공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고 일본군이 감시하는 가운데 대한제국 사병 및 간부들의 계급장이 제거되고 소지 중인 도검류를 반납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은사금으로 나온 지폐를 찢어버리고 통곡하는 장병들도 많았다.

4.1. 남대문 전투


참령 박승환이 자결하고 시위 1연대 1대대, 2연대 1대대 및 여러부대가 군대해산을 거부하고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4.2. 강화 진위대 봉기



4.3. 원주 진위대 봉기



5. 결과


8월 1일 남대문 전투 이후 살아남았거나 해산식에서 뛰쳐나온 중앙의 시위대, 그리고 8월 3일부터 9월 3일에 걸쳐 차례대로 해산된 지방의 진위대 장병들은 의병이 되어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8월 5일에는 민긍호와 김덕제가 이끈 원주 진위대의 봉기, 같은 해 8월 9일 수원 진위대 강화 분견소의 봉기 등이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군의 의병 합류로 장비와 전투능력은 한층 강화되어 정미의병이 발발한다.
군대 해산 당시 대한제국군의 규모는 8000여 명이었는데, 1907년 11월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한 13도 창의군 1만명 중에 3000여 명이 대한제국군 출신이었을 정도로 많은 해산 군인이 의병 전쟁에 참여하였다. 다만 귀향 후 일제의 회유로 헌병보조원으로 참여한 이들도 많다. 당시만 해도 일단 대한제국 자체는 아직 멸망하기 전이었기에 그들은 일제에 협력한다기보단 반역자들을 토벌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의병 토벌에 참여한 경우가 많다. 또한 통감부는 군대에서 나와 실업자가 된 병사들이 불만세력으로 바뀌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이들을 헌병보조원으로 채용했다.
또한, 당시 해산을 면하고 황실 경호부대로 존치가 허용된 시위 2연대 2대대는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채 현 상태를 유지했고, 결국 일제의 강제 병탄 이후에도 이름을 조선 보병대로 바꾼 채 조직이 유지되어 이왕가로 격하된 구 황실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다 조직이 축소되면서 1931년에 최종 해산되었다.
"미역국 먹었다"라는 말이 해산산후조리 차원에서 먹는 미역국을 음이 같은 군대 해산에 비유하는데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6. 관련 문서



[1] 군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국방 개혁을 하면서 잠깐 부대를 해산할 뿐이라는 식으로 대외적 명분을 꾸며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대 해산의 배후인 일본 제국의 기만적 침략 방법이다.